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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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의 사계절
2006년 01월 12일 00시 00분  조회:4059  추천:32  작성자: 김관웅
☆ 수필 ☆

산의 사계절

김 관 웅


내가 연변의 첫 등산 동아리인 연변백두산문인산악회에 가담하여 산행을 시작한지도 어
언간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전문적인 산악인도 아니요, 특수한 장비를 갖추고 보기만 해도 아찔
한 암반을 타거나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톺아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풍 가는 간단한
차림으로 도시락과 물 한 병 넣은 배낭 하나만 달랑 메면 족하다. 그리고 교통도구도 따
로 없이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초만원 공공버스 속에서 부대끼는 것도 하
나의 즐거움이다. 버스 요금을 가지고 차장아가씨와 콩팔칠팔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그
래서 대부분 교통비로 충당되는 회비를 한해에 100원 남짓이 내면 별 부담이 없이 1년 동
안 등산을 할 수 있다. 이만한 싸구려 여가선용은 아마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선지를 미리 정하지도 않는다. 문자 그대로 행운류수(行雲流水)다. 여유작작하
게 아침 9시에 약속한 집결장소에서 모였다가 버스정류소에 나가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공
공뻐스에 올라타면 어디라도 좋다. 산에 가서도 일정한 등산코스가 없다. 산짐승처럼 아무
데나 산속의 울창한 나무숲을 꿰질러 다닌다. 우리와 한동안 등산을 같이 했던 한국 선문
대학의 황송문 교수는 우리의 등산 스타일을 《조선족산행(朝鮮族山行)》에서 이렇게 시로
표현하고 있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렬 종대로
정겨운 이야기를 꽃잎처럼 날리면서
줄줄이 줄줄이 오르지만

산허리나
산의 무릎이나 겨드랑이나
어지간히 올라서 발동이 걸리면
갑자기 까투리가 되어
기자 기자 기자 기자
구구 구구 구구 구구
꽁지야 날 살리라고 옆으로 샌다.

질서 정연하게 나있는 길을 두고
길 없는 잡목들 부러뜨리며
멧돼지 치오르듯 자꾸만 오른다.

조선족 산행은 창작 실습인가
서스펜스와 스릴과 액션,
미지의 인연을 위한 복선(伏線)까지
클라이맥스로 클라이맥스로
가기는 자꾸 가는데
결말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항일 빨치산 유격훈련이다.



모로 가든 세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까투리식이든 메돼지식이든 우리의
산행은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등산팀은 일년 사계절 주말이나 휴일이면 례외 없이
산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백두산을 비롯한 연변의 산들은 말 그대로 무른 메주 밟듯 했다
. 한달에 4회 정도, 1년이면 50회, 만 10년이니까 500회는 몰라도 아마 400회는 웃돌 것이
다. 적어도 400회 이상 산행을 하는 중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산의 정취(情趣), 산의 매력
(魅力)에 푹 빠지게 되였다.
산행을 하기 전에는 멀리서 모아산(帽兒山)이나 마반산(磨磐山)을 바라보면서 일년 사시
장철 변함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산행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
였다. 산은 불변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 변화속에서 불변하는 동중정(
動中靜)의 아름다움과 남성적인 양강지미(陽剛之美)와 녀성적인 음유지미(陰柔之美)를 한
몸에 겸비한 혼성미(混成美)의 극치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바로 이것이 산이
사람들을 영원히 잡아끄는 매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따라 자기 나름대로 산으로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유혹한다.
봄의 산에서 나는 삶의 희망과 힘과 랑만을 느낀다.
봄은 아침이요, 소년(少年)과 청춘 그리고 꿈과 랑만의 상징이다. 그래서 봄의 산은 색
동저고리 입은 소녀들처럼 알락달락 예쁘게 꽃단장을 한다. 봄의 선구자는 진달래다. 이
른 봄 4월 중순 이후면 연변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치며 봄소식을 알
린다. 그 연분홍 빛깔에서 나는 흘러간 청춘의 힘과 희망과 랑만을 다시 느낀다. 진달래가
피면 련달아 철쭉이 피고 코언저리에 주근깨가 살짝쌀짝 보이는 시골 새악씨 같은 개나리
가 수줍게 피고 이름 모를 뭇 꽃들이 다투어 피고 진다. 그리고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뾰
족뾰족 새움이 튼다. 언 땅을 강인하게 비집고 돋아 올라온 씀바귀를 캐면서 생명의 위대
한 힘을 실감한다. 그것을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계곡수에 대수 헹구어 점심에 오구작작
산정 우에 모여앉아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온 몸에 마구 청춘의 힘이 솟구치는
것만 같다. 어쩌다가 물이 많이 나는 축축한 택지(澤地)를 지나다가 봄 미나리 밭을 만나
게 되면 당장 도시락을 풀어 헤치고 초고추장에 뚝뚝 찍어 그 자리에서 즉석 봄 미나리 추
렴을 한다. 그 선뜻선뜻하고 시원시원한 향기 진한 맛은 봄에만이 진짜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같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식도락이다.
여름 산에서 나는 생명의 풍성한 성장과 뜨거운 정열을 느낀다.
여름은 정오이요, 장년(壯年)의 정진(精進)과 노력과 상승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름 산
은 구척장신의 헌걸찬 사나이처럼 푸른 두루마기를 의젓하게 떨쳐입는다. 온통 푸른 색상
으로 성장(盛粧)을 하고 나선다. 그 푸르른 숲의 바다 속에서, 그 무성하는 생명 앞에서
나는 나의 30, 40대 중년시절의 분투와 성장의 계절을 회상하며 한번 밖에 없는 이 생명을
더욱 뜨겁게 사랑해야하겠다고 결심하군 한다. 일회 인생의 가치는 크고 성장하고 열심히
, 뜨겁게 사는데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더우면 더울수록 땀을 흠뻑 흘리면서 정상
을 향해 톺아 오른다. 내 꿈의 정상(頂上)을 향해 부지런히 톺아 오른다. 정상에 올라 야
호 삼창을 하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면 내 생명의 나무도 한그루의 상록수로 되여 하늘
높이 솟아오름을 느낀다. 가을 산에서 나는 생명의 성숙과 결실을 느낀다.
가을은 오후이요, 아직은 꺼지지 않은 초로(初老)의 욕망의 불길과 조용한 사색의 상징
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산은 단풍이 물들어 울긋불긋 단장을 한다. 옛날 시인묵객들이
《서리 맞은 단풍 2월 봄꽃보다 아름답구나(霜葉紅於二月花)》라고 읊조리였듯이, 《석양
은 무한히 좋으나 황혼에 가까웠구나(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라고 개탄했듯이 가을 산
은 아름답지만 그 것은 잠간일 뿐 이내 조락(凋落)에로 직행한다. 황금나락 출렁이던 풍년
벌은 허허롭게 비워지고 청산(靑山)은 입고 있던 푸른 성장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락엽으
로 날려 보낸다. 나도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내 몸둥이와 팔다리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욕망의 잎새들을 하나 둘 미련 없이 락엽처럼 날려 보내는 련습을 한다. 채찍을 후려갈기
듯 매섭고 앙칼진 삭풍(朔風)앞에서도 떡갈나무가지들에 듬성듬성 악착스럽게 붙어 있는
가랑잎들처럼 내 욕망의 잎새들을 모조리 다 날려 보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비워지는 가을 산을 보면서 나의 욕망과 욕심에 대한 정리를 적잖게 했다. 그래서 돈이나
재물보다도, 명예나 벼슬보다도 육신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이 가장 값지다는 것쯤은 알아
버린 요즈음 나는 더욱 산행에 열중한다. 가을 산을 거울로 삼아 마음 비우기, 욕심 비우
기를 배우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산행을 한다.
겨울 산에서 나는 생명의 죽음과 재생의 법열(法悅)을 느낀다.
겨울은 저녁과 밤이요, 로인과 죽음의 상징이자 아울러 재생과 열반(涅槃)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온통 흰눈에 덮인 순백(純白)의 겨울산은 여위고 춥지만 만고풍상을 다 겪
으신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호호백발(晧晧白髮)을 날리며 흰 도포를 차려 입은 도고한 모
습으로 정좌(靜坐)하고 계신다. 봄의 산에서 녀성적인 우아미가(優雅美)가 느껴지고 여름
산에서 남성적인 장중미(壯重美)가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겨울 산에서는 이 두 아름다움을
다 초월하는 숭고미(崇高美)가 느껴진다. 이제 초로(初老)의 언덕바지에 올라선 나는 겨
울 산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의젓하고, 점잖고, 깨끗하고, 곱게 늙어갈 생
각을 하기 시작한다. 인생은 좋은 시작보다 좋은 마무리가 더 중요함을 겨울 산을 통해 터
득한다. 늙어서는 무엇보다 로추(老醜), 로탐(老貪), 로망(老妄)을 스스로 경계하여 추레
하게 늙지 말아야 함을 산신령(山神靈) 같은 야위고 순백한 겨울 산의 거룩한 모습에서
배운다. 그러자면 겨울 산처럼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고 마음을 허허롭게 비우고 부귀빈천(
富貴貧賤), 생사영욕(生死榮辱)을 달관하면서 살아야 할게 아닌가.
어제도 눈 덮인 마반산에 오르면서 나는 겨울 산처럼 깨끗이 살다가 인생의 종지부를 찍
을 개관론정(蓋棺論定)의 날을 맞이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한 산
속의 바위틈에도 저 초목들의 목숨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어두운 땅속에 숨어서 바위도
얼어터지는 엄동의 혹한을 견뎌내는 뿌리의 덕분임을 나는 산행을 하면서 거듭 확인하군
했다. 그래서 산은 영원히 죽지 않고 봄이 오면 재생하여 다시 청춘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
다.
나는 내 생명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내 분신(分身)인 토끼 같은 내 새끼들의 창창한 래일
을 위해서 얼마 남지 않는 인생에 무엇이라도 좋은 일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 생명의 연장인 내 두 딸내미들을 위해 좋은 아빠, 훌륭한 아빠가 되리라
고 다짐을 했다. 산속의 바위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폭풍설 속에서도 강인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겨울 나목(裸木)들을 보면서 우리 백의 겨레의 자라나는 후대들을 위해 썩은 뿌
리가 아니라 튼실한 뿌리로 되여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물에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나는 어제 겨울 산에서 내리면서 이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 만고에 살아 숨쉬는
산처럼 나의 육체와 령혼도 내 분신인 내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
고 《샘이 깊은 물》과 같은 우리 겨레의 창창한 래일과 이어져 영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환상에 사로 잡혀보기도 하였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우리네 인생을 본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인생을 배운다.

2005년 12월 20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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