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중에 주인공이 농경사회의 전시대인들에게 갖가지 개선 방안을 지휘하면서 문득 자기가 사용한 말 속에서 “‘사태’니 ‘책임’이란 말들이 지금 이곳에서 쓰이기나 하는가”라고 자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 일상어가 된 이 말들을 5세기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 때문이다. 하긴 그는 ‘회사’ ‘보험’ 기구를 구상하고 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에 20세기에 들여온 사회 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를 이해할 리 없어 당시에 사용하던 ‘계’란 말로 대치해야 했다. 이 대목은 일본의 비교문화학자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을 회상시켰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유신 시절, 서구의 문물을 왕성하게 도입하면서 그 용어들을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가로 지식인들은 무척 고민했다. 가령 ‘소사이어티’는 교제, 반려, 집단 등 여러 말로 옮겨지다가 ‘사회’로 점차 정착되고, 젊은 남녀 간의 ‘러브’도 ‘연’(戀)은 성적인 것이고 ‘애’(愛)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갖는 사랑이어서 적절치 않았는데 한 잡지가 그걸 ‘연애’란 신조어로 표현하면서 유행어로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책의 설명이다. 여기서 새로운 사물이나 사태를 표기할 말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지만, “언어가 먼저 생기고 그에 맞춰 실제의 내용이 채워진다”는 저자의 관찰이 주목된다. 그러니까 서구적(그래서 현대적)인 ‘사회’며 ‘연애’ ‘자유’ ‘개인’이 실상으로 존재하지 않다가 서구 언어를 들여오면서 그 말에 맞는 실제적 사물과 현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말씀이 먼저 있고 세계가 만들어졌듯이, 먼저 기표가 있고 뒤에 기의를 채워넣은 것이다. 언어 통제를 통해 사회 통제를 이룬다는 오웰의 <1984년> 속 ‘신어’(Newspeak)와 비슷한 논리다.
‘영어 공용화론’으로 논의를 일으켰던 복거일은 이런 언어 현상에 대한 문제들을 활용하면서 일본 식민통치 기간 중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세기 동안 언어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언어는 사회가 발전하는 대로 따라서 바뀌어야 생명력을 제대로 지녀갈 수 있는데 조선어는 그렇게 진화할 기회를 거의 반세기 동안 갖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어는 갑자기 늙어버린 언어가 되었다”(1권 125쪽)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 대화체는 조선조의 중세어(로 생각되는)의 말씨를 사용해서 읽어 알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만, 다른 제도들과 기구들은 개선하면서도 정작 말은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도 표기와 표의의 일체화가 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짐작건대 전통의 우리말이 가장 잘 고수되고 있는 곳이 한말에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해 러시아대륙에서 고립된 섬처럼 폐쇄된 사회로 살아야 했던 조선족일 것이고 지금은 아마 외부와의 교류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외래문물도 가능한 한 우리 고유의 말로 옮겨 쓰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전통 조선어에 가장 가까운 ‘늙은 말’을 쓸 듯하다. 그러나 가령 ‘어름보숭이’는 늙은 말로 새말을 만들어낸 흥미로운 예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에도 남한처럼 말이 빨리 변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한국 사회는 한껏 다른 문화와 새로운 문물들을 적극 받아들였고 그 수용과 개발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능동적이고 조급했다. 우리가 신문이나 책, 거리와 모임에서 보고 듣는 말들의 반 정도는 1945년 해방 후에 생기거나 들여온 어휘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과학에도 매우 해박한 복거일이 이 작품에서 예상한 대로 1960년에서 2070년의 110년 동안 지식의 양이 2천 배 늘어난다면, 당연히 우리말의 어휘수도 엄청 늘어날 것이다(잃는 말도 상당히 많겠지만). 여기에 외국 언어 때문에 우리말의 문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덧붙는다. 가령 ‘보인다’ ‘된다’란 우리말의 수동태형 어휘가 있는데도 영어로 피동형 문장을 배운 젊은 세대들이 ‘-지’를 넣는 어법을 사용해 ‘보여진다’ ‘되어진다’란 이중수동태의 잘못된 말을 쓰고 있는 것이 그렇다. 내가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면서 처음에는 눈에 띄는 대로 그 ‘-지’를 지웠지만, 그 표기가 너무 창궐해서 결국 내가 투항하여 저-역자가 쓴 대로 그냥 두고 말았다. 말의 활용에 표준 문법이 패배한 것이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너무’란 부사를 긍정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했다는 보도를 보며 으레 “너무 좋았어요”로 끝내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못마땅해하던 내 고정관념도 이젠 수정해야 마땅하게 되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5.9.3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