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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으로 자살한 구쏘련 시인 - 마야꼬프스끼
2016년 11월 26일 22시 06분  조회:4391  추천:0  작성자: 죽림
마야꼬프스끼의 삶과 죽음과 시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 마야꼬프스끼 Vladmir Vladimirovich Maiakovskii는 1893년 7월 19일, 그루지야 R따이스 근처의 바그다지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아버지 블라지미르 꼰스딴찌노비치와 어머니 알렉산드라 알렉세예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림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여성으로 어린 블라지미르와 두 손위 누이들의 양육에 전념했다.
마야꼬프스끼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에게서 읽고 쓰기를 배웠다. 1902년 가을에는 중등학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꾸따이스로 갔으며, 2년 뒤에 꾸따이스 중학교 예비반에 입학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독서에 남다른 취미를 나타내었다고 전재힌다. 쥘 베른 류의 환상소설, 『돈 키호테』등은 그가 당시 애독한 소설이었다. 이 무렵엔 또한 그림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가족의 친지가 미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 날 모스끄바에서 공부하고 있던 누이가 몇 편의 혁명시를 가져와 그에게 읽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당시 러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물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5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학업에만 전념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 시위에 가담하였다. 고작 12세에 불과했던 그는 사회주의 문학을 학습하는 마르크스주의 서클에도 참여하였다.
1906년 2월 19일, 부친이 패혈증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마야꼬프스끼 가(家)는 가산을 정리하여 머스끄바로 이주했다. 그는 모스끄바 중학교의 제4학년으로 편입했다. 어머니가 받는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온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마야꼬프스끼는 그림을 그리거나 부활절 달걀에 색칠을 하거나 목공예품에 무늬를 새기거나 함으로써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908년 초에 그는 직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스뜨로가노프 상업 미술 학교 예비반에 입학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볼셰비끼 파에 가담했다. 얼마 후 그는 당의 비밀 인쇄소에서 체포되었으나 단기 구류를 거친 뒤 풀려났다. 1909년 초에 그는 다시 체포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해 7월에 세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는 부뜨이르스까야 형무소 독방에 수 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마야꼬프스끼의 생애 중 이 대목이야말로 소비에뜨 전기 작가들이 거의 언제나 열광적으로 강조해 온 부분이다. 즉 <세 번의 체포와 독방 구금>은 모든 마야꼬프스끼 전기에서 핵심적인 대목으로 등장한다. 사실, 아직 미성년자이던 시기에 <세 번씩>이나 체포되었다는 사실보다 시인의 <투쟁적> 생애를 더 웅변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체포가 갖는 정작 중요한 의의는 다른 데 있다. 대부분의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의 경우처럼(도스또예프스끼를 상기해 보라!) 마야꼬프스끼에게도 감옥은 인생 행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바이런, 셰익스피어, 똘스또이 등을 탐독했으며 시를 창작하고 싶다는 의욕을 체험했다. 그가 정치 활동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낀 것도 또한 감옥에서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이때 자신의 재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의 결여를 불안하게 의식하였다. 책에서 배운 이데올로기를 전단에 박아 뿌리고 다니는 일보다 좀더 창의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그는 정치 활동은 일단 접어두고 정식으로 예술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이러한 회심의 상태에서 감방 문을 나선 마야꼬프스끼는 당대의 저명한 화가 쥬꼬프스끼 Zukovskii에게서 미술 수업을 받고 께린 Kelin의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준비 단계를 거친 후 1911년 9월, 빠스쩨르나끄 B. Pasternak의 아버지가 강의를 하고 있던 모스끄바 회화 조각 건축 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14년에 퇴교당할 때까지 거기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아방 가르드 예술가 다비드 부를류끄 David Burliuk와 침교를 맺었다. 부를류끄와의 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마야꼬프스끼의 장래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미래인들 budetliane>이란 이름의 혁신적인 화가와 시인들의 그룹을 조직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예술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1912년, 마야꼬프스끼는 훗날 자전적 수기에서 <나의 진정한 스승>이라 부르게 될 부를류끄에게 자신이 쓴 두 편의 시를 읽어 주었다. 친구의 반응이 두려웠던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거라고 말했지만 친구는 즉시 저자가 마야꼬프스끼임을 간파했고, <자네는 천재야>라고 탄성을 질렀다. 마야꼬프스끼의 말을 빌면 <그날 밤, 나는 전혀 뜻밖에도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부를류끄와의 우정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1920년에 그가 러시아를 떠남으로써 중단되었다. 부를류끄는 나중에 뉴욕에 정착하였다. 부를류끄에게 시를 읽어주었던 1912년 마야꼬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최초로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으며 또 유명한 카페 <길 잃은 개>는 아흐마또바 A. Akhmatova, 블록 A. blok 등 당대의 문인, 예술가들의 집결지이자 일종의 사교장이었던 카페로 당시 이곳에 등장했음은 예술계에 데뷔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마야꼬프스끼가 화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1910년대 초엽은 러시아 예술계에 미래주의 futurizm가 뿌리내리던 시기였다. 흔히 문학사가들은 1910년을 러시아 시사(詩史)의 한 전환기로 간주한다. 그 해를 기점으로 그때까지 지배적인 사조였던 상징주의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대신 아끄메이즘 akmizm과 미래주의가 반(反)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신예 사조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2년 뒤 러시아 시는 이미 그 두 파벌 간의 대립이라는 국면에 도달해 있었다. 아끄메이즘이 상징주의 시의 철학성, 종교성, 그리고 무절제한 음악성 대신 언어와 사상의 균형, 절제, 조화를 추구했다면 미래주의는 훨씬 호전적으로 상징주의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상징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러시아 문학 전체를 낡은 소시민 근성에 젖은 문학이라 일괄 부정하고 시어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혁신을 주창했다. 부를류끄, 마야꼬프스끼, 끄루초느이흐 A. Kruchonykh, 흘레브니꼬프 V. Khlebnikov 등이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적 취향에 따귀를 Poshchechinu obshchestvennomu vkusu」(1912)은 제목에 버금하는 과격한 어조로 <현대의 기선에서 뿌쉬낀과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를 내던져버리자>라고 외침으로써 즉각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동명의 연감에는 마야꼬프스끼의 첫 번째 시 두 편 「아침Utro」과 「밤Noch」이 실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마야꼬프스끼는 미래주의의 주요 시인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미래주의 동지들과 더불어 러시아 곳곳을 순회하며 마치 광대패처럼 기괴한 옷차림과 기이한 행동으로 <고상하고 점잔빼는 부르주아 소시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마야꼬프스끼가 당시 즐겨 입었던 샛노란 재킷은 미래주의 의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태로 말미암아 그는 부를류끄와 함께 회화 조각 건축 전문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제대로 된 고등 교육>에 대한 시인의 염원은 이렇게 하여 다시 좌절되었다.
그러면 미래주의자들이 기존의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 제시하려 했던 문학은 어떤 것이었나. 러시아 미래주의는 흔히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비교되곤 한다. 후자가 주로 마리네티 F. Marinetti의 <기계미학>을 모토로 현대성modernity 즉, 자동차와 도시와 기계 문명을 내용의 차원에서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면 전자는 근본적으로 형식의 혁신성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보다도 시어(詩語)의 개편을 자신들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 그들에 의하면 종래의 시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에 편향되었으므로 시어의 소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소리야말로 시의 유일한 재료이며 동시에 시의 테마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를 그 자체로서 실재적이고 순수한 시로 체험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명제하에 흘레브니꼬프는 <의미를 초월한 언어>란 뜻의 <자움 zaum>을 발명하고 또 자움에 입각한 시를 썼다. 끄루초느이흐 또한 거기에 합세하여다. <자움>은 그야말로 아무 뜻도 없는, 순수하게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신정 언어이며 흘레브니꼬프는 그것을 자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소리 연상에 의해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독립적인 말 samobitoe>이라 명했다. 그리고 1913년에 끄루초느이흐와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문 「말 그 자체 Slovo kak takovoe」에서 <우리 미래주의 시인들은 정신보다는 말에 관해 훨씬 많이 생각한다. 체험이 아닌 말 그 자체에 의해 살아가자>라고 선언했다.
말에 대한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회화 영역의 큐비즘과 일맥 상통한다. 큐비스트들이 객관적인 현상의 모사를 거부하고 사물들의 내적인 관계를 캔버스에 표현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선과 면과 패턴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형식의 미를 창조하려 했던 것처럼 미래주의자들은 사상을 전달하는 말 혹은 이미지로서의 말이 아닌 순수하게 소리로만 이루어진 말을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성하려 하였다. 이렇게 기본적인 미학적 입장뿐 아니라 실질적인 시어의 실현 양상에서도 큐비스트와 미래주의자들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큐비스트들의 캔버스에 나타나는 해체된 오브제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시적 캔버스에 등장하는 단어와 시행과 연(聯)은 해체되고 분할되고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말의 소리는 선과 색채와 기하학적 도형에 상응하였다. 미래주의와 큐비즘의 관계는 사실 미래주의 시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대 회화와 관련을 맺었으며 또한 혁명 전 한동안 자신들을 <큐보 미래주의자>라 부른 사실, 마야꼬프스끼를 비롯한 그들의 대부분이 혁명 후에도 그래픽 아트에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등에서도 명백해진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는 흘레브니꼬프가 창시한 <자움>에는 거의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시어의 창조적 잠재력에 대해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시에서는 소리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를 완전히 초월한 순수하게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어는 그에게 관심 밖이었다. 그가 창조하려 했던 것은 새로운 의미로 충만된 말이었지 아예 의미를 결여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다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큐비즘의 미학이었다. 그는 초기 시에서 큐비스트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의 기법을 언어적 장치를 통해 시적 공간에 수용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작품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후기의 정치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시어를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미래주의자들의 의도는 그들이 선택한 어휘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그들은 고의로 천박하고 저속한 언어, 그때까지는 고상한 장르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비어(非語)를 도입하였다. 시의 형식이 해체되고 굴절되어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지듯이 시의 의미론도 <아름다움>의 개념에서 벗어나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를 놀려주기 위해 몸에 걸친 외설스러운 의상처럼 그들의 언어 또한 조야하고 야비하고 외설스러웠다. 그것은 거리의 언어였고, 공장의 언어였으며, 노동자와 매춘부와 상인들의 언어였다. 그것은 또한 먼 산간 벽지의 사투리였고, 사투리와 <자움>을 결합한 신조어였다.
미래주의 시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익명성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명예는 다른 모든 구습처럼 부르주아의 유산이므로 폐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저자를 명시하는 것은 개인의 명예를 추구하는 소치이므로 예술가는 절대로 작품의 저자를 명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미래주의자들이 익명으로, 혹은 집단의 이름으로 출간한 작품에서 개인으로서의 시인은 설 자리를 잃고 개인으로서의 시인의 감정, 시인의 전기적 삶 등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주의 시의 저자는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의 경우는 나중에 다시 논하겠지만 거의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그의 시학과 미래주의 시학은 뚜렷이 구분된다.
미래주의의 이러한 특징들, 즉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한 거부감, 시어의 하양적 재창조, 집단 창작의 개념 등은 당시 러시아를 휩쓸고 있던 혁명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점차 문단을 주도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물론 미래주의와 볼셰비끼는 각기 다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표면상 양자가 주장하는 슬로건의 유사성 때문에, 1910년대의 러시아 미래주의는 자칭 타칭 혁명의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미래주의의 중심 시인이었던 마야꼬프스끼는 당연히 혁명의 시인이 되었다. 그가 소시적에 <세 번>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이 열광적인 혁명 시인에게 빛나는 훈장처럼 붙어다녔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다시 마야꼬프스끼의 초기 창작 활동으로 돌아가자. 마야꼬프스끼는 「대중적 휘향에 따귀를」에 두 편의 시를 선보인 뒤 계속해서 다른 연감에 몇 편씩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의 최초의 시집 『나 la』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말이 시집이지 사실 그것은 석판으로 인쇄된 팜플렛 두께의 인쇄물로 거기에는 네 편의 시가 본문과는 관계없는 체끄르인 V. Chekryin의 그림과 함께 연작 형태로 실린 것이 고작이다. 이 시집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 제목에 있다. 시인은 첫 시집에 <나>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시적 우주에서 중앙에 자리잡을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임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쓰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임을 직관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첫시집의 예언대로 마야꼬프스끼의 거의 모든 시는 혁명을 다룬 시건, 레닌의 생애를 묘사한 시건, 언제나 마야꼬프스끼 개인의 사랑과 고독과 절망을 주선율로 삼는다. 시집 『나』에서 마야꼬프스끼가 그리고 있는 자아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처럼 고독하며> 그것은 <성상을 뛰쳐나가 그리스도가 남겨 놓은 공간에 절름발이 화가인 세월이 그려넣어줄 성인의 모습>과 동일시된다. 시인의 고독과 역사 속에서 겪게 될 수난은 이때부터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에 마야꼬프스끼는 <나>를 토대로 운문 드라마를 한 편 썼는데 그것은 첫시집보다도 더 마야꼬프스끼의 자아 중심 성향을 강조하는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이며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세계를 향한 시인의 상실감과 분노와 고독이다. 거리가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온갖 불구자와 기형아들이 주인공 <시인>에게 자기의 눈물을 바치고 시인은 자진해서 그들의 눈물을 모은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에서 마야꼬프스끼는 세상의 고뇌를 한몸에 지닌 비극적 영웅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마야꼬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의 루나 빠르끄 극장 무대에 이 드라마를 올렸다. 주인공 역은 자기 자신이 맡아 했다. 그는 로마 시대의 흰색 의상과 월계관을 쓰고 등장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연기했다. 드라마는 대체로 <스캔들> 차원에서 받아들여졌지만 일부 관객은 주인공 역을 맡은 마야꼬프스끼의 강렬한 이미지에 깊이 감동했다. 상징주의의 거두 알렉산드르 블록 A. Block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1914년 초터 마야꼬프스끼는 혁명 전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지를 입은 구름」의 집필에 착수했다. 서정성과 서사성을 겸비한 장시(러시아 문학에서는 흔히 포에마란 장르의 이름으로 불린다)인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랑과 혁명과 종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시의 주인공 <나>는 마야꼬프스끼 자신과 동일시되는데 그는 진부한 세계와 무정한 연인에게 버림받은 천재 시인으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모티프-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와 사회적 모티프-혁명-가 지그재그로 얽혀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청년 마야꼬프스끼의 <광기의 에메랄드>와 <육체에 이름을 지어주고 영혼을 소생시키는 황금의 언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다가올 혁명의 <구세주>를 앞질러 선포하는 <여느 복음서의 열세 번째 사도>이며 <골고타>를 순회하며 시를 낭송하다 <자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구세주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폐병쟁이 밤이 거리의 더러운 손으로 뱉어버린 가래 같은> 존재이며 <매춘부의 기둥 서방>이며 <카드 사기꾼>이다. 예측 밖의 비유로 가득찬 이 시에서 마야꼬프스끼가 그리는 시적 자아의 이율배반적 모습은 인간 마야꼬프스끼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야꼬프스끼는 후리후리한 키에 운동 선수 같은 체격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눈빛과 비극에 출연한 배우 같은 우렁하고도 꾸민 듯한 목소리에는 상대방을 사로잡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병적일 정도의 민감함과 다치기 쉬운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당시 모스끄바의 카페에서 마야꼬프스끼와 숙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빠스쩨르나끄는 이 악명 높은 러시아 시단의 <무서운 아이>의 강렬하고 현란한 외모의 껍질 속에 숨겨진 불안과 자기 불신과 면역 안 된 슬픔의 정서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극도의 수줍음을 감추려는 일종의 위장이었다. 그는 어쩌면 시의 제목처럼 <바지를 입은 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야꼬프스끼는 계속해서 세 편의 장시를 썼다. 사랑의 광기와 고통을 주제로 한 「등골의 플루트 Fleita-pozvonochnik」, 제1차 대전을 소재로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그린 「전쟁과 세계 Voina I mir」, 그리고 시인의 죽음과 영원한 사랑의 주제를 결합시킨 장시 「인간 chelovek」은 모두 수작들로 간주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은 혁명 전 시기를 마무리짓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마야꼬프스끼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과 죽음을 구성적 모델로 삼는다. <마야꼬프스끼의 탄생>, <마야꼬프스끼의 생애>, <마야꼬프스끼의 수난>, <마야꼬프스끼의 승천> 등등의 소제목에 의해 세분화되는 이 시는 승천한 시인의 천국 생활과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지상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질투의 현세와 고통 없는 유토피아인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자아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 자아는 <천 년 사랑의 쇠사슬>을 절그렁거리며 <상상도 못 할 사랑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인 채 화형대에 서 있는> 비극적인 전설의 인물로 묘사된다.
혁명 전 시기의 마야꼬프스끼의 생애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은 시학자 브릭 O. Brik 부부와의 만남이다. 브릭은 큐보 미래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마야꼬프스끼의 「바지를 입은 구름」과 「등골의 플루트」를 개인적으로 출판하여 그의 재능을 인정받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평생 동안 계속된 두 사람의 우정은 또한 러시아 형식주의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1916년에 결성된 「시어 연구회 Opoiaz」는 모스끄바 언어학회와 더불어 형식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는데 마야꼬프스끼는 브릭의 집에서 열리는 오뽀야즈 회합에 종종 참가하여 시 형식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브릭의 부인 릴리 또한 마야꼬프스끼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코코 샤넬을 연상시키는 이 미모의,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지성을 겸비한 여성은 마야꼬프스끼가 일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나중에는 <마야꼬프스끼의 애인>으로 훨씬 더 유명해진 릴리를 마야꼬프스끼는 언제나 <한 식구>로 대했다. 릴리와 알게 된 후에도 마야꼬프스끼가 다른 여성에게 연정을 느낀 적은 몇 번 더 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만큼 강렬하고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그의 시에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격렬하고 슬픈 사랑은 그녀를 향해 외치는 시인의 회한에 찬 고백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이 시기에 장래의 유명한 시(詩) 로만 야꼽슨 Roman Iakobson과도 알게 되었다. 야꼽슨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계기로 마야꼬프스끼는 「모스끄바 언어학회」에 가담하였다. 1915년 몇 명의 모스끄바 대학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언어학회는 형식주의의 산실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학술적으로는 전문가라 할 수 없었지만 언어학회 모임에 자주 출연하여 야꼽슨 등이 발표하는 최근의 시 이론, 평론 등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시인과 시학자의 우정은 러시아 미래주의와 형식주의의 나란한 발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혁명을 고대하였다. 그는 혁명이 과거의 모든 오물을 깨끗이 청소해 주리라 믿었다. 그가 경멸했던 진부한 문화의 찌꺼기는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제거될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는 혁명이 일어나자 아무런 회의도 의심도 없이 자신을 혁명의 품에 던졌다. 사실, 혁명과 내란의 그 돌풍 같은 시절에 마야꼬프스끼와 소요로 들끓는 거리는 일심 동체인 듯 여겨졌다. 문단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혁명이라고 하는 대변동으로 인해 다소 그 모습이 변해 있었다. 대부분의 혁명 전 작가들은 망명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냉담했으며, 신인들은 아직 배출이 안 된 상태였다. 이러한 공백을 메워준 것은 몇 명의 혁신적 문인들이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단연 마야꼬프스끼였다. 혁명 이전의 큐보 미래주의자들은 이제 그 이름을 <공산주의 미래파 komfuty>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신 정부의 문화 및 교육 부문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다. 더욱이 초대 교육 인민 위원히 의장이었던 루나차르스끼가 정책적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었기 때문에 혁명 직후의 몇 년간은 그야말로 미래주의의 천국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꼬뮨 예술 Iskusstvo kommuny』을 창간했고 정부는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아방 가르드 예술과 마야꼬프스끼의 시, 형식주의 연구 논문 등이 『꼬뮨 예술』의 지면을 장식했다. 창간호에서 브릭은 <신 예술은 과거의 예술을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라고 선언했으며 필진은 그러한 선언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호전적인 예술의 이론과 실천을 꾀하는 데 주력했다. 경제 정치 영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발맞추어 예술 영역에서 미래주의 독재가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제 미래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동의어처럼 되었다.
이 시기의 마야꼬프스끼는 창작과 노동은 결국 같은 것이며 예술은 인민 대중에 대한 봉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예술 좌익 전선 LEF』(1923)을 창간했다. 대부분의 큐보 미래주의자들과 빠스쩨르나끄, 바벨 I. Babel 같은 소설가, 형식주의 비평가, 브릭, 또마셰프스끼 B. Tomaschvskii, 띠냐노프 Iu. Tynianiv, 에이헨바움 B. Eikhenbaum, 영화감독 에이젠쉬쩨인 S. Eisenstein 및 여러 아방 가르드 화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통일되어 있진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과거 문화의 청산, 새로운 혁명적 현실을 위한 새로운 예술의 창조, 형식의 추구 등을 골자로 했다. 마야꼬프스끼를 비롯한 레프 동인들은 새로운 형식이 곧 부르주아의 잔재를 말소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에게 봉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마야꼬프스끼는 레프를 통해 활동하는 한편 혁명의 이데올로기에 헌신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업에 기꺼이 자신을 던졌다. 그는 자랑스럽게 <러시아 통신국 ROSTA)에서 일하면서 수천 장의 포스터, 표어, 슬로건, 선동시 등을 제작했다. 이 대목 역시 소비에뜨 전기 작가들이 좋아하는 대목이다. 그의 표어들은 국영 백화점의 값싸고 품질 좋은 전구 선전에서 물을 반드시 끓여 먹자는 공영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한 표어들은 오늘날 우습게 들리지만 그의 언어적 혁신성과 창조력이 심지어 그러한 잡다한 <작품>에서까지 드러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마야꼬프스끼는 또한 수십 개 신문 잡지에 정치성 짙은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그의 글은 소비에뜨 사회의 모든 시사적 문제를 반영했다. 혁명 후 마야꼬프스끼가 일련의 정치시와 평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비난했던 대상은 신흥 관료 계급이었다. 신흥 관료들은 혁명의 순수성을 녹슬게 하고 새로운 사회를 다시 진부한 일상성으로 되돌리는 주범이었다. 문학 관료 또한 마야꼬프스끼의 지탄을 받았다. <아카데미 배급>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은 혁명 전에 마야꼬프스끼가 타도하자고 외쳤던 전(前) 시대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속물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재무감독관과의 시에 관한 대화 Razgovor s fininspektorom opoezii」(1926)에서 그들은 <민완가> <책략가> <서정 시인이란 이름의 내시>라고 불렀다. 이 시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에서 마야꼬프스끼가 강조한 것은 새로운 사회에서 시인은 곧 노동자이지만 시인의 노동과 육체 노동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라듐을 채취하듯 <시1그램을 채취하기 위해 1년 동안 수고해야 하며>, <한 개의 낱말을 위해 천 톤이나 되는 언어의 광석을 소비해야 한다>, <한 개의 낱말을 위해 천 톤이나 되는 언어의 광석을 소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낱말이 탈 때 나오는 열기는 수백만의 가슴을 천 년 동안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그 어떤 노동과도 비교할 수 없이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는 시는 관료 제도의 간섭이나 시인 자신들의 정신적인 타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마야꼬프스끼의 주장이었다.
혁명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려는 마야꼬프스끼의 문학적인 노력은 1918년,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전위 감독 메이에르홀드 V. Meierkho'd의 연출로 초연된 「미스쩨리야 부프 Misteriia buff」에서도 드러난다. 중세 신비극과 저급한 코미디를 결합한 이 풍자극은 볼셰비끼의 승리와 공산주의 천국을 찬양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드라마는 노골적인 정치적 모티프와 선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마야꼬프스끼의 우주적 상상력과 현대적 감각 덕분에 문학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혁명을 찬양하는 일련의 시와 장시를 썼는데, 그 중에서 「150 000 000」(일억 오천만, 1921)은 출판에 따른 에피소드 덕분에 더욱 유명하다. 「150 000 000」은 미래주의의 <익명성> 원칙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이다. 마야꼬프스끼는 이 시의 저자는 자신이 아니라 일억 오천만의 인민, 일억 오천만의 <이반>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주장을 웅변적으로 강조하기 위핸 제스처로 표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한 채 출판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작품임은 누가 보아도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그러한 제스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0 000 000」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대결을 의인화시킨 작품으로 전자는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에게서, 후자는 일억 오천만의 러시아 인으로 구성된 영웅 이반에게서 각각 구현된다. 이 두 이미지에는 인간적 특성이나 사실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윌슨이 거주하는 시카고의 궁궐, 바다 건너 쳐들어오는 이반, 양자의 격투, 이런 것들은 모두 러시아 민중 사이에서 구정되어온 <브일리나>(구전 영웅시)의 차원에서 그려진다. 과장된 주인공의 이미지, 민담적 어휘, 브일리나를 모방한 리듬 등은 이 시를 초보적일 알레고리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전설과 신화의 수준에서 의도적으로 변형된 문학 작품으로 이해해야 함을 말해 준다. 「150 000 000」은 그야말로 <피투성이 혁명의 일리아드>요 <굶주린 세월의 오딧세이>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선동적이고도 정치적인 작품 외에도 그는 아름다운 서정적 장시도 썼다. 「나는 사랑한다 Liubliu」(1922)와 「이것에 관하여 Pro eto」(1923)는 「바지를 입은 구름」의 속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의 고뇌와 아픔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의 천재적인 언어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낸 이 탁월한 시들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는 이유에서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사랑의 무게로 <갈빗대는 휘어지고 새장 같은 가슴은 그만 터져버린> 시인, <달구어진 육체에 봄처럼 설레는 심장이 스무 개나 박힌> 시인, <사랑으로 부상당한> 시인-이는 분명 마야꼬프스끼 자신의 모습이었지만 신세대를 주도할 혁명적 시인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1924년 레닌이 죽자 마야꼬프스끼는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Vladirmir Il'ich Lenin」을 썼다. 4천 행에 달하는 이 대작은 훗날 마야꼬프스끼를 계관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데 톡톡히 기여했지만 국외에서는 지나친 정치성 때문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장중한 리듬, 과장 및 반복, 반어를 축으로 하는 무거운 수사적 장치 등, 모든 측면에서 18세기의 장엄 송시를 연상시키는 이 시에서 레닌은 인류의 운명에 예정된 구세주의 모습으로, 볼셰비끼 당은 지상 유일의 정권으로 각각 제시된다. 여기서 묘사되는 레닌의 일생이나 볼셰비끼 당사(黨史), 그리고 여러 등장 인물의 이미지는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 때문에 또한 종종 단점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가 의도한 것은 18세기의 시인 로모노소프 M. Lomonosov가 「뾰뜨르 대제 Petr Velikii」에서 그랬듯이 지도자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실 그러한 비난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의 지나친 정치성에 대한 비난 또한 같은 원리에서 반박될 수 있다. 어용 시인이 쓴 정치시의 차원에서 읽는다면 이 시는 한낱 조야한 선전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신화를 창조하려는 송시 작가, 그것도 뛰어난 장인 정신의 소유자가 쓴 헌시의 차원에서 읽는다면 이 시의 문학성뿐 아니라 장르 진화성의 의의까지 살아남게 될 것이다.
여리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레닌이 개인적으로는 마야꼬프스끼를 혐오했다는 점이다. 원래가 모더니즘이나 아방 가르드에 둔감했던 이 지도자는 마야꼬프스끼의 일부 포스터와 표어에는 만족했지만 그의 모든 예술 작품에는 넌덜머리를 냈다. 마야꼬프스끼가 낭송하는 「우리의 행진 Nash marsh」(1917)을 차마 끝까지 들을 수가 없어 레닌이 중간에 자리를 떴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150 000 000」도 레닌은 쓰레기 취급을 했으며 미래주의자들을 두둔하는 루나차르스끼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마야꼬프스끼가 창조한 레닌의 신화는 더욱 현실성 없는 하나의 비극적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레닌이 죽고 소비에뜨 사회가 점차 새로운 체제에 안주해 가면서 마야꼬프스끼의 삶은 고난과 모순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재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생산예술의 슬로건 하에 의욕적으로 출간되던 『레프』는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기울기 시작하더니 1925년에는 완전히 폐간되었다. 문단의 대세가 평범한 리얼리즘 쪽으로 기울고 대중의 취향도 시보다 산문 쪽으로 쏠린 것 등이 이유였다. 판매 부수가 날로 격감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출간을 계속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야꼬프스끼의 위상도 혁명의 내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예술 정책을 담당하는 인물들은 이미 미래주의에서 멀어져가고 있었고 공산주의 문학가, 극단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비평가들은 마야꼬프스끼의 <쁘띠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와 <형식주의>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혁명 전 마야꼬프스끼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독자들은 마야꼬프스끼의 일보 조야한 선동 언어에 노골적인 실망을 표명했다. 시인 만젤쉬땀 O. Mandel'shtam은 이 시기의 마야꼬프스끼가 <스스로 자신을 궁색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야꼬프스끼와 그의 미래주의 동지들은 이러한 상황을 만회해 보고자 『신예술 좌익 전선 Novyi LEF』(1927)을 조직했고 <사실 문학 literatura>, <사회적 소명> 등을 대안적 슬로건으로 들고 나왔다. 그것은 예술 창작이 신문 기사, 다큐멘터리, 여행기, 일기 등의 사실(事實)문학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예술거도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계급과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슬로건도 이미 어것난 궤도를 수정해주지 못했다. 브릭과 쉬끌로프스끼 등의 학술적으로 가치있는 논문이 실렸음에도 부구하고 『신 예술 좌익 전선』은 1928년 말에 폐간되었다. 당도 독자층도 이제 미래주의의 편이 아니었다. 마야꼬프스끼는 고조되는 갈등 속에서 <혁명 전선 REF>(1929)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외부에서 가해지는 비난과 압력, 자기 내부에서 일고 있는 회의와 절망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는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는 대작 「좋아! Khorosho」(1927), 수 편의 영화 대본, 그리고 희곡 「빈대 Klop」(1928)와 「목욕탕 Bania」(1930)을 썼다. 이 희곡들은 혁명의 본질을 더럽히는 관료와 신흥 속물 계급을 가차없이 비난하는 풍자극으로 메이에르홀드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으나 당의 비난을 받아 한동안 상연이 금지되었다. 「좋아!」는 임시 정부 시절부터 동궁 습격까지의 혁명사와 내란, 외국 군대와의 투쟁, 그리고 이 모든 사건 뒤의 안정된 소비에뜨 사회의 모습을 몽따쥬 형태로 기술한 서사시로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과 함께 마야꼬프스끼의 정치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마야꼬프스끼는 이 시를 1927년 전 소연방 공산당 모스끄바 위원회 <붉은 홀>에서 낭독했으며 이후 몇 번인가 더 대중 앞에서 낭독할 기회를 가졌다.
마야꼬프스끼는 192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시 낭송고 강연회 등을 가졌으며 종종 해외 여행을 다녔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했으며 1925년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혁명 후에 씌여진 일부 시는 빠리의 아름다움, 멕시코의 인정, 뉴욕의 위용 등 해외 여행에서 받은 인상들을 토대로 하였는데 특히 괄목할 만한 작품은 「대서양 Atlanticheski okean」(1925)과 「브룩블린 다리 Bruklinski most」(1925)를 비롯한 일련의 <미국에 관한 시들>이다. 미국 방문 전에 씌어진 「150 000 000」에서 보여주었던 반미 감정은 이 시들에서 다소 약화되었지만 미국의 인종 차별과 황금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1930년 2월 1일, 마야꼬프스끼는 창작 20주년 기념 전시회에 출연해서 장대한 구상으로 시작한, 그러나 결코 완성하지 못하게 될 장시 「목청을 다하여 Vo ves' golos」의 서문을 낭독했다. 이 서문은 비록 보다 긴 시의 서두에 불과하지만 마야꼬프스끼의 마지막 자기 변론이자 일종의 <시적 기념비 Exegi Monumentum>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자신을 <혁명의 청소부요 물지게꾼>, <선동가요 소리꾼>, <현수막의 깔깔한 혀로 폐병쟁이의 가래침을 핥은 시인>이라 소개하면서 자기도 선전 선동시는 싫증이 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가 <힘겹게 시간의 암석을 뚫고> <낡았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무기처럼> 먼 훗날까지 살아 남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벼랑 끝에 선 예술가가 시대를 향해 <목청을 다하여> 외치는 절규처럼 처절하고 장엄하게 들린다.
마야꼬프스끼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비에뜨 사회에 적응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1930년 2월 평소에 경멸해 마지 않았던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RAPP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스처도 이미 지나간 마야꼬프스끼의 시대를 되돌려주지 못했다. 점점 깊어가는 소외감과 불안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고뇌, 자신의 창작에 대한 불만까지 겹쳐 1930년 4월 14일, 마야꼬프스끼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그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자살은 순전히 자기 탓이며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노라는 말을 남겼다. 친지들에게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소비에뜨 정부에게는 유족(어머니와 누이들과 릴리 브릭을 명시했다)을 보살펴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자살은 소련 전체와 그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빠리의 망명 문인들까지 두 파로 나뉘어 그의 자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아무도 마야꼬프스끼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 만만하고 삶에 대한 사랑과 의욕으로 넘쳐 있었던 것이다. 1925년 예세닌 S. Esenin이 정맥을 자른 피로 유서를 쓰고 자살했을 때, 마야꼬프스끼는 그의 죽음을 슬픔에 찬 어조로 비난했었다. 그에게 자살이란 용서할 수 없는 비겁한 행위였다. 그리하여 예세닌이 남긴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 <이 세상에서 죽은다는 일은 새로울 게 없지만 산다는 것 또한 더 새로울 건 없다>를 빗대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은 어렵지 않다.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어렵다>라고 응수했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자살은 더욱 더 이해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과로로 인한 신경 쇠약이 원인이었다고 발표되었고 사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실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러시아 룰렛 게임에서 졌기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나왔다. 소비에뜨 정부는 혁명과 동일시되었던 천재 시인의 자살에 당황했으며 어떻게든 사태를 축소시키고자 노력했다. 죽음의 원인이야 어찌되었건 그의 죽음으로 러시아 큐보 미래주의는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마감했으며 혁명 이후 그렇지 않아도 궁색해지고 있던 러시아 시는 더욱 초라해졌다.
그동안 마야꼬프스끼는 소련의 계관 시인으로, 공산주의 혁명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공식적인 추앙을 받아왔다. 그는 뿌쉬낀, 네끄라소프, 예세닌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는 시인이며 그의 작품은 러시아 내의 여러 공화국 언어는 물론 무수한 외국어로 번역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마야꼬프스끼 숭배는 그의 자살 후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작은 계기를 통해서 시자괴었다. 1935년, 릴리 브릭은 스딸린에게 마야꼬프스끼의 위치를 승격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브릭의 탄원에 감화를 받았는지 아니면 일순간의 변덕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스딸린은 탄원서의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브릭 동무의 말이 맞다. 마야꼬프스끼는 우리 소비에뜨 시대의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고 또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추억과 그의 작품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다.> 독재자의 이 몇 마디 말은 관료들에게 무시무시한 경고였고, 그때부터 마야꼬프스끼 추앙 운동은 전국에 산불처럼 확산되었다. 마야꼬프스끼의 동상이 세워지고 거리와 광장과 도서관과 극장에 마야꼬프스끼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작품은 문학 교과서의 필수 부분이 되었고 문학 연구가들과 전기 작가들은 <범죄자>의 오명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그의 생애를 기록하고 그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의 혁명성과 선동성은 확대되고 그의 형식주의적, 개인주의적 <탈선>, 그의 모더니즘, 미래주의와의 관계, 그의 불행한 연애와 자살, 레닌이 그를 싫어했었다는 사실 등은 교묘하게 축소되거나 은폐되었다. 빠스쩨르나끄의 지적처럼 이러한 왜곡된 숭배 운동은 고인이 겪은 제2의 죽음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공식적인 칭호답게 실로 혁명의 시인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 혁명을 지지했으며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복음서처럼 받들었다. 그러나 그의 칭호 <혁명의 시인>에서 강세가 주어지는 쪽은 언제나 두 번째 단어이다. 그는 언어를 재료로 다루는 장인이었고 정열과 호전성 뒤에는 연약한 마음과 섬세한 감수성을 숨긴 모순 덩어리의 낭만주의자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끊임없이 주위의 환경과, 역사와 사회와 그리고 그 자신의 또 다른 극단과 충돌을 일으켰고 그는 결국 헤어날 길 없는 자기 모순의 늪에 빠져버렸다. 혁명에 대한 그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예술적인 것이었고 오로지 예술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지녔다. 부르주아에 대한 경멸, 과거의 청산, 이 모든 것은 그에게서 시라고 하는 맥락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시 형식의 혁신을 꾀했고 시의 표현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혁명이 자신의 그러한 의도를 뒷받침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혁명은 그에게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였다. 그러나 정작 혁명이 일어나자 세상은 그가 원하는 바와 다른 미학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혁명의 주역인 노동자들은 그의 난해하고 혁신적인 언어를 거부했다. 그가 아무리 <시인-노동자>임을 자처해도, <일억 오천만> 프롤레타리아의 대변인임을 역설해도 그는 여전히 모더니스트 시인이었으며 그의 가장 조야하고 선동적인 표어나 레닌과 공산당에 바치는 정치시에도 여전히 그의 언어적 개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시대는 이제 쉬운 말과 쉬운 내용, 무남각과 몰개성을 원하기 시작했다. 계획하고 생산하고 조직하는 문학 관료들의 세상에 변덕스러운 소리꾼이 설 자리는 없었다. 시대는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범속했고 그는 시대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민감했다. 개인 생활에서도 그는 이율 배반을 극복할 수 없었다. 낡은 부르주아 감정이라고 그가 매도했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을 때 그는 <심장에 붙은 불>을 꺼줄 애무를 구하지 못했다. 예전에 그가 진부하게 사랑이나 노래하는 시인들을 경멸했듯이 이번에는 그가 사랑을 노래할 때 둔감한 속물들이 그의 <서정성>을 비난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의 갈증을 풀어줄 샘물을 찾아야 했고 한때 자신의 탈출구였던 혁명을 떠나기 위해 또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죽음은 불가피한 마지막 해결책이었다.

...마야꼬프스끼의 탄생 100주년... 러시아는 자신이 낳아 도중에 질식시켜 버린 이 시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그러나 시대는 많이 변했다. 뻬레스뜨로이까로 소비에뜨란 이름조차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혁명의 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이 비운의 시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벌써부터 러시아 인들 사이에선 올해를 기점으로 마야꼬프스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는 둥, 그의 위상이 다소 격하될 것이라는 둥의 말들이 오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고인을 또 다시 모욕하고 고인에게 세 번째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인가.
어쨌던 마야꼬프스끼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혁명 후 러시아 시의 존속을 가능케 해주었던 극소수 시인들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리 사람들의 취향과 의식이 달라져도 마야꼬프스끼의 빛나는 시어와 감수성과 영감에 찬 비전은 그가 살았던 비극적 생애와 더불어 그를 여전히 한 시대의 전설로 남게 해줄 것이다.

마야꼬프스끼의 시적 특성은 무엇보다도 그 형식에서 드러난다. 그는 작가가 할 일은 정교한 화병을 만드는 일이며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다양한 혁신적 시 형식을 통해 증명된다. 그는 우선 파찰음과 마찰음 등의 거센 자음과 단음절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한 음성 체계는 혁명과 전쟁의 불협화음을 전달하는 데 적절할 뿐 아니라 소리 자체만으로 친숙한 시적 관례에 저항항 수 있는 수단이었다. 작시법 상의 시각에서 볼 때 그의 많은 시들은 전통 음절 억양법을 수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강세와 약세의 규칙적인 배열을 과감하게 파괴한 완전 자유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러시아 시에서는 억양시라 하더라도 강세 음절과 강세 음절 사이에 약세 음절이 어느 정도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상례인데 마야꼬프스끼는 때때로 강세 음절이 줄지어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숨쉴 틈 없이 강렬한 마야꼬프스끼 특유의 어조가 탄생되었다. 더욱이 전통적인 행과 연의 배열법을 무시하고 한 개의 단어, 혹은 한 개의 음절이 한 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좋아!」, 「150 000 000」등의 시에 도입된 소위 <계단식> 행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 배열에서 각각의 단어와 음절은 그 하나하나에 강한 어조적 무게를 싣고서 울려퍼진다. 그는 자신을 <혁명의 고수>라 불렀지만 그의 시는 그 전체가 우렁찬 북소리였다. 나른하고 단조로운 멜로디 대신 북소리와 행군과 전진의 리듬을 실현시킨 그의 시는 조용히 음미하면서 읽기보다는 마지막 시의 제목처럼 <목청을 다하여> 절규하듯 외칠 때에 비로소 그 진수가 전달될 수 있었다. 광장에 운집한 수천 수만의 관중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시가 바로 그의 시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60년대 러시아를 풍미했던 소위 <시끄러운 시> <무대를 위한 시>의 주역들, 보즈네센스끼 A. Voznesenski와 예프뚜셴꼬 E. Evtushenko는 마야꼬프스끼의 후예들이었다.
작시법에서 그가 보여주는 혁신성은 압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거의 언제나 압운의 법칙을 파괴한다. 정상적인 압운 대신 유사운, 이음절운, 자음운, 합성운, 언어 유희적 압운 등을 사용하며, 그의 이러한 압운은 러시아 시사에서 압운의 가능성 확대와 다양화라고 하는 중요한 사적 의의를 갖는다. 독자의 허를 찌르는 압운, 예측 밖의 압운, 거기서 파생되는 위트와 유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를 시사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어는 종종 지적되듯이 전통 시어의 <탈시화 depoetization>로 정의될 수 있다. 고상한 언어가 아닌 거리의 언어, 속어, 저급한 이미저리 등은 일반적으로 <반미학>을 추구하는 미래주의자들의 공통적 특징이었지만 마야꼬프스끼의 경우는 그 중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는 자신의 어휘를 사회와 문학과 종교에 반항하는 무기로 삼았다.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때로는 천박했고 때로는 신성 모독적이었으며 때로는 해학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고상한 언어와 함께 씌어질 때 한층 더 고조되었다. 사실 가장 고상한 개념과 가장 저급한 개념의 대비는 그가 애용한 장치였다. 그에게 드넓고 광할한 우주는 <강아지의 귀>이고 우주를 수놓은 별들은 <강아지의 귀에 닥지닥지 붙은 진딧물>이다. 신은 <찬장 속의 빵>이고 사도 베드로는 <맘보 춤>을 추며 영광은 오갈 데 없는 과부처럼 비척거리며 천재들의 장례 행렬을 따라간다>. 이런 식의 대조적 비유는 또한 비정상적으로 장황한 메타포로 이어진다. 결코 단순한 적이 없는 기이한 메타포는 독자의 기대치를 완전히 무산시키면서 그의 시에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더해준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지구는 <잘려진 세례자 요한의 목둘레를 춤추며 도는 살로메>이고 평평한 길은 <행인에게 짓밟혀 결핵 환자의 가슴보다 더 납작한 가슴>이다. 저녁 노을은 <티투성이 푸주한처럼 먹구름의 몸통에서 내장을 긁어내고> 시는 시인이 <자기 가죽을 벗기고 압운으로 안감을 대어 만든 외투>이다.
마야꼬프스끼의 이러한 형식적 혁신성은 그의 저항적 메시지와 직결된다. 그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지속적인 테마는 단연 일상성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난로 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일상의 벽을 <이마로, 언어로 부수려 했다>. 그의 시를 이루는 두 개의 세력을 공식화시키면 그것은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 자신 즉 <나>와 나를 제외한 세계, 일상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세계가 된다. 이러한 공식은 때로 <우리>와 <그들>, 일억오천만의 <이반>과 <우드로우 윌슨>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등으로 변조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양극성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러시아 어로 <브이뜨>라 부르는 일상성은 시인이 무너뜨려야 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며 그에 대한 적의가 고조될수록 시인의 자기 확인도 고조디다. 마야꼬프스끼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확대되고 증폭된 자아의 이미지는 이렇게 일상성과의 투쟁이란 배경에 투사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일상성은 낡고 진부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가 종교를 모독할 때 모독의 대상은 종교의 일상성이며 사랑을 모독할 때 모독의 대상은 사랑의 일상성이다. 그가 전 세대의 문학을 쓸어버리자고 할 때 그것은 전 세대 문학의 일상성이다. 일상성은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이며 한정된 공간이며 정체된 현재이다. 그는 예술의 의미 전체를 이러한 일상성의 감옥을 파괴하는 데 두었고 시인은 그 파괴의 수행자로 간주했다. 사실 그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은 일상성 파괴자라고 하는 단일한 이미지에 수렴된다. 그는 일상적 인간에게 둘러싸인 한 마리의 고독한 곰이다. 그는 <털어도 털어도 자꾸만 되앉는 먼지처럼 붉은 깃발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일상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지만 결국 일상성과의 투쟁에서 패배하며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끄렘린에 남겨진 파편>으로 묘사한다. 그가 마지막 시에서 말했듯이 <사랑의 조각배는 일상에 부딪혀 박살이 나고 시 속에서도 삶 속에서도 일상성을 무너뜨리는 데 실패한 그는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자살은 허구와 실제에서 동시에 일어난 듯 두 개의 죽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일상성과의 투쟁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과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시를 점철하고 있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비전이다. 이는 20세기 초에 예술과 철학과 과학에서 일고 있던 문화적 위기감에 대한 극복으로서의새로운 신화 창조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마야꼬프스끼에게 있어서 일상성의 최종적인 끔찍함은 그것이 마침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낮과 밤의 반복을 통해 인간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시인은 이러한 무의미한 죽음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다. 「150 000 000」, 「이것에 관하여」, 「인간」, 「좋아!」에서 펼쳐지는 미래는 <승리자의 미래>이며 <30세기>이며 <천 년 후>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미래이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시간이 없어지는 때, 즉 종말론적 신화의 미래이다.
한편, 미래의 신화는 그에게서 영생 불멸의 모티프로 발전한다. 시간이 사라지고 공간도 정복되었을 때 펼쳐질 천국에서 사회주의는 <늙지 않고 천년 만년 살 것이며> 시인은 자기가 쓴 시 덕분에, 그리고 현세에서 못다한 사랑을 다하기 위해서 부활할 것이다. 그는 30세기의연금술사에게 말한다 : <나를 되살려달라. 내가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라도>. 마야꼬프스끼의 시에 나타난 부활과 영생의 모티프는 기독교의 부활 사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에게서 미래와 유토피아는 현세적인 미래와 유토피아이다.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육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미래, 추상이 아닌 구체로서의 천국이다. 마야꼬프스끼는 영혼만이 살아 있는 <지겨운 천국>은 거부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일이란 심장을 노래하는 일인데 육신이 없으면 심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내다보는 미래의 유토피아는 일상성이 완전히 패배하고 시인은 사랑하는 이와 다시 현세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이다. 이 점에서 그는 내세는 믿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인물과 유사하다. 그는 그리스도 대신 자신을 집어넣은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영생 신앙을 창조했고 일상의 압박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세월의 산맥을 넘어> 다시 오리라 약속하며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1920년대 러시아는 골고타였다.


-마야꼬프스끼 전집 2 『좋아!』(열린책들, 1980) 의 역자(譯者)
석영중의 작품 해설

 

 


문학이 디저트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 마야코프스키
정윤수

80년대 말에 문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때의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그 격렬했던 논쟁을 부드럽게 기억하기 위하여, 다소 무리하게 단순화하여 말한다면, 그때에 대중의 감성에 맞는 ‘쉬운’ 예술을 하자는 쪽과 노동계급의 전망을 투사할 수 있는 ‘어려운’ 예술을 하자는 쪽이 있었다.
‘쉬운’ 예술 쪽은 노랫말도 쉽게, 그 선율도 단순하게, 이야기도 쉽게, 그 결말도 낙천적으로 판을 짰다. ‘어려운’ 예술 쪽은 약간은 복잡한 화성과 선뜻 이해되지 않는 노랫말과 더러 비극적 결말도 주저하지 않는 쪽으로 판을 짰다.
시인 마야코프스키돌아보면 한낮의 꿈이었으나, 그때는 그것이 문학, 음악, 연극, 현장 예술 등의 장르와 부문과 단체에 걸쳐 뜨거운 열정의 논쟁이 되었는데, 정파의 입장에 따라 예술운동의 방향과 그 경향이 달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무렵에, 1940년 오늘, 4월 14일에 권총 자살한,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ii, 1893.7.19~1930.4.14)가 소개되었다.
혁명, 실험, 연애 그리고 권총 자살이라는 단어들이 그의 이름을 강력하게 환기시켰고, 그리고 바로 그러한 단어들 때문에 정작 그의 예술 세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소비’되었다. 아니 요즘의 체 게바라 열풍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순간적이었으니 ‘문화 아이콘으로 소비’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 무렵에 영향을 끼친 해외 예술가들 중에서 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브레히트는 ‘마당극 운동’이 파시즘 시대를 극복하는 연극운동의 보편성과 부합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 증인이었고 멕시코 벽화운동의 리베라도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적지 않은 힌트를 주었다.
하지만 마야코프스키는 그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브레히트나 리베라와 달리 그가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더욱이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공식화된 실패였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는 그의 길을 참고할 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의 용어로는 ‘자주파’와 ‘평등파’가 될 터인데, 아무튼 그 무렵에 이 흐름도 안팎으로 경직될 수밖에 없어서 마야코프스키 같은 자유분방한 예술가는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더 본질적으로는 마야코프스키가 ‘벤치마킹’할 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파괴된 내용을 파괴된 양식에 담는다’는 명제는 이미 전두환 시대에 어느 정도 실천된 바가 있을 뿐더러,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문화운동은 정치적 신념은 높았으나 ‘문화’ 그 자체로는 대단히 보수적인 형식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마야코프스키의 편지는 한편으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도착했던 것이다.
마야코프스키가 작업한 혁명 포스터게다가 마야코프스키의 조국(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파괴자들이 드물었다. 어쩌면 마야코프스키는 20세기 초엽에 파리와 빈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이 누렸던 ‘모든 실험이 가능한 문화적 환경’에 더하여 레닌이 성공한 ‘혁명 러시아’라는 ‘선택받은’ 시공간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으로,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서 모든 실험을 원없이 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는지도 모른다.
‘문화의 혁명’과 ‘혁명의 문화’가 아주 잠깐 동안 밀월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사회주의 혁명 초기의 불꽃 같은 시기 말이다. 그 시기가 지난 후 ‘관료적 당 문화’가 재편된 뒤로 그의 예술과 삶은 비극을 향한 일방통행로를 주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파격적인 실험의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예술 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차르 체제에 신음하던 모든 예술가들이 러시아 혁명을 환영하고 나왔다. 러시아 혁명은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가들의 구원으로 여겨졌다.
혁명에 대한 첫 보도가 파리에 날아왔을 때, 우수어린 긴 머리의 여인을 그리던 모딜리아니는 붓을 내던지고 곧장 러시아의 작가 에렌부르크에게 달려갔다. 에렌부르크의 회고에 따르면 모딜리아니는 ‘마치 독수리처럼 고함을 질러’ 대며 러시아 혁명을 환호하였다. 로망 롤랑도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공식 서한을 띄웠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속박의 사슬을 깨버리고 일약 프랑스 혁명의 뒤를 이었습니다. 바라건대 당신들은 프랑스 혁명이 못다 이룬 한계를 넘어서서 당신들의 일과 우리의 일을 완성해 주기 바랍니다.”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예술가들. 왼쪽 아래 쇼스타코비치와 대화를 나누는 연출가 메이어홀드. 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마야코프스키.
러시아 내부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유럽의 급진적인 실험을 받아들인 전위예술가들은 혁명을 누구보다 선호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의 금기와 억압과 무의식적인 고통을 맹렬하게 거부하였던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삶의 지평이었다.
1918년 10월 25일에 열린 제1회 혁명기념일. 전위예술가들은 온 힘을 모아 대대적인 예술축전을 열었다. 그들은 도시 하나를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거리와 건물을 대담하게 장식해버렸다. 거리의 나무와 화단에도 물감을 뿌렸다.
페트로그라드의 광장도 전위 화가들의 새로운 소재였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황제를 위한 오만한 기념비를 원형과 다각형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색채와 장식으로 바꾸었다. 국립예술공방의 화가들은 거대한 깃발과 다양한 장식으로 새 도시를 만들었다.
선전 열차도 등장하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과 선동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달리는 기차를 또 하나의 소재로 삼았다. 그들은 차량에 갖가지 혁명찬가와 그림을 그려 넣었다. 선전열차는 러시아 평원을 달리면서 군소 도시 사람들에게 혁명의 열기를 전달하였다.
파리에서 고향 비테브스크로 돌아온 샤갈은 그 마을 미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혁명기념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샤갈의 그림을 크게 흉내 내서 그린 그림을 뒤집어 쓰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축제 행진을 벌였다.
그 한복판에 마야코프스키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진실이냐 허위냐에 대해서 더 이상 다투지 말라
낡은 것은 모조리 가슴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거리는 우리들의 붓
우리들의 파레트는 광장이다

그의 동료인 메이어홀드와 박탄코프는 연극 분야에서 일대 혁신을 꾀하였다. 그들은 표현주의와 극장주의를 융합하였다. 영화에서는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쥬 이론을 들고 나와 충격의 영상을 만들었다.
마야코프스키는 1917년 3월 미하일 극장에서 가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절대 목적인 예술은 미래의 국가에서는 모든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결정의 권리여야만 합니다. 나의 모토 그리고 모든 사람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러시아의 정치 생명이여, 영원하라, 예술이여, 정치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라!"

그리고 또 어느 강연에서는 이렇게 소리쳤다.
"왜, 어째서 문학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신문에, 매일 같이, 모든 페이지들에 실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디저트 정도로만 내놓는 문학 따위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던, 그 한낮의 꿈은 너무도 짧았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혁명의 '내재적 발전'을 서두르는 한편 서유럽의 파시즘화에 대한 투쟁전선을 확립하기 위하여 러시아 내의 자유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당 예술'의 근간을 새로 세웠다. 당의 기틀을 공공히 해야 할 권력의 입장에서는 풍자와 자유와 파괴와 실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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