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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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증손들
2007년 02월 21일 12시 28분  조회:2567  추천:100  작성자: 강룡운
   나의 할머니는 1890년 경인(庚寅)년생, 범띠다.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강씨가문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 겨우 열세살, 할머니는 년상의 녀인이였다. 아마 지금 이 또래 나이의 중학생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이거 진짜 웃긴다"고 폭소를 터뜨릴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너의 할아버지는 장가를 가구 홍진(홍역)을 했네라. 내가 시집와 너의 할아버지 홍진시중까지 다 들어주었네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끔 할아버지를 놀려주군 하시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갓 스므살되던 해에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고 아버지가 열살되던 1921년에 남부녀대하여 쪽박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화룡 우심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것은 머리태를 땋아드리운 열살난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우심산으로 걸어오는걸 어머니가 보았다는것이다. 우심산에 와 아버지는 나의 외할아버지가 교장으로 있은 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는데 열네살 되던해에 열여덟살이된 년상의 녀인인 나의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한다. 아마 조혼은 그때 우리 조상님네들의 풍속이였고 결혼년령 남소녀대(男小女大)가 그시절의 풍토였던모양이다. 지금 한국에서 적잖은 젊은 총각들이 년상의 녀인을 선호하는 그 취향은 아마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오랜 전통과 깊은 뿌리가 있는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대여섯살 되던 때부터 "누가 너의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면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이라고 대답해라. 그래야 똑똑한 애야"라고 가르쳐주었다. 고향이란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라 잃은 설음을 안고 살길 찾아 이역땅으로 떠나오면서 등을 돌리지않으면 안되였던 고국의 그 정든 땅이며,  두만강을 도강하여  새로운 낯선 세계에로 진출한 우리 가족 새력사의 출발점이다. <조국>과 <고국>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딱히 잘 모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였지만 두고온 고향땅이 늘 그리워 나어린 손자들에게 자기의 근본을 잊지 말라고 이렇게 고향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던것이다.  어찌나 똑똑히도 가르쳐주셨는지 "도", "군", "면", "동"이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알려준 고향주소 열세글자는 머리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길수 있었다.

   1993년 가을, 나는 연변일보사대표단을 인솔하여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다. 우리가 소형뻐스를 타고 회령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중, < 민주조선>신문사 박춘민부장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선친의 고향이 부령이라는 얘기를 듣고 부령역광장에 차를 세우게하고 나로하여금 선친의 고향을 일별할수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참동안이나 사위를 둘러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땅에서 기념사진까지 찍고 다시 차에 올랐지만  나의 마음은 선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하여 한없이 설레이였다. 나는 맘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작은 손자가 오늘 조부모님께서 오매불망 그리시던 부령땅을 찾아보았습니다>라고 웨치면서 저승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모두 대견스럽게 여기시며 기뻐하실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환갑전에 일찍 세상을 뜨시였고 할머니는 83세까지 장수하시면서 두 손자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가는것까지 보시였으며 또 큰 증손녀도 안아보시였다. 큰 증손녀는 할빈공업대학를 졸업하고 북경의 한 연구원에서 연구사업에 종사하던 나의 형님의 큰 딸이다. 그애는 출생해서부터 줄곧 한족탁아소에서 자랐으므로 다섯살에 처음 증조할머니품에 와 안겼지만, 한어밖에 할줄 모르는 그애가 뭐라고 종알거리는지 할머니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어 퍼구나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이였다.  

   할머니는 집안살림이 하도 구차하여 독자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소학교밖에 공부시키지 못한게 늘 가슴속에 한으로 맺혀있어 손자녀석들의 공부뒤바라지에 적극 동참하면서 손자들이 대성하기를 크게 기대하시던 분이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외지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여 집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기차역까지 나오시여 <새학기에도 공부를 잘해 일등하라>고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민망스럽게 <우리 손자 일등!>하고 웨치시였다고들하는데  아마 손자들이 잘 되는게 할머니의 제일 큰 소망이였으리라.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되여 크게 출세했다는 큰손자놈의 딸아이가 우리말도 모른다니 이게 웬 말이냐! 할머니는 "북경에 있으면 뭘하냐?새끼들이 자기말도 할줄 모르는데..">하시면서 이런 출세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형님의 딸애들은 둘 다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글도 모른다. 그애들은 자기집에서 중국식 볶음료리에 조선식 장국과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서 자라서인지 김치는 좋아하고 또 잘 먹는편이지만 그애들한테서 조선족의 다른 그 어떤 특징도 거의 찾아볼수 없을만큼 완전히 한족으로 동화돼버렸다.  큰조카딸이 일본 쯔꾸바와 니이가다에서 공부할 때 나는 일본의 어느 한 한식집에서 그애와같이 식사를 한적이 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김치를 좋아했다. 이것이 그애한테서 찾아볼수 있는 조선족 후손의 유일한 특징이라고나 할가. 하지만 김치를 좋아한다고 다 조선족인가? 

   큰조카딸은 북경에서 석사공부할 때 벌써 한족남자와 결혼하고 함께 일본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따냈는데 일본에서 취직했다가 어린아들애의 조기영어교육을 위해 몇해전에 또 카나다로 이민갔다. 작은 조카딸은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석사공부를 하였는데 노란머리 코큰 미국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이미 국제상식으로 되여있다. 국제결혼,  타민족과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다. 그애들은 그저 혈연적으로 조선족인 형님과 형수님의 피줄을 이어받았을뿐 민족적 감정이라는게 젼혀 없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르기때문에 그애들은 우리 조선족과의 문화적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과 카나다에 살고있는 그애들은 우리 가족과 더 나아가 우리 조선족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될것이고 그리고 또 언젠가는 우리 조선족과의 련관성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그애들은 자기들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별일 다 있다. 내가 어떻게 돼서 조선족이지? 참 재밌다!"하는 식으로 호기심을 가질뿐이다.

   두 조카딸을 이렇게 조선족답지 않은 <조선족>으로 키워온 뼈아픈 교훈이 있기에 북경 형님은 나의 아들애들이 한족학교에 입학하는걸 견결히 반대했다. 내가 안도방직공장에서 근무할 때 나의 큰애가 방직공장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한족 보육원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한족말은 완전히 한족애들 수준이였지만 조선말은 겨우 알아들을수 있었을뿐 잘 하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소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우리는 하는수없이 한족학교에 보내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북경 형님이 "아는것이 힘이라고 한가지 언어라도 더 아는것이 장차 경쟁에서 큰 힘이 될터이니 아이들을 꼭 조선족학교에 보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게 하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형님의 편지를 받고 우리 부부는 연변에 살면서 애들을 북경의 조카애들처럼 만들수는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큰애를 억지다짐으로 조선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엔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몹시 힘들었는지 방과후면 선생님을 찾아가 한족말로 "선생님, 오늘 숙제문제를 다시 알려주시요"하고 숙제문제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사람은 언어로 사유하고 또 언어가 사유를 지배한다. 유치원까지 계속 한어로 사유하던 어린애가 갑자기 조선어로 사유하게되자 첫학기는 적응이 잘 되지않아 조금은 힘들어했지만 그후로는 차츰 적응이 되여갔다. 지금 그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한국기업 회사원으로 취직하고있는데 중국어, 한국어를 모두 잘 구사하고 두가지 문자로 서류작성도 잘하기때문에 한중무역 업무수행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의 둘째 아들애도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프랑스에서 국제무역 석사과정을 밟고있다. 조선어, 중국어,영어,프랑스어등 여러가지 언어를 다 배웠으므로 앞으로 국제무역에 종사해도 역시 크게 도움이 될거라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20세기 20년대초반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출발한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은 지금 이민 4세에 이르러 이렇게 한국, 유럽 더 나아가 저 멀리 북아메리카대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할머니 증손들중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고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른다. 그 분수령은 바로 교육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어교육에 있다. 형님네는 북경에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가르칠수있는 여건이 없었지만  연변에 돌아온 나까지도 만약 아이들을 한족학교에 입학시켜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거야말로 진정 후대들에게 무책임한 엄청난 실책으로 되였을것이며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했을것이다.

   민족의 동화는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의 두 조카딸의 경우, 물론 그애들 자신의 차실은 아니지만 동화는 이미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였다. 지금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재래식 농경사회의 탈출로부터 시작된 대도시로, 해외로의 대거 진출이 날로 증가됨에 따라 나의 두 조카딸과 같은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남으로써 지금 우리 민족의 일부 청소년들은 동화의 위기와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기원 70년,  로마제국이 유태인들의 봉기를 무참히 탄압하고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였을 때 유태인들은 세세손손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전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게되였다. 그러다가 거의 이천년이란 세월이 흘러간후 산지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오던 그들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다시 자기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수 있게된것은 그들에게 <성서>(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전서>)와 유태교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민족에게는 뭐가 있는가? 우리에겐 민족종교가 없다. 우리에겐 오직 <훈민정음>이 있을뿐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생존, 발전, 번영하는데 있어서 첫번째 필수과목이다. 우리는 자기스스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조선어(한국어/조선족어)는 언어사용인구에서 세계의 언어중 12위권에 있는 결코 무시하거나 홀대할수 없는 언어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  6700여종 언어가 있고 우리나라에만 120여종 언어가 있는데 그 많은 언어들가운데서 우리 조선어가 세계사용인구순위 제12권안에 있다는것은 우리 민족의 긍지이며 자랑이 아닐수 없다. 

   언어는 인간의 교제도구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공동체의 교제도구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제도구만도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일종의 특수한 문화이며  그 속에는 그 민족의 문화가 응집되여있고 그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어있으며 그 민족의 력사가 슴배여있는것이다. 

   남영전 시인은 민족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민족은 문화적 개념이지 혈통적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로 구분되는것이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북경에서 자라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지 못한 나의 두 조카딸은 혈연적으로는 조선족이 분명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이미 조선족이 아니다. 그애들은 우리말과 글을 배우지 못했기때문에 우리말과 우리글속에 응집되여 있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모르며 우리 민족의 력사도 모른다. 그애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증조할아버니, 증조할머니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때문에 그애들에겐 애틋한 민족감정이라는게 있을수 없다.

   나는 오늘 이글에서 우리집과 나의 할머니 그리고 그 증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잘 모르기는 하겠지만 다른 가정이나 가족의 상황도 크게 다를바 없이 대동소이할것이다. 백여년전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후손들이 오늘 해외로, 대도시로의 민족대이동이 한참 진행중인 이 시점에서 자녀교육, 더우기 자녀들에 대한 민족어교육은 다른 동네 얘기가 아니다.민족은 일종의 문화유전인자라고 하는데 문화가 없으면 민족이 어떻게 유전되겠는가? 그래서 후대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대변혁의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책임있는 구성원이라면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지금은 거의 집집마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들이나 후손들의 입학, 진학등 진로문제를 결정할 때는 보다 진지하게 재사삼고(再思三考), 심사숙고해보는것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


2005년 10월 14일 연변일보 B3 해란강 제124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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