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숙/
백지 위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
시를 쓸 때 나는 신체리듬을 중시한다. 신체리듬에 따라 글이 잘 씌어지기도 하고 전혀 씌어지지 않기도 한다. 리듬이 맞지 않는 사람과 만나게 될 때 트러블이 생기거나 어느 장소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흐르는 리듬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의 리듬은 우주의 리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주행성인 지구의 위치에 따라 즉, 사계절 변화하는 리듬에 따라 우리의 신체가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또한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생기는 밤과 낮에 따라 개개인의 신체리듬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는 개개인의 독창적인 리듬으로 인해 태어나는 그 시인만이 지닐 수 있는 개성적인 어떤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詩는 존재로 돌아가기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句를 통하여 인간은 존재한다.’라는 옥타비오 빠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의 시는 내 생활의 리듬에 따라 몸이 열리고 닫히고 하면서 이루어진다. 어느 순간 방황하던 나의 사유는 신체의 리듬에 의해 이미지와 의미를 가지고 시로 씌어진다. 언제나 첫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써 내려가는 시간은 짧다. 이성적인 의식 없이 마지막 행까지 막히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는 의미의 통일성을 가지나 쓰다가 막히는 시는 나중에 다시 쓰기는 어렵다. 또한 나의 시는 충만되지 않는 결핍된 상태에서 씌어진다. 무엇인가 목마르게 갈구하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내 영혼을 불러 펜대를 쥐어 준다. 그 순간 백지 위에 태어나는 나를 보게 된다. 마치 무당이 신이 내려 칼날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듯이 나의 혼은 백지 위에서 춤을 춘다.
아래 시는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단숨에 써 내려간 것이다.
조수아, 나의 나무
아침의 바둑판을 펼치면①
나무를 향해 달려오는 코뿔소를 본다②
사막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대한 힘③
수직의 뿔 끝에 뭉쳐진다④
시퍼런 뿔에 받쳐⑤
모래불 속으로 선인장 노란 꽃이 떨어진다⑥*
순식간에 바둑판 위에서 길을 잃는다⑦
코뿔소의 뜨거운 입김에 선들이 지워진다⑧
게임의 규칙도 사라진다⑨*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된다⑩*
여기에 길은 없다⑪
모래 바람 태양 불 속에 수십 년 가꾸어 온⑫
나의 조수아⑬
하늘로 뻗었던 가지가 꺾이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⑭
벌떡 일어나 흩어진 바둑알을 주워 바둑판 위에 올린다⑮
그리고 열심으로 가지를 뻗어 꽃을 생각한다?*
이제 막 아침을 밝히는 노란 꽃 한송이 피워 올린다?
시를 다 쓰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던 나는 사라지고 만다. 시를 쓰기 전의 방황하던 마음, 갈등,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되려던 세계의 혼란, 욕망, 분노, 희망 등은 펜을 놓는 순간 사라진다. 백지 위에는 언어만 댕그마니 남는다. 처음 보는 순간 낯선 얼굴을 한 언어 앞에서 나는 당황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잠시 후 거기서 나 자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
시를 쓰고 나서 바로 고치는 일은 거의 없다. 시를 쓰는 시간은 짧지만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아마 1000m 수영을 한 만큼의 에너지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덮어 두었다가 시간이 얼마 경과한 후에 다시 읽어보면 거기에서 어떤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시행과 시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의미구조가 맞지 않거나 청각적으로 귀에 거슬리는 리듬,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 행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두음과 휴지, 같은 의미와 소리의 반복은 리듬 있는 시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어와는 달리 우리 말에는 강세와 고저, 장단, 각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5행의 ‘시퍼런 뿔’과 6행의 ‘선인장 노란꽃’의 두음을 맞추기 위해 6행의 앞뒤 말을 바꾸었다. 그러고나니 우연히도 3,4,5,6,7행까지 두음의 ‘人’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읽어 보았더니 전보다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생기게 되었다. 9,10행은 시의 흐름에 거슬리며 구체적 사실 묘사뿐 각 행에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것 같다. 한 시행 안에는 리듬과 이미지, 의미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1연의 ‘아침의 바둑판’이 2연의 ‘길’의 이미지로 확장됨에 따라 흰색과 검정색의 바둑알은 빛과 어둠의 이미지로 더 크게 증폭시켰다. 또한 16행에서 ‘그리고’는 시에서 필요없는 접속사이므로 삭제하고 명사 ‘꽃’을 강조하기 위해 ‘열심으로’ 부사를 꽃 앞으로 옮겼다.
아침의 바둑판을 펼치면
나무를 향해 달려오는 코뿔소를 본다
사막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대한 힘
수직의 뿔 끝에 뭉쳐진다
시퍼런 뿔에 받쳐
선인장 노란 꽃이 모래불 속으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바둑판 위에서 길을 잃는다
코뿔소의 뜨거운 입김에 선들이 지워진다
뿔뿔이 흩어지는 아침의 알갱이들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되는,
어둠이 빛이 되고 빛이 어둠이 된다
여기에 길은 없다
모래 바람 태양 불 속에 수십 년 가꾸어 온
나의 조수아
하늘로 뻗었던 가지가 꺾이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 흩어진 바둑알을 주워 바둑판 위에 올린다
가지를 뻗고 열심히 꽃을 생각한다
이제 막 아침을 밝히는 노란 꽃 한송이 피워 올린다
그러고나니 바둑판과 코뿔소라는 두 명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바둑판은 코뿔소에 비해 너무 작은 명사이지만 지금껏 바둑판에 대신할 명사, 코뿔소에 대신할 다른 명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단어가 가진 상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바둑판이 상징하는 것은 바둑판에 그려진 직선에서 느끼는 것처럼 잘 짜여진 규범과 틀, 질서, 그리고 도덕적인 정신세계이며 코뿔소가 상징하는 것은 에너지나 규제되지 않는 본능의 힘, 무의식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나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힘을 느끼고 거기에 맞서는 태양을 상징하는 노란 꽃을 정신세계에서의 승리로 피워 올리게 된다. 노란꽃을 詩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써 놓은 시를 보면서 시편 속에 나오는 단어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나면 왜 내가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의 당위성을 알게 된다. 나의 시는 내 몸의 리듬이며 욕망의 목소리이며 내 존재 찾기이며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행위로서의 여행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찾아 백지 위에서 긴 여행을 떠난다.◑
◇정영숙 서울 교육 대학, 한국 방송통신대 영문학과 졸업. 92년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 『지상의 한 잎 사랑』
====================================================================================
내 마음 속의 시
너를 본 순간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튀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이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져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이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 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승훈 시인처럼 고독한 표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988년 여름이었다. 한양대로 옮긴 김시태 선생께서 하시던 '문학과 비평' 문학 강연회 자리에서였다. 강연회 후 제주 서부두 횟집 즐비한 방파제로 가서 소주를 마셨는데 가까운 자리에서 본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외롭게 보였다. 저녁이었고 수평선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그는 소주를 별로 안 했다. 이 사람은 분명 무슨 깊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구나, 생각되었다
방파제에 앉아 수평선의 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쓸쓸한 보헤미안 같았다.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강연에서는 그렇게 차분하게 잘 하던 그가 이 저녁의 바닷가에서는 말이 없었다. 그 가는 몸피, 검으스레한 얼굴, 반 곱슬의 머리. 매력 있었다. 시인 같았다.
그는 가방에서 꺼내 내게 '내가 뽑은 나의 시, 너를 본 순간'(문학사상사)를 주었다. 파란 볼펜으로 '나기철 선생 88.7 이승훈'이라고 작게 썼는데 달필이 아니었다. 거기 저녁 노을이 묻어났다. 무엇인가와 화해하지 못하는 의식의 날카로운 촉수가 드러났다. 허나 그의 표정은 온유했다. 착했다. 어둠이 짙어가자 그는 "김형, 이제 그만 갑시다"하고 재촉했다.
그 후 시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발표하는 시와 산문들을 읽었다. 그가 쓴 '시작법'은 내 중요한 시의 지침서가 됐다. 2001년 여름, 남제주 분재예술원에서 열린 '다층'이 주관한 '한일 시인 100인 시집' 모임에서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그는 어느덧 60이 되었고 단정했다. 흰 머리카락도 많이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했다. 뷔페 음식을 기다리며 몇 마디 나눈 후 다시 떨어졌다. 나는 계속 그를 바라봤다.
어느 글에서 그가 두통 때문에 매일 학교 앞에서 박카스 두 병을 사서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신다던가, 늘 우울하다던가, 해 질 무렵에 맥주 한 병을 마시며 시를 쓴다는 걸 읽고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글을 쓰고, 교수 생활을 잘 할까 의아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누구나 다 '너를 본 순간'이 있다. 이 시처럼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튀고, 장미가 피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술을 마셨고, 태양이 쏟아졌고, 그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쌓였'던 것이다.
그랬다. 너를 본 순간에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이게 시의 경이고 아름다움이다. 너를 본 순간을 시가 아니면 이렇게 나타낼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너를 생각하며 너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린다. 너를 만나는 때는 언제나 이처럼 마냥 새롭다. 너는 한 '운명'처럼 내게 왔다.
*이승훈(1942-) 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문학박사).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현 한양대 국문과 교수. 시집 '사물A', '환상의 다리',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밝은 방', '나는 사랑한다', '너라는 햇빛', '인생' 등. 시론집 '시론', '비대상', '모더니즘 시론', '포스트모더니즘시사' 등.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