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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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술회(冬天述怀)
2012년 12월 02일 20시 53분  조회:4047  추천:3  작성자: 김인섭
수필-동천술회(冬天述怀)
                                                      김인섭   2012-11-18
 
오래만의 주(周休)휴라 늦잠에서 깨어일어나 창너머 뒤산의 혼성림 숲을 건너다본다. 북온대 해양성계절풍기후의 지역이라 소설(小雪)이 눈앞인데 산색이나 나무잎 매무새는 아직도 내 고향 연길의 만추 자태이다.올해는 풍조우순(風調雨順)의 호천후도 아니었는데 가을날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단풍잔치를 벌이던 매무시가 여전히 력력하다.해마다 되풀이되는 화사수류(花謝水流)의 기묘한 순환은 그 유혹이 집요하고 은근하였다.그 꼬드낌에 싱숭생숭하여 입노릇이나 대충하고 천리(天理)의 궤적을 드팀없이 따라가는 산림과 이신전심(以心傳心)의 기맥상통이나 해보려 신끈을 조이고 나섰다.
 
겨울 숲속의 정취를 만끽할 심산으로 유산객들의 발길로 다스러진 오솔길에 들어선다. 길 량옆은 여러 가지 활엽수들과 간혹 끼인 침엽수들로 울밀(鬱密)하게 푹 우거졌는데 능선길에는 아직도 만미(滿尾)의 풍엽에 두툼히 깔려있다. 짓수굿이 도렬한 수간(樹間)으로 텃새들이 날아돌며 적막을 깨뜨리고 약동하는 감흥을 일으켜 무척 정겹다. 풍겨오는 태고의 땅내음을 기껏 빨아들이며 묵묵히 걷다가 무심결에 낙엽 위에 드러난 바위돌에 앉아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자연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철없는 세월은 창조주가 하사하신 내 년치를 한 살이나 매몰차게도 썰어 먹는다.
 
나무에 엉성하게 매달려 찬바람의 조화를 서슴없이 감내하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니 그들에게는 지금이 한해살이를 정리하고 새 소생을 기약하는 장엄한 조락의 시절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이들이 새봄에 신록을 펼치고 력동적인 여름의 번성을 이루다 오늘은 가을의 결실을 안고 지난날을 반추하면서 한살이의 대미(大尾)를 수자(繡刺)하며 떠나는 슬픔을 감추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바로 어제가 춘초의 환생이었는데 매정한 계절의 재촉은 되려 사람의 가슴도 버겁게 한다.한 해 동안 뭘 했기에 이리도 빠를가 아쉽다는 허허탄식이다. 시들한 심경은 서글픈 망향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가파른 언덕에서 두발을 겨끔내기로 내디디며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솔바람을 실컷 먹어본다. 잡다한 일상으로부터 비켜서서 가슴을 허비는 속사잡사들의 번거러움에서 벗어나 건뜻한 마음만을 가지려는 욕심도 어른거린다. 거룩한 꿈을 가지고 성현들의 반열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거저 입살이가 목표인데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녀도 년년이 소망이 굽질리고 뒤틀어지어 <선무당이 장구만을 탓한다.>는 촌극을 되풀이하는 연유는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항시 티없이 매서운 바람같은 수련을 받으며 심적 오예물(汚穢物)들을 실시로 털어버렸더라면 이토록 멋쩍지는 않았을가 생각해 본다.이 겨울날 하늘이 나를 비춰야 할 몸거울이 되기에 제격이다.
 
세월이 또 만물에 나이바퀴를 한 겹 둘러놓는다는 속마음도 여느 해보다 허우룩하다.저 추레해진 고엽(枯葉)들도 천체의 회전을 따라 새 숲의 벅찬 부활을 위하여 정숙한 동면을 위해 붙살이 하던 나무에서 미련을 털어 버리고 떠난다.이듬해 새 생명의 밑거름으로 기꺼이 되어진다.인간도 세속의 다툼이나 명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들과 같은 삶의 궤적을 좇는다면 주제넘는 욕기나 기를 쓰고 토하던 망언망동도 싸악 버리고 기꺼이 새 도전에 마주할 것이다.
 
앙상한 가지들의 세찬 몸부림은 인간에게는 혹심한  시달림으로 각인되나 그들에게는 돌아오는 봄날의 찬란한 재생을 위한 기꺼운 통과의례(通過儀禮)이리라.틀림없이 일년생(一年生)을 거뜬히 마치고 풍성한 창조와 결실을 윽벼르는 드센 몸짓이다.늘 아집과 독선의 성채에 같혀 항간에서 시야비야를 주문하는 인간에겐 이 삭풍의 담금질이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다. 만물의 령장이라 뽐내대는 우리들이 이 나무들처럼 배부른 투정이나 오기가 없이 살았더면 해마다 에돌아오는 랑패감은 없을 것이다.  
 
이 계절은 우리들이 한풍같은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봐야 할 길목이다.비망(非望)의 굴레에 매여 드잡이하다가 배낭에는 캐캐묵은 구닥다리만 꽉 채우고 허허로운 빈손이 쑥스러워 자꾸 뒤로 감추는 나를 살펴보니 애처롭기만 하다.늘 세속의 천박한 가치기준에 연연하며 헤매는 내가 타고난 어디가 약간 모자라는 축이 분명하다.잘 아는 사람들이 올해는 뭐하며 살았냐고 물을텐데 외면하고 빠져나갈 구멍이 어디에 있나 찾아놓아야겠다.만나면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민망스런 면판은 어디 둘 것인고!
 
허방지방 해매던 해가 바야흐로 지나간다.마음은 서글퍼도 새해의 볼일들과 하고 싶던 일,사랑하는 일에 얼마 안되는 에너지라도 쏟아야 한다. 떡판같은 바람이나 번뇌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이 겨울나무의 서릿발 같은 정진을 한다면 행운과 축복이 닿으리라 희망해 본다.
 
뉴톤의 말이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쏟으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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