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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언과 노벨문학상 (4)
2012년 12월 21일 13시 38분  조회:3612  추천:7  작성자: 김혁

 
. 대담 .

 

막언과 노벨문학상 (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세아의 문호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스쳐 지났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번 시리지의 마지막 시간으로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아세아의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고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도 스튜디오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작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지금까지 중국을 여러번 스쳐 지났지만 아세아에서는 수상자가 여러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 김: 인도의 타고르,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와 프랑스국적을 가진 고행건 등 4명이 있습니다.

 

 

- 신: 타고르는 그 유명한 시로 만방에 널리 알려진 문호인데 그가 수상한 정황과 그분의 신상에 대해 말씀 주시지요.

= 김: 우리에게 "시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 시인이며 사상가입니다.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유명한 가문에서 열네번째 자녀중 막내로 태여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였습니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세에 벌써 시를 썼습니다. 가문의 배경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내내 저조했습니다. 14세 때인 1875년에 타고르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된것도 이 즈음의 일이였습니다. 타고르 가문은 당대의 다른 인도 명문가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호의적이였고 사회 및 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덕분에 타고르는 일가친척이 발행하는 여러 문학잡지를 무대로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뽐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타고르가 관직이나 사업같은 분야로 진출하기를 바랐지요. 1878년 이후 타고르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어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한편 문학에 매진하여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쟝르의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린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였습니다. 그는 이 곳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였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였지요.

 

- 신: 그럼 그후로도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이어졌는가요?

= 김: 하지만 이 즈음에 타고르는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안해와 부친, 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련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벌린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그 빚짐을 충당하게 됩니다. 20세기 초의 10여 년간 타고르가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여 1910년에 발표된 한 권의 시집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였습니다. 여기서 기탄잘리란 헌시(獻詩)라는 뜻입니다.

 

- 신: 문학은 역시 아픔의 호소라고 볼수있구만요.

= 김: 타고르는 1912년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로 간행된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했고 런던에서 만난 한 영국인 친구에게 그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 원고를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보여주었고 W. B. 예이츠라는 시인이 원고를 읽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출간을 주선했습니다.
그해 말에 영어판 "기탄잘리"가 영국에서 간행되였습니다. 이 작품집 덕분에 타고르는 하루아침에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듬해인 1913년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습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 겸 유명인사로 존경받았습니다.
194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타고르가 평생 받은 유일한 학위증명서였습니다. 1941년 타고르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래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7일에 결국 사망했습니다.

 

- 신: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뿐만아니라 그후의 활동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했는데요, 그럼 학계에서는 타고르의 공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 김: 현대 인도문학에서 타고르의 지대한 영향력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에는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 말고도 22개에 달하는 지역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도 각지의 지역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쓸수 있습니다는 자신감을 인도인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전형적이고 랑만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타고르의 업적은 결코 폄하(貶下)할수가 없는것입니다. 나아가 형식면에서도 타고르는 현대 인도문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개척자로 평가됩니다.
아세아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타고르는 문학상에 대해 개의치 않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은 명예에 환호하고 있는것이다."고 수상직후 말했습니다. 사실 타고르 본인은 문학보다도 산티니케탄에 설립한 학교를 더 큰 업적으로 여겼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였지요.

 

- 신: 타고르의 문학작품창작정황은 어떠했습니까?

= 김: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는데 대표작으로는 시집 "기탄잘리", "초승달", 희곡 "우체국", 소설 "고라"(1910), 평론 "인간의 종교"(1931), "문명의 위기"(1941) 등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아 두 나라의 국가도 그의 손에 의해 창작되였습니다.
하지만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후 서방사회에서는 유색인종의 수상을 로골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고 심지어 인도 내에서도 타고르의 명성은 과장된것이라며 헐뜯는 목소리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편파적인 서구의 편견에 의해 그후 50여년이 지나서야 아시아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습니다. 그가 바로 가와바다 야스나리입니다.

 

 

- 신: 아세아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소개가 요청됩니다.

= 김: 일본의 소설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899년 6월 11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여났고 1968년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중국의 로사가 문학상에 거론되였으나 그가 자살하고 상은 야스나리에게 돌아가게 된거지요. 그후 가와바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 두사람의 인연은 우연이라도 기막힌 인연입니다.
오사카에서 태여나 동경대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문예시대"와 같은 문학지를 창간했고 "신감각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신감각파의 작가로서 주목되여지고 또 시평가로서도 이름이 높습니다. 우수에 젖은 서정성을 통해 고대 일본문학의 전통을 현대어로 되살려낸 작가입니다.
어려서 량친을 잃고 고아가 되였으며 청년시절에 가까운 친척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1924년 도꾜제국대학을 졸업한뒤 1926년 "이즈의 무희"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 소설은 중국인들에게는 8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저도 이 영화CD를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보아도 영상미가 뛰여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이 소설은 자서전적인 그늘이 많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의 문학 류파의 미학은 대부분 다다이즘, 표현주의 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문예사조에서 따왔습니다.
1948년에 그 유명한 소설 "설국 (雪國)"을 발표합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1935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결말 부분을 여러번 고쳐 쓴 끝에 12년이나 지난뒤에야 완성되였다고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대 서정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였으며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종의 외국어로 널리 번역되였습니다.

 

- 신: “설국”은 문자 그대로 눈 나라라는 뜻인데요, 어떤 작품인지?

= 김: 작품은 에치고유자와라는 곳의 온천장을 배경으로 게이샤인 고마코와 미소녀 요코의 미묘한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산문시와 같은 세련된 문체는 작가가 재발견한 신감각파적 수법의 극치를 이룹니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처럼 서정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며 신비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눈의 배경과 함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정경이 배경을 이룹니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니이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는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인데 작가는 직접 이곳에 머물면서 소설을 집필했습니다고 합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는 싸늘하고 청결합니다. 제목에서부터 환상적이고 청순한 분위기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 소설속에 그려진 사랑의 모습도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과 대비되는 유한하고 고독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바로 "설국"이 그려내는 현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외에도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천우학(千羽鶴)"과 "산소리(山音)", "잠자는 미녀", "고도(古都)" 등의 대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줄곧 서정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서정문학의 장을 열었습니다.

 

- 신: 문학창작을 제외하고 기타 사회활동은 어떠했습니까?

= 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외에도 일본 문화훈장 등 여러가지 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 세인이 주목을 한 몸에 안고있던 이 대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은뒤 얼마 되지 않아 또 그 길을 가게 된거지요.
소설 "금각사"로 이름난 미시마 유키오 역시 세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였고 추천을 받았은 사람으로서 일본문학에서 주요한 일석을 차지하는 작가입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가와바다의 작품 대부분에 짙게 깔려 있는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은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입니다. 노벨상을 받았을때도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와바다의 문학에는 불법의 범신론적세계관이 있고 불교적세계관의 무위로 타락하는 가치이상으로, 서구전위예술의 사상과 련결되여 있습니다.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라고 말한적 있는데 이 말은 그의 문학적 경향을 몇마디로 응축한것입니다.

 

 

- 신: 아세아의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역시 일본사람인 오에 겐자부로라고 했는데요, 그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 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는 1935년 1월 31일 일본 에히메 현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여났습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합니다. 7형제의 3남으로 태여났으며 할머니에게서 예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에를 가르치면서 "하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기"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책에 반한 나머지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18세에 프랑스 문학을 배우기 위해 도꾜로 상경했습니다.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도꾜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습니다. 그의 졸업론문 역시 "사르트르 소설의 이미지에 대하여"라는 테마였습니다. 23세의 나이에"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문단 최고의 작가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이 외에도 핵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습니다.
1963년,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여났습니다. 이로부터 오에 겐자부로의 창작성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지요.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였습니다. 1964년, 장애자 아들의 출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풋볼은 미식축구를 말하는거지요. 이 작품으로 최년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습니다.

 

- 신: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요?

= 김: 작품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로 하여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였을 당시의 수상리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꾜방언에 대항하는 시적인 문체로 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겐자부로 역시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였습니다. “노벨문학상도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습니다.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2003년에 일본이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극명한 립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중국과도 관계가 아주 돈독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수상한 막언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와서 남경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북경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일본 관료들과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입니다”라고 비판의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 신: 인지와 량지가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듭니다.

= 김: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적중한 예언으로 화제를 몰고오기도 했습니다.
지난 월드컵때 문어 한마리가 경기 결과를 맞추어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오에 겐자부로도 그에 못지않은 예언으로 주목받고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뒤 오에는 "앞으로는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중국의 막언, 그리고 토이기의 오르한 파무크, 한국의 황석영이 유력하다"고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부터 오에의 예언은 줄줄이 실현됐지요. 
이듬해 곧바로 오르한 파무크가 수상했습니다. 해마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 1순위로 꼽히다가 미끄러졌던 파무크는 오엔의 예언이 나오면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것입니다.
2년 뒤인 2008년에는 르. 클레지오가 또다시 "오엔의 예언"을 실현했습니다. 르 클레지오 역시 프랑스 소설계에서 현존 최고의 작가로 꼽히다가 마침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에 이어 중국의 막언 역시 올해에 소원을 성취한것입니다. 이제 남은 작가는 한국의 소설가 황석영입니다. 오에의 "예언"이 과연 실현될지 한국매체들은 이 에피소트를 대서특필하면서 기다리고있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트이지만 이 모든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그냥 문학에 대해 관조하고 세계 각국 작가들의 창작성향에 대해 연구한 결과라 볼수 있지요.

 

 

- 신: 점괘와 같은 무근거한 억측이 아니라 세계문단을 꿰뚫어보는 혜안이라고 봐야겠지요. 아세아의 네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고행건은 중국이름 같은데요?

= 김: 고행건(高行健)은 중국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번역가, 연출가, 화가입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1940년 1월 4일 중국 강서성 간주(赣州)시에서 은행 간부인 아버지와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때부터 연극과 글쓰기에 흥미를 갖도록 북돋워 주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후,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환경 덕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룰수 있었고 그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후날 그가 소설가로, 극작가로, 비평가로, 또 화가로 여러 장르의 예술활동을 펼칠수있게 된 바탕에는 이와 같은 유년기의 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북경 외국어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문학과를 전공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78년 이후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습니다. 1987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1997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 신: 고행건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요?

= 김: 그는 2000년에 “보편적 타당성과 날카로운 통찰력, 언어적 독창성으로 가득 찬 작품을 통해 소설과 드라마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희곡 “절대 신호”, "뻐스정류장", "도망", "산해경전 (山海经传)"등이 있습니다. 1989년에 대표작이자 자전적인 소설인 "령혼의 산 (灵山)"을 내놓았습니다. 소설은 내면으로의 순례임과 동시에 현실과 허구, 기억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반성적 려정의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아세아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막언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은 리유는 어디에 있습니다고 봅니까?

= 김: 모두어 보면- 
막언의 작품들은 여타 동서방 작가들의 작품에 견주어 보아도 서사의 힘과 문체의 다변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서 금번의 막언의 수상은 크게는 중국문학과 중국작가들의 성공일뿐더러 곧바로 막언의 문학적 특징의 성공이기도 하다고 말할수 있지요.
막언의 소설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리유는 첫째로 그의 서사방식에 있다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문학사조면에서 어디에 속하든지 그의 작품은 중국문학의 전통적 서사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늘 고향과 고향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작가의 이념, 사상, 상상력이 부과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목격한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때 민속 문화적 요소들이 불가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습니다. 1981년 등단한 이래 30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그의 창작의 안목은 아직도 락후한 치벽지인 고향에 머물고 있으며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향인 중국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 오고있는것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져 있습니다. 막언 문학의 핵심적 요소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입니다.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공간을 마주 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거지요.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립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기피하면서 허무한 개인적인 정서와 취미에 머문 작품들을 부끄럼없이 내놓고 있는 현실의 “병태적 창작”에 비하면 막언의 민간립장, 현실립장의 창작자세는 소중하며 존경할만한것입니다.

 

- 신: 막언작품의 주요한 제재였던 고향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풀이해야 될까요?

= 김: 고향을 주무대로 다루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들은 또 단지 고향이라는 공간,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있습니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 문학의 일부인 중국 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습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습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 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입니다. 고향의 일상과 간단한 자연주의를 넘어서 텅 비고 무의미한 형상과 력사에 대한 맹목적인 락관과 비관을 극복하고 이에 민간적인 기질, 신념과 의의를 부여한것입니다. 좁게는 고향인 산동 지방의 농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는 작품들에서도 분방하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 신: 그럼 우리는 막언의 문학관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가요?

= 김: 막언의 창작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것은 문체의 각도에서 문학을 인식하고 있는 그 점입니다. 그는 부동한 방식과 형식의 필법으로 문학을 기록하고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여타의 작가들의 작품이 한가지 방식으로 부동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반해 막언은 부동한 방식으로 한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막언은 일찍부터 마르케스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나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魔幻)현실주의소설의 결구 방식을 배웠던거지요. 
소설의 서사결구로부터 소설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막언은 온갖 실험을 적극 시도해왔습니다. 농촌, 군사, 력사, 괴담, 로맨스, 반부패 등 다양한 주제의 돌파와 개척으로부터 서사방식에서는 다인칭 시점에 지방언어, 문화대혁명시기의 언어, 민간창법, 및 경전문학작품을 차용, 흡수하면서 실험적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중국 전통의 소설형식인 장회체(章回體)를 사용하는가 하면 의식의 흐름기법이나 판타지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적지않은 작품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비슷해 유럽에서는 막언이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합니다.
작품들에서 다양한 기법을 적극 실험하는 작가여서 한 문예사조로 국한되기를 거부하지만 막언을 현대 중국의 문예사조로 따져본다면 1985년부터 불기 시작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學, 전위파)계렬의 작가로 볼수있습니다.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은 “좌”의 철사에서 벗어나 국문을 열어 젖혔고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거치면서 세계와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편승해 세계적인 사조와 문학성과들을 중국의 작가들은 민감하게 포착하고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립장에 든든히 발붙이고 자신들의 작품에서 간거한 탐색과 사색을 이어나갔습니다. 막언은 그들과 함께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学) 계렬의 작가이며 그 선두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물론이고 개혁개방 초기의 상흔(伤痕)문학과 반사(反思) 문학에서 벗어나 “삶의 문제”를 주제로 한 문학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가 그에 일관된 작품을 다량으로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편 서구의 영향을 외양으로 중국전통의 창작방식을 골조로 하면서 그 상호작용에 의한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들을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 작가와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사조와 호칭을 갖다 붙일수 있는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그가 폭넓은 문학 세계에 침잠하여 다양한 문체나 서술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한데서 쌓을수 있은 성적가리인것입니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쉴줄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를 신랄한 비판, 고난속에서도 결코 놓치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작가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습니다.

 

- 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까지 네 번에 나누어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김혁소설가를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를 방송해 드렸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문학살롱 여기서 줄입니다.

 

(끝)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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