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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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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2016년 11월 07일 22시 53분  조회:4111  추천:0  작성자: 죽림
보르헤스와 성(性)의 문제

송 병 선



1. 들어가는 말

     보르헤스의 무덤에 새워진 묘비에는 흥미로운 비문이 적혀 있다. 이 비문을 새긴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에두아르도 론가토(Eduardo Longato)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글은 북구의 고대 언어와 보르헤스의 문학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묘비에 적힌 시구는 13세기 노르웨이 사가(saga)인 폴숭가 사가의 27장에서 인용한 “Hann tekr sverthit Gram ok/leggr i methal theira bert”라는 글이다. 이것은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라는 뜻이다. 보르헤스는 이 글을 『모래의 책』에 수록된 「울리카」의 헌사(獻辭)로 사용하는데, 이 시구는 주인공 지구르트가 브륀힐트와 사흘 밤 동안 침대를 함께 쓰던 대목을 지칭한다. 지구르트는 브륀힐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칼을 놓는다. 그리고 이 시구 아래에는 “울리카에서 하비에르 오타롤라까지”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데, 이 이름들 역시 「울리카」에 나온다. 그들은 보르헤스 작품 속에서 유일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유명 인사의 비문에는 그의 대표적인 말이나 그의 사상을 함축할 수 있는 글귀가 새겨지는 법이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비문에는 왜 이런 글이 새겨져 있을까? 흔히 유명 문인들은 그들의 문학과 더불어 극적인 삶으로 인해 후세에게 감동을 주거나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보르헤스란 이름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의 격정적인 삶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만을 떠올린다. 특히 모든 문인들의 관심사인 남녀간의 사랑의 문제는 보르헤스 작품을 연구할 때 논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보르헤스의 문학은 관념론이나 형이상학적 측면,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관심을 보이는 미로나 진리의 상대성 혹은 카오스의 개념과 같은 것들만이 관심을 많이 끌었을 뿐, 남녀의 사랑에 존재하기 마련인 에로스의 문제는 관심에서 제외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지적인 작가로만 치부된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남긴 수많은 명언들 중에서 왜 자신의 사랑 체험을 고백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울리카」의 글귀만이 비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폴숭가 사가에 적힌 말은 두 남녀가 에로스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남들과 차별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울리카에서 하비에르 오타롤라까지”라는 말은 그가 에로스의 유혹에 굴복하여,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흔히 보통 사람들은 젊었을 때 사랑을 꿈꾸거나 갈망하다가 노년이 되면 관조의 입장을 취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는 「울리카」와 같은 후기 작품을 쓸 때서야 비로소 성(性)에 눈을 뜬 것인가?

     보르헤스의 전기를 쓴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María Esther Vázquez)에 의하면, 그의 사랑 편력은 보통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 모임에서 만난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특히 왈리 센너(Wally Zenner), 하이디 랑쥐(Haydée Lange), 실비나 불리히(Silvina Bullrich), 엠마 리소 플라테로(Emma Risso Platero), 에스텔라 칸토(Estela Canto), 피피나 디엘(Pipina Diehl), 수사나 봄발(Susana Bombal) 등과 사랑에 빠졌다(Vázquez 170). 이것은 현실 속의 보르헤스가 남녀간의 사랑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그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 작품들 속에는 성(性)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다가 갑자기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에서는 바로 성(性)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의 글쓰기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목적에서 수단으로: 초기 작품 속에서의 에로스 

     에로스의 추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는 흔하게 등장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 집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산발적으로는 많은 작품 속에서 나타난다. 특히 초기 시에서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만남이 주요 주제중의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런 것은 그의 작품을 대단히 지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보르헤스의 첫 번째 시집인『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은 에로스에 관한 보르헤스의 초기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여러 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열정적으로 성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단지 슬픈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열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기념비」(Trofeo)에서 시인은 과거의 사랑했던 여인에 관해 말한다.


나는 영원한 하루동안
당신의 아름다움을 지켜본 관객이었네 (47)


     C. G. 에게 받친다는「토요일」(Sábados)에서 보르헤스는 다시 한 여인을 두고 “당신 육체의 찬란한 흰빛”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 놀랍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
어제는 단지 아름다웠을 뿐인데,
오늘은 나의 모든 사랑이 되었네 (46)


     그러나 로버트 리마에 따르면, 에로티즘에 대한 젊은 시인의 태도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불길」(Llamarada)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초판에 수록되었다가 후에 삭제된 이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눈을 감은 채 육신의 절정에
빠져들고 싶은 바램으로
우리는 얽히고 설킨 육체의 고난으로
빠져들고 (Lima 408)


     이 시구는 성의 희열을 발견하기 직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제 시인은 관음적인 기쁨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여인의 육체를 소유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육체적 사랑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웃음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순간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며, 단지 우리의 눈먼 욕망만을 남겨둔다. 시인은 이런 육체적 사랑 속에서 환멸을 느낀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시인은 감각적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성행위의 나쁜 점만을 인식할 뿐, 그런 사랑이 얼마나 큰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는 발견하지 못한다. 보르헤스가 육체적 사랑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사랑에 관해 가질 태도를 결정하는 주요인이 된다. 이것은 특히 『정면의 달』(Luna de enfrente)에 수록된 「사랑의 예감」(Amorosa anticipación)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인은 사랑을 나눈 후 잠이 든 여자의 무력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아직도 신비스럽고 말이 없는, 
소녀 같은 당신의 몸
........
나의 품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당신의 꿈을 바라보는 것처럼... (59)


     그는 잠이라는 은유를 통해 이미 지나간 사랑의 행위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꿈의 사죄(赦罪)로 다시금 기적처럼 처녀가 된”(59)이라고 지적하면서, 사랑의 환희가 제공하는 순간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전율하는 사랑의 행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모습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매하게 말한다.


아무말 없이
당신의 마지막 해안을 바라보리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을 보듯이
사랑도 없이, 나도 없이
시간의 허구에서 벗어난 그대를
다시 처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 (59)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시인 보르헤스가 육체적 사랑 뒤에는 무력한 여자의 몸만이 남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 지적인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육체의 열정이나 쾌락을 버리고, 관조적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예감」의 끝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사랑을 예찬하지만, 에피쿠로스적인 관능적 쾌락보다는 플라톤적인 관념론적 즐거움이 지배적이다.

     이후 보르헤스는 육체적 사랑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육체의 환희 속에 빠지게 하려는 젊은 날의 욕구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런 행동은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 중단되고, 그것은 관조적 상태로 대치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로티시즘은 차별화 되고 지성화되며 추상화된다. 즉, 이후에 씌어진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 관능적인 요소들은 형이상학적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사랑의 순간적인 쾌락에 만족하지 않는 보르헤스의 입장은 특히 「베일에 가린 거울」(Los espejos velados)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927년경 나는 그늘진 여자를 알았다. 처음으로 알게된 것은 전화를 통해서였다. 훌리아는 이름도 얼굴도 없이 목소리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다음 해가 질 무렵 거리 모퉁이에서 보았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큰 눈과, 검고 반지르한 머리칼과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786)


     여기에서 훌리아의 육체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간략하고 객관적이며, 따라서 보르헤스가 관능적인 것을 넘어서서 형이상학적인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인 것은 ‘놀랄 정도로’라는 단어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눈이 생소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특성은 그녀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느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화자는 훌리아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에, 그리고 몇 번은 밤에 우리는 동네를 함께 걸어다녔다”(786). 그러나 이 매력을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빈번한 만남은 성적인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사랑도 없었고, 사랑을 꿈꾸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 안에서 어떤 열렬한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성적인 것을 두려워했다.(786)


     여기에서 “두려워했다”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관찰자의 태도와는 전혀 틀린 내적인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훌리아는 관능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난해한 존재로 공포감을 스며들게 하면서 매력을 풍기는 존재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화자는 성관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만, 결국 훌리아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육체적 사랑에 대한 그들의 동의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3.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에로스:『픽션들』부터 『브로디의 보고서』까지 

     에로티시즘에 대한 보르헤스의 냉정한 태도는 그의 단편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화자인 보르헤스는 거울과 성교를 혐오스런 것으로 언급한 친구 비오이 카사레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이 말의 출처를 찾기 위해 백과 사전을 뒤지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날 비오이 카사레스는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말한다.


그노시스파의 어느 사람은 눈에 보이는 우주란 환영(幻影)이거나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혐오스런 것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우주를 증가시키고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432)


     여기에서는 성교란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부성이란 말을 통해 그가 암묵적으로 그런 것을 비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오이가 처음에 떠올린 말이 부성이 아니라 성교였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에로티시즘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에, 부성에 내포된 성교가 역겨운 것임을 작품을 통해 전파시키려고 했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부성 자체보다도 쾌락과 번식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성행위를 비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한 「원형의 폐허」에서도 독신자인 이교도 사제는 성행위 없이 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즉, 육체적 행위가 아닌 정신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이렇게 「원형의 폐허」는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생식은 교접 없이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성은 성교가 수단으로서 제거될 때에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말한 그노시스트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신적 생식이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극소수의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성(性)에서 희열과 생식의 기쁨을 제거 한 후, 그것을 비성(非性)적인 기능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개념의 하나는 바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화자는 “성교라는 환희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다”(438)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그는 개인적인 느낌을 통해 전체를 동일하게 파악한다. 객체와 전체가 동일하다는 개념은 「전체와 무」(Everything and Nothing)에서 강조된다.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인류의 태초의 의식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6월의 기나긴 낮잠을 자는 동안 앤 헤서웨이가 시작한 것을 포기하고”(803) 만다. 그리고 “... 런던의 술집이나 여자집에서 자기 육체의 운명을 수행하는 동안”(803)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육체를 이용해 자아를 찾으려고 한다.「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전체의 동일성은 성을 통해 순간적으로만 경험되며, 따라서 진정한 동일성이 상정하는 불변성의 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는 무한하게 인간에게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육체관계는 동일성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불변성’이란 형이상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환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성교를 비성(非性)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엠마 순스」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르헤스의 몇 개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서, 자기 아버지를 모함하여 자신의 죄를 덮어버린 횡령자 아론 로웬달에게 복수할 생각을 한다. 아론 로웬달의 모함으로 인해 순스는 브라질로 도망쳐야 했으며, 그곳에서 더러워진 자기의 이름이 깨끗해질 수 없음을 알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했던 것이다. 엠마는 아버지의 자살을 야기한 원인으로 로웬달을 지목한다. 그녀는 밤새 잠을 설치면서 어떻게 해야 자기와 자기 아버지의 적을 죽일 수 있는지 궁리한다. 엠마의 소망은 전통적인 방법인 살인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 자기가 살인범으로 구속되지 않은 채 자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런 엠마의 목적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는 횡령자를 죽일 것이지만, 로웬달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했듯이, 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기로 한다. 그녀의 계획은 간단했다. 즉,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로웬달을 방문해서, 그가 죽어야 할 이유를 설명한 다음에 죽여버리고 나서, 그가 자기를 강간하려는 순간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엠마는 “4월이면 그녀는 만 열 아홉 살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에 관해 거의 병적일 정도의 두려움”(565)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이런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날 저녁 출항할 배는 그녀의 계획에 알맞은 남자를 제공해 주기에 충분했다. 이 선원은 후에 자기가 그날 그녀를 소유했다고 증언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서너 개의 바에 들어가서 일상적인 것들,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이 손장난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노르취채르난 호의 승무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 중 아주 젊은 한 사람에게서 그녀는 어떤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순순한 공포심이 약해지지 않도록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566)


     상스럽고 거친 선원은 미로와 같은 복도와 계단 통해 그녀를 침실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엠마는 처음으로 고통스런 성교를 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저질렀던 끔찍스런 일을 이제는 이 선원이 자기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별 놀라움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 즉시 흥분 속으로 도피했다..... 혼자 남아있게 되었을 때, 엠마는 즉시 눈을 뜨지 않았다...... 공포심이 그녀의 육체가 느끼는 슬픔과 역겨움 속으로 사라졌다. 역겨움이 슬픔이 그녀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지만, 엠마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566)


     그녀가 순결을 받친 것은 쾌락이나 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원과 엠마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였다. “엠마가 그에게 사랑의 도구인 것처럼, 그는 엠마에게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566)

     엠마가 자기의 순결을 로웬달에게 주었다면, 그녀가 마음먹었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공포심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런 상황에서 더욱 커졌을 것이고, 그녀는 영원히 그를 자기를 강간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었다. 엠마가 원한 것은 로웬달을 제거하는 것이었지, 자기가 구상한 계획과 어긋나게 그를 영원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익명의 스칸디나비아 선원은 그녀의 계획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엠마는 그를 찾았고, 그의 성욕을 비성(非性)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했으며, 그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잊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와의 성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선원은 엠마에게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준비 작업이 끝나자, 엠마는 자기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그녀는 몇 시간 후 로웬달의 사무실에 도착하여, 두려움에 질린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자 로웬달은 마지못해 그녀를 위해 물 컵을 찾으러 나가고, 그녀는 그의 책상 속에 숨겨져 있던 권총을 꺼낸다. 그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두 번이나 권총을 발사한다.


아론 로웬달 앞에서 엠마 순스는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도 급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받은 치욕을 벌하는 것이 더욱 급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일이 그를 모욕한 후에, 그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567)


     그러나 로웬달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욕을 퍼붓자 엠마는 그의 입을 잠재우기 위해 세 번째로 총을 쏜다. 엠마는 자기의 희생자가 죽은 이유를 알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피에는 피로 대하라는 함무라비 법전에 의거해 총을 쏘았다. 이렇게 그녀가 처녀를 잃으면서 흘린 피는 그녀가 로웬달에게 흘리게 만든 피를 속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로웬달을 처형하자, 엠마는 용의주도하고 냉정하게 범죄를 저지른 현장을 정리하고, 시체의 웃옷 단추를 풀었으며, 피가 튄 코안경을 빼서 서류철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미리 준비한 가상의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화로 경찰서에서 전화를 걸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웬달 씨는 파업을 핑계삼아 나를 오라고 해서... 나를 겁탈했고, 그래서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568) 살인을 저지르기 얼마 전에 순결을 잃어버린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최후의 증거로 사용된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이 작품의 말미에 적고 있듯이, 그녀의 말투는 사실이었고, 그녀의 증오와 치욕도 사실이었다. 남자의 잔인한 성적 탈취로 여자가 누명을 쓴 여자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모든 사람이 쉽게 수용한다. 엠마는 “성적(性的) 정의”라는 것을 통해 비성적인 목적을 달성한다. 에로티시즘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치욕을 복수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런 주제는 『브로디의 보고서』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인 「침입자」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침입자’란 훌리아나를 뜻한다. 두 형제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끈끈한 형제관계를 유지하던 중, 형인 크리스티안이 정부(情婦)이자 애인인 훌리아나를 데려온다. 그러자 이웃들은 두 형제들이 카인과 아벨처럼 끝맺을 것이라면서 생각한다. 그러나 훌리아나의 요기(妖氣)가 그들의 평화에 위협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은 자기 동생 에두아르도가 그녀에게 반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재산을 동생과 함께 소유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훌리아나와 함께 있도록 해. 그리고 원한다면, 저 애를 사용해도 좋아”(1026) 여기에서 여자는 황소처럼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두 형제는 그녀의 욕망과 감정은 철저히 무시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형제애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훌리아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질투를 느끼면서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날 밤부터 그들은 훌리아나를 함께 소유했다... 그런 협정은 몇 주 동안은 아주 잘 이루어졌다... 거칠고 힘든 변두리에서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 생애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말하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에 대한 욕망과 소유욕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것이 바로 그들을 창피하게 느끼도록 만든 것이었다.(1026)


     형제애를 되찾기 위해 형제들은 훌리아나를 창녀 집에 팔아버리고, 몸값으로 받은 돈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창녀 집에 들러 훌리아나와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이 비밀리에 이런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다시 훌리아나를 사서 이전의 계약대로 행한다. 그러나 여자를 공동 소유한다는 것은 다시 형제애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의 성적 침입이 두 사람간의 사이를 깨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크리스티안은 훌리아나를 죽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 속에 내재한 성적 ‘악마’와 맞서 싸운 것이었다. 그는 성적인 관계보다 형제애를 택한다. 보르헤스에게 이런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관계보다 형제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형제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은 거의 울먹이며 서로를 껴안았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유대관계에 의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즉 두 사람 모두 쓸쓸히 희생당한 여인과 그 여인을 잊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1028) 따라서 육체적인 사랑은 폭력을 통해 형제애에 굴복하고 만다. 살인을 통해 성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성교를 중요치 않게 여기는 보르헤스의 관점을 엿보게 해 준다. 즉, 성교란 인간의 열등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보다 상위적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형제 관계를 재확인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작품뿐만 아니라 「브로디의 보고서」「결투」「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등에서도 보르헤스는 이성간의 육체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동성연애나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성교 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 보르헤스는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관계라고 일컫는 것들을 모두 피하지만,『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에서『브로디의 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성관계’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성교라는 육욕의 짐승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속물로 사용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모래의 책』: 에로스를 통한 시간과 공간의 극복

     『모래의 책』에 수록된 「울리카」와 「의회」는 에로스가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이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을 띠고 있다. 「울리카」는 콜롬비아의 로스 안데스 대학교 교수인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영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우연히 만난 노르웨이의 여자와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한편『모래의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인 「의회」는 비밀 조직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사랑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이전의 보르헤스 작품 세계와는 달리 사랑의 감상적(感傷的)인 면과 남녀간의 성관계를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울리카」에서 화자인 하비에르 오타롤라는 조용하고 신비스런 울리카를 만나자 자기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을 즉각적으로 예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옆에 또 다른 사람이 있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Libro 27) 그녀 역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은 “나이가 지긋하게 먹은 독신 남자에게 자청해서 주겠다는 여자의 사랑은 기대치 않은 선물과 진배없다” (Libro 28)라는 말에서 쉽게 간파될 수 있다. 하비에르 오타롤라는 지난날의 잃어버린 사랑을 회상하면서, 그녀가 어떤 조건을 붙이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들은 서로를 지구르트와 브륀힐트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헌사로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날 밤 절대로 따로 자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둠 속으로 백년만에 처음으로 사랑이 흘러들었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Libro 31)

     여기에서 보르헤스가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라는 말은 두 사람이 성교를 통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교의 완성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총체적인 경험이 성취되었으며, 말하는 주체 , 즉 경험한 순간과 그것을 말로 적는 순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보스헤스의 글쓰기에서 주요 핵심은 경험의 순간과 글쓰기 순간의 커다란 간격을 인식하면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에로스의 문제가 그의 글쓰기 양식에도 변화를 가져옴을 뜻한다. 이런 면은 「의회」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의회」에서 화자인 알레한드로 페리와 그녀의 새 애인 베아트리스의 사랑의 에피소드의 핵심은 바로 청혼을 하는 화자에 대한 그녀의 대답에 있다. 그녀는 프리섹스의 신봉자로서 “아무에게도 구속되길 원치 않았다”(Libro 55). 그러자 그는 즉시 시적인 황홀감의 격류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밤이여, 오! 당신과 함께 보내는 따뜻한 어둠이여, 오! 숨겨진 강물처럼 어둠을 흘러 다니는 사랑이여, 오! 한 사람이 두 사람 되는 환희의 순간이여, 오! 너무 순결하고 순진한 환희여! 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되고, 함께 꿈속으로 빠져드는 결합은 행복하나이다, 오! 새벽의 여명이여,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나이다 (Libro 55)


     얼마 후, 그들은 지난겨울에 만났던 대영 박물관에서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편지를 기다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Libro 56) 그는 자기의 주소를 그녀에게 남기지 않는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지만, 그들의 성적 결합은 단 하나의 환희의 순간이자, 단 하나의 밤이며, 단 하나의 여명이자, 단 하나의 꿈으로 상징화된다.

     그런데「의회」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알레프」와 유사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알레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언어는 상징들의 알파벳이며, 그 알파벳의 사용은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편들이 공유하는 과거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허우적거리는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무한한 알레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신비주의자들은 상징에 의존했다. 가령 신성성을 뜻하기 위해 어느 페르시아 사람은 어찌 보면 모든 새를 대표하는 어느 새에 관해 말한다..... 아마 신들도 내가 이와 유사한 표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624-625)


     「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서 등장한다. 페리는 비밀 의회의 다른 회원과 함께 공유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새기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이란 함께 공유된 기억을 필요로 하는 상징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장미 한 송이, 한 번의 키스, 그리고 모든 새들을 의미하는 새 한 마리, 모든 별들과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 한 개, 포도주면, 정원이나 성교와 같은 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메타포는 길고 길었던 환희의 밤을 이야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 밤이 끝나고 서광이 밝아올 무렵, 피곤했지만 행복에 젖어있었다...... 나는 수년 동안에 걸쳐 그날 밤의 맛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언젠가 나는 음악이나 사랑, 혹은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렸다고 믿는다.. 그러나 되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번 어느 날 새벽 꿈속에서 찾아왔을 뿐이다.(Libro 61-62)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제는 이 두 작품에서 유사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경험의 내용과 본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알레프의 신비적인 모습은 고독하고 차가우며 축소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화자만이 느낀 충만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경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 도구는 불완전하지만, 타인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가 쓰고 있는 매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보르헤스는 자기의 경험을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접근하며, 거기에서 우리는 보르헤스와의 ‘공유된 기억’을 끌어낼 수 있다. 

     반면에「의회」에 표현된 환희의 밤에 있어서, 페리가 음악과 사랑을 통해 필사적으로 되찾으려고 추구했던 경험은 단지 꿈에서만 회복된다. 이것은 일상적 의미의 신비적인 것도 아니며 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마지막 경험, 즉 “내 평생에 단 한번 있었던 그 믿지 못할 사건”(47)으로 인식된 것은 추상적인 철학적 관념의 법규였으며, 그것은 “모든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자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세계 의회는 해체되며, “진정한 의회”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유기체임을 깨닫는다. “그 비밀스런 사건에 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파수꾼”(Libro 37)으로써 페리는 약속을 깨뜨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면서 베아트리스와 함께 보낸 밤을 회상하며 그녀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한다. 페리는 베아트리스가 한 남자만을 사랑할 것을 거부한 베아트리스의 경험을 통해 공동의 경험이 개인의 관념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이 작품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는 아이러니는 바로 ‘의회’란 말의 의미는 ‘성적 결합’이라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5. 끝나는 말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은 보르헤스의 태도가 초기부터 순수했던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통해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성관계가 목적이 되었다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후에는 진정한 성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르헤스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픽션들』과 『알레프』를 보면, 성적 열정은 무언가 모자라는 열등한 것이며, 심지어는 환멸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보르헤스의 글쓰기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반영한다. 즉 성교를 비성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전복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사랑을 찬양하지만, 육체적 열정이 보여주는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측면에 분개한다. 그는 성관계가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엠마 순스」에서 수단은 합리화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사랑이 주인공이 성관계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침입자」에서는 형제애를 간직하고 고양하는 것이 형의 마음속에 최고의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모래의 책』에서는 이런 태도가 다시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을 통해 그 동안 지녔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의 세계를 탈피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형이상학적이고 언어적인 문제들의 해결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런 사실을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성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늙은 나이에「울리카」와 「의회」라는 작품 속에서 마침내 성경험을 통해 그의 문학관념을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흔히들 보르헤스의 후기 작품은 『픽션들』과 『알레프』의 반복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보르헤스 연구가들은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관심을 보이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위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전 작품 속에서 항상 동일하게 사용되어 온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발전되어 왔으며, 그것이 그의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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