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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인생 조명한 대형 특강 연길서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21일, 조선족의 훌륭한 아들이며 룡정의 자랑인 한락연의 생애가 연변1중에서 집중 조명되였다.
올해는 한락연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연변1중의 400여명 사생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한락연 평전'의 저자이며 청소년을 위한 인물 시리즈로 '한락연의 이야기' 위인전기를 펴낸 김혁소설가가 <한락연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한락연(1898-1947)은 걸출한 정치가, 혁명가, 예술가, 고고학자로 룡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다. 조선족으로서는 맨 첫 사람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조직 건설에 기여했고 국내 최초의 미술학교인 상해미술전문학교(현재 남경미술학원)를 졸업하고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일찍 해외류학을 다녀왔으며 심양미술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중국 조선족으로서 국제반파쑈투쟁에 참가한 첫 사람, 중국 조선족으로서 첫번째 장군으로도 기록된다. 그외 서역의 고고학연구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려 중국예술사에 진귀한 유산을 남겼다.
연변1중 1학년 9반 최유경학생은 "전에는 한락연에 대해 잘 몰랐다"고 밝히고 나서 "그의 특이하고도 전기적인 인생, 그중에서도 이름에 락(乐)자를 새겨넣을 만큼 긍정적인 성격에 감동받았다. 한락연의 사진과 그림들을 꼭 찾아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강을 마친 김혁소설가는 "한락연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들이 적다. 그러나 강연중에 적극 호응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보람과 더불어 이런 특강을 계속 조직해가야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편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룡정 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있는 김혁소설가는 급변을 겪고 있는 조선족사회에 민족의 위인을 알리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판단, 다년간 조선족의 걸출한 인물들을 글로 조명하고저 노력해왔다. 한락연, 윤동주, 주덕해, 김염 등 위인들의 사적이 그의 필끝에서 돋을새김되여 독자들과 만나왔다.
연변1중, 연길시고령사회교육문화원에서 이날 행사를 주최했다.
룡정지역반일유적지 순람 9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하)
김 혁
1945년 10월, 한락연은 돈황을 찾았다.
돈황에서 한락연은 서구 렬강들이 중요 문화재, 문화적 전통의 중요한 자산을 략탈해간 사례들을 화가로서의 한락연은 뼈아프게 접했다. 이런 략탈행위는 단 예술진귀품의 손실이라는 아픔보다는 더 크게 한 나라와 민족 전체의 력사적 감성에 가해진 상처와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어렵게 구한 자금과 탐사팀을 이끌고 우루무치로 갔다.
키질의 천불동에 묵으면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천개의 불상이 있어서 천불동이라 불리는 석굴이였다.
이때부터 한락연은 본격적으로 탐사와 발굴에 나섰다. 한락연은 커다란 소명의식을 가지고 석굴 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석굴은 거개가 층암적벽에다 판것인데 지진과 풍화작용으로 하여 석굴안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져버렸다. 그들은 절벽에 한층한층 홈차기를 파놓고 가까스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바줄 한가닥을 타고 오르내려야 했는데 절벽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을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한락연은 그 층암절벽에 매달려 작업을 견지했다.
고달픈 작업에 한락연은 륵골통으로 몹시 고생했지만 통증을 누르고 벽화를 모두 그려내고야말았다.
돈황 막고굴의 수백개 석굴과 신강과 쿠처(庫車) 등지의 석굴 및 고분 벽화가 그의 탐사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한락연은 또 자신의 발굴결과를 “신강문화보물고의 새발견- 옛 고창국 예술탐사기”라는 글로 정리해 “신강일보”에 발표했다. 이 글은 중국에서는 최초로 신강의 고대문화 유적지인 고창국의 문화유물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락연은 그림에서 예술과 과학의 통합을 이루었으며 그림과 고고학을 융합시켜 고대문명을 보호하는데 개척적인 의의를 갖게 하였다.
1947년 8월 6일부 “감숙민국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렸다.
“7월 30일 적화로부터 출발한 군용기는 이날 점심 하미에 도착한후 계속 동쪽으로 비행하다가 두시간후 지면과의 련락이 끊겼다… 군용기는 가욕관상공에서 추락되였다.”
이 소식은 삽시에 중국 미술계를 놀래웠다. 이 비행기에는 다름아닌 한락연이 탔던것이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크게 진동하였다. 그의 죽음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사를 통하여 전국에 알려졌다. 영국의 유명한 “타임스” 지도 지면을 할애하여 한락연 서거소식을 실었다. 한락연이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주은래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
한락연은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그가 사랑했던 고비사막의 한줌의 먼지로 스러졌다. 실크로드에서 유린당하고있던 고대 유적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돼 그 발굴 작업에 혼신을 쏟아부으며 선구적 업적을 보였던 그는자신의 념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고비사막에 영원히 묻힌것이다.
한락연은 서방의 회화예술을 본받은 선구자이고 20세기전반기 민중에 접근한 유화가이며 중국에서 커즐석굴을 발견하고 연구한 첫사람이며 조선족가운데서 처음으로 중국미술계에 진출한 화가이자 첫 공산당원이다. 또 세계반파쑈전사로 중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넘나들면서 풍부한 예술유산과 고고학의 성과들을 쌓아올려 이루다 헤아릴수 없는 예술정신을 후세에 남겼다.
(끝)
"연변일보" 2015-9-3
[출처]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하)|작성자 김 혁
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즐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7월 30일, 한락연일행이 탄 우루무치-란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메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1970년대 주은래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바 있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교묘하게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뉴스래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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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즐석굴은 남강요충지로서 인도불교예술이 동쪽으로 이동한 첫 문호이다.한락연은 당년 키즐석굴 발굴과정을 10번동굴에다 적어놓음으로써 이는 중화문화유산임을 명확히하였다. 후세인들은 한락연의 필치가 남아있는 10번동굴에 한락연의 사진과 그가 모사한 벽화사진을 진렬해놓고 한락연의 공적을 기리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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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한락연은 키즐석굴에서 색채가 선명하고 스찔도 참신한 완벽하게 보관된 벽화를 발견하고 그 벽화 전체를 모사하였다. 그의 빛나는 성과들은 69번동굴에 있었는데 취재팀이 마주한 69번 석굴은 개봉되지 않았고 자물쇠가 잠가져있었다. 취재팀의 진지한 촐영자세에 감동된 연구소일군들은 만리밖에서 온 연변취재팀에게 특혜를 베풀어 한시간만에 녹쓴 열쇠를 열고 촬열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
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즐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7월 30일, 한락연일행이 탄 우루무치-란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메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1970년대 주은래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바 있다.
2010년 9월에 룡정시락연공원 공원비에 새겨진 한락연의 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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