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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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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터전을 위하여
2008년 11월 23일 15시 15분  조회:1301  추천:36  작성자: 강효삼

우리 삶의 터전을 위하여
-어느 한 조선족 농촌 삶의 외로운 정착

강효삼

 

머리글

조선족이 모국을 떠나 중국의 광활한 대륙 동북 땅에 정착한지도 어언간 한 세기를 훨씬 넘어섰다. 하지만 전례 없던 세기의 변화 속에 조선족들의 주요 삶의 정착지였던 농촌은 격변기의 진통 속에서 부대끼고 있는데 이 속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으며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행운도 있고 불행도 있다. 이 복잡다단한 현실을 살고 있는 어느 한 현장을 찾아서 그 진솔함을 알리면서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민족을 위한다.’는 거창한 부르짖음과 빛깔 좋은 맹세는 없어도 민족의 얼과 넋을 일상의 삶에 접목하여 거친 세월의 비바람에도 빛바래지 않게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그 넋과 얼을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에 헹구어 내어 하얀 빨래처럼 소중이 간직하고 사는 평범하나 평범하지 않는 어느 한 삶의 현장을 내 나름 조명하고 싶어 못난 필을 들었다.

‘조선족 촌’ 그 이름을 다시 찾기까지

빈 수선 철길과 어깨 나란히 훤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큰 길을 쫓아 산들도 줄줄이 물결쳐 간 북쪽 어느 한 산비탈에 오붓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있는 한 자그마한 마을을 보게 된다. 마을의 세면은 모두가 병풍을 친 듯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트인 곳에 넓은 벌이 펼쳐져 있는데 벌을 끼고 한 줄기 강물이 유유히 서쪽으로 흘러간다. 산이 있고 벌이 있고 강이 있는 이 마을이 바로 60여 년 개척과 정착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달과 별 동네’이다. 

이 마을은 일찍 20세기 40년대 초, 발 빠르게 이곳에 와 자리를 정한 한 조선족 이민자에 의해 개척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은 불과 몇 세대 밖에 되지 않았으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30여 세대의 동네로 커졌고 그 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이민자들에 의해 오늘의 마을 기틀이 잡혀지고 범위가 커져 지금은 백여 가구의 우리 동포가 오붓이 이마 맞대고 사는, 북방치고는 꽤나 살기 좋은 동네로 불리고 있는 조선족마을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은 산 좋고 물 좋고 벌 좋은 이곳을 어찌 알고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 좋은 터전을 우리겨레의 이름으로 가지게 되였는지? 그 개척자의 선견지명에 감탄된다. 그러나 원시의 벌을 개간하여 논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시도구인 삽과 쇠스랑 따위로 온 들판을 가득 메운 그 우악진 버들뿌리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대신 그 곳에 이네들 삶의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 세월은 논물에 들어서 일을 해도 물장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시대이다. 그러니 이른 봄 찬물에 맨발바람으로 들어서야 하는 벼농사일은 그 얼마나 두렵고 고되었을까? 한족들이 이 너른 들을 그대로 방치해놓고 조건이 좋은 곳만 골라서도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구태여 소출이 낮은 조나 옥수수를 심어먹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찬물에 들어서 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북방의 봄은 봄이라 하지만 남방과는 다르기에 봄이 되여도 아직 논물이 뼈가 저린데 절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벼농사 일이기에 뼈 에이는 찬물에 무작정 뛰어들어 보뚝을 막고 맨발바람으로 씨를 넣는다. 그러다 정 발이 시리면 한참씩 나와 동동거리며 오리발처럼 빨갛게 언 발을 녹였다가 다시 들어선다. 그래도 남성들은 술이라도 한 모금하여 몸을 덥히지만 여인들은? 그래서 우리 민족여인들은 한족여인들에 비해 풍습, 관절염과 기타 냉병이 더 심한 것이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아득바득 일하는 줄을 모르고 어떤 한족들은 ‘꼬리들은 고춧가루를 잘 먹어서 족히 캉뚱(추위를 이긴다는 뜻)을 잘 한다’ 고 했다 한다. 

이렇게 원주민인 한족들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간고한 벼농사로 그네들에게도 이밥을 맛보게 한데서 그들은 이 벌의 당당한 주인이 되었고 점차 이들의 가치와 위상도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한족들의 언어와 습관을 배우며 한 이웃에서 그네들과 공존 할 수 있는 기초를 닦게 되었던 것이다.

산과 물 그리고 벌이 다 갖추어 진 터전이기에 산비탈엔 오붓이 집터를 정하고 앞벌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해 때고 산나물도 캐며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야말로 <이밥 먹고 장작 패고 고기 먹고 사는 어미지향(魚米地響)>으로 이 마을을 키울 수 있었다 하여 농사가 위주이던 세월에는 린근 사람들로부터 아주 각광받는 고장이여서 오히려 벌방의 처녀들이 이곳으로 시집오지 못해 안달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농사가 잘 되고 산골 인심이 좋은데다 촌민들의 문화생활을 관심하여 촌지도부에서는 마을의 경제사정이 조금 여유로워지자 공공건물 중에도 문화실부터 먼저 앉혔으니 온 나라가 가난의 때를 아직 벗지 못한 70년대에 마을에 커다란 벽돌집구락부가 있다는 것은 웬만한 조선족마을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영화며 예술종목을 더 감상 할 수 있었다. 어느 한 해는 현 문화관의 지도를 받으며 이 마을에서 전문 예술단을 무어 현의 무대에 나가서도 인기를 끈 적도 있었는데 이 모두가 경제가 따라가고 인심이 좋은 데서 얻어진 성과다. 그래서 같은 민족은 물론<달과 별 조선족 동네>(月星)라면 인근 한족들도 다 알고 매우 부러워하는 마을이었다. 

허나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해도 세상의 변화를 피해서 세외도원처럼 살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의 열려진 세상에 사는 중국 조선족마을들의 상황인가보다. 90년대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국바람은 이 오붓하던 산골마을에도 회오리바람을 몰아왔다. 친척을 찾아서 혹은 로무로 연수로 게다가 누군가는 밀입국까지 서두르게 되니 온 마을치고 한국에 식솔들이 가 있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마을을 떠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고국으로 가는 것은 물론 고국에서 돌아왔지만 시골에서 더는 살지 않고 청도, 위해, 대련 등 연해도시로 이사 간 사람들과 정 먼 곳으로 갈수 없는 사람은 현성에라도 자리를 옮겨 누구의 말처럼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다 고향마을을 떠나고 보니 마을에 빈집들이 여기저기 가득 널려있게 되었는가 하면 농사짓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아 벌판 또한 한적해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당에 자기 선택에 쫓아 자기인생을 살기 마련이다. 아무리 산골마을이 가난하고 호젓하다하여 버리고 가는 사람은 가더라도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 맛이라고 남들이야 어찌하든 자기인생 자기 나름대로 오히려 남들이 버리는 곳일수록 더 이곳을 아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마을의 소문 없는 파수군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그도 얼마 되지 않는 사람가운데하나다. 오랫동안 이 산골 마을에서 교육 사업을 하였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김 선생!”, “김 선생!”하고 부른다. 

기실 그에게도 도시로 나가 살 조건이나 능력이 없어서 누구의 말처럼 하냥 ‘머저리’ 같이 시골에만 붙박혀 있는 사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녹을 타먹는 노교원으로서 한때 작으나 시골학교 교장까지 지낸 사람으로서는 얼마든지 도시에 나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어이 편벽한 마을을 뜨지 않고 일상을 부담 없이 즐겁고 여유 있게 사는 이유는 향토에 대한 남다른 아집과 애착 때문이다. 하여 그는 남들이야 어찌하든 자신은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까지를 살 각오이다. 하여 소문 없이 산골에 묻혀 사는 그의 형상은 마치 그의 집 앞 마당에 뿌리를 내린 한 그루 늙은 느티나무나 다를 바 없다고 할까.

그만큼 그는 이 산골을 사랑하고 이 고장에 집념한다. 그렇다고 여기는 그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고 더구나 사람마다 추억이 깊다는 어린시절을 보낸 곳도 아니다. 그는 60년대 고중을 나와 타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교육사업의 수요로 이 고장을 선택한 사람이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산골인 이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모친께서 이곳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상품양을 잡수시며 늘 먹을 걱정에 시달려온 그의 모친께서 어느 한번 또래들을 따라 이곳에 산나물을 캐려 왔다가 보고 <참 좋은 동네>라고 하며 이런 곳에 와서 살았으면 하기에 부모의 선택에 쫓아 조건이 좋다는 곳들을 마다하고 산골학교 교원으로 전근이 된 것이다.그러나 정작 살아보고는 여기가 좋아 떠날 수 없는 여기가 다름 아닌 그의 <제2의 고향>으로 된 것이다.

그때부터 장장 30여 년을 줄곧 이 산골에 묻혀 이곳 사람들과 한 덩어리가 되여 사업하고 생활하다보니 이제 그는 산골사람들을 닮아 소박하고 부지런한 것은 말할 것 없고 그에게서는 산골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풋풋한 나물 냄새며 땀 냄새가 푹 베인 삶의 모습이 어디라없이 풍기는 <촌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의 일이자 자기 일이 되어버린 그는 교육 사업을 할 때는 물론 정년퇴직한 후에도 마을 일에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 ‘제2의 사업이랄까?’, ‘제 2의 인생이랄까?’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때 대대적인 출국바람으로 촌에 회계하나 담당할 젊은이가 없어 안타까워할 때 촌 회계를 맡기도 하였는데 촌 회계를 맡아 하는 기간 그는 교원의 깨끗한 양심으로 촌의 경제를 차질 없이 관리하였다. 그가 얼마나 정직하게 촌의 재무를 관리했는가 하는 것은 내가 직접 한 가지 일을 지내보아서 안다.

몇 해 전이었다. 이곳의 경관이 좋은데다 그가 촌의 회계로 있다 하여 나는 이곳에 와서 비교적 범위가 큰 문학창작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참가자들은 전 성 여러 곳에서 모여온 문학 애호자들이었다. 모임에 쓰는 경비는 물론 주최자인 내가 담당하였다.

모임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와 나는 초중 동창생인데다 다 같이 문학친구여서 나는 그더러 “당신이 촌의 회계이면 촌의 어른이자 살림군과 같으니 촌의 돈을 좀 쓸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느냐? 내 면목을 보아서라도 모임이 끝나는 날 촌의 이름으로 식사 한때를 대접했으면 한다.”는 의향을 내 비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촌의 경제가 넉넉하지 못한 사정도 있겠지만 회계라하여 권리를 턱 대고 촌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자기 이름을 내는데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쩌다 찾아온 동창의 의사마저 거역하는 그를 보고 너무 쩨쩨하고 고지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마지 그를 고깝게 보았던 것이다. 기실 회계면 촌의 경제를 어느 정도 자신의 의사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정한 권한이 있으니 촌에 온 손님들에게 촌을 대표하여 식사 한 끼 대접했다하여 설사 각박한 곳이라 해도 (더구나 동창생) 어느 누가 잘못됐다고 걸고 들 사람은 없는 것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곧고 바른 원칙성은 이 일에서만 아니었다. 한번은 촌의 장부에 만원 돈이 비게 되였는데 그것은 그의 상급인 촌장이 도용한 것이었다. 촌장은 회계인 그더러 차이가 나는 이 돈을 장부를 고쳐 말썽이 없게 지워버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지시를 거부하였다. 워낙 회계는 촌장의 말을 따르게 되여 있지만 이 돈은 용처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대바른 그는 촌에서 규정한 재정원칙을 위반할 수 없었다. 상급인 촌장이 아무리 요구해도 촌민들이 애써 번 돈을 직권을 남용하여 점하려는 촌장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능하게 촌장은 이 돈을 상급지도자들을 초대하는데 쓴 모양인지 상급지도자까지 나서서 이 문제를 무마시키려 여러 차례 그에게 귀띔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견결히 동의하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촌장은 촌의 경제 관리규칙에 쫓아 자신이 도용하여 쓴 만원 돈을 내여 장부를 맞추게 되였다. 

이런 일들은 그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신망을 높여주어 후에 회계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한 후 마을에서 촌장을 맡을 적당한 사람이 없어 할 때 그를 촌장 직에 올리려고 물망에 올린 적이 있다. 누군가는 직접 그를 찾아와 이번 기회에 나서라고 권고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기보다 마을의 장래를 생각하여 장원한 견지에서 젊은 간부를 양성해야 촌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능력은 좀 모자라지만 대신 젊은 사람을 올려 세웠다. 아름다운 양보를 한 것이다.

촌 책임자가 결정되는 날 모임에서 그는 명확히 태도표시를 하였다. “내가 뒤에서 능력껏 받들어 줄 테니 마음 놓고 대담하게 해보십시오.” 말하면 한데로 실천하는 그는 비록 나라의 록을 타먹는 교원이지만 농민과 한 덩어리가 되여 지금까지 촌장 아닌 ‘촌장’으로 촌 지도부를 성심껏 받들고 행동으로 도와주고 있다.

지금 허다한 중국 조선족 농촌마을들은 전에 생계의 주업이던 농사를 짓지 않고 촌민들이 마을을 떠나 출국했거나 연해도시로 진출하면서 마을에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보편적인 상황으로 되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항상 마음속 깊이에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조선족 촌의 운명이다.(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장차 이 땅에서 조선족 마을의 존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인간이 없음으로 하여 우리 마을도 족히 조선족마을로 계속 존재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민족의 존재에 연관된 일이라면, 마을을 살리고 잘되게 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보다 이를 자신의 응당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간직하고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다. 그 많은 것 가운데서 아마도 첫 손꼽을 ‘공’은 ‘조선족’이란 마을의 이름을 되찾은 사실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다. 조선족 촌이 번연히 존재하는데도 촌민들 누구도 모르게 마을이름 앞에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조선족’라는 이름 석 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 날 촌의 회계가 향에 회의를 갔는데 현에서 나와 각 촌 회계들을 점검하는 책임자가 그더러 <당신은 어느 촌의 회계인가?>묻기에 어느 촌의 회계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이 촌은 없어졌는데 왜 왔는가?>하며 돌아가라고 하기에 쫓겨나다시피 마을에 돌아와 촌 간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부터 간부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 도자기들 촌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되였다.

분명 조선족들이 사는 ‘조선족’ 마을인데도 ‘조선족’이라는 이 석자 이름을 촌민도 모르게 지워버린 ‘엉터리 같은’ 조치를 세상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가장 좋고 훌륭하다’는 나라의 한 하급조직이 엄숙한 나라의 정책마저 뜯어고치고 저희 멋대로 결정한 것을 알게 되였을 때 촌민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소식을 들은 촌민들은 그 누가 모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촌부에 모여들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촌간부들에게 따지고 물었다. 하지만 일촌의 지장이라는 사람도 이제야 알게 되였으니 사업에 등한했다고 할까? 아니면 등잔 밑이 어두웠다 할까? 너무나 엄청난 현실 앞에서 한동안 자기들 민족의 이름조차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살았던 촌민들은 새삼스레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각자 생각들은 달랐다.

촌 이름이 없어진 것은 불 보듯 뻔한 현실인데도 ‘그럴 수 있을까?’ 며 아직도 그냥 회의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미 상급에서 결정한 일이니 아무리 떠들고 일어나도 소용없다며 할 수 없이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사람들로…. 보아하니 생각들이 이렇게 흩어지고 안이한 것은 아직 촌민들이 장차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장 말단 조직인 ‘촌’이란 이름 앞에 ‘조선족’ 이라는 세 글자가 사라진 것에 있게 될 그 가슴 아픈 후과에 대하여 미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한 김 선생은 이런 때 나서서 순박한 이들을 일깨워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여보시오. 정신들 차리십시오. 이제라도 우리가 나서 찾지 않고 고분고분 말 듣는다면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우리에게서 사라질 줄 아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마을이 조선족 촌이 아닐 때 마을주인은 누가 되는 것 입니까?”

비록 이 마을 태생은 아니지만 마을의 연장자들을 통해 그는 누구보다 이 마을의 역사를 잘 안다. 이 마을은 분명 조선족이 개척하고 건설하고 조선족끼리만 모여 사는 순수한 조선족마을인데도 세월의 폭풍에 말려 선후 두 번이나 ‘조선족 촌’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 버렸던 아픈 역사가 있다. 처음은 아마 개척 초기였을 것이다. 행정구역을 억지로 한족 촌에 귀속시키면서 한족 촌의 관할 하에 이름마저도 그 한족 촌으로 대체하였다. 후에 민족자치가 실행되면서 ‘조선족 독립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였다. 그러나 50년대 중기 극 ‘좌’ 적인 농업정책이 집행되어 촌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한 개의 향(鄕)을 한 개의 농업 집단으로 확대하면서 또 조선족 촌의 이름이 사라졌으나 상급으로부터 시대착오를 시정하면서 이 마을은 다시 조선족 촌의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조선족 촌’ 보기에 아주 간단한 이름 같지만 이 이름이 가지는 함량과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이름을 잃고 살아본 사람들은 잘 안다. 있을 때의 행운과 없을 때의 불행을… 가장 치명적인 것은 ‘조선족 독립촌’이 아님으로써 촌을 운영해나가는 자주권이 조선족 촌민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결과 역사의 교훈은 이제라도 나서서 우리 촌의 이름은 우리가 찾아야만 마을에 희망이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누가 나서는가?’ 하는데는 또 의견이 같지 않았다. 이 일은 무엇보다 절실한 촌의 일인 만큼 촌의 주요 간부가 나서야 하는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로 한 쥐들의 토론처럼’ 정작 나서야 할 촌의 간부가 자주 얼굴을 보는 직접 상급과 맞서기가 주저되는지 아니면 잘못 나섰다가 후환이 자신에게 돌아 올가봐 걱정되는지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나서는가? 촌민들의 눈길은 자연 김 선생에게 쏠렸다. 하긴 마을에서 누구누구 해야 이 일을 나서 해결할 사람은 김 선생 밖에 없다는 것을 촌민들은 정녕 알고 있었기에 모든 기대와 희망을 김 선생에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은 자신이 맡은 책임이 무거움을 느꼈다.

(어떻게 자리 잡고 어떻게 개척하여 어떻게 불러온 이름인데 이렇게 홀가분하게 역사에서 사라진 것을 그저 눈뜨고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촌간부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나설 테니 당신들은 방해는 하지 말고 뒤에서 지지만 해달라!”

하여 촌에서는 그를 선두로 ‘조선족 촌’ 이름을 되찾기 위해 나서 줄 3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그날 밤 그는 밤도와 촌의 이름이 잃어진 사실을 상급에 신소하는 재료를 썼고 이튿날 날이 밝는 즉시 이 재료를 가지고 현성으로 쫓아갔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어에 능숙한 한 동창생을 찾아 그것을 한어로 번역하려는 것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곁에서 거들어주며 번역이 원만히 되자 그는 그것을 다시 타자하여 여러 벌 복사본을 만들어 다른 대표들에게 주어 우선 상급의 해당 부문에 갖다 주게 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직접 민족 사업을 관장하는 현 민족 종교 사무국의 책임자를 찾아가서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이 없어진 사실을 책임자에게 반영하였다.

헌데 민족 사업을 주관하는 민족종교사무국의 책임자조차 금시초문이이여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쩍 뛴다. 그는 이것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자신의 사업 수첩을 펼쳐 보였는데 거기엔 의연히 이 마을이 조선족 촌으로 그의 사업 범위 내에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나라의 위탁을 받고 민족 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는 민족 사무국도 모르게 조선족 촌이 없어졌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족사무국은 나라의 지령을 받고 전문민족에 관한 구체적인 사업을 하는 곳이다. 하기에 민족에 관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민족 사무국이 먼저 알고 그들을 통해야 한다. 헌데 정부의 권력기구의 하나인 민족 사무국도 모르게 민족정책에 관련되는 중대사가 처리되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엄중한 일인가!

책임자는 이 일을 해당 부서를 통해 이해한 후 촌에 알리겠다고 하여 김 선생은 그것을 기대하면서 다른 두 대표를 찾아 재료를 현의 다른 관계부문에 갖다 주었는가를 확인한 뒤돌아오는 길에는 또 촌의 직접 상급인 향정부에 들려 퇴근시간이 다 되였기에 재료를 비서에게 주면서 이 재료를 꼭 제일 책임자에게 시급히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마을로 돌아왔다. 재료를 읽어보면 촌민들의 의사를 알 수 있기에 구태여 여려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첫 행보를 마치고 마을에 도착하기 바쁘게 촌장이 그를 찾아왔다. 향의 제일 책임자에게 긴급히 전화가 왔는데 이 재료를 누가 가져왔는가? 고 묻기에 고지식한 그가 누가 갔었다고 하자 향장은 그 자리에서 명령조로 “김 선생이 함부로 외출하지 못하게 하라.” 지시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 무슨 죄인이라고 날 외출까지도 못하게 하는가?”

향의 제일 책임자는 촌에서 이런 일을 추동하고 또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설 사람은 김 선생 밖에 없다고 인정했기에 아예 시초부터 그를 다잡아 꼭 붙들어 놓기만 하면 다른 촌민들은 떠들다 말 것이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잘못 추측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알았을까? 상급의 말이라면 팥으로 매주를 쓰라 해도 고분고분 잘 듣던 촌민들이지만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에 절실히 관계되는 이 일에서만은 쉽사리 상급의 말을 듣지 않는 다는 것을….

이는 어느 한 두 사람 촌민의 개인적 이익에 관계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한 민족 구성원들인 전 촌의 이익과 운명에 달린 문제고 더 엄격히 말한다면 나라에서 제정하고 집행하는 소수민족의 자치와 권익에 해당한 중대 사안이다. 이들이 주로 상급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다시금 의견을 지출하는 의거는 바로 촌민들의 동의도 없이 ‘조선족 촌’이라는 촌의 이름을 지운 것은 나라에서 제정한 당의 민족정책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제정한 구체 법규에 의하면 무릇 소수민족의 촌은 비록 범위가 작아 작은 촌을 큰 촌에 합친다 해도 민족이 다른 촌과 합칠 때는 반드시 촌민의 백분의 백이 다 동의해야지 단 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아도 안 된다는 (아래에서 이런 일을 하급에서 제멋대로 소홀히 처리할까봐 문건에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음) 엄격한 기준이 명백히 적혀있어 촌민들도 이 기준을 다 알고 있기에 촌의 합병문제가 제기됐을 때 근본 이 일은 삼척동자도 동의하지 않기에 아예 토론에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촌민의 합법적인 권리를 무시하고 향의 제일 책임자는 ‘백분의 백으로 동의했다.’로 사실을 고쳐 이를 상급에 보고하였고 상급에서는 그의 보고만 믿고 이렇게 소홀하게 결정을 내려 촌민들을 불안하게 한 것이다. 하기에 엄격히 말하면 나라에서 제정한 우량한 민족정책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잃어진 촌의 이름은 꼭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초조하게 답복을 기다렸지만 답복을 주마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도 현 민족 사무국에서 답복이 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민족 사무국을 찾아갔다. 그 날 제일 책임자는 없고 대신 다른 한 민족 간부를 만났는데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그를 직접 촌의 이름을 관할하는 민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 일을 반영하게 하였다. 민정에서는 오히려 ‘무엇 때문에 한족 촌과 합치는 것을 백분의 백으로 동의해 놓고 오늘에 와서 부동의 하는가?’ 하며 소란을 피운다고 이들을 무조직, 무규률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에서 자기들은 합치는 것을 근본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과 백분의 백의 동의는 완전히 거짓으로 만들어낸 숫자라는 것을 까밝히면서 다시 조사하여 촌민들의 요구사항대로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자 다시 조사하여 알려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마을에 돌아와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흙소가 강을 건넌 듯’ 답복은 없고 문제의 해결은 갈수록 묘연했다. 그는 다시 몇몇 민족간부들을 찾아가 이 일을 반영하면서 민족의 일이니 민족간부들이 직접 나서 도와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모두들 동정은 하면서도 직접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간부는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꿩구어 먹은 소식이고 어떤 간부는 이 일에 나서기를 꺼리어 회피하는 눈치다. 하긴 나라의 록을 타먹는 그네들로써 ‘민족, 민족’ 하다가 상급에 잘못 보일까봐. 두려워 여느 사람과 달리 소수민족 간부로써는 남다른 고충이 있는 것이다.

1957년 나라에서 진행한 정풍 운동 때 민족을 애호하거나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여 상급에 정당한 의견을 제기했다가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우파’ 로 몰려 몇십 년 동안 인간 지옥에서 고생한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김 선생은 자신도 국가간부이기에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민족간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래도 민족심있는 간부가 있어 조선족 촌의 이름이 없어진 일을 매우 동정하면서 그에게 한 가지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향의 제일 책임자가 이제 곧 타지로 전근되어 가게 될 것인데 중국의 적지 않은 일은 그 일을 처리한 책임자가 전근되어가고 다른 사람이 오면 선임 영도가 한 일을 웬만해서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풍이 있기에 해결이 더욱 어려워 질것이라며 그 책임자가 가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바짝 시간을 다그치라는 것이었다. 

그 민족간부의 말에서 계시를 받은 그는 해결 방법을 달리 모색 하였다. 단지 간부들의 힘만으로는 언제 해결이 될지 모르는데 공연히 시간을 늦추었다가 그 민족간부의 말대로 향의 제1책임자가 불시에 전근이라도 하게 되면 문제의 해결은 더욱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지 않아도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구실을 달며 책임지지 않는 일부 간부들은 밤 낮 ‘연구해보자.’며 일은 해결해주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으로 나중에 백성자신이 힘들어서 요구를 철회하게 만든다. 이번 일도 자칫 그렇게 끝 날수 있다. 때문에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자면 민족 언론 기관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는 다시 재료를 가지고 조선족 언론지인 신문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이 신문의 오랜 독자인 그는 신문을 통해 언젠가 지방정부에서 소수민족이 부딪친 난제를 질질 끌며 타당하게 처리해주지 않아 기층에서 해결하려고 뛰다 못해 할 수 없어 신문사를 찾아서 문제를 제기했더니 신문사가 나서 질질 끌던 난제를 대번에 원만히 해결했다는 보도를 본 기억이 났다.

조선족으로 말할 때 조선문 언론지는 가물의 비와 다름없다. 민족에 대한 책임감이 높은 이들은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수수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고 나서서 이를 정부에 반영하여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민족사업중매꾼’ 역할을 지금껏 담당하여 조선족 대중들 속에 위망이 높다. 한편 권력기구는 아니고 그저 언론을 일으키는 언론기관에 지나지 않지만 그 권위와 위력이 권력기구에 못지않아 조선족들은 흔히 신문사를 ‘제 2정부’라고까지 부른다. 그처럼 신문사는 나라의 법과 정책에 의지하여 민족의 권익을 수호하는데 진력을 다하는 것이다.

신문사에서는 특별히 이 사실에 중시를 돌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기자를 인차 보내어왔다.신문사의 기자가 해당부문을 찾았을 때였다. 기자가 일부러 차까지 몰고 와 급히 찾아온 이유를 말하는데도 해당 일꾼은 곧 점심시간이 되어서 접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한다. 이에 기자들이 ‘그렇다면 좋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에 성민정청의 위탁을 받고 왔는데 당신들이 접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돌아가겠다.’ 하자 그는 오늘은 주말이니 오후에도 사람이 없을 것이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여 이 일을 토론한 후 꼭 월요일 오후까지는 답복을 해 주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그 자리를 떴다.

다짐을 받은 기자들은 다시 점심도 먹지 않고 곧바로 향정부를 거쳐 촌으로 와서 한 번 더 문제의 정확성을 이해하였다. 중대 사안이니 만큼 해결에 차질이 없자면 그 무엇보다 진실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사실에 조금도 허위과장이 없었다. 기실 김 선생이 신문사에 써 올린 재료는 존재하는 현실에 비해 그다지 엄중하지 않다. 현실은 이보다 더욱 엄중한 것이다.

사실을 이해하고 기자가 돌아간 후 향에서 한 영도 간부가 촌민들의 의견을 들으려 왔다. 촌민들은 벌 떼 같이 모여서 향에서 잘못 처리한데 대해 서투른 한어로 억울함을 표시하면서 주먹 같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보아하니 상급의 말을 아주 고분고분 잘 듣는 마을 사람들이지만 ‘조선족 마을’ 이름을 회복하는 일에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간부는 촌민들의 정서와 의견을 그대로 향에 가지고 가 보고했다.

 

 

 

이튿날 향의 제일 책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촌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고는 싶으나 이미 결정에 의해 지도까지 고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보아하니 촌민들더러 양보하라는 뜻이다. 마음이 약한 어떤 사람들은 그말을 듣고 중도에서 그만 둘 것을 제의하면서 김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가고 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대답했다. 국가에서 제정한 정식지도도 아니고 향에서 임시 그린 지도가 무엇이 대단한데 농민들이 그것을 고려하는가? 그래 그것이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이는 해결해주지 않으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으니 절대 중도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소모한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 고이 마을은 영원히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

만일 향이나 현에서 질질 끌고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그보다 높은 상급에 갈 준비도 해야 한다!

지도까지 고쳤다 해도 촌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향에서는 이번에는 촌민들의 부담을 생각해서 작은 촌을 큰 촌에 합치면 간부도 줄어들고 촌민들이 촌에 내는 경비도 절약할 것이 아니냐? 했다. 이에 맞서한 촌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를 받지 않고라도 촌민을 위해 일하겠으니 조선족 촌의 이름을 하루 빨리 돌려 주십시요!’

강물은 골을 쫓아 흐르고 해는 동쪽에서 뜬다.

촌민들의 한결같은 의지와 민족 언론지의 적극적인 도움과 더우기 소수민족의 자치 권리를 존중하고 보증해주는 나라의 정책과 법규가 있음으로 하여 ‘조선족 촌’이란 민족의 이름을 되찾는 일은 끝내 성공하여 이름을 잃어버린 지 1년 3개월 만에 마을 촌민들은 상급으로부터의 촌의 이름을 원래의 ‘조선족 촌’으로 회복시킨다는 정식통지를 받아 쥐게 되였다.(당시 이 사실은 신문의 제 1면 톱기사로 실려 이 신문을 보는 겨레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편달이 되였다.)

하다면 왜 상급에서는 한 개 향에 많지도 않고 딱 하나뿐인 조선족 촌에 대하여 돌보지는 못할망정 없애려고 촌민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독단적인 조치로 조선족 촌을 한족 촌에 합병시켰을까? 김 선생은 생각하였다.(이것은 단순한 사업문제가 아니다. 여기엔 우리 스스로가 깊이 사고해볼 문제가 있다.)

나라의 밥을 먹고 사는 그들이 ‘마을 촌민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타민족과 합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 때 합쳐서는 안 된다’ 는 나라의 정책 규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조선족들이 지금 마을을 떠나가는 추세로 보아 멀지 않아 이 마을엔 조선족들이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일찍 예측한 것은 아닌가.

한편 조선족 촌에 지금 남아있는 촌민들이 많지 않고 지금도 련속부절히 외지로 나감으로 멀지 않아 사람이 많지 않는 상황에서 한 촌을 운영하기가 헐치 않는데다 참새는 작아도 오장육부가 다 있는 것처럼 작은 촌에 있어야할 부서는 다루어야 함으로 간부를 줄여 촌민의 부담을 덜려는 쪽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장 중요한건, ‘조선족 촌’이 아닐 때 한족들과 한 촌이 될 때 부근 한족들이 마음대로 이 촌에 들어와 살 수 있도록 명분을 주려는 것이 주되는 원인이고 목적이다. 주위 한족들로 말하면 이 마을은 항상 그네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노다지와 같은 존재다!

이 마을은 산과 물이 겸한데다 토질이 좋고 수원을 가까이 끼고 있어 농사짓기도 좋거니와 주위가 온통 산이어서 살림자원이 풍부하다. 그리고 마을이 조촐하고 안전하며 경관이 좋아 참으로 주위 여러 마을 치고도 가장 욕심나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는 자기들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조선족 촌민들의 동의가 없을 때 타민족이 함부로 조선족동네에 들어와 집을 사거나 토지를 경영하지 못한다는 ‘결정’을 지였다. 이것이 규정 아닌 ‘규정’으로 지켜 왔고 마을의 자주권과 생활권을 존중하여 한족들도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제 민족의 구분 없이 다 같이 한 촌으로 합쳐지면 그들이 자유로이 마음 놓고 들어와 정착할 수 있다. 그러면 장차 이 마을은 조선족보다 한족들이 더 많아짐으로 하여 말이 조선족 촌이지 실은 한족 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민족자치도 한낱 무용지물로 되고 마는데 지금껏 김 선생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가장 근심하고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어서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찾는 것에 그토록 모자람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이네들뿐 아니라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왜 중국이라는 대국에 창해일속(滄海一粟)처럼 섞여 살면서도 자신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면 자기민족의 이름을 가지려 하는가?. 왜 이 땅을 사랑하여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이 땅에서 대대로 살려고 하면서도 어찌해 또 조선족들끼리 따로 살고 싶어 하는가? 

아마도 소수민족이 이래야만이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타민족 속에 포위되어 살면서도 작은 터전이나마 우리끼리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 그 속에서 같은 언어, 같은 글과 같은 민족의 풍습을 누려야만 민족이 민족다워 지는가 싶다. 

‘조선족 촌’ 중국에서 흔히 듣는 이름이지만 익숙한 이 이름에 기대여 이 이름을 받들며 이 이름을 긍지와 자호로 우리는 지금까지 이 땅의 한 족속으로 살아왔다.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으로 있으면서도 꼭 조선족으로 살고 싶은 그들에게 이 이름은 민족 존재의 표현이요 생명력의 과시인 것이다 이는 또한 장기간 올바른 민족정책교육을 받아 자주성과 책임감이 몸에 베인 결과라고 해야겠다. 나라의 이런 정책의 지지와 담보가 없었다면 이 마을 사람들에게 구태여 자기민족의 이름을 가지고 살려는 이런 욕구도 배짱도 담략도 없었을지 모른다. 모든 조선족들이 그러하듯이 이 마을사람들도 이 작은 터전에서나마 구애 없이 자기들의 글과 말과 풍습을 누리면서 하루를 살아도 제 민족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아, 민족이여 누구는 지금껏 조선족들이 시야가 좁은 것은 오랜 세월 스스로 자신의 작은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갇히어 살면서 대민족속에 섞이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방어 때문이라고 하면서 열린 세상이니만큼 울타리를 터치고 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 말에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온 역사를 고찰해볼 때 바로 이런 자각적인 ‘봉쇄’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만일 창해일속(滄海一粟)이나 다름없는 우리민족이 이 땅에 올 때부터 ‘우리끼리’를 고집하지 않고서 누가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는 살아남을지 모르나 민족으로서는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쩜 나라에서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여 소수민족집거지의 상대적인 자주성과 독립성을 존중해주는 이유도 바로 숫자가 많지 않은 소수 민족이 대민족 속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편리를 주고 보호를 하기 위한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기에 나라에서 자신들에게 준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실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갖고 살면서 자기의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켰고 전통과 풍습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타당한 실례인지는 모르나 한 번은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한 한족이 들어와 잠시 사는 것을 허용하게 되였는데 자신들이 폭죽을 요란하게 태워 마을을 시끄럽게 할 때 조선족들은 그것이 한족들의 하나의 전통적인 풍속습관으로 알고 말치 않았는데 조선족들이 자기 마을에서 누구의 생일을 쇠게 되어 밤 깊도록 춤추고 놀자 시끄러워 잠 못 자겠다면서 일부러 찾아와 야단을 치더라는 것이다.

이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다. 때문에 이런 경험으로부터도 같은 민족끼리의 삶이 얼마나 편리한가를 체험으로부터 알고 있는 그네들이다. 아직 서로가 다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박약하기에 다문화로 가는 하나의 과정에는 아직도 소수민족이 자기들의 터전에서 자기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야 그 민족으로 될 수 있음이 절실하다. 촌민들은 비록 땅 파먹는 보통의 농사꾼들이지만 누구보다도 같지 않는 문화에 대한 절실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대민족 속에 살면서도 ‘조선족, 조선족’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궤야 보배’ 라고 아무리 좋은 정책이 있어도 이를 자각적으로 이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이 될’ 위험도 있다. 여기엔 촌민들의 노력과 더불어 촌민들이 자신의 권익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선두에 나선 김 선생의 로고가 크다. 그는 잃어진 촌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밤도와 재료를 쓰고 교통도 불편한 곳에서 쉴 새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현성을 앞․뒷집 쫓아다니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에서 꽤나 높다하는 한 민족 간부를 꼭 만나 이 문제를 제기하고 도움을 받아야겠는데 그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자 일부러 그가 회의를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오래 길에서 지켜 서 있다가 기여 만나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아들 같은 젊은 간부를 만나보겠다고 자존심을 깎으면서까지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 것은 그 무엇 때문일까? 민족이 무엇이길래? 촌민들이 합심하여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한족들 속에서 ‘꼬리빵즈들이 대단하다’ 고 했다한다 . 웬만하면 상급에서 결정하면 결정한대로 복종하고 말 것 인데 이렇게 자기의 이름과 명예를 찾겠다고 촌민이 한 사람처럼 나서서 여기 뛰고 저기 뛰고 하여 기어이 성공한 것을 보면 담략과 패기가 있는 민족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긴 이 마을은 역대로 상급의 말을 아주 잘 들어왔다. 솔선적으로 나라에 양식을 많이 바치고 산아제한, 위생, 문화 등등 마을문명건설도 잘하며 주위의 산에 나무가 그렇게 많아도 함부로 남벌을 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수사 적은 민족이라는 데서 항상 정직하고 온순하여 상급의 지시를 적극 받들어 공헌은 많이 하면서도 불미한 대우나 억울함에 대해서는 애써 참으며 너그럽게 살아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상급 영도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해하고 양해하여왔다.

헌데 촌의 이름을 찾는 일에는 이렇게 끈질기고 이약하게 나서서 끝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질 줄이야! 민족이 무엇이기에? 민족은 생명의 뿌리이고 존재의 가치이기 때문인가.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해도 결코 이 한가지만은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이네들에게서 ‘민족’이란 이름은 귀중한 것임을 소수민족으로 살아보지 않는 대민족은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이와 같은 담략과 패기를 가지고 이 작은 마을에서 자신들을 영도하는 상급에 맞서서(중국에서는 보기드믄) 승리한 것은 우선 나라의 민족정책의 보람인 것이다. 만일 소수민족의 자치 권리를 법적으로 정책적으로 담보해주는 나라의 좋은 정책과 법이 없다면 아무리 되찾자고 해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라에서 특별히 제정해준 민족자치법이 없다면 근본 ‘조선족 촌’이라는 것이 정녕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기에 더더욱 지키고 빛내가야만 할 이름이다, 탯줄은 묻지 않았어도 뼈는 묻고싶어 조선족 촌의 이름을 다시 찾은 후였다.

한 차례의 힘겨운 줄 당기기에서 ‘승리’한 이들은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평소에 그저 습관처럼 ‘조선족 촌’, ‘조선족 촌’ 하지만 그 이름을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부르며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는 우리 민족이 와서 개척하고 몇십 년 우리가 건설한 마을이라는 것을 만천하가 다 알고 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똑똑히 과시하는 것은 비단 과거에 책임지는 것일 뿐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다.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촌이지만 자기의 이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려는 촌민들의 의지의 집념, 역량의 표현으로써 이제 다시 찾은 이 이름은 촌민들로 하여금 조선족 촌의 영예를 귀중히 여기고 자각적으로 이를 이행하여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데 힘을 보태주는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하지만 명실 공히 조선족 촌으로 거듭나서 자기의 주권과 권익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대민족 속에 둘러싸여 있는 한 작은 마을로써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엔 마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바로 마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은 우리 이름으로 된 우리의 마을을 우리 스스로가 굳건히 지키며 가꾸려는 그 의지와 행동에서 표현된다. 이에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우리에게는 어떤 부족점이 있기 때문일까?!)

왜 상급에서 이 향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소수 민족촌인데도 이렇게 없애지 못해서 역사의 고비 때 마다 그 이름을 지우려하는가? 단 한 촌뿐인 소수민족 촌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얕잡아 보여서일까? 설사 상급의 일부 간부들에게 소수 민족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관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그네들의 사업에서도 찾아야 하지만 우선은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찾아야하지 않을까?

지금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마을을 떠나 국외 나가거나 대도시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인데 그 대신 삶의 터전을 포기하는 현상이 날로 엄중해지고 있다. 설사 버리지는 않는다 해도 전처럼 부지런히 고향의 삶에 열중하지 않는다. 농촌에 남아 있으면서도 농사를 짓지 않고 한족들이 부지런히 일할 때 빈들빈들 노는 것은 이제 조선족 농민들의 보편적인 형상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사람들이 살지 않아 텅텅 비어있는 집들은 보기에도 궁상스러운데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얼마 되지 않고 그 중에도 젊은 사람들을 거의 보기 힘드니 생기가 넘치던 당당한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조선족 촌은 김빠진 공처럼 생기와 활력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조선족 마을에 와 보면 첫인상부터가 쓸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는 많은 지성인들 속에 조선족 농촌의 ‘해체론’과 ‘위기론’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적지 않은 한족들이 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이제 얼마가지 않아 조선족 마을은 하나하나 해체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한족들은 멀지 않아 조선족들의 삶의 터전이 그 옛날처럼 자기들 손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때문에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은 가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만이라도 일심협력하여 조선족 촌을 조선족 촌답게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각오나 결심이 부족한 것이 오늘의 조선족 촌민들의 정신상태가 아닌가싶다. 자나 깨나 출국하여 돈 벌이만 생각하면서(잘 살고자 하는 일이니 그것도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곰이 옥수수 따듯 얻을 때는 어렵게 얻어놓고 버릴 때는 너무 쉽게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번 촌의 이름을 잃었던 교훈을 상급이나 상관에만 밀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나서서 우리 마을을 우리 마을답게 가꾸고 지키어 ‘나쁜 일을 도리어 좋은 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조선족 촌’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후 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촌민공약을 내왔다. 한 마을사람들이 농사를 많이 짓도록 고무하기 위해 토지를 임대할 때 무조건 본 마을사람에게 임대해준다. 그러면서 마을을 살리기 위해 모두가 헌신하는 의미로 임대료는 타지의 한족에게 주는 것 보다 눅게 한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농사를 많이 짓기를 원하는 촌민에게 토지를 집중해서 임대하여 우리 마을에도 농사짓는 ‘경영지주’가 나오도록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토지가 외지의 한족들손에 들어가지 않아 우리 땅 우리가 가꾸고 지키는 것이 된다.

 ‘공약’을 자각적으로 준수하여 토지를 한 마을사람에게 임대하여줌으로써 농사를 많이 지을수록 늘어나는 이득도 많아 몇 년 전만 해도 이 마을은 총 농호의 숫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사짓는 호가 다른 곳 보다 훨씬 많았다. 예를 들어 이웃 ‘동방’이라는 촌 같은 데는 전 촌 300세대 중에 유감스럽게도 농사를 짓는 조선족 농호가 단 두호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이곳은 100가구 중에 아직 20여 가구가 그대로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에도 농사를 많이 짓는 호가 바로 우리의 김 선생 가족인데 이는 그 자신이 마을을 살리는 방도를 촌민위원회에 제기하여 ‘민약(民約)’을 내오고 또 자신이 앞장서 이를 실천하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일을 하여야만 잘 산다고 인정하고 죽으나 사나 출국꿈을 꾸면서 자신들의 의무나 다름없는 농사를 포기하여 토지가 남아도는 마을의 형세를 감안한 그는 늦깍이로 한 번 ‘지주’가 돼 볼 꿈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진출하는’ 세기적 변화의 역사적 과정에서 이제 장차 농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진출하는 새로운 추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인데 토지를 버리지 않고 우리 농촌 우리가 살리려면 마을의 토지를 맡아 몇 사람이 혹은 조건이 허락한다면 한 사람이 경영하는 경영인이 있어야겠다는 것이 여러 신문과 잡지의 정보를 보고 그가 사고하고 깨달은 ‘마을 지키기’ 묘책이다. 그것을 실천해보려고 첫 발자국을 뗀 것이다. 하여 마을사람들의 토지를 많이 임대하여 농사를 지였는데 지난해까지 그가 경작한 토지는 무려 17헥타르나 되었다. 이 집 저 집 사방 널려있는 토지를 맡다보니 그가 맡은 자투리 같은 땅 뙈기가 무려 20여 곳이 남아 되었다. 이렇게 토지가 사방으로 분산되어 다루기가 매우 불편했지만 촌의 공약을 앞장서 실천하려는 의지와 그리고 ‘지주’가 되어 마을을 살려볼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환경의 열악함을 탓하지 않고 아들과 아내와 함께 농사일에 근신하였다.

워낙 그는 출신이 교원인데다 어릴 때 교실에서 불발탄으로 인정된 작탄을 가지고 놀다가 그것이 터지면서 손가락 몇 개가 떨어져 나갔기에 농사일하기가 매우 불편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젊은이들도 하지 않고 노는 농사일을 만년에 맡아 부지런히 하면서 철따라 계절따라 농사일에 바쁘다보니 언제 한번 시원히 놀러 다닐 새도 없었다. 어쩌다 동창생들이 현성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를 불러도 농사가 한창 바쁠 때면 갈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이 마을의 농사돈은 그가 다 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긴 이렇게 많은 토지를 맡아 지은 농사 수입이 쌀값이 높을 때는 한국에 가서 뼈 빠지게 버는 돈만 못지않아 웃음집이 흔들거릴 때도 있었다.

그가 농사에서 수입을 올리는 비결은 부지런한 것도 있겠지만 과학기술적으로 농사를 짓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 ‘늦깎이’ 농사꾼이지만 열심히 농업기술을 장악하기위해 신문잡지를 열심히 뒤지다가 누가 새로운 영농기술을 창안했다면 그곳이 어디든 불사하고 찾아가 경험을 배워왔다.

한번은 연수 동명의 최모모란 농민이 부식토를 쓰지 않고 농촌에서 흔하게 버리는 벼 껍질로 볏모를 키워내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 기술을 알아왔다.

이렇게 근신하게 노력한 결과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셈으로 한국에 가 일하는 사람 못지않게 수입을 올린 그는 농사일을 더더욱 확대하여 허락되면 장차 온 마을의 토지를 다 임대하여 농장을 꾸리고 ‘농장주’가 되어 볼 타산으로 농사에서 번 돈을 대량으로 투자하여 모내는 기계며 수확기 등 확대 재생산에 쓸 값비싼 농기구부터 마련하였다. 마을의 조선족들이 점차 일하지 않는 족속이 되어 바쁜 농사철마다 노동력을 한족들 속에서 구해야 하는 데는 그들도 점점 꽤가 나서 해마다 모내기 가을걷이 등 관건적인 농사일에 달라는 인건비가 높아지기 때문에 아예 노동력을 적게 쓰는 기계화 작업을 시도한 것이었다. 모두다 출국하여 뭉치돈만을 노리는 세월에 이렇게 남들이 하지 않는 농사일로 치부하고 마을을 살린다는 것도 쉽지 않는 작업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퇴색하기 마련이다. 마을을 지키고 꾸는 일도 마찬가지다. ‘마을을 살리는 일이 내 알바 무어랴?’ 고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일부 사람들께서 시간이 지나자 슬그머니 촌민 ‘공약’을 어기는 것이었다.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한족 농사꾼들이 조선족들의 토지자원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족은 대량 출국으로 토지는 남아돌고 사람은 줄어드는 대신 한족들은 사람은 많고 토지자원은 부족하여 늦게나마 잘살아보려고 부지런히 설치는 그네들에게 조선족 촌의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것은 그들이 남 앞서 치부할 수 있는 좋은 도경이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조선족들의 토지를 맡아 농사지으려 하였다. 이에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촌의 결정을 무시하고 임대비를 조금 더 받기 위하여 촌의 장원한 이익을 무시하고 촌민위원회 몰래 한족들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주었다. 문에 이런 ‘이단’ 적인 처사는 때로 촌에 화근을 불러와 농사를 많이 맡아 마을을 살려보려던 김 선생은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이었다. 

어느 하루 논물을 보러 나갔던 그는 조선족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짓는 한 한족이 물도랑을 마구 파서 물을 대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장원하게 타산하고 농사일을 하는 마을사람들과 한 해 한 해 ‘임시 먹기는 곶감이 좋다’는 식으로 와서 그때그때 일 하는 타지의 농군과 다르기에 이렇게 도랑을 마구 파제끼면 마을 농사에는 큰 지장이 되는 것이다. 헌데 누가 알았을까! 그 한족은 그만두기는커녕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그의 멱살을 잡고 한 매 후려치지 않는가!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한 일인데다 힘깨나 쓰는 젊은 놈이라 노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헌데 무례한 그는 자기 부친 같은 그를 몇십 미터나 끌고 가면서 욕을 보이었다. 하지만 억대우 같은 놈이라 힘을 당할 수 없어 그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면 그 한족이 김 선생에게 이렇게까지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 모든 것이 어쩜 그가 조선족 촌의 이름을 찾으러 적극적으로 나선 것과도 관련되지 않을까. 그 한족 젊은이가 사는 마을은 조선족 촌과 강 하나 사이 두고 남쪽에 있는 데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 그 소문을 모를 리 없다. 비록 촌의 책임자는 아니지만 김 선생이 나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그들도 조선족 마을사람들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김 선생을 때린 그 한족젊은이가 속해 있는 촌은 지난 번 향에서 억지로 조선족 촌을 그 촌에 귀속시키려던 한족 마을의 촌민이다. 그러니 그도 소문을 들어 알았을 것이다. 김 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 촌민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자기들과의 합촌이 무산 되였다는 것을.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앞뒤 마을이 한 촌이 되여 그네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음대로 살수도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원인도 있겠고 더욱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 선생만은 그네들이 조선족 촌구역인 산에 와서 나무 한 대를 허가 없이 찍었다거나 다른 일로 조선족 촌의 이익에 손해를 주었을 때 다른 사람은 다 모르는 척하고 말치 않는데 김 선생만은 기어코 넘기지 않고 나서서 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하루 그가 볼 날이 웬 한족이 와서 마을 앞을 에도는 강역의 모래를 파서 산더미처럼 쌓아놓지 않는가? 도시에서 집을 짓는데 모래를 실어다 파는 사람이었다. 헌데 허가도 없이 이 마을구역 강의 모래를 파서 가득 모아 놓으니 홍수에 강물이 제때에 빠지지 못하게 되면 강역의 토지가 심히 유실되는 데 강역에는 이 마을의 논밭이 줄지어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더욱이는 강위에 놓여있는 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리의 기둥들을 받치고 있는 강심의 모래를 파내니 수심은 깊어지는 대신 다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지반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다리가 충격을 받아 전에 없이 여기저기 금이 가서 힘들게 자금을 마련하여 놓은 다리의 수명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 다리는 마을 사람들이 외계로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거니와 이 마을 뒤 산에 살고 있는 몇몇 한족 농호들이 다니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다리이다. 20여 년 전엔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 여름철엔 강을 배로 건너다니어 외계 세상으로 왕래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이 다리를 놓는 일을 마을의 첫째가는 대사로 간주하고 촌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도 모자라는 금액은 상급관계부문을 쫓아다니며 마을의 전임 책임자였던 김 촌장께서 숱한 고생을 해서야 완성 할 수 있었던 다리이다. 이 다리를 놓느라고 노심초사를 해서인지 이 다리를 놓고 전임 촌장은 병으로 아깝게 사망하였던 것이다. 그 한족이 와서 강 바닥을 멋대로 파는 것을 어찌 김 선생 혼자만 보았겠냐만 모두가 팔짱을 끼고 남의 일인 듯 모르는 척 할 때 그만은 이것이 마을 사람들이 이익과 관계되는 일이기에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함부로 강바닥 모래를 파가도 되느냐? 환경관리부문의 허가를 얻었느냐?”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나서 제지시키려 한 것이다. 

필자의 견해가 틀리는지는 모르나 우리 조선족은 월경민족으로 이 땅에 와 살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여 공이 있는 민족으로 떳떳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살면서도 아직 마음 깊이에 ‘주인 된 용기’가 부족한 것 같다. 문화와 풍습이 같지 않는 민족이 이웃해서 살다보면 개인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민족 간에 모순과 갈등이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과 갈등에 봉착했을 때 흔히 나약한 조선족들은 정부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 줄 것을 바라고 자신이 떳떳이 나서서 자신들에게 차려진 권익을 수호하는 데는 용기와 담략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극히 개별적이지만 일부 한족들 가운데 조선족을 우습게보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중화 인민공화국의 떳떳한 공민이 아닌가! 난제에 부딪쳤을 때 나라에서 제정한 법과 정책이 있다는 것을 왜 상기하지 않는지? 그렇다하여 민족 간에 문제가 있을 적마다 날카롭게 맞서 싸워야 비로소 민족성이 강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어떤 사람들은 타민족과의 원칙적인 문제에서조차 대담히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면서도 같은 민족끼리의 모순이나 갈등에 대하여서는 너무나도 옴니암니 따지고 다투며 곧잘 물고 뜯는 것이 허점이 아닌가싶어 하는 말이다.  

다행히 김 선생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나약성이 없어 보면 보는 대로 민족의 이익에 손실을 주는 행위라면 주저 없이 나서니 밉상을 받을 수밖에 이렇게 모든 일에 민족을 최우선한다고 하여 그를 협애한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흑백을 가리는 그의 좌우명’ 이어서 같은 마을 사람이라 해도 그는 촌민의 이익에 손해를 주는 일에 대해서는 마찬가지 누구보다 앞서 말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조용하던 마을 뒤 산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왁자하니 떠들면서 흰 눈이 한 벌 덮인 산에서 벌목을 헤적이고 있었다. 촌의 핵심인물이기에 그는 촌에서 진행되는 크고 작은 일을 다 안다. 헌데 나무를 찍어 팔기로 촌민들이 토론한 적이 없는데 누가 함부로 담 크게 이렇게 촌의 나무를 남벌하는 것인가? 가던 길을 멈추고 급히 찾아가 “어찌된 영문인가?” 사연을 따지고 보니 촌의 부직을 맡은 한 책임자가 전체촌민들의 동의도 없이 마을의 이 중대사를 혼자 결정하여 한 나무장사군에게 촌민들이 몇십 년 고이 키운 나무를 눅거리로 팔았던 것이다. 

10여 년 키워 38㎝나 자란 낙엽송 한 그루에 10원도 걸리지 않게 똥값으로 팔았는데 기실 정확히 따지자면 이 낙엽송 한대에 400원이 넘는 값이다. 김 선생은 당장에서 채벌을 정지시키고 이 일을 촌민들 속에 알렸다. 그리하여 촌민들이 한결같은 반대에 의해 겨우 300여 대를 찍고 나서 더 이상 찍지 못했다. 만일 그날 김 선생이 이를 발견하고 촌민에 알려 이 일을 제지시키지 않았던들 이 마을 촌민들이 몇십 년 고이 키운 낙엽송 4만 여 그루가 다 잘려 나가 온통 수목으로 뒤덮여 푸르싱싱하던 마을 동쪽 산은 영락없이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쯤 쓰고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 선생이라는 사람이 촌민들의 신임을 이용하여 촌장도 젖혀 놓고 촌의 일을 좌지우지하며 독단하는 것은 아니냐고. 그가 촌을 위해 자각적으로 일을 많이 찾아 한다하여 그를 올리고 촌 책임자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촌장 아닌 ‘촌장’ 이다. 워낙 전임 촌의 책임자가 물러난 후 마을에서 책임자로 그를 선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을의 장래를 생각하여 자기 보나 나이 젊은 사람에게 촌의 책임을 양보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은 마치 악대반주마냥 무대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은 받들어 주고 그러다 잘못 비껴가는 일은 꼬집기도 하고…. 그렇다고 촌의 영도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촌의 크고 작은 대사에 참여하여 건의를 제기하여 방법을 모색케 하는 ‘참모’ 일 뿐이다.  

더욱이 그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전적으로 촌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마음가짐에서 하고 있는 즐거운 봉사이기에 그가 촌의 일에 자주 삐치지만 밉상을 받지 않고 내심 존경을 받는 이유가 사적인 욕심이 적고 대공무사하며 말에 도리가 있고 일 처리가 공정하기 때문이다. 술도 마실 줄 모르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놀음도 놀 줄 모르는 유순한 선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 농사일과 촌의 일 내놓고 남아도는 시간에는 부지런히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그의 집에 가면 해마다 구독해 보는 신문 잡지가 방바닥에 수두룩 널려있는데 웬만해서는 깔끔하게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어쩌면 수더분하고 솔직한 그의 개성을 말해 주는 듯싶다. 

행동은 가장 좋은 모범이다. 사랑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벙어리장갑을 끼고 벌벌 떨며 자기 돈을 써가며 촌의 일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감동 앞에서야 누가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람이 애매하게 한족에게 매를 맞았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봉변을 당했다! 이 악성사건이 생긴 후 그가 해보니 이 한족 젊은이가 때려놓은 조선족이 이 마을에 한 둘이 아니었다. 그는 지어 한 조선족 노인의 집에까지 가서 온 집 식솔을 때려죽인다고 공공연히 위협까지 하였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조선족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일반 개인적인 갈등의 차원을 넘어 소수민족에 대한 기시인 것이다. 더구나 그 젊은이가 김 선생을 때리면서 ‘꼬리빵즈’이니 ‘일본 놈의 앞잡이였다’ 느니 하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용어를 썼다는 것은 더욱 그에게 조선족을 기시하는 민족적 편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음 용한 사람들은 그 보다 더 큰 보복이 두려워 매를 맞고도 울분을 속으로 새기며 참고만 있었던 것이다.  

정의는 용기를 낳는다. 단순히 자신이 매를 맞았다는 분노에 앞서 소수 민족을 함부로 모욕하거나 업신여기는 무례한 자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 조선족 마을사람들이 마음 놓고 산다고 생각한 김 선생은 이 사건을 덮어두지 않고 사회치안을 관할하는 파출소에 알리었다. 하지만 사회 치안을 관장하는 파출소에서는 그 한족 젊은이가 평소에 정신병이 있어 그렇다고 두둔하여 사람을 때렸는데도 가만 놓아두는 것이었다. 정의에 견결한 그는 참을 수 없어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직접 향의 제 1책임자를 찾아 이 사실을 보고하고 강경한 처리를 요구했다. 사실을 안 향의 제일 책임자는 대노하여 즉석에서 파출소 소장에게 명령하여 그 한족 젊은이를 체포하게 하였다. 

후에 그 젊은이는 김 선생의 치료비를 내게 되였고 벌금도 내게 되였으며 구류소에서 단단히 교양을 받아 매우 노실해 졌다. 하여 한족들조차 김 선생이 과연 ‘쎄기는 세다고 했다’ 한다. 알고 보니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 고 그는 같은 우리 민족도 불사하여 한족 마을에서도 자주 사람을 때려눕히는 말썽을 일으켜 골칫거리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 선생도 종당엔 인간이다. 희로애락이 구전한 인간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마을의 일을 관심하다가 매까지 맞는 억울함을 당하자 자존심이 몹시 상한 나머지 더는 이 마을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마을을 뜨려고 하였다. 하여 모내기를 다하여 이제 절반농사는 지은 것과 다름없는 논을 중도에서 처리하였으며 장원하게 농사지으려고 마련했던 수확기며 모내는 기계며를 모두 팔아 치웠다. 

헌데 그가 마을을 떠나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 왔다. 오랜 세월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오며 그와 더불어 촌의 여려가지 일들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고 함께 근심해오는 지기나 다름없는 한 노인은 김 선생의 손을 꽉 움켜쥐고 ‘선생까지 떠나면 이 마을은 어찌되는가? 당신이 남아서 모르는 것은 일깨워주고 가르쳐줘서 이 마을이 그냥 조선족 마을이 되도록 해야지 않느냐? 이제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사는 날까지 약한 힘이나마 우리 다같이 손잡고 이 마을을 지켜보자’ 며 그를 만류했다.  

마을의 장래를 근심하는 진정어린 노인의 권고를 들으니 차마 이사를 가겠다고 뻐길 수가 없어 깊이 생각해보겠노라고 하고 노인을 돌려보낸 뒤 김 선생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마을을 떠날 것인가? 떠나지 말 것인가?’ 갈림길에서 오래도록 사색을 굴렸다. 정작 이사를 가자니 어쩐지 무엇인가 아쉽고 알찌근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녕 싫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버리겠다고 할 때 오히려 더욱 귀중함을 알 때가 있다. 바로 그에게서 이사를 가려고 생각한 이 시각이 그러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때 묻히며 살아온 고장이기 때문일까. 그는 이 마을에서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업을 하며 청춘을 보냈고 이 마을에서 30여 년간 생활하면서 삶을 영위했고 인간과 인정을 배웠다. 이 마을의 산에 어머님을 모셨으며 이 마을에서 아들 딸 셋을 낳아 키웠다. 이 산골의 공기로 피부를 적셨고 이 산골의 흙으로 배를 불렸으며 이 산골의 인정미로 생활의 훈향을 익혔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없이 준 고마운 산천, 허물없는 사람들을 떠나가 살기엔 애착의 뿌리가 너무 깊었다. 고향은 아니지만 30여 년을 고향처럼 사랑하며 살던 곳이다. 인생에 30년이 몇 번이나 되는가?!  

때로 인간에게는 포기가 아름다울 적이 있다. 바로 이런 때를 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용감히 자신을 포기하였다. 체면이나 어떤 명분 때문에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던 자신을 억제하고 다시 이 고장에 마음의 뿌리를 내렸다. 비록 이곳에 탯줄은 묻지 않았어도 뼈는 묻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그가 몸 붙이고 30여 년을 살아 온 이 마을은 일찍 40년대 개척이 되었다. 워낙 이 자리를 왜인들이 바라보고 집단 마을은 건설하려 하다가 실패한 후 조선인 오 아무개란 사람이 와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주민들을 모아왔는데 3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마을의 옛 사진에 의하면 마을에 세워진 30여 채의 가옥들이 모두 통일 규격으로 지은 듯 가뿐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리적 환경도 좋거니와 조선족들의 신근한 노동으로 이 마을은 인근 조선족 마을가운데서도 비교적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모두가 공인하는 곳으로 되였다. 특히 벌이 넓은 북방에 조선족들은 입쌀만 욕심 내여 벌판만 보고 산을 보지 않아 이 마을처럼 이렇게 주위에 온통 산을 끼고 넓은 벌에서 조선족들끼리 오붓하게 살면서 몇십 년 동안 자연 경관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한 곳도 많지 않다. 그래서 가까운 인근은 물론 멀리 하얼빈 같은 대도시에서도 가끔 산골자연의 냄새를 맡기 위하여 때 묻지 않은 자연의 경치를 흠상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곳을 찾는 조선족 나들이가 많은가 하면 이곳의 공기가 좋아 하얼빈 같은 대도시에서 일부러 이곳에 이사 와서 사는 사람도 있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이 마을에 도시의 조선족들이 해마다 집단적으로 이곳에 와서 묵으면서 자연을 즐기는 데는 모두가 그의 연줄을 통해 찾아오는 귀객들이다. 그들은 그의 집이 좁으면 다른 집들을 빌려 밤을 지새우면서 그의 집 넓은 텃밭에 심은 배추며 상추며 옥수수며 파 등 무공해 채소를 직접 밭에서 따내어 뜰에 멍석을 펴고 먹어보는가 하면 우정산에 올라 철을 맞춰 산나물을 채집하는 생태체험을 하는데 이 마을 산에는 고사리, 고비, 더덕, 취나물, 두릅, 물미나리 등 천연산채와 오미자, 오갈피, 머루, 다래, 추자, 송화가루, 오두 등 수십 가지의 산열매와 야생약초가 주렁져 있고 몇 해 전엔 노루며 오소리, 산토끼, 꿩, 물오리, 매, 부엉이 등 산짐승들이 자유롭게 서식했다. 그리고 강에는 붕어, 잉어는 물론 이 근년에는 보기드믄 메기도 많은데 촌민들이 농사짓는 논물에까지 찾아 든다. 가마에 쌀을 안쳐 놓고 밥이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산에 잠깐 올라가서도 한 끼 먹을 산나물을 넉넉하게 뜯어 온다는 마을이다. 집집마다 고사리, 고비로 누구든지 이 마을에 왔다가는 사람들에게 무공해 산나물을 특산으로 선물하는 곳이다. 

이곳의 물은 미량 원소 함유량이 월등하여 천연 광천수로 평을 받았다. 하여 도시의 복잡한 삶에 찌들었던 그들은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고 철 맞춰 각종 산나물과 산열매를 채집하며 이름도모를 산새들의 명랑한 지저귐 소리를 감명 깊게 들으며 여기서 산을 즐기고 자연을 즐기면서 목가적인 삶을 향수해본다. 

훤한 뜰에 멍석을 펴놓고 웃고 떠들며 산간의 오염되지 않는 공기를 마시고 오염되지 않는 물을 마시며 시골내가 푹 나는 곡식들을 먹는 재미를 어찌 도시의 비좁은 식탁에서 먹는 것과 비기랴! 더구나 지금은 무공해를 선호하고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향수를 소위 웰빙적인 삶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삶에서만 그친다면 그저 놀이꾼들이 어쩌다 한 번씩 오는 나들이 마을로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렇게 산골마을을 찾아 여행이나 산놀이를 자주 오는 데서 마을 건설의 좋은 계시를 받은 그는 이 마을을 북방에서 이름난 관광지나 자연체험 마을로 만들 수 없겠는가를 고심하면서 소문도 없이 경영인이나 투자자를 찾기 위해 자기 돈을 팔며 얼마나 많은 곳을 가보고 얼마나 사람들을 만나보았는지 모른다.

산골에 살아도 열린 사고로 산골을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을 이 산골에 모셔오기 위하여 그것이 마을을 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임을 명심한 그는 어느 한 해는 자신이 돈을 팔며 이곳 산골마을에서 몇 백리나 멀리 떨어진 장춘에 가서 그곳에서 진행하는 ‘제 9회 조선족 발전 심포지엄 및 제 1회 중한 녹색경제 기술합작교류회의’에 한 보통 촌민의 명의로 참가하여 그 장소에서 ‘돈 벌고 재미나게 오래 살려면 우리 마을로 오시라! 큰돈을 벌어보고 싶은 분은 우리 마을로 오십시오!’ 하면서 투자와 유치를 호소하였다.

누군가 앞으로의 21세기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세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언제고 이런 경치 좋은 산골이 각광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 보금자리가 우리 겨레의 손에 있지 않고 남의 것이 되어있다면? 얼마나 아쉽고 또 아까우랴? 그래서 더 이 좋은 환경을 마을의 이름으로 경영하고 겨레의 것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목마른 호소를 해 보는 것이다. 그 후에 있은 ‘촌민들을 거치지 않고 정부의 독단적인 권력행위로 주위의 산들을 어느 한 한족의 손에 팔아넘긴’ 불행한 일만 없었던들 그의 노력으로 지금은 누구인가 이 마을에 와서 투자하여 수수한 산골마을이 아름다운 관광지나 자연생태마을로 탈바꿈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 산이 많고 경작지 밭이 많은 이 마을의 특점을 살려 친 환경적인 곡식들을 대량 재배하여 촌민들이 경제적으로 한 몫 보게 하고자 한국분들이 중국에 와서 실험적으로 꾸리는 농장에 가서 호박이며 고추며 콩 종자 등 우량종자를 가져다 마을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출국에만 열을 올리며 성심으로 가꾸는 사람이 없어 대면적에 낙착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었으나 어떻게 하든 촌을 살리고 촌민들을 잘살게 하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은 물론 인맥 관계를 총동원하여 모지름 쓰는 그의 성심은 눈물겨운 것이다. 

그는 안다. 지금도 누구인가는 자꾸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떠나지 않지만 앞으로 누구인가는 또 마을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도 있게 된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포기하지 않고 잘 관리하여 그네들 삶의 보금자리를 잘 보존해놓으면 언제인가 떠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 올 터전이 있다.

알 수 없는 세상의 변화, 지금은 돈이 있다고 마을을 떠나 도시에 가서 편안한 삶을 향수하지만 누가 알랴! 있는 밑천 다 불어먹고 빈 털털이가 되여 다시 돌아오게 될지. 그때 가서 그네들이 후회하며 돌아 온다하여도 몸 붙이고 살 터전이 없다면? 그래서 더 지금은 버리고 비우고 갔다 해도 그것을 버린 것으로 생각지 말고 미래에 대비하여 여유 있게 보존했다 그네들에게 다시 돌려줄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것이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의무 아닌 의무이고 책임일 것이다.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그러면 그네들이 오늘은 하찮다고 버리고 간 집과 땅이 다시금 그네들 삶을 감싸주는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싸늘하게 식은 집에 불을 지피고 주인이 없어 뜰에 가득 자란 잡초를 뽑아내고 다시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또다시 조건이 성숙했을 때 열려진 세상으로 다시금 재출발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에로의 이행은 막을 수 없는 역사의 추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농촌을 깡그리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맨 처음 이 땅에 와서 발 딛고 산 곳이 어디인가? 바로 지금의 이 삶의 터전인 농촌이 아니었던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농촌을 아껴야 한다. 

지금 중국의 조선족들이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발 빠르게 들어서면서 몇십 년 살아온 농촌이 흔들리고 있다. ‘임시먹기는 곳 감이 달다’는 격으로 출국으로 인하여 차려지는 눈앞의 단촉한 이익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터전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모르고 하찮게 여기면서 마치 ‘기름병 떨구고 깨알을 줍듯이’ 어렵게 얻은 것을 쉽게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농촌은 보편적으로 해체의 위기에 놓여있다.

허나 곳마다 그 지방에서 사업하는 간부의 소질에 의하여 마을의 사정이 달라진다. 어떤 곳에서는 간부들이 코앞의 이익만 보고 삶의 원천적인 재부인 땅이며 산을 눅거리로 한족들에게 팔아넘긴다. 이를테면 그 값이 몇백 만원 어치가 되는 촌민들의 재산인 임목지를 불과 몇십 만원에 팔고 거액의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가하면 마을에 남아있는 공지마저 팔아 촌민들이 집수리를 하자고 흙 한차를 파 쓰자 해도 팔 곳이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어 어떤 곳에서는 산이란 산은 죄다 팔아치워 촌민들이 몇십 년 자기네 산으로 알고 모신 조상의 무덤마저도 옮겨야할 처지에 놓여있다고 한다. 토지를 비롯한 마을의 일체자원은 인간과 더불어 앞으로도 우리 삶의 토대이고 원천이다. 우리는 역사발전에 쫓아 발전한 산업사회에 들어선다 하여도 우리가 역사적으로 개척하고 건설한 이 삶의 터전만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공들여 마련한 우리 삶의 보금자리이기에 우리의 것이자 전 민족적 재부로 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이 마을이 걸어갈 길은 중국조선족 농촌마을과 같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다. 각일각 무섭게 성장하는 대민족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키지 않는 한 한족들은 언제인가 이곳에 와 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조선족 마을이란 이름은 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상들이 몇십 년 피땀으로 건설한 것이 하루아침에 타민족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면 민족의 지반이 사라지고 지반이 사라지면 따라서 민족도 사라지고 만다. 정책이 좋은 이 나라에서 어찌 민족이 스스로 사라지게 한단 말인가?

비록 한족들이 잘살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면서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삶의 지반을 애써 차지하려고 하나 강제로 빼앗거나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 무슨 기시를 받는다거나 압박하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다. 자신이 자신의 재부를 적극적으로 지키고 보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엔 공허한 이론이나 추상적인 결의보다는 실천이 수요된다. ‘김 선생’이란 한 작은 농촌의 지성인지만 작은 것을 크게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민족의 농촌에서 시급하다. 그는 이 땅에서 민족의 오늘과 내일의 운명을 관심하는 그 많은 지성인 중의 한 보통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야 우리 농촌이 보존된다. 허지만 이런 정신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향토와 삶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의 산 향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곧바로 민족의 사랑에 집결된다. 세상에 사랑처럼 뜨겁고 절실한 것은 없다. 하기에 마을에 얼마 남지 않는 겨레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이 마을을 조선족 마을답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늘 사고하며 조용한 실천으로 소리 없는 뜨거움으로 드높은 책임감으로 마을 주민들의 참모역할을 하면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버스나 기차를 타자해도 몇리 길을 걸어 나가야 된다. 편벽한 산골이라고 점점 남아있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아 때로 자신또래 사람들을 불러 트럼프 놀자 해도 사람이 모자라서 놀지 못한다는 곳이다.

태양이 지글지글 끓는 한 낮이 되여도 산간에 자리 잡은 마을은 그림처럼 조용한데 들리는 건 새소리, 바람소리, 수목들이 설레는 소리뿐, 밤이면 별들만 깜빡깜빡 쥐죽은 듯 조용한 마을을 내려다보는 너무 잠잠한 마을이어서 때로는 그 누가 소리라도 한번 크게 질러 한적한 마을을 놀래우기라도 했으면 싶게 인간이 그립고 인간의 소리가 그리워지는 곳이다. 이 때문에 보다 많은 인간을 찾아서 왁자지껄 떠드는 도시를 목적하고 떠나는데 어쩌면 남들 다 서쪽으로 향할 때 그만은 동쪽을 향하는 듯 ,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일부러 외롭고 고독한 삶을 붙잡고 사는 그는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진부한 인물은 아닌가! 그의 마음엔 ‘농촌’ 만 꽉 차있는 것 같다. 사랑이라면 사랑이고 집념이라면 집념이다.

지금 그는 또 마을의 백년대계인 산을 찾기 위해 간고한 ‘대결’에 나섰다. 잃었던 민족의 이름을 되찾아 분발된 마음으로 고향을 지키려는 촌민들의 열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촌민도 모르게 촌의 이름을 지워버리듯 상급정부에서는 또 촌민들을 통과하지 않고 마을의 소유지인 산을 외지의 한 한족에게 눅거리로 팔아 몇십 년 동안 보존되어 온 그네들의 소유가 하루아침에 소실된 억울한 일이 생겼다 한다. 그 때문에 경관이 좋은 이 마을을 농촌 관광지나 조선족민속촌이 아니면 자연생태마을로 만들어보려는 촌민들의 꿈과 이 꿈을 실천하기위해 애면글면한 그의 로고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게 되였다.

그가 사는 마을은 국도 옆에 자릴 잡은 아직도 오염되지 않은 산골의 작은 조선족 촌이다. 많은 외지 투자상들이 눈독을 들여 찾아드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산에 의거하여 살아왔고 앞으로도 초요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제한된 농경지만으로는 될 수 없기에 산 자원을 합리하게 개발하면서도 생태환경을 파괴하지 말아야 전도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2003년 3월 1일 상급 정부에서는 촌민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 마을 2만 4천 6백 여무의 산을 성이 왕가라는 한족에게 도급줄 때 이 마을 행정구역의 1만 8천 3백 5십 무를 포함시켜 끝없는 후환을 남긴 것이다. 그는 이 마을 산을 소유하게 되자 조선족들이 몇십 년 애써 개척하고 건설해온 역사도 무시하고 ‘거주 지역은 물론 농경지까지 자기 것인데 단지 조선족이 거주할 뿐이다.’ 등 유언비어가 떠돌아 몇십 년을 자기 터전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온 촌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촌민들의 항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나라에서 적극 제창하는 조화 사회건설이나 안정 단결에 매우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2003년 촌에서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고 도급 준 면적이 얼마인지 경계를 나누지도 않은 상급의 합동을 절대 승인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촌민들의 정서를 안정시키며 진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촌의 영도가 직접 상급 영도를 찾았다.

상급에서는 ‘증건을 사실로 하는’ 원칙에 따라 토지분쟁을 해결하여 주겠다고 명백히 태도 표시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조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촌에서는 ‘촌과 사전에 협의도 없었고 면적이 얼마이며 경계도 나누지 않은 불투명한 합동은 승인 할 수 없다’ 는 태도를 표시하였다. 마을 촌민들은 건국 전부터 지금까지 주변 산지와 황지를 지켜왔고 가꾸고 관리하여 왔기에 정부에서 도급줄 때 촌민들의 생존을 위하여 지역경제발전을 위하여 촌에 먼저 사용권을 주어야 하는데 외지 사람에게 주는 이유는 무엇인지? ‘촌락 주변과 농토주변의 양지쪽 산은 이 마을의 것이니 국가에서 발급한 토지증대로 해야 한다’ 고 촌에서 반박하여 조해는 무산되었다. 협의가 무산되었는데도 산을 산 한족은 자신이 체결한 합동에 따라 촌의 집체 소유지 토지마저 관리해 나섰다. 촌에서 촌민들의 생활편리를 위해 가옥수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흙을 한 두 수레 파는 것을 위해 내놓은 폐경지의 흙조차 못 파가게 막아나서 고 기타의 땅도 잠식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2005년 봄 촌의 땅을 빼앗아 논 뚝 하나를 사이 두고 소나무를 옮겼는데 이는 관청을 등에 업고 조선족농민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급에 수차례 해결을 제기하였으나 시간을 미루면서 6개월이 지나도 아직 소식 한마디 없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 한족은 촌의 집체 소유 토지를 잠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뙈기 인공림도 내 것이요 저 뙈기 인공림도 내 것이다.’ 하며 근간에는 무슨 낌새를 챘는지 마을주변의 토지를 촌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측량하고 있다. 그래도 상급영도를 거쳐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시 찾아가면 정부 내의 일부 공무원들은 촌민위원들이 정부를 찾아가면 벌떼같이 모여들어 몰아 부치며 민족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촌민들은 물러설 여지가 없는 처경에서 심은 묘목을 뽑아내자고 떠들고 일부 과격한 촌민들은 정부 문 앞에 가서 농성을 벌리자고 까지 하지만 촌에서는 전력을 다하여 촌민들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상급을 통해 해결하러 찾아갔으나 끝내 원만한 해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법에 제기한다 해도 한 개 작은 촌에서 상급기관을 피고석에 올려놓고 송사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마을은 경제실력도 약하고 소수민족으로서 언어장애로 인해 자신의 권익을 변호할 대단한 능력도 없고 인맥관계도 넓지 못하다. 그래서 천방백계로 상급에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촌의 요구는 아주 간단하다. 이 마을 토지 사용증에 밝혀진 5천여 무를 다시 확인하여 주고 법률의 보호를 받도록 천방백계로 힘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재료도 보내고 면담도 거쳤으나 ‘흙소가 강물을 건넌’ 듯 3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결론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는 것이다. 하다면 이 마을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이 산은 이제 이네들의 소유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산은 이 마을의 사랑이고 산은 이 마을의 재부이며 산은 이 마을의 의거이고 산은 이 마을의 자호이다. 산은 이 마을의 생명이며 산은 이 마을의 미래다. 산에서 나무하고 산나물 뜯어 먹고 산 경치를 흠상하고… 생활의 한 밑천이고 근거 인산이다. 이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도 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이 있어 남들의 각광을 받는 것이다. 산이 자랑이여서 마을이 소문났고 산이 희망이여서 의연히 사람들은 살고 있으며 산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찾아드는 것이다. 산은 이 마을사람들의 공통한 사랑이다. 이런 산을 잃으면 마을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산, 누군가는 이 산이 영원히 자신들의 것인 줄 알고 전에 없이 그 무덤에 비석까지 세웠다. 

지금 산이 남의 소유가 됨으로써 마을은 건립되어 60여년 긴 세월의 역사에 일찍 없었던 나무 채벌로 (자기 산이라 하여 마음대로 채벌함) 인한 수토류실 피해를 받고 있으며 봄 해동 때 산골 물이 쏟아져 내려 농토를 덮고 수로가 끊겨 봄씨 붙임이 늦어졌다. 그리고 산지관리가 이전됨으로써 주위 한족들의 남벌이 최근 2년 동안 왕성해져서 그 후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산지 분쟁이 있어 투자해도 시끄러움이 많을 줄 알고 많은 투자자들이 왔다가 돌아간 것인데 성중의학원의 모모 교수와의 ‘식물원 상담’이 파산되었고 상학원 교학기지의 건설 상담이 파산되었으며 한국대학생해외봉사단이 이 마을을 거쳐 가면서 그들의 주선으로 국제농업발전개발원 이박사의 마을고찰이 위기에 직면하여 난산이 되였다. 현 교육국의 모모 간부의 소개로 삼명한국기업인의 가공공장설립 상담도 토지 분쟁사실을 알고 도중에 유산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직접 혹은 간접적인 피해로 이 마을은 발전의 좋은 기회를 잃게 되였고 그러지 않아도 자꾸 떠나는 마을에 남은 촌민들은 더욱 신심을 잃고 많은 농호가 촌을 떠나려 하고 있어 촌의 존재에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그는 이 가슴 아픈 사연을 글로 써서 상급에 주었는데 그 글을 보노라니 불행하고 억울한 마을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해결을 기대하는 절절한 감정이 피를 토하듯 글자마다에서 애절히 흐르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지금 이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여비를 써가면서 변호사를 찾고 교수를 찾아 타당한 해결 방법을 찾아내려 모색하고 있다. 정부를 상대로 도전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연약한 한 개인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라 때로 포기하고 싶으나 어쩐지 겨레에 대한 끈끈한 정과 향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차마 포기할 수가 없어 마음을 앓고 있다. 잃어버린 촌의 이름을 되찾듯 잃어버린 산도 되찾아 올 수 있다면? 누가 이들을 도울까? 이 작은 마을의 ‘하찮은’ 존재를….

해결하자면 막대한 대가를 내야 한다고 한다. 어쩜 미해결 상태에서 끝나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제 경제발전에 집념하면서 전엔 관심이 없는 산이나 토지에 대하여 대민족들은 심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칫 방심하다가 소수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많은 자원들이 인맥이 넓고 권력을 등지고 있는 그들 손에 넘어가면 소수민족의 삶의 지반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하고 힘겨운 도전이지만 나라의 정책이 있고 정의로운 법이 있는 한 어느 때고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 민족이여. 우리는 소수 민족이 여선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삶은 늘 곡절적이고 힘이 들구나. 우리들의 힘겨운 삶에는 항상 기쁨과 슬픔 행운과 불행, 희망과 절망이 점철되어 있다. 그래도 정책이 좋은 나라이기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며 살고 싶은 땅이기에 우리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힘들게 마련한 우리 삶의 터전을 위하여! 후손들 내리내리 이 땅에서 살아갈 그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촌의 이름을 다시 찾은 그 해 여름이었다. 한국의 모 대학의 자원 봉사자들이 순수한 조선족 촌인데다 최근 마을에 이런 장한 사연이 있었음을 알고 자원봉사를 와서 마을길도 깨끗이 청소하고 일손이 딸리는 어느 가정의 일손도 도우며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난간을 돈을 내여 다시 산뜻하게 색칠해주는 등 동포의 사랑을 쏟았다. 그리고 우등불을 피워놓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마을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마을의 전도와 운명을 두고 밤이 새도록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번 모국에서 온 대학생 자원봉사단의 자원봉사는 그네들에게 동포에 대한 끈근한 정을 심어주었으며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마을을 지키고 가꾸려는 의지를 더욱 북돋아주었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농촌은 지금 격변기의 새로운 진통으로 존재와 더불어 발전과 퇴보의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의 농촌을 살림으로서 오랜 우리의 보금자리가 대를 이어 우리 민족의 손에서 이어지게 할 것인가?는 이 한 마을만이 아닌 온 조선족의 두고두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우선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을 지키고 가꾸려는 주체의 노력이 절실한바 잃었던 이름을 자신들의 노력으로 되찾아 세운 이 마을 사람들의 기거는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간 후 그들의 고마운 봉사를 기념하고 촌민들에게 ‘우리 마을’ 의식을 더더욱 북돋아 주기 위해 김 선생이 기획하고 촌민들의 동의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작은 기념비 하나를 세우고 ‘동포의 사랑으로 마을은 영원하리.’ 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인근 마을 어디서건 이 마을이 조선족 동네임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어찌하여 촌 이름을 따로 또 진지하게 돌비석에 새겨 놓았는가. 이는 그네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다시 찾아온 자기들의 촌 이름을 더욱 잘 지키고 가꾸어가려는 촌민들의 한결같은 염원을 반영한 것으로도 된다. 구태여 세상이 다 아는 ‘조선족 촌’이지만 특별히 자기 촌의 이름을 아로새긴 이 기념비는 보기엔 작고 평범해도 여기엔 우리겨레의 만만치 않은 패기와 담략과 의지가 깃들어 있다. 여기는 조선족들이 와서 개척하고 건설한 곳이다. 이 작은 기념비는 비록 보잘것 없어도 민족의 이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려는 촌민들 그 집념의 상징인 것이다.

이 작은 기념비는 또한 자신들을 명실이 부합된 조선족 촌으로 계속 만들어가려는 촌민들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이제 이 기념비는 촌민들로 하여금 조선족 촌의 영예를 귀중히 여기고 자각적으로 이를 이행하여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데 힘을 보태주는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이 기념비는 역사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역사들을 돌비석에 새긴 글에서 확인했는가? 누구든 이 기념비를 일부러 파 던지지 않는다면 이 기념비는 오랜 세월 마을의 입구를 지켜선 파수군의 역할을 하면서 이곳은 누구 아닌 바로 조선족들이 와서 개척하고 건설한 곳임을 증실하는 유물이 될 것이다 이 작은 수호신이 있어 마을은 대대로 우리겨레의 손에서 보존될 것인가? 나라의 우월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집행되는 한 그리고 이에 걸맞는 이네들의 노력이 있고 고국을 포함한 모든 동포들의 사랑과 연대가 있는 한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이 역사적 존재 속에 이 한 작은 마을도 영원하리라는 것을 김 선생과 같은 ‘민족 지킴이’들에게서 기대하고 싶다.

후기

그는 워낙 어릴 때부터 득실하게 문학을 희망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중 때는 책 뒤주로 글재간 있는 학생으로 각광을 받았다.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청년 문학도들을 조직하여 문학단체를 뭇고 신문 잡지까지 꾸려볼 타산을 하고 선두자로 나섰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기후가 무릇 어떤 단체든 단체를 뭇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그는 공안국의 뒷조사까지 받게 되자 문학을 놓고 교육 사업을 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 이 마을에 전근되어 와서는 작은 학교지만 한 학교의 책임을 지고 오랜 시간 사업해 전심해왔다. 그러다가 퇴직한 후는 또 촌 사업을 돕느라고 바삐 돌면서 글을 못 쓰고…. 그러나 워낙 문학에 흥취가 있는 사람이라 짬짬이 쓴 글을 모아 비공개로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작을 쓰려던 그의 야심은 촌을 살리기 위한 실천에 나서 ‘경영지주’가 되어 볼 꿈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농사일에 바삐 돌면서 그밖에 촌의 회계며 노인협회 회장이며 촌 당지부 위원이며 등등 실제 일을 맡아 하는 한편 많은 일들을 주동적으로 찾아 하다보니 대부분 정력이 촌의 운명을 관심하는 일에 쏠리어 한가하게 글을 쓸 사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작을 쓰려던 포부를 잠시 접어놓게 되였다.

하지만 꼭 글로 써야만 하랴! 글쓰기도 사회와 민족을 위한 것이거늘 실천은 가장 매력 있는 문장이다. 비록 글을 쓰지는 못했어도 바로 민족 사랑과 고향 사랑으로 그가 촌민들과 함께 해놓은 많은 일들로 하여 오늘도 의연히 ‘조선족 촌’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작은 산간 마을 이것은 바로 그가 정성을 기울려 쓰고 있는 ‘작품’이며 작품 중에도 ‘명품’이 아니겠는가! 그는 붓이나 필이 아니라 헌신하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랑으로 지금까지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끝나지 않는 ‘대표작’을 쓰고 있다.

'조선족 촌’ 이름을 다시 찾은 산간 마을 상공에 파아란 하늘이 비껴있다. 하늘을 떠받치고 옹기종기 솟아있는 아름다운 봉우리 중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바위산 꼭대기에 봄이면 진달래가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화사한 진달래다. 이곳에 사는 조선족들처럼 그 숫자가 많지 않은 진달래는 모든 산봉우리에 다 있는 것이 아니어서 특별히 마을 사람들의 사랑은 받는다. 진달래꽃은 산 정상 바위위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기에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봄마다 어김없이 제자리에 생명의 꽃을 무덕무덕 피운다. 어쩜 진달래는 우리민족의 얼과 넋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다면 해마다 진달래가 어김없이 피듯이 이네들의 이 작은 터전도 세월 따라 영원해야 하지 않을까!

본문은 제10회 재외동포 문학상 가작상을 수상했습니다.-편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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