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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젠가는 "사막의 꽃뱀"이 될지도 모른다...
2016년 10월 28일 22시 32분  조회:4006  추천:0  작성자: 죽림

 

1. 귄터 쿠네르트 [라이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쇠로 만든

공 안에서

죽은 개 한 마리가 날마다

우리의 지구 주위를 돈다.

경고로서,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위성인

지구가

죽은 인류를 실은 채

언젠가는 그렇게

해마다 태양 주위를

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로서

- 귄터 쿠네르트 [라이카](김용민 역)에서

 

 

 

귄터 쿠네르트는 이 시에서 우주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이 벌이는 비생명적인 행위를 비판한다. 시인은 인간의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무인위성과 지구의 운명을 냉소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생체실험을 위해 쏘아올린 위성에 실려 죽은 채로 돌고 있는 개의 운명은 생태계의 교란으로 다가올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끔찍한 경고로 들린다.

인간들은 무인 우주선 안에 개 한 마리를 넣어 지구 주위를 돌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우주선에서 죽은 채 돌고 있는 개의 운명을 인류가 환경파괴로 인해 파멸하여 전멸한 채 태양을 돌 수 있다는 암시를 끔찍하게 비유한다. 가장 좋은 쇠로 만든 공은 인공위성을 의미하며 개는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우주에 쏘아 올린 것이다. 그 위성이나 지구는 운명적으로 지구와 태양을 계속 돌도록 유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태계나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 몰고 올 위기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시사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순간에 핵이 전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2. 하인츠 쉬네바이스 [무제]

 

 

 

그녀가

씻지 않은

하나를

먹었다

그녀의

배가

부풀어올랐고

그녀의

몸이

퉁퉁 부었고

그녀의

다리가

부어올랐다

그리고

피부 세포들이

박편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인츠 쉬네바이스 [무제](김용민 역)에서

 

 

독일의 생태시인 하인츠 쉬네바이스는 이 시에서 농작물의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인체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사실적인 묘사로 표현한다. 시 속에 나타나는 여인은 환경오염에 의해 희생되어감으로써 인간이 물질적 욕망에 의해서 철저히 인간적 가치에서 타자화되어 있다. 오염된 물과 땅에서 자란 농약을 잔뜩 뿌린 과일 하나로 많은 생명들이 자신도 모르게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자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희생되는 인간의 수보다 자본으로 환산되는 과일의 수가 더 중요하다. 자연환경을 무시하고 물질적인 업적이나 상업적 이익을 위한 생산량에만 치중할 경우 나타날 결과는 과연 가공할 만한 상태일 것이다. 이것이 외부에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신들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인류 스스로 저질러 놓았기 때문에 남의 탓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문명이 만들어놓은 황무지 같은 사막은 낙원과는 정반대이다. 콘크리트, 아스팔트, 독극물, 기름, 핵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은 생각만 해도 흉측스러울 뿐이다.

 

 

 

 

 

3. 죠르그 힐셔 [사막의 아들]

 

 

 

내 기쁨을 어찌 제어할 수 있으랴

저기 언덕들 뒤의

가장 아름다운 사막에서 살게 될지니

그곳에는 콘크리트 사막 아스팔트 사막

독극물 사막 기름 사막 핵 사막

그리고 쓰레기 사막이 있으니

이들 사막에서 살게 될 일이 얼마나 기쁘랴

-죠르그 힐셔 [사막의 아들](김용민 역)에서

 

 

죠르그 힐셔는 인류를 ‘에덴의 아들’ 대신에 ‘사막의 아들’이라고 명명한다. 그의 생태시는 극단의 반어적 어법을 구사한다. 사실 사막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가 “내 기쁨을 어찌 제어할 수 있으랴”라고 기쁨의 감탄어를 토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비통의 신음소리처럼 들린다. 시인이 모순되게 슬픔을 기쁨처럼 표현한 것은 인류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풍자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그들에게 생태가 파괴되고 쓰레기로 가득 찰 세상에 살아야 할 인류에 대해서 충격적인 경고를 하고 싶은 것이다. 즉 시인의 전 지구적 자연파괴에 대한 관점은 인류가 이루어낸 과학기술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시인은 인류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비전을 진보에 두고 있는 것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 후손들이 미래에 살아가야 할 지구에 대해서 애도하는 마음을 [사막의 아들]이란 시로 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이 지니고 있는 늪, 수렁, 감탕 흙, 천연 못 등과 같은 습지는 생명과는 무관한 곳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 해내고 또 해내서 살아남은 생명력과 생존으로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아이러닉하게도 인간은 이런 생명의 연속성이 담보된 지구를 전혀 생명이 생존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것을 힐셔는 역설적인 생태시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가 그의 시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적 공간을 파괴한 결과로 “사막에서 살아야 할 것임을, 즉 우리가 ‘사막의 아들’이 되고 말 것임을”(김용민) 경고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4. 루드비히 펠스 [소비 테러]

 

 

 

우리가 날마다

새옷으로 갈아입고

적어도 여섯 개의 메뉴를 먹어 치우고

오로지 진열품에만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할 것이다.

우리의 눈은

진열장을 보며 무조건 빛나야 하고

생생한 관심을 표명해야 한다.

날씨가 아무리 나빠도

사람들은 우리가 돌아다니며

산더미처럼 쌓인 상품을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말고 보도록 명령할 것이다.

그리고 판매원들은 백병전 훈련을 받을 것이다.

-루드비히 펠스 [소비 테러](김용민 역)에서

 

 

독일 생태시인 루드비히 펠스는 이 시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시민들을 상품의 노예로 만드는 모습을 풍자한다. 자본주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체제이다. 일단 시민들이 자급자족하는 농업이 아닌 상황에서는 대량생산의 공장과 대량판매의 유통시설이 되어야만 경제가 돌아가게 되어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땅을 경작하는 대신에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만들어진 상품들은 수많은 유통시설을 통해서 판매되지 않으면 경제는 불황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문제는 인류가 생존의 문제를 이 시스템에 의존하는 이상 자원을 개발하여 대량생산을 위한 원자재를 만들어야 하고 그 원자재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소비자를 대량소비로 끌어들이는 판매이다. 생산을 하는 회사는 생산원가 이상의 자본으로 매스 미디어와 신문을 통해 엄청난 광고를 한다. 광고는 종교가 교리를 전파하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현대인의 머리를 세뇌시키고자 한다. 루드비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슈퍼마켓을 종교로 제정해 줄 것이다”라고 희극적으로 비유한다. 결국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을 파괴함으로써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김용민).

이 시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은 마치 점령군이 무기를 들고 점령지의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그들의 광고 전략에 말려들지 않는 자들에게 “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총구가 이미 불을 뿜어” 광고지 앞에 무릎을 꿇어 굴복시키고 만다. 결국 소비자는 상품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구매여부를 결정하기보다는 신의 경전대로 살아가는 세뇌된 맹신도처럼 무조건 광고 문구에 순종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루드비히 펠스가 풍자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문명의 주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조종을 받는 객체로서 로봇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죠르그 힐셔가 [사막의 아들]에서 경고한 것처럼 지구는 대량소비로 인해 쓰레기 더미로 휩싸이고 말 것이다.

 

 

 

 

5. 위르겐 테오발디 [새로운 자족을 위하여]

 

 

 

오랫동안 나는 내 옷들과 살아왔다!

바지는 4년이나 되었는데

주머니며 허리띠, 엉덩이 판 같은

좋은 바지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여전히 다 지니고 있다.

바지는 부드러운 천으로 내 가냘픈 무릎을

그대의 손에 매력 있게 만들어준다!

-위르겐 테오발디 [새로운 자족을 위하여](김용민 역)에서

 

 

독일 생태시인들은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서 비판하고 경고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파괴되어가는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르겐 테오발디는 “새로운 자족을 위하여”란 시에서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행동 지침을 내놓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에 대해 예전보다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건들이란 인간과 같은 시공간을 함께 공유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실용적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용자 자신과 함께 살아온 물건들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고 삶의 역정을 담겨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은 광고가 조성해낸 분위기 때문에 그것들이 유행에 맞지 않다거나 조금 낡았다는 이유로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다. 테오발디는 이 시의 1연에서 이런 소비경향을 비웃는 듯 4년이나 입은 바지가 아직도 옷으로서 기능을 다할 뿐 아니라 시인의 육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지적한다.

테오발디는 생태계의 보호를 위해서는 단순한 생명체 중심주의로만으로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경향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시인은 생태계는 분명 유기체뿐만 아니라 무기물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둘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대인의 생태의식이 절제나 금기 같은 도덕적 책임감으로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테오발디는 인간의 정체성을 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색깔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들은 모두 삶의 요소로 소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기체로서 인간과 무기물로서 물건들을 적극적으로 화해시키고자 한다. 패트릭 머피(Patrick D. Murphy)의 정의에 의하면 생태학이란 “원자료를 우리 마음대로 부리기 위한 일종의 관리체계가 아니”라는 인식이며 생태문학은 “나와 사물, 그리고 장소의 연계를 아우르는 공동체의 존재가 있을 수 있게”(최동오) 한다. 테오발디는 시의 화자와 친구 디터의 외투라는 사물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를 생태적 조화로 보고자 한다. 사람과 의복이 서로 어울려서 보호적 기능과 미학적 멋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타인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인간적 가치를 반추함으로써 현재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와의 재결합을 시도하고자 한다. 시인은 2연에서 옷장 속의 친구 디터의 외투가 최신 유행이 아니고 값비싼 옷도 아니지만 친구가 따뜻한 곳으로 떠나면서 남겨준 옷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외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 그 외투는 친구 디터가 입었던 것으로 그것을 볼 때마다 친구와 추억을 생각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기물인 외투에 친구의 우정이라는 인간적인 가치를 적극적으로 둠으로써 인간과 물질과의 관계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친구 디터는 자신에게 불필요하게 된 외투를 시인에게 넘겨줌으로써 물건의 재활용을 하여 자원을 절약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대량생산과 대량생산이라는 환경문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외투는

몇 년 전에 베네수엘라로 간 디터의 것이다.

가을이면 나는 그것을 옷장에서 꺼내 입으며

더운 나라에 있을 디터를 생각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외투와

헤어져야 하는가? (김용민 역)

 

 

테오발디는 그가 신었던 신발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정에 대해서 제3연에서 노래한다. 그의 신발은 진열장에 놓여 있는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역정을 함께한 그의 일부분이다. 그와 인생의 행-불행을 함께 한 신발은 그의 삶 그 자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발을 어떻게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그 신발을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침대 곁에 두고자 한다. 그야말로 인간과 물질의 일심동체를 느낄 수 있는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밤마다 내 침대 앞에

놓아두는 내 신발

그것이 아직 보지 못한 게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발걸음을 이들은

나와 같이 했던가. 내가 그것들을 신고

길을 걷고 매 걸음마다 밟아줄 때마다! (김용민 역)

 

 

시인은 마지막 4연에서 자신을 위해 헌신해온 물건들에게 존경과 무한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내 옷들이여 영원하라”라고 찬양하면서 그것들이 없다면 자신은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자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낡은 옷을 입었을 때 오히려 안락을 느끼고 시적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토로한다. 테라발디의 자세야말로 생태시인으로서 미래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본다.

테라발디의 생태시는 단순한 환경이나 생태의 파괴에 대한 고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위기의 원인을 인간과 그가 사용하는 물건 등의 무생물과의 소원하거나 분열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치유하고자 한다. 그 사물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한 수단만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켜온 것이다. 그 사물 속에 친구와의 우정이나 자신의 삶의 역정들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때 사물에 대해서 함부로 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인한 자원의 무한 개발과 폐기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테라발디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관계를 유기체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한몸을 이루고 있음을 시를 통해서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테오발디가 문명사회의 일상생활의 개선을 통해서 생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심층생태론이 주장하는 대로 실생활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생태운동이 “이상적이고 낭만적 성격을 띠는 탈인간중심적 자연관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허”(신두호)하며 그 효과에 대해 회의적일 수 있기에 문명사회 속에서 생태적 실천이야말로 해결적 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근(대진대 교수) [독일 생태 시인과 박영근 생태시 비교]에서 뽑고 편집.

(독일 시 출처: 김용민 [생태사회를 위한 문학], 『현대문학』 46권 7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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