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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관’ 으로 영화‘ 동주’ 인기 상승 불구 외면 받는 등록문화재로 전락
고귀한 정신 소통 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별이 반짝이던 스무 살 어느 밤들, 주옥같은 그의 작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베껴 쓰기도 했다. '별'을 헤는 대신 '윤동주' 헤는 밤을 보내다 도취돼 자기반성의 시를 여러 편 습작 했고, 아무나 윤동주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배웠다. 이런 추억들 속에 파묻혀 있던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했다. '정병욱 가옥'을 방문하기 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에 방문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안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 뿐이었다. ‘기대'한 만큼의 '씁쓸함'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정병욱 가옥'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됐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정병욱 박사가 받아 일제의 공출제도를 피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인 박아지 여사에게 맡겼다. 박 여사는 소중히 간직해 달라는 아들의 부탁에 마루 널장을 뜯고 항아리 속에 비단 보자기로 싸서 숨겨놓았다고 한다. 시집 한권도 일제의 눈을 피해 숨겨놓아야 했던 처참한 시대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상기시키고 감성에 젖어들어도 모자랄 그 순간에, 남의 집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민망함'이 엄습해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 동주' 상영이후, 윤동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와 관련된 서적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돼 나오고 있다. 광양 역시 윤동주와의 인연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홍보의 효과인지 타 지역에 거주한 지인들까지 '너 광양에서 일하고 있다했지? 정병욱 가옥에 가봤어?'라며 덧붙여 '광양'에 대한 무궁무진한 관심을 쏟아낸다. 어깨 '으쓱'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이런 상황에 왠지 걱정이 일고 조바심이 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생생한 첫 방문 체험에 발로한 이러한 조바심과 걱정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방문한 이들이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된다 . 눈에 띄는 안내판이 보이질 않았다. 어렵사리 정병욱 가옥을 겨우 찾는데 성공한다면, 이 가옥이 갖는 진가를 집 앞에 놓인 몇 줄의 글만이 설명해줄 것이다. 찾아오기 전에 인터넷을 뒤적였다면 이미 알만한 내용을 알려줄 뿐이다. 그곳에서 눈을 떼고 자연스럽게 유리창에 바짝 붙어 뚫린 마루를 감상 할 것이다. 그 감상을 작은 표지판 하나가 친절하게 돕는다.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
주변 지역에 비해 문화 관광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광양은 실로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그 가치와 의미는 오래전부터 방치돼 왔었다. 이제야 세상이 윤동주를 외치는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정병욱'을 언급하고 '정병욱 가옥'을 언급한다. 다양한 행사들 속에 윤동주와 함께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정병욱 박사의 노력을 조금씩 서서히 이야기해 나가고 있다. 물론 지금이라도 좋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또 알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앞서 고민해 봐야 한다. '기대'를 품고 와서 뜯겨진 마룻바닥만 보고 가게 되기 전에 말이다. 윤동주 하면 정병욱 박사를 떠올리고 광양을 인식 할 수 있게 의미와 가치만 홍보할 것이 아니라 진짜 마룻바닥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 갈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되길 원한다. 더불어 광양을 찾는 이들에게 또는 시민들에게 광양 출신의 작가를 알리고 현재 광양 내에서 문학의 꽃을 피워 내는 지역 작가들도 동시에 알릴 수 있고 지역 내 문학 활성화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관’으로 이용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전국의 윤동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기대’ 뒤에 ‘씁쓸함’ 대신 광양에 대한 더 큰 기대와 즐거움이 함께 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귀한 정신적 산물을 함께 느끼고 소통 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바란다. |
![]() 鄭炳昱 |
|
출생 |
1922년 3월 25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남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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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2년 10월 12일 (6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병원 |
필명 | 호(號)는 백영(白影) |
직업 | 국문학자, 민속학자, 수필가 |
언어 | 한국어 |
국적 | 대한민국 |
소속 |
前 서울대학교 교수 前 한국판소리학회 회장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
활동기간 | 1948년 ~ 1982년 |
장르 | 국문학, 민속학, 수필 |
수상내역 |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 |
친지 |
정덕희(누이동생) 윤일주(매제) 윤인석(생질) |
종교 | 개신교 |
정병욱(鄭炳昱, 1922년 3월 25일 ~ 1982년 10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경상남도 남해애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하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이후 전라남도 광양에서 성장한 그는 부산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7년 민속학자로도 첫 입문하였으며 1964년에는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1922년 출생한 그는 1934년, 부친이 구매한 양조장(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 근대 문화 유산 등록)을 겸비한 주택을 구매해 그곳에서 가족이 거주했다.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는 방학등에 동생들을 위해 선물을 사기도 하여 본가인 망덕에서 지냈다.
그는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원고를 일제의 눈을 피해 본가인 망덕의 집에서 지켜냈다. 강제로 징용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에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고 보관했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찾아가 함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게 된다.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잊지못할 윤동주>에서 자세히 빍히고 있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 문학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고전소설등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 하버드대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및, 강의외에도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다. 그 외에도 유수의 권위있는 신문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출판문화상, 외솔상, 3.1문화상등을 받았다.
현재 그가 살았던 전남 광양시 망덕에는 그의 집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며, 원고를 보관했던 마루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양성 신장종양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그는 시인 겸 건축사학자 윤일주(尹一柱)의 손윗처남이다.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유독 낡은 집 한채를 발견하게 됩니다.
양철지붕에는 뻘건 녹이 슬고, 짙게 변색된 나무는
섬진강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오랜세월 동안 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마치 공장의 창고 같이 보이는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입니다.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시인 윤동주의 시집이 숨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국민 대부분이 좋아하는 윤동주시인의 ‘서시’는
일제시대 이곳 정병욱 가옥에 숨겨져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언급한 ‘서시’가 포함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로 3부의 시집을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한권은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권을 연희전문학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각각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정병욱은 강제 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 가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어머니에게 해방전까지는 어떻게든 비밀리에 숨겨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정병욱 어머니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집의 마루 밑에 숨겨 두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해방을 6개월 남기고 스물일곱 나이로 일본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절명하게 되고,
해방이 된 이후 정병욱 가옥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유고가
정병욱씨에 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으로 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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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김응교 교수가 ‘한글을 지켰던 두 청년, 윤동주와 정병욱’, 성균관대학교 윤인석 교수가 ‘역사적 터의 내력과 활용, 이야기가 있는 정병욱 가옥의 미래를 그려보며’ 등 4개 주제로 두 인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발표를 하게 된다.
시 관계자는 “정병욱 가옥은 백두산 북쪽 끝자락 용정 출신 윤동주와 백두산 최장맥 남쪽 끝자락 광양 정병욱 선생의 만남을 통해 한국 시문학사의 꽃을 피우는 운명적인 여운이 남겨진 곳으로 ‘우정’이라는 이야기를 간직한 역사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병욱 가옥은 1925년 건립된 전형적인 근대 상가 주택으로 지난 2007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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