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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 - 윤이상
2018년 02월 26일 01시 59분  조회:580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대 현대
출생 1917년
사망 1995년
유형 인물 - 尹伊桑
직업 작곡가
성별
분야 예술·체육/현대음악

요약 1917∼1995. 작곡가.

개설

출생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출신지는 경상남도 통영. 1917년 9월 17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통영에서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작곡을 비롯하여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고 잠시 귀국한 후, 다시 1939에 일본에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1943년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한 이유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1949년 「고풍의상」·「달무리」·「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숙명여대·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1959년 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네델란드의 빌토벤과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에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작곡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유되어 2년간 복역을 하였으며 1969년 다시 독일로 돌아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Hanover Hochschule ful Musik)에서 작곡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85년에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1970년에 킬 문화상과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켰으며, 사망 전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유동의 꿈」·「나비의 미망인」·「요정의 사랑」·「심청」 등 네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바라」·「무악」·「예악」·「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등 40여 편의 실내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의 교성곡, 동요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1백 50여 편을 남겼다.

1977년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자서전 『상처받은 용』이 독일과 서울 그리고 평양에서 각각 출판 되었다.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여,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에 주력을 하였으며,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덤으로 더...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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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尹伊桑
Isang Yun
기본 정보
출생 1917년 9월 17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
사망 1995년 11월 4일 (78세)
독일의 기 독일 베를린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前)
독일의 기 독일(1971~1995)[1]
직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장르 현대 음악
활동 시기 1936년 ~ 1995년
배우자 이수자
가족 아버지 윤기현
어머니 김순달
자녀는 슬하 2녀
형제자매 관계는 남동생 1명과 누이동생 3명
종교 불교

윤이상(尹伊桑, 독문명: Isang Yun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4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기타리스트첼리스트이다.

본관은 칠원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이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성장하였다.

 

 

생애[편집]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윤이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2]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고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하였다.[3]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1944년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 padding-right: 13px;">[1] 이후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유럽에서의 활동[편집]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편집]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루이지 달라피콜라죄르지 리게티아르네 멜내스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요제프 카일베르트마우리치오 카겔오토 클렘퍼러한스 베르너 헨체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편집]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1]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사망[편집]

1994년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 했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갈등을 겪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4]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사망후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고 함.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음악[편집]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수상[편집]


  • 1956년 서울시 문화상
  •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 1992년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 1995년 괴테 메달.[5]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기념[편집]

대한민국[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독일[편집]

주요 작품[편집]


  • 한국 가곡
  • 오페라성악곡

    •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 오페라 《류퉁의 꿈》(1965)
    •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 1968)
    •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1970)
    •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1971)
    • 오페라 《심청》(1971, 1972)
    •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 타악기, 오르간, 혼성 합창을 위한《도에서(道-)》(1972, 1982)
    •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2)
    •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 padding-right: 13px;">듣기
    • 소프라노, 3성부의 여성 합창과 다섯 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
  • 관현악

    • 관현악을 위한 《바라》(1960)
    •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0)
    •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1964)
    •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 padding-right: 13px;">듣기
    •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
    •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1972)
    •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1973)
    •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환상 《무악》(1978)
    •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 《교향곡 제1번》(1982, 1983) -  "); padding-right: 13px;">3악장 듣기
    • 《교향곡 제2번》(1984) -  "); padding-right: 13px;">듣기
    • 《교향곡 제3번》(1985)
    •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1989)
    • 관현악을 위한 메멘토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
  • 협주곡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 실내악

    • 현악 사중주 제1번
    • 현악 사중주 제2번
    •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  "); padding-right: 13px;">듣기

      • 한국 정악(正樂)의 색채를 담았다.
    •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1964)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詞)》(1963)
    • 플룻과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  "); padding-right: 13px;">듣기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1968)
    •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1972, 1973)
    •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72-1975)
    •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 오보,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1974)
    •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1976)
    • 오보에,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 관악기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1988)
    • 《실내협주곡 제1번》(1990)
    • 《실내협주곡 제2번》(1990)
  • 독주

    •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  "); padding-right: 13px;">듣기
    •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陰管-)》(1967)
    • 첼로를 위한 《활주》(1970)
    •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  "); padding-right: 13px;">듣기
    •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1976)
    • 플루트 독주를 위한《살로모》(1976)
    • 하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
    • 플루트를 위한 《소리》(1988)
    • 플루트를 위한 《가락》 -  "); padding-right: 13px;">듣기 및 악보
    •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참고 문헌[편집]

    "); color: rgb(34, 34, 34); font-family: sans-serif;">
  • 윤신향, 《윤이상 -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 김용환, "다원적 세계주의자 윤이상의 삶과 음악", 『윤이상 연구 I』(김용환 편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년
  • 윤이상, "나의 삶, 나의 음악, 나의 민족", 『윤이상의 음악세계』(최성만, 홍은미 편역), 한길사 1991년
  •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상/하권, 창작과비평사, 2002년
  • 박선욱, 《윤이상평전 - 거장의 귀환》, 삼인, 2017년

각주[편집]

  1. ↑ 이동:   "); padding-right: 13px;">Isang Yun
  2. 이동 이시균.  "); padding-right: 13px;">“상처입은 용 윤이상”그의 어머니는 윤이상을 임신했을 때 용(龍)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3. 이동  "); padding-right: 13px;">“통영을 빛낸 예술가”이때 그가 만든 선율이 통영의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의 막간에 행해지는 음악 연주회에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편곡 연주되고 있었고, 우연히 자신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게 된 윤이상은 작곡가가 되기를 꿈꾼다.
  4. 이동 任英淑 논설위원실장 (2001년 2월 17일).  "); padding-right: 13px;">“윤이상”. 대한매일. 1994년 마지막 귀국노력이 좌절된 후 병원에 입원한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安淑善)씨의 남도민요CD가 있었다.아악(雅樂)에 이어 남도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그는 별세했다.
  5. 이동   "); padding-right: 13px;">윤이상이 받았던 `괴테메달'
  6. =========================
  7.  
    출생 1917. 9. 17, 경남 충무
    사망 1995. 11. 3, 독일 베를린
    국적 한국/독일

    요약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윤이상(尹伊桑) 흉상
    윤이상(尹伊桑) 흉상

    경남 통영에 있는 윤이상 기념관에 윤이상(尹伊桑) 흉상이 전시되어있다.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

    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등이 있다. 1995년 5월에는 민주화를 위해 분신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가 일본에서 초연된 바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과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 괴테메달, 튀빙겐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덤으로 더...
     

     

    윤이상(尹伊桑, 1917~1995작곡가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흔히 통영이 윤이상의 고향으로 언급되지만호적 기록에 따르면 산청으로 되어 있다당시 관습으로는 여자가 출산 전후에 친정에 머무르는 관습이 있었으며산청은 윤이상 모친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생후 3년 뒤 가족들과 함께 충무(현재 통영)로 이주했고,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윤이상은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충무(통영)라 했다.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실에 비치된 풍금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서양 음악의 기초 이론을 배우는 한편 남사당패나 판소리 명창의 공연에 열광하기도 했다그러나 음악가가 배고프고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금지했고상업학교로 아들을 진학시켰다.

     

    하지만 입학 후 2년 뒤에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경성으로 갔고옛 대한제국 소속의 군악대였던 시위연대 출신의 연주가로부터 화성학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상업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오사카로 유학했고첼로와 작곡음악이론 등을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배웠다.

     

    귀국 후 잠시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다시 도쿄로 유학했고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그러나 거사를 일으킬 틈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었고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옮겨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했고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부산사범학교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한국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이듬해 프랑스의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다.

     

     

    2.2. 유럽에서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서독의 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작곡을 배웠다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고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 형편은 늘 좋지 않았고프라이부르크와 쾰른을 거쳐 1964년에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시 서베를린에 이주했다쾰른 정주 시절에는 월북 음악가였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는데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떡밥으로 작용했다실제로 윤이상은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친구를 만났지만냉전으로 인한 서로 간의 입장 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고 한다.그리고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6년에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이 초연되었고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그러나 이듬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불법적인 체포 과정과 혐의 사실의 날조 혹은 과장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 등으로 2심과 3심을 거쳐1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투옥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했고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여론이 확산되었다이후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했고투병 중에도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강석희 같은 젊은 작곡학도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1969년에 한국 정부가 특별 석방 조치를 내려 독일로 돌아갔고,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을 작곡해 초연했다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이듬해'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

     

    1982년부터 남북한 양측에서 윤이상 음악의 공연이 개최되기 시작했고, 1983년부터 87년까지는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했다. 1987년에는 70회 생일 기념으로 서독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개최되었으나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휴전선상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공동으로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남북 양측에 제의했으나양측의 이견이 너무 커 무산되었다그 대신 1990년에 남북의 예술인들이 예술단을 구성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공연했고분단 이후 개최된 남북 간의 첫 교환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그러나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폐렴 등의 추가 질환이 발생했고산소호흡기와 휠체어 없이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개최되었는데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한국 정부와 갈등이 계속 되어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한국 정부 외에도 몇몇 과격 운동권 인사들이 베를린에서 벌인 행각-'정치적 논란항목에 따로 기술한다-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같은 해 마지막 작품이 된 '화염 속의 천사'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병세 악화는 계속 진행됐고폐렴 재발로 인해 1995년 11월 4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장례는 유언에 따라 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가토우 지방 묘역(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안장되었다그런데 딸 윤정의 말에 따르면 통영으로 이장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주한 독일 대사관도 이와 관련된 실무를 준비 중이라고

     

     

     

    유년기 때부터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골고루 들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인지이후 독일로 옮겨가서도 이러한 양상을 계속 유지했다초기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민요나 전통음악 풍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동시에 쇤베르크나 버르토크의 현대적인 기법을 절충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독일에서 발표한 첫 작품들은 12음 기법 등 서구 현대음악 기법의 강한 영향력을 반영하지만동시에 동양의 전통음악들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음의 떨림이나 호흡이 길고 음의 움직임이 적은 선율이를 표현하기 위한 비일상적인 특수 연주법 등을 가미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들 초기 작품은 너무 연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종종 연주자들로부터 불만을 듣거나 심지어 공연을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교착적 음향의 경우초연 연습 때 악단원들이 윤이상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온갖 욕을 했을 정도였다지휘자가 나서서 달래보았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는데결국 윤이상이 무대 위로 올라가 첼로 파트의 어려운 대목을 직접 연주해 보이자 잠잠해 졌다 가까스로 공연이 개최되기는 했지만청중석에서도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나올 정도로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이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 문제가 아니었고실제로 윤이상은 여타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가지휘자들과 여러 차례 토론하면서 작곡을 진행했다윤이상과 친분을 맺었던 음악인들 중에는 각기 해당 악기의 본좌로 손꼽히는 하인츠 홀리거(오보에), 오렐 니콜레(플루트), 에두아르트 브루너(클라리넷), 지크프리트 팔름(첼로),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바이올린),우어줄라 홀리거(하프등이 있었다이런 괴수대가들을 위한 곡이다 보니기교적으로 넘사벽에 가까운 난이도가 될 수밖에.

     

    그리고 초연 후에는 기악과나 성악과 학생들의 수업을 함께 지도하면서 '결코 연주 불가능한 곡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는 꾸준한 연습과 교육의 결과 학생들도 연주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음대 관현악단도 윤이상 관현악곡을 연주하고 있을 정도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고작품의 메시지가 강해지는 대신 음악의 어려움이 경감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가사가 들어가는 곡들의 경우노자의 도덕경이나 성경 등 동서양 종교/철학서의 인용 외에 넬리 작스나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같이 나치에 의해 탄압당한 유대인/반체제 인사의 시를 사용해 그러한 메시지를 강화했다. '나의 땅나의 민족이여!' 의 경우 독일 유학 후 최초로 한국어 가사를 택했는데이 곡에서는 백기완이나 고은문병란박봉우박두진양성우김남주 등의 재야/민족계 문학가들의 시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부터는 신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듯 작품이 더 유순해지고 받아들이기 한결 편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그렇다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가령 마지막 작품인 '화염 속의 천사의 경우, 1980년대에 분신 자살한 학생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곡이라고 분명히 발표했다표제에 반영되던 아니건 간에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인종차별인권유린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부터는 실험성이나 전위적인 면이 줄고 작품의 구조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등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시대 별로그리고 작품 별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받아들여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창조한 업적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지금도 독일에서 활동한 동양인 현대 작곡가들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고,유럽 현대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호소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도 그의 어법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독일을 거점으로 하는 '국제 윤이상 협회가 만들어졌고지금도 윤이상 작품의 보급과 연구연주녹음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6. 사생활

     

     

    윤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다섯 달 전에 결혼했는데상대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이수자였다중매가 아닌 연애 결혼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처음에는 윤이상이 결핵 환자였다고 해서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결혼 직후 딸인 윤정이 태어났고아들인 윤우경은 1954년에 태어났다.

     

    한국에서는 상당한 애처가였고 가정적인 인물이었지만독일로 옮겨간 후 서구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었는지 아내와 아이들이 1961년과 1964년에 각각 독일에 와서 합류한 후에는 종종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가족 관계가 회복되자마자 터진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에게 지울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인 상처를 남겼고,이 때를 전후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성격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엄격했다고 전해지는데특히 작곡할 때는 절대 정숙을 요했기 때문에 번잡한 주택가에서 살 때는 자주 짜증을 냈다고 한다교육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제자들도 '엄한 서당 훈장만큼 무서웠다고 회고할 정도하지만 사제 관계를 떠나 학생들에게 유학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고 하고특히 동양인 유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항구 도시에서 살았던 것 때문인지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는데식욕도 왕성했다고 한다하지만 술과 담배는 결핵과 당뇨병으로 인해 거의 손대지 않았고감자를 싫어해 독일 유학 초기에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구황 작물로서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섭취했는데빵처럼 매일 식탁에 감자가 올랐을테니 꽤나 곤욕을 치렀을 듯...

     

     

    7. 정치적 논란

     

     

    한편윤이상의 정치 행적을 두고 특히 독일 로 건너간 이후의 사회활동을 두고 국내에선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다.

     

    초기 윤이상은 반일 활동을 벌일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지만해방 후 진행된 좌우 간의 대립은 그리 깊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사실 이런 점은 당시 윤이상과 동갑인 유명한 작곡가 김순남(1917~1983)도 마찬가지였는데 김순남은 미군정에서 그의 음악성을 발견한 미군 장교가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미국 유학까지 주선했음에도 서북청년단에게 빨갱이로 인증받아서 잔인한 처우를 받고 월북의 길을 택한다이것은 그가 해방 전후에 잠시 들었던 단체때문이기도하다윤이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후 행적에서 볼수 있듯이 정치와 예술간의 괴리가 해방과 분단에서는 때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실지로 윤이상도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가 된 부산에서 반공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만든 바 있었고종전 후에는 육군 장교들과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한 위문품이나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로 활동 거점을 옮긴 뒤의 행적이었다.

     

     

     

    일각에서는 위 사진과 같이 김일성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북한에 포섭당해서 북한을 따르는 인사가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위 참고 기사를 쓴 조선일보에서는 그 이외의 사례도 제시하고 있는데이를 보자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서거1돐을 맞이하여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

     

    등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알아서 판단하시길...

     

    , 1963년에 북한을 방문한 것도 쟁점 사항 중 하나이었다그러나 윤이상의 북한행에 대해서는 동백림 사건 당시 그를 납치하려고 독일에 간 중앙정보부 요원들조차 몰랐고이것이 남한 언론에 퍼진 것은 재판 과정의 보도 때였다이승만 정권 이상으로 반공주의가 강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무슨 목적이었건 북한에 갔다는 사실 만으로 좌빨 인증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각종 국제법마저 쌩깐 중앙정보부의 활동이 되레 외국에 안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고윤이상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는 심지어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거물급 인사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서명 운동에 참가한 다른 음악계 명사들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오토 클렘페러한스 베르너 헨체볼프강 포르트너보리스 블라허 등 약 150여 명에 달했다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여론은 대부분 사전검열로 인해 한국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윤이상이 독일로 돌아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실제로 동백림 사건 수사 종결 후윤이상의 음악 뿐 아니라 윤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하지만 한국 장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거나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단편적인 소식 정도는 간혹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특히 반 윤이상 조류가 극에 달했는데,지휘자 임원식이 독일에 초청받았을 때 '무악을 지휘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모 음악잡지에서 유명 필진들을 대거 동원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였다이로 인해 임원식은 한국 음악계에서 급작스럽게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동시에'사상 검증논란에 휘말렸다아이러니한 것은이 여론을 주도한 잡지의 발행인이 윤이상과 부산사범학교 시절 음악교사로 함께 일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임원식은 동백림 사건 때도 윤이상의 무고를 주장한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했기 때문에이미 예전부터 쿨타임을 노리는 반대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82년에 대한민국 음악제를 통해 윤이상 작품만으로 꾸며진 연주회가 두 차례 열리면서 해금 기회를 맞았지만여전히 윤이상 작품이 수록된 음반과 악보는 수입 금지 혹은 제한 품목으로 묶여 있었다이 기간 동안 오히려 윤이상 음악의 평가와 연주연구에 열을 올린 쪽은 북한이었고, '나의 땅나의 민족이여!' 는 평양에서 초연되었다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음악 사조를 '부르주아 반동적이라고 규정한 북한 정권이 유독 윤이상에게만 호의적이었다는 것에 대해 숨겨진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팽배하다.

     

    윤이상은 1990년 남//해외 3자간의 민간통일운동 연대체를 목표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이 출범하자 해외본부 의장을 맡았다그러나 범민련은 범민족대회를 둘러싼 갈등으로 남한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고이후 범민련 내부에서도 단체의 성격통일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치열한 내부 논쟁이 전개되었다특히 범민련 남측본부 창립을 주도했던 문익환 목사가 1994년경 북한이 범민련을 대남공작기구로만 이용한다며 범민련 해산과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건설을 주장하면서 논쟁이 격화되었고상당수 인원이 이탈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윤이상은 이런 과정에서 해외본부 의장이긴 했지만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1990년대 말이 되면 범민련 해외본부는 사실상 껍데기뿐인 조직이 되었다.대다수 인원이 이탈하면서 범민련 남측본부는 사실상 NLPDR주사파 그중에서도 소수 강경파만의 단체가 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이후 범민련은 대법원 판결에 의해서 국가보안법 상의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에 대한 업적 보다는통일운동가로서의 업적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그러나 매년 가을마다 윤이상 음악회를 열고 있고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연구소 부속 관현악단인 윤이상관현악단까지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영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실지로 북한은 유명한 현대사 괴작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윤석민이라는 가명으로 두번에 걸쳐서 영화화 할 정도로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윤이상은 작품 활동 외에도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계의 거물들과 만나 한국의 민주화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고한민통이나 범민련 등 재야 운동가들의 조직에서도 의장을 맡는 등 민주화/통일 운동에 참가한 경력도 갖고 있었다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을 모두 '반국가/친북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던 한국에서는 그의 이러한 활동 정보만으로도 가루가 되도록 깔 수 있는 떡밥을 보유한 셈이었다후술하겠지만 재독 유학생들 포섭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 된 바 있다.

     

    정치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이런 사실과 별도로, 1980년대 후반에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의 해금과 함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해금도 같이 진행되었다그와 함께 까기 일변도였던 국내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평가도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고윤이상에게 직접 배웠던 강석희와 백병동김정길 등이 한국 작곡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면서 간접적으로도 공적이 언급되는 등 많이 호의적인 쪽으로 선회했다한국 출신으로서 가장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지휘자인 정명훈도 교향곡 제3번의 세계초연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예술계의 평가와 다르게정치계에서는 여전히 윤이상의 행적에 대해 친북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고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에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윤이상은 결국 '지난 과오에 대한 사과를 정부로부터 요구받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윤이상의 한국행을 '정권에 대한 굴복'으로 멋대로 해석한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베를린의 윤이상 자택에까지 찾아가"선생께서 한국에 가신다면 우리는 분신자살하겠습니다." 라고 협박하는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

     

    하여간 윤이상 개인으로도 김영삼 정권하에서 귀국 논쟁은 결국 자신을 잡아가고 고문했던 권력자들 뿐 아니라자신이 믿고 지원했던 재야 인사들까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이는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낳았고결국 정치 활동 포기 선언을 한 뒤 고향땅을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윤이상 사후 11년이 된 2006년에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에서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로 악화된 국민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확대되고 과장되었다는 발표가 나왔고이듬해인 2007년에는 이수자가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을 방문했다.

     

    통영시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고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 음악 콩쿠르나 작곡 경연도 열리는 등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거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그러나 남북을 아우르고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는 정치적인 입장과 행각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남북 간의 대립이 계속되는 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7.1. 오길남 논란

     

     

    이 사건 이후로 윤이상이나 몇몇 인사들에 대한 비판 기사가 월간조선에 실리기도 했다윤이상의 친북행위나 발언에 대한 비판은 별도로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1985년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 유학생활을 하던 중 그해 가족을 데리고 월북북한 공작원으로 일하다 1992년 남한으로 귀순한 오길남 박사의 수필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윤이상과 송두율이 오길남을 포섭하고 독일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공작을 수행하며 오길남의 가족을 수용소에 보내는데 앞장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왔다특히 오길남의 수기에서 묘사하는 윤이상은 천하의 개쌍놈이자희대의 인간쓰레기로 나오는데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2011년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데 참조.반면 윤이상의 오길남에 관한 글 '오길남 사건과 나'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펴고 있다.

     

     

    위 사진은 1974년에 찍힌 사진으로윤이상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오길남의 부인 신숙자다우파 단체에서는 이 사진을 근거로 윤이상이 오길남을 1977년에 만났다는 발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데논리에 허점이 많고 그 허점을 보충할 추가 자료가 없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거나 인사를 하는 등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단순히 앞뒤로 서 있는 사진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길남 사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데 일각에선 윤이상 유가족들의 행보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길남이 자신의 가족을 돌아오게 힘써줄수 있느냐는 말에 윤이상 딸이 미쳤다라고 했다라는가 하면 윤이상의 아내는 김정일이 사준 집에서 살면서"김일성이 죽자 비통해 했다라는 것그러나 보수 언론인 조선일보의 보도인 만큼 다른 시각의 보도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길남측의 증언과는 반대로 윤이상의 유족들은 앞서 언급한 '오길남 사건과 나'의 연장선상에서 증언을 펴고 있는데윤이상과 오길남은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오길남이 탈출한 뒤 자신들은 북한측의 인맥을 이용해서 북에 남은 가족들의 사진을 얻어다 주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오길남 본인이 가족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분노해서 내쫓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른쪽에서는 오길남에게 정녕 아무 문제도 없는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실제로 오길남의 부인이 북한행을 반대했음에도 본인이 강행해놓고 이제와서 윤이상 탓을 하는게 우습다는 지적이 있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와서 가족을 구하겠냐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지적도 있다그리고 2012년 신숙자씨는 요덕 수용소에서 간 질환으로 사망했으며두 딸은 살아있으나 아버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류승완 감독의 다큐멘터리 "간첩"에 출연해서는 자신이 간첩에 대해서 잘 안다는 식으로 류승완 감독과 주진우 기자를 낚았다는 비난도 있다심지어 같은 보수쪽에서도 "종북짓을 하던 인간이 가족 구해달라고 할 자격이나 있나라고 하기도 한다물론 저 글의 말미에 대한민국이 구해주면 감사해서 충성할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충 의견은 오길남이 괘씸하지만 윤이상을 죽이려면 오길남을 이용해야 한다라고 하니 판단은 알아서.

     

    2011년에 통영에서 위에 언급된 오길남 박사의 가족들을 북한에서 구출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이들의 주장 중에 통영국제음악제 등 윤이상 기념사업들의 즉각 철폐가 있다하지만 이미 세계구급 작곡가가 된 인물의 기념사업을 철폐한다는 것은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운 문제라서실현될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2년 유족들에 대해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한 공격이 거세지자 유족들은 오길남과 극우단체에 대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여 결국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게 되었다하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윤이상이 이미 사망한 데다가 증거증인 부족으로 인하여 진실 규명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로부터 5년 동안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가, 2016년 기사에서는 윤이상이 월북을 권유하고 탈북 이후에도 돌아오라고 했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유족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길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를 영화화 한 사선에서는 pjh정부의 비리 중 하나인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의혹을 받고 있다자세한 것은 사선에서 문서와 이 기사를 참고하자.

     

     

    8. 기타

     

     

    통영시는 윤이상의 출생지이니만큼 관련 사업을 꽤 많이 하고 있다. 2000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그것. 1회 음악제에서는 윤이상이 지은 '통영시민의 노래'가 초연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2017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라서 다수의 추모기념 연주가 계획되어 있다. 7월 초에는 위의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위해 독일을 방문한 동년 7월에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묘소를 찾아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고 헌화하였다.

    ====================덤으로 참고로 더...

    동백림 사건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루이지 달라피콜라죄르지 리게티아르네 멜내스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요제프 카일베르트마우리치오 카겔오토 클렘퍼러한스 베르너 헨체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1]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덤으로 또 더...
     

     

    음악이야기 –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유년기와 청년기를 통영에서 보냈으며독일에서 활동한 현대음악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기타리스트첼리스트다어릴 땐 풍금 반주와 노래를 잘 불렀고 악보를 잘 읽었으며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다작곡가가 꿈이었지만아버지의 반대로 통영상업학교에 진학했고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했으며도서관에서 서양고전음악을 독학했다.  상업학교에 간다는 조건으로 음악공부를 허락 받은 그는 오사카(일본상업학교와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와 작곡 등 음악 이론을 배운 뒤통영에서(1937) 교사로 일하면서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통영고교 교가를 비롯하여 통영에 있는 여러 학교 교가와 고려대학교가도 그가 만들었으며,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와 부산사범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했다. 1950년 국어교사로 일하던 이수자와 결혼했고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면서 많은 창작과 평론을 발표했으며,  ‘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현악4중주 1번》《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은 뒤,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났고(1956). 1년 뒤베를린으로 옮겨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보리스 블라허요세프 루퍼에게서 사사 받고,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동아시아의 음악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새로운 기법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1965년 초연한 불교주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인 음악가로 위상을 높였다.

     

     

     

    1963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오랜 친구 최상학을 만났으며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지만당시 반공을 국시로 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내사에 들어가, 1967년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고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으며집행유예로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로 전달되어 1969년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으로 초연되어 31회의 커튼콜을 받았다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했으며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한국 정부에 공동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항의했다. 1967년 1차 공판에서 무기징역재심·삼심에서 감형,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지만죽을 때까지 한국땅을 밟지 못했고정권은 그가 작곡한 모든 곡들을 금지시켰다.

     

     

     

    나는(고봉인, 첼리스트, 분자생물학 박사) 열네 살에 독일유학길에 올랐다. 유럽인들은 한국의 자동차나 전자제품, 88서울올림픽,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소프라노 조수미, 지휘자 정명훈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한국인의 저력에 감탄했다. 어린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수많은 연주회를 찾아 다니면서 매우 다양한 현대음악을 듣던 어느 날, 운명처럼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과만났다. ‘Isang Yun’. 프로그램마다 등장하는 ‘윤이상’이라는 인물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부끄럽게 했다. 유럽의 음악가들이 잘 알고 존경하는 한국인 작곡가를 왜 난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까? 그들에게 윤이상의 음악은 새롭고 신기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익숙하고 친근한 현대음악의 기둥이었다. 나는 점점 그의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2003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밤늦게 통영에 도착해 아침 잠에서 깨어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문득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석방된후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를 영영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일본을 찾을때면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었던 윤이상! 나는 그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연주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하노버 음악대학 교수(1969-1970)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1977-1987)로 재직하는 동안 북한을 오갔다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되고한국에서도 해금되어 연주가 계속된다그는 1988년 남북합동음악회를 갖자고 남북 정부에 건의했고그 뜻이 이루어져 1990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되어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그는 항상 한반도를 조국이라 생각했고 언젠가 남북음악인들이 한 무대에 서서 연주할 날을 꿈꾸고 있었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그도 참석하려 했지만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고, 199511 3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기일날 베를린에서는  ‘윤이상탄생100주년 음악회가 열렸다세계적인 피아나스트 랑랑이 손가락 부상으로 조성진이 맡았던 피아노 연주는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고 조성진은 머지않아 랑랑을 추월할 것이라고 격찬했다.

     

     

     

    윤이상은 1956년 서울시문화상,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자유예술원공로상. 1995년 괴테메달 등을 받았고오사카음악학교 졸업파리국립음악원 졸업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음악학 석사), 튀빙겐 에베르하르트 카를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한국에는 윤이상평화재단이 있고국제윤이상 작곡상이 있으며통영국제음악제가 매년 열리며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에는 윤이상 기념관과 윤이상 거리가 있다북한에는 윤이상관현악단이 있고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설립되어(1984) 매년 윤이상음악회가 개최된다독일에는 국제윤이상협회가 있으며베를린에서는 매년 3회 윤이상 음악회가 열리며매회마다 3일간 이어지는 연주회는 항상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만석이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 이후 고향땅을 밟기 위해 노력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오페라 <심청>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자, 한국에서 공연을 원했고, 박정희 정권도 귀국을 허락했지만,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동백림 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나 남쪽 방문을 포기했다. 1980년대 초반에도 전두환 정권이 그를 수차례 초청했지만, ‘광주의 학살’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받아들일수가 없었고, <광주여 영원히!> (1981년)를 작곡해 민주영령들을 위로했다. 그는 점점 ‘반한 인사’로 낙인찍혀갔다. 한국의 음악계를 위해 공헌하고 싶어 열망했던 제자 양성도 작곡을 배우러 온남쪽학생들은 “윤이상한테 음악을 배운다고 하니 학비를 보내주지 않는다”며 떠났다. “남편에게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회고한다. 그가 작곡한 세계적인 곡은 120여곡 이상이다대통령 부인 김정숙여사는 그의 묘에 동백나무를 심었고(2017.7), 뉴욕타임스는 그를 칭송했으며 (2017.4), 한 음악평론가는  한국이 외면한 천재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차르트나 벤토벤처럼 위대한 음악가로 기록 될것이라고 평했다.

     

     

     

    참조 : ‘위키백과우리 모두의 사전나무위키 참조

     

    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황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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