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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것과 없음을 노래하기
심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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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으로 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과도 무제한 대화가 가능하여 인간관계의 소통이 더 폭넓어졌음에도 관계의 불화로 고통을 겪는 많은 영혼들이 있다. 자본이 금융에 먹히고, 가져도 가져도 새로운 것을 욕망케 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황폐한 물신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기계가 되기를 강요하며, 거기에는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획일화를 따르게 하는 무서운 폭력이 숨어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 이러한 후기 산업사회의 병적 징후를 나타내는 말로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이 넘쳐나서 소중한 것이 없어져 가는 이 시대에 ‘텅 빈 것’과 ‘없음’을 노래하려는 시인이 있다. 바로 이시환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신작 18편의 시들을 통하여 텅 빈 ‘지금 여기’를 진단하면서 그 대안으로 ‘없음’을 묵상한다. 이시환은 없음을 노래함으로써 없음마저도 있는 풍요로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생명이 파괴되고 인간의 영혼이 메말라 가고 인간관계가 삭막한 ‘지금 여기’에 없음마저도 있게 함으로써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되게 그는 없음을 노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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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있으면 역설적으로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편안해진다. 또한, 평생을 지지고 볶으며 열심히 살았어도 때가 되면 다 죽게 되어 그 몸도 그 마음도 모조리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이 있다면, 우주 속으로 방사되어 다른 물질의 원료가 되는 몇 가지 원소일 뿐이다. 따라서 보란 듯이 살고, 남부럽게 많이 가졌어도 그 끝은 허무하기 짝이 없게 마련이다.
시인은 인간 존재의 종국이 죽음으로 귀결되며 그것을 허무한 일로 보면서도 그렇게 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고 자서(自序)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자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시인은 텅 비어 있는 것에 대하여 부정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거기에 내재한 긍정성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것은 시인만이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내면의 두레박이며, 그가 자서에서 밝히듯 ‘마음 속의 풍경’이기도 하다. 시인은 내면의 둥글고 아래로 구멍 난 우물에 두레박으로 끊임없이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을 던져 넣기를 하면서 우물의 이쪽에서 두레박의 끈을 어느 정도의 길이로 내리면 그것이 내면의 언어를 퍼 올릴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데 이 가늠이야말로 시인은 있음으로 가득 찬 세계와 텅 비고 없는 세계의 대립을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이시환의 시는 그 가늠하는 시간 속의 예리한 감각이 더욱더 벼려지는 순간 순간들에서 나온 언어들로 직조(織造)되고 있다.
이시환의 시에서 텅 비어 있는 세계는 ‘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벌판에 서서」)이라고 하여 공허감, 죽음, 고요, 사막, 적막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곳 내가 걷는 길의 고적함 속으로
저들이 곤두박질치며 부려놓는,
짧은 한 악장의 장중한 화음을 들어보시라.
저들끼리 밀고 당기고, 질질 끌고 잡아채며,
점점 세게, 아주 여리게,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소생하는,
허허벌판에 부려지는 화음이 범상치가 않구나.
죽어가는 세상을 부여잡고
그리 통곡하는 것이더냐?
이 들판 저 산천에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더냐?
싸락눈이 섞여 내리는 겨울비가 부려놓는,
오늘의 짧은 한 악장의 화음이
절뚝이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네.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시네.
-「겨울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건만 나이 팔십이 되도록 십여 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이웃, 김 씨 아저씨. 하필이면, 들끓는 가래 천식으로 꽃 피는 봄날에 숨을 거두었네. 하나뿐인 자식은 탕자蕩子가 되어 돌아왔으나 눈물을 삼키며, 애비의 주검을 화장火葬하고 남은 재를 뿌리고, 손을 탈탈 턺으로써 쓰레기를 치우듯 말끔히 그의 흔적을 지우고, 그를 지워 버리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고 사는 목숨이여,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 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
모래뿐인 세상,
적막뿐인 세상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머리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로 흥건하게 샤워하고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어둠으로는
머릴 감으면서
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을 쏟아놓네.
아, 고갤 들어 보라.
살아 숨 쉬는, 저 고단한 것들의 끝
실오리 같은 주검마저도 포근하게 다 끌어안고,
혈기왕성한 이 육신의 즙조차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래뿐인 세상의 중심에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 나를 노려보네.
-「사막투어」
이시환에게 이 세상은 공허하며 참으로 고단하다. 그래서 그는‘모래뿐인 세상’,‘적막뿐인 세상’이라고 진단한다. 시적 화자는 그 힘겨운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서‘죽는 줄도 모르고 사는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이 마음 속 풍경에 독자들은 이시환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 어디에도 생명을 읽을 구절이 없다. 그 세상에 사는 시적 화자 ‘나’는 절뚝이는 병신이다. 시인은 제복과 달리‘안 병신’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현실이‘침몰하는 세상’이기에 시인은 절뚝이는 병신으로서 그를 둘러싼 세상을 말하고 싶은 것이며, 스스로 병신되기를 자처하는 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은 김씨 아저씨의 죽음에서 보여주듯이 열심히 살았지만 팔십이 되도록 십여 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드러내고,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 아비의 시신을 쓰레기 치우듯 흔적을 지우는 데서 극에 달한다. 이와 같은 죽어 가는 세상을 부여잡고 시인은 통곡하는 소임을 맡고, 침몰하는 세상에 맞서 절뚝이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부림을 한다.
광야에 해당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시적 화자를 일으켜 세우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는 것은‘짧은 한 약장의 장중한 화음’이다. 이와 같이 죽음의 부정성의 세계를 생명의 긍정성으로 바꾸는 것은‘피리 소리’(「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바람의 연주’(「바람의 연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막투어」에서 사막이라는 공간은 황량한 벌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써 시적 자아가 공허감과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생성된 부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정화되는 장소이다. 정화, 씻김의 공간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대면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나’를 노려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시적 화자는‘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이 쏟아지네’라고 하여 씻김으로써 정화되고 있다. 자기 응시와 내 안의‘나’ 바라보기는, 「그해 겨울」에서 ‘나도 한 그루 헐벗은 미루나무처럼/ 그 깊은 겨울에 갇혀서/ 숨죽인 대지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묻고/ 그 텅 빈 세상에 갇혀서 / 이글거리는 눈빛을 깃발처럼 내걸어 놓는다’라고 하여 겨울과 텅 빈 세상에 갇혀서 헐벗은 미루나무의 적신(赤身)에 깃발 내걸듯 준엄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화, 씻김은 자기 지우기, 또는 비우기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자기 비우기나 지우기를 이행함으로써 도달되는 경지이다. 시 「태양」에서 시적 화자는 ‘태양이시여,/ 나의 심장을 조금만 가볍게 하라/ 그것이 마침내/ 한 덩이 까만 숯이 되고,/ 그마저 하얀 재가 되어 폴폴 날릴 때까지/ 불타게 하라’라고 외친다. 시인에게 텅 빈 부정성의 세계는 긍정성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며, 텅 빈 것이 편안함으로 다가오기까지 텅 빈 것의 부정성과 대결해야 하는 것이 시인이 처한 운명이다. 시인은 스스로 ‘병신되기’를 마다않고 텅 빈 것의 부정적 세계를 통곡해야할 소임을 맡는다.
3
시「겨울바람」에는 두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가슴 속’과 같은 부정성의 세계와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 ‘진흙’, ‘눈먼 광인’, ‘어린 풀꽃을 터뜨리는’ ‘겨울바람’의 긍정적 세계가 대립되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세계가 공존하고 상호 침투함으로써 텅 빈 것의 부정성은 극복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공空」에서 텅 비어 있는 것에 대해 찬탄한다.
텅 비어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깊은 것이냐.
내 작은 성냥갑, 야트막한 주머니, 큰 버스, 깊은 하늘
모두 비어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아득한 것이냐.
그런 네 텅 빈 가슴 속으로 문득 뛰어들고 싶구나.
그 깊은 곳에서, 그 아득한 곳에서 허우적대다가
영영 익사해버리고 싶은 오늘,
텅 비어 있음으로 꽉 차 있는
네 깊은 눈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이 시에서는 텅 비어 있는 존재들을 나열하면서 깊은 하늘마저도 텅 비어 있고 그 비어 있는 것이 얼마나 깊고 아득하냐고 독자에게 반문한다. 텅 비어 있는 것은 허전하고 쓸쓸하고 공허한 부정성을 넘어 이시환은 깊고 아득하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음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꽉 찬’ 것으로 치환한다. 텅 비어 있는 것과 ‘꽉 찬’ 것은 대립적인 개념이지만 이시환의 시에서는 완전한 텅 빔이 오히려 꽉 참이 되는 역설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 텅 비어 있음은 「구멍론」에서 더 구체화 되고 풍성하다.
커다란, 혹은 깊은/ 구멍이 눈부시다./ 푸른 나뭇잎에도, 사람에게도/
바람에게도, 하늘에도, 우주에도,/ 그런 구멍이 있다./ 기웃거리는 나를 빨아들이듯/
불타는 눈 같은,/ 그런 구멍이 어디에도 있다./ 사람이 구멍으로 나왔듯이/
비가 구멍으로 내리고,/ 햇살도 구멍으로 쏟아진다.(후략)
텅 비어 있는 것의 구체화는 구멍이며 그 풍성한 구멍은 우주만물과 인간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구멍은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유(有)에서 무(無)로도 또는 그 역으로도 되는 하나의 통로이며 분절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시환은 그의 자서에서 하나의 통로로서의 구멍을 ‘한 몸 안에서 커다란 두 기둥이 되었던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죽음의 아늑함과 생명의 뜨거움이 나의 삶속에서 늘 함께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죽음은 ‘공허’로 묶여지고, 생명은 ‘바람’으로 묶여졌다. 그리하여 공허는 생명의 존재양식 변화인 죽음의 양태일 뿐이며, 바람은 생명에 원기를 불어넣는 텅 빈 공간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일 뿐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다. 결과적으로, 생명과 죽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생성과 소멸이라는 대립되는 두 키워드가 한 몸 안에서 커다란 기둥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생성과 소멸의 구멍은 잉태와 죽음의 장소이며 여성성의 상징인 자궁이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들어있고 이시환의 구멍은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퇴행(죽음)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은 부분이 평가될 만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시환의 구멍이 생명의 근원으로 기능하는 데에 있고 그것은 순환되는 우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통해서만이/ 한없이 빠져들 수 있고, 침잠할 수 있고,/ 새로 태어날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고,/ 비롯된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
텅 비어 있는 구멍은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생명을 움트게 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며, 비롯된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만상동귀(萬狀同歸)의 불교적 존재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구멍은 ‘숨통, 기쁨, 슬픔’이 된다고 말한다. 이시환 시의 이러한 시법은 역설에 근거하며 존재/비존재의 영역을 넘나드는 시인의 감성이 길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즉 텅 비어 있는 것이 시인에게 긍정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리라. 이시환은 그의 자서에서
어리석게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佛敎)의 영향 탓인지, 이 ‘유’와 ‘무’란 개념에 대해 집착해 왔다. 동시에 집착하며 살아있게 하는 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해 왔다. 곧, 온갖 욕구 욕망으로 들끓게 하면서도 때론 부끄러워하게도 하고, 때론 의롭게 하게도 하면서 심장을 뛰게 하는 힘의 근원과 미추(美醜)에 대해서도 오래오래 생각해 왔다는 뜻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불교적 사유의 경험을 어릴 때부터 하여왔고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내적 힘이 길러진 것이라고 간주된다.
4
「구멍론」의 구멍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구멍 보기라면 「하늘」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난 구멍 들여다보기이다. 이 세상은 태초에 어둠에 둘러싸인 거대한 궁창이었으며 그 궁창의 위쪽이 하늘이 되고 아래가 땅이 되었다. 이시환의 구멍은 이렇게 창세기의 궁창의 이미지를 엮어 그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궁창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우주이며, 페미니즘 시각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며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거대한 막이고 둥근 것으로 순환의 원리에 의한다.
미루나무 푸른 잎에는
푸른 잎만한 하늘이 반짝거리고
종알대는 까치 새끼들에겐
까치 새끼만한 하늘이 실눈을 뜬다.
높은 산 깊은 계곡에는
높은 산 깊은 계곡만한 하늘이 뿌리 내리고
너른 들 너른 바다에는
너른 들 너른 바다만한 하늘이 내려와 있듯
사람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하늘이 숨을 쉬고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지나가는 바람만한 하늘이 내걸려 있구나.
하늘 궁창 아래에 있는 사물들과 인간들에게 하늘 궁창은 그것만큼 현현되는 것이며 그 거대한 구멍을 한낱 풍경화처럼 보아온 것을 이시환의 구멍 보기라는 렌즈에 잡힌 하늘은 역동적이다. 즉 자궁의 막처럼 하늘이 사람과 사물, 동식물과 나아가 우주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우주의 구멍에는 바람이 생명의 원천을 제공한다. 바람이야말로 이 우주의 힘의 근원이며 생명이다. 시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를 보자.
먼 옛날,
할아버지가 대나무에 구멍을 내어
천 가지 만 가지 마음의 소리를 내듯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만물에 숨을 불어 넣고
만물의 혼을 다 빼가며
천 가지 만 가지 빛깔의 소리를 내는
당신의 피리 연주.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이미 한 생이 저물어가듯
또 한 생명의 싹이 돋는구나.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크고 작은 바람으로
만물에 혼을 다 빼가며
이 땅 가득 부려 놓는
당신의 말씀이여, 사랑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시인은 거대한 구멍이 있다고 보고 그 구멍, 우리가 ‘대기’라고 부르는 그 공간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이 순환함으로써 땅 속, 땅 위, 하늘의 모든 삼라만상이 변화를 하게 되는 우주의 이법을 이시환은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물에게 숨을 불어넣기도 하고 만물의 혼을 거두기도 하는 자는 어떤 존재자인가? 이는 우주만물을 만든 조물주이며 생명을 주재한다.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이미 한 생이 저물어가듯/ 또 한 생명의 싹이 트는구나/’ 하고 시인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존재들의 생멸을 듣는다. 시인은 여기에서 성서적 기원인 창세기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하여 우주만물의 시원과 창조의 세계로 이끈다. 먼 옛날의 할아버지는 창조주를 연상하게 하고, 시의 마지막 행에서와 같이 ‘당신의 말씀이여, 사랑이여’라는 구절에서 조물의 원인이 사랑 -불교적으로는 자비- 이며 그것이 말씀으로 전해져 온 성서적 세계로 의미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이시환의 시는 문학과 종교라는 상호텍스트적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세계가 지니는 깊이와 영역이 확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교적인 세계와 기독교적인 세계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종교혼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시환은 종교혼합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웅대한 창조질서와 모든 생명의 만상동귀라는 기독교와 불교적 진리를 시 속에 풀어둠으로써 시 세계에 깊이를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자비)에 의해 수행되고 로고스에 의해 세세대대로 전하여져 왔다고 말한다. 시인의 의식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텅 비어 있는 것의 부정성도 극복이 되고,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으로 시에서 작용하며 텅 빈 것이나 없는 것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된다. 인간이 생멸을 다하는 것도 불교적 진리에서는 하나의 순환일 뿐이며 이법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소멸해가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라 하고 소멸해 가는 것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5
텅 비어 있는 것, 소멸해 가는 것의 허허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은 「벌판에 서서」에서 나타난다.
바람이 분다.
얼어붙은 밤하늘에 별들을 쏟아 놓으며
바람이 분다.
더러 언 땅에 뿌리 내린
크고 작은 생명의 꽃들을 쓸어 가면서도
바람이 분다.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저 단단한 돌도 부드러운 흙이 되고,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돌에서도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진다.
바람이 분다.
내 가슴 속 깊은 하늘에도
별들이 총총 박혀 있고,
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에도
줄지은 풀꽃들이 눈물을 달고 있다.
바람이 분다.
한 인간이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기에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도 종교적 진리를 접하면서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자신도 삼라만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고 겸허해질 수가 있다. 인간은 지난 세기에 우주의 삼라만상의 존재들을 인간이 지닌 끝없는 욕망으로 파괴하여 왔고 인간 자신마저도 욕망의 기계가 되게 하여 파멸의 길로 인도하였다. 자연적 소멸과 파괴적 소멸은 같지 않다. 이시환은 자연적 소멸을 이야기하여 텅 비어 있을 수 있고, 없음을 노래할 수 있으며, 겸허하게 욕망을 내려놓은 인간, 즉 자유인이고자 한다. 만상을 제멋대로 부리기만 하는 지배자 인간이 아니라 만상과 함께 동귀하는 인간이고자 한다. 소멸은 욕망이 거세되는 것이기에 우주적 이법을 깨달으면서 받아들여 갈 때 아름답고 아득하며 깊이를 가진 것이라고 토로할 수 있게 된다. 「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에서는 인간의 운명적인 죽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러쿵저러쿵 한 세상을 살다가 훌쩍 자리를 비운다는 게 얼마나 깊은 아득함이더냐. 그 얼마나 아득한 그리움이더냐.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대로 제 그릇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 그 얼마나 그윽한 향기더냐, 아름다움이더냐.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분명한 진리는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너무 살아 있는 것만을 보아왔고 그 안에 배태되어 함께 커가는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음은 두렵고 꺼려지는 것이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해왔다. 성장만 있고 아름다운 소멸은 없었다. 성장만을 부르짖는 시대에 거기에 반하는 것을 외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외면한다. 인간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 피하고 성장만을 외쳐왔다. 그러니 성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차별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간주하여 구석에 밀어 두던지 획일화라는 이름의 제복으로부터 훈육, 감시와 처벌을 받아야 했다. 죽음이 그렇다. 저 구석에다 처박아 둔 것이 어느 날 반역을 일으키고 살아 있는 것에 도전을 해 온다. 있음만이 강조하던 시대는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외쳐대던 시대였다. 이시환은 없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에서 시인은 죽음을 향기나 아름다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데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시환은 겸허하게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고 그 부정성을 넘어 긍정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씨 아저씨도 갔고, 김씨 아저씨도 갔고, 이젠 그 박 가 놈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고 없다’고 시인은 그 허전함을 노래하지만 그들의 빈자리가 깊이와 향기,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저마다 하나씩 간직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렇듯 아름다운 존재의 소멸로 호명되는 순간 존재들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불려짐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치환됨을 알 수 있다. 이시환은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없음마저 있는 풍요롭고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길 그는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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