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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는 현실적 모순의 내면적인 목소리이다...
2016년 11월 10일 00시 20분  조회:3985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시의 디아스포라적 정서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김경훈

 

1. 들어가는 말

 

해방 전의 문학사에서 유이민(流移民)의 삶의 정서를 다룬 작품은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시문학의 경우, 단연 윤동주를 대표적인 시인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의 시적 내용은 물론 표현의 수법에 이르기까지 유이민의 삶의 애환과 목소리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윤동주의 시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적 정서를 잘 담아낸 백석, 이용악의 작품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이들 세 시인의 작품의 공통한 양상을 찾아보고, 각자의 개성적인 특성을 아우름으로써 이 시기 시문학사의 중요한 흐름의 한 갈래인 주변적 삶의 정서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시각은 암흑기를 전후한 민족문학사의 풍성하면서도 과학적인 서술에 의미 있는 작업으로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래에 이들 세 시인의 작품에서의 디아스포라적 정서에 대하여 주로 공간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정서로 양분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2. 유이민의 삶의 공간

 

1) 고향 상실

 

윤동주와 백석, 이용악의 시 작품은 대부분 유이민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그것은 우선 그러한 삶의 근간이 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내면적인 목소리로 그러한 현실적 모순을 조용히, 그러나 절실하게 보여주고자 한 점에서 특징적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눈 감고 간다

 

태양과 별을 사모하는 아이들은 어두운 밤인데 씨앗을 갖고 한 알, 두 알 뿌리면서 태양이 솟는 새벽까지 길을 걷는다. 밤이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눈을 크게 뜨고 걷는 것이 아니고 아예 눈을 감고 길을 가야 한다. 이리저리 살피면서 조심스레 간다고 해서 당금 도착할 것도 아니므로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그때 《감었든 눈을 와짝 떠》도 늦지 않다고 한다. 즉, 기나긴 터널과 같은 현실적 어둠 속에서 분명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래된 인내는 오히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현명한 대책일지도 모른다는 도리를 귀띔해 주고 있는 셈이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윤동주의 시에서 《밤》은 시적 공간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이다. 《밤》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의 층위를 둘러볼 때, 그것은 현실적인 상황의 암울함뿐만 아니라 그러한 배경에 휩싸인 화자의 어두운 심경을 함께 드러냄으로써 동질적 의미의 이중 구조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밤》은 모든 구체적인 사물의 윤곽을 희석시키거나 소실시킴으로써 사라짐 내지 소멸의 상징성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밤에 퇴색되거나 함몰되지 않고 그를 극복하는 방법은 밤을 의식하지 않고 그것이 지나기를 침착하게 기다리는 끈기 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므로 《눈 감고 간다》는 것은 어둠(밤)에는 어둠(눈 감다)으로 대처한다는 부정의 부정의 변증적인 사고방식을 엿보이는 것으로, 부정적인 대상으로서의 《밤》을 긍정적인 미래에의 도달을 위한 필요악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기는 그러한 미래에의 도달은 여러 가지 힘든 과정이 수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길》은 그러한 과정의 고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도 그러하지만 《길》도 《밤》과 마찬가지로 수평적 공간에서 중요한 몫을 하는 요인이다. 다만, 《밤》은 《눈 감고 간다》에서 힘들고 기나긴 여정을 뜻한다면 《길》은 낮과 밤이 점철되는 오랜 시간적 흐름을 함께 상징하고 있음으로 해서 전반 인생의 여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단계적인 상황과 전체적인 상황으로 갈라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전체적인 상황인 만큼 《길》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들이 시화되어 있다. 무언가 잃어버려 안타까워하는 화자와, 돌담을 끼고 끝없이 뻗은 길과, 쇠문을 굳게 닫은 담, 아침에서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에서 다시 아침까지 이어지기만 한 길,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 등이 그러한 시적 대상이 된다. 《길》은 《풀 한보기 없》고 내가 가는 길에는 돌담이 항상 긴 그림자를 드리워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또 담을 경계로 《나》는 분열된 모습으로 쪼개어져 있고, 이들을 굽어보는 하늘은 괜스레 부끄럽기만 하다. 요는, 밤과 낮이 교차된 공간에서 화자를 괴롭히는 대상들은 오히려 그 모습이 분명해짐으로써 현실적인 장애나 모순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대상들은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유이민의 후세로서 여직 현지 혹은 타국에 적응하지 못한 화자의 내면적인 깊은 고민과 우수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定州城, 조선일보, 1935.8.31

 

이 작품은 백석의 등단작이자 그의 초기시 세계를 확연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를 그린 바로 그 ‘정주성’은 그러나 성문이 헐려져 그 일부만이 남아 있는 퇴락한 성으로 다가온다. 폐허가 된 성의 밤풍경들은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는 청각적 묘사와,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와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짝이로 난다’와 같은 시각적 묘사로 인하여 한층 을씨년스런 감을 더해갈 뿐이다. 이와 같은 정물 묘사는 시의 마감 부분인 ‘날이 밝으면 또 메기 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는 판단에 이르러 그 침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동시에 더 이상 정물 묘사이기를 거부하고 정주성, 나아가 조선 땅 전체에 피폐를 가져다준 식민지의 암흑상을 떠올리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이처럼 외세에 의한 민족의 역사의 허무함을 표출하면서 시인의 이후의 창작에서 유이민의 방황과 고민을 지속적으로 그릴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편, 다음 작품은 상기의 작품의 정물적인 관찰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 그 심층을 들여다보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의 어느 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女僧, 시집 사슴, 1936

 

작품은 한 여승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일제에 의해 파괴된 가족 공동체의 운명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를 찾아 ‘금점판’을 떠돌다가 결국 어린 딸마저 잃고 여승이 되어 버린 한 여인의 비참한 일생은 그 개인의 비극만이 아닌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비극이 된다. 이는 다른 한 작품인 <모닥불>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를 말해줌으로써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백석이 그려내고 있는 식민지 조선 땅이란 험상하게 헐린 밤하늘의 성곽이나 산산조각이 난 여승의 가족처럼 더 이상 한 곳에 버티고 살기 힘든 공간 다름이 아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연스레 유이민의 삶을 선택하게 되고 그러한 삶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八院- 西行詩抄 3,  조선일보, 1939.11.10   

 

이 작품은 4편의 <서행 시초(西行詩抄)> 중 세 번째 작품으로 ‘나이 어린 계집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 앞에서 예로 든 <여승>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내지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고통스러운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등이 얼어 터지고 밥 짓고 걸레질을 하는 아이, 삼촌이 살고 있다는 ‘자성’이라는 먼 곳을 찾아 가는 어린 계집아이는 곧 가족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리고 방황하는 유이민의 삶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 시는 화자가 이처럼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모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백석의 시가 유년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강렬한 향수에 보다 집착을 보이는 과거지향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용악의 경우에도 유이민의 비극적 삶은 무엇보다 고향에의 상실감에 대한 독특한 시적 정서를 통해 아프게 전해지고 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北쪽, 시집 분수령, 1937

 

이 시는 앞에서 보아온 백석의 <定州城>이나 <女僧>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자신의 고향이 위치한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이고 시름이 가득한 나라로서 도저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는 공간이 된다. 비극적 상황 그 자체로서의 이러한 고향의 이미지는 다른 한 작품 <낡은 집>에서 ‘날로 밤으로/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대대손손에 물려줄/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라는 표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정처 없는 유이민의 방황이 시작되고 그러한 삶의 공간에서 비극적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시집 분수령, 1937

 

이 시는 러시아를 넘나들며 상인으로 삶을 꾸려가고자 했던 한 조선인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소금을 싣고 러시아 영토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였던 사실을 되새길 때, 그리고 그가 10세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체험적인 감동이 진하게 안겨온다.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집도 아니고 / 일가집도 아닌 집 / 고향은 더욱 아닌 곳’ 에서  ‘침상 없는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은 곧 당대 유이민의 비극적인 삶과 운명을 대표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례는 <오랑캐꽃>이라는 다음 작품에서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인문평론, 1939.10

 

작품은 일제의 수탈로 말미암아 오랑캐 땅으로 쫓겨난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오랑캐꽃’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즉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꽃의 형태가 오랑캐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는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사연과 함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그 옛날의 오랑캐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민족의 처지를 동일시함으로써 꽃송이 하나에서 민족의 비극적인 현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감 연에서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이라는 부분에 와서 폭발되고 말 때, 우리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존재의 궁극에 대한 허무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유년적인 평화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특히 동시를 중심으로 유년적인 평화에 대한 그리움은 아주 짙게 배여나오고 있다.

 

눈우에서

개가

꽃를 그리며

뛰오

 

―개

 

모두 해야 13자밖에 안 되는 시지만 독자들에게 주는 미감은 매우 충만되어 있다.

우선 개와 꽃의 관습적인 ‘대립관계’를 조화롭고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꽃을 그리다)으로 만듦으로써 ‘꽃’에 상대한 ‘개’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꽃이 아름답다거나 개가 곱다는 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꽃과 개가 직결되는 긍정적인 형용은 여간한 상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시에서는 개가 꽃을 그림으로써 꽃의 아름다움과 개의 ‘아름다움’이 같은 미감을 산생할 수 있는 동질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

여기서 당시 배경과 시인의 경력을 좀 더 살피기만 하면 화자 밖의 것(개-꽃)에 대한 그러한 동경과 찬미 속에 다른 시적 분위기가 내재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를 쓴 해, 시인은 자신이 다니던 평양숭실학교 폐교(3월), 고종 송몽규의 구금, 문초(일제경찰에 의해 4~8월), 부친의 포목상경영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불운에 접하였다. 이러한 배경적 요인을 감안할 때 이 시에서 흐르는 평화와 아름다움 뒤에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고뇌가 잠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여 개의 행동에서 아름다움(꽃)을 발견할 수 있은 데는 시인의 예리한 혜안과 함께 내적인 고뇌를 자연과에의 동경, 합일로써 잊으려 했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기법이 작용한다 하겠다. 다른 방면 동시에 부상되는 아름다움을 자연에 대한 시적 기분의 평화로움과 풍요함 및 작시자세의 경쾌함은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양심과 신조를 지녔고 시인으로서 진실과 선량, 미에 충실했으며 사회인으로서 세상을 밝게 맞을 수 있는 내세에의 드팀없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윤동주의 시관 중 밝고 명랑한 부분을 내비치는 것이 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굴뚝〉전문

 

이 작품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외딴집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람들의 발자취가 드물은《산골짜기 오막살이》에서 대낮에 때 아닌 연기가 솟는다. 개구쟁이 남자애들이 어른들 몰래 모여앉아 입가를 숯으로 검댕이 칠하면서 감자를 구워먹고 있는 것이다. 워낙 《산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벌판보다 구석진 곳이며 폐쇠된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서 시적 공간은 다시 《오막살이》로 축소되어 있고 또다시 《깜박깜박 검은 눈》과 《입술》의 까맣게 된 숯자욱으로 더욱 축소된다. 이렇게 점층적으로 축소된 공간에서 어른들 몰래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는 감자구이의 행위는 남자애들만의 안락하고 행복한 평화로운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어른들로 표현되는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풍경과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산골짜기 오막살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냄새는 한 켤레, 두 켤레로 옛이야기와 함께 남자애들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동년의 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윤동주 시인의 고향에 대한 사랑과 함께 삶의 원초적 공간으로서의 유년적 공간에 대한 끈끈한 추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다음 백석의 경우, 작품에서 유년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통해 과거지향성격을 보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실의 엄혹한 상황에서 자기 보호적이고 평화로운 공간을 찾기 위해 유년의 시기로 되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 곬族, 조광, 1935.12

 

이 시는 명절날의 풍경을 통하여 유년기의 순진무구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그 속에서 따스한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을 환기하고 있다. 짙은 평북 사투리와 다양한 이미지 수법을 개입시킴으로써 푸근한 고향 정서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오리치’ ‘반디젓’ ‘아르간’ 등 방언과 함께 명절날 설빔으로 입은 옷에서 ‘새옷의 내음새도 나고’라고 함으로써 시각을 후각으로, 많은 음식물을 ‘…… 내음새도 나고’와 같은 후각적 이미지로 표출함으로써 명절날 특유의 신선한 분위기와 정서를 흐뭇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백석의 시적 공간은 이처럼 대부분 유년기의 평화로운 공동체의 삶을 그림으로써 강렬한 과거지향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고향 상실의 아픔을 딛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원초적 공간을 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3. 유이민의 정서적 흐름

 

그렇다면 저러한 삶의 공간에서 시인들이 표출해 내고 있는 정서적 흐름은 어떤 것으로 되어 있을까? 이는 공간과 함께 시간의 양상을 문제시함으로써 가능하다.

윤동주의 경우, 유이민의 그러한 삶의 공간에서 빚어지는 시간의식은 많은 경우에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지상의 세계에서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끊임없는 말 없는 손짓 때문에 우주적 공간에서 그 시간성과 작품의 의미를 돋보인다 하겠다.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가을、겨을、

   그런날 아츰도 아닌 아츰에

 

   빨―간 꽃이 피여낫네、

   해ㅅ빛이 푸른데、

  

   그前날밤에                     

   그前날밤에                        

   모든것이 마련되엿네、

 

   사랑은 뱀과 함께

   毒은 어린 꽃과 함게

 

     ―太初의아츰

 

   

   하얗게 눈이 덮이엿고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말슴이 들려온다。

 

   무슨 啓示일가。

 

   빨리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겟다。

 

     ― 또太初의아츰

 

두 작품은 모두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작품 속에서 현실은 어두운 밤으로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곧 희망찬 도래를 확신하는 것으로 돼 있다. 다시 말해, 어둠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죄의 삶이고, 시대적으로는 식민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작품 서두의 시간 의식은 역사적 시간 개념과 다른 시작과 끝도 구별할 수 없는 무한성을 지니는 것으로 우주적 시간에 잇닿아 있다. 기독교에서 시간성은 신의 사랑과 계획, 의도가 표명되는 구체적인 현장으로 모든 것은 구체적인 시간, 공간 안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의식되는데 전형적인 사례로 인간이 죄를 지어 낙원에서 추방된 후 고통과 불행이 생김은 곧 역사적 시간 개념을 의미한다하겠다. 하지만 하늘이 주재하는 우주의 변화와 섭리 속에서 개인의 무력감을 느낄 때 역사적 시간은 한층 리얼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모순적 존재이며, 죄는 전적으로 인간이 의지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모순된 삶의 현장은 “그 전날 밤에 마련되었다.”는 기독교의 예정설에 기인한다.

첫 번째 예문에서 시적인 구조는 태초의 아침, 생명의 시작, 예정된 섭리의 역사, 삶의 본질 양상 등으로 전개가 되며 이는 곧 일종의 순서적 시간의 질서에 의해 구성됨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1연은 순환적인 시간 개념이 아닌 태초의 시간으로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해주고, 이 태초의 아침은 광채를 발해 밝고 빛나지만 화자가 처한 현실의 시대 상황은 어둡고 답답할 뿐임을 드러낸다. 3연까지는 조물주의 예정된 섭리 속에서 피조물이 창조되어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4연은 선악이 함께 공존하는 삶의 현장을 형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번째 예문은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성서에서도 자연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듯이, 하얗게 눈이 엎인 날 전신주에 바람 소리가 잉잉 거릴 때 그 계시를 듣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계시는 초자연적 존재인 절대자와 유일하게 가지는 특수한 관계를 뜻하며 또 지상보다 높은 천상에서 이루어진다. 성서에서도 그러하듯이 ‘산’은 천상에 가까우므로 변화와 계시가 나타나는 신성한 공간이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음은 깨끗하게 정화된 시계를 뜻하며 따라서 이 계시의 신비감은 두려움과 존엄성이 공존한, 무한한 힘이 있는 자에 대해서 인간의 이해 과정을 엿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뱀의 유혹으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선악의 분별력이 생겨 죄를 짓게 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화자는 신의 예정론적 섭리와 악한 죄까지도 수용하면서 운명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를 능동적으로 보여 준다. 즉 신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 왜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회의나 거부감 없이 모순된 삶에 순응하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겸허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시인의 순수한 삶을 추구하고 지향했던 시인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시로 티 없이 깨끗한 순결의 정신적 추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추구의 과정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의 비교적 긴 시간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더구나 식민지 치하에서 그러한 길을 걷는 과정은 시인에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수많은 작은 순간들의 집합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운 과정은 모든 역경이나 고난을 물리칠 수 있는 드팀없는 신념이나 의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시의 경우, 시간은 순간적인 시간의 집합과 이것의 통합을 의미하는 전체적인 시간으로 파악할 수가 있고, 이를 다시 내면의 끊임없는 성찰과 그 행동으로의 실천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 1938.3

 

제목에서부터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는 이 시는 백석에게 조금 이색적인 작품이다. ‘나타샤’라는 이름도 그렇고 ‘흰 당나귀’의 등장도 시인이 즐겨 찾는 토속적인 세계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유랑의 공간을 그리면서 시인이 누리고자 했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우선 화자는 가난하고 외로운 존재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더욱 쓸쓸한 존재가 된다.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혼자서 소주를 마시며 나타샤는 나타나지 않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는 결국 ‘흰 당나귀’를 타고 나타샤와 함께 산골로 갈 것이고 오막살이에서나마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갈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이나 환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푹푹 쌓이는’ 눈임을 알 수 있다. 겨울에 내려 쌓이는 눈은 흔히 새해 농사에 대한 풍년이나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데서 그러한 표현은 사랑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편, 그러한 사랑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반해서 소중함도 그만큼 더하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눈은 풍성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가려 주는 비밀의 기능도 한다. 여기에 이 기능을 전폭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밤이 깊어갈 때 그러한 비밀스러우면서도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타샤’와의 사랑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톺아오고 그 감동은 사람은 물론 ‘흰 당나귀도 응앙응앙 울’ 정도로 극대화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독자는 ‘산골’이라고 하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지된 시간의 순간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데 쌓이는 ‘눈’이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과 교묘히 대조된다. 

 

이용악의 경우 다음의 작품은 그 나름의 시간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부분, 시집 낡은 집, 1938

 

이 작품은 쉬지 않고 흐르는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는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는 강물이 흘러흘러 언젠가는 바다에 가닿듯이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 과정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깨달음은 강물의 흐름에 비해 더할 나위없이 빨리 달리는 찻간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상대적으로 정적인 강물의 모습이 화자의 의식 성장을 오히려 가속화함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상대적이 되고 인식의 승화 과정이 의미 있게 부각되는데 그러한 시간의식은 곧 역사의식 다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예를 든 적이 있는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작품에서는 특징적인 상황에 걸맞게 정지된 시간을 통해 역사적 수난상을 보여주고자 한 점이 돋보인다.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주략)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4, 5연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둡고 쓸쓸하기만 한 밤의 공간을 풀벌레 소리만 가득 채움으로써 시간의 흐름은 정지되어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뿐이다. 죽음은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얼어붙은 시간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지된 시간에서 조금 물러서기만 하면 식민지 정책 하의 유랑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단면이 독자들 눈앞에 배경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용악의 이러한 시간의식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전라도 가시내>에서 공간의식과 함께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규모로 발생했던 유이민 중 ‘팔려 간 여인’을 시적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서사성이 강화된 시라고 평가되고 있다.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각각 함경도와 전라도라고 하는 같지 않는 공간에서 출발하여 이국타향에 유랑함으로써 시작부터 민족적인 대 유민의 사태를 폭로한다. 이들 주인공은 경계가 삼엄하고 인심이 흉흉했던 국경 지방의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에서 해후하여 술을 마주하며 기나긴 이야기에 빠지고 자신들이 같은 운명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자리에서 여인이 석 달 전인 늦가을에 북간도로 팔려 오던 ‘천리 천리 또 천리’는 모두 삼천리, 곧 여인의 고향인 전라도와 지금 북간도 땅과의 거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족적인 유랑 내지 방황의 거리와 시간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에서 팔려오는 유동적인 시간의 흐름과 대화나 노래에 깊이 빠지는 심리적인 시간의 흐름은 교차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나오는 말

 

이상으로 윤동주의 작품을 중심으로 백석과 이용악 등의 시에서의 디아스포라의 시적 정서를 알아보았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들 세 시인은 모두 유이민 혹은 유이민의 후세로서의 삶의 방황과 유랑을 그려내고 있었으며 이는 윤동주의 경우, 내면적인 목소리로 그러한 현실적 모순을 조용히, 그러나 절실하게 보여주었으며 그것은 주로 ‘밤’이나 ‘길’과 같은 특징적인 공간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또 백석과 이용악의 경우, 정물적인 관찰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서거나 고향에의 상실감에 대한 독특한 시적 정서를 통해 그 아픔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향에의 상실감과 그 그리움은 이들 디아스포라들의 경우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한편 이러한 유이민의 고통스런 삶의 공간이나 위기의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윤동주와 백석은 유년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통해 과거지향성격을 보이고 있었다.

유이민의 그 같은 삶의 공간을 지탱하는 중요한 시적 수단인 시간의식에서 우선 윤동주는 유이민의 그러한 시간의식 또는 역사의식은 많은 경우에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시각과 연결시켜 순간적인 시간의 집합과 이것의 통합을 의미하는 전체적인 시간의 출현을 엿볼 수가 있었고 백석은 이국적인 정취 속에서 환상적인 사랑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상상을 매개로 한 정적인 심리적 시간의 양상을 통해 우러나왔으며 이용악의 경우, 화자는 시적 대상과의 불일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는 정적인 시간과 동적인 시간의 교차 속에서 오히려 역사적인 의식을 획득하고 있었다.   

모두어 보면 윤동주를 중심으로 한 이들 시인의 작품에서는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아픈 경험과 그럼에도 고향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이어짐을 보아왔고 이러한 디아스포라적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년적 평화나 이국적인 정취, 또는 종교적인 시각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음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이들의 작품에 관한 보다 다양한 시각의 연구를 함으로써 민족문학사의 페이지를 더욱 무게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기본 자료:

김학동 편, 백석전집, 새문사, 1990

윤영천 편, 이용악시 전집, 창작과 비평사, 1988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94

 

2. 저서, 논문

김용직, 한국현대시사(1,2) 한국문연, 1996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마광수, 윤동주 연구, 정음사, 1986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세계사, 1988

박경수, 1930년대 시의 현실지향과 저항적 문맥, 문화연구, 제4집

전봉관, 백석 시의 모더니티, 한중인문학연구, 16

이경수, 백석 시의 낭만성과 동양적 상상력, 한국학연구 21

박건명, 백석 시 연구, 건국어문학 제23`24 합집

조병춘, 이용악의 유이민시 연구, 세명논총 제3집

박윤우, 이용악 시의 일상성과 리얼리즘적 창작 방법, 인문과학연구 제5집

 이종주, 시적 자화상의 의미구조,  西江語文, 제3집

 유재천, 윤동주론, 배달말, 15

 김인섭,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의 구원의식―윤동주, 김현승 시를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제9권 1호

 

*주:"윤동주 옥사 65주년 기념 윤동주시포럼"에서 발표(중국연길.20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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