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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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2015년 07월 19일 19시 23분  조회:6713  추천:9  작성자: 주청룡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원래 연변의 산 강 그리고 마을 지명들은 순수한 고유어로 다양하게 불리여 왔다. 그런데 지명이 지

금처럼3∼4자의 한자어로 고착 되여 버린 것은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많은 이름

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천불지산 동쪽 삼합진 북쪽에 자리 잡은 증봉산을 덴노후지산

(天皇富士山)이 라고 외곡 되여 불리여 왔고 천불지산 서남쪽에 위치한 큰 쓰레산 작은 쓰레산 지명

도 원래 함경도 방언 쓰레 (쓰레 라는 말은 빗물 따위에 쓸리어 나가 경사가 진 비탈을 가리키는 말이

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난 시기 연변의 많은 잡지 신문들에서는 큰 쓰레산을 한자어 표

기에 따라 그 지명을 공사령 孔石列 혹은 쿵스레 昆石列라고 잘못 적어 왔었다.


천불지산 지명도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지산을 천

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천불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풀과 나무가 불살라진 자리에 밭을 일구는 땅을 뜻한다. 일찍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고유

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

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 해석에 따르면 하늘

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고 적고 있다. 천불지산이 국가급자연보호구로 선정되고 룡정시 천불지산송이문화관광절을 펼쳐가

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국내외 각종 신문 방송 언론매체들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 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해석하고 있다.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이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 있다 . 이

런 현실 속에서 원래의 천불붙이 지명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여 가고 있다. 이는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땅을 개척해온 선조들의 후손으로서는 너무나도 부끄

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은 사회문화적인 존재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백여 년

세월을 훨씬 뛰여 넘어 뼈아픈 역사가 묻혀있는 연변. 그리고 그 땅 우에 아로새겨져 있는 지명들을

이제 하나 둘 우리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해가야 한다. 천불지산 지명도 그 동안 연변 각 현시 지명지

(地名志)와 연변대학 교수들의 논문과 자료에서 적지 않게 언급 되여 왔다. 하지만 이런 책과 논문들

에서는 모두가 한자의 뜻에만 몰입하여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되풀이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어 아

직도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조사 연구는 미흡한 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천불지산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계기로 이름이 지어진 것인지 기타 지역 지명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당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 날 와서 이

에 대한 조사사업은 시급히 이루어지어야 마땅한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밭을 하다게畑라 적고 불(火)와 밭(田)로 이루어 졌는데 화전은 오래전부터 동북 아세

아 지역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나타고 있다. 조선반도에서는 화전의 시초를 북방변경에서 생활하

고 있던 재가승들이(在家僧) 산간벽지에 은거하여 화전경작을 한데서 찾는다는 주장이 있다. 함경도

에는 심산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만든 화전(火田)을 이용하는 이른바 화전농법이 다른 어느

도에 비해서도 가장 많은 편이다. 1928년의 화전민을 지역분포별로 볼 때 북부지방이 80.1만 중부지

방이37.5만 남부지방이 6.3만이며 그 가운데 북부지방은 전체의 70% 이상을 점유하여 화전경작의

집중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화전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부

터 학정에 시달린 백성은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임꺽정 같은 소설이 되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화전을 부대기 부대밭을 일군다고 말한다. 천불지산 북

쪽에 자리 잡은 지신 성남의 불 붙이 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살던 노인들은 부대밭을

불대기(부덱이 火德)밭으로 풀이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체로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가을에 벌채해 두었다가 이듬해 해빙기에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 사람

들은 꽉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파종의 경우 주로 꽉지로 대충 골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묻는데 이것을 포지라고 말하며 이런 골 지명을 포지골 이라고 불려왔다. 그때 이런 밭에서 모기가

극성부리기에 쑥대를 길게 묶어 허리좌우에 뻗쳐 차고 두 끝에 불을 태워 모기를 피하군 하였다. 민

초들 가운데 북빼기집(농막의 일종)을 짓고 여름 내내 부대밭을 일구며 농사짓는 떠돌이 날농군들이

많았다. 화전 밭은 숙전과는 달리 밑거름으로 투입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 타서 남긴 재와 낙엽이 쌓

여 생긴 부식토로 지력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몇 년간은 경작하다가 떨어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여 휴경한다. 이렇게 몇 년간 밭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일구는 이런 밭을 묵밭을일군

다고 말한다. 화전농업은 이런 단계가 반복되다가 차츰 소와 쟁기를 사용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늘게

되고 따라서 계곡 경사면이거나 산기슭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된다. 이렇

게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최초의 함경도 이주민들을 화전민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년 전 두만강 이북 천불지산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가득 찬 망망한 임

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하늘에서 원인 모를 불똥이 떨어 지여 불이 났으며 이렇게 불에 탄

나무들이 있는 곳은 화전을 일구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거기에 사회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산지를 도피 은거하는 백성들이 많아지면서 화전은 근세사회에 들어오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비탈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함경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천불지산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의식주 해결과 겨울이면

폭설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천불지산은 그래도 개척민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그리고 그 땅에서 수확한 보리 메밀과 감자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

나 다름없었다.


산세가 부드럽고 조망이 좋은 천불지산 정상에 서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

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뭇 봉우리들이 마치 두만강 물결처럼 굽이굽이 정상에 흘러와 뉘연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천불지산 정상은 북쪽의 오봉산과 서남쪽의 큰쓰레산과 달리 산세가 급하지 않고 부드

럽다. 산정상의 뉘연한 능선 사이로 여러 갈래 냇물들이 숲 속으로 흘러 내려가는 곳에 크고 작은 산

길들이 뻗어나 있다. 그 중에서 서래골로 뻗은 경우가 가장 많고 서남쪽 능선을 타고 중마래 하마래

로 내려갈 수도 있다. 북으로는 노름바위와 노루메기 작수동 범동 등 마을 거쳐 달라자로 가는 길이

있고 서북으로는 동쪽골로 원동 덕수로 이어지는 갈들이 뻗어있다.


천불지산 화전민의 취락은 음달진 북면이나 서면의 산허리보다 햇볕이 잘 드는 남면이나 동면의 지

역이 더 발달 되여 있다. 여전에는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올라가면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동

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자연부락을 단위로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였으며

20세기30~40연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

들은 산비탈에 귀틀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

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적도 있었다


해방 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 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

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 마을 흔적은 서서히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와 닿지 않은 서래골 마래골 계곡 구석구석을 온종일 누비며 헤쳐보아도 이젠 그 옛

날 화전민이 일구었던 화전 밭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노송아래 파란 이끼가 두

텁게 내려앉은 바위위에 앉아 땀을 들이노라면 희미한 꿈결처럼 저 멀리 구불구불 길게 뻗어간 오솔

길로 지게를 지고 함지를 이고 하얀 옷을 입은 화전민들이 당금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지산은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임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

들어와 화전 밭을 일구면서 천불지산의 역사가 시작 되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왔

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 했던 역사는 아니러니 하게도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것을 꽁꽁 숨기

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 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사람들의 기

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연변 역사는 어느 한 위인이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서있는 연변 땅 곳곳에서 땀 흘

리며 살아왔던 평범한 백성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가로 세로 촘촘히 엮이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우

에 연변의 문화가 소박하게 이름 없는 꽃으로 피여 나온 것이다 . 보잘 것 없고 초라하고 하찮다고 생

각한 민초들이 천불지산에 흘린 땀의 기록은 진실성을 갖고 있기에 진실한 역사로 기록 되어 남아야

한다. 오늘날 와서 우리가 적어도 천불붙이란 이 진실한 지명에 의지하고 또 적어도 이 진실한 지명

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지켜 나간다면 선조들의 원초적인 삶의 흔적이 아로 새겨진 이 지명은 많은

연변 사람들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 똑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씨

앗처럼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 싹으로 움터 자라 날것이다.


천불지산의 역사는 화전민이 개척해온 피눈물의 역사이며 천불지산 지명은 함경도 이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아로새겨 놓은 이름이다. 연변지명에서 이처럼 이주민들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어나는 지명이 과연 또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처럼 너무나도 쉽게 잃고 있거나 이미 까마

아득히 잃어버린 소중한 지명유산은 얼마나 될까 ... 지금 천불지산은 똑 마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

절을 흘러 보내고 담담해진 연로한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앉아 유유

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한테 다가가서 그의 진

실한 이름을 불러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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