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김형효,『데리다의 해체철학』, 서울: 민음사, 1993, 207쪽, 참조.
92 • 수사학 제 8집
9쪽)라고 규정한다. 차연의 시간적 실인 기억, 대기, 연기, 유보, 저
장, 유예 등의 개념과 차연의 공간적 실인 차이, 거리, 행간, 사이,
자간 등의 개념은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시간이 공간으로 또 공간
이 시간으로 변용될 수 있다. 그래서 차연은 ‘시간의 공간되기’(becoming
space of time) 혹은 ‘공간의 시간되기’(becoming time of
space)가 서로 교차하는 직물로서 표상된다. 그런 점에서 차연은 수
사학에서 말하는 ‘교차적 배어법’(chiasmus)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11) 따라서 “의미작용이라는 운동을 가능하게 하
는 만드는 것으로서” (MP, 13쪽) 차연은 언어와 의미의 가장 근원
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동일성과 차이, 차이와 연기, 반복과 타
자성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이상한 논리인 차연은 우리가 결코 따
라잡을 수 없는 탁구공이다.12) 탁구공을 때리는 선수들의 차이와
다양성에 따라 탁구공의 움직임 역시 차이와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탁구공을 우리는 한 번도 고정된 시각에서 볼 수 없
다. 이런 이유로 해서 차연은 (텍스트의 다양한 맥락에 따라) ‘흔적’,
‘파르마콘’, ‘문자’, ‘대리보충’, ‘고막’, ‘쇼핑목록’13), … 등으로 변할
수 있다. 때문에 차연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차연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던
가?
11) 김형효, 같은 책, 214쪽. 교차적 배어법은 2개의 같은 관계에 있는 구 또는
절이 반복될 때의 어순의 전치(轉置)를 말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죽기위해
살지만, 우리는 살기위해 죽는다”와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또한 ‘X’, ‘+’
와 같은 문자들도 교차적 배어법을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12) 니콜러스 도일, 같은 책, 174쪽.
13) 데리다의 차연을 엘리자베스 바우엔(Elizabeth Bowen)의 소설『마음의 죽
음』(The Death of Heart, 1938)에 나오는 쇼핑목록과 비교하는 글을 위해
서는 니콜러스 로일,『데리다의 유령들』, 168-181쪽을 참조할 것.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3
4.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언어적 환
경에 둘러싸여 양육되고, 학습의 과정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세
계 속의 대상들을 언어의 의미화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성장하는
언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인간 정신 활동의 산물이다. 여
기서 말하는 언어는 단순히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말과 글뿐만
아니라 낱말을 통해 대상을 알 수 있는 지시적 언어들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지시적 언어를 통해서만 낱말의 의미를 획
득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과학 혹은 음악, 미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체적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추상적, 혹은 상징적인
영역에서 언어가 작동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인간은 언어
의 사용을 통해 삶과 세계 속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행
위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와 인식에 있어
서 언어의 고정점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말과 글을 가지
고 지식과 지혜를 전수받고, 문제의 해결 방식을 강구하며 미래를
계획한다는 점에서 언어는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가 된다. 이런 맥
락에서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작업은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한
언어놀이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를
통해 다음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분명히 밝히는 데
있었다.
(1)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2) 한 화자가 자신들의 공통 언어에서 표현을 하는 것처럼,
다른 화자가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94 • 수사학 제 8집
4.1 본질주의 비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될 만큼 사유 방식
에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언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
다. 그가 제시한 철학의 문제는 한 마디로 ‘언어를 언어로서 가능하
게끔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물음
속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의미와 이해의 문제가 함축되
어 있다. 칸트가 이성 능력의 비판을 통해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구
분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적 역할과 그 한계를 명확
하게 구분함으로써 기존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집약되어 있는『논고』에 의하면,
진리는 지식을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선천적인 기준
에 의해 결정되는 실재론과 관련이 있다. 실재론에 의하면, 현실 세
계뿐만 아니라 가능 세계에 있어서 진리를 가늠할 수 있는 선천적
형식들이 있다. 실재론에 입각한 의미론적 본질주의를 그대로 계승
한『논고』의 주된 관심은 이상 언어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
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데 있다. 언어의 본질은 논리적 공간의 세계
를 ‘그리는’ 것이다.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그렇
게 생각하는 실재의 모형이다.” (TLP, 4.01)
그러나 언어의 사용과 의미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후기에
서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곧 당혹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며, 이는 진정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선행 조건에 해당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
는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제로 느껴진 혼란” (BB, 6쪽)이며,
“철학적 문제는 ‘내가 어느 길을 가야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형식을
갖는다.” (PI, §123) 철학자들이 부딪히는 난점의 진정한 원천은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5
내부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깊은 데 있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의 존재를 알기조차 어렵다.
철학자는 건전한 인간 지성의 개념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의
지성의 수많은 질병을 스스로 치유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
가 삶 속에서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와 같이 우리는 오성(이
해력)의 건강 속에서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RFM, IV §53)
세계와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이나 기존의 철
학자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사유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려는 비트겐슈
타인은 철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목적은 가장된 헛
소리에서 명백한 헛소리에로 옮겨 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PI,
§464) 철학적 당혹의 주된 원천은 언어에 대한 오해와 인식 초월
적인 형상 내지는 본질을 추구하려는 “일반성에 대한 열망” (BB,
17~18쪽)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그는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이 본질
에 집착하는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의
사용에서 비롯되는 차이와 다양성을 간과해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그림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철학적 질병에 걸린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이『탐구』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은 바로
존재와 세계에 관련된 기존의 사유 방식과 개념들의 의미에 대해
비판하는 언어적 문제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언어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며 똑같은 문법적 범주에 있는 낱말들은 모두
똑같은 식으로 기능한다는 전기의 생각으로부터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로 전환한다. 낱말의
의미는 낱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도 아니며, 낱말을 둘러싼 어떤
정신적 분위기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낱말의 사용에 있다.『논
고』에 의하면, 명제가 하는 일은 단 하나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다. 그러나『탐구』에서는 낱말과 명제들은 광범위하게 다양한 상황
96 • 수사학 제 8집
들에서 적용되며, 적용을 하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
준이 있다는 점과 함께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과 명제를 어떻게 ‘이
해’하는가 하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실재의 그림이 아닌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며, 서로 다
른 언어는 연장통에 있는 서로 다른 연장들처럼 아주 다양한 용도
를 갖는다. 어떤 연장에도 고유한 용도에만 쓰이는 단 하나의 용도
가 없는 것처럼 (이를테면, 망치는 못을 박기도 하지만 못을 빼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낱말이
나 문장도 마찬가지로 단 하나만의 본질적인 용법이란 없으며, 여기
저기에 ‘유사성’14)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은 낱말들
이 우리에게 말해지거나 원고 또는 인쇄된 글에서 우리와 마주치게
될 때 그 낱말들이 지니는 겉모습의 획일성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사용은 우리 앞에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철학을 할 때에는!” (PI, §11)
일상 언어의 다양성과 차이에 대해 주목할 것을 강조하는 비
트겐슈타인의 생각은『탐구』§156~178에서 논의되는 ‘읽기’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신문 속에 있는 기사를 읽는
것과 그 기사를 읽는 체 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처
럼, 그는 단순히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차이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읽기’를 일종의 규칙따르기로 생각한다. 즉 ‘읽기’는
14)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유사성은 비유사성을 수반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놀이들은 미래의 어떤 언어 규제를 위한 예비 연구들
- 말하자면 마찰과 공기 저항을 고려하지 않은 최초의 근사치들 -이 아니
다. 오히려 그 언어놀이들은 유사성과 비유사성에 의해 우리의 언어 상태
에 대해 어떤 빛을 던져야 할 비교 대상들로서 있다.” (PI, §130) 그런 점
에서 유사성은 언어의 본질을 가정하는 언어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의 역할
을 수행한다. 동시에 그것은 흄에게서와 같은 자연성을 논할 수 있는 계기
이기도 하다. 양은석,『논리철학』(미출간본), 2007, 160쪽.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7
읽고자 하는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나 인쇄
된 것을 규칙에 따라 소리로 바꾸어 놓은 활동이다. (더 나아가 구
술하는 것에 따라 적는 것, 인쇄된 것을 베껴 쓰는 것, 악보에 따라
연주하는 것 등등도 읽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읽기’는
“어떤 하나의 특별한 의식적 정신 활동” (PI, §156)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는 “이러이러하게 써진 글자에 반응하는 것을 뜻
하며, … 학생이 읽기 시작했을 때의 변화는 그의 행동의 변화였
다.” (PI, §157) 읽기 위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행동적인 기술
(technic)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을 갖는 것은 일정한 종
류의 경험을 겪는 문제나 의식의 조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
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언어적인 기호를 단순히 지각하는 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의 영역에서 생각할 문제이
다.15)
중국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을 때, 우리는 그의 말을 분절되지 않은
‘쏼라쏼라’와 같은 소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소리 속에서 언어를 인식할 것이다. (CV, 15쪽)
전통적 철학에 의하면, 언어와 사유의 기초들은 선천적인 원
리, 수학의 공리, 자명한 진리 혹은 직접적인 경험이나 감각 자료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
하면, 규칙을 따르는 인간의 행위에는 삶의 다양한 양식들이 주어졌
다는 자연적 조건을 외면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본래적으로 규
칙을 따르는 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논
리는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 수많은 자연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즉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으며 자연스럽게
15) McGinn, Wittgenstein on Meaning, Oxford, Blackwell, 1987, 46-47쪽.
98 • 수사학 제 8집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이다.16) 이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언어 사용의 자연성을 본능을 빌어 설명하는 것과 통한다. 그에 따
르면, “언어 사용은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자연적 본능에 의한
것이다.” (OC, §475) 그러면서도 중요한 점은 몇 가지 기술들이
우리들에게 예를 통해 설명된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이러이러한 하나의 기
술을 가르친다면, 그랬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진행하며 어떤 특정
한 새로운 경우에는 저런 식으로 하지 않거나, 혹은 그가 저런 식이
아닌 이런 식으로 계속하는 것은 그에게는 ‘자연적인’ 지속인 것이
다. 이 점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자연의 사실이다. (Z, §355)
언어의 도구적 측면과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동시에 파악함으
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의미 이
론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단순히 하나
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들
의 집합체인 동시에 언어는 어떠한 규칙들, 즉 언어에 있어서 다양
한 용법을 ‘규제하는 규칙’17)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일련의 활동들이
16) 스트로슨이나 핸플링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반회의적 특성을 통해 그의
철학을 흄의 자연주의로 해석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종속논제’와 ‘선험논
증’을 빌어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흄의 자연주의로 간주한다. 핸플링에 의하
면, 정당화될 수 없는 근본 신념은 의심할 수 없는 삶에서 당연히 받아들
여야 할 것이고, 그러한 점을 이성이 본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종속 논제
를 통해 보여 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연적, 본능적 반응을
빌어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는 근본 신념들의 그러한 성격
을 강조한다. 이하 자세한 논의는 양은석, 같은 책, 제6장 ‘비트겐슈타인과
자연주의’, 144-167쪽, 참조할 것.
17) 규칙의 차이를 규칙의 지위와 관련시키면 규칙에는 구성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이 있다. 구성적(constitutive) 규칙은 게임이나 모종의 행위를 가능하
게 하는 규칙으로 테니스의 규칙, 또는 카드 게임의 창시자가 카드 게임에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99
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것의 개념들은 도구
들이다.” (PI, §569)
4.2 언어놀이와 문법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은 (전기의 그림이론과 달리) ‘언어놀
이’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라는 말
이 주는 가벼움 탓에 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 가볍고 경박하
다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과연 언어와 놀이라는 개념이 잘 통할
수 있는 조합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언어를
놀이와 연관시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언어를 말하는 것과 비
언어적 활동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실제로 언어를 말하는
것은 공동 사회 활동의 일부, 즉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에게 자연적
으로 주어진) ‘삶의 형식’에 포함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비
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의 용법에는 다양한 쓰임
이 있음을 주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언어놀이에 대한 개념은 이미
중기의『청색책』에서 등장하고 있다.
부여한 규칙과 같은 것을 말한다. 구성적 규칙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집
합적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명령문보다는 보통 서술문으로 표현되어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가령 테니스를 정의하는 구성적 규칙이
없이는 한 점을 따거나 한 세트를 이기는 것은 물론 서브를 하거나 서브를
받는 행위가 불가능하다. 다른 한 편, 규제적(regulative) 규칙은 개별적으
로 완전한 의미를 지니며, 서술문보다 보통 명령문으로 표현되며, 그 규칙
에 의해서 조정하려는 동작이나 행위를 이미 가능한 것으로 전제한다. 체
스의 규칙이 구성적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하여 체스의 전략은 규제
적 규칙이다. 뉴턴 가버 ․ 이승종,『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 이승종 ․ 조성
우 옮김, 민음사, 1998, 173쪽.
18)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있어서 ‘언어놀이’, ‘규칙’, ‘실천’, ‘삶의 형식’
등은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100 • 수사학 제 8집
나는 미래에 되풀이해서 내가 언어놀이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들
에 여러분들의 주의를 돌릴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매우
복잡한 일상 언어의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들보다 단순한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들이다. 언어놀이들은 어린애가 낱말들을 사용하기 시
작하는 언어의 형식들이다. 언어놀이에 대한 연구는 원시적인 언어
의 형식들이나 원시적인 언어의 연구이다. 우리가 참과 거짓, 명제
의 실재와 불일치, 주장, 가정, 그리고 물음 등의 본성에 대한 문제
들을 연구하려 한다면, 우리가 매우 복잡한 사유의 과정과 같은 혼
란한 배경이 없이 이러한 사유의 형식들이 나타나는 원시적인 언어
의 유형들을 보는 것은 상당히 유리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언어
의 단순한 형식들을 볼 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의 쓰임을 가린 것
처럼 보이는 안개는 사라진다. (BB, 7쪽)
중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언어놀이 개념을 착상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의도들이 있었다. 수학의 ‘계산’을 ‘놀이’(게임)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수학기초론에서 논의되는 플라톤적 실
재론이나 유명론적 형식주의와 다른 차별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었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놀이가 그 자체로 어떠한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계산 체계 역시 그 자체로 완전하며, 놀이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구성 혹은 발명된 것처럼, 수학 역시 마찬가지
이며, 놀이가 자율적인 것처럼, 계산 체계 역시 자율적이라는 점이
깔려 있다. 이러한 놀이의 개념은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놀
이(게임)에서 규칙의 역할은 언어에서 규칙의 역할과 유사하다. 놀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놀이 역시 인간의 자율적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 혹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고정된 규칙에 의거한
계산 개념은 일상 언어의 유연함과 다양성을 말하는 데는 한계가 있
다. 이상언어에 입각한 논리적 사고로부터 일상 언어에로 전환을 모
색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서 충분하게 엿볼 수 있다.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1
우리가 실제의 언어를 더욱 정확하게 고찰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
구 사이의 충돌은 더욱 강해진다. (논리학의 수정체 같은 순수성은
실로 나에게 탐구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였다.) 그 충돌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 요구는 이제 공허한
어떤 것으로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걸어갈
수도 없는 빙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고 싶다; 그렇다면 우
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되돌아가자! (PI, §107)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삶의 세계는 수많은 우연성들이
작동한다. 이러한 세계를 논리적 참과 거짓이라는 이상언어로 그려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마찰이 있는 일
상 언어로 관심을 돌린 것은 일상 언어의 다양한 쓰임과 맥락을 무
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언어의 실천적 활동을 주목하며
언어놀이가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글은 언어
놀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으며 언어놀이
의 다양한 목록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기호들’, ‘낱말들’, ‘문장들’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상이한 종류
의 사용이 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고정된 것, 딱 잘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새로운 유형들, 새로운 언어놀이들이라
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고, 다른 것들은 낡은 것이 되어 잊혀
진다. (수학의 변화들이 우리에게 이에 관한 하나의 대략적 그림을
줄 수 있다.)
‘언어놀이’란 낱말은 여기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
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들에서, 그리고 다른 예들에서 언어놀이의 다양성을
똑똑히 보라:
명령하기, 그리고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
어떤 하나의 대상을 그 외관에 따라서, 또는 측정한 바에 따라서 기
102 • 수사학 제 8집
술하기-
어떤 하나의 기술(소묘)에 따라 어떤 대상을 제작하기-
어떤 하나의 사건을 보고하기-
사건에 관해 추측들을 하기-
어떤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검사하기-
실험결과들을 일람표와 도표로 묘사하기-
어떤 하나의 이야기를 짓기; 그리고 읽기-
연극을 하기-
윤무곡을 부르기-
수수께끼 알아맞히기-
농담하기; 허튼소리하기-
어떤 하나의 응용 계산 문제를 풀기-
어떤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부탁하기, 감사하기, 저주하기, 인사하기, 기도하기. (PI, §23)
그렇다면 언어를 놀이와 관련시키는 궁극적 이유는 무엇인가?
언어와 의미는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러
한 실천적 행위의 문맥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
의 사용에 있어서 의미와 행위 간에는 놀이가 연관되어 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낱말이 의미를 얻는 다양한 언어놀이를 (사
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연사와 관련시킨다. “명령하기, 질문
하기, 말하기, 잡담하기는 걷기, 먹기, 마시기, 놀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연사의 일부이다.” (PI, §25)19) 자연사의 일부인 언어놀
이는 어떤 하나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 그
리고 유사성으로 중첩된 인간의 실천적 활동과 관련된 복잡한 네트
워크를 형성한다. 이런 이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를 ‘가족유사
19) 자연사와 관련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다음의 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
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인간 존재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다. 그러
나 우리가 불러일으키려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
문에 아무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다.” (PI, §415)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3
성’(family resemblance)으로 설명한다. 밧줄은 그것을 형성하는 많
은 섬유들이 중첩됨으로서 강한 힘을 갖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관
통하는 언어놀이 역시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유사성으로 중첩되었
을 경우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언어놀이는 언어적 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사학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20) 말과 글
의 긴장 관계를 수사학적 힘으로 해소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수사학에 대한 관심은 “철
학은 한 편의 시처럼 쓰듯이 해야만 한다” (CV, 28쪽)는 구절에서
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연하고 자유로운 글
쓰기를 옹호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일
상에서 익숙한 나머지 지나치기 쉬운 언어적 문제들에 대해 근원적
으로 묻고 생각하는 엄정한 과정을 통해 자기 식의 명확한 글쓰기
를 한다. “올바른 문체로 쓴다는 것은 차량을 철로 위에 한 치의 어
긋남도 없이 올려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CV, 44쪽) 그의 글을 자
세히 살피면 거기에는 은유와 유추를 통한 수사학적 표현의 힘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이라는 거대담론이 일으킨 혼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도의 변화, 혹은 봄의 방식의 변화가 요구된
다. 이러한 봄의 방식의 변화는 지적인 영리함보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함으로써 일상의 언어 사용에서 잠재된
이해와 느낌의 지평을 재발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항상 영
민함의 척박한 산정에서 내려와 어리석음의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
라.” (CV, 86쪽)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의 기술
에 의해서 철학적 문제와 오해들이 해소되고 제거되어야 하는 문법
적 탐구이다. 개념적 관계에 대한 고찰은 ‘문법적 주석’ (PI, §232)
20) 박만엽, “후기 비트겐슈타인 텍스트의 수사학적 읽기”,『수사학』, 제7집,
한국수사학회, 2007, 75-98쪽, 참조.
104 • 수사학 제 8집
내지는 ‘문법적 고찰’ (PI, §574)이다. 논리적 물음들은 실질적으로
문법적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는 무엇 때
문에 생기는가?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된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사용
을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문법에는 명확성이 결
여되어 있다- 명확한 묘사가 이해를 성립시키며, 이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연관들을 보는’ 데에 존립한다. 매개적인 중간고리들의 발견
과 발명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I, §122)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은 분명히 단 하나의 용법만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언어놀이의 다양성은 단순히 언어의
유사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차이에 의해서도 밝혀질 필요가 있다.
어떤 한 낱말의 사용을 지배하거나 그 낱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명확한 규칙을 제시한다는 생각은 철학적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철학적으로 혼란된 사람은 말이 쓰이는 방식에서 하나의 법칙을 본
다. 그리고 이 법칙을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그것이 역설적 결과로
이끄는 경우에 부딪치게 된다.” (BB, 27쪽) 더군다나 우리가 일상적
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표현들은 물론 철학적으로 흥미 있는 표현
들조차도 그것들은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며 엄격한 의미를 갖
지도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설명으로서의 철학을 배격하고 철학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한다. “어떠한 철학도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해를 주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철학은 언어의
사용을 단지 기술할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언어의 사용에 대한
기초를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
아둔다.” (PI, §124) 철학의 설명적 측면을 배격하는 그의 생각은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의미’가 어떤 정신적 실재나 활동을 가리킨다면, 우리가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5
행하는 언어놀이의 모든 측면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
러나 언어놀이는 “아무 것도 감추어져 있고, … 아무 것도 숨어있지
않은” (PI, §435)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아픔과 같은 사적인 감각
이 아픔에 대한 언어놀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문법적 규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문법적 규칙의 명료화를 통해서 철학적으로 혼동을 일으킨 문제들
과 역설들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물속에 있는 설탕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그러한
문제들이 사라지는 문법적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서
기인한다. 과학의 문제는 그 특성상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있는 반면
에, 철학의 문제들은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 과학과 달리 철학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21) 비트겐슈
타인에 의하면, 뜻의 한계와 한 표현의 사용에 대한 규칙을 결정하
는 문법은 언어의 옳은 사용을 결정할 수 있는 지표로서 ‘언어의 회
계장부’ (PG, 87쪽)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법은 논리적 필연성 혹은 필연적 진
리에 대한 지식의 근원, 언어와 실재 간의 본질적 연관성 혹은 사고
법칙의 영원성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회의적 생각을 불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철학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문제들과 거짓
으로 점철된 신비적 분위기는 ‘한 방울의 문법에로 응축된 철학 전
체의 구름’ (PI, 222e)에 의해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다.
언어에 대한 문법적 고찰을 탐구한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언어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처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생각을 언어와 문법의 임의적이며
자율적인 특성과 관련짓는다.22) 그렇게 함으로써『논고』에서 다루
21) Hacker, Wittgenstein's Place in Twentieth-century Analytic Philosophy,
Blackwell, Oxford, 1996, 109-110쪽, 참조.
106 • 수사학 제 8집
었던 실재적인 언어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이론을 포기하는 대신에,
후기에서는 일상적인 언어의 문법적 측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체계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그물망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을 구성하는 규칙들의 체계로서 문법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언어놀이를 통해서 낡은
언어들이 도태되고 새로운 언어의 유형들이 생기는 것처럼, 철학에
서도 다양한 개념의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5. 나오는 말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통은 알지 못할 미래의 즐거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데리다와 비트
겐슈타인 역시 철학이라는 기존의 권위에 서슴없이 저항하면서 고
통을 감내했던 자들이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비교하는 작업이
가능할까? 이러한 회의적 물음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와 비트겐슈타
인은 공통점과 차이들이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로고스(진리) 중
심의 거대한 철학적 담론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일치
22) 1929년 초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현상론을 “물리학이 이론을 구축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기술하는 문법” (WA, I 5)으로 기술했다. (이 구절은『철
학적 고찰』§1에서 다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결과로 비트겐
슈타인의 문법의 개념은 변해야만 했다. 1933년에 대타자본(Big Typescript)
(여기서『철학적 문법』이 발췌되었다)을 쓸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규칙은 그것들이 의미를 결정하고 그러므로 앞서 있는 의미나 실재에 대해
서 책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임의적이며 자율적이라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법적 규칙들은 자율적이다. Marion, Wittgenstein,
Finitism, and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larendon
Press, 1998, 142쪽.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107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진리 중심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철학
보다는 수사학에 그리고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을 중시했으며, 언어
(놀이)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같은 철
학 운동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한 로티(R, Rorty)의 평가도 그런대
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특히 필자는 이들이 (그동안 폄하되어 왔
던) 수사학의 지평을 여는 데 강력한 촉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이들을 통해 진리와 논리로 무장한 거대한 빙하(거대담론)의
밑바닥을 관통하려는 수사학의 솟구침을 들을 수 있었다.
텍스트, 수사학 그리고 언어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주장하는 데리다의 논
의는 결국 텍스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
에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 안에서 행해지는 차연의 놀이는 언어와
의미의 지속적인 차이와 연기를 끝없이 진행하는 일종의 힘과 같은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복잡하
게 뒤얽힌 삶의 형식을 완전하게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 안
에서 그려진 세계는 마찰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가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일부라는 생
각과 맞닿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관성에 길들여진 우리의 사고를 질
타하면서 사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봄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
다. 왜냐하면 사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은 철학적 믿음들에 의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자라온 삶의 방
식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과
세계를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은 텍스트로
시작되지 않는다.
둘째, 데리다 자신이 포스트모던한 사상가 그룹에 속하는 것
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건대 데리다는 포스
108 • 수사학 제 8집
트모던한 경향이 강하게 있다. 문자의 억압을 주도했던 음성중심주
의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교란 전략은 질서에 잠복해있는 무질서를
회생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아방가르드한 텍스트 퍼
포먼스를 스스로 연출하고 연기를 한 사람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
다. 문제는 이항 대립적 질서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목소리가 (스스
로 차연의 논리/놀이에 함몰되면서) 잘 들리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현란한 춤동작과 함께 랩을 역동적으로 부르는 래퍼의 목소리
가 중간 중간 파열되면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자신의 사고와 글쓰기에 언제나 엄정했던 비트겐슈타인
은 진리 중심의 형이상학을 거부한 점에서는 포스트모던한 사상가
에 포함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가 않게 보
아진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어느 주의에도 어느 학파
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과 자신에 대해 치열할 정도로 진솔
성을 가졌던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모던의 정점에 있는 (고급의)
문화와 예술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낱말은 오직 삶의 흐
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는 언어적 패러다
임의 전환으로서 수사학적 힘이 담겨있다. 결론적으로 텍스트와 수
사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을 통해서 더욱 그 지평을 넓
힐 수 있을 것이다.23)
23) 이 글은 한국수사학회/한국텍스트언어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2007년 (11
월 17일, 성신여자대학교) 가을철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특히
본 논문의 논평을 맡아주셨던 김종갑, 박우수 선생님의 비판적 지적에 감
사를 드린다. 그리고 본 논문을 최종적으로 심사하시면서 좋은 지적을 해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텍스트, 수사학, 언어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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