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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고 쓰러졌다.
그에게 총구를 겨눈 건 청년 안중근. 역사적 의미가 담긴 이 거사 뒤에는 안중근 의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한 기업인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 비하면 이름조차 생소한 최재형 선생이다.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 출생인 최재형 선생은 노비 최홍백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최홍백은 최 선생이 9살 되던 해 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 지신허로 떠난다.
그곳에서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고,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최 선생은 3년 만에 집을 나왔다.
운이 좋게도 최 선생은 자신을 거둬주겠다는 러시아 선장을 만난다. 선장의 양아들로 들어간 최 선생은 6년간 선원 생활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철도관리국, 도로공사 등에서 일을 하며 사업 수완을 체득한 최 선생은 해군 군납 사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러시아 안에서 최고의 조선인 갑부가 된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제에 넘어가자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든다.
최 선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부와 권력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을 위해 썼다. 항일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하고, 각종 조직의 회장을 맡아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재정난으로 끊겼던 한인 민족지 대동공보가 재발간 된 것도, 무기를 구입하는 것도 모두 최 선생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 선생은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작전을 도모한다.
거사를 앞두고 최 선생은 필요한 자금과 물품을 모두 후원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썼던 브라우닝식 권총 역시 최 선생이 구해준 것이다.
최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변호사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1심 판결 5개월 만에 안중근 의사는 처형됐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최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안중근 의사는 수감 당시 배후세력인 최 선생의 이름을 끝까지 함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포들에겐 늘 따뜻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최 선생. 그의 별명은 '페치카',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퍼주었던 최 선생은 1917년 집 한 채 남지 않을 정도로 다시 가난해졌다.
독립 운동가들의 존경을 받았던 최 선생은 1919년 3월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을 맡았고 그해 4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 총장으로 추대됐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1920년 4월, 일제는 러시아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방화와 체포, 학살을 거듭한 이른바 '4월 참변'이다.
최 선생은 이때 일제에 붙잡혀 4월 7일 순국했다. 일제는 최 선생의 흔적이 독립운동 세력의 혼과 정신적 지주로 남을까 두려워 유해가 매장된 장소조차 숨겼다.
지금도 최 선생의 유해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최 선생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며, 자신의 재산과 목숨 모두를 나라를 위해 내놓았던 최재형 선생.
정부는 1962년 최 선생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황규정 기자
책 제목은 연해주 한인 사회를 물심양면 지원해 동포들로부터 '페치카(난로) 최'라고 불렸던 최재형의 애칭에서 따왔다. 그는 곳곳의 한인 마을에 학교를 세웠고 우수한 학생을 러시아 주요 도시로 유학 보냈으며 농장을 만들어 한인들의 경제력 향상에 힘썼다.
최재형은 1905년 연추로 피신한 대한제국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지원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1908년 연해주 한인과 망명 의병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 총재로 추대됐고, 동의회 발기인인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지원했다. 안중근이 동지들과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하고 사격연습을 한 곳이 최재형 소유 건물이었다. 최재형은 1911년 12월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권업회 총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대동공보' '대양보' 사장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3·1운동 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된 것은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비중을 보여준다. 그는 상해로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0년 4월 연해주 일본인 보호를 내걸고 파병된 일본군이 가장 먼저 최재형을 살해한 것은 일제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최재형이 일본군에 붙잡힌 우수리스크 집은 연해주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찾는 곳이 됐고 한국 재외동포재단이 매입해 기념관으로 조성하고 있다.
평전은 특히 '사업가 최재형'에 주목한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건설·군납·무역·임대업 등으로 부(富)를 모았고 이를 동포와 모국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그래서 말년에는 재산이 바닥난 상태였고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자손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박환 교수는 "최재형은 한국에 아무 연고도 없지만 그의 삶에 감명받은 중소기업인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꾸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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