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의 실정에 근거하여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게 경제건설과 사회 각항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할 장원한 안목으로부터 출발하여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자치조례>의 관련 정신에 근거하여 <연변 경제 및 사회 발전전략>을 제정하였다. 이어 주인민대표대회의 심의를 거쳐 채택하였다.
이 발전전략을 제정할 때 주당위 지도부 성원들은 거듭되는 토론을 가졌고 또 수차에 걸쳐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서 연변의 네가지 특점을 귀납해냈다. 첫째, 연변은 자원이 풍부하고 나아가 거대한 발전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연변은 지리적 위치와 지역적 조건이 특수하여 동북아개발의 최전방에, 그것도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연변의 개혁개방은 타고난 우월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셋째, 연변은 국내와 국외에 폭넓은 인맥우세를 갖고 있다. 넷째, 연변에는 민족자치조례 및 변강소수민족지역을 배려하여 중앙과 성에서 내놓은 우대정책이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은 연변의 쾌속적인 발전과 개혁개방을 다방면으로부터 보장해주고 있다.
리덕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귀납하면서 경제건설에서 주로는 두가지, 즉 공업기반건설과 공공기반시설건설을 잘 틀어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공공기반시설은 주로 항공, 철도, 도로, 통신 등 기반시설 건설을 말하는 것인데 리덕수는 이러한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연변의 신속한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1984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구성한 정부대표단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대표단의 인솔자는 리덕수였다.
이번 출국은 리덕수로 말하면 첫번째 미국행이면서 역시 처음으로 서방국가를 체험하는 과정이였다. 이번 방문길에서 리덕수는 발달한 자본주의국가의 실제적 상황을 현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로스앤졀러스에서 리덕수가 아침에 일어나 빌딩 밖을 일별하니 연기를 내뿜는 굴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부터가 새삼스러웠다. 구두를 신고 며칠 돌아다녀도 먼지라곤 오르는 게 없었다. 미국에서 고속도로는 어디로 가나 막힘이 없을 만큼 사통팔달했고 도시의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로세로 나드는데도 교통질서는 매우 정연하였다. 도시마다 모두 록화를 매우 중시하였고 위생환경이 정결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공기도 맑고 깨끗하였다. 리덕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연변경제의 전면적인 도약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반시설건설부터 틀어쥐어야 되겠다는 의지를 굳히게 되였다.
미국측 접대인원들은 리덕수 일행에게 일부 기업소와 회사의 생산, 운영정황을 소개하는 한편 이들을 안내하여 일부 기업소와 회사를 돌아보았다. 리덕수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인원이 몇몇 안되는 작은 회사의 사무실에도 어김없이 놓여있는 팩스에 가게 되였다. 하도 신기해서 미국측 인원들한테 물어보니 전세계 각지의 정보들이 팩스를 통해 시시각각 전해오고 그들도 수시로 전세계 각지에 팩스로 업무사항을 내보내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리덕수를 망라한 대표단 성원들 모두가 팩스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보지도 못한 건 당연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물건은 확실히 빨려들어갈 만큼 신기하였다.
리덕수 일행은 의논 끝에 미국에서 팩스수신기 세대만 먼저 사가지고 돌아오기로 상론했다. 리덕수 일행에게는 갖고간 돈이 얼마 안되였다. 돈을 아끼느라고 그들 다섯 사람은 한스위트룸에서 비좁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머무는 동안 자기 돈으로 식당에 나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사치였다.
그들이 투숙하고 있는 스위트룸에는 랭장과 랭동 기능을 갖춘 전기랭장고가 있는가 하면 밥을 짓고 료리를 볶을 수 있는 취사도구도 구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랭장고 안에 넣어둔 물건을 다치면 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 때 접대한측에서 그들한테 돈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정기적으로 쌀이며 고기며 남새 같은 것들을 사다주면 그들은 끼니마다 저절로 밥을 지어 먹었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남긴 돈이 퍼그나 되였다. 그 때는 공무로 출국하게 되면 날마다 상응한 보조금이 있었다. 그들은 그 보조금을 모아 팩스수신기 세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뒤 연변대학에 한대, 주정부에 한대 넘겨주고 주당위판공실에 남겨두었다. 비록 그것을 잠시 쓸 수 없었지만 리덕수는 판공실 일군들에게 롱담삼아 이렇게 말했다.
“그저 거기다 놓고 보기만 해도 속이 든든하지요. 항시 현대적 통신수단에 대한 갈망과 추구를 우리들한테 일깨워주니 말입니다!”
리덕수는 미국을 방문하면서 앞으로 연변이 발전해 나가려면 현대화 통신시설부터 한발 먼저 앞서 나가야 하므로 연변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대화 통신기반시설건설부터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색을 무르익히고 있었다. 그 당시 연변은 우전통신설비가 너무 락후하고 통신련계가 잘 되지 않아 외국에 전화를 하려고 해도 정말 통화하기가 어려웠다. 어렵사리 팩스수신기 세대를 사가지고 힘들게 메고 왔지만 그 때 연변에는 프로그램제어계통이 가설되지 않았으므로 한낱 진렬품이 되여버렸으니 이것은 결코 그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였다. 리덕수는 미국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연변을 개발하고 개방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연변의 뒤떨어진 우전통신상황부터 돌려놓아야 한다는 데 사색을 모으게 되였다. 리덕수는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우전통신방면의 기반시설을 서둘렀다.
리덕수는 연길에 돌아오자마자 연변조선족자치주우전국 국장 김태호(金泰昊)를 사무실로 불렀다.
리덕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동무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전문적으로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구축하는 이 대상을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긴박하고 임무가 막중하므로 주당위에서는 동무가 분초를 다투어 전력을 다해 이 일을 내밀기를 희망합니다!”
리덕수는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연변의 쾌속적인 발전에 미치게 되는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의를 설명하고 나서 자기가 미국을 방문할 때 자기 가슴을 저미던 감수를 들려주면서 절박성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시대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린다. 많은 나라들이 서로 앞다투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긴박하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서둘러 쫓아 가지 않으면 그저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리덕수의 말을 다 듣고난 김태호의 얼굴은 대뜸 근엄해졌다.
“리서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김국장동무! 무슨 곤난에 봉착하면 아무 때든 저를 찾아 오십시오. 이 대상을 추진하는 과정에 주에서는 전폭적으로 동무를 밀어주겠습니다!”
“리서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저는 이 대상을 다해내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김태호는 천신만고를 다 겪으면서 일을 추진해나갔다. 김태호는 건강이 그닥지 않았음에도 이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쉴새없이 장춘에 갔다가 북경으로 가고 북경에 갔다가 다시 장춘으로 오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였다. 그 당시 장춘시와 길림시에도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연변에서 이 시설을 먼저 설치하자 했으니 세간의 눈길이 어떠했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걸림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비록 그 과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종당에 연변에서는 끝내 이 대상을 쟁취해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변의 프로그램제어전화가 마침내 정식으로 가동되는 시대를 맞게 되였다.
이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우전국에서는 모처럼 새 빌딩을 신축하였다. 이 정보통신빌딩이 일떠서면서 그 당시 연길을 적잖게 들썽해놓았다. 이 빌딩은 한동안 연길시의 랜드마크로 불리울 만큼 물망에 오르게 되였다. 연변의 프로그램제어전화설치는 전국적으로도 상당히 일찍한편이였다. 그 때 북경 등 많은 지역에서도 아직 프로그램제어전화계통을 가설하지 않았다. 1990년도에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취임했을 때 사무실전화도 아직 프로그램제어전화가 아니였다. 그 때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 판공실에서는 이미 직접 국내외 장거리 전화를 자유자재로 걸고 받을 수 있었다. 리덕수가 북경에 가서 취임한 어느날이였다. 당시 주당위 부서기 리정문이 중앙당학교에서 학습을 하는 여가에 모처럼 리덕수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리정문은 리덕수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뭔가 떠올라 연변에 전화를 걸려고 하였는데 직접 통화가 안되였다. 그러자 리정문은 갸우뚱하면서 롱담을 건넸다.
“어쩌면 당신네 북경이 우리네 연변 시골보다도 못하단 말이요?”
그 당시 연변에는 프로그램제어전화가 있었으므로 시골에 살고 있는 백성들도 미국이나 한국 등 모든 나라에 직통전화를 할 수 있었다.
“저는 연변에서 정말 이런 기반시설건설을 착실히 틀어쥐고 싶었습니다. 연변은 기반시설건설을 잘 해놓아야 외부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거니와 전반 경제를 조속히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중국말 속담에 낫을 가는 일이 나무를 찍는 일을 지체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반시설을 잘 갖춰 놓는 것은 지금의 시체말로 하면 투자환경이 좋아야 후속적 발전도 가능하다는 그것이겠지요.”
이 말 속에 리덕수의 마음속 진실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미국에 쳬류할 때 그는 한가지 일에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대표단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대표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된 만큼 미국측에서도 매우 성의스레 그들을 접대하였다. 그래서 리덕수는 많은 사람들, 더구나 수많은 기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거의 모든 기업가들한테 한결같이 “여러분들이 연변에 와서 투자하는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연변으로 청했다. 그런데 이들 기업가들은 연변이란 고장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연변을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다. 리덕수가 그들에게 연변의 지리적 위치를 소개해주었는데도 그들은 그 곳이 너무도 편벽해서 찾아가기 힘들다고 시무룩하게 나왔다. 그러면 리덕수는 또 그들이 알아 듣기 쉽게 약간 유모아까지 곁들여 해석했다.
“당신들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도착하여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고 두 시간이면 장춘에 도착하고 또 장춘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곧바로 연길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연변이란 바로 이렇게 가까운 고장이랍니다.”
미국사람들은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좀처럼 말귀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다가 곰곰히 따져보고 나서야 어이없다는듯 무릎을 탁 치며 탄식했다. 북경에서 장춘까지 비행기를 타고 장춘에서 또 기차로 바꿔 타고 꼬박 하루밤을 기차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말이 그들한테는 천방야담 같았다. 그들한테는 멀면서도 교통마저 불편한 이 고장이 그처럼 아득해보였다.
그 때로부터 리덕수는 연변이 개혁개방하려면 꼭 공항을 건설해야 하고 나아가 연변의 려객렬차가 수도 북경으로 직행할 수 있게 길을 뚫어어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경에 남았다. 그는 미국에 다녀온 려독이 아직 채 풀리기도 전에 북경에서 조금도 쉴새없이 부지런히 두가지 건설대상을 추진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다름 아닌 공항건설대상이였다. 리덕수는 중앙과 국무원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 관련 부문들을 찾아다니며 연변을 대표하여 정식으로 연길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확장건설할 것을 제의하였다. 나중에 그 때 만났던 부장들과 주임들 그리고 국장급 간부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은 모두 리덕수와 친구가 되였다.
처음부터 연길공항 개축확건대상의 추진과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무명소졸’이 한명 있었다. 그 때 그는 교문을 금방 나선 대학졸업생이였다. 바로 나중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담임하였다가 지금은 길림성당위 상무위원 겸 통전부 부장을 맡고 있는 리경호(李景浩)이다.
1983년 8월, 리경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주계획위원회 공업처에 배치되였다. 리덕수가 주위 서기 겸 주장으로 있을 당시 관심을 갖고 있는 몇개 중요한 공정건설현장으로 내려갈 때면 리경호는 자주 리덕수를 수행하여 각 공사장으로 내려갔다. 그 후 주계획위원회 종합처 처장으로 임명되면서 리경호는 리덕수가 소집하고 사회하는 공업 관련 의제 주당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도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세부를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리서기는 문제를 매우 깊이 있게 보았으며 늘 문제의 여러개 측면들을 다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연설은 론리성과 설득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어떤 때 리서기는 주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사회하고 회보를 듣다가도 제기되는 수치 속의 오차를 그 자리에서 발견하고 바로잡아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회보를 들으면서 건설적이고도 활용성 있는 건의들을 제기해주었습니다. 리서기는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가끔 따로 준비하지 않고 완전히 즉흥적으로 연설을 해도 문제를 면바로 파악하고 있었고 제기하는 의견도 적중하고 건설적이였습니다. 이것은 리서기가 전반적인 국면도 잘 파악하고 있었거니와 구체적인 매개 중점공정에 대해서도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리서기가 관련 수치의 배후에 숨겨진 문제들과 그 수치 속에 감추어진 론리를 능란하게 분석해내는 지혜에 탄복할 때가 많았습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추억했다. 그 당시 연변에서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건설하자고 제기했을 때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었고 찾아다니며 일일이 뚫어야 할 장벽이 너무도 많았다. 관련이 있는 상급 부문만 해도 십여개가 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때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만들어 낸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고 아슬아슬한 모험이였다. 연길비행장의 지리적 위치가 너무도 민감하고 중요하여 국방적 차원의 시각으로나 변경의 시각으로 감안해도 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문외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사회적 환경과 정치적 환경에서 리덕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지도간부가 이런 건설대상을 제기하자면 일정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다. 송평(宋平)이 국무위원 겸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으로 있을 때 연변에 와서 시찰을 한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송평한테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건설할 데 관한 항목신청을 회보하였다.
리경호는 그 때의 세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그 날 저녁에 모처럼 관련 부문의 책임자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회보할 내용을 포치하였다. 리덕수는 공항건설을 단독으로 제기해야 하며 반드시 빈틈없이 회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회의에서 리경호가 입수한 자료에는 국내 몇개 지역에서 이미 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개축했다는 중요한 정보도 들어있었다. 많은 일들이 왕왕 다 그러하듯이 그 누구도 먼저 그렇게 한 선례가 없는데 내가 맨먼저 그렇게 하자고 나서면 그 어려움은 두말할것없이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먼저 그렇게 한 전례가 있다할 때 그 실례를 들어가면서 각 주관부문을 설득하게 되면 더 힘이 클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 주계획위원회 주임이 하루밤 새에 급히 <연길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확장건설할 데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리경호를 찾았다. 리경호는 연변의 실제정황에 근거하여 밤도와 보고서를 작성하여 그 이튿날로 교부하였다. 리덕수는 그 날 리경호가 작성한 <연길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확장건설할 데 관한 보고서>를 직접 송평한테 넘기면서 차에서 상세한 정황을 설명하여 마침내 송평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지나간 일들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심경을 밝혔다.
“이로써 연길 군민량용공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장 관건적인 한발작이자 결정적인 한발작을 내디디게 되였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송평은 회의에서 회보를 다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이 일은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라고 태도를 보여주었다.
송평의 이 말이 떨어지자 리덕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이런 유리한 형세를 다잡고 곧바로 관련 부문 회의를 열고 연길공항 확장건설대상의 각항 준비정황에 관한 회보를 청취하였다. 리덕수는 자신감에 넘쳐 연길공항 확장건설은 우리가 남들보다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였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형세를 분석, 판단하고 다음 단계의 사업을 연구하였다. 연길공항 확장건설대상에 대해 리덕수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 어떤 일이라도 매개 고리마다 하나하나 친히 챙기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때 리덕수는 주정부 상무부주장인 손홍상한테 이 건설대상의 구체적인 실행사업을 맡겼다.
30여년이 지난 후 손홍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몇해 동안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확실히 주요한 정력을 경제건설에 몰부었습니다. 목표가 명확하고 인식이 통일되여있으니 박력 있게 일을 밀고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항건설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연길공항 확장건설은 처음부터 우여곡절에 부딪쳤다. 애초에 이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곧바로 부동한 의견을 내놓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변경선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다 연길공항을 건설하려고 하면 상급에서 비준할 리가 만무하다고 소극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 당시에 민항계통에서마저 연길공항건설에 부정적이였다. 민항계통에서는 주로 옹근 연변 인구가 겨우 200 만명 밖에 되지 않는데 공항을 건설한다 쳐도 비행기에 탈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경제적 측면에서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변보다 한발 앞서 공항을 건설했던 목단강의 실례를 들었다. 간난신고 끝에 숱한 재력을 들여서 공항을 닦고 항로를 개통해놓았다지만 어떤 땐 한 항공편에 손님이 고작 한두 명 밖에 안되면서 밑지게 되자 목단강에서는 이미 개통해놓은 항로를 부득불 스스로 중지하게 되였다. 흔히 앞사람의 실패는 뒤사람의 거울로 된다. 그들은 연변에서는 반드시 목단강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따끔하게 침까지 놓아주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튼 그 당시의 여론은 연길공항건설에 지극히 불리하였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리덕수의 의지는 그처럼 확고했다. 그는 연변에는 반드시 공항이 있어야 하고 연변에서는 어떻게 하나 자기의 공항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 큰 방향은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연변의 정황은 목단강과는 다르다. 연변은 전국에서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이고 각광받고 있는 관광명소 장백산 주봉도 연변 쪽에 있다. 전국 각지와 외국에서 손님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연변의 독특한 우세이다. 만약 연길에 항로가 개통되면 그 느릿느릿한 기차를 타고 연변에 오겠다 할 사람이 몇이 안될 것이다. 기필코 비행기를 탈 게 분명하다. 처음엔 손님이 좀 적을 수 있더라도 관광시장이란 것도 역시 사람들이 육성하기에 달린 만큼 그 예비는 예측하기 어렵다.
나중에 리덕수는 이 일을 여러번 상무위원회에 내놓고 토론하여 종당에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통일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상무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당위에서는 이미 결심을 내린 이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난관을 돌파하고 기어이 공항을 개통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은 주정부에 일임하고 구체적으로는 상무부주장 손홍상동무한테 맡기겠는데 주정부에서는 이 일을 꼭 해 내야 합니다.”
연길비행장은 공군 모부대 관할이였고 본부는 목단강에 있었다. 손홍상은 최고지휘관을 만나려고 목단강으로 찾아갔다. 지방에서 동지들이 찾아가면 군부대에서는 매우 열정적으로 맞는 관행이 있는 만큼 손홍상은 곧바로 최고지휘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찾아오게 된 의향을 이야기하자 최고지휘관은 곧 난색을 보이였다.
“손주장동지! 만약 이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라면 너무도 큰 사안이여서 저희들한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응당 심양군구 공군을 먼저 찾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손홍상은 거기서 더 지체할 수 없어 곧바로 심양으로 달려갔다, 심양군구 공군 사령원은 전정(田征)이였다. 그는 나중에 상장계급을 수여 받은 군인이였다.
전정 사령원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약간 머밋거렸다. 솔직히 군부대에서도 지방과 이런 업무접촉을 가진 적이 없기에 감을 잡기 어려울 수 있었다. 군부대의 비행장을 차용하겠다는 지방정부의 청구 역시 처음이였다.
손홍상은 간절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사령원동지께서 한번 저희 연변에 오셔서 몸소 연변의 정황을 료해해보시면 감수가 다를 겁니다.”
손홍상의 진정이 전정 사령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중에 전사령원은 혼자만이 아니라 공군부대 관련 책임자들을 다 거느리고 연변으로 찾아왔다,
리덕수는 매우 열정적으로 전사령원을 접대하였다. 이어 있은 리덕수의 회보는 그처럼 감동적이였다. 물론 리덕수는 미사려구를 늘여놓은 게 아니였다. 리덕수의 순박함과 성실함과 연변 인민에 대한 깊은 감정, 그리고 한마음한뜻으로 연변을 발전시키려는 절절한 심정, 책임감과 사명감이 전사령원의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전사령원은 연변은 변강지구이면서도 소수민족지구이며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신중국의 창립과 사회주의건설사업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거대한 기여를 하였지만 지금 연변의 발전이 내지보다 훨씬 뒤떨어져있고 연변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아직도 부유하지 못하다는 리덕수의 소개를 듣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였다. 그는 연변의 발전을 다그쳐 내지와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리덕수의 관점에 완전히 긍적적이였다. 지금 연변의 개혁개방사업이 군부대의 비행장을 수요하고 있고 그것도 차용하는데 그치는 사안인데 인민자제병으로서 연변 부모형제들의 이런 기대를 거절한다는 건 정감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변에서의 현지고찰을 마치고 나서 전사령원은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명확히 표명하였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시도입니다! 저희들한테는 연변 인민이 제기한 요구를 거절할 리유가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대담하게 해 봅시다!”
이리하여 공군사령부에서는 곧 회시를 내려보내 연길에 군민량용공항을 건설하는 데 동의하였다.
마지막엔 심양군구 사령원이 정식 명령을 하달하여야 했다. 역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리덕수는 또 손홍상을 그 당시 심양군구 사령원인 류정송(刘精松)한테 보냈다.
손홍상은 이번에도 류정송 사령원을 연변으로 모셔왔다. 리덕수는 류정송 사령원에게 정황을 회보하고 나서 그를 배동하여 비행장에 가서 현지를 고찰했다.
세월이 흘러가고 상황이 많이 달라져 지금 이런 일들을 돌이켜보면 매우 순탄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때는 이런 과정이 그야말로 걸음마다 하나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로정이였다.
이제는 또 민항계통을 설득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민항계통에서 연변의 항로개통에 소극적인 이유는 주로 적자를 우려해서였다. 민항계통에서 문제를 고려하는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려객수송량이였다. 려객수송량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려객수송량이 모자라면 적자가 생기게 되고 또 결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손을 책임져야 하는 민항계통의 립장도 어느 정도 리해할 수 있었다.
손홍 상은 리덕수한테 이렇게 물었다.
“그들이 려객수송량을 갖고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성민항국을 설득해야 할가요?”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도 종당에는 기필코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덕수가 연변의 미래 항공시장에 이처럼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 하나로 리덕수는 중국 개혁개방의 큰 흐름을 똑똑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 만큼 국문을 여는 것은 중국 개혁개방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명석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세계로 나아가야 하고 세계도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대적 추세였다.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연변의 발전과 개방은 무한히 광활한 전망을 갖고 있다. 민항선의 개통은 연변의 개혁개방과 발전에서 조만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과정이다.. 이제 연길공항이 건설되면 예상 밖의 돌파가 연거퍼 이어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로 리덕수의 연변에 대한 료해였다. 그는 연변의 단기 발전목표를 똑똑히 내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중장기 발전전망도 다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연변의 지연적 우세, 자원우세, 관광우세, 민족자치구역우세 그리고 인맥관계 우세…이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다 엄청난 브랜드인데 려객수송량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리덕수는 연길공항이 일단 건설되면 그 려객수송량은 기필코 기하급수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이며 조만간 공항재확장건설이 절박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송홍상은 장춘에 찾아가 길림성민항국을 설득시키는 작업을 벌려나갔다. 그 당시 성민항국 서기는 림씨이고 국장은 오씨였는데 나중에 이들 두사람은 모두 리덕수와 손홍상의 훌륭한 친구로 되였다. 손홍상은 넓은 안목으로 멀리 내다 보는 리덕수의 리념을 림서기와 오국장한테 전달했고 드디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더라도 민항국에서는 신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만약 연길공항 민항항로가 개통된 후 적자가 발생하면 그 결손부분을 연변에서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내놓았다. 이로 하여 팽팽하게 론쟁이 있었다. 저녁에 손홍상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낮에 성민항국과 있은 론쟁을 그대로 회보했다. 리덕수는 이렇게 제기했다.
“만약 적자가 발생하여 그 결손부분을 연변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하면 이와 반대로 만약 리윤이 발생했을 경우 연변을 빼놓아서는 안되겠지요?”
이튿날 손홍상은 리덕수의 의견을 성민항국 지도자한테 전달하였다. 성민항국 지도자들은 밖에 나가 따로 의론을 하고 다시 들어왔다.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결손화제는 이제 더는 꺼내지 맙시다. 앞으로는 다시 결손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연변항로가 개통되면 힘을 모아 모나게 운영하여 리윤을 창출해냅시다!”
연길공항이 개항되여 얼마 안 지나 곧 리윤을 보게 되였다. 사실은 주당위의 결책이 정확하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연길공항건설을 몇년 뒤로 미루었다면 연변 개혁개방의 템포도 필연코 그 만큼 더 늦춰졌을 것이다.
성민항국의 지지를 확보하자 심양민항국에서도 동의하였다.
처음에 심양민항국 동지들은 연변의 일반 백성들도 비행기를 탈 수 있을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리덕수는 그들을 데리고 도문시 홍기대대에 가서 좌담회를 가졌다. 심양민항국 리부국장과 그가 거느린 관련 인원들도 같이 자리했다. 홍기대대에서는 70, 80세 되는 어른들로부터 20, 30세의 젊은이들, 심지어 십여세 되는 조무래기들까지 한꺼번에 숱한 사람들이 좌담회에 모여왔다. 홍기대대 농민들은 구김없이 자기들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지금은 돈도 좀 있고 생활도 많이 나아져 모두 밖에 나가 한바퀴 빙 돌면서 세상구경을 좀 해보고 싶다. 그리고 외국에도 가보면서 시야를 좀 넓히고 싶다. 더우기 친적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국에도 가보고 싶다. 생산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모두 조선어로 되였는데 리덕수가 몸소 심양민항국 동지들한테 한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나중에 심양민항국 동지들은 다들 항공시장은 결국 민간에 있다는 새로운 발견에 고무를 받았다.
심양민항국에서 연길공항건설을 동의하자 국가민항총국의 비준도 곧 내려왔다. 군부대에서 연변에 무상으로 비행기 활주로를 제공하고 또 무상으로 건설용지를 떼여주었다. 민항계통에서는 연변에 비행기 항행에 필요한 시설들을 제공하였다. 공항탑승터미널, 민항종업원 숙소와 비행기 계류장 등 기본시설 건설자금은 연변에서 책임졌다. 그 당시 얼핏 예산을 따져보니 1,000만원이 있어야 했지만 연변에서는 세밀하게 계획하고 꼼꼼하게 계산하여 실제로는 700여만원을 들이고 모든 시설들을 갖추어놓았다.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길비행장은 1985년에 정식으로 군민량용공항으로 활용하게 되였다.
1985년 8월 29일, An-24형 려객기가 연길----장춘 항로를 날게 되였다. 연변에 민용항공편이 없던 력사는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뒤이어 연길----심양----대련, 연길----심양----북경 등 항공편이 륙속 개통되였다. 개혁개방의 흐름과 추세에 따라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연길공항에서 두차례의 확장공사를 벌리면서 대형려객기의 리착륙도 가능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민용항공지선에 위치한 연길이란 이 작은 공항에서 날마다 오르고 내리는 려객수송량은 국내 같은 류형의 지선 공항중에서 대뜸 두각을 드러내게 되였고 연길공항은 일약 전 동북지구의 다섯번째로 큰 공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지금은 국내 각지로 날아갈 수 있게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조선, 일본, 로씨야 등 나라로 오가는 국제항공편이 잇달아 개통되면서 명실상부한 국제공항으로 떠오르게 되였다.
연길공항이 건설되면서 이제 연변사람들은 제 집 문 앞에서 직접 비행기를 타고 거뜬하게 전국 각지로 날아갈 수 있게 되였다. 항로가 개통되는 그 날 연길시는 명절을 맞은듯 환희로 들끓었다. 개항의식도 아주 특별하게 치러졌다. 비행기는 먼저 연길시 가두에서 뽑힌 할아버지, 할머니 대표들을 모시고 연길시 상공을 세바퀴 빙빙 선회하였다. 시구역 시민들은 머리를 쳐들고 하늘 공중에서 선회하는 비행기를 신비롭게 올려다보았다. 비행기는 저공비행을 하였기 때문에 그 동음도 유난히 요란했다. 땅에서 하늘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너무도 기쁨에 넘쳐 흥겹게 환호성을 울리였다. 《연변일보》에서 파견한 특파기자는 첫 비행에 관한 장편통신을 써서 감격적인 이 순간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공항이 다 건설되고 비행기가 통항하게 되였다고 하여 만사대길이 아니였다. 아직도 일련의 협상과 조률 그리고 관리사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한이래 사업을 온당하면서도 박력이 있게 벌려나가고 착실하면서도 실속 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에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긍정을 받게 되였다. 성당위의 연구와 중앙의 비준을 거쳐 1985년 5월에 리덕수는 성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85년 9월 24일, 당의 제12기 중앙위원회는 당면한 형세와 특수한 력사조건에 근거하여 북경에서 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표대회에서 리덕수는 신규 중앙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기간에 길림성위 서기 강효초는 우정 일부 사람들한테 리덕수의 정치적 업적과 위인을 소개하였다. 강효초는 료녕성당위 서기 전수인, 흑룡강성당위 서기 손유본과 의견을 나누고 리덕생을 찾아갔다. 리덕생은 리덕수와 진작부터 교분이 있었고 비교적 익숙한 사이였다. 리덕생이 앞에 서고 동북3성의 성당위 서기들은 리덕생과 함께 련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올려보내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리덕수를 제12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추가선거할 것을 제의하였다. 리덕수가 당선된 후 손유본을 포함한 몇몇 지도자들이 모두 건너와 일일이 리덕수를 축하해주었다. 조남기는 리덕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리덕생동지가 앞에 서서 중앙에 보고를 올려보낸 만큼 동무는 의례 그 분한테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리덕수가 리덕생한테 사의를 드렸더니 리덕생은 이런 세부를 들려주었다.
“정치국에서 토론할 때 제일 먼저 발언한 분이 호계립동지였습니다. 호계립동지는 동무를 중앙후보위원으로 천거하는 걸 지지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남기동지는 이미 중앙위원이였다.
1987년 10월, 당의 제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리덕수는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88년 3월 19일, 제13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가 페막된 후 리덕수는 성으로 돌아왔다. 이 때는 연길공항 건설사업이 이미 완료되여 정식으로 사용에 교부된 뒤였다. 3월 19일 당일, 리덕수는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서 장춘에 돌아온 뒤 장춘에서 일을 다 보고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돌아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연길공항이 금방 사용에 교부되였기에 운영되는 건 소형비행기였다. 리덕수가 이 비행기를 타려하자 성민항국 정위가 기어코 리덕수를 배동하여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연길 상공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길공항에서 시종 신호를 주지 않아 비행기가 공중에서 몇바퀴 선회하면서도 착륙할 수 없었다. 성민항국 정위도 지면에서 무슨 상황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어 미안하게 사과했다.
“리서기! 지금 공항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린 착륙할 수가 없습니다. 비행기의 기름도 부족하므로 여기서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린 다시 장춘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동무의 말 대로 합시다. 착륙할 수 없다니까 곧바로 장춘으로 돌아가야지요.”
비행기가 장춘공항에 착륙하자 민항국과 공항 책임자들이 줄을 서서 리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하고 나서 잠간 휴식한 뒤 민항국 지도일군들은 리덕수한테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를 반드시 바꾸어 타야 하겠습니다. 수장동지께서 타셨던 첫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했으므로 또다시 그 비행기를 보낼 순 없습니다.”
리덕수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모든 것은 민항국 배치에 따르겠습니다. 그저 어서 빨리 연길에 돌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도 민항국의 그 정위가 리덕수를 배동하여 연길로 날게 되는 비행기에 올랐다. 정위는 연길공항과 이미 다 련락이 되였다고 하면서 이번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비행기가 연길공항에 착륙하자 성민항국의 정위는 곧 그 비행기를 타고 장춘으로 되돌아갔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인 동시에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이였다. 그 당시 연길시 하남 쪽에는 연변주둔군부대 한개 사단본부가 또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의 신분으로 각 주둔군부대와의 관계를 조정, 조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안경찰, 무장경찰, 공군부대, 륙군주둔부대 할 것 없이 모두 리덕수가 소집한 련석회의에서 한자리에 모여앉아 연변의 안정과 단결문제를 상론하게 되였다. 나중에 지방과 군부대에서는 리덕수가 창도한 이런 련석회의를 자주 열어 무슨 일이 있으면 련석회의에서 다같이 상의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군부대와 지방의 이런 련석회의는 연변에서 또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게 되였다.
그 이후의 실천은 리덕수가 이 문제를 제때에 틀어쥔 것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적시적이고도 효률적으로 연변의 군부대와 지방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였기에 연변은 옹군애민모범자치주로 되여 여러번 중앙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및 성의 표창을 받게 되였다.
민용항로의 개통외에도 주에서 틀어쥔 또 다른 중점기반시설건설항목은 도로교통이였다. 당시 주교통국 국장을 맡고 있다가 정년퇴직하기 전에 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 임명되였던 박남일(朴南镒)은 리덕수가 늘 자기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회억하였다.
“연변이 발전하려면 교통이 선행해야 합니다. 교통이 곧바로 경제의 동맥인데 동맥이 잘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발전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
리덕수는 하루빨리 연변의 변경도로와 주내 순환도로를 구축하기 위해 친히 주당위와 주정부 관련 지도일군들과 주교통국, 주계획경제위원회 등 관련 부문의 책임자들을 거느리고 반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전 주를 한바퀴 돌면서 매개 도로구간 건설계획과 구체적인 시공방안을 상세하게 연구하고 주내 순환도로를 건설하기로 초보적으로 기획하였다. 주당위의 전폭적인 지지를 딛고 박남일은 주교통국을 거느리고 세가지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첫째, 원래 비가 오면 질척거려 차가 다닐 수 없었던 주내의 모든 흙길을 전부 아쓰팔트포장도로로 바꾸었다. 둘째, 백성들의 나들이에 편리하도록 8개 현, 시에 모두 뻐스터미널을 건설하였다. 셋째, 전 주 향촌 일급까지 모두 려객뻐스가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북아려객운수쎈터도 박남일이 주교통국 국장 임직기간에 완공한 큰 공정중의 하나였다. 이 동북아려객운수쎈터의 건설부지 역시 원래는 군부대 귀속이였다. 당연히 군부대를 설득하였다. 동북아려객운수쎈터를 건설하는 총 예산은 3,400만원, 공사예정기일은 3년이였는데 물가상승과 내부설계변동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1,000만원이 더 추가되였다.
이 항목에 수요되는 건설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리덕수는 성에서 회의하는 기회를 빌어 성교통청 청장한테 연변의 교통정황을 상세히 회보하였다. 교툥청 청장이 몸소 연변에 와서 현지를 고찰하고 전문자금을 비준, 하달하였기에 려객운수쎈터는 재빨리 건설될 수 있었다.
그 때 박남일은 교통부의 왕부장과도 련계가 비교적 많았다. 박남일은 리덕수의당부 대로 왕부장을 연변으로 모셔왔다. 왕부장은 연변의 도로상황을 돌아보고 나서 곧바로 연변에 도로건설자금을 비준해주었다. 민족지구의 교통사업에 돌려준 왕부장의 각별한 배려는 리덕수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남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리덕수는 교통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경상적으로 교통국 간부들과 함께 조사연구하러 내려갔습니다. 연변의 첫번째 턴넬인 소반령턴넬 착공에 앞서 리덕수는 현지에 가서 고찰하였고 시공에 들어간 다음에도 자주 내려가 시공진척상황과 시공질을 검사하였습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와 주장을 담당했을 때까지도 주내에 각 현, 시를 련결하는 아스팔트길이라곤 한갈래도 없었습니다. 리덕수는 1984년부터 아스팔트 로면 건설을 단단히 틀어쥐였습니다. 10 년간의 건설을 거쳐 1993년에 이르러 각 현, 시를 잇던 주내의 흙길은 몽땅 아스팔트길로 바꿔졌습니다.”
리덕수가 틀어쥔 네번째 기반시설건설은 철도교통운수사업이였다. 그 때 연변의 철도려객렬차는 도문에서 장춘으로 오가는 장도선 한갈래 뿐이였는데 그것도 그저 아침 저녁으로 한번씩에만 그치고 있었다. 장도선은 단선궤도로서 한쪽에서 기다려야 했고 속도도 느릿느릿했다. 연변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다니려면 먼저 장춘에 이른 다음 다른 지방으로 가는 렬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연변에서 떠난 려객렬차가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리덕수는 주의 기타 지도자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라도 이 일은 바짝 틀어쥐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급히 성사시키려고 서둘러도 안되겠습니다. 단번에 북경직행이 어렵다면 먼저 심양, 천진까지 직행하고 점차적으로 이루어내는 방법도 연구해볼 만합니다.”
그 때 주에서는 전문 두 사람한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맡겼다. 한 사람은 주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민족사무위원회 간부이던 박유생(朴榆生)이였다. 리덕수는 북경에 일 보러 갔다가 특별히 이들 두 사람을 만나보았다. 북경은 5월부터 벌써 더워났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겨울에 신고 갔던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그마저 다 헤어져있었다. 옷도 아직 절기에 맞춰 갈아 입지 못하고 있었다. 1984년, 그 당시 간부들의 로임은 보편적으로 다 낮은편이였다. 이 두 사람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리덕수는 눈물이 날 지경이였다.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연변 인민들로 하여금 렬차를 타고 북경까지 직행할 수 있는 꿈을 이뤄내게 하기 위해 이들 두 사람은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불철주야 뛰여다니느라고 갖은 고생을 겪고 있었다. 연변에 돌아온 리덕수는 직접 관련 부문에 전화를 걸어 이들 두 사람한테 새옷과 새 구구도 사주라고 당부하였다.
나중에 박유생은 중병에 걸려 연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효험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리덕수는 지금도 박유생을 떠올리면 늘 괴로워 한다. 연변의 발전에는 박유생처럼 묵묵히 헌신만 하여온 수많은 간부와 대중들의 피와 땀이 응결되여있다. 이 동지는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특별히 려객렬차 북경직행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차출한 사업일군이였다. 연변발 려객렬차는 진작 소원 대로 북경직행이 이루어졌지만 박유생은 끝내 그 날을 보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박유생의 안해 오애순은 연변대학도서관 선생님이였다. 리덕수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으면서 이 선생님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남편이 타계하고 몇년이 지난 후 이 선생님이 리덕수를 찾아와서 그 때까지 집도 없이 살고 있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 말에 리덕수는 가슴이 못내 무거워났다. 리덕수는 그 때까지도 박유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직하고 사업책임심이 매우 강한 데다가 일에 들어서면 모든 걸 불사하는 그런 사람이였다. 리덕수는 깊은 감개에 젖어 오애순선생한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남편은 연변의 발전을 위해 아주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그 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잊을 수도 없습니다!”
리덕수는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한테 이 일을 맡기였다. 김동기의 구체적인 협상과 조률을 거쳐 오애순은 연변대학에서 60여평방메터짜리 아빠트를 분여받게 되였고 그의 딸애도 출판부문에 배치받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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