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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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민족출판개혁의 돛을 달고 댓글:  조회:1794  추천:0  2012-01-06
민족출판개혁의 돛을 달고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     2007년은 민족출판사로 볼 때 실로 벅찬 한해라 할수 있었다.   “장문대사전”편찬을 기획해 국가로부터 1000만원의 자금을 쟁취했다. 이 대사전은 글자수가 3천만자로 쟁취한 자금은 국가출판총자금 1억원에서 10분의 1을 차지하여 엄청난 자금이 아닐수 없다. 또한 정부구매에서 정부를 대상으로 350만원 상당의 책을 판매, 그중 “중국아동백과전서”를 260만원(원가 230만원)에 판매하였다. 이밖에 “대외로 나가자(走出去)”(8권), “당대중국종교연구정선총서”(중국의 종교문화를 국외에 집중 소개함), “중국독본” 등 영향력있고 무게가 있는 일련의 도서들을 출판하여 사내 경제수익을 창출였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난한해는 “민족출판사의 기적”을 만든 한해로 평가되고있다.    이는 2005년 1월 우빈희씨가 민족출판사 사장으로 취임한지 불과 2년만에 따낸 실적이자 만들어낸 기적이기도 하다. 민족출판사는 우사장을 위시한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과 더불어 개혁의 돛을 달면서 위축되던 민족출판사의 이미지가 새롭게 부각됐고 수년간 꾀해오던 변신에 한걸음 가깝게 다가섬으로써 민족출판사상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북경으로 발령을 받고   무순태생인 우빈희씨가 북경에 전근된것은 2004년말이다.   그전에는 청원현 현위부서기, 서기, 무순일보 사장으로 사업하였다.   보통인의 키를 훨씬 초과하는 그는 일찍부터 현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총명과 재능으로 맡은 분야에서 뛰여난 지도능력과 사업수완을 과시했다. 타고난 소박함과 진솔함은 사람들을 마무런 틀이 없이, 무랍없는 사이로 대해주었는데 그를 접근하는 사람마다 인정미가 넘치 사나이라는 인상을 물씬 풍겨준다. 이러한 후더운 인품과 더불어 강직함과 높은 책임감이여서인지 그는 재빨리 민족간부로 성장했고 국가민위에서 중점양성하는 민족간부명단에 자기의 이름을 올려놓은것 같다.     무순시 청원현에서 부서기 겸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는 기간 그는 중앙조직부, 통전부, 국가민위 3개 정부부서에서 조직하는 직무을 갖고 단련하는(과職鍛練) 50명 명단에 들었다. 그리하여 1995년 5월부터 1996년 5월까지 1년간 복건성 석사시 부시장으로 취임했다. 몇년후 이 50명이 북경에 집결하여 그동안의 사업경험을 교류한적있는데 그때 우빈희씨는 교류회에서 7명의 발언자속에 들어 중앙의 중시를 더 받게 되였다. 석사시에서 돌아와 얼마안되서 1996년 12월부터 그는 5년간 무순시 청원현서기로 사업하였으며 2001년 11월에는 무순일보 사장으로 발령받아 2003년 6월까지 무순일보 사장으로 정력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그의 노력으로 하여 타 신문사보다 후진 무순일보는 신문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무순일보신문그룹을 구성하여 신문개혁의 대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2003년 8월에 국가민위는 그에게 북경으로 전근하라는 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전중국이 사스라는 전례없는 재해에 휩쌓여있었고 무순일보그룹 내부의 책임자인선이 미처 해결되지 않아 1년간 지체하다 2004년 12월에 중국민족보신문사 부사장으로 발령받고 전반 신문사사업을 주관했다. 그러다 1년뒤인 2005년 1월 민족출판사 사장으로 정식 취임하게 되였다.   “국가민위는 당시 나를 비롯해서 산하 기관에서 5명을 조동시켜 민족출판사의 지도층을 구성하였지요. 그래도 내가 출판관련 업무에 정통하고 민족사업의 경험이 풍부하다는데서 서로 낯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장의 중책을 메워준것입니다.”  그 당시를 돌이키며 그는 어딘가 전기색채나 희극색채가 띈다며 환하게 웃었다.     '공공문화제품생산' 제출   민족출판사는 국가민위가 주관하는 출판기관이다.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민족출판사는 1953년에 창립되였으며 주요하게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과 모택동의 경전저작을 번역출판하였다. 현재 민족출판사는 몽골어, 장어, 위글어, 까자흐어, 조선어 등 정상 5개 소수민족언어문자외 한어와 영어, 이문 등 문자로 책을 출판하고있다. 그래서 6개 “작은 출판사”로 불리운다고 한다. 사내에는 '구사(求事)문선’, ‘경제생활 '잡지외 영상출판 등 매체도 있다. 그리고 민족도 많은데 사내에는 도합 22개 민족구성원으로 재직자가 무려 300명이 된다.   이런 유구한 력사와 중요역할을 담당하는 민족출판사의 중임이 우사장을 위시한 새로운 지도층들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들은 부임한 첫날부터 민족출판사가 국가출판계통의 유일한 민족출판개혁시범단위라는데 중점을 두고 설계도를 다시 그렸다.    우사장은 먼저 사내 정황을 익숙한 기초에서 지도부성원들과 얼굴을 맞대고 출판사의 앞날을 설계했다. 그래서 국가의 5개년계획처럼 만들어낸것이 민족출판사의 5년계획안이란다. 이 5년계획에서 전 3년은 실천의 해로, 후 2년은 계획의 해로 정했다,. 실천의 해는 또 첫해는 학습의 해, 두번째 해는 실험의 해, 세번째 해는 개혁의 해로 나뉘었고 네번째 해인 올해는 형태전환(轉型)의 해라고 한다.   그는 이 5년계획에서 중요한것은 형태전환이라고 주장하며 형태전환을 둘러싸고 모든 개혁의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공공(公共)문화제품 생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 공공문화제품이란 일련의 출판도서에서 첫째, 핵심가치관을 나타내는것, 둘째, 공동문화(55개 소수민족마다 다 개성이 있지만 공성이 있기에 그 공성을 살려야 한다)를 육성하는것, 셋째, 소수민족문화의 최저보장을 반영해야 한다는것이다. 우리의 생뢀에 최저생계보장이 있는것처럼 문화에도 각 소수민족들이 수요하는 도서가 있는데 이러한 도서를 출판하는것이 곧바로 문화의 최저보장이라고 일가견을 폈다.   바뀌지 않으면 살수 없다는것이 지도층의 확고한 결심이였다. 해마다 새로운 계획이 나오고 층층이 집행되면서 사내 분위기가 확 바뀌고 사람들의 정신면모도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과거 누가 돈을 내면 책을 내주는 등 책출판번호만 파는" 피동적인 출판관습은 완전히 깨지고 대신 엄밀한 계획에 따라 도서를 출판하고 돈이 없어도 필요한 도서는 출판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우사장은 "형태전환은 제품구조의 전환, 생산방식의 전환, 관리모식의 전환, 분배방식의 전환"이라고 설명하면서 전 3년에는 형태전환을 위한 준비를 하고 후 2년에는 공공문화제품생산기지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토로했다. 올해에 5개 민족이 총 500종의 도서를 출판할 계획인데 각 민족실마다 제마끔 책을 출판하는것이 아니라 5개 민족실이 각 100종의 도서를 출판하되 그중 70종은 동 주제의 도서를 동시출판하고 나머지 30종만 자기 민족의 원작을 출판한다. 그는 “쉽게 말하면 여러 사람들이 힌상에 앉아서 동시에 영양식을 먹는것”이라고 형상적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이미 상급에 출판비용으로 600-800만원의 예산을 신청하였으며 사내 보유자금으로 시작해서 일부는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로도 진행해 나갈것이라 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이미 3년간의 실천속에서 커다란 성취를 거두었다. 실험적으로 "중국아동백과도서”, “중국독본”, 당17차대회보도물 등 도서를 출판하여 좋은 효과를 보고있으며 이러한 공공문화제품의 생산을 통해 공익성개혁체제 구축과 기제실천이란 목표로 한걸음씩 나아가고있다. 또한 사업단위가 기업화경영으로 나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출판계통에서도 누가 돈을 주기를 기다리는 시대를 력사가 되였으며 지금부터 모든 사업을 프로젝트화해서 자금을 쟁취하는것이 지름길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돈은 머리를 쓰면 쓸수록 생겨나기 마련이다”고 개혁에서의 성취감을 자부하기도 했다.     민족의 비문화유산 보호해야   그는 지금 북경에서 고독감을 모르고 산다고 상경소감을 토로했다. 안해는 민족화원에서 3급미술사로 근무하며 수도 생활에 잘 적응하고있고 자기는 학습, 또 학습이라고 했다. 그는 현시대사람들이 자주 쓰는 "충전"으로 표현하지 않고 미욱할 정도로 배우고있다(惡補)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시대의 변화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학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이다.   수십년을 민족간부로 몸을 담아온 그는 민족유산에 대한 애착과 관심도도 매우 높았다. 그는 자신이 청원현서기로 있을 당시 청원현의 조선족학생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 비추어 민족학교를 살리기 위한 부득불의 조치로 조선족중학교와 조선족소학교를 청원현조선족학교로 통합하고 새로운 청사를 지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이 학교도 학생수가 얼마 안되여 소실될 위험에 처해 매우 안타깝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현실이지요." 시대의 변천과 흐름속에서 여하히 소실되여가는 민족의 유산을 발굴하고 보호하는것이 우리 현실에 놓인 하나의 과제라고 직설했다.   특히 그는 지난해 맏형인 우철희선생이 세상뜨고 또 중앙당교 교수였던 최룡수선생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신변에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와 연구에 조예가 깊은 분들로 우리 민족의 비유산을 빨리 건지지 않으면 소실될 위험성이 크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 시대는 도시화, 정보화시대여서 급변하고있고 우리민족의 80세 좌우의  로일대, 조선족이민세대들이 사망되면서 우리들의 비문화유산이 소실되고있어요.. ‘우씨가족사’는 단순한 개인가족사가 아니라 중국조선족력사의 일부이며 중국 다민족력사의 일부지요.. 맏형님이 생존할 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못했는데 사후에야 이 점을 더 깊이 깨닫게 됐지요.” 지금 짬짬히 김학철선생의 소설을 읽고있는데 우리 민족가운데 이렇게 대단한 분이 있었다는것을 잘 몰랐다며 조선어수준이 낮은 사람이나 조선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력사와 인물에 대해 알기 어렵다면서 유구한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전통, 인물을 단지 우리 민족 언어문자만이 아니라 중국어로 소개하여 타민족에게 알리는 작업도 자못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우리 민족언어로 우리 민족의 력사와 인물을 발굴하고 정리하는것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여하히 타민족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겠는가 하는 점도 념두고 우리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점입니다..” 우사장은 “중국소수민족중 우리 민족은 중국조선족100년사 등 책이 나온것처럼 상당히 특히한 민족이고 자기 나라가 있지만 이미 중국의 조선족으로 되여버렸다. 따라서 모국어의 점차적인 상실은 필연적인 현실로 되고있으며 문자한계에서 벗어나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겠는가 하는것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피력했다.    (2008/05/04)    
19    "부자군단" 성보상인들의 심양인상 댓글:  조회:2352  추천:0  2012-01-06
 "부자군단" 성보상인들의 심양인상(2008/06/11)   한국침실용품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아요   -몽나라침실용품 안여영사장   "현지인들이 우리 상품을 보고 '너무 훌륭해요', '태도가 정말 좋다' 찬사와 치하를 던져줄 때 상품이 잘 팔리고 안 팔리고 떠나서 그보다 더 기쁜것이 없었어요" '몽나라침실용품' 안여영사장의 말이다. 그가 경영하는 '꿈나라침실용품'은 연길에선 유명한 브랜드다. 이번 심양성보한국상품전에 참가하기 위해 '꿈나라'상표가 이미 있다고하여 '몽나라' 브랜드로 신청해서 심양에 왔다고 한다.   첫인상에 진솔하고 소박한 아줌마 인상을 주는 그녀나 10년 장사경력으로 장사엔 그만큼 미립이 텄고 경영기반과 노하우를 갖고있었다. 그가 경영하는 제품은 한국혼례용품에서 전통침실용품, 한국고전가구, 카페트와 전자용품 등이다. 심양에 오기전 도시가 크고 돈이 많이 있겠다싶어 최고급 침실용품을 많이 가져왔는데 웬걸, 시장반응은 좋은데 가격이 비싸다고만 한다. 하루에도 입이 부르트고 목이 쉬도록 설명해도 좋다고만 하고 사는 사람이 적어서 알아보니 처음에 전시회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저소득층이고 로인들로 별로 물건은 사지 않고 보러 오는 구경군들이였다. 그러나 20여일이 지나면서 점차 중상층 소비자들도 찾아들고있고 좋은 시장반응을 보이고있어 기대감이 부푼다고 했다. 그래서 우선 중저제품을 위주로 판매하면서 고급제품은 홍보를 위주로 하여 시장을 형성하여 파는 전략을 세웠다.   "몽나라침실용품"은 현재 전국에 크고 작은 도매상만 2-300여집이다. 장차 심양에 거점을 둔다고 하니 도매상들이 우선 반기는 기색. 많은 로비와 시간을 팔 팔면서 연길까지 올 필요없이 직접 심양에서 거래할수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운임도 절약되서 더 많은 도매상들이 생겨날 전망이다.   또한 한국 인천에서 연길보다 심양은 운임도 크게 절감된다고 한다. 보통 인천에서 연길까지는 해상운임이 1만여원이라면 심양은 1/3 정도이며 연길에서 전국 각지로 나가는 국내운비도 심양은 퍽 절감되는데 그 절감되는 리윤을 도매상과 소비자들에게 돌릴것이라 했다.   한국거래처 사장들도 심양을 다녀갔는데 매우 긍정적이여서 성보의 심양진출은 여러가지 방면으로 좋은 결실을 맺을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그는 장차 시장에 보편화된 대중성제품보다 독특하고 새롭고 세련된 신제품으로 심양시장에 타깃을 잡아나갈것이라고 했다.   애로점이라면 아직 심양시장을 잘 리해못한 탓으로 상인들 생각과 현지소비자간 생각에 차이가 있고 한국상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과 소비의식이 조선족이 많은 연길보다는 2년정도 뒤떨어져있어 시간이 필요하다는것, 그러나 고객관리를 철저히 하고 VIP고객을 확보하고 고객서비스전략을 펼쳐나간다면 성보상인들의 심양시장전망은 매우 밝을것으로 본다고 했다.   2세 상인교육을 중요시해 이번에 20살난 둘째아들을 심양에 데리고 왔고 심양에선 그가 경리라며 기자에게 그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심양에 연길못지 않은 황실궁전을 짓겠다는 안사장의 꿈이 이뤄지기 기대해본다.        생각보다 기대가 더 크다   -한우주방 김기화사장   "심양에서 20여일 장사해보니 생각보다 기대가 더 크다. 앞으로 사업을 크게 할곳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는 구경군들만 많이 몰리고 싸구려만 찾더니 이제는 중급제품도 제법 찾고있고 서로 소개해서 찾아오기도 하고 친구를 데리고 와서 물건을 보며 '다른곳보다 더 좋다'는 평까지 주고있다. 그리고 비싸지만 다시와서 사겠다는 사람이 많은것 봐서 심양시장 전망성이 매우 밝은것 같다"   한국 최대 도자기회사 행남도자기의 중국총판을 거머쥐고있는 한우주방 김기화사장의 말이다. 행남도자기는 친환경제품으로 국제 DNP검증도 받은 제품이다. 가격이 좀 비싸지만 품질이 좋고 디자인도 우수하고 강도도 세다는것, 성분 50%가 골분(젖소 뼈가루)이 들어있어 신선도를 보장하는데는 일품이여서 말그대로 "살아숨쉬는 그룻"이란다. 한번 써보면 다시 찾을수밖에 없는 제품들이라고 자랑을 쏟아놓았다.   20여년 장사경력을 갖고있는 그는 연변성보와 연길제1백화점에 부스를 갖고있으며 한국의 30-40여곳에 거래처를 두고 도자기외 갖가지 한국일용품을 팔고있다. 그가 이번에 심양에서 선보인 상품만 공기, 대접, 커피잔, 머그(컵), 뚜껑, 접시 등 수백종이다. 그는 "아무 물건이나 신생사물을 접수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기만련이다"며 현지인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심양시장을 죽 돌아본 그는 현재 심양에는 국산이 많고 한국 행남도자기와 같은 고급제품은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있다며 심양총판을 하겠다는 사람, 도매를 하겠다는 사람 생각보다 시장반응이 좋아지고있다고 했다.   "첫술에 배부를수 있겠어요?" 어쨋든 이번에도 연결에서처럼 정영채회장님과 김성순사장님을 밑고 두말없이 따라나섰는데 "생각보다 시장평판이 좋아 매우 기쁘다, 부부가 같이 와서 먼저 자리를 잡은다음에 아들을 데리고 올 계획이다"고 토로했다.   홍보를 잘하면 판매는 문제없다   -코리아메온지 박송선씨   "홍보를 잘하면 판매는 문제없다" 훈춘밀강중학교 교장을 퇴임하고 안해를 따라 장사길에 나선지 1년밖에 안되다는 박송선씨는 심양시장에 대한 확신성을 나타냈다.   코리아몬지는 그의 안해 안계월씨가 만든 회사다. 안해는 연길이 남고 아들과 부자간이 같이 왔는데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아 걱정이 많았댔는데 인제는 팔리지 않던데로부터 팔리고있고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좋다고 물건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의류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고있어 심양성보백화점 전망이 밝게 느껴진다고 했다.   코리아메온지는 한국 로또운동복의 중국총판, 한국 정장 "다모다" 품종을 전문 취급하고있는데 연길에 6개 점포를 갖고있으며 동북3성외 천진, 소수, 온주 등 남방 여러 도시에 거래처를 두고있다. 심양전시회는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시장조사차 홍보가 위주라며 청도에서 보통 정장 한벌의 가격이 4,000원인데 심양은 1,500원으로 팔고있다고 했다.   장사군보다 인테리 스타일이 다분히 풍기는 박송선씨는 부부간은 로임으로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할수 있으나 집에서 쉬는것보다 일하는것이 좋고 또 대학을 졸업한 아들을 위해서 장사길에 나섰다며 학교교육과 여러면으로 맞지 않는것이 많아 하나하나 적응해나가고있다고 설명했다. 33년간 교편을 잡아온 그에게는 장사가 서툴고 고달프고 힘들었다. 학교교육은 학생들을 위한 차분한 교육이 위주지만 장사는 령활하고 고객서비스를 잘해야 물건이 잘 팔릴수 있어 자기 성격을 많이 개변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인제 상인못지 않게 시장을 분석할줄 알았다. 한국의류상품의 우수성을 중국에 널리 알리고싶다. 조선족이니 한족이니 선진적인 문화를 배우는데는 차이가 없다. 공동으로 잘 살고 입고 하는것이 중요하지 민족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의류시장에서 제일 골치거리중 하나가 상품의 모조라며 심양에는 오애시장이란 큰 도매시장이 있어 더욱 걱정된다고 했다.   심양에 본사를 이전하고싶다   -이래양말 최종철씨    수년간 장사하면서 가격이 비싸도 역시 잘 먹여들어가는 상품은 한국상품이라고 생각되고 더욱 신심을 갖는다고 이래양말 최종철씨는 말한다. 교편생활 4년반, 후에 일본에 갔다와서 일본어학원도 꾸렸댔지만 안해가 힘들어서 하는것을 옆에서 그냥 지켜보기 민망하여 어느날 학원도 팽개치고 양말장사길에 오른 그다. 처음에는 학원원장이 양말을 팔려고 뭇사람들앞에 나서자니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양말을 사주는 사람보다 고마운 사람이 없단다.   이래양말은 한국 모 양말회사의 유명상표가 아니라 최종철씨 부부가 만들어낸 중국상표다. 현재 대도시외에 장가계, 훅호트, 우룸치 등 전국에 300여곳에 거래처를 두고있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거기 장점만 따서 새롭게 개발한것이 이래양말인데 국가에 상표가 등록돼 법적보호를 받고있다. 중국에서 오다를 받아 한국에 판매하는것이 아니라 한국에 오다를 주어 중국에서 판매하는것을 보고 한국인들이 놀라와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산하면 아무리 모조품이 나와도 육안으로 볼 때는 같아보이지만 질적으로 천양지차라며 똑같게 만들수 없다는것이다.   "말이 없이 홍보되는것이 심양이다" 이래양말은 전시회기간만 벌써 연길에서 6번이나 물건을 들여왔다한다. 가게에서 물건을 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에 가서 물건이 좋은데 비싸서 못샀다고 하니 이튿날 자식들이 와서 가갔다며 심양은 고객이 고객을 끌어들여 너무 좋다고 했다. 또 상품을 보고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서 가격이 좀 비싸지만 이렇게 좋은 상품은 보지 못했다. 우리한테 제공할수 있겠냐며 도매를 요구하는 사람, 오애시장 양말상인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서로 양말을 제공해달라고 하고있다고 했다.    또 도매상들도 비행기편이든 기차편이든 교통비가 절약되고 물류류통이 원활하고 자주 만나 상담할 기회가 많아 OK이란다. 편벽한 연길에서 이래양말이 전국에 소문을 놓고있는데 심양에서 무조건 성공할수 있다고 최종철씨의 확신했다.   처음에는 진렬정도나 하면서 시장을 테스트해보려 했댔는데 이렇게 불티나게 팔릴줄 몰랐다며 최종철씨는 아예 본사는 심양에 이전하고 자식들을 심양에 공부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심양에서 뿌리내릴 작정이얘요   -한일종합주방 지성씨   성보그룹이 전 심양백화상점을 인수했다는 소식에 며칠동안 밤잠을 설치며 가장 들떴던 사람중에 한일종합주방의 지성씨를 빼놓으면 아마 서러워할것이다. 지난해 5월 한국에서 귀국한 그는 금년초부터 심양을 중심으로 금주, 단동 등 주변시장을 돌면서 거래처 확보에 나섰고 심양에 이미 아파트를 매입해서 호적수속을 하고있다고 했다.   기자와의 첫 대면에 지성씨는 심양은 연길보다 인구가 퍽 많고 동북3성 중심도시여서 시장이 너무 크고 좋다며 "심양에서 뿌리내릴 작정이얘요"며 말을 던졌다. 우람진 체격에 호탈한 성격을 가진 그는 20대 후반 젊은이지만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들 밑에서 일찍 장사에 눈을 뜨고 6년남짓 한국주방문화를 접촉하였는지라 2세상인답게 자기의 계획을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연길로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도매상 대부분이 심양 주변사람들로 심양에 숯불구이, 갈비구이 등 한식료리물품이 적어서 연길로 올라오고있고하니 아예 심양에 거점을 두면 도매상들에게 교통편의도 제공하고 물류비도 절감되여 여러모로 좋단다. 그러나 심양 자체는 시장이 크지만 연길처럼 보매로 리윤을 보려면 3-4년 시간 걸리기에 심양에서 소매시장을 뚫으면서 주변시장에로의 도매시장을 개척할것이다. 연길에는 인구가 약 50만이지만 한국주방용품 소매와 도매가 각 50%여서 도시는 작으나 시장성이 크다. 심양인들이 한국주방용품에 대한 인식에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1-2년 밑진다고 시작해도 열심히 홍보하고 부지런히 시장을 개척해나간다면 조만간에 큰 시장으로 만들수 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한일주방은 현재 동북3성외 북경, 천진, 상해 등 전국 여러 도시에 총판을 두고있을뿐만 아니라 자체가 한국 부방테크노주식회사 전기밥솥의 중국총판, 효성유압랭면기의 중국총판, 삼서어김치랭장고의 중국총판, 보령전자의 중국총판을 갖고있으며 품종이 무려 3,000여종, 년매출이 1000만원이다.   전시회기간은 물건을 팔기 위한것보다 홍보차원. 20일어간에 2800원짜리 전기밥솥을 4개 팔았는데 설명을 잘해주고 밥맛이나 료리맛이 없으면 물품을 반환해주겠다는 조건으로 하여 야채장사군이 사갔다고 했다. 이 가격은 소매가격이 아니라 대래상들에게 주는 가격이다. 처음에는 전기밥솥의 내솥을 보고 청소기인가 뭍는 사람이 있어 당황하기도.   그는 자기 회사의 주방제품은 30%가 가정용이고 70%가 업소용이여서 심양시장을 한번에 확보하기 횜들지만 이 지역이 개발지역이서 주변이 개발되면 시장도 더 커질것으로 본다고 했다.   젊은 우리세대 상인 지성씨, 심양에서 화이팅!     
18    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댓글:  조회:2220  추천:0  2012-01-06
 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ㅡ리원명탄신125주년을 기념하여 1월5일은 리원명 탄신125주년 기념일이다. 료녕성당사연구실은 지난해 전 중국기자협회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요청을 받고 약1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들여 조선과 중국에서의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을 발굴하고 “리원명동지의 일생은 위대하고 비장한 일생이였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고 귀중한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그의 항일투쟁사적은 중조인민의 빛나는 항일력사에 기록되여 영원히 간직되여야 할것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전국인대상위회 비서국 국장 리재덕동지도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에 대해 “조상지장군은 생전에 리원명동지는 우리 항일부대에 많은 필수품을 제공했고 투옥후에도 견정불굴하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했다”고 리현덕에게 전했다.   의병운동과 리진룡의 희생   리원명의 원명은 리종생, 가명은 리고려, 리명도이다. 1884년 1월 5일(음력12월8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연봉동의 가난한 전주리씨의 가문5남2녀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11살 어린 나이에 그는 왜놈이 마을에 내붙인 “안전고시”를 뜯어내여 개울물에 처넣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를 저주하였다. 16살에 일제의 만행으로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아버지 리윤경을 도와 수상운송에 나섰고 후에는 의병운동에 뛰여든다. 1907년5월 리원명은 홍범도가 조직하는 의병에 참가하여 청천강에서 군수품을 운송하면서 때론 평양에 내려가 무기와 약품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어느날 우연히 조선독립운동지도자 리동휘의 연설을 들은 뒤 항일구국의 도리를 깨우치고 조선독립운동조직 신민회(新民会)에 가담하였고 조선 의사 안중근이 이도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을 알리는 삐라를 살포하는 등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0년 8월 28일, “조일합병조약”후 의병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고 일부 애국지사와 진보적 인테리들이 중국 동북지역에로 들어와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때 리원명은 많은 반항독립운동가들을 동북지역으로 운송했는데1910년4월, 리동휘를 동북지구에로 호송했고1911년 저명한 의병지도자 리진룡을 관전경내까지 호송하였다.   1918년 여름, 리원명은 고향 정주에서 의병 지도자 백광운(일명 채찬)과 알게 되여 그와 함께 정주,창성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후에 백광운의 제의로 여러명과 함께 도강하여 관전현에 가 리진룡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리진룡은 조선 황해도의병의 주요지도자로서 한정만이 이끄는 의병대와 손잡고 수차 일본군경을 습격했다. 리원명의 도움으로 밤도와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의 청산구 은광촌으로 온 리진룡은 그곳에서 “반일회”를 조직하여 조선인과 한족민중을 단합해 항일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   리원명은 리진룡의 도움으로 “부빈회”를 설립하여 자금을 모아 생산을 조직했다. 그는 늘 압록강과 파저강(지금의 혼강) 량안에서 중국과 조선을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였다. 1919년3월, 리진룡이 조선인첩자의 고발로 일본특무에게 피살되였고 비보를 받은 리진룡의 부인도 당장에서 까무라쳤다가 당날로 나무에 목을 매여 자결하였다. 이때 압록강 북안 하구에서 배를 몰고있던 리원명은 소식을 듣자 즉시 청산구로 달려가 의병들과 함께 비통을 참고 이 한쌍의 의부렬녀(义夫烈女) 를 은광촌의 석가골에 매장하였다. 리원명은 이를 악물고 결단코 이 비겁한 간첩을 잡아 리진룡의사의 원쑤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압록강량안에서의 항일투쟁   천마산(天摩山)은 조선북부 압록강 남안 최대산간지대이다. 주봉은 해발1,160메터에 달하며 산이 높고 밀림이 우거진데다 인가가 드물어 일본군경들이 쉽게 드나들수 없는 곳이므로 항일복국독립운동이 날개를 펼수 있는 안성맞춤한 지역이였다.   1919년 “3.1”운동후 최시흥, 백광운, 최지풍 등이 이곳에다 천마산독립군과 천마산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였고 천마산을 중심으로 초산, 창성, 의주 등지를 습격해 일본군경과 수십번 싸워 적에게 호된 타격을 주었다. 1920년5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는 련락관 리작을 동북지구로 파견하여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참리부(参理部)를 광복군총영으로 개편, 천마산독립군을 천마산별동영(别动营)으로 개칭할것을 제의하였다. 광복군 총영장 오진동의 지시를 받아 리원명은 광복총영의 최시흥을 별동영장으로, 최지풍과 백광운을 중대장으로 임명하는 지시를 전달하였다. 최시흥은 리원명더러 천마산부대 후근을 맡아줄것을 부탁했다.    1921년 여름, 리원명은 최시흥의 지시에 따라 박태봉이 고향 녕변에 잠행하여 누님과 어머니를 관전으로 모셔오는데 동행했다. 박태봉이 천신만고로 누님 박순명과 어머니 등 가족을 거느리고 지정된 곳에 이르렀으나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났고 군무가 급한 리원명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태평초로 떠났다. 그들 일행이 태평초려관에서 류숙한 당날, 주변 백화산(현재의 화발산) 산채의 비적들은 려관주인과 짜고들어 박순명을 랍치했다. 박순명은 노기가 충천하여 비적들을 한바탕 꾸짖고는 산꼭대기를 향해 결사적으로 달려갔다. 나무가지를 잡고 깎아지른 절벽을  에돌아가던 박순명은 그만 나무가지가 부러지는바람에 산골짜기에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리원명이 독립군을 이끌고 달려와 그녀를 범의 굴에서 구원해낼수 있었다. 이로 하여 그들은 기이한 인연을 맺었고1921년 가을 리원명과 박순명은 결혼하였다. 그해 리원명은37살, 박순명은22살이였다.  1922년 봄, 리원명은 천마산별동영을 거느리고 도강하여 관전에 찾아온 최지풍을 맞았고 태평초 동쪽5킬로되는 괘방자촌에 안치하였다. 당시 관전현 경내에는 대한독립단(大韩独立团), “한족회(韩族会)”,“대한청년단”, “광복군사령부”,“천마산독립영” 등 여러 류형의 독립운동과 복국반일조직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도합 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의식주와 무기탄약 등을 해결하는 후근임무가 리원명에게 맡겨졌다. 그는 셋째 처삼촌 박윤범과 련락을 취했다. 일찍 일본류학을 다녀온 진보적 인테리인 박윤범은 혼강북안의 관전과 환인현 사이에 있는 작은 진인 사첨자(沙尖子)에서 조선인거류민들로 소규모의 독립무장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수동식재봉틀 세대를 갖춘 피복공장을 운영하고있었다. 리원명부부는 그 기지를 리용해 생산을 확대했고 구식 페달재봉틀 두대를 더 구해서 조선부녀들을 동원해 회색과 황색 두가지 색상의 군복을 만들었다. 두달동안의 노력끝에 관전경내에 있는 독립군의 수요를 기본상 만족시킬수 있었다.   1922년6월, 천마산별동영에서50여명의 병사가 환인현으로 이동한후에도 리원명은 계속해서 후근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7월, 최시흥과 백광운도 각기 조선으로부터 도강하여 길림의 림강과 집안으로 왔다. 8월, 환인현 마권자촌 골안에서17개의 조선독립운동조직에서 파견한71명 대표가 참가한 남만조선통일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회의에서 “통일부(统一部)”혁명조직을 세우고 산하 의용군을 건립하였다.  9월 상순, 최시흥이 이끄는 소분대는 조선경내에 들어가 왜놈경찰소와 사무소를 기습하여 적지 않은 무기를 로획하고 또한 백성들로부터4천여원의 항일자금을 모아왔다. 부대를 더 잘 은페시키기 위해 그들은 천마산으로 돌아가는 도중 창성을 지나가다 당년 리진룡을 팔아먹은 첩자 정씨를 찾아내서 당장에서 총살했다.    채목회사 두목 아라키를 암살  왜놈들은 “압록강일본채목공사”라는 기구를 세우고 동북지구의 림강, 관전, 안동 등 여러곳에 분회사를 설립하여 중국의 삼림자원을 마구 략탈하였다. 관전현 로흑산(일붚)에는 압록강으로 운송하는 목재만 해도 수천만립방메터에 달했다. 이 분회사는 일본퇴역군관인 아라키가 경영을 맡고있었는데 그자는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조선난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리원명은 박윤범, 박태봉과 상론하고 아라키를 처단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채목공사에 호림대가 있었는데 일본사무라이들과 부분 조선인첩자로 구성되였고 또 모두들 무장을 갖추고있어 거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23년 8월 30일(음력7월19일)  깊은밤, 벌목장의 내선한테서 아라키가 술에 취해 처소에서 자고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즉시 어둠을 타고 로흑산분공사문어구로 접근해 잠에 졸고있는 두 보초병을 단매에 쓰러뜨린후 잽싸게 그들의 총을 빼앗고 아라키의 처소로 갔다. 아라키는 잠에 푹 빠져있었는데 리원명은 맹호같이 달려들어 아라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놈의 권총을 집어들고 돌아나오다 한 조선인첩자가 다급히 삼림속으로 도망치는것이 보였지만 시간이 긴박하고 위험이 큰지라 더는 추격못하고 재빨리 로영구로 돌아왔다. 그는 안해 박순명더러 가족을 거느리고 먼저 북산 대우골조선인집거구에 피신가도록 했다.   그날 도망친 자가 압록강변하구의 삼림호위대 총부에 가서 리씨성을 가진 조선인독립군이 처소에 뛰여들어 아라키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호위대장(일본인)이 로흑산분공사에 달려가보니 아라키는 피못속에 쓰러져 죽었다. 날이 밝을 무렵, 조선인첩자를 앞세운 놈들이 태평초까지 추격해왔으나 헛물만 켜고말았다. 놈들은 조선복장으로 차림새를 바꾸고 동쪽10여리 떨어져있는 로영구로 뒤쫓다 공교롭게 막 문을 나서려던 리원명과 맞띄웠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리원명은 붙잡히고말았다. 흉수를 잡았다고 흐뭇해난 대장은 리원명을 한 마구간에 가두어놓고 간수 한사람만 남기고는 술집에 갔다. 태평초의 지리환경을 손금보듯 잘 아는 리원명은 바로 이 마구간뒤쪽에 옥수수대로 만든 변소가 생각났다. 마침 간수는 연명을 위해 삼림호위대에서 일하고있는 조선인청년이였다. 리원명은 조선말로 뒤를 보러 변소에 가겠노라고 청을 들고 변소의 뒤켠으로 도망쳐나와 수수밭속에 잠입했다가 북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박윤범은 거사를 하고 무사히 돌아온 리원명을 보고 큰일을 해냈다고 치하했고 소분대를 거느리고 사첨자로 리원명을 찾아온 최석순도 흥분되여 조선인들의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최지풍이 “통일부”에서 퇴출하여 대한진동도독부(大韩镇东都督府)를 따로 세웠고 최지풍이 중앙부총사령원을, 자기가 참모장을 맡았다고 하면서 수배령이 내렸으니 환인현에 가 후근일을 계속 하는것이 어떤가고 제의했다. 리원명은 리종생이란 원명을 리원명으로 고쳤다면서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1923년 음력8월 하순, 리원명은 환인현 마권자촌 북구리차자에 있는 대한진동도독부 총사령부에 가서 오랜 전우인 최지풍과 상봉했고 최지풍은 그를 후근부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당시 골안에 수백명 인구가 거주하고있었는데 부녀와 아이들이 날마다 광물질함유량이 많은 물을 마시고 배앓이를 하거나 캐신벡병에 걸려 시달렸다. 또한 전사들의 건강도 엄중한 위협을 받았다. 그는 맹씨성을 가진 개명지주의 둘째아들 맹소당이 조선인들의 처우를 동정하는 심리를 리용하여 맹소당이 자기네 우물물을 매일 우마차로 골안까지 운송해주게 함으로써 식용수문제를 해결하였다. 식량은 환인과 관전 변경에 가서 조선교민들로부터 량식을 구매해들이는 한편 맹소당이 골안에 있는 자기네 밭 옥수수를 전부 걷어들여 독립군의 겨울식량으로 주어 해결할수 있었다.   1924년 1월말, 대한진동독도부가 대한민국림시정부 륙군만주주재 참의부로 재편성되면서 내부 파벌투쟁이 커졌고 형세가 좋지 못한것을 본 리원명은 서둘러 가족을 잠시 환인현 서부 이호래(二户来)와 고태자(高台子)로 옮겼다.   1924년6월, 최지풍의 제의를 받은 리원명은 최지풍, 백광운, 최석순 등 생사고락을 같이 한 오랜 전우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 할빈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가 먼저 환인현 고태자에 가서 가족과 거처하고있을 때 갑자기 백광운이 일본특무에게 암살당했다는 비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형세가 급변하는것을 간파하고 급히 고태자를 떠났다.   할빈 옥중투쟁   1924년12월말, 리원명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할빈에서 무려 한달동안이나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빈서진에서 조선에서 면목있는 한 로인을 만났고 이 로인의 집을 거점으로 반일조국광복선전활동을 하였다. 얼마뒤 북만청년총동맹(이때는 북만조선혁명통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의 한 성원으로 됨) 책임자 황기찬을 만났다. 황기찬은  리원명을 총동맹의 지도자성원으로 임명하고 리명도(李明道)란 가명을 지어주었다.    리원명은 빈주, 일면파, 주하정거장 등 지에서 양로공, 건축공, 하역부 등 일을 하면서 조선인로동자들속에서 북만청년총동맹 회원을 발전시켰다. 1927년4월, “신민부”가 파괴당하자 리원명은 빈주의 황인툰에서 조선독립운동 지도자 류원제의 조카와 손잡고 진보적인 조선인학교 복흥학당을 세우고 조선인쳥년들에게 애국주의를 각성시켰다. 1928년초, 조선혁명가 석만추가 쏘련에서 빈주지구에 와 신민부를 재건하고 복흥학당의 교원신분으로 자기 신분을 엄호하였댜. 동북당국 정보부문에서는 그를 “쏘련특무”로 의심하고 오래전부터 그의 행적을 밟기 시작했고1928년 여름, 리원명의 호송하에 빈주지구를 빠져나가려던 석만추를 체포하였다. 미구하여 리원명도 동북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석만추와는 어떤 관계냐? 석만추는 어디로 뭐하러 가는거냐? 그가 쏘련에서 월경해온 임무는 무엇이냐? 놈들은 리원명을 욱박질렀다. 헌병들의 가혹한 고문에 리원명은 “나는 조선혁명가이고 나라가 망하여 중국에 망명왔으며 복국을 위해 조선학생을 양성했다. 석만추는 우리 복흥학당의 교원일뿐 쏘련 홍색특무와는 상관없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몇달동안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헌병대는 하는수없이 리원명을 빈주 지방당국으로 압송했다. 가족들은 수소문하다 여러방면의 관계를 통해 오랜 력사배경을 갖고있는 빈주 청련사의 주지스님을 찾아 빈현 조지사(현장)를 통했지만 석방시킬수 없었다.   전 중공중앙 대외련락부 부부장, 중앙기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비서장 조의민(赵义敏)은1991년 북경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1928년 할빈에서 나는 통일전선사업의 수요로 여러차 ‘북만청년총동맹’조선독립운동조직을 찾아간적 있다. 그때 리고려(리원명의 가명)가 체포되기전에 그와 만난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체포된후 우리 당조직은 여러 방면으로 관계를 찾아 동북헌병사령원 류흥아를 설복하려 했다. 후에 장학량이 대사면을 하게 되여 리고려는 그해말에 풀려나왔다.”   출옥할 때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리워 집으로 돌아간 리원명은 온몸에 상처가 랑자했으나 여전히 견강한 의지로 복국독립운동과 항일혁명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후에 리원명은 조선공산주의자 리계동과 접촉하였는데 리계동은 리원명이 세번째로 접촉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이시기 공산주의영향을 받아 그는 항일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여들었다.   1931년 “9.18”사변후, 조선국적의 공산당원 장남운은 중국에 망명해있는 조선교민들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받고 쏘련으로부터 중국에 왔다. 먼저 리원명을 찾았는데 그들은 겉으로는 모피장사를 한다고 했으나 내막은 리원명을 통해 유격대가 필요한 군수품을 제공하는 할빈도외삼과수지구에 항일련락거점을 세웠다. 이때 리원명은 할빈성위군사위원회사업 책임자로, 후에는 파언공농반일유격대 참모장으로 된 조상지를 만나게 된다.     그해 가을, 리원명은 밤에 두번이나 조상지 등을 비밀리에 자기의 동생 리원국의 집으로 데리고 간적 있다. 파언공농유격투쟁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실패하고 일부 성원들이 왜놈에게 붙잡혔다. 변절자의 밀고로 하여1933년 초여름, 리원명의 련락점은 파괴되고 리원명도 일본특무기관에 체포되였다.   할빈일본헌병대는 그에게 잔혹한 고문을 들이댔다.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리원명은 “너희 일본인들이 조선을 삼켜버렸고 우리들은 중국의 동북으로 살길 찾아 올수밖에.”라고 꿋꿋이 맞섰다. 화가 잔뜩 치민 일본특무는 그를 허공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했다.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고 깨여나면 다시 혹형을 들이대면서 모피상과 유격대 및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쏘련공산당에 대해 대라고 하였다. 리원명은 모른다며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두달동안 고문하여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일본현병대는 전신이 만신창이 된 리원명을 일본령사관 지하실 특별간수소에 가두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대부분이 비밀리에 처형당하거나 혹형으로 죽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때 지하실의 감방에 파언유격대원3명이 갇혀있었는데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있었다. 한 전사가 나서서 조금 마른 가마니를 내주며 리원명을 그우에 누워 쉬게 하였다. 리원명은 일본을 류학한 처삼촌한테서 일본어를 조금 배운적 있어 몸이 약간 나을 때면 종종 일본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조선에 가본적 있는 한 젊은 간수장은 리원명의 처지를 조금씩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해18살인 나는 혹형을 받아 옷이 다 찢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로 지하감방에 갇혔다. 한 감방에 있는 리고려가 간수더러 더운물을 가져오게 하여 내 상처를 씻어주었다. 리고려는 외용약을 꺼내여 내몸에 발라주고 조선족들이 입는 흰옷 한벌을 꺼내여 내게 입혀주었다. 나는 너무 감동되였다. 리고려는 굳센 혁명자로서 몸이 그토록 심하게 상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조선독립군 사람이였다. 나와 리고려는 두달동안 감방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어떻게 적의 고문에 대처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조선의병운동으로부터 빈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말해주었고 거기서 나는 커다란 계발을 받았다. 당시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그가 적어도 공산당을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신앙한다는것을 긍정할수 있었다.∼”1933년10월 반일시위를 하다 붙잡혀 일본령사관 지하실에 같힌적 있었던 하능(서안광업학원당위서기)은1988년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 할빈당조직의 구출로 리원명은 마침내 할빈시 도외(道外)감옥으로 옮겨졌고 남강법원에 기소되여 공개심판을 받게 되였다. 당시 할빈호제회(互济会, 전문 옥중 동지들을 구출하는 기구)의 책임자 조상박(조상지의 친형)동지는1989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쏘련에서 돌아온 중공당원 장남운이 우리 호제회를 찾아와 원 할빈련락점의 리고려(리원명)를 구출해줄것을 간청했다. 나는 곧 관계를 통해 남강법원을 찾아서 법관에게 은화100여냥을 쥐여주었다. 내 기억에 남강법원은 ‘이 상인은 리익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불문하고 치안법규를 무시하며 산중 유격구에서 장사를 했다. 금지품을 도매해 적을 지원한 행위로 하여 징역8개월에 판결한다. 허나 이미 갇혀있은 시간이8개월이상 되였으니 즉시 석방한다.’고 판결하였다.”   리원명은 동생 리원식과 리원보에게 들리워 집으로 온지 얼마 안되여 상처가 너무 심한 탓으로1934년 3월 19일(음력2월5일)에 눈을 감았다. 그때 나이50세였다. 그날로 박순명은 리원명의 유복자 리현덕을 낳았다. 살림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은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 북만당조직에서는 장남운동지를 파견하여 리원명의 후사를 처리하고 로씨야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공동묘지는1958년 할빈시유원지로 개조되면서 그의 묘와 비석은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남편이 사망된후35살의 박순명은 가냘픈 녀인의 몸으로 올망졸망한 여섯아이를 데리고 완강한 의력과 두려움모르는 정신으로 운명에 도전했다. 비밀리에 독립군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왜놈의 추격을 받고있는 독립군 정찰원을 엄호해준 “죄”로 옥살이까지 하였다. 리원보와 리원국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1944년에 선후로 병사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여 항전이 승리하고 조선이 광복을 맞았다. 박순명은 눈물을 흘리며 “리원명이 살아있어도 겨우61살밖에 안되는데 몇십년동안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오늘을 기다리지 못했군요. 그래도 구천에서 기쁘게 웃을거예요.”라고 말했다.  일전 리원명탄신125주년기념일에 즈음하여 전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 전 국가민위주임, 현 통전부 부부장 리덕수, 전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전국정협위원 정순주는 각기 “영렬충혼, 만고류방(英烈忠魂万古流芳)”, “렬사정신수우주, 영웅호기관장홍(烈士精神垂宇宙英雄浩气贯长虹)”“충혼소일월 호기장건곤(忠魂昭日月浩气壮乾坤)”, “민족충렬, 천추만년(万古忠烈千秋万年)”, 이란 친필제사를 써주어 그의 정신을 높이 구가하였다.           오지훈기자  2009/01/23  (전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구술과 료녕성당사연구실의 리원명관련 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함)   
17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댓글:  조회:2786  추천:0  2012-01-06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서탑 홍성희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지금도 서탑 “구시장”이라 부르는 골목에 가면 유일하게 층집에서 연탄(장작)을 때는 4층건물이 있다. 1970년대 평양에서 도입한 조선건축공법으로 지은 건물인데 당시에는 신축건물로 이름났었지만 수십년 지난 현재는 서탑지역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축으로 당년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수 있다. 철거를 기다리다못해 많은 원주민들이 빠져나가고 지금은 로인들이나 외지세입자들만 살고있다. 일흔여덟의 홍성희할머니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면서부터 이곳에서 산지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은 두 아들 다 딴살림을 하고있으며 가끔 손녀가 와서 할머니를 동무해주고있다. 할머니는 둘째아들의 “퇴물”인 전자풍금을 갖다놓고 심심하면 치군하는데 악보를 배운적 없지만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70여곡은 무난하게 연주할수 있다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안중근의사의 고종륙촌녀동생 어머니가 생전에 안중근에 대해 특별히 들려준것은 없지만 두가지 일은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한가지 일은 어머니가 18살에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없어서 일가집에서 혼례를 치뤄주었는데 당시 고향인 황해도 해주근처에서 살던 안중근의 안해가 찾아와 옥양목속옷을 선물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는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홍할머니가 11살 되던해인 1946년 민주동맹에서 개원조선족중학교 회당에서 3.1운동을 기념할 때 어머니더러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어머니는 “안중근옥중가”까지 불렀다고 한다. 홍할머니의 어머니 곽희종은 안중근의사의 고종륙촌녀동생이면서도 의병대장의 딸, 혁명렬사의 어머니이다. 곽씨는 1912년 조선 황해도에서 곽재경과 안현경(안중근의사의 5촌고모)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곽재경은 성질 또한 불같아서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앞에서 굴할줄 몰랐다. 왜놈들이 흰옷을 못입게 하고 상투를 자를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버젓이 상투를 틀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초기에 그는 화승총을 쥐고 의병대장이 되여 선두에서 왜놈들을 족쳤다. 유년시절 곽씨는 안중근의사가 살던 천계동의 외가에서 근 4년간 살면서 한동네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막내녀동생 안익근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때 안익근은 그에게 가족사진첩과 안중근의사의 유상을 꺼내보이면서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중근옥중가”도 배워주었다. 당시 이 노래는 완전히 금지된 노래였다. 할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코리아독립만세!” 웨침소리로 하여 간담이 서늘해진 왜놈들은 이 노래를 엄밀히 단속하였다. 동네어른들도 애들에게 이 노래를 배워주는 곽희종이 걱정되여 “음전(애명)아, 너 아무데서나 함부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된다. 왜놈들이 알면 큰일난다”고 타일렀다. 그렇지만 어린 곽희종은 “이 노래는 우리 칠성오빠(안중근의 애명)가 감옥에서 왜놈들과 싸우면서 부른 노래”라며 열심히 배워주었다. 곽희종은 17살에 홍안표와 가정을 이루어 아들딸을 보았다.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에 왔건만 석달만에 장대같던 남편이 급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세상뜬 뒤 그는 재가하지 않고 모든 사랑과 정성을 오로지 두 남매에게 쏟아부었다. 곽희종은 2000년에 88세로 세상떴는데 돌아가기전에도 “안중근옥중가”를 불렀다고 한다.       오빠는 중국인민지원군 렬사 홍성희할머니의 오빠 홍성필은 홍씨집안의 3대독자였고 곽종희의 대들보였다. 개원에서 8.15를 맞고 이듬해 3월 곽희종은 17살나는 홍성필을 설득하여 해방군(당시 지방공안대)에 참군시켰다. 아들이 떠나는 날, 곽희종은 남매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성필아, 우리는 모주석과 공산당의 덕분에 광복의 날을 맞아 기를 펴고 살게 되였다. 너의 외조부는 의병대장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몸바쳤고 또 너의 칠촌외숙(안중근의사)은 빼앗긴 삼천리강토를 되찾기 위해 할빈역에서 일본침략괴수 이등박문을 쏴눕혔다. 너도 총을 메고 우리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이 잘 싸워라!” 홍성필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용감히 싸워 수차 공을 세웠다. 그는 참군하여 부대를 따라 동북해방전역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48년 동북해방 당시 제4야전군 118사 353퇀 정치처 견습참모로 되여 남진하여 평진해방전투, 해남도해방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홍성필은 다시 부대를 따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떠나기 3일전 홍성희는 어머니와 함께 개원에서 오빠를 만나러 단동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우리 부대는 곧 조선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인민군과 협동작전을 잘 벌리면 전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중조인민군대의 승리로 끝날것이다. 그때 오빠가 돌아오면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 한번 잘 살아보자꾸나!” 그런데 이번 상봉이 오빠와의 마지막상봉일줄을 홍성희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매불망 오빠가 돌아오기만 고대했던 홍성희모녀에게 불행한 소식이 날아든것은 1951년 봄철이였다. 신나게 국어랑독을 하던 홍성희는 “쟈는 제 오빠가 죽은줄도 모르네.” 옆에서 동학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얼결에 듣게 되였다. 촌정부에서 이 비보를 차마 모녀에게 전달할수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던것이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 모녀는 붙어잡고 련며칠 통곡하였다. 어머니가 아예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16살난 성희는 생산대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다. 전교 문오위원으로 노래 잘 부르고 활약했던 그 역시 강한 충격을 받아 과묵해졌다. 가난한 집 아이가 빨리 셈이 든다고 성희는 낮에는 생산대로동과 전선원호, 가마니짜기를 하는 한편 밤에는 피곤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951년 개원조중 초중반을 졸업한 그는 개원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되였고 모범교원의 영예를 지녔다. 오빠 홍성필은 조선전쟁에 나가서 1951년 1차전역때 21세의 어린 나이에 전사하였는데 결국 싸워보지 못하고 죽었다며 홍성희할머니는 가끔 눈물을 훔쳤다.         남편과 짝사랑에서 결혼까지 성희는 남편 윤유갑씨에 대한 짝사랑에서 종국에는 결혼에까지 이른다. 소학시절부터 성희의 사모를 받은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다름아닌 상급반학생 윤유갑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생김새가 시원하게 생긴 윤유갑은 학교 마라톤에서도 1등을 하여 녀학생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1948년 11월 2일 심양이 해방되자 윤유갑은 개원현공안국경찰대에 참가하였고 그후 해방군에 편입되여 장사군관학교에서 군사, 정치, 시사 등 학과정을 마쳤다.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사령부 소속부대에 배치되여 조선에 나간 그는 지원군총부 소재 평안남도 인평회창군에서 지원군공정지휘소 초대소 소장직을 맡고 각종 복잡한 임무를 완수하였다. 주요하게 동북에서 오는 참전부대를 인솔하여 지정된 목적까지 안전하게 보내주고 조선 각 지방과의 긴밀한 련계로 지원군부대의 활동을 적극 협조하며 수시로 적정을 알아내여 지원군총부에 보고하고 또한 최전선 부상병들을 후방근거지 혹은 동북으로 후송하는 등 임무들이였다. 윤유갑은 1차전역때부터 운산, 상소리, 덕천, 개천, 령원, 회령 등 묘향산맥 서쪽지구에서 적정을 살폈는데 임무를 훌륭히 완성하여 수차 공을 세웠다. 2차전역에서 제38군은 팽덕회사령관의 제의로 “38군만세”란 영웅부대로 명명되여 전군에 명성을 날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후 윤유갑은 초대소에서 사업하면서 주요하게  전선복구건설을 지원하였다. 1956년 5월 휴가를 맡고 고향인 개원에 왔을 때 오래동안 부대생활로 장가를 못간 로총각은 중매로 홍성희와 맞선을 보게 된다. 성희도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슴 한곳에는 윤유갑을 사모하고있었는지라 더없이 기뻤다. 그리하여 6월 5일 청춘남녀는 약혼사진을 찍었고 이튿날에는 윤유갑을 따라 렬차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단교와 복구건설이 한창인 조선의 산천을 목격하는 성희는 오빠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원군총사령부는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인 곳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여기서 성희는 윤유갑과 돌격식결혼식을 올렸다. 38군 소속 공정지휘소 지휘관이 주례를 선 간단하지만 뜻깊은 결혼식이였다. 결혼뒤에도 하나는 조선에서, 하나는 중국에서 서로 떨어져 살다가 1958년 남편이 귀국해서 심양중형광산기계연구소(현재의 화평구조선족소학교 자리)에 배치받은 뒤 밀월을 보낼수 있었다. 1963년 단위가 사천으로 옮겨질 때 자식교육때문에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여 남편은 심양소재 경공업부 심양판사처에 남게 되였다. 단위에선 일능수, 모범이여서 영예게시판에는 언제나 그의 남편의 사진이 버젓이 붙어있었다. 단위책임자도 “우린 대학생보다 로우윈(老尹)만 있으면 되오.”라고 그의 사업실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편과 성희의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어 남부러움없이 살았는데 1999년에 남편이 불시에 암으로 돌아갔다. “우리 남편같은 사람 정말 보기 드물어요.” 언제나 튼튼한 뒤심이 되여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던 남편, 그와의 로맨틱하였던 과거를 돌이키면서 홍성희할머니는 지금도 이렇게 남편자랑을 늘여놓는다.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홍할머니와 그의 오빠 홍성필 두 남매의 사이는 유별났다. 아버지없이 어머니의 사랑과 엄한 교육속에서 자라나면서 빨리 철이 들었고 성희는 오빠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오빠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마 믿을수 없었고 그토록 슬퍼했으며 조선에 나가는 날이 있으면 꼭 오빠의 묘를 찾겠다고 몇번이나 다졌는지 모른다. 1956년 7월 24일 방학기간 조선에 가서 윤유갑과 결혼식을 올린 성희는 이튿날 남편과 함께 지원군총사령부에서 1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을 찾았다. 부지가 9만평방메터인 렬사릉원은 1954년에 지어졌는데 130여명의 렬사들의 유골이 정중히 모셔져있었다. 정문에는 중조 두나라의 글로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이라고 새겨져있었고 정문중앙에는  “항미원조보가위국의 렬사들은 영생불멸하라”는 글귀를 새긴 돌기둥이 세워져있었다. 그 뒤면에는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라성교 등 전투영웅들의 화상이 있었다. 지원군의 조선전쟁을 반영한 청동조각상과 중조우의의 군상이 새겨진 비석 뒤켠으로는 희생된 지원군장령들의 유골이 모셔져있는 묘지였다. 성희는 렬사릉원으로 발길을 향하면서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다. 그러나 묘지의 맨 앞줄 중앙에 세워진 비문을 보고 화뜰 놀랐다. “모안영지묘”라고 쓴 묘비가 눈에 안겨왔던것이다. 설마 모주석의 아들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으니 일찍 모안영과 한 부대(제38군)에서 싸워온 남편으로서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성희 또한 학교에서 배운 모안영의 사적이 떠올라 감개무량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성희를 끌어당겨 모안영의 묘앞에 정중히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세번 절을 올렸다. 앞줄에서부터 하나하나 세면서 오빠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다. 어떤 묘비에는 이름과 소속부대가 적혀있는가하면 또 어떤 묘비에는 이름만 있었으며 지어 어떤 묘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의 묘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가로 훑고 세로 훑어봤지만 찾지 못하였다. 혹시나 해서 이튿날에도 계속 찾아봤지만 찾을길이 없었다. 안타깝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편이 처남의 유골은 아마 무명의 묘지에 묻혀있을터니 더 찾지 말고 고향에 있는 렬사릉원에 가서 참배하자고 하였다. 모안영의 묘를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성희도 남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주석도 보가위국을 위하여 조선전장터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또한 우리 가족처럼 무수한 가정들에서 혈육을 잃었다. 오빠는 조선민족의 아들로 고국에서 싸우다 희생되여 고국땅에 묻혀있는데 어디에 묻혀있은들 어떠하랴? 오빠, 고국땅에서 부디 고이 잠드시라. 오빠의 유골을 꼭 찾고야말겠다는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아들을 그리워하고있는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그후부터 항미원조기념일때면 부부는 심양항미원조렬사관을 찾아가 참배하였다.   취재를 마치면서 만년생활이 고달프지 않냐고 묻자 “자식들이 다 커서 제노릇을 잘하는것이 지금세월엔 효자다”라며 온돌방이 습관되여 15년째 이곳에서 산다고, 이 “보금자리”가 없어지기전까지는 이곳에서 계속 살고싶다고 하였다. 행복은 자기 스스로 창조하고 또 그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산다는 홍할머니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16    중일한 3개 국 문화비교와 조선족의 "탈령역성" 댓글:  조회:2932  추천:23  2012-01-06
중일한 3개 국 문화비교와 조선족의 "탈령역성" ㅡ재일조선족 중일한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와 대담(1)    이어령 전 한국문화부장관, 한국의 대표적지성인은 김문학씨를 “3국문화의 경계를 넘어선 ‘세계인’다운 특이한 목소리를 내고있는 독보적인 지성”이라고 평가했는가하면 일본의 한 유명 평론가도 “김문학의 글은 일본인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고 평했다. 그만큼 그가 십여년 동안 중일한 3국어를 구사하며 “월경하며 글쓰기”인으로서의 이뤄낸 성과, 사회를 보는 시각과 관점은 신선하고 독특하다. 따라서 우리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사색과 힌트가 클것으로 기대된다. 본지는 김선생과의 대담을 테마별로 게재한다.   기자: 김선생은 중일한3개 국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우세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3국비교문화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것으로 알고있다. 3국문화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목표는?   김선생: 사실 1980년 고중때 중일한 3국 문화비교의 연구학자로 되고싶은 꿈을 남몰래 키워왔다. 대학전공도 중문학부나 조문학부가 아닌 일본전공을 택한 리유도 장래 일본에 가서 3국문화비교를 하고싶어서였다. 대학에서 일본 문학, 문화를 전공하면서 3국 문화비교의 절박성을 느꼈다. 동양3국은 력사적 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가끔 문화를 육성해왔다. 그러나 이 3국에 대해 립체적, 포탈적으로 비교연구한 학자나 학문령역은 공백이였다. 나는 사실 조선족의 문화(언어우세)를 활용했던것이다.   본인은 중일한 3국어를 다 구사할수 있고 그리고 3자를 객관화시켜 또는 타자화시켜 바라볼수 있는 독특한 시야와 조건을 갖추고있다. 이런 문화적조건이 나를 3국문화비교학자로 변신시켰고 이 령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할수 있게끔 했다.   흔히 전통적 비교문화는 동양과 서양, 중국과 서양, 또는 일본과 서양하는 식으로 단순비교가 많이 이뤄졌고 또 서양과 동양의 비교는 이질적이여서 그냥 외관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다르다고만 해도 어느정도 그 의미는 있겠지만 마치 흑색과 백색을 비교하는것처럼 이미 그 이질성이 두드러져있어 별 의의가 크지 않다. 근대초기라면 몰라도 지금까지 와서 이런 비교는 그 의미가 더욱 미미한것 같다.   나는 한중도 중일도 일한도 아닌 이 3자를 어우른 포탈적비교를 하는것에서 비교문화의 새 의미를 찾았다. 즉 나의 리론대로 “근색(近色)비교원리”인데 류사한 색갈끼리 비교함으로써 그 차이점이 극명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같은 황색이라도 오렌지색, 귤색 또는 바나나색 이렇게 미묘하게 다른 이질성을 비교함으로써 그 동질성, 이질성을 세부로부터 비교분석하는 령역을 개척했다. 이래서 지금 나의 근색비교문화원리는 하나의 문화비교의 원리로 많이 원용되고있어 기쁘다.   기자: 중일한 3국은 같은 동양나라로서 공통점과 부동점도 있다. 이 3국문화의 가장 구분되는 점을 말한다면?   김선생:  3국문화의 차이점을 얘기하려면 적어도 몇권의 단행본의 분량이므로 나는 알기 쉬운 리해를 위해 한 글자로 그 특징을 표현하고저 한다.   굳이 3국의 문화를 하나의 한자로 표현하면 중국은 의(義)자, 한국은 정(情)자, 일본은 화(和)자를 들수 있겠다. 의는 의리를 자기인과 타자로 구분하여 합하는 세계로 재물이나 리익을 뜻하는 양(羊)아래 나를 나타내는 아(我)가 조합된 문자로서 결국 한족의 사회에서는 의리 역시 내 리익에 통할 때만 베풀어지는 행동원리, 가치관의 세계라는것이다. 또한 유교적인 혈연, 연고관계가 착잡하게 얽혀져 그 양상은 더 복잡하고 표리부동으로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정은 주로 감정적인 면에 편향되여 감정을 발로하는것이 한국인의 미덕이다. 한국인을 동양의 이딸리아인으로 부르는것 같이 한국인은 정서적기복이 크고 축구도 잘하고 자기주장도 잘 펴서 똑똑해보인다. 역시 유교적 주자학적인것이 체질화, 가치관으로 돼있기때문에 우리와 남의 이질된 범주로 준별(峻別)되며 따라서 이질된 타자에 불친절하고 또 타자리해에도 약하며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면이 있다. 정서적 순발력이 있고 감정(정서)이 고양되면 거대한 에너지가 생기고 강대한 일의 효과를 안아온다.    일본은 화의 민족으로서 서로 집단, 그룹내에서 모순과 갈등을 회피하고 자기주장을 되도록 그룹의 리익에 배반되지 않게끔 조절하는 성향이 강하다. 서로 너좋고 나좋고 그런 상대방 배려심이 강하고 이에 눌려서 눈에 트이는 언행을 삼가하고 늘 어딘가의 가치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행동원리가 3국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다.   중일한 3국인의 국민기질도 중국과 한국이 대륙과 반도가 련결돼있듯이 류사성이 많고 외향적기질이 많이 보여진다. 반면 일본은 대륙과 반도에서 동떨어진 섬나라여서 매우 이질적 기질성을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도 내향적기질이 강한 민족이며 일단 외향적으로 침략, 확장했다면 결국 그 성격스케일이 맞지 않아서 곧 실패해버린다. 이게 섬나라의 근성이라고 보여진다.   기자: 최근 일본외 중국과 한국을 자주 드나들며 특강하는 기회가 많은데 가장 깊이 느끼는 점이 있다면?   김선생: 중일한 3국에서 특강은 금년 3월에 이미 300차례를 넘었다. 특강 의뢰측과 상대에 따라 내용도 다르지만 나는 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로서의 본인이 해야 할 사명감으로 3국의 비교분석을 통해 상대방을 이문화(異文化)로서 리해하고 문화 경상(景像)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비추어보고 성찰, 반추하는 자타문화의 리해, 동아시의 상호리해와 화합 등에 대해 강조하려 한다. 자신의 앎(지식)을 통해 동양3국의 상호리해를 위해 국제파 지성인의 사명감을 지니고 나는 활동하고있다. 이게 내게는 너무 즐겁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즐거운 월경의 디아스포라(해외 유태인,다문화인)”, “지구촌민”이라 자칭하기를 즐긴다. 또 “고향도 포켓(호주머니)속에 넣고 다닌다”고 늘 말하군한다.   어떤 때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왜 중국출신인데 일본문화를 자신의 조국같이 사랑할수 있느냐? 중국, 한국,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잘 련대하여 화합할수 있느냐 등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역시 내가 느끼는것은 아직 21세기지만 상호간의 문화리해가 잘 이뤄지지 않았기때문에 나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박쥐”가 너무 필요한 시대라는 점, 문화의 경계를 오가며 창조적 글쓰기, 문명비교 연구, 비평 등 활동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는 실감이 들어 내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그만큼 절박성과 긍지감을 느낀다.                    오지훈기자  
15    중일한은 “매화문화권”의 문화동질성 강조가 더 바람직 댓글:  조회:3921  추천:27  2012-01-05
재일조선족 중일한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와 대담 (4) 기자: 김선생은 중일한 비교문화연구에서 독창적인 제기법을 대담하게 내놓고있다. 요즘 또 3국간의 “매화(梅花)문화권”을 주창한다 하는데 거기에 대해 설명한다면? 김선생: 지금껏 우리는 “한자문화권”이란 고정관념으로 동아시아문화의 동질성을 해석하는 인식학적인 코드(符%?만으로 편향했다.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나 새로운 21세기 동아시아문명을 해독(解fF)하는 코드는 한자리념보다 리념이나 고정관념을 넘어선 새로운 문화코드가 필요하다. 이어령선생님과 같이 2003-2004경에 제기한 설법이 바로 “매화문화권”이란 신코드이다. 서양에는 없고 동양에만 있는 매화(문화공통성)로서 정치적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문화적동질성을 제기함으로써 동아시아가 유럽련맹과 같은 공동체를 결성하는 인식, 해석학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게 그 취지다. 매화와 같은 동아시아의 문화콘텐츠를 구체적으로 발견, 또 그것을 글로벌텍스트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길이기도 하다. 한자문화권으로 동아시아를 통합하는데는 력부족이다. 같은 한자라도 중국은 한자전용(€{(用)문화권이고 한반도나 일본은 한자차용(借用)문화권이여서 그 내용적이질성을 내포하고있는것이니까 정치, 한자 등 통념을 넘어선 신통합의 기반이 필요한 시기다. 기자: 방금전에 이어령선생과 대담할 때 “매화문화권”을 거론하였다고 하는데 김선생과 이어령 등 중국, 일본의 지적 거인들과 친교에 대해 약간 언급해준다면? 김선생: 중한일 몇몇 거장들이 나에 대한 평가는 《김문학주의》 책 뒤표지에도 나와있다. 나는 이런 거목들과 망년지교를 갖고 또 그들의 관심과 가르침을 받으니 행운이라 생각한다. 이어령선생도 여추우선생도 일본의 스승님들도 한중일 3국어와 3국문화를 습득한 나를 부러워했다. 이는 나 자신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우리 조선족의 지적집단에 대한 선망일것이다. 전번 7월 《히로시마인에게 고함!》 이란 책이 나오자마자 히로시마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책을 읽은 마츠이(松井) 히로시마시장은 나를 접견하고 히로시마의 시정(市政)문화자문으로 많은 의견을 제출하라고 부탁해왔다. 동아시아 일류의 인물이나 일반 독자들에게서 받은 지지와 고무에 나는 늘 감사하며 좀더 문화적으로 업적을 남겨야겠다고 다지게 된다. 기자: 김선생은 또 국제안중근기념협회총회 부회장 겸 일본지회장을 맡고 여러 방면으로 안중근연구활동을 펼치고있다 하던데? 김선생: 수년전부터 이 직을 맡고 안중근의 유묵친필이나 관련 자료를 발굴, 수집하면서 안중근사상연구를 해오고있다. 안중근은 31년의 짧은 인생에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斷指)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 동안 공판투쟁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했을뿐만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 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시하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안중근이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련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페제도 이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견식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현재 유럽의 유럽련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 등 세계적인 공동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것이다. 한마다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쯤 인식하는데 머무르고있는것이다. 문인이자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금년 안중근순국100주년기념활동을 맞아 우리 국제안중근기념협회에서는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 《안중근의사기념화첩》출간을 준비중에 있다. 기자: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교류하였다. 김선생의 금후 목표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면? 김선생: 계속 월경하는 연구, 글쓰기를 하는것이다. 본업에 비교문화, 비교문명론연구이고 이제 “문화로서의 력사”란 의식하에 력사문제(특히 동아시아 근대사를 통합적 시각으로 비교, 비평하는 작업)에 대해 보다 심도있고 활발하게 전개하겠다. 《근대 재발견€?00년전 한중일》(본지에 련재중임)이 그 시작이고 또 현재 일본어로 집필중인 《사상가 안중근과 지성인 이토히로부미》가 그 하나이다. 테마는 너무 많다. 우리 조선족에 관해서도 《개조론》이후 작년에는 《신조선족월경론》을 발표했고 근년에 《조선족방법론(方法論)》을 준비중이다. 우리가 21세기 살아가는 방법, 방식에 대해 사상령역과 문화령역에서 구체적으로 론술할 예정이고 또 《조선족미래론》을 쓸 생각이다. 100년, 500년후의 독자들에게 이계의 타자들에게도 읽히게끔 상정한 작품이다. 나는 만 49세, 이제 50으로 들어선다.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는데 나는 내 천명이 바로 동아시아의 월경하는 글쓰기로 진실을 말하고 타자간의 이문화 리해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것이다. 이게 내 숙명이고 사명이다. 오지훈기자
14    수자 212,357의 의미 댓글:  조회:6788  추천:0  2011-12-23
수자 212,357은 지난 12월 20일, 2012년 상반기 한국방문취업 및 기술교육 대상자 4만 2천명에 선정되기 위해 사전신청을 지원한 중국조선족의 수자이다. 10만의 예상수치를 훨씬 넘어선 수자여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수 없다.   아직도 이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코리안드림”속에 빠져있는것이 중국조선족사회의 현주소이다. 중한수교전부터 시작된 한국행은 약장사에서 “불법체류”의 불명예를 쓰기도 했고 현재는 한국방문취업으로 이어지고있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2007년부터 방문취업제가 실시되면서 총 40만명이 이미 방문취업비자를 받았다.   또한 농촌뿐만아니라 도시에 사는 조선족도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한국행을 희망하고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특히 이번 신청자중 20~30대의 젊은이수가 무려 1/3을 넘어서고있어 더욱 우려를 자아낸다. 주류사회에 진출하여 자기의 지혜와 재능으로 삶의 기반을 넓혀나가야 할 이들이 너무 쉽게 한국행을 선택하고있으니 말이다.   “코리안드림”이 조선족사회에 부를 갖다준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족 상당수가 한국에서 3D업종에 매달려있어 산재 등  여러가지 위험에 로출되여있다. 한국로무에서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기술교육이나 부단한 “충전”을 통해 자기의 창조가치를 배가시켜야 한다. 저가인력에서  고가인력에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방문취업제도가 한국어시험에서 무시험, 사전신청으로 바뀌여 한국행이 편리해졌다해서 너도나도 무작정 이 “코리안드림”이란 한나무에 매달리려 한다면 보다 건강하고 조화로운 중국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예약하기 어렵다고 본다.   “코리안드림”,인제는 그의 득과 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이고 단순한 한국행을 사회적인 시너지효과가 있는 한국행으로 유도하고 또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유용하게 쓰며 소자본으로 창업하는 사회적풍기를 조성하고 제창하는것도 바람직하다.  
13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과 “탈령역성” 댓글:  조회:8859  추천:39  2011-12-16
재일조선족 중일한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와 대담 (3)  기자: 중한수교후 이뤄진 “코리안드림”은 중국조선족사회에 희비가 엇갈리는 지대한 영향을 주고있다. 김선생도 우리 민족의 진로에 많이 고민하고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김선생: “코리안드림”이란 조선족들이 월경을 통한 한국 로동, 생활을 말한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이는 1990년 랭전체제가 무너진 뒤 세계적글로벌화의 바람속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월경이동의 시기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솔선 모국인 한국을 향한 인구이동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 조선족의 이런 월경은 식민지시대 조국을 등지고 왔던 경로를 “역이동”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조선족사회의 해체”라는 위기설이 범람하고있는데 사실 역시 그 인구가 이동된 공간만큼 조선족사회의 해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시점을 달리하여 조선족의 구조적특징이 시초부터 “월경이동”이였다고 보면서 우리 자체의 특성이기도 한 “월경이동”에 대해 랭철히 바라보고 사고하는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작년 “신조선족월경론”이란 책을 집필했는데 조글로와 미국의 니카사이트에 련재해 큰 반응을 일으켰다. 1980년대이후 우리 조선족의 월경을 새로운 글로벌화의 시각으로 조명하고 월경하는 조선족을 새로운 개념, 즉 “신조선족”으로 정의짓고 그 특징, 양상을 세계적 내지 동아시적 문명권안에서 고찰 비교 분석하였다. 중국내에서는 대도시안에서, 해외에서는 제각기 신조선족의 집단공간을 형성하고있으니 토지, 땅에만 의존하던 우리 원래의 농민체질의 문화공간을 이미 고차원의 도시문명권안에다 이동했으니 이는 사실 기꺼운 일이다. 세계의 우리 한인집단은 다 도시문명권에서 영위되고있으며 높은 문화를 자랑하고있다. 재일동포가 그렇고 재미동포도 그렇다. 이런 중국조선족의 “월경이동”을 “탈령역성”이라고 할수 있다. 기자: 조선족의 “탈령역성”에 대해 좀더 설명한다면? 김선생: 여기서 령역이란 중국에서 오래동안 살아온 터전을 말한다. 조선족의 “탈령역성”은 근년에 내가 제기한 새로운 설법인데 우리의 월경의 구조적특성에서 여러 나라, 도시안으로 이동월경하여 생활하며 새로운 민족집단을 이루는 성격을 일컫는다. 100년전 조선족이 한일병합으로 인해 중국으로 이주했다면 100년후인 오늘 다시 자신의 주거지경계를 넘어 새로운 이동하는 령역을 고착시키지 않고 탈하여 선진문명권에서 이문화를 습득하며 중층(重/?)적 정체성을 형성하고있다. 조선족의 “탈령역성”은 플라스면만 잘 살리면 그것은 새로운 조선족민족집단의 형성을 의미하며 선진문명권의 신조선족집단을 의미하게 된다. 기존 공동체에 조선족이 없어져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있는데 기실 그 공간에 있던 조선족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것뿐이며 대조선족집단이 이제는 여러곳에서 분산행으로 소집단을 형성한것뿐이다. 또한 선진문명권에 이동한것은 조선족의 숙명이며 그 탈령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것을 어떻게 살리고 발휘시키겠는가 고심해야 바람직하다. 이미 피페되거나 소실된 농촌마을을 그냥 한탄하고 부정적으로 “해체”로 포착하기보다는 이제 새로 형성된 도시문명권의 우리 집단을 어떻게 살리고 우리 고유의 경계성을 발휘할것인가 부심해야 한다. 나는 이래서 조선족의 미래는 오히려 밝고 경계를 사는, 다층 정체성 인간으로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민족집단의 모델로 될수 있다고 본다. 재일조선족이 바로 이런 신민족집단의 모델로 부상돼 주목받고있다. 중한일 3개국 언어, 문화와 중층적 정체성을 소유한 경계인으로서 또 고학력, 고차원 문화인이 많아서 동아시아공동체와 련합에 있어서 그들의 특이한 고차원의 문화지적(知的) 역할이 갈수록 가시화되고있다. 우리는 이런 다층(多層)적 조선족의 집단을 보아야 하며 또 예전의 하나의 고착된 정체성만이 아닌 중층적 문화정체성을 갖고있는 신조선족의 밝은 면을 인식할 시점에 와있다. 정서적인 비판론은 오히려 근거있는 락관론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욱 백해무익하다. 기자: 김선생은 해외의 초청특강에서 “문화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데 우리 민족한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영향을 줄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선생: 상세한 말은 략하겠으나 현재 경제자본에만 편향되고 물질추구에 리념없는 조선족(중국인 포함)현상태에 대해 그 해결책으로 문화자본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자는것이다.  중국조선족은 단지 경제자본만 아니라 문화자본도 추구해야 하는것이 큰 과제다. 문화자본 중심의 전통(자식공부를 시키는 등 문화중시전통)을 지닌 우리 민족이 중국 내지 세계에서 살아나는 길은 경제자본도 하나이지만 더 중요한 요소는 유연한 문화자본이다. 일본인도, 유태인도 기실 다 문화자본주의로 승부를 걸었고 그것으로 성공하고있다. 조선족의 21세기비전은 문화자본주의밖에 없다. 문화자본주의는 유연해보이나 오히려 경제보다 더 강하다. 마치 로자가 얘기했듯이 “땅땅한 이가 로화되면 썩어져 없어지지만 유연한 혀는 늙어서도 남아있다”. 이런 유연한 문화자본주의가 우리를 유연한 파워로 살아남게 한다. 조선족이 이에 좀더 중시하고 의식적으로 의식전변을 하였으면 한다.
12    문학인보다 문화인으로 사고하는 시각을 키우라 댓글:  조회:4788  추천:76  2011-12-02
재일조선족 중일한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와  대담 기자: 김선생이 문학인으로 소문나기는 중학시절때부터인것 같다. 장백산잡지에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련재하면서 문화비평학자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지향하려는것이 있었다면? 김선생: 2001년에 장백산에 련재한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은 조선족문화지도를 바꾼 전무후무의 “사건”이였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당시 일본서 류학하면서 조선족의 현상에 대해 매우 고민하다가 우리의 민족체질, 우리의 생활방식, 즉 문화를 갱신하는 절박성을 느껴 비교문화적으로 이 글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나는 시리어스(과격한) 문체와 독설(毒說)문체를 구사함으로써 그 효과를 노렸다. 결과 예상이상으로 반향이 너무 컸다. 이 원고를 장백산에 보내면서 남영전선생님께 “장백산이 폭격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십시오”라고 편지에서 썼는데 과연 그런 무서울만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제 개조론 문화반성, 천근성문화, 경계성, 디아스포라 등 낱말과 의식이 이 글로 인해 전파, 수용 보급되고있다. 조선족문단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다. 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로서의 나는 우리의 문학, 문단에 대해 늘 문화적 대시야에서 조감({4瞰) 또는 충감(_훗?하고있다. 조감은 하늘에서 내가 거시적으로 내려다보는 시각이고 충감은 땅우의 개미나 벌레가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인것이다. 이 량자의 시각으로 우리의 문학, 문단을 고찰하면 우점과 단점을 다 볼수 있다. 기자: 그렇다면 작금의 중국조선족문단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김선생: 우리가 복수의 언어와 문화를 알고있기때문에 많은 문화를 접촉하고 앎에 유리롭고 그것에서 받는 계발, 지적자극도 그만큼 풍부하고 크다는것이다. 우점은 다 아는 사정이니 이만 접어두고 단점에 대해 지적하겠다. 우선 우리 작가들은 독자가 없어졌다. 독자질이 낮아졌다고 한탄하는데 나는 그 역(逆)으로 외려 우리 작가, 평론가가 제공하는 작품의 가치성이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우리 작품의 질이 외려 개혁개방초기 80년대-90년대초기보다 떨어졌다는것이다.  우수한 문학작품은 동시대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어휘에 리얼리티(現實)를 부여하여 누구나 모르던 개념의 의미를 리해시키는것이여야 한다.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닫혀진 사고와 감성의 페역(閉域)에서 끌어내여 이적인 적계 즉 이계(異界)를 보여주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문학, 철학, 자연과학의 책도 그 가치는 역시 “세계에 대한 충격도”에 의해 고량(考量)된다는 점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안주하고있는 세계에서 귀렬(龜列)을 뚫고 그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것들이 거기서 분출돼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포나 불안같은 경험이기도 하며 또한 해방, 해탈 및 유쾌, 쾌감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동시에 가능케 해주는게 곧 “문학”이나 “사상서”의 힘이다. 내가 보건대 우리 문학에 쓰고있는것은 “사상”이 아니라 모종의 서로 공감할것이라고 막연히 안주하고있는 안일한 “이데올로기”뿐이다.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은 사상은 나 자신의 독립적 고립적인 자각이며 이데올로기는 압도적으로 많은 대다수가 나와 같은 의견을 갖고있을것이라고 하는 무근거적인 느낌인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데올로기는 작품을 더 좁은 세계로 페색(閉塞)화시키고 사상은 넓은 이계에까지 퍼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의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村樹)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공감받는것은 그속에 사상, 공감 공명을 환기시키는 사상적요소, 세계적요소가 “이계”까지 전파되는 매력이 지대한것이기때문이다. 작가라면 의례 우선 “아득히 먼 독자”에게도 전해질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는것이다. 시간 공간적으로 떨어진 독자들에게도 읽힐수 있는 그런 리더블일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조선족을 위해 독자설정이 우선 좁다. 례를 들어 심양이라면 작가들은 왠지 수필, 내향적인 에세이, 녀성적 섬세한 수필에만 치중하여 독자층을 이미 좁게 설정해버리는 과오를 스스로 범한다. 이 좁게 설정하는게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할수 있다. 우리, 우리 조선족 또는 우리 심양, 료녕 동포만 설정하며 자신과 가치관이나 미의식을 공유할수 있다는 “우리”의 독자만을 상정(想定)하여 그 “남들” 즉 “타자, 외부”에 대해 발신할 생각이 없는것 같다. 우리 조선족(또는 료녕조선족)문학이 독자를 획득하지 못하는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그 “협소성”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문학, 평론의 “사정거리(射程距離)”를 더 넓게 설정하여 시공간적으로 먼 독자를 상상하면서 글을 쓰는게 바람직하다 긴말을 짧게 요약하면 우리의 시야의 협소성, 상상력의 미약성, 문학을 단지 글의 기교로만 보는 사고력, 구상력의 결핍성, 급급히 발표해 명성을 날리려는 경부(輕浮)성으로 인해 문학을 위한 가난과 무명을 참고견디는 프로다운 견인성이 다 부족하다. 기자: 비교문화학자로서의 독특한 견해다. 앞으로 우리 문학인이나 작품이 한차원 업그레이드하려면? 김선생: 앞으로 우리 문학은 그 협고성을 리탈해 더 넓은 이계의 독자를 설정하여 쓴다는 그런 의욕과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학이 문화활동의 일환이므로 문학의 글쓰기로만 보지 말고 문화인으로 사고하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 한마다 더 부언한다면 내가 보건대 현재 중국조선족문단의 중심은 이미 연변이 아니다. 중심은 구조적해체를 이루어 이미 “탈중심, 다양성”의 기꺼운 현상을 이루고있다. 이런 현실속에서도 우리가 아직까지 연변문학계에 그 기준을 두고 계속 그것에로 쏠린다면 하나의 우거(愚擧)일수 있다. 연변문단은 더이상 중심도, 본보기도 아니다. 이미 문화, 문학의 변경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가 매우 농후한 연변의 문학적기질에서 탈피하여 그 조잡하고 거친 언어나 구성, 작품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외람된 말일수도 있지만 김학철문학의 “투사문학” 그런 “20세기형 모델”이 우리의 우상, 또는 모델이 되여서는 우리 문학, 문화는 더는 발전하기 어렵다는것이다. 우리가 21세기의 문학에서 립장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좀 더 넓은 “이계”의식을 가져야 한다. 료녕이라면 료녕조선족의 인문, 문화환경, 글로벌환경을 활용하는 그런 새로운 문학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우리 작가들이 여기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아 유감이다. 이제부터 이런 국면을 타개하여야 한다. 료녕은 문화, 국제적 인문환경이 다 넓은 시야와 사고를 제공할수 있는 동북에서 최첨단의 환경, 위치에 있다는것을 우리 료녕작가들은 망각하고있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기업가, 자산가들이 우리 문화, 문학을 위해 자금이나 물심량면의 지원이 좀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싶다.
11    소통의 힘 댓글:  조회:3645  추천:0  2011-11-29
소통의 힘      21세기는 소통의 시대로 사람과 사람지간, 인류와 자연지간에 모두 소통과 조화를 강조하고있다. 먼저 닫혔던 자신의 마음을 열고 대방과 진지한 교류를 해야만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수 있다.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빚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처세에서 언변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소통하면 풀기 어려운 일도 풀수 있다는 뜻인것 같다. 최근 조선족사회에서는 주심양한국총령사관에서 파격적으로 시행하고있는 사증령사면담제에 대해 대단히 반기고 감사하는 분위기다.   그만치 “코리안드림”에 매달려있는 조선족들은 령사관과의 소통을 갈망하였다. 지난 1999년 심양에 령사사무소가 갓 섰을 때 본지에서는 전화안내원들의 불친절 등으로 민원인들의 불만이 크다며 령사관의 문턱을 낮춰달라고 호소한적 있는데 10여년간의 공관장들의 간단없는 내부시스템개선, 민원편의서비스창출 등 노력으로 령사관의 문턱이 매우 낮아졌는데 2010년에는 행정개선 최우수공관으로 선정되였다. 최근 몇년간 주심양한국총령사관은 해외공관중 관할지역내 조선족이 가장 많은 점을 감안해 사증업무와 관련된 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 령사관홈페이지내용 쇄신과 재외동포비자발급대상 확대, 개별사증신청 접수에서 사증신청인들이 사증거부원인을 가장 알고싶어하는 점을 감안해 홈페이지에 거부원인에 대해 해명하고있으며 금년 8월부터는 아예 사증령사면담제를 전격 도입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있다.   3개월간 800여명과 면담을 통해 400여명을 구제해주었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래부터 비자신청량이 해외공관중 최다로 사증업무가 초부하인데 령사면담제 도입으로 담당령사는 물론 직원들까지 사업량이 늘어나 수고는 이를데없다. 과거에는 가장 불만투성이여서 “령사관놈”들이라고 욕까지 했던 민원인들로부터 최근에는 감사의 편지가 잇따르고있다 한다.    령사관은 또 경제사랑방, 문화사랑방 등 여러가지 만남의 장을 통해 조선족 경제, 문화교육인들과 폭넓은 교류와 리해의 문을 열고있다. 열린 자세, 열린 마음, 파격적인 조치에서 한 공관의 변화를 기껍게 바라보며 소통의 힘에 대해 다시한번 느껴본다.   석천  
10    되돌아보는 감사절의 의미 댓글:  조회:3776  추천:2  2011-11-29
금년 11월 24일은 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추수감사절 또는 감사일이라 하는데 기독교신자들이 한해에 한번씩 가을곡식을 거둔 뒤에 하나님께 감사례배를 올리면서 기인되였다 한다. 1620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청도교들은 다음해 가을에 첫 수확을 거두자 감사한 마음으로 례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후에 미국대통령 링컨이 매년 11월의 네번째 목요일을 감사절로 정하면서 미국의 감사절기념행사는 우리 나라 음력설 못지 않게 성대하게 기념되고있으며 점차 구미의 전통명절로 전해내려오고있다.    우리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서방의 기념일이 들어와 젊은층들속에서 점차 선호되고있는가하면 상가들에서는 이런 서방명절을 호기(好机)로 리용하고있다. 언제부턴가 달력에도 우리 나라의 전통명절과 함께 감사절도 표기되여있다.   감사절이 다가오면서 상점에 들어가보면 여기저기에 감사절 판촉이벤트가 눈에 띄이고 매스컴에서도 감사절 부모나 은인에게 드리는 좋은 선물이라는 상품광고의 빈도도 높다. 물론 상품판매를 위한 판촉수단이기는 하나 한번 감사절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어느때보다 금전욕이 팽배되여 우리 사회는 갈수록 부모와 자식, 친척, 이웃 등 모든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사막화”되여가면서 “오아시스”가 더욱 필요한 시기다. 이번 추수감사절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한번 가져보고 그 감사메시지를 사랑에 담아 전한다면 우리 주변은 순간이라도 사랑으로 넘치지 않을가.   지난해 이런 일이 발생해 전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바 있다. 한 빙상운동선수가 시상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하여 귀국후 체육관원한테 나무람당했다는 소식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회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경직되여있는 면이 많고 상호간 소통과 리해, 사랑이 너무 린색하다.     감사절을 계기로 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사랑하는 부모님께, 지식의 물꼬를 틔워준 존경하는 스승님께,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전화 한통 해보는것도 감사례배를 드리는것 못지 않게 의미깊은 일인것 같다.     작은 일에도 항상 감사한 마을을 갖고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것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가 한다. 
9    친일문학과 최삼룡선생 댓글:  조회:2944  추천:15  2011-10-20
친일문학과 최삼룡선생 Author:관리자 Date:10/20/2011 전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최삼룡 친일문학하면 일본에 친근하고 일본을 구가하는 문학으로 인식되여왔고 우리와는 거리가 멀어 별로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일전 “김문학씨 70권 도서출간식” 참석차 심양에 온 전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최삼룡선생(72세)과 대화를 나누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 되였다.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와 2005년에 출간한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중 문학사(산문과 시) 집필에 참여하였다. 또 《해방전 친일문학자료집》 출간(2002년)을 토대로 2008년에 《해방전 재만조선족친일문학선집》을 출간하였다. 이 책자는 2009년 한국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중국에서는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친일분자가 청산되였기에 친일문학을 거의 제기하지 않지만 해방전 문학관련 자료를 정리 발굴하면서 친일문학의 존재를 느꼈다고 그는 소감을 밝혔다. 하여 력사를 정시한다는 차원에서 친일문학관련 자료를 수집 발굴하여 책자까지 펴냈다. 《해방전 친일문학자료집》은 연변대학 도서관의 자료에 근거해서 발굴한것이라면 《해방전 재만조선족친일문학선집》은 세미나차 한국에 간 기회에 사비를 털어가며 한국국회와 연세대학의 귀중도서실과 열람실에서 수집 발굴한것이다. 강경애의 “간도여 잘 있거라” (룡정에서 쓴 글), “두만강례찬”은 연활자체에 복사체로 오랜 책자여서 어떤 글자는 희미하여 부득불 현미경으로 확대해 정리하는 등 간고한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선생은 이러한 자료들은 중국조선족들이 처음 보는 글이라며 “우리 민족의 문학사는 물론 정신사 연구에서 필수자료”라고 했다. 그가 발굴한 자료들은 한국이나 조선에서 여직껏 발굴하지 못한 자료들이여서 더욱 값지고 귀중했다. 박팔양은 카프에서 탈퇴한 뒤 1937년에 만주로 가 일본인들이 꾸리는 신문 《만몽일보》(만선일보로 개명)에서 사회부 부장을 맡았고 1940년에 만주제국협화회총회 상무리사로 전근되여 조선인대표로 왕정위 등 친일파들과 친일활동에 참여했으며 “청목팔양”이라는 일본이름으로 여러수의 친일시를 창작했는데 이번에 최선생이 발굴해낸것이다. 광복후 박팔양은 조선에 가서 평양 김일성대학 교수, 《로동신문》 부주필, 작가협회 제1부위원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또 다른 중요자료로 당시 연길에서 “대친일주구”로 불리웠던 김동한(전 쏘련공산당 당원에서 일본이 만주에서 만든 협조회 회장을 맡고 항일투사 1천여명을 귀순시키는 등 친일행적을 하였다가 항일투사에게 가목사에서 피살당함. 일본제국주의는 연길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욱일훈장”을 수여)을 구가하는 장막극을 카프성원이였던 김영팔이 창작했다는것 역시 그에 의해 발굴되였다. 또 “대동아전쟁과 문인의 각오” 라는 동제목으로 일본식민지침략을 구가한 글을 여러 사람이 써냈는데 그가 11편을 찾아냈다. 한국에서 한편만 찾아내도 신문 톱기사에 나갈만큼 중요사료라 한다. 중국조선족소설의 기초를 닦은 김창걸도 역시 친일글을 썼다. 이에 대해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글을 몇편 썼다하여 모조리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된다며 문학에서 친일행적과 성향을 따져보고 문학인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즉 의식에는 친일경향이 있으나 그 내용의 밑바탕에는 민족애환이 담겨있다면 고려할바라는것이다. 해방후 조선에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 리찬은 당시 유명한 친일작가였고 조선의 유명한 작가 송영도 친일연극을 많이 창작한 사람중 하나다. 그러나 청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작가협회 요직을 맡았는데 “조선에서 줄을 잘 섰다”는 평이다. 친일은 력사문제로 당시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만주국건립의 건국리념을 찬양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구가하고 반공을 주장하는 등 친일행적 여부로 친일문학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따라서 최근년에 한국 모 방송에서 재일조선족 중한일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를 친일명단에 포함시키고있고 중국조선족문단내 일부 사람들도 그를 친일파로 오해하고있는데 “현시기에는 친일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엉터리”라고 일축했다. 김문학씨의 문화평론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중국조선족문학거두였던 김학철선생이 작고하기 몇달전 “집중포격은 금물이다”는 글에서 “괴재”라고 평가한것처럼 학자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성과, 그리고 그의 문학장(文學場)이나 문화장(文化場)은 조선족가운데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그가 해내고있는것이라고 직언했다. 최선생은 김문학씨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에서 연변대학 교수들을 북경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보다 의식이 못하다고 폄하하고 연변지역인과 중국 기타지역인을 분리시키고 장단점들을 죽 렬거하여 연변문단의 집중포격을 당한바 있는데 비교문학의 관점으로 조선족의 렬근성을 잘 지적하였고 또 그가 자기의 여러 책자들에서 중한일 3국의 차이점을 잘 들어내고있는데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 없다고 했다. 또 중국조선족문학이 세계로 진출한다고 제기한지는 20여년이 되였지만 김학철외 김문학씨를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며 그러나 해외에 나간 조선족지식인들을 “신조선족”으로 지칭하는 등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문화자본주의” 등 혼동하기 쉬운 제기법을 나름대로 제기하는것에 대해 공중지식인으로 책임감을 갖고 더욱 신중성과 과학성을 기해야 한다며 아쉬움도 드러냈다.                       오지훈기자  
8    군침이 도는 2011명분의 대형 비빔밥 댓글:  조회:2824  추천:0  2011-07-27
7월23일, 제12회중국미식절 및 제10회국제미식박람회가 심양올림픽체육관에 펼쳐져 료리사들의 기능과 재량을 자랑했다. 대회기간 한국음식조리경연대회도 동시 진행되였는데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주방장들도 중국에서 전통 한식알리기에 나섰다. 2011년을 상징해 2011명분의 대형비빔밥을 즉석에서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무료로 시식케하여 중국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지름이 3메터인 큰가마솥에 36가지의 나물과 한국에서 들여온 5년묵은 고추장, 갓짜낸 참기름 등 갖은 양념에 150㎏의 쌀을 넣어 주요 래빈들이 즉석에서 비빈비빔밥퍼포먼스에 관람객들이 대거몰렸다. 비빔밥을 나눠먹은 중국인들은 "맛있다(好吃)"를 련발하며 한식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료녕신문 오지훈기자]
7    백청강의 승리 1, 2, 3… 댓글:  조회:4184  추천:30  2011-06-14
               백청강의 승리 1, 2, 3…                                                      석천    연변의 23살의 당당한 신세대 백청강이 지난 5월 27일 한국 MBC “위대한 탄생”에서 단연 우승을 거머쥐면서 연변의 사투리인 “앙까(압니까)” 단어가 널리 알려질 정도로 백청강의 이름과 함께 백청강의 효과가 중국과 한국에 조선족의 새로운 “코리안드림”과 함께 신드롬을 만들어내고있다.      백청강이 7개월간의 대장정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동남아 등 나라에서 온 300여명의 경쟁상대를 뚫고 쾌거를 이뤄낸데 대해 언론매체들은 “백청강의 승리”에서 “연변의 자랑”, “조선족의 승리”로 대서특필하였다. 한국이나 조선족 언론은 물론 중국신문넷 등 중국 주요 언론매체에서도 그의 승리와 상금기부 등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고있다.     백청강의 승리에 조선족들은 환호하고 그의 성공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있다. 필자는 백청강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백청강의 승리내면에 잠재한 몇가지 현상을 짚어보려고 한다. 우선 그의 성공은 인간 백청강의 불굴의 노력과 도전의 결과이다. “코리안드림”으로 하여 많은 조선족아이들이 그러하듯 부모가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그도 결손가정의 아픔을 감수했고 술집에서 공연 아르바이트를 뛰며 가수의 꿈을 열심히 키워왔다. 따라서 백청강의 승리는 조선족세대들에게 역경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갖고 노력하면 성공할수 있다는 신심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있다. 다음 한국에서 더는 흩어진 모래알이 아니라 뭉쳐보려는 조선족의 힘을 과시했다. 한국내 쟁쟁한 대상들과의 겨룸속에서 백청강이 이길수 있었다는것은 최근년에 적극적으로 다문화정책을 통한 한국의 공정사회 구사와도 관계되지만 또한 이번 오디션이 심사위원들의 평가와 시청자들의 문자투표로 진행되는 특점을 감안하면 재한조선족들의 적극적인 투표가 백청강을 역전과 함께 최종 승자로 등극할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백청강의 승리는 “조선족의 승리”라고도 할수 있다.     백청강의 승리가 더욱 돋보이는데는 우승후 약속대로 한화 5천만원 상당의 현금과 물품을 보육원 등에 당당하게 기부하여 한국사회에 감동을 선사한데 있다. 어찌보면 그의 기부는 한국내 실추된 조선족이미지 개선과 동시에 한국사회에 훈훈한 중국동포의 정을 뿌려주었다.     백청강의 한국에서의 쾌거는 격변기속에서 몸부림치고있는 조선족사회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었을뿐만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조선족의 성공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다. 따라서 그의 승리는 한국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상을 높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백청강이 한국에서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6    민간단체도 이런 책임을 댓글:  조회:3461  추천:65  2011-05-23
  얼마전 한 민간단체의 상무리사회의에 참가한적 있다. 금년 사업요점 확정이 회의 주요의제였는데 협회의 "로령화" 화두가 나오면서 회장은 삽시에 열띤 분위기로 변했다.   누군가 40세이하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있다며 특히는 과학연구소, 대학교분야 조선족젊은엘리트로 구성된 우리 협회도 이런 추세로 나가면 5-10년뒤 협회의 존속도 어렵다고 했고 또 갈수록 학생원이 매년 줄어들고 또 대학졸업후 남방이나 외국으로 많이 류실되고있는것이 현실이라 하면서 수수방관할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부터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등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동안의 여론끝에 과학연구소나 대학교에서 조선족젊은인재를 심도있게 발굴하는 동시에 입회 문턱을 낮추어 조선족중학교의 골간교사들도 흡수하고 년령층을 “80”에서 “70”에로 확대하여 “젊은피를 많이 수혈하자”는데로 의견이 모아졌고 조선족중학교 중층이상 간부들을 영입할데 관해 구체인원분공까지 했다. 또한 조선족학생들이 어려서부터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기 위해 조선족중소학교가운데서 과학기술발명활동을 적극 조직 창의하자고 하였다.   “민족인재의 발굴, 양성은 우리 협회의 미룰수 없는 책임이다. 이는 협회존속에 관계되는 문제일뿐만 아니라 민족생존과 미래발전에 직관된다” 이 협회 책임자의 말을 들으면서 민간단체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민간단체는 말그대로 협회원들간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다. 그렇다고 만나서 술잔을 나누면서 지나간 회포를 푸는데 그친다면 별 의미가 없다고 할수 있다. 이 몇년래 산재지역 민간단체의 역할은 이 범위를 넘어서고있는데 어떤 민간단체는 "범정부"의 역할로 개혁개방시대 외자유치, 지역경제발전에 일조하고있을뿐만 아니라 이 지역 조화로운 조선족사회건설에도 이바지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나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등 여러 민간단체들이 최근년에 민족사회 경제문화발전을 위한 노력과 기여에서도 기껍게 찾아볼수 있다. 여러회를 이어오는 조선족 민속절, 유원회나 불우학생돕기, 기금모으기 등 여러가지 행사와 활동들은 단순한 행사범위를 벗어나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민족전통을 보존, 전승,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한층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주지하다싶이 민간단체들은 초기 어떤 목적을 갖고 “탄생”하였든간에 과거의 단순한 친목도모의 단체가 아니라 새로운 력사격변기에 들어서서 민족운명과 맥을 같이하고 그 지역 조선족사회의 응집력을 구성하고 구심점역할을 하는 단체로 발전하고있다. 본지 “민간단체 민족공동체구축의 진두에 서야” (1월 1일자) 이 글에서도 민간단체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여러방면으로 깊이있게 전개한바 있는데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고 생각된다.    주류사회발전에 적응할수 있는 민족후세대의 양성은 물론 새로운 시기 조선족사회정체성 보존, 민족공동체구축에 있어서도 우리 민간단체들의 역할과 책임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하고 막중한것 같다.  석천
5    인제 식탁거리가 두렵다 댓글:  조회:3382  추천:71  2011-05-23
  석천   30년전만해도 별로 먹을거리가 없어 걱정이였는데 요즘은 먹을거리가 넘치지만 먹기가 두려운 시대다.   요즘 뭘 사먹나?  매일 유독식품을 먹고있으니 팔십은커녕 륙십도 제대로 살가? …   요즘 신변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니 아닌게아니라 식품안전이 가장 무섭다.   3년전 유아들의 분유에서 멜라민성분이 검출되면서 오래동안 잠자고있던 중국내 식품안전이 화산처럼 “분출”된것 같다. 최근년에는 가짜보다 더 무서운 유독성 첨가제를 넣은 식품이 우리의 주변에 더욱 넘쳐나는판이다. 올 들어 유독성 첨가제를 사용한 콩나물과 생강, 유해색소를 첨가한 옥수수만두, 또 식용금지의 약물인 클레부테롤 등을 섞은 돼지고기가 류통되다 잇따라 적발됐다. 요즘은 "불임오이"까지 나와 세상이 이런 일이 할 정도로 중국식품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있다.   심양에서 “유독콩나물”이 적발된지 얼마안되여 "불임오이"사건이 터졌다. 광동과 섬서 두성에서 동시적발된 이 “불임오이”는 생장촉진과 신선도유지를 위해 피임약을 사용해 재배한 오이로 "피임약사용은 오이재배농가들사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은 먹지 않으면서 시중에 버젓이 류동시키고있다.   누리군들은 "무엇하나 안심하고 먹을게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중국식품안전이 최근년에 이렇게 심각해진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우리 나라 문호개방과 더불어 서구의 사고방식과 금전욕, 물질욕이 점차 사람들의 의식속에  침투되면서 돈밖에 모르는 일부 부도덕한 장사군들이 첨가제의 기준치를 초과하거나 유독성 첨가제를 사용하여 식품안전을 크게 위협하고있지만 이에 따른 법률적제도가 완선화되지 못한데 있다. 또한 식품안전에 대한 언론감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면도 홀시할수 없다. 외국언론도 중국언론이 정부를 도와 언론감독의 채찍을 들었다는 평이다. 어찌보면 중국이 언론을 통해 식품안전을 강화한다는 강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가짜, 모조상품 범람으로 “짝퉁이천국” 별호까지 붙은 중국, 식품안전에 서서히 초비상이 걸리고있는 가운데 유독식품을 만들어내거나 류통시키는 자는 무조건 사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있다.    음주운전 단속이 그 어느때보다 강화된것처럼 식탁거리에 대한 보다 완선화된 관리제도와 식품범죄에 대한 보다 엄하고 단호한 법률적조치가 필요하다.
4    "제구실"과 "찬밥신세" (석천) 댓글:  조회:3617  추천:45  2011-03-31
"제구실"과 "찬밥신세" -석천어릴 때 “언제 저놈이 제구실을 하겠냐”며 푸념반 걱정반 하시던 부모님의 말이 생각난다. “제구실”이란 언뜻보면 “언제 철이 들겠는가” 하는 뜻과 통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책임”을 말하는것으로 중국어의 “분내사(分內事)” 혹은 지금 사회적으로 사용빈도가 높은 “작위(作爲)”나 “유위(有爲)”로 말할수 있다.  “우리가 제구실을 해야 사회에서도 우리를 더 지지하고 후원해줄것입니다.” 대련시조선족학교 김영실교장의 말이 새삼스럽고 감명깊다. 그만큼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해서 가치를 창출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그만큼 떳떳하고 의의가 있다는것이다. 학교졸업식에서 사회적후원이 줄을 이었다는것은 단순하게 경제적후원 차원을 벗어나 학교가 학생들의 다방면 능력양성에 쏟은 심혈과 그 노력에 대한 긍정이고 응원이다. 어찌보면 중점대학진학에 편중하는것보다 졸업한뒤 사회에 진출하여 취업할수 있는 길을 넓혀주기 위한 하나의 대담한 실천이다. 또한 무작정 사회에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것보다 퍽 효과적인 학교 “수익창출”의 루트이기도 하다.   제구실을 한다는것은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 작게는 개인이나 가정에서, 크게는 사회와 민족을 볼 때 그가 갖는 의의와 영향은 매우 크다. 그만큼 자기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자기가 설 자리를 찾을 때만이 비로소 제구실을 거론할수 있다. 만약 제구실을 못한다면 우리 앞에 차례지는것은 “찬밥신세”다.  21세기 격변의 시대를 맞아 타민족에 비해 우리의 우수성이 많이 떨어지고 주류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립지가 점점 좁혀지는것은 우리가 제구실을 못하고있다는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경제기반이 위축되고 민족간부가 신속하게 줄어들고있는 현실에서 스스로 제구실을 한번 깊이 따져보는것도 필요한것 같다.                                
3    이젠 우리에게도 “면허증" (지훈) 댓글:  조회:3628  추천:56  2011-03-31
이젠 우리에게도 “면허증”    -오지훈    “중국동포도 한국취업에서 ‘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일전 한국직업전문학교 한 관계자가 전산탈락자(C-3)들의 한국내 취업을 설명할 때 한 말이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무연고동포의 한국어시험에 의한 방문취업제도 실시로 하여 4년동안 8만 9000명이 H-2비자를 쥔 반면에 한국어시험 합격자 9만 7천여명이 전산탈락자로 대기중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래년부터 한국어시험제도를 페지한다고 공고한 한편 전산탈락자들에게 한국체류 90일짜리 C-3을 발급하였다. 또 최근에는 C-3비자로 입국하여 지정 연수 및 교육기관에 가서 교육을 받으면 D-4비자로 변경하여 취업도 시켜주고 주말(토,일요일)에 1년간 수료하면 H-2비자로 변경되고 또한 6개월안에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면 바로 H-2비자로 변경하여 취업 또는 영주권 취득까지 가능한 제도로 이어지고있다.    국가기술자격증이 바로 “면허증”이다. 과거의 저급인력에서 일정한 기술을 습득하면 고급인력으로 업그레이드되여 한국내에서도 당당하게 취업할수 있고 귀국해서도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것이다.   실로 우리의 코리안드림은 뼈아프고 가슴저린 20세기 아리랑 영탄곡이라 할수 있다. 우리의 코리안드림은 중국 문호개방과 더불어 80년대말 90년대초 친척방문을 빌미로 한국에 나가 약장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친척방문은 한정된 범위내에서 허용되여 한국에 한번 나간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그러다 수교가 되고 친척방문의 길이 점차 트이면서 조선족사회는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해외로무붐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1997년 한국 IMF  경제위기 발생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한국내 조선족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로 전락되였다 . 2007년부터 무연고동포에 대한 방문취업제도 실시로 하여 한국에 가 합법취업을 할수 있는 길이 열리긴 했으나 “코타”제한으로 하여 상당수가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다.   전산탈락자(C-3)들에 대한 이번 조치는 어찌보면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회이자 도전이다. 재한조선족들중 당당하게 자영업자로 운명을 바꾼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식당이나 부동산중개 등 서비스업소 사장으로 된 사람이 1천여명을 헤아린다.   21세기를 맞으며 한국은 외국인 120만명의 다문화시대에 진입했다. 120만명 외국인중 약 40만명이 조선족으로 재외동포정책에 걸맞게 중국조선족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배려가 마땅히 돌려져야 하며 우리도 “면허증”을 갖고 자기의 운명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한다.
2    프로필 댓글:  조회:2641  추천:44  2011-03-31
오지훈   ☏: 024-2269-8212 E-mail:wxc21@163.com
1    “소금사재기”와 국민자질 (석천) 댓글:  조회:4090  추천:55  2011-03-23
“소금사재기”와 국민자질                           -석천 일본대지진은 순식간에 일본동북부를 페허로 만들었고 곳곳에 차마 눈으로 볼수 없는 참상만 남겨놓았다. 9.0의 강진과 10여메터의 높이에 시속이 헬기속도를 릉가하는 해일의 파괴력에 인간은 전률했다.    주변국은 물론 세계가 모두 이어지는 일본 원전폭발에 따른 핵물질 확산에 대한 심한 공포와 우려로 휩싸여있을 때 중국에서 난데없는 “소금사재기”사태가 벌어졌다. 외신에서는 “‘나비효과?’…일본도 깜짝 놀란 중국의 ‘소금사재기’”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16일부터 소금사재기열풍이 광풍처럼 광동, 복건, 절강 등 남부지방에서 일어 하루사이에 북경을 지나 동북3성을 덮치더니 중국 전역이 갑작스런 “소금공황”속에 빠져들어간것이다. “소금샀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전하는 첫마디 말이다. 대형할인점은 물론 서민들이 주로 리용하는 재래시장까지 소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소금매진현상이 이어졌고 소금을 구하지 못한 일부 식당은 당분간 정상적인 영업을 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염업총공사는 소금의 재고량이 충분한만큼 사재기할 필요가 없다는 긴급통지문을 내고 또 중국 소금의 대부분은 천일염이 아닌 광산염으로 바다오염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위생부도 소금이 방사선피폭을 치료한다는것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으며 과다 복용은 오히려 심장병과 고혈압을 유발할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인들사이 방사성물질이 바다물에 섞여들어가면 앞으로 생산될 소금이 오염될 가능성이 있고 또 요드성분이 든 소금을 먹으면 방사선피폭에 의한 부작용을 예방할수 있다는 설이 퍼지면서 이번 사태를 초래한것이라 한다.   그러나 주목할점은 정작 방사선피폭이 현실로 드러난 일본에는 소금사재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도꾜시내의 슈퍼와 편의점을 취재한 중국 기자는 라면, 물, 건전지 등에 품귀현상이 나타나고있으나 소금은 정상 류통되고있다며 일본인들이 중국의 소금사재기를 리해하지 못하고있다고 전했다.   너무나 판이한 대조이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그렇게 엄청난 자연피해를 겪으면서 슈퍼앞에 질서있게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광경을 보고 놀랐을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시장경제질서가 잘 되여있기도 하거니와 국민들의 자질이 보편적으로 높은바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크다.   최근년에 물가가 마구 뛰면서 나타난 “쏸니헌(蒜你狠)”, “떠우니완(逗你玩"  “탕꼬우중(糖高宗) ” 등 신조어와 같이 “옌스니(盐死你)”라는 신조어가 나타날가봐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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