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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딸과 세계 최초 컴퓨터 프로그램
2016년 12월 14일 01시 23분  조회:6228  추천:0  작성자: 죽림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거스타 에이다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Augusta Ada King, Countess of Lovelace, 
1815년 12월 10일~1852년 11월 27일)은 시인 바이런의 딸로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름인 에이다 바이런, 혹은 에이다 러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인 루프점프IF문과 같은 제어문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녀는 서브루틴에 관한 개념도 고안하였는데, 이것은 1948년 모리스 윌키스가 개발한 최초의 어셈블리어의 개념으로 추가된다. 에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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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가 사용하는 객체 지향적 컴퓨터 언어(Object-orientated computer language)와 과학계에 종사하는 여성을 홍보하기 위한 기념일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 준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여성의 오픈소스(Open Source) 운동 참여를 늘리기 위한 비영리단체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바로 기계에 연산을 수행하도록 명령하는 컴퓨터 명령문을 처음 만든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입니다.

 

<에이다 킹 러브레이스(Ada King Lovelace)의 초상화>

 

 

본명이 오거스타 에이다 바이런(Augusta Ada Byron)인 러브레이스는 1815년에 11대 웬트워스(Wentworth) 남작부인인 앤 이사벨라 밀뱅크(Anne Isabella Milbanke)와 유명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 경(1788-1824)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열렬히 사랑했지만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고, 러브레이스가 태어나자마자 바이런 경이 가족을 떠난 뒤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러브레이스의 어머니는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 출신의 스승들로부터 철학, 과학, 수학을 배웠고, 자신의 딸도 같은 길을 걷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같은 거칠고 무모한 기질을 일깨울지도 모른다는 어머니의 우려 때문에 러브레이스는 아버지 바이런의 시를 읽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여러 명의 스승에게 수학과 불어, 그리고 과학을 배웠습니다. 선구적인 여성 과학자 매리 서머빌(Marry Somerville)과 기호논리학의 지지자였던 유명한 수학자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Augustus de Morgan) 등이 러브레이스를 가르친 스승이었습니다.

 

<1873년에 판화로 새겨진 바이런 경(1788-1824)의 초상화>

 

러브레이스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후 긴 병치레 기간 동안 여러 보모들의 손을 거치며 간호를 받았습니다. 13세 때는 지독한 홍역 때문에 몸이 마비되어 거의 1년 동안 침대에 누워 지냈고, 회복된 후에도12개월 동안 목발에 의지하여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공학 분야를 특히 좋아했던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는데요. 종이 위에다 자신만의 비행기를 설계하고 비행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비행학』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17세였던 1833년 6월, 러브레이스와 어머니는 런던 매릴번에서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는데요. 그 곳에 참석한 손님들은 배비지의 작업물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고 그의 미분기의 축적 모형을 보았습니다. 

 

러브레이스의 스승인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도 그 파티에 참석했으며, 그의 아내 소피아(Sophia)는 그 기계가 러브레이스를 얼마나 열광시켰는지 후에 이처럼 설명했습니다. "다른 방문객들은 그 대단한 기계가 동작하는 것을 빤히 보면서, 뭐랄까 감히 표현하자면 마치 미개인이 거울을 난생 처음 보았을 때나 총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보인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바이런 양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작동을 이해하고 그 발명품이 놀랍도록 신기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배비지를 처음 만난 지 2년 뒤에 러브레이스는 윌리엄 킹-노엘(William King-Noel)과 결혼하여 킹 부인이 되었고, 3년 뒤에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되었습니다. 킹 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고, 모두 대담한 기질로 영국을 멀리 떠나 모험과 여행을 즐겼는데요. 맏이인 바이런(Byron)은 16세에 집을 나가 선박의 목수로 일하다가 26세에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랄프(Ralph)는 탐험가이자 유명한 등산가가 되었으며, 후일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맥의 한 봉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딸인 앤 블런트(Anne Blunt)는 아라비아산 말의 품종을 보존할 목적으로 유럽 최초로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러브레이스는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는 못했는데요. 여자가 대학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878년이 되어서야 런던 대학교가 영국 최초로 여학생을 받아들였을 정도니 말이죠. 하지만 러브레이스의 남편은 수학과 과학에 대한 아내의 관심을 이해하고 지원했습니다. 러브레이스는 배비지의 작업에 여전히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분기에 대한 그의 강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도 자주 방문하면서 기계 장치지만 현대 컴퓨터의 주된 요소와 기능을 많이 갖고 있는 그 획기적인 해석기관 설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배비지는 러브레이스의 독창적인 사고와 수학적 재능에 깊이 감명을 받아 그녀를 "숫자의 마술사”라고 불렀습니다.

 

1842년에 배비지는 토리노 대학교에서 해석기관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이 때 청중들 중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엔지니어 루이지 메나브레(Luigi Menabrea)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강의에 대해 프랑스어로 감상문을 썼는데요. 제네바 대학교 도서관에서 이 글이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러브레이스는 이 감상문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배비지는 러브레이스가 그 기계를 매우 잘 이해했기 때문에 러브레이스의 번역문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도록 권했습니다.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러브레이스는 세부적 논증과 수학적 관찰 및 증거들로 이루어진 장문의 평을 덧붙였는데요. 이는 원래의 감상문보다 세 배나 긴 내용으로 문제 해결의 중대한 돌파구를 만들었습니다.

 

이 주석에서 러브레이스는 스승인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에게서 배웠던 기호논리학이 해석기관에 적용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리고 배비지의 제안에 따라 러브레이스는 주석의 마지막 단원에 베르누이(Bernoulli) 수 계산을 위해 해석기관에 필요한 일련의 명령문을 기록했습니다. 대부분의 컴퓨터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이 명령문은 역사상 처음으로 작성되어 발표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1843년 후반에 사이언티픽 메모아즈(Scientific Memoirs) 저널에 실렸습니다.

 

<베르누이 수 계산을 위한 해석기관의 알고리즘 도해>

 

러브레이스가 내린 또 다른 결론은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해석기관은 마치 자동으로 장식 패턴을 발생시키는 자카드식 문직기가 꽃과 잎사귀를 직조하듯이 대수 패턴을 짠다"고 열의에 찬 어조로 쓰면서 "해석기관이 단순한 '계산 기계'와 어떻게 바탕이 다른지"를 설명하고 "해석기관은 온전히 그 자신의 위치를 갖는다"고 주장했는데요. 배비지는 주로 수치표를 만들기 위해서 산술 목적으로 해석기관을 사용하는 데 집중한 반면, 러브레이스는 그 목적 이상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주석에서는 해석기관이 "숫자 외의 다른 것에도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다른 것을 "해석기관의 작동 표기법 및 메커니즘"의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해석기관은 단순한 수량이 아닌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숫자에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알파벳 글자나 이미지 또는 음악과 같이 숫자 및 연산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을 해석 또는 처리할 때 이 기관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성학에서 음의 높이 나 작곡에 있어 이러한 표현식 및 변환을 허용한다고 가정하면, 해석기관은 어느 복잡한 경우나, 어느 범위의 음악이든지 작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이런 개념을 이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정말로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배비지는 해석기관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래서 러브레이스의 주석과 초기 프로그램은 사장되어 긴 시간 동안 거의 잊혀졌습니다. 

 

러브레이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늘 힘들어 했지만 과학, 기계, 수학 등에 대한 멈출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광범위한 독서를 계속했습니다. 그녀의 사교 범위에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전신 개척자인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만화경의 최초 발명자이며 박식한 학자였던 데이빗 브루스터(David Brewster) 등 당대의 최고 과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1849년에 브라이튼에 살고 있던 유명한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러브레이스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사람 중 하나로, 그녀는 침상에서 디킨스의 소설 ‘돔비와 아들’을 읽고 있었습니다.

 

러브레이스가 마지막으로 했던 중요한 외출은 1851년에 찰스 배비지와 함께 한 것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녀는 자궁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으며, 이듬해에 한창 나이인 36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와 같은 나이였죠. 본인의 요구에 따라 그녀는 노팅엄셔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옆에 묻혔습니다.

 

최근 그녀가 생전에 주고받았던 상당한 양의 서신들 중 일부가 그녀의 생에 대해 많은 조사를 거쳐 씌어진 전기와 함께 출판되었는데요. 이 책의 출판과 함께 그녀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미국 국방성은 1979년에 그녀의 이름을 따서 한 컴퓨터 언어의 명칭을 ‘Ada’라고 붙였으며, 그 언어는 현재 철도 선로 배정, 항공 교통 관제, 군용기 항공전자공학 등의 대규모 실시간 어플리케이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1998년부터는 영국 컴퓨터 학회 아카데미에서 컴퓨팅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러브레이스 메달을 수여하고 있는데요. 2009년에는 저널리스트인 수 샤먼-앤더슨(Suw Charman-Anderson)이 에이다 러브레이스 데이(ALD)를 제정했고, 오픈 소스 개발자인 메리 가디너(Mary Gardiner)와 리눅스 커널 개발자 발레리 오로라(Valerie Aurora)는 에이다 이니셔티브(Ada Initiative)를 설립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과학, 컴퓨팅,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학자를 홍보하고, 시대를 앞서간 최초의 프로그래머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한 여성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A Smart, Creative World: Past and Future' 연재 현황]

 

(1) 컴퓨터의 탄생, 시대를 앞서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http://blog.lgcns.com/950

 

(2)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http://blog.lgcns.com/982

 

(3) ENIAC: 세계 최초의 빠른 컴퓨터

http://blog.lgcns.com/1001

 

(4) 디버깅의 신화,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http://blog.lgcns.com/1021

 

(5) 초기 컴퓨터의 진화

http://blog.lgcns.com/1042

 

(6)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http://blog.lgcns.com/1060

 

(7) 웹의 발명: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http://blog.lgcns.com/1165

 

(8) 인터넷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1

 

(9) 위키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5

 

(10) 로봇의 발전

http://blog.lgcns.com/1182

 

글 ㅣ클라이드 기포드 (Clive Gifford) 

 

 
<여인열전>;ㅡ

 

 

1975년 미 국방성은 새 프로그래밍 언어를 발표하며 그 이름을 에이다(ADA)라 붙였다. 최초의 컴퓨터가 나오기 150년 전, 오늘날 PC의 가능성까지 예견했던 그녀의 원래 이름은 에이다 바이런,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친딸이었다. 귀족 출신인 그녀 어머니는 1815년 결혼하고 딸아이가 태어났지만 “우울하고 정열적이며, 참회하는 동시에 또 후회 없이 죄를 범하는 바이런적 인물”의 원조 바이런과 곧 절연한 탓에, 에이다는 8살에 세상을 뜬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온몸에 흐르는 시인의 피를 거부할 수 없었던 그녀는, 방탕한 아버지를 따라서 시인의 길을 갈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에게, “시를 허락할 수 없다면 ‘시적인 과학’이라도 허락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엄격한 모친의 간섭 속에 그녀의 유일한 낙은 수학과 모형 만들기였고, 이런 딸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려고 강제로 아편까지 복용시켰던 극성스런 어머니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가정교사로 부르고 산업혁명의 현장을 안내하는 한편, 왕립천문학회 최초 여성 회원인 메어리 소머빌을 통해 당대 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19살 규수가 된 에이다, 시집가서 3년 뒤 남편의 작위 수여로 러브레이스 백작 부인이 되시고 또 줄줄이 아이를 낳고 살림하느라 수학을 팽개친 날이 계속되면서, 그만 우울증에 빠진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파티에 와서도 산업혁명의 열매인 발명품들에 대해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데, 여기 끼어든 백작 부인 러브레이스는 갑자기 생기가 돌고, 이를 본 남편과 어머니는 그녀가 하고 싶은 걸 그냥 하게 놔두기로 합의를 봤다.

이 무렵 고귀한 재능의 에이다를 알아보고 환호한 또 다른 천재, 찰스 배비지 아저씨는 프로그래밍 역사의 기원이 되는 ‘해석기관’ 강의를 하고 다니며 이를 프랑스어 책으로 출간하는데, 에이다는 그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는 중에 모두 터득하고 해석까지 보태, 하드웨어 작동이 아닌 소프트웨어 개념과 관련해 훨씬 더 복잡한 계산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줄 루프, 점프, 서브루틴 그리고 ‘if’ 같은 경로들을 고안한다. 그리고 이런 기계가 앞으로 과학 발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작곡하고 그래픽을 만드는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것이라는 엄청난 잠재력을 정확히 예견했다.

이렇게 똑똑했던 에이다, 수학을 통해 뭐든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확률의 법칙을 통해 게임에 이기는 법을 알아내려던 그녀는 엉뚱하게 도박에 빠져 나머지 인생을 죽쑤고 만다. 엄마도 남편도 부자였지만 제 몫의 재산이 없는 여자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다 급기야 자궁암까지 겹쳐 36살,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 배비지 아저씨와 손을 맞잡고 경마에 대박 내는 프로그래밍을 만들어서 손해를 메울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그녀, 미래를 예측하고 제 맘대로 장난하는 일, 그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가망신하는 일을 좀 삼갈 수 있었을 거다.

 

▣ 김재희/ <이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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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몰락

언제부터인지, 왜 그랬는지 기록에 남아있진 않습니다만, 에이다는 극심한 도박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해석기관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그랬다는 설도 있고, 도박 게임이 제공하는 지적 유흥과 수학적 도전성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지만, 에이다의 도박벽은 분명 본인의 불찰에 의한 중독증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남편 집안의 패물을 훔쳐 도박 자금을 마련할 정도였으니까요.
 
수학 천재들이 도박에 빠지는 일은 역사적으로 결코 드문 경우가 아닙니다. 그러나 에이다처럼 '패가망신'할 정도로 도박에 깊이 빠진 경우는 드물었죠.
 
배비지 역시 에이다의 도박 행각에 깊이 관련돼 있었습니다. 배비지는 특유의 천재적 영감으로 경마에 필요한 확률 계산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도박 게임을 위한 기계를 만들어 손해를 메우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배비지와 에이다는 심지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분기를 개량해 경마에서 우열 평균조건을 계산하기 위한 기능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열 평균조건을 계산하기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 후 120년 뒤에나 개발될 고도로 복잡한 종류였습니다.)

남편의 패물까지 저당 잡히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친정 집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할 절박한 상황까지 몰립니다.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설상가상으로 자궁암까지 걸려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에이다의 이른 죽음으로 배비지는 유일한 후원자이자 지적 동료를 잃었고, 남은 여생 동안 비생산적인 방황을 계속하다 1871년 세상을 떠납니다. 만일 에이다가 그처럼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해석기관은 세상의 인정을 받아 부분적으로나마 완성됐을 것이고, 컴퓨팅의 역사는 수 십년 진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덤으로 보기>========아버지 시인 바이런 @@

 

 

 



<바이런의 성격> 


바이런은 1788년 1월 22일 런던에서 태어나서, 서른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후 1824년 4월 19일 희랍의 미솔롱기에서 학질로 죽었다. 
바이런의 행동과 생각은 보통사람들의 사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그가 죽고 난지 145년이 되는 해인 1969년에야 비로소 바이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묘역에 묻힐수 있었다. 
바이런만큼 큰 명성과 또 그에 비례할 만큼의 악평에 시달린 문인은 세계 문학사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이런의 시에 대한 오늘의 평가는 동시대의 시인인 셸리나 키츠에 훨씬 뒤지지만 그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한 많은 외국 독자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바이런의 생애와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이런의 조상의 내력을 보면 바이런의 호탕하며 기상천외하고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며 또한 낭만적인 성격의 일면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런의 조상들은 귀족들이었으나 정말 엉뚱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바이런은 방탕했으며 대단한 난봉꾼이었다. 그는 궁내 대신(궁정의 재산을 관리하는 장관)의 부인인 카마슨과 눈이 맞아 사랑의 밀월을 떠나 오거스타를 낳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바이런의 어머니가 되는 귀족의 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된다. 
바이런이 세 살 때 그의 집은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몰락하게 된다. 
또 그의 할아버지인 존 바이런은 해군제독이었는데 성미가 너무 나빠 '악천후 잭"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바이런은 그의 할아버지가 배의 난파를 묘사한 <얘기 Narrative>를 <돈주안>에서 참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인 바이런 남작도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바이런의 종조부인 바이런 남작은 자손이 없어 바이런에 

게 남작의 칭호와 유산을 물려주게 된다. 
또한 바이런은 대단한 미남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남에다 귀족출신이며 돈도 잘 쓰는 그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따랐다. 하지만 바이런은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절었으며 또한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을 타고 났다. 바이런은 이러한 신체적 결점을 감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바이런과 그의 여인들> 
바이런은 여러 계층의 수많은 여자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817년 가을 베니스에 온 이후 그 자신의 재산에 따르더라도 200명이 넘는 주로 신분이 낮은 여자들과 관계했다 한다. 하지만 그는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그의 대작인 <돈주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장 시의 주인공인 돈주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의 유혹에 빠져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이런의 이러한 성격형성의 원인을 그의 유년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바이런의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 끝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몰려 불란서에서 죽자, 세 살된 바이런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돌아가서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인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질이 아주 급한 여자였다. 그녀는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자기 아들에게 '버릇없는 절름발이 자식'이라고 욕을 해대기도 헸다. 자신의 불구를 항상 의식하고 있던 바이런은 이러한 모멸적인 말들에 크나큰 상처를 받곤 했다. 어머니와의 이러한 관계는 바이런의 성격이 반항적이고 파괴적이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바이런의 어머니도 화가 풀어지면 바이런을 아주 귀여워했다. 어린 바이런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죄와 영원히 계속되는 지옥에 대해 세뇌 당했다. 
어린시절의 이러한 종교적인 영향은 그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바이런적인 인물'은 이러한 종교적인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그를 가르쳤던 여가정교사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이런은 첫사랑 메리 초워스에게 청혼하지만 거절 당한다. 그의 이복누이인 오거스타와 이성의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애정은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도 바이런은 캐롤라인 램, 옥스퍼드 부인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이런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속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가정을 꾸리길 원하게 될 때 밀뱅크를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별거에 들어가게 되고 바이런은 딸인 오거스타 애더의 양육권까지 박탈당하게 된다. 그 뒤 또 바이런은 셸리 부인의 이복동생인 클래어 클래어머트와 관계를 맺어 알레그라라는 딸을 낳았다. 그 뒤 1819년 베니스로 간 바이런은 알레산드로 구이치올이 백작의 부인인 테레사 구이치올리의 정부가 되었다. 

<바이런의 사상> 
바이런에게 있어 압제와 위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싸워서 타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영국을 떠난 것도 사실은 정직한 본능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터키제국에게 압제받는 고전의 나라 그리스는 인생의 여러 가지 환락을 다 경험해보고 이에 염증을 느낀 바이런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볼만한 절호의 대의 명분이었다. 그는 희랍을 돕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하여 직접 지휘하면서 가지가지의 악조건 밑에서 스파르타적인 생활을 하며 나날은 보내다 학질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바이런시의 특징> 
바이런의 시는 단단한 시적 이미지가 결여되어서 산문적이기까지 하다. 
바이런적 인물에 대해 살펴보면, 바이런적 인물은 그의 작품 도처에 나타나며, 그는 우수에 젖어 있으며, 정열적이고, 죄책감으로 항상 고뇌에 차 있지만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방랑하는 인물이다. 
바이런은 그의 작품 속에서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를 사용하고 있다. 이 경우 바이런은 하나의 그럴듯한 환상을 만들어 놓아, 독자가 그것을 사실로 믿게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작가는 이러한 환상은 완전한 허구이며, 작가가 이 허구를 만들어 작중 인물들을 조종하는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은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나 <돈주안>에서 특히 자주 쓰인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작가의 이중적 시각 및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이런은 삶을 이중적으로 보는데서 생긴 아이러니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풍자에 도달한다. 그의 후기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풍자는 <돈 주안>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바이런은 풍자를 통하여 자기만의 채취를 풍기고 있다. 
바이런은 새롭게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거나 또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성격에 맞는 시의 형식을 찾아내 자기 특유의 시체로 개발시켰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어

--바람둥이.절름발이나 美男 시인 바이론 이야기--

●<이 시를 읽기 전에>

방문객 여러분 그리고 56도카페 단골님들을 위해 가능한 쉽고 재밌게 영미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부족한 점 많이 지적 바랍니다(부계올림)

 

바이론 George Gorden Byron(1788-18240)은

바람둥이 아버지와 히스테리 어머니 사이에 절름발이로 태어난 염세주의적 냉소적 인생관의 소유자입니다.

어느 아침 깨어 보니 내가 유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란 구절로 더욱더 우리에게 친숙한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George Gordon Byron은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어느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인생은 비록 짧았으나, 그가 남긴 무수한 희곡들과 서사시들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아 크나큰 감동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Byron은 세계의 시인들 중에 여자들과의 관계가 가장 큰 바람둥이 시인으로 알려져 왔고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그의 잘 생긴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언변능력에 많은 여인들이 그에게 반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Byron은 일찍이 사랑에 눈을 떠 몇 번의 사랑을 하게 되지만, 그의 첫 부인인 밀 뱅크와 결혼함으로써 스캔들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 이루어진 그들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계속되는 남편의 연애행각에 견디지 못한 아내는 결혼한 지 일 년 후 딸 에이다를 데리고 그를 떠났으며, 이들의 별거 중에는 그가 배다른 누이와의 근친 관계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떠돌았습니다. 그러자 런던 사회 전체가 들고 일어나 바이론을 매도하게 되고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이런 영국사회를 등질 생각을 마음먹고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최대걸작 DON JUAN을 남겼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 .열병에 걸려 객사합니다.

파란만장한  일생 은 낭만적인 그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아래시도 연인을 생각하며 쓴 것입니다.

 


When We Two Parted

George Gordon Byron

When we two parted                  (우리 둘이 헤어졌을 때

In silence and tears,                  (말은 못하고 눈물 흘리며,

Half broken-hearted                   (가슴이 거의 찢어지며

To sever for years,                   (오래 동안 헤어져 있었을 때,

Pale grew thy cheek and cold,        (그대의 뺨은 창백하고 차가웠고,

Colder thy kiss;                       (그대의 입맞춤은 더욱 차가웠습니다.

Truly that hour foretold               (진정 그 시간이 이 시간의

Sorrow to this.                        (슬픔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The dew of the morning               (아침 이슬은,

Sunk chill on my brow,                (내 이마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습니다.

It felt like the warning                 (그런 게 징조 같은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What I feel now.                       (내가 지금 느끼는 모든 것들 .

Thy vows are all broken,              (그대의 맹세는 모두 깨어졌고,

And light is thy fame:                  (그대의 명성은 보잘 것 없게 되었습니다.

I hear thy name spoken,                  (난 그대의 이름이
                                                  뭇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것을
 듣고서,

And share in its shame.                (나도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They name thee before me,           (사람들(they)이 내 앞에 그대 이름을 부르는게

knell to mine ear;                   (흉조로 내 귓전을 스쳤습니다;

shudder comes o'er me,             ( 나는 몸서리쳤습니다.

Why wert thou so dear?               (어쩌다가 그대를 그렇게 사랑했을까?

They know not I knew thee,           (사람들은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모릅
니다.

Who knew thee too well:              (너무도 그대를 잘 알고 있지만:

Long, long shall I rue thee,            (오래,오래 난 그대를 슬퍼할 것이에요.

Too deeply to tell.                     (말하기엔 너무나도 깊이.

In secret we met,                      (우리는 몰래 만났으며,

In silence I grieve,                     (나는 말없이 슬퍼하며,

That thy heart could forget,            (쉽게 잊으시는 그대의 마음을,

Thy spirit deceive.                     ( 거짓에 찬 그대의 영혼을.

If I should meet thee                   (그대를 만난다면

After long years,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에,

How should I greet thee?              (난 그대를 어떻게 맞아할까요?

With silence and tears.                (말은 못하고  눈물로 맞이하겠지요.

본문 해설

“When we two parted” by Lord Byron

이 시는 불같이 뜨겁게 사랑했다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에 관한 시입니다.

1연에서 화자는 그대의 키스와 그대의 뺨이 차가웠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우리의 이별은 이미 예전에 마련돼 있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화자는 그들의 이별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2연에서는 평소와 같았을 아침이슬마저도 싸늘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슬을 이별의 조짐이었다고 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그대의 가벼운 평판과 함께했던 맹세들이 다 깨짐을 보고 그대와 사귀었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3연에서 화자는 2연에서 그대와 사귀었던 것을 부끄러워했고 아직도 남들이 그대의 이름을 말하면 슬픈 종소리처럼 들려서 온몸이 한바탕 떨린다. 그대를 왜 그렇게 깊이 사랑했나 후회도 하면서 또한 남들이 그대를 잘못알거나 잘 모르고 말하는 것에 다시 슬퍼하고 있다. 화자는 말로는 다하지 못할 만큼 슬퍼할 것입니다.

4연에서“That thy heart could forget, Thy sprit deceive" 를 통해서 그대의 잊기 잘하는 마음과 속이기 잘하는 그대의 영혼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먼 훗날에 그대를 보면 어떻게 인사할지를 미워하는 마음과 그래도 사랑했던 이에 대한 연민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는 2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불같이 뜨겁게 확 타오르지만 금방 차갑게 식어서 그전의 사랑의 온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냄비같은 사랑과 천천히 은은하게 타오르는 하지만 오랫동안 따뜻하게 이어가는 뚝배기 같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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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조사◗

sever:분리하다.thy:(옛.시)그대의 . knell:조종弔鐘.흉조凶兆 .shudder:몸서리.전율戰慄

wert:(옛) be동사의 직설법 단수 과거형,가정법 과거형.thou:그대는.rue:슬퍼하다.후회하다

 

                  

 

 

 

 

 

걷고 있는 그녀는 구름 한점 없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 처럼 아름답네.

가장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가

그녀의 모습과 눈 속에서 어울려

저토록 은은한 빛으로 무르익으니

번쩍거리는 낮 하늘에선 저런 아름다움을 못 보네.

 

그림자 한 줄기를 더 했어도

검은 머리카락마다 물결치는 저 우아함은 반감되었으리,

빛 한줄기를 더 했어도 그녀 얼굴에 은은히 빛나는

저 형언 할 길없는 아름다움 떨어졌으리.

얼굴에 깃든 고요하고 고운 사상은

정하고 귀한 보금자리 자랑하네.

 

눈 언저리에 어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는

너무도 고요하고, 뺨에 서리어

발그레 빛나는 홍조는 너무도 은은하면서도,

너무도 웅변으로 말하여 주네 선하게 살아온 세월을,

지상의 모든 것과 화목했던 정신을,

순진무구한 사랑이 담긴 가슴을.

 

 

 

Vocabulary

 

감상포인트

■ 해설 및 감상 

리듬 :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노래형식에 맞추어 쓴 시로서, 약강 4보격을 기본 리듬으로 한다. 4행의 행도에는 meet in her aspect로 파격이 일어나는데, 예상되는 리듬약강 대신 강세 받는 단어 meet를 행수에 가져 옴으로써, 그 앞 행에서 말한 빛과 어두움이 잘 조화 되고 있음을 강조해준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상반된 요소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여인의 얼굴에서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얼핏 여인의 아름다움의 묘사로는 부적절 한 듯 하지만, 실은 이 시가 시인의 장차 처제벌 될 한 여인이 상복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쓴 시라는 점을 이해하면 그 적절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복 입은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는 연민의 정과 더불어 그 상복의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더 아릅답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빛(아름다움) 과 어두움(슬픔)의 어울어짐에 관한 부분에서 리듬에 파격을 주어, 읽는 사람의 귀에 강도있게 느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행 : ABABAB의 rhyme scheme을 갖는다. 흔히 교차형 각운이 갖는 의성·의태적 효과 때문에 여인의 경쾌한 걸음인 듯 또는 부드럽게 치마자락 스치는 소리인 듯 들려옴과 동시에 치찰음s의 hissing효과 때문에 여인의 표정의 고요함까지 전한다.


이미저리 : 주의해야 할 것은 she walks in beauty라는 첫 구절의 beauty가 여인의 의상 또는 의사의 색깔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앞의 전치사 in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총총한 밤과 같다고 했으니 beauty는 의상의 빛깔과 무늬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바이런은 1814년 6월 13일 밤 무도회에서 장차 결혼하게 될 Annabella Milbanke의 사촌뻘되는 미모의 여인 Mrs Rebert John Wilmot가 반짝이는 장식이 붙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아침에 이 시를 썼다. 그러니까 반짝이는 장식이 붙은 검은 상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별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 하늘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을 중심되는 이미지로 하여, 밝음과 어두움의 이미지를 얼굴과 눈빛 또는 얼굴과 머리결의 대비적 색깔의 이미지로 확대하기도 하고, 밝음과 어둠이 무르익어 이루는 아름다운 조화의 이미지를 눈가에 퍼지는 미소와 뺨에 서린 연한홍조의 이미지로 심화 시키기도 했다.그리하여 종국에는 마음의 색깔 이미지로까지 시화시켜 놓았다. 이 시를 읽고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 속에는, 밤 하늘처럼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그런 고요한 매력을 가진 여인의 얼굴의 빛과, 현란하지 않은 밤하늘처럼 은근한 그런 마음의 아름다움의 빛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전개구조 및 그 외에 것들 : 1연에서는 먼저 여인의 의상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여인의 얼굴로 옮겨간다. 2연에서는 여인의 얼굴과 머릿결을 생각하고 이어 머리 속에 간직 되어 있을 아름다운 정신을 생각해본다. 마지막 연에서는 여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을 음미하고는 밤하늘처럼 깊숙한 내면에 들어 있을 한량없을 마음씨를 생각해 본다. 전체로 볼 때 여인을 싸고있는 제일 바깥에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내면으로 옮겨가는 전개방법이기 때문에 시를 읽은 독자도 여인의 반짝이는 검은 상복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얼굴을 거쳐 그 속의 생각과 더 깊은 곳의 마음씨를 따라가며 시 속으로 그리고 여인의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감상 : 이시에 대해서 작가나 이시의 배경을 모르고 시를 대한 사람은 분명히 이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위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시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에서 빗나가 작가의 약혼자의 사촌동생을 보고 연상된 것들을 시로 적은 것이다.약혼자의 사촌 동생인 그녀가 상복을 입고 파티에 나타났는데 그녀의 상복은 반짝이는 수가 달린 옷 이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에 잠긴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렸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까만 바탕의 반짝이는 무늬가 마치 밤하늘에서 별들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처음 이시를 읽었을 때는 나도 사랑하는 여인을 보고 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시의 작가 바이런에 대해 알고 시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된 순간..아~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소한 것에서 오는 감동 역시 작가적 기질이 뛰어난 그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어렵게만 느껴졌던 고전시들이 이번기회를 통해서 얼마나 아름답고 순고한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바이런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이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어둠과 빛의 그중 나은 것들이

그네 얼굴 그네 눈에서 만나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어요.

난(亂)한 낮에는 보이지않는.

 

어둠 한 겹 많거나 빛 한 줄기 모자랐다면

새까만 머리 타래마다 물결치는

혹은 얼굴 부드럽게 밝혀주는

저 숨막히는 우아함, 반이나 지워졌을 거에요.

밝고 즐거운 생각들이 그 얼굴에서

그곳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가 알려 줘요.

 

그처럼 상냥하고 조용하고 풍부한

뺨과 이마 위에서

사람의 마음 잡는 미소, 환한 얼굴빛은

말해 줘요, 선량히 보낸 날들을,

지상의 모든 것과 통하는 마음을,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피를.

 

 

* 죠지 고든 바이런 : 1788년 영국출생. 셸리, 키츠와 함께 세계적인 낭만파 시인으로 꼽힌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 했으며 1812년 발표한「챠일드 헤럴드의 순례」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극시, "만프렛", 서사시 "돈.쥬안" 등을 발표하여 19세기 낭만주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 바이런이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를 출간한 이후 유럽사회는 그를 각별하게 주목했고, 그 스스로도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지만 바이런의 시편들을 읽을 때 받게 되는 인상은 그가 인간을 옹호하는 인간적인 시를 썼다는 점에 있다. 특히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들은 어느 누구의 시보다 감성적이며 부드럽고 솔직하다.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에서도 한 여성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음성은 사랑에 매혹되어 열떠 있다.

바이런은 자유, 그 "사슬 벗은 마음의 끝없는 정신"을 노래했으며, 신(神)앞에 "폭정을 드러내 놓고 있는" 부패하고 탐욕스런 당시의 권력을 날이 선 목소리로 노래했다.

ㅡ 문학평론가 정끝별님의 해설에서 부분 발췌함 ㅡ

 

“바이런의 시를 향해 세상은 열렬하게 경의를 표했다. 바이런의 급류 같은 시는 당대인들로부터 완전히 정당한, 아니, 아마 그 이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의 시는 ‘그 온갖 불완전함을 보란 듯이 내세우고서,’ 소홀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반복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그것이 가진 어떤 결점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위대하고 찬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밀 듯한 인기를 누리던 시절도 이제 지나가 버렸다. 바이런에게조차 그런 시절은 지나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슈 아놀드)

 

 

 

 

과격한 청년 바이런 경, 인기 절정의 시인이 되다.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1788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바이런 가문은 대대로 귀족이었지만, 그중에는 유달리 과격하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많았다. 가령 시인의 아버지인 육군 대위는 “미친놈 잭”이라는 별명으로 통했으며, 할아버지인 해군 제독은 “악천후 잭”으로 통했고, 큰할아버지인 제5대 남작은 “악당 바이런”으로 통했으며 실제로도 살인 전과가 있었다. 시인 바이런의 아버지 “미친놈 잭”은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으며, 첫 결혼도 어느 부유한 유부녀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것으로 시작했다

몇 년 뒤에 상처한 그는 1785년에 캐서린 고든(Catherine Gordon)과 재혼했는데, 진실한 애정보다는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에 대한 탐욕에서 이루어진 결합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인 캐서린도 남편 못지않게 격렬하고도 변덕스러운 성격이어서, 남편은 물론이고 외아들에게도 종종 잔인한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고든 가문에도 바이런 가문 못지않게 과격하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많았기 때문에, 시인 바이런의 생애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성품 역시 친가와 외가 양쪽의 유전적 영향으로 간주된다

1807년에 대학을 졸업한 바이런은 유럽 여행을 떠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그리스 등지를 돌아보았다. 그 2년간의 여행 경험을 토대로 쓴 이국적인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 1부와 2부가 간행되자, 그는 이전의 혹평이 무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찬사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 바이런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소감을 표현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이로써 바이런은 단숨에 낭만주의자의 선두주자로 등극하며 명성을 얻었다.

문학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는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리게 되었다. 비록 과격하고도 변덕스러운 성격이기는 했지만, 바이런은 조각상 같은 외모를 지닌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신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쪽 발에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기 때문인데, 일설에는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았다고도 한다. 다만 바이런 본인도 그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 까닭에, 과연 왼쪽과 오른쪽 가운데 정확히 어느 쪽이 정확히 얼마나 짧은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체적 결함을 상쇄하려는 듯 바이런은 체력 단련에 몰두했으며 승마, 수영, 권투, 펜싱, 사격 등에서 상당한 실력을 뽐내게 되었다. 특히 수영을 좋아한 그는 고대의 전설을 모방해 다르다넬스 해협(가장 좁은 곳의 폭이 1.2킬로미터인)을 헤엄쳐 건너가 여자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전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은 평생 지속되었다. 심지어 그의 첫사랑도 그 문제로 깨지고 말았는데, 평소 흠모하던 여성이 그를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고 상처를 받은 까닭이었다.

1815년 1월에 바이런은 귀족 출신의 애나벨라 밀뱅크(Annabella Milbanke)와 결혼하고, 그해 12월에는 딸 오거스타 에이다(Augusta Ada)를 낳았다.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밀뱅크는 방탕한 남편의 성격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1년 만에 일방적으로 별거를 선언하며 딸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이는 정신적으로는 정상적인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병들었어요.” 이때부터 바이런이 배다른 누이 오거스타 리(Augusta Leigh)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파경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기 시작한다.

바이런을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 (동성애, 가학 및 피학 성향 등)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이 근친상간 혐의인데, 지금까지도 사실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지금도 물론이지만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는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머지않아 갖가지 악담이 쏟아졌다. “나에 대한 세평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맞지 않는 인간이고, 틀리다면 영국이 나에 맞지 않는 나라였다.” 견디다 못한 바이런은 이 말을 남기고 1816년 4월 25일에 영국을 떠난다. 크나큰 명성과 오명을 모두 얻은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이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어둠과 빛의 그중 나은 것들이
그네 얼굴 그네 눈에서 만나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어요,
난(亂)한 낮에는 보이지 않는.

어둠 한 겹 많거나 빛 한 줄기 모자랐다면
새까만 머리타래마다 물결 치는
혹은 얼굴 부드럽게 밝혀주는
저 숨막히는 우아함 반이나 지워졌을 거예요.
밝고 즐거운 생각들이 그 얼굴에서
그곳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가 알려줘요.

그처럼 상냥하고 조용하고 풍부한
뺨과 이마 위에서
사람의 마음 잡는 미소, 환한 얼굴빛은
말해 줘요, 선량히 보낸 날들을,
지상의 모든 것과 통하는 마음을,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피를

바이런은 얼굴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다리를 저는 것이었고, 둘째는 쉽게 살찌는 것이었다. 체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런은 식사를 적게 했으며, 종종 설사약을 복용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몸을 관리했다.

 

유럽을 방랑하고 그리스에서 불멸의 생을 마치다

영국을 떠난 바이런은 스위스의 제네바에 한동안 머물렀다. 머지않아 영국 출신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그의 부인 메리 고드윈(Mary Godwin), 그리고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 클레어먼트(Claire Clairmont)가 찾아왔다. 바이런과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이었던 셸리는 평소에 흠모하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인 메리와 사랑에 빠졌다. 메리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1792)의 저자로 유명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였다.

하지만 당시 셸리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메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셸리는 부득이하게 해외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도 두 사람을 따라왔다. 열정적인 성품의 바이런과 침착한 성품의 셸리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지만, 자유와 예술을 향한 포부와 열망을 지닌 까닭에 금세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원고를 바꿔 읽으며 논평을 해주고, 밤새도록 문학 토론을 벌이면서 피차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바이런은 여행 중에도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렸는데,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무려 2백 명을 넘게 사귀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1817년 1월에 클레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Clara Allegra Byron)를 낳았다. 바이런은 이 아이를 딸로 인정해서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클레어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기도 거부할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이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부(1816)와 4부(1817), 그리고 훗날 슈만의 음악으로 더 유명해진 시극 [맨프리드(만프레드)](1817) 등이 있다.

1819년에 바이런은 숱한 여성 편력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다. 상대는 19세의 테레사 귀치올리백작부인(Countess Guiccioli)이었다. 바이런은 그녀를 따라 라벤나로 거처를 옮겼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될 장시 [돈 후안](1819~1824)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은 문학이나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도 오히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의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에 가담한 것은 십중팔구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821년에 무장 봉기가 실패하고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친정 식구들이 줄줄이 라벤나에서 추방되자, 바이런도 애인을 따라 피사로 거처를 옮겼다. 1822년에는 연이어 비극이 벌어진다. 4월에는 클레어가 낳은 딸 알레그라가 사망했고, 7월 8일에는 셸리가 라스페치아 만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돌풍을 만나 익사한다. 바이런을 비롯한 친구들은 바닷가로 떠밀려 온 셸리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했는데, 불이 꺼진 뒤에도 셸리의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1823년 12월 30일, 바이런은 이탈리아의 제노바를 떠나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으로 간다. 15세기부터 계속되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적극 동조한 까닭이었다. 비록 군대 경험은 없었지만 바이런은 그리스 반군과 힘을 합쳐 코린트만의 적 요새를 급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1824년 2월 초에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의사들이 사혈(혈관을 절개해 피를 빼내는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했다고 추정된다.

1824년 4월 19일, 조지 고든 바이런은 영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에서 36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가 되어 영국으로 옮겨졌지만, 일설에는 심장만을 따로 떼어내 현지에 묻었다고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는 바이런의 좋지 않은 평판을 의식한 듯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시신은 그해 7월 16일에 가문의 영지인 뉴스테드의 한 교회에 묻혔고, 한 세기가 더 지난 196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의 시인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바이런이 남긴 미간행 원고 중에는 회고록도 있었다. 자기가 겪은 여러 사건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라고 했는데, 항상 주색에 탐닉했던 바이런의 성향으로 볼 때 십중팔구 스캔들을 일으킬 내용으로 짐작되었다. 그의 사후에 원고를 보관하던 출판인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바이런의 유족과 지인들, 그리고 변호사와 상의한 끝에 이 원고를 여러 증인 앞에서 벽난로에 집어넣어 불태워 버렸다. “별 내용 없었다.” 그 원고를 읽은 메리 셸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불타버린 원고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밤 이슥토록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마음 아직 사랑에 불타고
달빛 아직 밝게 빛나고 있지만.

칼날은 칼집을 닳게 하고
영혼은 가슴을 해어지게 하는 것이니
마음도 숨돌리기 위해 멈춤이 있어야 하고
사랑 자체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리.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달빛을 받으며.

 

 

알바니아 민속의상 차림의 바이런. 그의 출세작인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경험이 투영된 작품으로, 이국적인 배경에서 자유와 반항의 정서를 열정적인 언어로 서술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대의 인기에 비해 오늘날은 통속적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슴에서 우러난 솔직한 표현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바이런만의 매력으로 여겨진다.

인간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적 인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 작가였지만, 오늘날 바이런은 문학사에서나 대중의 인기에서나 동시대의 다른 시인에 비해서는 덜 주목을 받는 편이다. 당시에는 그보다 인기가 못했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키츠(John Keats)나 셸리가 새로운 시도와 혁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불멸의 지위에 오른 반면, 신작이 나왔다 하면 초판본 수만 부가 며칠 만에 동났던 바이런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로 여겨진다. 비록 생애는 누구 못지않게 파격적이었지만, 시를 짓는 데에서는 바이런이야말로 오히려 보수적 성향이었던 까닭이다.

기교에서도 바이런은 피상적이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언어의 압축성이나 비유의 신선함에서도 아주 돋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특유의 감상주의와 장광설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사뭇 호소하는 바가 컸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의 판단 기준이 바뀌자 오히려 외면 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시는 그 솔직함, 정열, 위트에서 여전히 남다른 매력을 지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불필요한 유리구슬이 이따금씩 섞인 고급 진주 목걸이,” 그것이 바로 바이런의 시였다.

“나는 절대로 글을 고쳐 쓰지 않는다.” 바이런은 퇴고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시가 되었다고 스스로도 회고했다. 바이런의 시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닌 매력은 바로 그 단순성과 생생함에 있다. 선이 굵다는 것, 즉 섬세하지 못한 대신에 번역을 거쳐도 의미가 많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도 강점이다. 바이런의 시가 당대에 영국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비평가보다는 오히려 대중에게서 더 인기를 얻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늘날 바이런의 시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이른바 ‘바이런적 주인공’(Byronic hero)이다. 겉으로는 무모하고 난폭하지만, 속으로는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과거를 떠올릴 때면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우울함에 사로잡히는 남자 주인공,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고독한 늑대 스타일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은 바이런의 창조물이다. 물론 ‘바이런적 주인공’이 실존 인물 ‘바이런’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독자들은 이 두 가지가 똑같다고 생각해서 더욱 열광해 마지않았다.

대중의 열광과는 반대로 바이런을 ‘악마’로 지칭한 비판자도 있었다. 가령 워즈워스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으며, 콜리지(Samuel Coleridge)는 “악마[사탄]적”이라고 불렀으며, 사우디(Robert Southey)는 “악마[사탄]파 시인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었다. 인습타파주의자인 바이런은 오히려 이런 악명을 즐긴 듯하다. 그의 발언이나 작품에는 실제보다 과장해서 자신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위악적인 태도가 종종 드러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합리성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바이런을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바이런의 모순적인 기질은 정신의학 쪽에서도 관심의 대상이다. 조울증 전문가인 케이 재미슨은 바이런에 관한 문헌 자료를 근거로 그를 조울증 환자로 진단한다. 즉 바이런이 일종의 열광 상태에서 써내려간 걸작 시들은 ‘조증’ 상태의 발현이며, 종종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온 분노와 기행은 ‘울증’ 상태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울증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질환임을 고려해 보면 일리는 있다. 물론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모두가 바이런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매순간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어서, 어느 하나도 오래 가지 못한다. 나는 선악이 묘하게 혼합된 존재여서, 나를 묘사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바이런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 만든 것은 단순히 정신적 혼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그의 발언이야말로 오늘날 ‘바이런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내가 언제나 변치 않고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강한 애정이고, 또 하나는 위선에 대한 혐오이다.”

 

바이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왼쪽)와 그의 아내인 메리 고드윈(오른쪽).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두 사람은 한동안 바이런과 머물며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셸리 부부와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폴리도리가 한 자리에 모인 결과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과 [흡혈귀]가 탄생했다는 후일담이

프랑켄슈타인, 흡혈귀, 그리고 바이런

 

바이런의 영향 가운데서도 가장 크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흥미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셸리 부부와 함께 스위스의 제네바에 머물던 1816년 6월 14일, 장마가 계속되자 며칠째 밖에 나가지 못한 바이런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괴기 소설을 하나씩 쓰자고 일행에게 제안한다. 셸리의 부인 메리 고드윈은 한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시체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썼고, 이때의 초고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바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1818)이 되었다.

바이런은 흡혈귀에 관한 내용을 다룬 소설을 조금 쓰다가 말았는데, 마침 그곳에 함께 머물던 그의 주치의 존 윌리엄 폴리도리(John William Polidori)가 그 소재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나름대로의 개작을 시도했다. 바이런을 연상시키는 흡혈귀 ‘루스벤 경’을 주인공으로 한 폴리도리의 소설 [흡혈귀](1819)는 훗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1897)로 완성되는 이 장르의 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 문학뿐만 아니라 공포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르 가운데 하나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참고문헌: G. G. 바이런, [라오콘의 고통], 1991; [순례], 1997; 헨리 리 토머스 외, [위대한 시인들], 1983; M. 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II], 1984; 매슈 아놀드, [삶의 비평], 1985; 케이 재미슨, [천재들의 광기], 1993; 앤드루 샌더즈, [옥스퍼드 영문학사], 2002; 토마스 메드윈, [바이런], 2004

글쓴이​: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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