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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과 더불어
강룡운
이 글을 구상하면서 한족들이 늘 말하는 “훌륭한 기억력도 뭉드러진 붓보다 못하다”(好记性不如烂笔头)는 속어가 자꾸 머리에 떠올라 “뭉드러진 붓”을 우리말인 ”몽당연필”로 바꾸어 놓고 생각을 굴려보다가 이렇게 글제목을 달아보았다.
“훌륭한 기억력도 뭉드러진 붓보다 못하다”는 이 말은 내가 고중에 갓 입학해서 처음 듣고 마음속에 아로새겨둔 말이였는데 나는 이 말을 “아무리 훌륭한 기억력도 몽당연필만 못하다”고 번역해 놓고 나름대로 배움의 좌우명으로 간주해오던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그때 그 시절부터 나에겐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다가도 자기가 잘 모르는 새로운 지식이나 꼭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고 판단되는 명언이나 경구같은것들이 눈에 띄면 곧바로 노트나 종이장에 기록해 두는 습관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하지 않고 “몽당연필”의 기억력을 더 확신하였기때문이다.
지난 7월 15일에 우리 중학교(初中)동창생들의 “졸업 5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거행되였는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고중에 진학한지도 어언 50년 세월이 흘러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나의 이 습관도 저그만치 반세기를 넘긴 고루할대로 고루해진 낡아빠진 습관인 셈이다.
고희의 언덕을 지척에서 바라보고있는 로구가 되였지만 지금도 나는 독서나 독보를 할 때는 물론, 텰레비죤를 볼 때에도 탁자우에 펜과 종이장을 놓아두고 가끔 무언가를 적군 한다. 심지어 마누라와 같이 앉아 한국드라마를 보다가도 종이장에 무언가를 적고있으면 안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또 무얼 적느냐고 묻는다. 하도 세월이 흐르니까 안해도 인제는 내가 무엇을 적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는 눈치이다.
50년전 내가 조선족중학교을 졸업하고 추천을 받아 한족고중에 입학하였을 때의 일이다. 나로 말하면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워서부터 줄곧 조선말만 하면서 자라고 공부를 해오다가 갑자기 한족애들속에 끼여들어 공부를 하게되었으니 앞을 가로막는 애로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한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또 다른 과목들도 한어로 된 참고서적들을 더러 열독하여왔던지라 한어어문과목을 제외하고는 기타 다른 과목에서 한족애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는데 유독 어문과목에서 한어로 글을 짓는 작문(作文)이 나에게는 제일 큰 걸림돌이 되여 공부를 잘하는 한족애들에게 다소 밀리는 형국이였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벌린 작전이 바로 “몽당연필”작전이였다. 그 시절 베스트셀러였던 《청춘의 노래》.《림해설원》.《붉은 바위》와 같은 장편소설들을 읽거나 《붉은 기》나 《중국청년》과 같은 잡지들을 읽을 때면 나는 생소하다고 느껴지는 단어들과 멋지다고 생각되는 성구들을 노트에 많이 적어놓았다가 새로운 작문제목을 받아안으면 먼저 내가 수집해 놓은 성구나 경구, 관용어들을 뒤적이면서 작문을 구상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1년간의 고투끝에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의 작문도 자주 “모범작문(范文)”으로 선정돼 전 학급 한족애들에게도 읽혀지게되었다.
나는 이렇게 ”몽당연필”작전으로 한어공부에서 단맛을 보게된 다음부터는 이 방법을 조선어공부에도 활용해보았다. 조선어공부라고는 중학교때까지밖에 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고중을 다니고 대학을 나와서 기업소와 당정기관을 두루 전전하면서 주로는 한어로 글을 많이 써왔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스스로 조선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조선문서적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인지 오늘도 이렇게 조선어로 수필이랍시고 어설프게나마 긁적거리고있는데 이것도 모두 ”몽당연필”과 갈라놓고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언젠가 내가 주정부에서 근무할 때 연변대학 조문학부 류은종교수가 우리집에 놀려왔다가 우연히 내가 수집, 정리해서 특제나무박스에 소장해두고있던 조선어자료카드를 발견하고는 “주정부관원의 집에서 이런걸 보기는 처음 “이라고 떠들어대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말 속담에 세살 때 버릇이 여든살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이팔청춘 젊은 시절에 형성된 나의 이 습관은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에까지 이어지면서 아예 하나의 고질이 돼버렸다.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에 진입하면서도 펜으로 종이에 메모를 하는 나의 이 아날로그식 구태의연한 버릇은 좀처럼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오히려 컴퓨터를 리용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였다고나 할까.
고중시절부터 지금까지 모아온 노트들만 헤아려보아도 어림잡아 몇십권도 많이 넘을텐데 거기서 무얼 찾아본다는것은 이미 너무 힘에 부치는 일이 돼버려서 도무지 그럴 엄두조차 못 내고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은 컴퓨터를 리용하고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날의 필기노트를 자주 펼쳐보지도 못하거니와 또 그럴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고있다. 지금은 무엇을 알고싶으면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하면 세상만사 알고싶은걸 다 찾아내 읽을수 있는 현실인데도 나는 오늘까지 나의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고있다. 왜냐하면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여 계속 내나름대로의 노트문화를 만들어 가고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종이장에 메모해 두었던 유용한 자료들을 분류하여 다시 컴퓨터에 입력해서 수시로 찾아볼수 있도록 편집하고 저장해 두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있으므로 시체말로 말하면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내가 굳이 이렇게 하는것은 나로 말하면 종이장에 메모했던걸 다시 컴퓨터에 입력하는 과정이 바로 나의 대뇌속에 재입력하는 과정이 되고 머리속에 다시 아로새겨 각인하는 과정이 되기때문에 결코 무의미한 무효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릇 지식이란 다 이렇게 축적해 가는 과정에 앙금처럼 가라앉는 침전물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세상에 그 어떤 뛰여난 천재가 있다고하더라도 그의 기억력도 “몽당연필”만 못하다는것은 당연지사이고 더구나 컴퓨터의 저장능력을 초과할수 없다는것은 일반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아무리 박식한 학자들도 자신의 서재를 떠나서는 저술활동을 하기 힘들다고 하는것이고 그들도 “몽당연필”로 모아놓은 자료가 없거나 컴퓨터의 도움이 없으면 촌보난행이라고 하는것이다. 대학자님들도 이러할진대 나같이 범상한 사람에게는 “몽당연필”이 한결 더 필수적이라는건 너무나 불보듯 뻔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닌 장장50여 성상을 한결같이 “몽당연필”과 더불어 함께 살아 온 인생!
나는 이렇게 살아온 인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의 남은 여생도 이렇게 살아갈것이다.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며…
(2008-07-31 산동 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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