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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번지없는 집
최 균 선
ㄷ시주택건설성과에 대한 취재를 마치자바람으로 성필이는 옛친구가 사업하는 ㄷ중학교로 걸음을 날렸다. 귀밑머리 희슥하도록 산골학교에서 전전하던 친구가 ㄷ시에 전근되여 온후 편지마다 놀러오라고 열당부해왔던것이다. 그때 굳혀놓은 약속도 약속이려니와 시골샌님의 묵은 때를 쭉 벗고 그럴듯한 아빠트서재에서 흐뭇해 할 친구의 모습이 무척 보고싶었던것이다.
성필이의 마음같아선 곧추 집으로 찾아가는게 옳겠으나 데퉁한 친구가 집번지를 알리지 않아서 부득이 학교로 가는것이다. 그가 ㄷ중학교에 이르렀을 때는 한창 점심 시간이여서 운동장도 휑뎅그레 비여있었다. 숙직실을 들여다보니 마침 나이 지숙한 령감이 졸음을 청하고있었다.
《저 미안하지만 말씀 좀 물읍시다. 이 학교에 탁우군선생이 계시지요?》
《탁선생이요? 거시기 삼합서 왔다는…》
수직령감은 눈을 치뜨며 늘어지게 대답했다.
《네, 네. 옳습니다. 탁선생 퇴근했겠지요?》
《건 모르겠소만 체육실에 가보면 알수 있을거웨다.》
령감은 더 묻지 말라는듯 목침을 베고 누워버렸다.
《…이 친구가 그 나이에 체육교원은 할수 없겠는데… 혹시 산골수재가 도시학교 에 오더니 밀려난게나 아닌가? 원…》
이렇게 의문을 굴리며 현관층계를 오르던 성필이는 화단 저쪽에서 재깔거리는 두 녀학생의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잠간 귀를 강구었다.
《영실아, 난 그저 어문시간만 있었으면 좋겠어. 딴 애들두 어문시간만 고대하 는것 같더라. 넌?…》
《응. 네번째 시간에 어문선생님이 오츄멜로브흉내를 낼 때 난 우스워 혼났어. 아이, 막 배가 아프지 않겠니? 정말 챠플린이야. 호호…》
《넌 막 별명을 짓는구나. 언제 일러바치면 혼나지 않나봐. 호호…》
한참 찧고 까불어대더니 《까르르…》하고 짝자꿍을 놓았다. 빙그레 웃으며 섰던 성필이는 불쑥 친구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가 하는 생각에 그들을 놀래울세라 슬그머니 다가갔다.
《학생동무들, 나 말 좀 물어볼가? 동무들은 몇학년생들이지?》
금방 저희들이 한 말이 켕기웠던지 녀자애들은 혀를 홀랑 내밀고는 《2학년입 니다.》 하고 혀아래소리를 했다.
《오, 그러니까 탁선생의 학생들이겠구만.》
성필이는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친구가 성공하고있는것이다.(아무렴, 그렇겠지. 공든탑이 무너질라구, 어떤 친구라구 남에게 짝지겠는가?)
교단에 처음 나섰던 한동안은 우군에게 웃음거리가 많았다. 한번은 밤마다 슬며시 어데론가 나가는 남편을 찾아서 동구 밖까지 뒤를 밟았던 우군의 안해는 그만 깜짝 놀랐다. 글쎄 멀쩡하던 사람이 두만강물을 마주하고 서서 손짓, 몸짓을 해가며 말하다가는 목소리를 높여 시를 읽기도 하고 혼자 연극을 놀기라도 하듯 흐느끼다 가도 《하하》 웃기도 하였다. 글싸귀가 있다더니 미쳐죽은 훈장귀신이나 매달렸나 해서 남편을 붙들고 살을 꼬집어 봤다는 우군안해의 말이 동네방네에 퍼져 골안의 특대 뉴스로 되였던것이다.
시골샌님이 인제는 당당한 도회지교탁을 차지하고있다고 생각한 성필이는 시름덜린 마음으로 체육실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눈익은 상고머리가 나왔다.
《어이구, 이게 누군가?! 성필이!!! 오겠다더니 정말 왔네 그려.》
탁선생은 악수를 한다 어깨를 두드린다 하며 반가와 야단이다.
《그래, 친구 잘 있었나? 점심때도 잊고 열성인걸 보니 일재미가 무더기채 쏟아지는 모양이지. 어떤가? 시골샌님의 도시살림에 깨알이 막 쏟아지겠지?!》
《음, 음, 자 어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구.》 탁선생은 무작정 성필이의 팔을 잡아끈다.
《잠간, 이런 알량한 친구라구야. 난 체육실검사를 할 마음이 없네. 어서 집으로 안내하라구. 우리 쌍가매사모님두 뵙구 가야지.》
《미안하이. 자네 먼길을 다녀올 수고는 던것같네. 여기가 바로 내 집일세.》
《아니, 뭐? 자네 집이라구?!》
《뭐 그리 희한해할것두 없네. 아마 기자선생이 생활의 구석취재는 처음인게로군. 자, 어서!》
성필이는 문안에 들어서는 참으로 기자의 특유한 본성을 가지고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워낙 맨 구석진곳이라서 볕도 잘 들지 않는데 습기까지 축축했다. 알뜰한 안주인의 솜씨가 보이긴 했으나 높다란 천정아래 찬장은 너무나 꾀죄죄해 보인데다가 테블과 나란히 놓여서 도무지 격에 맞지 않았다. 북향작 창밑에 외침대 두개를 맞대여놓고 맞은켠에 좀 사이뜨게 쌍침대가 놓였다. 이불장과 옷장, 책장으로 간막이를 했는데 그뒤엔 먼지투성이 체육기재들이 무드기 쌓여있어 자못 기분을 잡쳤다.
《여보게 탁군, 이런 판인걸 난 또 자네가 체육선생이라도 됐는가 했네그려.》
《음, 사정이 그렇게 되였네. 잠시 체육실주임으로 여겨주게.》
《흥, 그래도 어느 아빠트베란다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시상을 모으고 있는 탁선생을 그려봤더랬지.》
《아따, 이게 좀 좋은 아빠트인가? 나에겐 좀 과만하다고 할가, 부장어른도 이런 집을 못쓰고 살걸. 허허…》
걱정없는이마냥 너털웃음을 치는 친구의 주름많은 얼굴을 정시하는 성필의 눈에는 웃음속에 가리워진 마음의 빈구석이 빤히 보이는듯 했다.
《여보게, 괜히 미륵보살인체 말라구. 딱친구앞에서 딴전을 부리는건 우정을 말아먹는 가증한 재간이야!》 성필이는 공연히 역증이 났다.
《그런데 부인은 왜 보이지 않나? 애들은 공불 잘하겠지?》
《응, 애에미는 저 송도인지 하는 개체식당에서 일하네. 큰 놈은 지금 연길가서 중점고중에 다니는데 사오십원씩 대주기도 조련찮구만.》
《아무튼 림시라도 일자리 있으면 됐네. 하긴 너렁청한 시골집도 안팎에 기름이 돌도록 꾸려놓구 살던 우리 쌍가매가 부아통이 터지게 됐는걸. 응? 안그런가?》
《젠장, 두말이면 잔소리고 세마디면 숨이 차지. 아빠트욕심에 그만 긁쟁이 되여서 신경을 박박 긁어대고있다네. 얌전이가 그만 암펌이 됐네.》
성필이는 탁우군의 처 쌍가매를 잘 알고있었다. 마래골서 나서자란 죽마고우요 소꿉동무였다.
《암, 그야 당연하지. 그래 점심에는 못오겠군그래. 고향친구가 무척 보구싶기도 한데…》
《자네, 형수님께 정성이 갸륵하이. 헌데 유감스럽게도 밤중이 돼야 잠동무하러 오네.》
《허, 생각은 굴뚝같겠군. 저렇게 갈지자 한복판에 화촉동방을 꾸렸으니 갑산 지개비네 아이놈 없으면 다행일세…하하하…》
《그렇기도 하이. 사무실에서 그냥 새우잠을 잘 때가 드문하네. 마음은 아직두 기둥뿌리 뺄 지경인데두말이야. 허허허…》 우군도 넉살좋게 웃어제꼈다.
《자, 빈방아는 그만 찧구 강술이라두 한잔 주게.》
《아차, 이거 귀객 푸대접일세그려.》
두 고향친구는 우정이 찰찰 넘치는 술잔을 마주쳤다.
《자, 죽마고우의 상봉을 위하여!》
《자, 탁선생의 아빠트를 위해서!》
축배도 열렬했고 회포도 절절했다. 그러나 성필에게는 술맛이 별스럽게 씁쓸 했다.
《여보게, 우리 시에 와서 문필사업을 해볼 생각은 없나? 전번에 두번이나 편지 했는데 왜 묵묵부답인가?》
《념려해주어서 정말 고맙네. 허지만 저녁에 우리 긁쟁이 앞에선 그런 말 까땍 내지 말라구. 응?》
《어째 겁나나? 가위라도 눌린게로군, 쳇.》
《글쎄. 긁어댄들 뿌리까지 헤치지는 못할거네만 인젠 〈열전〈랭전〉에 넌덜 머리나네. 자네 편지를 보구 얼마나 콩팔칠팔했다구.》
갑자기 탁우군은 목소리를 죽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여보게 성필이, 나두 침대에 엎드려 교수안을 쓰다가두 아늑한 서재꿈을 꾸기도 하네. 또 뼈시린 겨울밤에 마래골언덕의 그 따스하던 집구들목두 새삼스레 그려보기두 하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가령 집을 찾아 교단을 훌훌이 떠나버린다면 교원의 알찬 량심이란게 무엇이 되겠나? 응!》
한껏 베풀려는 친구의 진정을 량심따위에 꾸겨박기만 하는것이 저으기 고까와난 성필이는 쀼죽한 말쐐기를 골라 툭 박았다.
《그따위 직업애착병은 자네같은 고리샌님들이나 귀중히 여기는거야…》
《하긴 꿈은 한가지라도 해몽은 제나름이지.》
우군이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성필이는 입만 다시고 앉았다. 대학을 마치고 교단에 떨어지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여기고있는 그로서는 더 입씨름할 마음이 없었으나 기어이 한마디 하고야 시원할것 같았다.
《여보게 탁선생, 황소의 유촉은 너무 충직하지 말라는거네. 허지만 자네의 지조에 만세는 불러줍세.》
성필이는 비뚤어진 진정을 작별인사로 남기고는 일어섰다.
《허, 우리 기자선생이 알긴 아는군. 그럼 오리의 선언도 읽었겠네. 걷는 방법은 제각기 다른 법이라네.》
역시 탁우군다운 유모아다.
《챠, 이 친구 한술 더 뜨는데. 또 있는가?》
《있구말구. 돼지의 리상은 배부르게 먹고 늘어지게 자는거라나.》
탁선생은 두눈을 신비롭게 치뜨면서 껄껄거렸다.
《에끼, 이 친구! 아무튼 자넨 석마를 끝까지 찧지 말라는 나귀의 철학을 기억해두게.》
그들은 이렇게 혀로써 악수를 대신하고 작별했다.
거리에 나선 성필이는 저도 모르게 여기저기 기세좋게 일떠선 아빠트들에 신경을 쏟았다. 불현듯 자기의 아늑한 서재가 방금 본 친구의 《아빠트》와 대조적으로 떠올라 그만 측은해진 마음을 누를길 없다.
ㄷ시에 올 때까지만도 ㄷ시 주택건설사업의 비약을 보여주는 멋진 기사를 쓰려고 윽벼르던 생각이 태반이나 풀어지는것이 락망이 아닐수 없다.
(…탁우군이여, 탁우군! 무엇이 너를 그토록 교단을 못떠나게 하는거냐? 너야말로 영예의 계관에 눈이 시여 무정한 현실속에서 상아탑을 쌓고있는이로구나. 가련하고 위대한 친구여! )성필이는 다시 체머리를 흔들었다.
광음은 또 일년이란 세월을 밀어갔다. 그동안에도 성필이는 우군의 편지를 몇통 잘 받았으나 집이야기는 예이제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으나마나 번지없는 집 주인 으로 만족하고있음에 틀림없었다.
두번째로 ㄷ시에 출장오게 된 성필이는 이른아침차로 내리자 아예 친구의 체육실 로 찾아들었다. 그런데 이런 맹랑한 일이라구야. 체육실의 육중한 문에는 소발통같 은 자물쇠가 침묵을 지키고있었던것이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체육기재만 어수선했 다.
《아차, 이 친구가 이사하면서 또 집번지를 알리지 않았군.》
이렇게 혼자 풀풀거리던 성필이는 돌아나오다가 마침 첫사람으로 등교하는 녀학 생을 붙잡았다.
《학생동무, 여기 체육실 탁선생을 어떻게 하면 찾을수 있을가?》
《검은테안경을 건 어문선생님이죠? 알아요, 4층 음악실에 있어요.》
《뭐? 음악실?! 이 친구 정말 팔방미인인걸. 허, 어느새 또 음악선생이 되였 군.》
뚱싯거리며 허위허위 층계를 올라 음악실앞에 이르렀을 때다. 억눌린듯 짜내는 친구의 웅글진 목소리가 성필이의 발목을 잡았다.
《…아니, 그게 당신이 하는 말이요? 그래 호박넝쿨 뻗을적에 곧게 뻗는걸 보았소? 사람이 기다릴성이 있는게 아니라 그저 입만 벌리면 집타령이니 이거 원!》
침이라도 튕겨나올 말타툼에도 속담명구를 끼워서 말하는 탁우군이다. 성필이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럼 손자턱에 수염날 때까지 기다려보시구려. 먼저 뛰여다니며 좀 공작이나 했던들 그냥 이꼴이모양이겠어요?》
(에라, 그 남편에 걸맞는 아낙인걸.) 성필이는 또 한번 피씩 웃었다.
《저런, 코열고 답답이라구야. 그래 이 탁아무개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구 이 조건 저 조건 칭얼댄단말이요? 흥, 이만치도 복덕방인줄 알라구. 사람이 먹을수록 냠냠이라더니 젠장.》
《여봐요. 볶은콩도 골라먹습디다. 그래 어떤 사람은 층집이 오르내리기 싫다고 단층집에 담장까지 두르고 살고 어떤 사람은 등치고 간빼먹는식으로 국가집을 둘러 맞춰 돈가리를 늘이고. 그래 우리같이 못난 교원은 그냥 이렇게 살라는 법이 어데 있어요?》
우군의 안해도 말솜씨가 제법이다.
《여보,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릴 거두라우. 이밥이면 다 제밥인줄 알았소?》
《그리 잘 아는 량반이 왜 오라는 편지가 두세번 와도 그 잘난 분필통을 안고 맴도는거예요?》
우군의 안해가 점점 육박하는 소리다.
《뭐요? 그래 붙는 불에 키질할 작정이요? 내라고 생각없는 등신이던가? 왜 리해는 못할지언정 들볶아 못살게만 구는거요? 엉?!》
마침내 울분을 터치듯 우뢰치는 남편의 불호령에 우군의 안해는 잠시 꿀꺽인다. 녀자들이란 남편과 만사에 충돌하면서도 교묘하게 재간을 피우는 법이다.
부부간의 설전이 바야흐로 백열화될판이다. (허, 이거 암행어사 출도를 불러야 겠군.)
성필이는 헛기침 두번으로 《정전》을 암시하고 세번 노크로 《중립국개입》을 선포했다. 이윽해서 상고머리가 《무기》를 놓고 나왔다.
《오, 성필이 자네로군. 이건 매복습격인걸. 아무튼 반갑네.》
벙실거리는 탁우군이야말로 정서돌변의 능수였다. 친구의 표정예술에 성필이는 더구나 마음이 여리여진다.
《친구 잘 있었나? 정말 새집에서 손님을 맞는군그래. 허허허…》
《암, 여부가 있나? 자네 올줄 알고 이렇게 4층아빠트로 바꾸어놓았네. 허허허…》
호인다운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찰찰 흘리며 우군이가 넉살을 부리는데는 성필이도 그만 탄복이다. 집안에 들어선 성필이는 아닌보살하고 우군의 안해에게 인사를 했다.
《사모님, 별래무양하십니까?》 서양사람들처럼 모자를 높이 들었다놓는 모양이 어찌나 우습강스러웠던지 여직껏 구석에 쥐죽은듯하고있던 우군의 열살난 딸애가 캐드득거렸다.
《아이유, 철이 아버지군요. 기자선생이라 인사도 개방식인가요?》
우군의 안해도 흉허물없이 웃는 얼굴로 맞는다.
《어서 앉으세요. 내 얼른 아침차릴게요.》
한마을에서 무랍없이 지내온 그들인지라 오가는 말도 구김이 없었다. 성필이는 방안을 일별했다. 체육실보다는 한결 탐탁하고 아늑하게 꾸려졌었다.
《여보게, 단칸이여서 좀 말째지만 널직한게 쾌 살암직 하네그려. 아무튼 셈평이 좀 펴인셈일세.》
《음, 친구씨가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탁씨도 시름놓겠네. 간단한 문제라도 새롭게 신중히 제기될 때면 더는 간단한 문제로 되지 않는 법이네.》
탁우군답지 않게 자못 엄숙하게 말하는 그속에는 분명 지난해의 그런 호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장수엄지손가락만치 굵직하게 말아문 담배만 애꿎은 연기를 내고있다. 두툼한 입술새로 몰려나오는 연기는 동그란 원을 그리다가 점차 커다란 갈구리모양을 방안 가득히 띄워놓았다.
저으기 머쓱해진 성필이는 눈길이 침대머리에 무드기 쌓인 작문책에 박혔다. 간밤에도 늦게까지 수정한게 틀림없었다. 친구의 부석부석한 눈이 너무도 잘 말해 주고있었다. 작문책을 펼쳐보니 여러가지 수정부호들이 벌겋게 그려져있었고 찌르 는듯 띠끔하면서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평어들이 깨알같이 씌여있었다.
성필이는 모범작문인듯 따로 놓인 작문책을 펼쳐보았다. 《내가 아는사람》 이라는 글제가 무척 인상적이여서 저도 모르는새에 한줄한줄 읽어내려갔다.
《밝음이 인생에서 사랑의 첫봉화라면 교원이야말로 인류문명의 새아침을 안아오 는 사랑의 천사이리라.…내가 아는 그 사람은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주는 그 사랑이야말로 평범하지 않다.…》
문장은 비록 잘 맞물리지 못한감이 나지만 중학생 글로 말하면 제법이였다. 실로 맹장수하에 졸병이 없다고 친구의 피타는 노력의 정화가 또렷이 안겨왔다.
《참, 아침 늦었어요. 철이 아버지, 스산한대로 많이 잡수세요. 지난해 든걸음 으로 보내신게 얼마나 미안한지…》
언제보나 열무우갓김치같이 사근사근하고 인절미같이 나긋나긋한 성품을 드러내는 친구의 안해다.
《허, 이거 고맙소. 쌍가매씨께서도 함께 드시지요.》
《어서 드세요. 아까 내전을 하는통에 식당이 그만 늦어진걸요. 점심에 애아버 지와 같이 식당에 오세요. 시원한 국수를 대접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드러난 비밀을 다시 피려치는 안해가 밉강스러웠지만 눙쳐 생각 하고 하는 말이 또한 친구다왔다.
《인품은 열두폭치마 울산애기지. 자, 난 상학때메 안되겠네만 자넨 초다듬이로 서너잔 하라구.》
《감사하네만 어쩐지 이번도 술맛은 쓰네그려. 여보게, 권주가도 좋지만 살진 안주도 집는 현실적인간이 되라구, 응?》
《말뜻은 알만하네. 다음번엔 우리 취하도록 마시고 새 아빠트에서 <번지없는 주막>이나 함께 부르세나.》
《좋네. 그러자면 생활과 생존방식의 시대적변화에 꽤 민감해야 할걸세.》
《자기 로력의 보상에 대한 끈질기고 실속있는 추구야말로 현대가치관념의 정수 란말이겠지? 친구.》
《여보게 탁선생, 설교란 책에 씌여있는게라구. 생활은 우리 앞에 문제를 풀라고 펼쳐져있는거네. 알겠나?》
탁선생은 어깨만 으쓱했다.
《허지만 한걸음에 답안을 찾을수 있는건 아니지 않나?》
우군이로서는 명백한 무엇을 말하는듯싶었으나 성필에게는 그저 벙거지시욱 만지는 소리같이 애매하게만 들리였다.
《좋네. 일을 보아 저녁에 만나도록 합세. 하지만 딱 기다리진 말라구.》
그들은 이렇게 헤여졌다.
고고청산은 변함이 없어도 세월의 언덕에 물레방아계절은 돌고돌아 어언 세번째로 ㄷ시에 오기까지 일년하고도 수삭이 지났건만 성필이는 친구의 집번지를 알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음악실을 지키고있는게다. 그래서 성필이는 이번길엔 그 친구의 《아빠트》에 가고싶지 않았다. 아니, 번마다 친구를 난처하게 굴고싶지 않았다고 하는게 옳을게다. 그러나 20여년 정분이야 어이 저버리랴. 성필이의 발길 은 저도 모르게 친구에게로 쏠린다. 그가 무작정하고 음악실문을 두드렸더니 바라는 상고머리대신 현대파마머리가 나타났다.
《누굴 찾으시는지…》
《네. 저 고향친구를…》
성필이가 말끝을 맺기도전에 그녀의 약삭바른 대답이다.
《아! 네, 탁선생말씀이죠? 지금은 저 보이라실에…》
성필이는 실례라는것도 잊고 펄쩍 뛰였다.
《뭐요. 보이라실?!》
아연실색하는 성필이의 표정에 그 녀교원은 마치 제잘못이기라도 하듯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참, 이거 제가 실례했습니다.》
성필이는 그제야 사과하고는 맥없이 사색의 층계를 내리였다. 이럴수도 있단말 인가? 주택난이 어제오늘 제기되는 문제도 아니고 또 탁우군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님을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아무튼 왼고개가 탈리는 일이다. 실로 고행하는 친구요, 고집불통 탁우군이다.
성필이는 제사 어깨가 처져가지고 학교건물을 돌아들었다. 웬 일인지 보이라실 널문이 짝 열려있고 마당에는 짐짝들이 널려있었다. 화부실의 열려진 창가에 친구의 펑퍼짐한 어깨가 보였는데 담배연기만 꾸역꾸역 밀려나오고있었다. 성필이는 얼없이 서버렸다. 친구의 사색을 깨고싶지 않다. 탁우군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다. 한 가정의 세대주면 누구나 바라는 그 모든 것—따스한 보금자리와 마련된 안정을 가지고싶어하는 한 녀인의 남편이요, 두 아이의 아버지다.
《어, 이거 기자선생의 왕림이로군. 어서 오시오. 성황리에 대환영이요.》
문뜩 몸을 돌리던 탁우군이 못박힌듯 서있는 성필이의 출현에 저으기 당황하여 너스레를 떨었다.
《잘 있었나? 친구. 그런데 대관절 올때마다 유격전인가 운동전인가? 원.》
《죄송하이, 하지만 우리네 상봉이야말로 얼마나 극적인가? 번마다 새 무대이니 말이야. 하하하…》
성필이는 어이없었다. 자기라면 웃음은커녕 고함을 질러도 시원치 않을것이다. (저 친구가 억눌린 위선이 항변을 토하는게나 아닌가? 이따위 <아빠트>에서도 밀려나는 신세에 뚱딴지같이 배심을 부리긴, 쳇.)성필이는 누구에게라없이 화가 났다.
《너무 격동하지 말라구. 오늘은 새집드는 날일세. 마침 잘 왔네.》
《어허! 그게 정말인가? 잘됐군 잘됐어. 그래 몇평방인가? 일층인가? 아니면 삼층?…객실도 달린거겠지? 좋아, 오늘 새집턱은 내가 담당하세.》
《노노, 너무 락관할건 못되네.》
《?!》
《집은 집이로되 세집이야. 자네 말마따나 번지없는 집이지.》
그야말로 딸이 온다기에 개물함지를 엎지르며 뛰여나갔다가 미운 시누이 오는걸 보고 시무룩해진격이다.
《뭐요? 일구월심 3년기도에 죽은태를 낳은셈이요? 쳇, 돈나무를 뿌리채 뽑아안았네그려. 당신 진짜 문간방샌님일세, 탁선생!》
탁우군은 허허…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는 정신건강의 믿음직한 표지라고들 하지만 우리 탁선생의 웃음은 결코 그런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웃는다. 웃을수밖에 더 있겠는가? 운다는것은 더구나 어리석은짓이다.
《노노, 너무 실망할것두 없네.》
《그래 친구, 이 지경에도 〈광휘로운 직업〉의 꽃양산밑에서 꿈을 꾸려나?》
《진정 변함이 없을 때라야 곧 신념인줄 아네!》
성필이는 채타지 않은 담배대를 비벼끄려다가 깔고앉은 책궤구석에 던져진 원고뭉테기를 쥐여들었다. 문학작품도 있었고 교육론문도 여러편 있었다. 그 복새통에서도 친구는 제할일을 착착 해오고있었던것이다. 그야말로 거칠은 쑥박속에 핀 함박꽃을 보는듯 성필이에게는 류달리 희한스러웠다.
《여보게 친구, 이런 불경기상태에서도 대작을 했네그려. 자넨 정말 소힘줄이야. 허허…》
…성필이는 짐을 가득 실은 밀차를 끌고 붐비는 네거리에서 수굿이 걷고있는 친구를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점점 더 커보이기도 하고 또 보잘것없이 왜소해 보이기도 했다.
천지 1988년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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