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에 관한 시 -
+ 선생님과 막걸리
해가 중천에 있고 겨울은 시작되었다
네모난 창에 등을 대고 언덕 내리막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앙상한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님
필경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다
울타리도 죄다 없어진 우리 집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신 그 날
엄마는 신작로 중앙상회까지 내려가 오징어를 사왔다
콩콩 곤두박질 치는 심장은 곤로 속 심지보다 더 뜨거웠다
양조장집에 가서 막걸리를 두 됫박 넘게 받아오고
선생님은 오징어회를 맵지도 않은지 잘도 드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거지
나는 선생님이 떠난 후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또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바닥에 쏟고 몇 번은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주전자마저 다 비우고서야 일어나셨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데
그날 밤 엄마는 아무말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느이 담임이 와서 가지도 않고 막걸리만 마셨는데
막걸리 잔을 비울 때마다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지긋지긋한 술
느 아버지도 모자라 이젠 담임까지 와서 술타령이냐
나의 은인 담임 선생님
아마 그때부터 술을 가까이 하신 것일까
슬픔의 강 너머로 나의 선생님이 손짓한다
(최나혜·시인)
+ 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강연호·시인, 1962-)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김경미·시인, 1959-)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시인, 1952-)
+ 술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정연복,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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