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완적(阮籍, 210-263) |
국가 |
중국 |
분야 |
시 |
해설자 |
심우영(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 |
<영회시> 82수는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완적(阮籍, 210∼263)의 작품이며, 중국의 고전 시가 중에서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선진 시대에 ≪시경≫이 탄생해 중국의 정통 시가 문학을 출발시켰다고 한다면, <영회시> 82수는 이보다 약 8세기가 지난 위진 교체기에 5언 신시체로 나와 최고의 서정시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한대 악부시와 <고시 십구수> 그리고 조식(曹植)을 비롯한 건안 시가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완적이 <영회시> 82수를 지은 것은 그의 나이 45∼46세 즈음부터 53세로 사망하기 전까지였다. 대략 255년부터 263년 사이에 지은 작품들이다. 그는 후한 말 전쟁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을 무렵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완우(阮瑀)는 조씨(曹氏) 부자와 건안 문학을 선도한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220년에 위나라가 건국된 후 2년이 채 못 되어 완우가 사망했지만, 완적은 당시 명문대족이었던 완씨 가문의 일원으로 위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49년 사마의(司馬懿)가 일으킨 가평(嘉平) 정변으로 인해 조상(曹爽)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 세력은 힘을 잃고 사마씨로의 권력 이동이 급물살을 탔다. 정권 회복을 위한 조씨 집단의 투쟁이 수년간 지속됐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사마씨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당시 명사로 이름을 떨치던 완적은 어쩔 수 없이 여러 관직을 거치지만, 정권 찬탈과 명교를 빙자한 그들의 전횡에 불만이 누적되어 극심한 심리적 공황 상태를 맞았다. 이리하여 도피적 처세관으로 청담 현학을 일삼는 죽림칠현의 일원이 됐고, 반예교적 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신선 세계를 동경했다. 이 시기가 대략 254년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완적의 <영회시>는 모두 95수인데, 이 중 5언시가 82수이고, 4언시가 13수다. 여기서는 완적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5언시 82수를 대상으로 했다. <영회시>의 ‘영회’는 ‘마음에 품은 바를 노래한다’는 의미다. <영회시>는 일정한 시기에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평소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지은 작품이다.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고통스러운 삶과 고독한 정회를 묘사했다.
둘째, 권력 찬탈과 변절자에 대해 풍자했다.
셋째, 노년기 인생 역정과 불안한 여생을 서술했다.
넷째, 은둔 생활과 신선 세계를 추구했다.
<영회시> 82수의 최대 특징은 비흥(比興), 상징, 용전(用典) 등의 수법이 자주 사용되어 시인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시의 난해성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 자체의 시작 수법에서 기인했다.
둘째, 복잡 미묘한 시인의 심리적 갈등이 상식을 뛰어넘었다.
셋째, 창작 배경이나 정황이 기타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판본에 따라 다른 글자가 많아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종영(鍾嶸)이나 이선(李善) 등 역대 수많은 비평가들이 <영회시> 82수를 지극히 난해한 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런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청일현원(淸逸玄遠)의 미를 구사했다는 점과 그의 철리(哲理)와 정사(情思) 그리고 의상(意想)이 적절하고 풍부하게 두루 포함됐다는 점은 또 다른 예술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회시> 82수는 일찍부터 비평가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종영의 ≪시품≫에는 상품(上品)에 올라 있고, 소명태자의 ≪문선≫에는 17수가 선록되었으며, 명 왕세정(王世貞)과 청 왕부지(王夫之), 방동수(方東樹) 등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쳐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좌사(左思)의 <영사(詠史)> 8수,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22수, 유신(庾信)의 <의영회(擬詠懷)> 27수, 진자앙(陳子昻)의 <감우(感遇)> 38수,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82수 등의 연작시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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