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4월 2025 >>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名詩 공화국

현대시 400선 ㅁ
2015년 02월 13일 17시 00분  조회:3305  추천:2  작성자: 죽림
 

300. 역(驛)

                              

                                       - 한성기(韓性祺)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

비가 오고 ……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문예}, 1952.5)

 

301. 나비와 광장(廣場)

 

                                        - 김규동(金奎東)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黙)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시집 {나비와 광장}, 1955)

 

 

302.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朴鳳宇)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조선일보}, 1956.1.1)

 

 

303. 램프의 시

                                    

                                           - 유 정(柳 呈)

 

날마다 켜지던 창에

오늘도

램프와 네 얼굴은 켜지지 않고

어둑한 황혼이 제 집인 양 들어와 앉았다.

피라도 보고 온 듯 선득선득한 느낌

램프를,

그 따뜻한 것을 켜자.

얼어서 찬 등피(燈皮)여, 호오 입김이 수심(愁心)되어

가라앉으면

석윳내 서린 골짜구니

뽀얀 안개 속

홀로 울고 가는

가냘픈 네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가물가물한 길은 어디냐.

안개와 같이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

싸늘하게 타는 램프

싸늘하게 흔들리는 내 그림자만 또 남는다.

어느새 다시 오는 밤 검은 창 안에 .

({여원}, 1958.3)

 

 

304. 강 강 술 래

                                         - 이동주(李東柱)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白薔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뇌누리 : 물살, 소용돌이의 옛말.

(시집 {강강술래}, 1955)

 

 

305.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

 

                                        - 한하운(韓何雲)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신천지}, 1949.4)

 

 

 

306. 보 리 피 리

 

                                         - 한하운(韓何雲)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시집 {보리피리}, 1955)

 

 

 

307. 꽃

 

                                         - 김춘수(金春洙)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

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현대문학} 9호, 1955.9)

 

 

308.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金春洙)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문학예술}, 1957.7)

 

 

 

309. 능금

 

                                         - 김춘수(金春洙)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시집 {꽃의 소묘}, 1959)

 

 

310. 인동(忍冬) 잎

 

                                        - 김춘수(金春洙)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시집 {타령조․기타}, 1969)

 

 

311. 나의 하나님

 

                                        - 김춘수(金春洙)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집 {처용}, 1974)

 

 

312. 처용단장(處容斷章) 1의 2

 

                                        - 김춘수(金春洙)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313.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金南祚)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시집 {정념의 기},1960)

 

 

314. 너를 위하여

                                      

                                       - 김남조(金南祚)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 이적지 : 이제까지, 이제껏.

(시집 {풍림의 음악}, 1963)

 

 

315. 겨울 바다

                                      

                                       - 김남조(金南祚)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虛無)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시집 {겨울 바다}, 1967)

 

 

316. 밤바다에서

                                

                                        - 박재삼(朴在森)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현대문학} 27호, 1957.3)

 

 

317.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朴在森)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사상계}, 1959.2)

 

 

318. 자연(自然)

 

                                         - 박재삼(朴在森)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319. 추억(追憶)에서

                                     

                                         - 박재삼(朴在森)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320. 멸입(滅入)

 

                                        - 정한모(鄭漢模)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 시집 {카오스의 사족}, 1958)

 

 

 

321. 가을에

 

                                       - 정한모(鄭漢模)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傳說)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速力)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 1959)

322. 나비의 여행(旅行)

- 아가의 방(房) ․ 5 -

 

                                         - 정한모(鄭漢模)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러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사상계}, 1965.11)

 

 

323. 어머니․6

 

                                        - 정한모(鄭漢模)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시집 {새벽}, 1975)

 

 

324.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趙炳華)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325.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趙炳華)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326. 의자․7

 

                                         - 조병화(趙炳華)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시집 {시간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1964)

 

 

327. 꽃과 언어(言語)

 

                                        - 문덕수(文德守)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현대문학} 74호, 1961.3)

 

 

328.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文德守)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시집 {선(線)․공간(空間)}, 1966)

 

 

329. 낙화(落花)

 

                                        - 이형기(李炯基)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집 {적막강산}, 1963)

 

 

330. 산

 

                                       - 이형기(李炯基)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시집 {적막강산}, 1963)

 

 

331. 폭 포

                              

                                        - 이형기(李炯基)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단말마 :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 석탄기 : 고생대 중엽으로 이 시기 후반에 파충류․곤충류가 출현하였다.

(시집 {적막강산}, 1963)

 

 

332.성 탄 제

 

                                        - 김종길(金宗吉)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시집 {성탄제}, 1969)

333. 설날 아침에

 

                                       - 김종길(金宗吉)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집 {성탄제}, 1969)

 

 

334. 황사 현상(黃沙現象)

 

                                         - 김종길(金宗吉)

 

그 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의 땅에

 

오늘은 발열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가뭄,

아 목이 타는 봄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 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

(시집 {황사 현상}, 1986)

 

 

335. 봄 비

 

                                       - 이수복(李壽福)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시집 {봄비}, 1969)

 

336. 북치는 소년

 

                                       - 김종삼(金宗三)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집 {십이음계}, 1969)

 

 

337. 민간인(民間人)

 

                                       - 김종삼(金宗三)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현대시학}, 1971.10)

 

 

338.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339.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金冠植)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

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

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

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 어룽진 : 얼룩진.

* 동정 : 한복 저고리 깃에 꿰매어 다는 헝겊으로 대개 흰색이다. 

(시집 {김관식 시선},1957)

 

 

340. 교외(郊外)․3

 

                                        - 박성룡(朴成龍)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愛撫)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 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1969)

 

 

341. 연시(軟柿)

 

                                         - 박용래(朴龍來)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집 {강아지풀}, 1975)

 

 

342. 저녁눈

 

                                        - 박용래(朴龍來)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 

(시집 {싸락눈}, 1969)

 

 

343. 겨울밤

 

                                         - 박용래(朴龍來)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시집 {강아지풀}, 1975)

 

 

344. 월훈(月暈)

 

                                        - 박용래(朴龍來)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너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허방다리 : 함정(陷穽).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월훈 : 달무리.   ({문학사상}, 1976.3)

 

 

345. 하여지향(何如之鄕)․일(壹)

 

                                           - 송욱(宋稶)

 

솜덩이 같은 몸뚱아리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집을

달팽이처럼 지고,

먼동이 아니라 가까운 밤을

밤이 아니라 트는 싹을 기다리며,

아닌 것과 아닌 것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모순(矛盾)이 꿈틀대는

뱀을 밟고 섰다.

눈 앞에서 또렷한 아기가 웃고,

뒤통수가 온통 피 먹은 백정(白丁)이라,

아우성치는 자궁(子宮)에서 씨가 웃으면

망종(亡種)이 펼쳐 가는 만물상(萬物相)이여!

아아 구슬을 굴리어라 유리방(琉璃房)에서

윤전기(輪轉機)에 말리는 신문지(新聞紙)처럼

내장(內臟)에 인쇄(印刷)되는 나날을 읽었지만,

그 방(房)에서는 배만 있는 남자들이

그 방(房)에서는 목이 없는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천장에 붙어 있고,

거미가 내려와서

계집과 술 사이를

돈처럼 뱅그르르

돌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좁아들다간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겠고,

안개 같은 지평선(地平線)뿐이리라.

창살 같은 갈비뼈를 뚫고 나와서

연꽃처럼 달처럼 아주 지기 전에,

염통이여! 네가 두르고 나온 탯줄에 꿰서,

마주치는 빛처럼

슬픔을 얼싸안는 슬픔을 따라,

비렁뱅이 봇짐 속에

더럽힌 신방 속에,

싸우다 제사(祭祀)하고

성묘(省墓)하다 죽이다가

염념(念念)을 염주(念珠)처럼 묻어 놓아라.

'어서 갑시다'

매달린 명태들이 노발대발하여도,

목숨도 아닌 죽음도 아닌

두통(頭痛)과 복통(腹痛) 사일 오락가락하면서

귀머거리 운전수(運轉手)

해마저 어느새

검댕이 되었기로

구들장 밑이지만

꼼짝하면 자살(自殺)이다.

얼굴이 수수께끼처럼 굳어 가는데,

눈초리가 야속하게 빛나고 있다며는

솜덩이 같은

쇳덩이 같은

이 몸뚱아리며

게딱지 같은 집을

사람이 될 터이니

사람 살려라.

모두가 죄(罪)를 먹고 시치미를 떼는데,

개처럼 살아가니

사람 살려라.

허울이 좋고 붉은 두 볼로

철면피(鐵面皮)를 탈피(脫皮)하고

새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들창처럼 떨어져 닫히며는,

땅꾼처럼 뱀을 감고

내일(來日)이 등극(登極)한다.

(시집 {하여지향}, 1961)

 

 

346. 산․9

 

                                         - 김광림(金光林)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시집 {학의 추락}, 1971)

 

 

347. 덤

 

                                        - 김광림(金光林)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지훈(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키다 만

하다 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 종삼 : 시인 김종삼(金宗三).

* 중섭 : 화가 이중섭(李仲燮).

(시집 {말의 사막에서}, 1989)

 

 

348. 목 숨

 

                                        - 신동집(申瞳集)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시집 {서정의 유형}, 1954)

 

 

349. 송신(送信)

 

                                       - 신동집(申瞳集)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바이없는 : 어쩔 수 없는.

(시집 {송신}, 1973)

 

 

350. 오렌지

 

                                        - 신동집(申瞳集)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시집 {누가 묻거든}, 1989)

 

 

351. 새

 

                                         - 천상병(千祥炳)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시집 {새}, 1971)

 

 

352. 귀천(歸天)

 

                                        - 천상병(千祥炳)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시집 {주막에서}, 1979)

 

 

353. 피아노

 

                                        - 전봉건(全鳳健)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집 {전봉건 시선}, 1985)

 

==========================================================================

8.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며

==========================================================================

354. 푸른 하늘을

 

                                        - 김수영(金洙暎)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집 {거대한 뿌리}, 1974년)

 

 

355.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金洙暎)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집 {거대한 뿌리}, 1974년)

 

 

356. 풀

 

                                         - 김수영(金洙暎)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68)

 

 

 

357. 진달래 산천(山川)

 

                                          - 신동엽(申東曄)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조선일보}, 1959.3.24)

 

 

358. 산에 언덕에

 

                                         - 신동엽(申東曄)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시집 {아사녀(阿斯女)}, 1963)

 

 

359. 종로 5가

 

                                        - 신동엽(申東曄)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 1967.6)

360.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申東曄)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초례청 : 혼인 예식을 치르는 곳. 

(시집 {52인 시집}, 1967)

 

 

36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申東曄)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대문화}, 1969.5)

 

 

362. 금강(錦江)

                                        - 신동엽(申東曄)

      - 1 -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 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正午)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午砲)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 …… 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치는 동짓달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막히는 삼복(三伏) 순이 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메밋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 2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 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 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이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이하 생략)

(서사시 {금강}, 1967)

 

 

363-신동엽/ 봄은/ 생략

 

 

364. 갈대

 

                                        - 신경림(申庚林)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문학예술}, 1956.2)

 

 

365. 겨울 밤

 

                                        - 신경림(申庚林)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한국일보}, 1965.4)

 

 

366. 파장(罷場)

 

                                         - 신경림(申庚林)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70)

 

 

367. 농무(農舞)

 

                                        - 신경림(申庚林)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꺽정이․서림이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

* 쇠전 : 우시장(牛市場). 소를 파는 시장.

* 도수장 : 도살장. 짐승을 잡는 곳.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71)

 

 

368. 목계 장터

                                        - 신경림(申庚林)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박가분 : 여자들의 화장품.

(시집 {농무}, 1973)

 

 

 

369.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

                                            - 민영(閔暎)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 밸 : '배알'의 준말. 창자 또는 마음.

* 가구가락 : '코카콜라'의 중국식 표기.

* 소태 : 소태나무 또는 소태껍질, 맛이 몹시 쓰며 한약재로 쓰임.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1977)

 

 

370. 눈 길

                                    

                                            - 고은(高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371.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은(高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372. 화살

 

                                            - 고은(高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시집 {새벽 길}, 1978)

 

 

373. 기항지(寄港地)․1

 

                                        - 황동규(黃東奎)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현대문학} 149호, 1967.6)

 

 

374.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黃東奎)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의 눈.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1978)

 

 

375. 풍장(風葬)․1

 

                                        - 황동규(黃東奎)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시집 {풍장}, 1984)

 

 

376. 벼

                                  

                                        - 이성부(李盛夫)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시집 {우리들의 양식}, 1974)

 

 

377. 위독(危篤) 제1호

                                 

                                        - 이승훈(李昇薰)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현대시} 13집, 1967)

 

 

378. 자수(刺繡)

 

                                        - 허영자(許英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 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 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1966)

 

 

379. 말

 

                                        - 이수익(李秀翼)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聖歌)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은 아마포(亞麻布) 위에

하늘에는 슬픈 전별(餞別)이.

(시집 {우울한 샹송}, 1969)

 

 

380. 옮겨 앉지 않는 새

 

                                            - 이탄(李炭)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새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 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시집 {옮겨 앉지 않는 새}, 1979)

 

 

381. 국토 서시(國土序詩)

 

                                        - 조태일(趙泰一)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시집 {국토}, 1975)

 

 

382. 사물(事物)의 꿈․1

 

                                        - 정현종(鄭玄宗)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시집 {사물(事物)의 꿈}, 1972)

 

 

383.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姜恩喬)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6)

 

 

384. 개봉동과 장미

 

                                        - 오규원(吳圭原)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1978)

 

 

385. 그릇 1

 

                                        - 오세영(吳世榮)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시선집 {모순의 흙}, 1985)

 

 

386. 서울 길

 

                                        - 김지하(金芝河)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시집 {황토}, 1970)

 

 

387.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金芝河)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

 

 

388. 정님이

 

                                        - 이시영(李時英)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집 {만월}, 1976)

 

389. 큰 노래

 

                                       - 이성선(李聖善)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시집 {절정의 노래}, 1991)

 

 

390.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鄭喜成)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문학사상}, 1978.2)

 

 

391. 산정 묘지(山頂墓地)․1

 

                                        - 조정권(趙鼎權)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392.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鄭浩承)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1979)

 

 

393. 동두천(東豆川)․I 

 

                                        - 김명인(金明仁)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시집 {동두천}, 1979)

 

 

39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金光圭)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

 

 

395.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宋秀權)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산문 : 절 혹은 절의 바깥문.

* 그리메 : 그림자.

* 즈믄 : 천(千). 

({문학사상}, 1975.2)

 

 

396. 그 날

 

                                        - 이성복(李晟馥)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1980)

 

 

397. 세속도시의 즐거움 2

 

                                       - 최승호(崔勝鎬)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1990)

 

 

398.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黃芝雨)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7)

 

 

399. 섬진강 1

 

                                       - 김용택(金龍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시집 {21인 신작 시집}, 1982)

 

400.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시집 {노동의 새벽}, 1984)

 

--------------------------------------------- 400끝.

성장한 아들에게

작자미상

내 손은 하루 종일 바빴지.

그래서 네가 함께 하자고 부탁한 작은 놀이들을

함께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내겐 많지 않았어.

 

난 네 옷들을 빨아야 했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해야 했지.

네가 그림책을 가져와 함께 읽자고 할 때마다

난 말했다.

“조금 있다가 하자, 애야.”

 

밤마다 난 너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주고,

네 기도를 들은 다음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발 끗으로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지.

난 언제나 좀 더 네 곁에 있고 싶었다.

 

인생이 짧고,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기 때문에

한 어린 소년은 너무도 빨리 커버렸지.

그 아인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으며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내게 털어놓지도 않는다.

 

그림책들은 치워져 있고

이제 함께 할 놀이들도 없지.

잘 자라는 입맞춤도 없고, 기도를 들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어제의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한 때는 늘 바빴던 내 두 손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길고

시간을 보낼 만한 일도 많지 않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네가 함께 놀아 달라던

그 작은 놀이들을 할 수만 있다면.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64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64 윤동주 시를 다시 공부하다(시 제목을 클릭한 다음, 訪問文章을 클릭해 보기)... 2024-08-23 0 499
463 해연의 노래 - 막심 고리키 2018-03-14 0 3823
462 [명시감상] - "새로운 길" / 윤동주 탄생 100돐 기념하여... 2017-12-30 0 3403
461 시인들이여, 수천의 박수소리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시를... 2017-09-14 1 2543
460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렇게 흘러보내야 하나" 2017-09-03 0 3418
459 "말똥가리 시인", 스웨덴 국민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2017-05-23 0 3206
458 시인은 나비와 함께 해협을 건너갈줄 알아야... 2017-05-23 0 3790
457 명문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2017-03-16 0 3522
456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2017-02-19 1 3098
455 "동주에게 편지를 보내고싶다..." 2017-02-08 0 2835
454 달문 여는데 보름 걸리고, 달문 닫는데 보름 걸리다... 2017-02-08 0 2890
453 하늘도 해를 팔다... 2017-02-04 0 2810
452 청산별곡 2017-02-02 0 3058
451 2017년 <<신춘문예>>당선작 시모음 2017-01-02 0 4509
450 백거이(白居易) 시를 재다시 음미해보다... 2016-12-31 0 7341
449 중국 古詩 10 2016-12-25 0 3256
448 "술타령" 시인 문학소년소녀들에게 꿈의 날개를... 2016-12-12 0 2826
447 [명시감상] - 자유 2016-12-05 0 3233
446 3 = 30 = 2 = 6 = 15 = 1 = 두줄 2016-11-28 0 2939
445 시인, 시, 그리고 번역... 2016-11-27 1 3676
444 [명시감상] - 황무지 2016-11-27 0 3396
443 詩에 독자들이 밑줄을 긋도록 써라... 2016-11-26 0 3165
442 "150 000 000" 2016-11-26 0 3212
441 테트 휴즈 시모음 2016-11-26 0 3086
440 미국 시인 - 알렌 긴즈버그 2016-11-26 0 3398
439 이육사 시 중문(中文)으로 읽다... 2016-11-15 0 3149
438 타고르 詩를 보다... 2016-11-14 0 3520
437 남미주 아르헨티나 문학 거장 - 보르헤스 2016-11-07 0 2891
436 미국 녀류시인 - 에밀리 디킨슨 2016-11-07 0 4141
43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사랑할 날 얼마나 남았을가... 2016-11-06 0 4577
434 해외 시산책 2016-11-06 0 2971
433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2016-11-06 0 3157
432 아름다운 세계 명시속에 흠뻑 빠져나볼가... 2016-11-06 0 4088
431 프랑스 상징파 시인 랭보 시 다시 새기다... 2016-11-05 0 3690
430 "세계는 소리와 맹위와 불로 가득 차고"... 2016-11-01 0 2886
429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2016-11-01 0 3314
428 장편 서사시 <<백두산>> / 조기천 2016-11-01 0 4447
427 미국 "생태주의" 방랑시인 - 게리 스나이더 2016-10-28 0 4497
426 아랍 "망명시인", 령혼의 나팔수 - 니자르 카바니 2016-10-28 0 2910
425 타이타닉호는 침몰되지 않았다... 2016-10-20 0 2694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