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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산촌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
2010년 01월 10일 18시 43분  조회:4996  추천:57  작성자: 강순화

                 변강 산촌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으면 추억에 산다더니 늙었다고 하기엔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도 지나간 옛일들을 자주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게 되는것은 웬일일가? 오늘도 휴식일의 짬을 타서 낡은 앨범의 색바린 흑백사진들을 펼쳐보느라니 꼭 30년 전의 그 세월 그 일들이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치며 그 산촌 그 사람들이 사뭇치게 그리워진다.

     1968년 고중을 졸업하고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광활한 천지로 하향했던 그곳은 바로 변강산촌인 백금향 심포마을이였다. 열다섯호의 농가가 두만강변 산비탈에 오손도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을 앞에는 푸르른 논밭, 마을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세월과 더불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는 살구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들로 울긋불긋 자연과원을 이루었고 산골짜기엔 맑은 샛물이 졸졸 흘러내려 그야말로 그림속의 에덴동산이였다. 명절엔 마을에서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떡이나 두부같은 색다른 음식은 언제나 온 동네가 함께 만들고 나눠 먹던 인품 좋은 시골 마을이였다. 장사라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세월이라 뒷산에 무너지듯 열리는 갖가지 과일들도 마을애들이 뜯어 먹고 나머지는 그냥 버려져 까치밥이 되군 하였다. 사회주의 집체재산의 판매와 교환은 절대로 금지되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2년후 나는 그 마을 향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범이 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66년급 고중 졸업생인 내가 그 시골에서는 최고학력자였으니 말이다. 그 시골학교는 전교학생이라야 50명도 안되였지만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다 있었다. 교원은 모두 합해 네명이였는데 교장이든 교원이든 관계없이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반 학생을 한 교실 좌우쪽에 따로따로 갈라 앉쳐 놓고 시간마다 복식교학를 하였다.

     그세월 향촌교원의 월급은 32원이였는데 시골에서 그것은 최고 수입이였다. 감농군들이 일년 내내 땀 흘려 벌어도 량식대와 생산비용을 제하고 나면 년말 총결에 단돈 100원도 손에 쥐여보기 힘든 세월이였으니 말이다. 그 월급에 손색없이 교원들의 사업열정은 아주 높았다. 과당교학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하학 후에도 산령을 넘나들며 후진생들의 과외보도도 꾸준히 견지하였기에 해마다 진행되는 현급 통일고시에서 우수한 점수를 따내는 등 시내학교에 못지않은 좋은 성적들을 올리군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나무낫을 들고 산에 올라가 겨울 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자체로 학교의 벽을 바르고 회칠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는 등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시골애들은 시골 정기를 타고 나서인지 일도 잘하고 말도 잘들었다. 도시에서 나서 자라 시내 큰 학교에서만 공부해 온 나로서는 그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향촌학교 교직생활이 참으로 재미났다. 세세대대로 땅을 파며 살아 온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 그것도 일곱 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 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 작은 남녀 애들이 매일 한집식구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였었다. 점심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애들은 좋아라 환성을 지르며 저마끔 싸들고 온 도시락을 책상우에 펼쳐 놓고는 누가 쫓기라도 하듯이 게눈감추듯 먹어 치운다. 숫가락 놓기 바쁘게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치고 닥치며 즐겁게 뛰노는 그 모습들은 그야말로 오붓한 변강마을의 희망이요, 산촌의 푸르른 풍경이였다.

     1973년 중학반 졸업 기념으로 찍은 우리 반급의 열한명 아이들을 보라. 하나하나가 그같이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아닌가? 이젠 모두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여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이땅의 그 어느 고장에서 살고 있겠지... ...?

     몇해 전 룡정거리에서 우연히 그 시골마을 촌장을 하고 있다는 동수학생을 만났었다.《선생님, 저를 몰라보십니까? 그 개구쟁이 동수입니다!》찬찬히 훑어보니 정말로 그때 그 아이가 옳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도 세번이나 넘게 변했으니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겨 버린 그때의 그 아이들을 어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랴!

     지난 가을의 어느날 나는 갑자기 사랑스러운 산촌마을 보고 싶어졌다. 지금쯤 몇분이나 남아 계실지 모르는 마을어른들도 뵙고 싶었고 더욱이 3년간이나 정들었던 촌학교가 무척 궁금해났다.

     토요일 나는 다짜고짜로 친구 월령이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룡정에서 공공뻐스를 잡아타고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산 사이를 꿰질러 그리 넓지 않게 포장된 큰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는 뻐스속에서 추억에 들뜬 나는 저도 몰래 마음만 설레였다. 한식경이나 지났을가, 어느덧 두만강이 보이는 향정부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또 두만강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20여리길을 내려가야 한다. 그젯날 향에서 회의를 하고 늦은 밤길로 돌아오다가 길옆 산우에 느닷없이 나타난 커다란 호랑이 눈불에 함께 걷던 세 녀선생이 하나같이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고 줄달음쳤던 그 일이 문뜩 떠오르며 저도 몰래 흠칫 몸서리쳤다. 걸어 다닐 그때엔 두시간도 넘어 걸리던 이 길이 뻐스로 달리니 어느덧 금시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기슭에 줄지어 있던 아담한 기와집들은 오간데 없고 마을 길옆에 남아있는 서너집 굴뚝에서만 저녘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우선 내가 살았던 집체호로 찾아갔다. 그땐 온 동네에서 제일 크고 좋은 벽돌집 이였었는데 들어서니 마당부터 어수선하였다. 낡고 헐망해진 문을 조심스레 노크하니 웬 시커먼 한족나그네가 나오면서 누구를 찾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이전에 이집에서 살았었는데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관내에서 와서 과수부업을 한다고 하였다.

     착찹한 마음을 다잡으며 이번엔 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네개 교실에 교무실과 숙직실로 되어 있던 교사가 지금은 민가로 변모하여 세가구가 들어 살고 있는 듯하였다. 발길이 닿는대로 첫집을 찾으니 그래도 다행이였다. 생각밖에 그때 우리반 인옥학생의 집이였다. 중학반 애들 중 제일 키가 크고 듬직한 언니로 불리던 그가 인젠 풍더분한 농촌 아줌마로 되여 놀라는 모습으로 그 옛날의 자기반 선생님을 반겨 주었으니 말이다. 큰애는 룡정에 가서 중학에 다니고 여섯 살 난다는 귀여운 녀자애가 방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애가 이 마을의 유일한 어린이라고 하였다. 몇해 전 두만강을 날아 넘어 온 큰 산불이 온 마을을 삽시에 태워버려 마을사람 대부분은 국가보험금 몇천원씩 타가지고 살길을 찾아 타향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젯날의 에덴동산이 쓸쓸한 길옆 주막같이 되여 버렸으니 애들도 없는 마을에 학교가 있을리는 만무하였다. 그래도 동네길 도랑 웅덩이마다에 탐스럽게 달려 있는 빨간 꽈리들과 무덕무덕 보이는 까만 감태나무, 그리고 뒷동산 과일나무들에 눈띄게 달려 있는 붉은 사과、파름한 복숭아들이 그나마 시골의 향기를 풍기며 길손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푸짐히 삶아 놓은 떡호박과 옥수수며 감자들을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맛나게 먹으며 마을사람들의 행방과 인생살이 이야기로 하루밤을 무던히 보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귀로에 올랐다. 그들 부부가 기어이 뻐스에 올려 주는 파아란 시골사과 두상자를 물끄럼히 바라보며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이 크게 변했으니 사람살이도 진작 변했구나! 그래 그들이라고 한평생 이 산골만 지키고 살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자식들을 출세시키며 더 잘 살아야지, 그때 그 시절의 환상에만 머물러 있던 내가 오히려 세월에 뒤진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청춘시절에 정녕 기쁨과 희망을 주었던 그때 그 아이들, 지금 그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가? 그 언제라도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은 여전히 달랠 길이 없었다.
                                     
( 연변녀성잡지-- 2005년 제7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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