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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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귀속
2008년 01월 29일 20시 57분  조회:3206  추천:33  작성자: 최균선

                                          바람의 귀속

 

시골 풍경

      

       시골에는 봄뜻이 여전하다. 산에는 진달래꽃, 시내가 버들 숲에 황금꾀꼬리 깊은 숲에 철늦은 뻐꾸기소리엄혹한 현실은 그 어떤 아름다운 동화로도 대체할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산향은 어디라없이 찌들려있다. 거창하고 비상한 사변들이 거쳐간 골마을들은 소외된 넋들뿐이다.한때 세외도원이라던 마래곡(马来谷)에도 이른바 개방의 수레바퀴가 굴러들어와 옛질서와 인습을 여지없이 짓뭉개버렸다.

    마을이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덕이밭에서 콩씨를 박아나 가던 정혜는 호미와 콩씨주머니를 팽개치고 밭머리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흥건한 땀을 씻고나니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흐릿한 눈길속에 손채양하고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정혜는 슬며시 머리를 돌려 밭이랑을 헤다가 팔베개하고 누웠다.

    넓고 푸른 하늘에서 흰구름산이 꽃궁궐을 짓다가 무너져 내리고 다시 들말같은 모양으로 변하여 토끼모양의 작은 구름덩이를 홀짝 삼켜버리고는 유유히 령을 넘어간다. 정혜의 머리속에는 문득 인간의 생활도 저 구름처럼 허황하고 변화다단하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아이, 이대로 영영 잠들어버렸으면) 아닌게 아니라 눈까풀이 사르르 감겨진다. 온갖 환영들이 떠오른다.

       급급히 잡아탄 택시에서 돌아보니 퍼그나 가까이 쫓아오고있는 오토바이우에 험상궂은 얼굴,《어마나, 저 새끼들이 아저씨, 빨리!》 애원에 찬 재촉 골목에 꺾어들자 굴러떨 어지듯이 차에서 내려 무작정 뛰여든 파마점, 황겁한 주인아줌마의 얼굴.

《아줌마 빨리 절 좀 숨겨줘요.

《아니?! 웬 일이니? , 오냐, 어서 저 옷장안에 들어가라.

옷장문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거의 같이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어떤 녀자가 금방 들어왔지?

목살갗을 떨게 하는 경칠의 목소리였다.

《녀자라니, 보면 모르겠소?

《제길, 막다른 골목에서 숨어들 곳이 이집밖에 없어. 괜히 경치지 말구 내놓으시오.

막되여먹은 삽살개다.

《야, 딸보, 저 옷장을 열어봐!

경칠이 명령에 딸보가 다가오는 거친 숨소리.

《자물쇠 여시오.

《이 사람들이, 국민당세상인가. 백주에 남의 영업집에 뛰여들어 무슨 행패요?

뒤미처 파마점아줌마가 전화거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시오. 신흥파출소 형사과입니까? 예 나 유림이 엄만데 그 앨 좀

《아니 죽고싶은가. 누굴 어쩔테야.

이웃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왜 무슨 일이우? 파출소를 부르며.

《제길 시끄럽군. 야 저기 나가 기다리자. 제깟것이 안나오구 배기는가 보자. !

한풀 기가 꺾인 목소리들이 문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바들바들 떨고있는 정혜를 안방에 밀어넣은 아줌마도 겁에 질려있다. 이튿날 새벽, 파마점아줌마가 정혜를 택시에 앉혀주고 차비까지 들이밀었다.

《집에 들아가. 다신 그런델 들어가지 말구. 에그 세상두 별랗지 원

시내를 벗어나서 모아산길을 올라서서야 정혜는 한숨을《호》 내쉬였다.

정혜는 지난해 연길에 들어갔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었다. 어머니가 장기간 몸져눕는 바람에 대학꿈이 깨여져 정혜는 집에 돌아와 한해 농사를 지었다. 처녀라고 생긴 계집애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할일없이 휘파람만 불며 어슬렁거리는 로총각들의 눈총에 몸살이 날지경이였다. 이 산골에 더 있어야 할 리유가 없었다. 돈벌어 더 공부하고싶었다. 정안되면 연길 어디서 벼슬한다는 낯짝 한번 못본 아버지와 해내려고도 작심했다. 엄마와는 비밀이였다. 그래서 작년 겨울이 잡아들자 연길로 나갔던것이다 .

정혜는 헛다리 짚었다. 아버지란 사람은 벼슬자리를 내놓고 하해바람에 종적을 감추었던것이다. 여기저기 식당으로 굴러다니다가 돈을 많이 준다는《밤불고기집》에 들어갔다. 알고보니 밤마다 오입쟁이들을 끌어들이는 매음굴이였다.

그날밤, 주인의《새끼》들에게 등을  밀려 뒤고방에 들어가니 점잖아보이는 한 중년사내가 술상에 앉아있었다. 사내는 100원짜리 두장을 꺼내 손에 쥐여주며 구슬렸다. 정혜가 딱 거절해버리자 억지공사는 않는다며 내보내주었다. 그런데 《새끼》들이 지키고 섰다가 기어이 《장사》를 하란다. 몸부림치는 정혜에게 주먹벼락이 내려졌다.

《쌍! 촌닭이 젠체하는구나. 이런델 들어오긴 왜 들어왔니? 썩 들어가지 못하겠니?

《아니, 이 사람들이?! 무슨 깡패행세요. 남이 싫다는데.

중년사내가 마침 나섰기에 망정이지 정혜는 곤죽이 될번 하였다.

《여보시오. 혀 깨물소리 말라구요. 기껏 위해주니까 흥, 별꼴 다 보겠네. 제밀.

개잡은 포수처럼 덤벼치는 딸보를 거들떠보지 않고 사내가 주인을 소리쳐 부른다.

《여, 석수 이리와!

《예. 한국장님, 무슨

《시끄러워. 괜히 왔어. 해두 좀 문명하게 하라구. 공연히 소문 더럽게 놓지말구. 정말 도깨비굴이라더니.

《저 계집애 써비스 소홀했던가요?

《그게 아니야. 농촌에서 왔다구 저 아가씨한테 망탕 굴지 말라구, 언제 또 올테니 명심해.

《예. . 너들 왜 서뿔리 굴었어?

석수가 《새끼》들에게 눈을 흘겼다.

이튿날 정혜는《새끼》들이 낮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줄행랑을 놓았다. 그 파마점아줌마가 하도 고마워 양어머니로 삼았다. 그때 얼마나 혼쌀이 났던지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악몽이 갈마들군 했다.

《싫어요. 싫어

낮꿈속에서도 팔을 허우적거리는 정혜를 한식경이나 지켜보고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열기띤 눈이 반쯤 열려있는 정혜의 무둑한 가슴을 쓸고있었다. 이윽고 청년은 얼굴을 슬며시 돌리고 호미와 콩자루를 집어들었다. 좀만 더 서있는다면 무슨 일을 저지르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계적으로 호미날을 박으며 콩씨를 두는 그의 헝클어진 마음밭에 추억의 이랑들이 번져갔다.

정혜는 워낙 그의 약혼녀와 다름없었다. 두집 부모들 사이에도 무언의 약속이 맺어져있었다. 정혜에게 있어서는 그가 미더운 오빠처럼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였고 그에게 있어서는 정혜가 옹근 삶의 꿈이였다. 소꿉동무이자 대학까지 함께 가서 행복을 꽃피우려던 사치스러운 랑만이 지금은 정혜의 배신으로 깨여졌지만 그녀 없이는 못살것같은 이 세상이였다.

정혜가 이렇다 할 리유도 없이 뿌리깊은 시골의 사랑을 찢어버리고 유혹의 세계에로 날아가버리자 그는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무지막지한 청년이였다면 정혜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것이다. 고중생이고 인정사정 아는 그인지라 시대의 조류에 몸맡기는 정혜를 잡아둘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방금전에 눈뿌리가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잠든 천사에게 본능의 발설을 기도해보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를 이겨내고야 말았다. 점유로 곧 끝나버리는 사랑을 그는 원치 않았다. 시골의 사랑을 도회지사람들은 우습게 알고있지만 그에게도 인격이 있었고 사내의 기풍이 헌헌했다. (하긴 정혜는 농촌아낙네가 되기엔 너무 아까운 녀자야) 그는 늘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원래 정혜때문에 대학도 포기했던것이다. 하건만 야속한 정혜는 날아가버렸다. 정혜가 없는 마을은 하나의 페허였다. 하여 대동골방목장에 들어가《도》를 닦고 부엉이 우는 한밤에 피리불며 토한 한숨인들 얼마였던가. 허약한 아버지만 아니래도 그는 산해관을 넘어 세상을 두루 편답했을것이다.

정혜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서 몸은 왔지만 마음은 시내에 두고왔다는것을 슬프게 읽어냈다. 억지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사랑이였다.

악몽에서 깨여난 정혜의 초점 잃은 눈에 콩을 박고있는 진국이의 커다란 허우대가 안겨왔다. 가까이 다가간 정혜는 난삽한 마음을 보듬으며 말을 걸었다.

《어쩜 또 밭갈이 해준것만두 고마운데 아이 내가 웬 낮잠을 깜박

《그래 퍽 고달팠던 모양이더라. 내가 끝내줄게 내려가봐. 늬 엄마에게 약을 달여드릴 때가 됐지 않니?

《아니 내 할께, 미안해서

그러고 섰는 정혜를 진국이는 차디차게 일별했다. 시내에 들어가기전까지만 해도 고중다닐 때처럼 터놓고 반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와서 공연히 거리를 두고 말하는게 아니꼬왔다.

정혜가 사춘기때 진국에게 소녀의 야릇한 순정을 얹어본것도 사실이였고 고중을 다닐 때 얼굴이 하얀 남자애들의 지꿎은 추구를 물리치고 억세고 듬직한 진국이만을 마음에 둔것도 사실이였다. 그런데 정혜의 첫사랑의 고운 꿈은 호미날에 찍힌 풀처럼 시들해졌다.

진국이를 떠나있는 동안 늘 죄지은듯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다. 우악진 그 주먹으로 피터지게 박고 강다짐을 할 진국이가 아니였기에 더구나 그랬다. 수걱수걱 호미질만 하는 진국 이의 떡판같은 등허리를 굽어보며 정혜는 속으로 부르짖었다.(진국아, 진국아! 우린 왜 이 시골에 태줄을 묻었니?  네가 대학에만 갔더래도 아니야. 그땐 또 내가 울거야. 아무래

도 우린 연분이 없는거야, 용서해.

진국이가 기어이 호미를 넘겨주지 않는바람에 정혜는 먼저 산길을 내리였다.

 

사랑의 뿌리는 쓰다

 

《얘, 너 방목장에서 오는 길이냐? 아까 볼라니까 정혜가 혼자 그 넓은 밭에서 콩을 박더구나, 그 불쌍한것이

《예, 근심마세요. 싹 끝내주고 오는 길입니다.

《음, 거 잘했구나. 인심이 천심이네라. 그래 걔가 영 안간다더냐? 늬들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해서 쓰겠니? 말이라두 떼놓아야 할텐데.

《참 당신두, 정혜가 진국이때메 돌아온줄 아나베. 무슨 딴 사정이 있을거래유. 지금 농촌처녀애들이 풀밭에 머리 틀어박자구한답데.

《이건 되는 호박에 송곳질 아녀? 저리 비키라구. 사내들 일에 공연히.

《엄마말이 맞습니다.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몰라요. 이 산골구석에선 홀애비 늙어죽은 귀신밖에 더 될게 있나유. 아버지, 저두 조만간에 세상구경 떠날가 합니다. 에익, 워낙 다시 시험쳐야 했던건데 때되면 소를 몇마리 팔아주시오.

《그래 애초에 대학못간건 네탓이구, 널 이 산골에 잡아두려구 한건 내 오산이였다. 이제 네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할수 있겠니?

《다른 애들은 다 청도요, 위해요 하면서 뛰는데 내라구 누구보담 짝질줄 압니까? 아버지가 고집쓰기에 주저앉았을뿐인데요.

《그래 알았다. 너가 이 골짜기에서 늙는걸 보지 않겠다. 후유

덕준이는 퇴마루에 걸터앉아 애꿎은 담배를 태우며 밭고랑처럼 홈이 패인 정혜네 지붕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추억이 얼기설기 엉켜돌았다.

진국이와 정혜의 가연은 끊어졌지만 원래 사랑의 쓴 뿌리는 덕준이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있었다. 시골의 숙명적인 사랑이라 할지, 덕준이도 한창때 정혜의 에미혜월이를 뜨겁게 사랑했었다. 허나 그 사랑의 뿌리는 가지도 뻗지 못하고 삭아버렸다.

덕준이 가슴에 안길듯싶던 혜월이가 그때 집체호로 내려왔던 멀쑥하게 생긴 한정군의 여윈 가슴에 안겨든것이다. 참하고 곱게 생긴 혜월이여서 정군이도 첫눈에 반해버렸던것이다. 한창 비판투쟁받던 국장아버지때문에 늘 기가 죽어다니던 정군에게 있어서 혜월이의 품은 사랑의 오아시스였다. 다른 애들이 륙속 시내로 올라갈 때 정군이는 완전히 실망해버리고 이 산골에서 혜월이와 아들딸 줄느런히 낳고 한평생 살리라 마음먹었다. 그들이 한창 초련의 단꿈에 빠져있을 때 덕준이는 뒤집의 순녀에게 장가들어버렸다. 진국이가 나던해 정군이도 새살림을 차렸다. 이듬해 딸을 낳자 두사람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이름을 정혜라고 지었다. 그들은 덕준이가 시샘할만큼 아기자기하게 살았다.

그러나 덕준이는 정군이가 평생 이 마래곡의 귀신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언녕 보아냈다. 다만 혜월이만 그점을 보아내지 못하였다. 아니나다를가 정혜가 돐을 잡던 그해 정군의 아버지가 해방받고 다시 국장이 되였다. 정군이도 대학추천 명단에 들었다. 그런데 결혼한것이 걸렸다. 정군의 장래를 위해 혜월은 협의리혼에 동의하였다.

정군이는 마래곡을 떠났다. 대학을 마치고 곧 혜월이를 데려간다고 눈물로 맹세하던 정군이는 시내에서 직장다니는 예쁜 처녀와 결혼하였다. 혜월이가 정혜를 업고가서 죽는다산다해도 워낙 독종이였던 한정군은 돌아서지 않았다. 혜월이의 고달픈 인생행로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두집 부모사이에 가슴 저린 사연이 있었건만 애들만은 잘도 어울려 자랐다. 혜월이 처녀때를 련상시키는 정혜를 볼 때마다 덕준이는 아버지같은 마음으로 귀여워했다. 이루지 못한 자기의 첫사랑의 슬픈 여운을 아들에게 얹어보려는 욕심도 굳어졌다. 자책감에서였던지 아니면 그동안 덕준이의 말없는 도움에 대한 감사의 정때문인지 혜월이도 그것을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세월은 또 한번 덕준이를 우롱했다. 가난때문에 혜월이를 잃었었지만 가난때문에 또 정혜까지 잃게 하고싶진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살림을 윤택하게 꾸렸다. 첫호로 덩실한 벽돌기와집도 지어놓았고 신용사에 저금액도 부쩍 늘이였다. 그러나 진국의 보금자리에 정혜는 깃들려하지 않았다.

덕준이가 쓰디쓴 사랑의 뿌리를 어루더듬고있을 때 진국이도 밤이 깊도록 달빛 부서지는 두만강가에서 간장을 후벼대는 피리를 입술이 부르트도록 불고 또 불었다. 개혁바람은 이 산골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고 살게 하였다. 그대신 처녀들을 싹 쓸어가버렸다.

피리소리는 열려진 정혜네 창문으로 지꿎게 새여들었다. 혜월이는 그 피리소리에 귀를 강구며 남모를 한숨을 지었다.

《엄마, 정말 아버지사진 한장도 없나요? 꼭 찾아내겠어요.

《그따위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타일렀니? 사진같은 소릴 다 하구있구나. 태워버린지 석삼년이다.

《엄마, 리해해요. 허지만 잎은 뿌리에 떨어진다지 않아요? 암튼 친아버지가 아닙니까?

《에구, 언제 껍쩍 죽을란지 네나 마땅한 배필을 뭇는걸 보구 죽어야 하는데

《엄만 왜 자꾸 그런 불길한 말만 하나요. 이제 제가 아들맞잡이로 엄말 복누리게 할테야.

《이것아, 옛말같은 소리면 듣기나 좋지, 진국이같은 애나 사위 삼으면 팔자가 펴일지. 에그, 그 물건짝은 어디 가서 급살이나 맞지

혜월이의 마음에 배반의 쓰라림은 잔인한 복수의 칼날이 되여 늘 곤두서있었다. 특히 경제난으로 고중을 중도이페한 딸을 볼 때마다 눈에 불이 일었다. 정군이의 우롱을 겪은후 청상 과부로 늙어가는 혜월이는 성미가 까다로워졌고 그만큼 정혜에 대한 감시의 가시도 성해졌다. 헛웃음 한번 흘려도 큰일 날 일이다. 그러나 진국에게만은 각별했다. 그리고 늘 하는 말이 나귀가 나귀를 긁어준다는 속담이다.

《엄마, 나 암만해도 다시 시내에 들어가 출로를 찾아야 겠어요.

《시내에서 네 출로를 열어놓구 있다더냐? 애두 너 정말 진국이와 그만두었니? 이 세상에 믿음직한건 그래도 박우물을 마시고 사는 골사람들이니라.

딴청을 부리는 엄마에게 정혜는 신경이 탈렸다.

《엄마, 엄마속을 제가 모르는줄 아나요. 덕준아저씨에게 진 감정빚을 저더러 갚으라나요? 엄마두 그에게 시집갔더면 진국이가 아들이 됐을런지 아나요.

《이년아,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니같은 촌계집애들이 시내에 들어간들 뾰족한 수가 있을듯싶으냐? 명앨 봐라, 기껏해 몸팔고 살지.

《엄만 절 믿어요. 이제 보란듯 잘되지 않나봐요. 그때 엄말 시내로 모셔갈게 응.

《야야, 바람 잦은데 흔들리지 않을 가지가 있더냐? 유리 그릇과 녀자는 나돌면 깨지는 법이여.

《그럼 난 어째요?

《에그 나두 모르겠다. 다 잘난 네 애비탓이지 뭐냐?》

혜월이는 구들장이 꺼지도록 한숨을 톺으며 돌아누웠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딸을 산골에 잡아두자니 자기처럼 될것이고 다른 집 계집애들처럼 굴레벗은 말을 만들자니 겁두 났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진국이가 미덥지만 딸년의 마음이 변해있다. 덕준이네가 살림이 오목하니 정혜가 들어가면 근심걱정없이 살것은 뻔한데 시대는 또 다르게 유혹한다. 이래저래 정군이가 이갈리게 미웠다.

딸년의 말이 옳기도 하다. 설음많은 과부살림 20여년, 덕준에게서 음으로 양으로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던가. 감정빚도 없는게 아니다. 때론 가만가만 가슴을 끓여도 보았다. 허나 이제는 고마움뿐이다.

정혜는 때이르게 마르기 시작한 엄마의 앙상한 등에 얼굴을 대고 소리없이 눈물을 삼켰다.

《엄마, 정혜가 심청이 되여줄게요

 

인격은 어둠속에 있었다

 

모든것이 흘러간다. 쏟아져내리는 별무리도, 흐릿한 달빛도 강가에 거꾸로 뛰여든 백바위도 물결따라 흘러만 간다. 산중턱 어느 곳에서 백년고독을 울고있는 부엉이울음소리도 바람따라 흘러간다.

진국이는 또 담배를 붙여물었다. 담배에 암을 초래하는 물질이 백가지가 있다해도 피워야만 하는 진국이다. 입안이 소태같이 쓰겁다. 굴뚝처럼 내뿜는 담배연기속에 다하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이 재가 되여 날린다.

자갈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국이는 담배불을 껐다.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첫사랑에 달아오른 입술을 정혜의 말랑말랑한 입에 어줍게 대일 때처럼 격정과 도취속에 뛰던 그 심정은 아니였다.
   
《에익 망할것!》 진국이는 제손을 비틀었다.

《어머, 벌써 나왔네요. 왜 오늘은 피리를 불지 않나요?

《내 피리소리 들어줄 사람은 이미 죽었다구.

진국이의 부르튼 대답에 정혜는 가슴이 꿈틀거렸다. 침묵, 가만히 삼키는 한숨소리, 기슭을 치며 지졸지졸 굴러가는 물소리뿐, 진국이의 가슴이 거세게 부푼다. 어떤 내심의 발작에 미칠것 같았다.

《왜 왔어? 널 저 두만강에 처넣으면 어쩔테냐?

《미안해.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넘겨버릴 일이 아닌줄 알아. 각오하고 왔어. 거기 싫어서가 아니야. 난 이 산골이 싫어. 이 어둠과 적막과 부엉이 울음소리도 싫어졌어. 우리 처녀애들이 다 갖게된 시대병일지 몰라. 내가 나쁜 녀자인줄 알구있어.

《다 말했니?

달이 구름속에 숨어버렸다. 이 한적한 강가에서 이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겁나서 지레 숨어버리는건가. 어둠속에서 눈길과 눈길이 묻고 회피하고 애원하고 거부하고있었다. 그속에 얼마나 많은 낱말과 헝클어진 문법이 포함되여있는가는 그들만이 알노릇이다.

《오늘 많은것 각오하고 나왔어. 두들겨 맞을것두, 욕을 먹을것두, 그리구그렇게라두 빚을 갚구싶어. 때려요. 분을 풀어요. 그리구 날 해방해줘. 그래야 내 마음도 평형을 찾을것 같아.

정혜가 이렇게까지 나올줄 몰랐다. 진국이는 억이막혔다.

《뭐? 해방?! 하하하. 내 언제 너를 속박했니?

《에익, 모두 콱 잘살아봐라. 망할것. 시내놈에겐 돈푼이나 받고 떡호박을 주물리우듯해도 좋아하면서 왜 한우물 마시고 자란 고향사내들에겐 그리두 린색한거니? 원통하다, 원통해!

《사랑이 어디 동정의 닭알에서 깨여나오는 병아리니? 처녀들을 나무랄것두 없어. 우리 다투어봤대야 해결될것은 없잖아? 이제 돈을 벌면 신세두 꼭 갚을게, 엄마두 말했어.

《갚는다구? 사랑을 값매길수 있어? 냉큼 사라져, 보기두 싫다.

진국이의 눈에서 불이 뚝뚝 흘렀다. 주먹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응, 죽여봐, 난 각오했으니까. 날 차지해봐. 이렇게라두 너의 용서를 받구 가볍게 떠나구싶어. 어서요. 그러면 원한도 풀릴게 아니야?

바투 디미는 가시나의 높은 가슴이 가슴에 닿자 진국이는 아찔해났다. 정혜가 이렇게 모질게 비틀어져있을줄은 생각지 못했다.

《뭐라구? 날 어떻게 보는거야? 네가 언제 이렇게 야하게 변했니?

《흐흑 그럼 난 어쩌라구? 내가 처녀로서 이런 말까지 할 때 내 마음이 어떤지 몰라?

정혜는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진국이의 푸들치는 팔이 정혜의 나긋한 허리를 뒤로 꺾었다. 이제 각을 뜯든 육장을 만들든 마음대로 하라는듯 탄성을 잃은 정혜의 몸이 풀밭에 축 늘어졌다. 가슴에 커다란 무덤이 불쑥 솟는다.

《가져요. 이 한번으로 모든것 깨끗이 청산해!

그녀는 지금 자기가 무척 황당한 짓을 기다린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일만 잔나비가 그네를 뛰였다. 때아닌 서북풍이 불어치며 꽃잎과 먼지가 흩날린다. 이제 뜻하지 않게 처녀의 첫꽃이 이지러지고 망가져버릴것이다. 진국이의 각일각 거칠어지는 숨결이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언젠가는 그렇게 고이 지켜온 처녀를 이 남자에게 활짝 열어주고 사랑의 단꿀 마음껏 쏟아주며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리라 수줍게 꿈꾸었던 정혜이기도 했다.

정혜의 꼭 감겨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의미를 진국이는 피부로 느껴 알고있다. 그 눈물은 사랑에 겨워 흘러나오는 감정의 장식품도, 사랑의 씨앗을 움틔우려는 마음의 단비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심기불편에서 오는 열물이였다. 불타는 정염에서가 아니라 지어먹은 마음을 취하는 자세다. 이러한 녀자의 몸에서 구경 얼마만한 환락과 신비를 맛볼수 있을것인가?

이밤, 손만 뻗치면 모든것을 내맡긴 녀자의 육체에서 주린 숫총각의 화산같은 욕정을 분출시킬수 있다. 무서운 불길이 발바닥에서부터 머리우까지 치솟는것도 사실이다. 젖빛안개속에 우렷이 솟는 한왕산처럼 신비하고 숭엄해보이던 그 젖무덤도, 비밀스러운 처녀림도 지척에 있다. 신체의 어느 부위가 뜨거워난다.

정혜의 입술우에 빨간 피방울이 떨어졌다.《아아! 아니다. 이것은 그렇게 바라던 사랑의 절경이 아니다. 이는 강간과 다를바없는 너절한 짓이다. 생명으로 사랑했던 정혜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그것이다.》 진국이의 입술에서 더 큰 피방울이 떨어졌다. 그렇게 한식경 미동도 않고있던 진국이는 조금은 세괃게, 그러면서도 부드러움 넘치게 정혜를 안아일으겼다.

《정혜야, 고맙다. 집에 돌아가. 얼른. 내 야성이 다시 광란하기전에. 다신 내앞에 나타나지마. 그땐 죽여치울거야

말은 흐느낌속에 삼켜졌다.

정혜는 무서운 그 순간이 이렇게 슴슴한 결과를 가져온데 대해 놀랐다.(아, 진국아, 진국아. 너는 진짜 바보스런 사내구나, 잊지 않을게

정혜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길옆에 사시나무의 여린잎이 바르르 떨고있다. 저 멀리 높이 솟은 한왕산이 달빛속에 묵묵히 천년한을 새기고있다. 미련때문에 뒤돌아선 리별의 이 순간, 진국이의 눈물고인 커다란 눈에 안겨드는것은 곡선미가 뚜렷한 정혜의 뒤모습뿐이다.

유치원때의 죽마고우, 10리 고개길을 넘어다니던 향소학교, 중학교 때의 다정하기도 했던 그림자, 고중시절, 성숙이 가져다준 점직한 그속에서 동경의 무지개를 서로의 가슴에 박던 그때에도 한번 흐트러질세라 아끼던 녀자, 참으로 정혜는 진국이의 마음의 뒤뜨락에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내린 생명의 꽃나무였다. 그 꽃나무에 사랑의 단열매가 주렁질줄 알았던 그날이 이렇게 뼈아픈 추억으로만 굳어지게 되다니 통분하였다.

《매정한 정혜야, 무엇때문이냐? 무엇때문이냐? 하늘아, 산아, 두만강아 말해주렴.

 

뒤골목 설음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북대촌골목길에 비틀거리는 두그림자, 서로 끌고 부축하며 힘겹게 움직이고있다.

《얘, 너 이렇게 흙이 되게 마실건 뭐니?

《차라리 취해서 죽었으면 좋겠다. 오늘 류치장에서 풀려나 왔으니 맘껏 축하해야지. 개새끼같은것들.

애릿한 녀자들의 목소리건만 술내가 확확 풍겼다.

《얘, 저기 어떤게 아까부터 따라온다. 무서워. 빨리 걸어라.

《흥 무섭긴, 기껏해서 암내 맡은 덜렁수캐겠지. 난 겁나지 않아. 삽살개구 미친개구 황둥개구 재래종이구 다 홀려봤어. 별게 아니야. 훌 주고나면 한푼값도 안가는게야. 흘레하는 수캐들은 짖기는 해도 물어죽이진 않아.

《야 듣기싫다. 낯도 뜨겁지 않니?

두그림자는 마침내 어떤 낮다란 사랑채로 들어갔다. 불이 켜졌다.

《아이 더워.

랭수를 벌컥벌컥 들이킨 명애는 알몸인채로 이불우에 네 활개를 뻗고 누웠다.

《아이그 망칙해.

《야야, 이게 진짜 인간의 모습인걸. 엄마가 준 자연미구. 사내새끼들이 게침을 흘리게하는 내 밑천이구

꺼이꺼이 울던 명애는 잠들어버렸다. 명애에게 요를 가리워 주던 정혜는 명애의 라신에 눈이 굳어져버렸다. 두번째로 류치장 맛을 보름이나 보고 3천원을 벌금해서야 놓여나온 명애의 멍든 얼굴은 초췌하였다.

그러나 몸뚱아리는 같은 녀자로서도 탐낼만큼 성감적이다. 말간 우유빛을 발산하고 있는 고운 살결, 부풀어야 할곳은 보기 좋게 부풀고 패여들곳은 적당히 패여있다. 때이르게 시들해지고 뜸자리같은것들이 아프게 눈을 찌르는 젖무덤, 언젠가는 귀여운 아가에게 미소와 함께 물려주어야 할 꽃망울같은 젖꼭지 하나가 망가져있었다. 어떤 악착한 놈팽이가 백원 한장에 담배불로 지져놓는 지랄병을 하다가 광기가 치밀었던지 개처럼 젖꼭지를 물어뗐던것이다. 그래도 그 돈을 받아챙겼다는 명애가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명애의 가슴우에서 롱탕치며 킬킬대는 징글맞은 낯짝들이 환영처럼 스쳐지났다. 류치장에 갇힌 명애를 모르는체하고 으르딱딱거리더라는 경복의 중년사내며 무슨 과장이요 처장이요 하는 얼간이 쾌락주의자들, 낮이면 언제 그랬냐듯이 점잖을 빼며 다니고 텔레비죤화면에 나앉아 빈소리 탕탕 쳐대는 위군자나으리들 정혜는 제풀에 왈칵 메스꺼움이 치밀었다.

명애는 그것을 일종의 보복이라고 말한다. 돈도 빨아내고 권세자들과 침대우의 평등을 누린단다. 그저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이다. 국고에서 후무려낸 돈이든 사기쳐서 번돈이든 관계할게 없다. 수컷과 암컷만인 뒤골목의 흘레에서 유일하게 진실로 남는건 돈이다. 피에 얼룩지고 땀에 더러워진 그 돈을 위해 제육신을 만신창이 되게 학대하는 가증하고 불쌍한 자기들이란다. 이제 돈을 벌면 집사놓고 정든 남편도 얻어 깨끗이 살겠단다. 녀자의 수치와 원한과 증오도 있지만 방법이 없다. 누가 가슴아프게 생각해주는가. 동물속에서는 동물로 뒹구는게 마음편하단다.

이 시내판엔 촌녀자애들을 그저 비게덩이로 안다. 아무 재간이 없으면 이 노릇을 하는게 그래도 수지가 맞는다. 어떤 땐 못된 버러지같은 새끼들이 녀자가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제가 쥐여주었던 돈마저 톡톡 털어가지고 꺼져버린다. 가슴이 터질노릇이다. 아무튼 한번 내준뒤에는 별로 값가지도 않는 케케묵은 정조관념을 가지고는 이 살판치는 세상에 살기 바쁘다. 누구들의 입버릇마따나 관건은 관념을 갱신하고 사상을 크게 해방하는것이다. 꽁꽁 지켜온것들을 어느 땅벌레에게 바쳐봤대야 장래성 없는 새끼나 생기고 풀밭의 귀신이나 되고 이것이 명애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정혜에게 불어넣은 살아가는 술법이였다.

정혜는 정혜대로 《대세계나이트클럽》에 춤아가씨로 다니면서 알게 되고 제법 친해진 점잖은 중년사내에게 열중하고있었다. 그 사내로 말하면 우연적이였겠지만 정혜에게는 숙명같기도 한 만남이였다.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왔고 올 때마다 꼭꼭 정혜를 점찍는 그 남자는 한창 중년사내의 풍채를 내고있었다. 멋대가리없이 우쭐대는 코흘리개들보다 거동이 우아했고 팁도 잘 주고 얘기도 폭폭 엎어지도록 운치있고 유모아적이다.

요즈음 정혜는 사내의 속을 뽑아내고있는중이다. 정말 확신이 서면 일생을 기탁할 작정이다. 이 남자 저 남자의 어지러운 품에서 유격전을 하기보다 그쪽이 퍽 안전도가 높다고 단정했던것이다. 이제 그 남자가 요구해나서면 모든것을 내여줄 마음준비도 되여있다.

어느날, 사내는 정혜를 싣고 시골《오락성》으로 갔다. 취할만큼 맥주도 마셨는지라 그녀는 어떻게 알몸이 되여 침대에 누웠는지 몰랐다. 자기의 라신도 숨기고싶지 않았다.

조금 팽팽해진 긴장도 사내의 능란한 애무에 녹초가 되여졌다. 마침내 그녀의 신음소리에 박자나 맞추듯 든든한 쇠침대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늘 도고해 다니던 돈많은 중년사내와 평등이 이루어지고있다.

탁상등이 켜졌다.

《이거 정말 기적인걸. 너 정말 동정녀였구나!

사내는 다시 정혜를 삼켜버릴듯 끌어안는다. 명애를 경멸했던 그 자신이 오히려 열에 달뜨는것이 이상하다. 한없이 부드러운 진공과 압박속에 무겁게 가라앉는듯도 하고 몽롱한 구름에 실려가듯 동동 뜨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치사하고 힘들어보이던 일이 이리도 쉽게 이루어지는것이 놀라울뿐이다.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진행되고있는 일을 두고 왜 죽는다 산다했던지 모르겠다. 그토록 복잡한 형식과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괜히 성스러운체하는 사람들이 우습지 않은가. 부부간에 하는 그짓도 이와 다를바가 없으련만 사람들은 왜 매음이요 음란이요 하면서 타매하는걸가.

그들은 밀월을 보내는 진짜부부처럼 날이 새가는줄 몰랐다. 사내는 제정신이 아니게 탐닉해왔다.

《제가 그렇게 좋나요? 삼켜버릴가봐 무서워. 나 이속에 쏙 들어가버렸으면.

정혜는 정말 그러고싶었다.  아버지사랑이 어떤것인지 모르고 자란 정혜는 다른 애들이 아버지품에서 응석부리는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녀자애들은 처음 아는 남자가 제 아버지이다. 정혜는 사내에게서 부애도 느꼈다.

제친구들이 중학을 마치고 유혹의 호화세계에 뛰여들어 녀자의 그 우세를 디밀고 인생의 도박을 놀 때 정혜는 어머니의 단속속에 들장미처럼 커왔다. 이 남자에게서 그녀는 아버지 사랑을, 남자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고싶었다. 뜨내기 사내애들에게서 도저히 느껴보지 못한 그런 왕성한 정력과 관용과 포옹력이 이 사내에게서 넘치고있었다.

사내도 정혜를 죽을판살판 모르고 안고 돌았다. 동정녀의 그 여린 촉감도 좋았지만 막되게 놀지 않아서 안심이 갔다.

《얘, 너 정말 제법이다. 훈련이나 받은것처럼말이다. 내가 이제 너에게 빠져죽을라나봐, 허허

《그런말 싫어! 으응 첫남자니까 정성을 쏟는거 아녀요.

만약 침대가 알고있는 그 모든것을 말한다면 그들도 얼굴이 뜨겁게 붉어지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절 버리면 안되요. ? 아버지같고 큰오빠같고 남편같은 그런 사랑을 독차지하고싶어요.

《그래 오냐. 너만 사랑해주지. 너도 내게만 충성하구.

《저도 거기가 하늘만큼 좋아요. 나의 사장니임, 늘 기쁘게 해드릴께 응, 우리 결혼하자요.

《정말이니? 내가 곧 늙어지면 어쩔래? 너 돈 탐내고 그러지?

《아뇨. 내 영원한 보금자리는 여기에

정혜는 사내의 푸들진 가슴에 파고들며 캐득거렸다.

《너 고중 중퇴했다며? 좀더 무언가 배운후 청도에 가서 결혼하자. 어때?

《아이 좋아. 내 꿈이 끝내 실현되였네요, 사랑해. 이렇게 울면서 사랑할테야. 나 아빠트 사주죠? ?

《음 사주구말구. 그대신 망탕 놀아댔다간 없어. 알겠니?

《나 곧 사장님부인이 될텐데 또 누굴 넘보겠어요. 믿어요. 안심해요.

《참 너 진짜 초향이니? 집은 어데구말이야. 자주 어데서 본 얼굴이야.

《집은 오상이구 이름은 정말 초향이야요.

《너 아버지가 알면 어쩌지?

《울아버진 일찍 죽었어요. 집사면 나 엄마 모셔올테야. ? 되지요?

《그래 널 초향이라구 믿어두자. 근데 너네 엄마문제는 좀 두고보자.

《당신 없을 때 외로와 죽을거야.

《요것이 사람 싹 죽여주네!

《사랑해. 나의 사장님. 절 이렇게 이렇게 품어줘요. 저 하늘끝까지 안고가요 응?

《그래 눈물겨운 너의 사랑에 나두 청춘을 되찾은것 같구나. 하하하

 

그 남자였다

 

정혜는 유한마담이 되였다. 연집강기슭에 아빠트도 사놓았고 장식도 궁궐같이 해놓았다. 이제 엄마만 모셔오면 된다. 명애가 심술이 날만큼 정혜는 잘된셈이다. 명애가 자주 와서 밤동무해주었다.

《정혜, , 기적이 나타났지뭐야.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아니?

《또 돈많은 한국령감쟁이겠지?

《틀렸어. 무덤에 들어갈 때도 못잊는다는 첫사랑, 너의 그 첫님을 만났단말이야. 아유 깜짝 놀랐지뭐니, 어쩜

?!

《어제 글쎄 진국일 봤지뭐야. 처음엔 몰라봤다야. 고급세비로에 넥타이까지 척 매구 촌때 쭉 벗었더라. 얼매나 의젓하다구. 홀딱 반했어. 히히 온하루 그애와 춤을 췄지뭐니? 정말 멋졌어!

《그가?!

《청도 한국기업에서 잘있는 모양이더라. 이번에 회사일루 연변왔대. 그리구 누구의 부탁도 맡구왔대. 너 만나면 가슴이 쓰릴거다. 돈두 잘 번다는것 같더라.

《난 이미 끝나버린 일에 마음 쓰고싶지 않아. 길은 이미 갈라졌어.

《얘. 그만둬. 시골서 소몰던 그때 진국이가 아니더라구. , 그앤 널 못잊어하더라. 눈물이 글썽해서 자꾸 네가 어데 있는가 캐여묻지 않겠나, 나 원 딱해서.

《그래 말했니?

《아니 그가 알면 기절하라구 말하겠니? 그가 그렇게 될줄 알았더면

《잘했어. 넌 좋은 친구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오늘 양엄마한테 가서 머리할가? 함께 안갈란?

《음. 그래. 나도 곱게 화장하고 새신랑 나꿔봐야지. 호호

정혜가 화장대앞에서 바삐 돌고있는데 느닷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얘. 명애 내다보구 문열어. 공연히 나쁜놈이면 어째.

《누구세요?

《이집 초향이라는 아가씨댁 맞지요?

귀익은 목소리에 명애가 혀를 홀랑 내밀었다.

《야, 진국이다. 어떻게 알구 왔을가? 참 바늘가는데 실이 간다더니.

《괴상한데? 네가? 문열어주지말구 사람없다구 해, 얼른.

《집에 아무도 없어요. 무슨 용건인데 이렇게

《문을 열어주시오.중요한 부탁받고 왔으니까요. 안그러면 여기 그냥 두구 가렵니다. 어쩌겠습니까?

정혜가 침실로 뛰여들며 눈짓했다.

《어머머 귀신곡하겠네 어찌 알구 곧장 찾아와?

《야하, 이거 진짜 극적인데. 명애야 네가 초향이로 둔갑했니? 우리 그 한사장이 말하던?

《무슨 소리야? 난 난 응 그래, 나의 친구가 초향이구 난 그저 놀러왔지뭐니.

《그래? 뭐 강탈하러 온것두 아닌데 당황해하긴? 그래 주인아가씨는?

《교회에 나갔어. 그래 무슨 부탁이니? 너 무슨 냄새맡구 온게 아니야?

《무슨 싱거운 소리냐? 하느님의 착실한 신도이구먼그래. 이거 유감인걸. 한사장이 침마르게 칭찬하길래 초향아씨의 존안이나 한번 뵙구가려했는데한끼 대접두 톡톡히 받구 말이야.

《딱 만날래? 나 불러올가?

명애는 갑자기 어떤 못된 장난이 생각났다. 또 한번 인생극을 보고싶었다.

《아니, 아니야. 여기 트렁크에 명패 옷이랑 돈이랑 들어있다더구나. 이번에 올려구 했는데 심수로 간다더구나. 전해줘. 그럼 난 간다.

진국이가 텅텅거리며 층계를 내리자 명애는 한숨을 활 쉬였다.

《아이구 혼났다야. 인생은 정말 연극이구나. 아니?! 너 낯색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좀 점직해졌을뿐이야. 암튼 오늘 기분 안좋아.

《그. 그럼 너혼자 가슴앓이나 해봐. 난 갈란다. 약속있으니까.

그날밤, 정혜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 사내가 동정녀라구 뛸뜻이 기뻐할 때 정혜는 자기의 처녀를 고스란히 남겨준 진국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마음이 어쩐지 안스러워졌다 며칠후 정혜는 명애를 불렀다. 진국이를 또 만났다는 명애의 얘기를 중동무이해버리고 양어머니네 집에 함께 갔다. 점심을 거기서 먹고 앉았을 때 명애가 불쑥 생뚱같은 말을 꺼냈다.

《아줌만 지금도 새각시같네요. 한창때엔 정말 사람을 죽여주었겠어요.

《뭐 볼데가 있다구. 안그러면 그 사람이

《양어머니 옛날 사진 좀 보여줘요. 무슨 비밀도 아닌데유.

《옛날 일은 생각하기싫어 그래.

정혜마저 조르는 바람에 정혜의 양어머니경희는 마지못해 낡은 사진첩을 궤밑에서 꺼내주었다. 명애가 제꺽 받아펼쳤다.

《어마나. 정말 희한하군요. 흑백인데두. 그런데 왜 집에 그분의 사진은 한장두 없나유?

《함께 찍은건 다 불살랐지. 보면 복통이 터져서 견디겠더냐?

《아이 이건 결혼사진이군요. 왜 엎어끼웠나요?

《없앨가하다가 일생기념이구해서 그냥 둔건데 애들두 별걸 다

《와아대단한 미남이네요. , 무척 랑만적이였겠는데 왜 갈라졌나요?

《할말은 아니다만 잘나구 믿음성이 있는 남자란 드물더라. 개방세월이 되자 어찌나 나도는지 입에 신물난다. 그런 바람둥인 처음 본다.

《인물값 하나보지요. 아이 아까와라.

《비단보에 개똥인걸 뭘 아까와? 글쎄 총각인줄 알구 시집갔더니 웬 녀자가 애기까지 업구와서 시악질하지 않겠니? 내 원 기막혀서

《그 녀자 누구게요?!

《집체호에 있을 때 결혼한 안해였단다. 대학갈 때 리혼하구는 나와 잔치했지뭐냐 글쎄. 마래곡인지 하는 산골의 그 녀자 정말 안됐더라. 애두 귀엽던데

그때까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 머리만 떨구고 앉았던 정혜가 덴겁한 소리를 질렀다.

《마이라구요?!

《아니. 너 그 사람 아니?

경희의 당혹한 눈길에 정혜는 외면하더니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뒤미처《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정혜가 기절해버렸다.

《아니 정혜! 이 애가 어쩐일이니?

사태를 짐작한 명애는 속이 바질바질 탔다.

《아, 아주머니 요즈음 이 애가 그럴일 좀 생겼어요. 곧 괜찮을거예요.

명애가 정혜의 인중를 꽉 눌렀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정혜는 깨여났다.

《명애 날 집에 데려다줘.

그러고는 다시 까무라쳤다. 사유가 멈춰서고 모든 감각기관이 꽉 메였던것이다. 명애는 정혜가 불쌍해졌다. 불행은 비로소 따스한 인간애를 불러일으킨것이다.

집에 이르자 깨여난 정혜는 그제야 제머리칼을 잡아뜯으며 피터지게 울었다. 그 어떤 위안도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에는 위안이 있을지 모르나 부끄러움에는 위안이 없는법이다.

《정혜! 절대 나쁜 맘 먹어서는 안돼. 우리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자. 너 양엄마와도 잘 말해둘게. 그리구 우리 아무도 모르는 남방으로 날아가버리자 응.

《명애 넌 내 영원한 벗이다. 고마워. 지금은 혼자 있게 해줘. 제발 빈다.

《아니야. 널 혼자 내버려둘수 없어. 나 여기서 며칠 자겠다.

《안심해. 이미 망태기가 되였는데 죽은들 씻어버릴수 있겠 니? 난 살테다.

《그래, 그래야지. 네가 죽을게 아니라 그 사람이 죽어야 해.

《아냐. 다 내 잘못이다.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했더니 흐윽

새벽녘 명애는 잠들어버렸다. 정혜는 편지지를 꺼내였다. 눈물이 다 말라버린듯싶더니 엄마 얼굴을 떠올리자 또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엄마, 이 불효녀는 먼저 갑니다. 가지 않으면 안될 죄를 이 딸이 졌어요. 묻지 말아주세요. 저는 지옥에 떨어질거예요. 운명도 탓하지 않겠어요. 엄마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고생 많으신 엄마, 죄송합니다. 제가 그처럼 찾던것을 찾았을 때 오히려 제가 죽게 된것은 아깝지 않으나 엄마가 걱정되여요. 엄마,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영별입니다. 엄마의 복을 빌겠습니다. 엄마, 엄마

불효녀 정혜

 

정혜는 남쪽 베란다의 창문을 열었다. 액화가스통을 열어 놓고 조용히 가고싶었으나 명애가 자고있다. 수면제를 먹자니 명애에게 구원될것이 뻔하다. 어느 깊은 산속에가 목메고도 싶었지만 가는 동안 결심이 흔들릴가 겁났다. 이 사무치는 고통과 수치와 죄책감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야 했다.

날이 훤히 밝고있었다. 담장 가까이에 있는 종이함공장의 보이라실에서《쏴》하고 김을 빼고있었다. 앞이 몽롱해졌다. 두 눈을 꼭 감고 정혜는 날아떨어졌다.《아악》하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찢었다. 이웃들이 떨쳐나왔다. 불길한 예감속에서 깨여난 명애가 달려내려와 지각을 잃고 쓰러진 정혜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정혜야, 이 불쌍한것아, 너를 지켜내지 못했구나. 아이구 정혜야

누군가 구호차를 불러왔다. 급진실에서 의사가 바삐 돌아칠 때 명애는 진국이의 호텔방에 전화를 걸었다. 진국이가 천방지축 달려왔다.

《동무가 이 녀자의 남편이요?

《예?! 아 네에 저어

《이게 뭐요? 멀쩡한 사람이. 제 안해가 층집에서 뛰여내리는것두 모르다니.

《예예 잘못그런데 어떻습니까?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 돈은 있습니다.

《천명이요. 엉뎅이가 먼저 떨어진것 같소. 콩크리트바닥이였더면 어서 입원수속을 하시오.

《생명위험이야 없겠지요?

《음 미추골을 상하구 하반신 신경이 잘못된것 같소. 차츰 관찰해봐야 알지.

정혜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병원침대에 누워있었다. 지옥이 아니였다.

《얘 움직이지마. 석고를 해놓았어.

명애의 뒤에 진국이의 어두운 얼굴이 보였다.《진국이가?!》정혜는 이불을 끄당겨 얼굴을 가리웠다. 가슴을 찢는듯한 흐느낌소리가 새여나왔다. 수치감과 자책감에서 끝없이 밀려나오 는 환멸, 절망의 눈물이였다.

명애는 진국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연집강제방뚝에 앉았다. 가물이 들고 오염된 강물이 흐르고있다. 저 멀리 깊은 산속에서 떠날때는 그리도 깨끗했으련만 도시문명권속에 뛰여들어 잔뜩 오염되여버린다.

물은 어떤한 강에서든지 변함없지만 강, 그 자체에는 세류가 있는가하면 급류도 있고 여울도 있다. 따스할 때도 있고 차디찬 얼음으로 굳어질 때도 있다. 인간도 이런 강물과 같지 않은가. 정혜도 마래곡 청계수같이 맑은 마음의 녀자애였다. 그러나 현대생활의 탁류속에 뛰여들어 한방울의 흐린물이 되였다.(진국아, 진국아 너는 무슨 강물이냐? 세류도 급류도 흐린 물도 차거운 물도 말없이 받아들여 려과하는 큰 강물인가? 대하같은 포옹력과 관용이 네게 있느냐?

진국이는 어깨우에 내려앉은 백양나무잎을 잡았다. 병든 나무잎이였다. 그는 나무잎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었다. 씁쓰레한 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진국오빠, 정혜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대로 집에 데려가면 그애 엄마가 받아내지 못할거예요.

《건데 대체 무슨 일이 3층에서 뛰여내릴만큼 엄중했는가 말이요.

《정혜의 마음은 순결해요. 한가지 묻자요. 정혜를 사랑했죠?

《사랑했지.

《지금은 잊었나요?

《미워할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사람은 구해놓고 봐야지 않겠나요? 그애에겐 치료비도 없어요.

《왜 잘보낸다더니?

《다 지나간 일이예요. 지금 그애에게 구원자는 진국오빠뿐이예요. 알겠나요?

《엥히 나두 모르겠다.

《사랑할수 없다면 인간애로 말이예요. 그앤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건 또

진국이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애가 병원에서 나오면 잠시 세집에 있게 하자. 잠시 거기서 내가

《정혜는 한평생 잊지 않을거예요. 그앤 진국오빠와 함께라면 새 삶을 살거예요.

《역시 불쌍한 우리 시골의 넋들이 아니니. 나귀가 나귀를 긁어준다는데

 

인생은 갈지자이다

 

《초향이 내가 왔어 아니?! 경희! 당신이 어떻게 여길 왔어?

《물론 뜻밖이겠죠? 명애한테서 집을 알았고 정혜한테서 열쇠를 가졌지요. 전화를 내가 쳤구요.

《명애? 정혜란 또 누구요?

《정혜란 이름마저 다 잊었던가요? 당신이 안고찍은 이 애가 누구지요?

경희는 손가방속에서 사진을 꺼내여 차탁우에 탁 놓았다.

《어?! 이 사진이 어떻게 당신손에 있소? . 이 앤 내 늦은 사랑이구 내 보배야. 지금 와서 무슨 상관이요?

《당신은 야차야. 제 친딸두 몰라보구 흘레하는 미친 수캐야!

《아니? 이 녀자가 왜 이래?!

《왜 이러는가구? 당신 눈으로 봐요. 무슨 짓을 하고있는가.

정혜의 유서를 읽는 정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연극이다. 당신이 꾸민 엉터리극이야.

《내가 꾸민 극이 아니라 당신이 연출해낸 인생활극이야. 그앤 저 창문에서 뛰여내렸어요.

?!

《당신같은 사람은 이제 죽어야 해요. 우리 유림에겐 당신같은 아버지가 필요없어요.

경희는 문을 《쾅》닫고 나가버렸다.

사진속에서 달콤하게 웃는 초향이, 아니 정혜의 모습을 퀭 하니 들여다보는 한정군의 머리속에 드디여 기억의 먼지속에 파묻혔던 옛날의 사연들이 언뜰언뜰 스쳐지났다. 혜월이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도, 이젠 그만 돌아서라고 애원하던 경희의 커다란 눈도 다시 캐득거리는 초향이의 얼굴이 정혜의 죄꼬만 얼굴로 클로즈업되여 떠올랐다.

《아 악》

한정군은 머리칼을 움켜쥐며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천장이 핑그르 돌아갔다. 피가 거꾸로 흐르더니 목줄기 어데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듯싶었다. 그는 간신히 기여일어나 화식칸의 액화가스통의 여닫개를 한껏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쓰러지듯 차디찬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로부터 수개월후 시교의 발전촌 어느 허수룩한 세집에 부부같기도 하고 오랍누이같기도 한 청년남녀가 들었다. 하반신을 잘 못쓰는 젊은 녀자에게 각근하게 구는 청년을 두고 마을 아낙네들이 수군댔지만 따스한 봄이 되자 남자는 매일같이 녀자를 장애자차에 싣고 호젓한 강뚝길로 오르내렸다. 진국이와 정혜였다.

정혜는 진국이가 한시도 곁을 비울세라 지켜가면서 간호하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기구한 목숨을 이어가고있었다.

긴긴 겨울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아마 몇동이가 잘될것이다.

《왜 날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난 살고싶지 않아요.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산단말예요.

《정혜, 난 아직도 왜 정혜가 죽어야 하는지 몰라. 알구싶지두 않구. 다만 정혜가 일어서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것만은 명백해. 정혜가 걸을만하면 우리 함께 고향 가자. 거기서 소두 치구 피리도 불구 청신한 대기속에서 깨끗하게 살자구. 우리 둘만의 작은 세계를 꾸려가잔말이야. 좋지?

정혜는 많고많은 말을 하고싶었다. 그러나 진국에게 무엇을 말한단말인가.

《진국오빠, 난 오빠의 진정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어요. 난 나쁜 녀자야요.

《얘, 인생은 갈지자야, 곧추 뻗은 길이 없어. 그리구 잊어버리는것과 새로 배우는게 인생이야. 어제는 어제대로 굳어져버리게 해두자구. , 우리 또 걸음이나 익혀볼가? 옳지. 나를 붙잡고 땅을 디뎌봐. 그래, 그렇게라두 걸어요.

정혜의 해쓱한 얼굴에 비지땀이 흘렀다. 손수건을 꺼내 살뜰히 닦아주는 진국이의 담벽같은 가슴팍이 정혜의 시야를 가리웠다. 마치 온 세상이 진국이의 가슴으로 꽉 메워진것 같다. 정혜는 비칠거리다가 진국이의 뜨거운 가슴에 푹 안겨들었다.

《절 죽여주세요. 당신손에 죽고파.

《또 머저리소리 한다. 자 내가 이렇게 억세게 껴안고있지 않아?

일찍 까난 작은 나비한쌍이 머리우에서 날아예다가 사라져버린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흐느끼는 작은 가슴과 관용의 넓은 가슴이 밀착되여 세차게 고동치고있었다.

인생은 갈지자다. 어느 끝에서 시작하든 굽이가 있기마련이다.

진국이는 정혜를 부축하여 다시 걷기 시작했다. 5월의 따스한 해볕이 이 한쌍의 시골의 넋들을 보듬고있다

 

 

도라지 19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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