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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2017년 05월 27일 18시 51분  조회:4402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기획-‘위안부’②] 강간을 ‘조선 정벌’이라 말해, ‘말 안 듣는다’며 칼로 찌르기도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5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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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심 할머니는 1921년 겨울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는 집에서 늘 외로웠다고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던 열일곱 살의 박영심은 친구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끌려갔다. 일본 순사는 검은 제복에 별 두 개를 달고 있었고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평양역으로 끌려간 박영심과 친구는 다른 15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압송됐다. 1939년의 봄이었다.
남경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는데, 병영으로부터 5백미터 떨어진 곳에 3층짜리 벽돌건물이 있었다. 빈 깡통들을 매달아놓은 가시철조망이 무시무시하게 드리워져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다. 일본군들은 그 곳을 ‘긴스이루’ 위안소라고 했다. 안으로 끌려들어가 보니 가로세로 약 2미터·2미터50센티 정도로 똑같은 크기의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방에는 침대만 하나씩 있었다. 박영심에겐 2층의 19번째 방이 배정됐다.  
 
▲ 등충의 위안소 인근에서 체포돼 곤명 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여성들. 사진출처=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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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박영심을 우타마루(歌丸)라고 부르며, 19호실 방문에 우타마루라는 이름과 번호를 붙여놨다.  
해가 뜨면 일본군들이 몰려왔다. 아침으로 쌀밥 한공기와 몇 조각의 무우 절임을 먹고 나면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하루 평균 30여명이 왔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면 일본군은 그녀를 다락방으로 끌고 가 발가벗긴 뒤 매질을 하곤 했다.
일본군들은 보급 받은 ‘돌격1번’(콘돔)을 들고 왔다. 또한 그들은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는 것을 ‘정벌’이라 표현했다. 2010년 공개된 일본 육군 제6사단 소속의 무토 아키이치 분대장의 1938년 일기에도 ‘오늘은 즐거운 나들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에 나섰다. 순서는 네 번째였다. 도미꼬, 경상남도’라고 씌어 있다.
“일본군은 하나와 같이 포악무도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어느 날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한 장교 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구두발로 차다 못해 긴 칼을 뽑아 나의 목에 대고 당장 죽일 것처럼 위협하고는 ‘황군’의 맛이 어떤가 보라고 하면서 자기의 수욕을 채웠다.”
어느 날은 일본군이 ‘요구대로 따르지 않는다’며 박영심의 배를 칼로 쑤셨다. 배의 정 가운데 5센티미터에 이르는 자상을 입었고 피가 쏟아졌다. 중국인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나서야 살아났다.  
일본군들은 위안부들이 임신을 하면 자궁까지 도려냈다. 그리고 다시 위안부로 ‘사용’했다. 위안부로 쓰던 소녀들이 병에 걸리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면 어디론가 실어갔는데,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아니면 가차 없이 강물에 처넣어 죽이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 중에 상대인 일본군에 맞아 죽거나 다른 위안부들이 보는 앞에서 처벌을 당해 죽은 경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박 할머니의 증언에선 더 끔찍한 사실도 드러난다.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 (중략)..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 
일본군들은 말을 듣지 않는 소녀들을 가마솥에 넣었다고 태연히 말했다. 유사한 증언이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17살에 끌려간 피해자 유선옥 할머니(함경북도 경흥군)가 있던 위안소에선 일본군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위안부의 목을 잘라서 보여주곤 가마솥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삶은 물을 위안부들에게 강제로 먹였다. 14살에 끌려갔던 정옥순 할머니(함경남도 풍산군)도 같은 증언을 한다. 일본 장교는 “남자를 하룻밤에 백 명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손을 들으라”고 한 뒤, 손을 들지 않고 대들었던 15명의 소녀를 벌거벗긴 채 못 판에 굴렸다. 소녀들의 몸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일본 장교는 이들의 목을 칼로 베고 역시 가마솥에 넣었다. 그리고선 “개 죽이는 것 보다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 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 1944년 9월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당시 22살이던 박영심. 사진출처=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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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스이루에서 3년여를 보낸 박영심은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끌려 상해를 거쳐 버마 랑군 부근의 라시오 위안소에 옮겨졌다. 여기선 다시 ‘와카하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이곳에선 7명의 위안부 가운데 4명만 살아남았다고 박영심은 기억한다.  
라시오의 위안소에서 2년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버마-중국의 국경지대인 윈난성의 송산으로, 다시 라모로 끌려갔다. 이때가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매일 수많은 폭탄과 포탄이 날아와 터졌고, 이곳으로 끌려온 12명의 조선 여성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선에서 하루 30~40여명의 일본 군인을 치러야 했다. 이들 조선인 여성 12명 중 8명이 폭격에 죽거나 일본군에 맞아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 날 군기를 태운다는 일본군들의 말을 엿듣고 패전을 예감한 박영심은 남은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도망쳤다. 박영심은 어느 중국인 농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중국군에 의해 체포돼 곤명의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다. 그녀는 당시 만삭의 임신 상태였으나 포로수용소에서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당시 곤명의 포로수용소엔 조선인이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 있었다. 조선인 여성 가운데 박영심을 포함한 10명은 송산 지역에서 체포됐고, 나머지 13명은 등충 인근에서 체포됐다. 등충의 위안소에선 중국군에 의해 등충이 함락되기 전 일본군들이 위안부 30명을 총살한 기록이 발견됐다.  
박영심이 고향으로 돌아온 건 8년만인 1946년이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종군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1967년 결국 자궁을 드러낸 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힘든 여생을 살아왔다. 1993년 박 할머니는 피해를 알려 ‘한을 풀고 싶다’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2000년 12월엔 여성국제법정에 증언자로 참가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방문했으나,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생각나 먹는 일도, 말하는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빠졌다. 박 할머니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됐다. 2003년엔 지원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중국 남경과 운남성 송산을 답사했다. 박 할머니는 남경의 위안소 건물에 들어선 뒤 소리 내어 울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2006년 8월7일 향년 85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 송산 위안소 터를 찾은 박영심 할머니. 사진출처=<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72페이지>. 서울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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