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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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청춘은 저 산 너머에
2009년 07월 03일 00시 16분  조회:3388  추천:59  작성자: 강순화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지식청년 회고록》을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부터 울렁거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시 찾을 길 없는 그 청춘을 아무런 보상도 바램도 없이 7년간이나 고스란히 바친 그 땅에 아직도 사랑과 련민의 정이 남아서 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킨 정열과 랑만, 방황과 아픔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잊혀지고 색바래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녀고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26살 애기엄마로 되기까지 하많은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힘들고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의연히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나의 농촌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던 향촌학교에서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뒹굴고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인생의 멜로디였다. 
   
    지식청년하향 4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새삼스레 그 옛날의 일들을 돌이켜 보노라니 저도 몰래 가슴이 뭉클해진다. 20세기 6-70년대 중국대륙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 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이는 확연히 중국 당대사의 일대 사변이였고 한 세대의 8천여만 젊은이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 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리하여 66년급, 67년급, 68년급, 3기의 초,고중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가의 가정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마주하고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양머리소녀가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검은5류》자녀들과 같이《집권파》의 딸로 전락되였다. 고급중학 3학년의 공청단서기로 북경정법대학에 추천되였고 학교에서 유일한 학생발전대상이 되여 입당비준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전도는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여지없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의 희망은 하루밤새에 사천 문천의 8급지진마냥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변할수 없는 철칙이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실려 아무런 주저도, 고려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도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기고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농촌이란 어떤 곳인지 막연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애들은 그냥 엉덩덩한 기분에 들떠 있기만 했다.《지식청년》들을 만재한 트럭은 어느덧 연길과 룡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붉은사상을 간직하고 있은 때문인지, 아니면 셈이 덜 들어서인지 하나같이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하기만 했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의 산촌마을 백금향이였다. 향정부마을에서 일행의 한 절반을 부려 놓은 후 또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는 열 다섯호의 인가들은 하얀 벽들에 기와를 얹어놓아 언제인가 그림에서나 보아왔던 전통한옥을 방불케 하였고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이라고 하는 검실검실한 중년 사나이가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그의 열정적인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집체호》에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져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온《지식청년》들을 맞는 일이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우리들을 환대하였다.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정신없이 퍼 먹어댔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끼다보니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의 그 저녁 같은 진수성찬은 평생 다시 맛볼수 없을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너머로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고장이였다. 뒷산에는 살구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들이 울긋불긋 자연과원을 이루었고 산골짜기로는 맑은 샘물이 졸졸 흘러내려와 그야말로 에덴동산 같았다.    
  
    도시의 연립주택과 아스팔트길에서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도시의 애들은 시골마을의 산등성이에서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정답게 이어진 기와집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등 그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수가 없었다. 더구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친구들끼리 산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신나고 재미있을것 같기도 했다. 15살부터 19살까지의 14명의 애티나는《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신생사물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에서의 새 기분도 잠간 일뿐 농촌에서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부터 일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벌판에서 헤매였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수 없었고 깨끗한 의복 한번, 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작업복바지에다 초록색 군복 모양의 웃옷에 네모난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서 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환하거나 꽃무늬 간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절대 엄금했었다. 하지만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적등황록색 그대로 인생의 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생산대장의 일 포치대로 벼가을이 끝나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둘씩 짝을 무어가지고 몰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사달이 생겼다. 벼단을 가득 싣고 옆에서 소를 몰다가 다리맥이 없으니 소수레 앞채에 걸터앉는다고 몸을 솟구친 것이 그만 소궁둥이 뒤쪽에 허망 떨어졌다. 그 찰라 나는 진짜로 그 무거운 수레에 깔려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커다란 두 바퀴가 내 작은 몸둥아리를 가운데 놓고 지나가버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비명횡사를 할번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 소름이 끼친다.
  
    또 한번은 생산대 우사칸의 소를 끌어내는데 고놈의 소도 풋내기라고 업신여겼는지 그 육중한 발로 나의 작은 발등을 꾹 밟아 놓아 당장에서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맨발의사라 자칭하는 집체호 재현이게서 수태 아픈 침을 맞으며 열흘나마 쩔룩거리면서도 무슨 정신이였는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밭에 나갔다. 물불을 모르고 그렇게 덤비고 당하면서 1년 농사를 다 짓고나니 어느덧 농사군이 된것 같았다. 겨울에는 어른들도 힘든 땔나무도 제법 아치를 탁탁 쳐 가며 수레에 싣고는 굵은 바줄로 단단하게 죄여 가지고 산등성이에서 집체호까지 끌고 올수도 있었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탈곡을 해야 하는데 60년대 말에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며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무서리가 내리는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이나 며칠 쉬고나면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그냥 들기에도 힘든 쇠곡괭이로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김매기를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하게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은 장알이 박히다 못해 피멍까지 들었다.
  
     이른 봄에는 아침부터 살얼음이 낀 논판에 들어서서 벼모를 뽑느라면 발은 물론 장단지까지도 시려났다. 그때 어데 장화나 갖춰 신었는가? 녀자애들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를 참을 수 없어 남몰래 찔끔 눈물을 떨구곤 하였다. 실로 따뜻한 집이 그리웠고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러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 《홍위병》,《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진짜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이러구려 3년 세월이 지난 후 부터는 하나둘씩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고 학교에 가면서 《집체호》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가든지 모두가 사회의 중견인물이 되어 자신의 빛과 열을 발휘하고 있었다. 초년고생은 천금을 주고도 못 산다고 농촌에서의 시련은 우리 모두를《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수 있는》강한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어찌보면 그 시대의 불행아가 오늘의 행운아로 되었는지 모른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산골도 보통 산골이 아니고 두메산골인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가장지물의 전부였고 로동력이 많아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개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유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시내의 큰아들이 사주었다는 17촌짜리 흑백텔레비 한대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그집 정주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일본드라마를 보았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약속하여 똑같이 만들고 나누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봄이 오면 집체호에서도 앞마당에 남새를 심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밭에 가기 전에 남자애들은 삽으로 땅을 파놓고 녀자애들은 호미로 밭이랑을 만들었다. 나와 성희는 집에 남아서 마늘을 심기로 하였다. 둘이 마늘 종자를 까서 열심히 거의 다 심느라 하였는데 이웃집 할머니가 오셔서 한참 들여다 보더니
    《아이고, 다시 파서 심어야겠네!》
     하고는 우리가 심은 마늘을 몽땅 파내서 당신이 다시 심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우리 둘은 마늘 종자를 전부 거꾸로 땅에 밖아 넣은 것이다. 먹을줄이나 알았지 언제 한번 심어나 보았는가? 마늘 종자의 뾰족한 쪽을 땅에 심어 넣으면 그냥 자라는 줄로만 알았던 한심한 인간들이였으니 말이다.
  
     농망기에 들어서면 소도 찰떡을 쳐서 먹인다고 하는데 집체호 애들은 허구한 날 고기점도 별로 먹어보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먹새 좋은《집체호》애들한테는 하루 삼시 먹거리를 장만하기도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였다. 열네명의 식구가 살다보니 밥은 항상 큰 한족솥에 쌀이 절반이나 차게 앉혀야 했고 반찬도 무엇이든 한 소래씩은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둘씩 조를 짜가지고 화식당번을 섰다. 반찬은 그날 당번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야 한다.
  
     나의 차례가 된 어느날 마침 촌 소매부에 감자국수가 왔다기에 우리는 그것을 사다가 국수탕을 만들기로 했다. 파를 닦다가 물을 몇 바가지 넣고 간을 맞춰 한시경이나 끓이니 맛있는 국수탕이 되였다. 저녁상을 갖추려고 준비하는데 밖에 나갔던 우리당번 경화가 웬 계란 두개를 들고 들어왔다. 웃집 마당에 있는 닭광주리에 수없이 많던데 딱 두개만 삶아서 먹어보자는 것이였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남의 계란까지 쥐고 왔으랴만 주인 없는 집에서 가지고 왔다니 좀 미지끈하기도 했다.
  
    《주인이 돌아오면 말하고 돈을 드리면 되지않니? 》하는 경화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딴 솥이 없는지라 그냥 국을 끓이는 솥에 넣어 삶을 수밖에 없었다. 경화가 계란을 씻어서 끓고 있는 솥에 넣자마자《툭!》하더니 웬 덜 된 병아리 새끼가 터져나왔다. 혼비백산한 경화는 꽥 소리를 질렀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바가지로 채 생기지 못한 병아리와 계란껍질을 건져서 밖에 내다 재더미 속에 파묻어 버렸다.
  
     이를 어쩐담? 종일 일하고 배가 고픈 애들이 당장 무리쳐서 들어서겠는데 저녁반찬은 무엇으로 한담? 이제 새로 할수도 없고, 김치쪼가리도 다 떨어지고, 맨 된장을 먹을수도 없고... ... 둘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드디어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막부득이한 일이니 아예 없었던 일로 하자는 약속이다. 일밭에서 돌아온 애들은 국수탕이 요즘 반찬에서는 제일 맛있다고 칭찬하며 저마다 한 사발씩 게눈감추듯 먹어치웠다.
  
     경화와 나는 먼저 먹었노라고 시치미를 뗏다. 사실 둘은 그날 저녁을 쫄쫄 굶는 수밖에 없었고 애들은《보지 않으면 약》이라고 저마다 만포식하고 늘어졌다. 알고보니 웃집 씨암탉이 알을 품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꺼내온 닭알이라 그만 그런 사건이 버러지게 된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 둘은 웃집에 찾아가 사과하고 비밀에만 부쳐줄것을 약속받는 연극까지 하게 되였다. 물론 그《비밀》도 며칠 가지 못하고 들통이 났지만 그날 저녁 한때만이라도 무사히 넘긴 것이 천만다행인듯 싶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기에 량식이 흔하지 않았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집체호》애들한테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을 심으라고 종자를 주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무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검대기를 뭍혀가며 콩서리를 했고 초가을 강냉이는 여물기 전에 다 뜯어서 삶아 먹곤 하였다.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먹는 물건을 먹겠다는 애들을 욕하랴, 때리랴?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우리《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이만저만 고생하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급중학교 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하물며 우리 66년급 고중졸업생들은《문화대혁명》이전에 고급중학교 3학년까지의 지식을 다 배웠고 또 그 자리에서 2년을《혁명》한답시고 눌러앉아 고급중학교만 5년을 다닌 셈이니 배울건 다 배운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어문, 수학, 기하, 물리, 화학 등 중학교의 모든 과목들은 별로 막힘이 없이 강의할 수 있었다.
  
     2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심포학교 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백금 1대부터 5대까지의 애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하여 그 무슨 모자 쓴 중학(戴帽子中学)이라고도 불렀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데 교장이든 평교원이든 할것없이 모두다 교단에 올라야 했다.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좌우로 갈라 앉혀놓고 흑판 가운데 줄을 그어 계선을 나누고는 시간마다 복식강의를 하였다.
  
    향촌교원의 월급은 32원이였는데 시골에서는 그것이 최고 수입이였다. 감농군들이 일년내내 땀 흘려 벌어도 량식대와 생산비용을 제하고 나면 년말분홍에 단돈 100원도 손에 쥐기 힘든 세월이였으니 말이다. 그 월급에 손색이 없이 교원들의 사업열정은 아주 높았다. 과당교학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하학 후에도 산마루를 넘나들며 학생들에게 과외보도를 해 주었기에 룡정현의 통일고시에서는 항상 우수한 점수를 따내군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우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자기 손으로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시골애들은 시골정기를 타고 자라서인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도시의 큰 학교에서만 공부해온 나로서는 그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향촌학교가 참으로 재미났다. 세세대대로 땅을 파며 살아 온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 그것도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 작은 애들이 매일 한집식구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였다. 휴식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전교 애들이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고 쫓고 하면서 즐겁게 뛰노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산촌의 푸르른 풍경이요, 변강마을의 찬란한 희망이였다.  
  
    1973년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찍은 우리 학급의 11명 아이들을 보시라. 하나하나가 그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아닌가? 이젠 모두가 불혹의 나이도 훨씬 넘겼겠으니 언녕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여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이 땅 어디서인가 살고 있겠지? 천진란만하고 순박하기만 하던 그 시골의 아이들이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청춘의 힘을 되살려 주었고 내 아픈 인생에 보람을 가져다 준 것이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패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 했다. 나는 그간 입고 쓰던 옷이며 신발이며 궤짝과 책 같은 물건들을 몽땅 가난한 집들에 나누어 주었다.
  
    귀성(回城)호구수속을 하는 동안 나는 하루라도 놀수 없는 성질이라 친구들과 함께 연길맥주공장에 찾아가 림시공으로 일했다. 도시의 일은 촌에 비하면 그야말로 누운 소 타기였다. 하루해가 기준인 농촌과는 달리 어김없는 8시간 로동제인데 언뜻하면 반나절이 지나는것 같았고 그 어느 차간의 일도 농촌 일에 비하면 모두 식은 죽 먹기였다. 농촌에서 단련된《지식청년》의 일본새로 뛰여다니면서 열심히 일했더니 생산과의 리과장은 나를 보고 호구수속만 되면 공장화험실에 배치하겠으니 아예 우리공장의 정식직원이 되라고 했다. 맥주공장에서는 아마 화험실이 제일 고급인것 같았다.
  
    그런데 매일 출근길에 연변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면서 나는 언녕 다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9개월 만에 농촌호구가 연길시호구로 되는 수속이 끝나자 나는 그날로 연변대학교 인쇄공장에 달려왔다. 맥주공장에서 매일 맥주나 만드는 일보다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생들의 교재를 만드는 일이 더 뜻있는 사업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 때문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인쇄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 받아주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교란 이 신성한 일터에 나절로 찾아와서 일하고 배우고 진보하면서 30여년이 되는 오늘까지 이 직장을 지켜 온 것이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로3기 고중졸업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10년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2년만 대학입시자격을 달라》고 시위하고 청원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대학입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서른이 다가오는 년령이였고 이미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아이인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찾아 복습하며 2개월간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1978년 7월, 연길시제2중학교 시험장에서 대학본과시험을 칠 때였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갓난애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 애는 집에서 울어대고 엄마의 젖은 탱탱 붓다 못해 절로 흘러넘쳐 적삼 앞자락을 흥건하게 적셔버렸다. 시험감독 선생님은 부지런히 수지를 가져다주면서 하도 기가막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교 한어학부 성인교육반에 입학할수 있었고 영광스럽게 대학생의 영예를 받아 안을수 있었다. 그 후 5년간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우수졸업생》이 되였고 오늘날까지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였다.

   《지식청년 회고록》을 마무리면서 나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그 특수한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으로 달리고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했지 않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당년의《지식청년》답게, 씩씩하고 후회 없이 인생의 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변지식청년회고록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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