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http://www.zoglo.net/blog/jskim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김인섭

전체 [ 75 ]

55    효도의 최선책、차선책、차차선책 및 발전책 댓글:  조회:2352  추천:0  2017-05-17
전통적 효도에는 선조를 공대하고 타계 후에도 어김없이 봉상(奉尝)하는 효행이 포함된다.그러나 세월이 변천을  거듭하면서 오늘의 그 내용에는 심각한 변화가 발생하고 방식도 다양해 지고 있다.과거에는 선배들을 잘 모신다는 덕목에 도덕적 무게가 실려있었지만 오늘에는 노인들의 노후 보장이라는 합성명제로서 풀이되고 있으며 법제와 도덕규범을  주선으로 하는 노인복지란 과제로서 정부사업의 의사의정에 오르고 있다. 사회의 변천으로 가족 형태가 대가족에서 핵가족화에로 전환되는 것은 물론 평균수명의 증가、인구의 고령화、사회구조의 변화、 경제구조의 변화,경제의 파동성 등으로 하여 노인에 대한 가족의 직접적 부양 기능이 날로 약화되고 자식들이 부모와 동거하는 환경이 대대적으로 축소되어 재래적인 가족관은 거의 전복되고 있다.하여 가정이 노년 부양의 주요 책임을 지지만 정부와 민간적 차원에서도 참여한다는 여러가지 대안들을 제출되고 있다.따라서 노년 생활도 자식과 동거,독거,양로원 및 기타 복지시설의 의탁 등 그때그때 자기 형편에 알맞는 시의적절한 대책으로 방향을 찾고 있다. 하여,사회 관념과 생활 환경이 하루 다르게 변하는 때  불거지는 노년부양 문제에 대하여 효도를 정신 골자로 하는 부양자와 피부양자 및 정부와 사회가 공감하는 적실한 시책과 새로운 가정철학의 확립이 절실하다.   A.최선책 부모들의 제일 희망은 자식들이 공부、명예、권력、금전 등 모든 것을 거머쥐는 영재가 되는 것이겠지만 결국은 제 노릇을 거뜬히 해내며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때문에 자식으로서 내가 잘 자라는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첫째 효도이고 ‘자식농사 풍년’이란 자랑거리를 안겨 주는 것이 최상의 공경이다. 자기 사업을 정착시키고 번영시켜야 힘이 커지고 경제적 여유가 생겨 부모에 대한 말그대로의 부양이 이루어진다.내 지갑이 두둑해야 대접 받는 부모가 흡족할 것이고 내 주머니가 달강거리면 효행은 효행이되 부모님의 가슴앓이로 전화된다.돈이 제갈량인 세월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한 세태인데 ‘궁하면 조상 제사 못 지낸다’는 세상사를 명기해야 한다. 어느 나라는 설문조사로 효도의 베스트3(最优前3位)을 뽑았는데 ‘부모 걱정을 없애는 것、자기 육신이 건강한 것、부모님을 자주 방문하는 것’ 등 순위었다.현실미가 풍기는 이 잠언은 들어 둘 말이다.   B.차선책. 노인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부양자 노인들의 의식변화도 부차적으로 중요하다.부자간에 바라는 효도 목표와 기준이 변화되고 있으며 신세대가 개성을 추구하고 전통과 리탈하는 어쩔수없는 경향을 인정해야 한다.노인들은 자식들이 부모를 돌보는 기회가 급속히 줄어드는 현실에 립각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서 오해 발생을 피면해야 한다.  노년자들은 그때그때의  생활 문제를 자식들과의 관계를 상경하애(上敬下爱)와 지독지정(舐犊之情)이라는 륜리 기준에서 되도록 독자적으로 타개해야 한다.자식들께 의존하지만 최대한의 자력으로 노후를 만들어가고 자신만의 생활 령역을 지켜기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결국 어떤 방식이든지 모두가 한계점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며 자식들의 복잡한 상황을 잘 고려하면서 자기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특히는 부양을 받지만 자식과 사회의 형편을 염두에 두고 걱정하고 심려해야 한다.   C.차차선책 전통적인 윤리는 변화에 흔들리어 이젠 그 효도관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으로 되었다.​이 과정에서 부모의 존재를 외면하거나 혹은 유산이나 돈에 눈이 멀어지는 일부 겨레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더구나 독거하거나 자립이 어려운 부모를 내물라라는 패륜적 남녀들이 있다는 소문도 간혹 들려온다. 이 사실은 노년자 권익의 보호를 위하여 특정 책임자들에게 자율적인 도덕적 책임을 강요하는 동시에 타율적인 법률로서 강제집행을 명령할 필요성을 부각시킨다.물론 이런 상황은 복잡한 조건에  따라 조성되지만 사회는 여론이 질타하는 륜리적 분위기를 만들면서 부양 의무에 대한 법제적인 위엄성을 조성해야 한다.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하여 부모자식 간에 자산을 구분하여 소유하거나 어색하고 씁쓸하더라도 부자간 혹은 자녀들 간에도 효도계약서를 작성하여 책임을 확인하는 것도 까다로운 처리에 도움이 되게 된다.   ​ D.발전책 노인복지는 개인과 가족 뿐만 아니라 결국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하여 풀어야 할 사업으로서 안정된 국가적 시스템이 필요하다.여기는 유력한 정책 수립과 강력한 여론 환경이 수요되며 행정수단으로 각 당사자들의 책임을 고착시키고 형평성을 조절하는 정부의 행동이 필요된다. 노인복지는 돈을 준다는 사은(赐恩)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시스템공사이다. 여기는 문제 발생 이후 해결해 나가는 수동적 서비스와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고 사전 대책으로 예방하거나 발생 즉시 비상시스템이 작동하는 주동적인 정부 서비스가 포함된다.이런 주수동(主受动)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대응 구조는 노년문제에서 악재 발생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고 사회적 원가도 대량 절감하는 특효를 보게된다. ​  무의탁 노인들은 정부가 꼭 부담할 사안이지만 전체적인 의무에서 보면 가정、사회와 민간이 분담하고 각종 상업방식을 도입하여 유한한 자금과 자원이 노인복지에서 최대의 작용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례하면 정부 경로시설,민간 양로원,노인복지 기업,노인복지 학교 등등의 방법으로 노인들의 생활을 보장함과 동시에 그들을 고립감과 소외감에서 해탈시키는 최대의 환경조성을 해야 한다.그들에게 최대한의 자립적 능력과 심리적 안정을 찾아주고 불의의 사건에 자아 대처하는 기능을 제고시켜여야 한다.이러한 다양한 조치들의 종합적 관리는 오로지 정부만의 몫이다.   귀납한다면, 효도는 력사에 따라 시대색을 가지게 된다.자식,부모,정부가 튼실한 일체화 관계를 이루며 노인복지를 풀어간다면 정부는 인륜적 가치를 부흥시키는 효도 수호신이 되고, 자식은 효도를 숭상하는 효자효부로 되고, 불효자는 불치인류(不齿人类)의 마크를 달고 다니며,노인 자신은 만년을 즐기는 사회 구성원으로 되게 된다.이 사회는 바로 효도 사회이다.  (끝)
54    부패 범죄의 내외적 원인 댓글:  조회:1941  추천:0  2017-04-25
‘새도 림종 때 울음이 애처롭고 사람도 운명 때 마음이 착해진다’는 격언이 틀림없는 같다.최근 몇년에 줄줄히 락마한 탐관들이 엄벌을 받고 ‘이럴줄 알았으면 왜 그랬갰어!(早知今日,何必当初)’를 들먹거리여 땅 꺼지듯 장탄식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이 위인들의 삶의 궤적을 보면 그래도 다수는 원래 인간다운 인간들이었다는 인식을 떨칠 수 없었다.그들이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초기에 원천적 방지책과 방화벽이 적용되었다면 나락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나라와 인민에 기여하는 사표(师表)로 될 가능성이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의 반성문이나 편집자들의 평론을 보면 대체로 범죄 원인을 세계관 개조.인생관 수립,가치관 오판,자률 정신의 부족 등등 관념적 요인이거나 사상 교육의 부재와 같은 외부적 작용에 귀결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이는 인간의 본성과 외부 조건간의 인과 관계를 도착(倒错)시키는 사고 방식으로서 ‘병을 오진하고 투약이 무효’되는 결과를 배태하게 되고 부패 척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사물의 발생과 발전에는 내외적 원인이 동시 작용하며 내인은 주인(主因)이고 외인이 부인(副因)이며, 내인은 변화의 근거이고 외인은 변화의 조건이며, 외인은 내인을 통하여 작용하고 일정한 조건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오늘의 반부패도 이런 인과순환분석의 철학적 시각에서 착안해야만 정확한 실마리를 찾아내고 유력한 방침을 수립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 생리욕망 외 여러가지 자아 발전과 명예 추구의 욕망을 가지게 된다.이 욕망은 인간이 생존하는 기본 조건이며 사회 발전 동력이기도 하다.그러나 그는 외부의 자극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전환하고 끊임없이 높아가는 특성이 있다.이 욕망은 긍정적 발전을 추동할 수고 있고 혹은 탐욕으로 변하여 사회의 법제와 윤리의 한계를 넘는 악행과 부패의 근원지로 된다.어느 인간에게 권력이 부여된다는 것은 이 지배력과 강제력이 욕망을 추구하는 개체와 ‘공사합영(公私合营)’의 통일체로 된다는 것인데 권력과 사욕이 종이 한 장을 사이 둔 이웃으로 자리잡게 된다.그중 인간 육체에 내포된 자기 욕망 우선 만족의 본능이 바로 직무 부패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권력은 타인에게 자기 뜻을 관철하고 그를 유도하거나 통제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그는 사회와 타인에게 재부를 창조하는 기회도 만들거니와 자기의 사익을 차리는 기회도 만들 수 있는 특수한 다기능을 가지게 된다.권력의 이런 특성으로 하여 우선 권력자의 본능적 욕구를 수시로 유발시키고 외래적 유혹을 야기하는데 어느 순간 ‘공기,온도,습도’ 3자가 걸맞는 임계점이 형성되면 팽창하여 부패의 검은손으로 변한다.권력자에게 대해 말하면 부패의 기회는 유무가 아닌 다소일 뿐이다.만약 제도와 그 운행에 결함이 있거나 혹은 심중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공포가 없어 사상적 브레이크를 상실하였다면 부패 독버섯은 수시로 틈을 찾아 아귀를 내밀게 된다.이것이 바로 부패의 외인이다.   그러나 본능적인 욕망을 부정적으로 과장하여서는 안된다.인간은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체로 개인적 수요를 조절하여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고 도덕적 영예와 자아 가치를 실현하려는 희망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이 정신은 야망을 억제하는 강대한 힘이 된다.이 긍정적인 욕망의 에너지를 발휘시키기 위하여 권력 운행의 투명한 환경을 조성하고 감독,고무,장려,승진,처벌,징계 등 법적 환경과 완벽한 대중적 감독 평가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행정관리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개괄하면 권력을 새장에 가두는 동시에 행위 규범의 레드라인(红线)하고 설정하고 감독,고무와 경고의 경종이 끊임없이 울리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욕망에는 만족이라는 지표가 없다.반부패의 투쟁의 본질은 결국 부당한 욕망을 억제시키고 긍정적인 욕망을 부활시키는 지속적인 영원한 사업이다.그러므로 부패 척결 방식은 간단히 타격한다는 보수적인 방법이 아니라 방미두점(防微杜渐)이란 예방 대책과 발본색원(拔本塞源)으로 견결히 적발하는 ‘콤비네션블로(组合拳) 전법’이어야 하는 것이다.이렇다면 아름다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문명,민주,법제 정신이 관철되고 공직 사회에 록색 환경이 조성되면서 표리겸치(表里兼治)란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등소평의 ‘좋은 제도는 악인을 호인으로 전화시킬수 있고 나쁜 제도는 호인을 악인으로 만들게 된다’는 론단의 의미를 곰곰히 새겨봐야 한다.우리가 정치적,경제적,법제적,문화적,사상적 면에서 제도적 합력(合力)을 형성한다면 부패는 설자리가 없어 해매일 것이고 ‘상병자를 치료하여 사람을 구하고’ 동지들의 륜락을 저지하게 된다.더 유의미한 점이라면 공직 사회에는 우승열패(优胜劣败)의 선순환(善循环)이 형성되어 반부패의 장기효과메카니즘(长效机制)이 형성되는 전략적 의미가 있다는 이것이다.  . (끝) 2017-04-22 흑룡강신문
53    다가오는 지능정부 댓글:  조회:1907  추천:0  2017-04-03
현재의 전자정부는 시간、공간、부문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신속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인민의 복지 향상과 사회의 변혁을 추동하고 있다.그런데 이것이 태어난지 언제인데 지능정부가 느닷없이 부상하여 새로운 변혁을 재촉하고 있다.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 지능정부 건설을 제4차산업혁명의 선행 사업으로 확정하고 국가적 전문위원회를 설립하여 추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국가적 전략으로 강력히 추동하고 있다.   제1, 2차 산업혁명은 오프라인(现实空间)에서의 인간 생태의 변화이고 제3차산업혁명은 온라인(网上空间)에서 이뤄지는 세계화 변혁이라 한다면 제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시킨다는 정보통합 혁명이다.공무원이 부재인 조건에서 인공지능이 사물인터넷(物联网), 클라우드(云计算), 빅데이터(大数据), 모바일(移动电话),로봇 등 기기들을 연결하여 진행하는 참신한 공공 사무가 보급이 시간적으로 좀 남았을 뿐이다.전자정부 조건에서 공무원이 정확、투명、신속、편리의 원칙에서 작동하였다면 지능정부는 지능기기들이 무인 상태인 좁디좁은 공간에서 방대한 정보 자원을 자율적으로 검색하고 판단하며 결과를 도출해 내며 어떠한 부정이나 불량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변화의 징후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사례로, 영국에서 자기 주택의 신축을 신청하는데 자기의 신원을 인증시키고 지점을 입력해 넣으면 챗봇(聊天机器人)은 자동으로 모든 지리환경、관련정책、주의사항、지속서비스 사항들을 제시해 주는 동시에 수요에 따라 서면 답복 서류를 제출해 주고 수속의 비준 여부를 즉시 마무리 한다.신청 사안들을 종이 서류가 필요없이 신청자 인증 하나로 원패스(一次性通过)식 쾌속처리 행정을 벌이고 있다.현재 우리 주변에서 핸드폰으로 음성통신,화상통신,서류전달.문서작성,전자결재까지 수행하는 가상 행정을 지능정부 맹아로 보아도 무방하다.   지능정부 조건에서는 지능기기들이 모든 분야와 부문의 지리적、시간적、공간적인 장벽을 부시고 관련 정보를 통합하여 자률적으로 행정적 방법론과 해결안을 제시하고 추후의 모든 필요 사안까지 고지하는 역을 담당한다는 것이다.이는 불가피적으로 전통적인 정부 구조의 개혁을 압박하고 사업 인원의 대량적 감축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의 관리 방식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초래할 것은 불 보기보다 더 뻔하다.맑스의 유물사관대로 고민한다면 새로운 생산력의 탄생은 생산관계와 상부구조를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인 바 이러한 충격적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참신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회를 선도해 가는 공무원들은 비록 자신의 업무에 안주하여 소관을 챙기고 다양한 리해 관계를 따지더라도 지금부터 반드시 변하는 앞날에 대한 청사진을 립체적 사고로서 그려야 할 것이다.아직도 제2차와 제3차 산업혁명시대의 관습과 행태가 농후한 현실은 넘겨야 할 고비지만 이것이 미구하여 사회 적폐(积弊)가 된다는 밝은 사상으로 미래를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와 촉진제를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을 지어야 한다.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미래를 주도할 내 아이들을 위하여 구격화되는 어정쩡한 대졸자를 만드는 구습에서 벗어나 참신한 세월을 리드할 수 있고 창조성이 있고 소통 능력이 강한 일군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부어야 한다.   이다.인공지능이 판을 쳐도 사회가 인간 중심이라는 주류는 개변될 수 없다.우리는 눈앞에 다가온 미래를 보고만 있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내 후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명철한 사색을 일으켜야 한다.특히 공직자들은 추격 전략에서 벗어나 개척자로 화려히 변신하고 신생사물을 포옹하며 시대를 선도해야 사회와 백성들이 시대 물결을 순리롭게 타고 간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끝) 2017-03-04 흑룡강신문
52    미래 일자리의 열쇠 댓글:  조회:1904  추천:2  2017-03-29
인공지능을 표지로 하는 제4차산업혁명에 가속이 붙으면서 국내외 매체들이 미래의 일자리를 자주 주제로 다루고 있다.일부 선진국들은 이 이슈 단계를 넘어 실제적 개발과 적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미래의 일자리 변화와 파생하는 사회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안을 제시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사물인터넷、3차원프린트、자율자동차 등 새 사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며 새 시대가 10~ 20년이 아니고 당장 2~3년 이후라는 긴박감을 가지게 한다.작년 12월 미국 아마존그룹은 시애틀에 대형 무인마트인 '아마존고(AmazonGo) 매장을 선보였는데 넒은 마트에서 소비자는 스마트폰으로 인증을 거친 뒤 물건을 가지고 나가면 된다.구매품은 컴퓨터 센서(传感器)가 기록하고 대금은 고객이 등록해 놓은 신용카드로 자동 지급이 된다.이 시스템이 일반화되면 미국 내 일자리 350만개가 사라진다는 계산이다.독일 아디다스는 인공지능、사물인터넷、빅데이트、로봇이 결합된 로봇 곳장을 현지에 세우고10명의 인력으로 년간 생산량 50만쌍의 신발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었갔다. 인공지능 의사로 불리는 ‘왓슨’은 환자의 진료 기록과 증상을 근거로 방대한 자료들에서 최적의 치료법 제안을 도출하는데 웬만한 전문 의사보다 월등한 병진단과 치료 방안을 낸다고 말한다. 기존 일자리가 대량으로 인공지능 기기에 대체되면서 물량이 크고 매출을 오르면 고용 증가와 이어지던 법칙이 옛일이고 명문대 졸업이면 상등 직종을 차지하던 시대가 바야흐로 지나가고 있다.   작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일자리의 미래》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7세의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면 65%가 지금 없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예측이다.이것은 미래의 일자리에 대하여 충분한 준비를 가져야 한다는 경종이다.이것은 새 시대를 앞두고 기성 세대들은 내 후대를 육성한다는 시점에서 심각히 고민해야 할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그러므로 력사의 맥박을 짚어보며 자식의 인생 첫걸음을 어느 길의 출발선에 세워야 하는가는 단안을 내려야 한다.    지능화시대는 과학기술의 대융합 시대로서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은 융합적 지식과 기능의 소유자여야 하고 동시에 몇개 부문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인공지능의 뒷바침으로 지식의 장악과 연구개발은 전례없이 빨라지고 쉬어지며 전통적인 생산、유통、분배、소비 구조가 뿌리채로 바뀌고 사회관리 방식의 전환도 사실화로 되고 있다.노동자는 일생 동안 적어도  두개 혹은 3개 이상의 직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근무시간、근무장소、근무규제 등 근무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하루에 두개 이상의 직장 근무도 가능하게 된다.전제라면 융합형 전문지식과 기능을 소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능사회에서 상기의 기본기능 이외의 핵심적 경쟁력은 무엇일 것인가?즉 기계가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령역인 언어、사유、감성교류 능력과 능동적인 정보의 수집 및 활용 능력이다.또 여기의 핵심 인프라는 인간의 사유와 교류 도구로서의 언어 기능의 고저이다.인류 사회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이유는 언어에 의한 교류가 있기 때문이다.《언어의 장악과 활용이 인류 발전의 열쇠이고 인류의 최강의 무기이다》는 잠언은 정확한 론단이다.초고속으로 운행되는 지능사회에서 언어 기능과 범위에 따라 그의 발전 터전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결론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로 부터 추론하여, 제4차산업혁명 시대의 조선족의 경쟁력 우위라면 조손이 전승하고 국가가 지원하는 중한 이중언어이다.최근 매체에서 료녕성 조선족 후대들이 대량적으로 민족교육을 이탈하고 있다는 멧세지를 보았다.여기에는 사회원인、경제조건、거주조건、교육환경 등 복잡한 원인이 작용할 것이지만 부모들이 조선어에 대한 ‘평가절하’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아직도 진학 유일이란 진부한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변해가는 세상을 외면하고 있다.지난 날 민족어에서 이탈시킨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후회막급하는  심성(深省)의 볼멘소리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인공지능의 어떠한 신통한 기능도 결국 인간이 설정한 기능의 반복이다.그의 어떠한 마법도 인간 언어를 대체할 수 없다.조선족의 이중언어는 타민족이 침을 흘리며 선망하는 대상이 된지 오래다.언어 가치가 폭등하는 시대에 조선어는 일자리를 파고드는 만능열쇠는 아니라도 천능열쇠 쯤은 충분히 되고도 남음이 가득할 것이다.  (끝)   2017-03-27 길림신문  
51    민족 요람의 수호자들 댓글:  조회:2069  추천:2  2017-01-25
정유년 닭해를 맞아 회사들이 송구영신 파티를 벌이기에 열을 올리며 다사다난했던 병신년을 뛰어넘어 제구포신(除旧布新)한다며 희망을 부풀리고 있다.나라가 펼치는 뉴노멀(新常态) 시대의 새로운 전략에 부응하여 회사의 위기 상황을 반전하여 새도약의 기회로 만들어 회사를 리드해 간다는 단골말들도 부지런히 등장한다.그런데 제살이가 시급하여 사고팔고(四苦八苦)의 난항을 겪으면서도 민족 후손들의 성장에 온정을 보내주는 회사들과 모임들이 이 동네에 여럿이 있다.   요즘 어느 회사의 년말 총화 모임에 참가하여 하루를 보내였었다.대낮 행사를 마치고 저녁은 뜨거운 기분을 무르익히며 파티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마지막은 느닷없이 몇몇 명가들의 명화 몇점을 경매에 내부치는 절목이다.결국 여러 지성인들의 을 거쳐 경매를 낙찰시켜 몇만원의 경매액을 실현하였다.이 금액은 이 동네 조선족학교와 에 지원금으로 보낸다는 것이다.이 회사 뿐만이 아닌 여러 회사들과 단체들이 늘 여러가지 방식으로 모금하여 지원한다는 멧세지이다.내 식구와 내 무리들과 민족문화 발전을 동시에 아랑곳하며 후대들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내는 진정에 감동 이외의 찬사가 따로 없었다.   이 동네 조선족 학교는 력사가 오래고 진학율이 높아 지역 이미지가 쏠쏠하다. 학교는 어느 구석에 숨어있고 건물은 보잘것없이 쑬쑬해도 미래에 대한 동경과 희망이 꽉 찬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아이들의 성당이다.그는 국가 민족정책의 지원과 이미 쌓아진 기반에다 교직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교육의 선두를 달리지만 조선족의 대량적 류입으로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자금이 부족한 시련을 톡톡히 겪고 있다.옹달샘한글학교는 누군가가 무료로 제공하는 림시 교실을 철새같이 찾아다니는 이다.지리적 상황으로 조선족학교 입학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말 시간에 민족 언어와 춤노래를 가르치는데 15명의 열성자들이 무일푼으로 무료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후대들에게 문화를 전파하는 착한 천사들과 지역 사회의 지원이 학교가 버티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세월의 계절에 따라 찾아오는 소슬한 바람을 실컷 마시며 민족의 새순을 틔운다는 기특한 선생님들의 포부야말로 지선(至善)에 푹 젖은 선녀의 마음씨이다.   우리 민족이 시대의 격변 속에서 민족 교육의 쇠락과 가치관 혼돈의 고전을 겪고 있는 때 문화의 전승을 위하여 후대 육성에 사회적 관심을 모은다는 사실은 황페한 터전에 내리는 가물의 단비가 아닐 수 없고 고민에 찬 민족교육가들께 보내는 설중(雪中)의 송탄(送碳)이 아닐 수 없다. 문화 다양성의 보존이 나라와 세계적 과제로 제기되고 우리의 민족문화 가치가 끊임없이 평가절상(升值)이 되는 때  교육은 도리어 가장 위험한 형세라고 곳곳에서 경종을 두드린다.문화의 보존과 부가가치 창출은 민족 존재의 필요조건이다.문화 전승이 없으면 민족이 사멸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그 문화가 타인의 외면을 당하면 민족은 존재의 기반을 잃게 된다.문화 기갈이 든 요람의 수호자들을 바라보니 백화총중(百花丛中)의 백미(白眉)로 도두보인다.   해외 한민족의 일반적 여론을 보면 조선족 사회를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서의 무형자산이라는 시점에서 주시하고 있다. 만일 조선족 문화가 없었더라면 헤아릴 수 없는 기회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 일반론이다.물론 조선족도 전체 한민족의 중국내 전략적 자원이라는 장점을 이용하여 자기 발전을 실현하고 있다.그러나 오늘 조선족의 앞에는 타지역 한민족의 협력자로만 되던 시기를 뛰어넘어 중국과 유러시아 대륙에서 나라와 세계의 발전 조류에 합류하여 독자적인 우수한 민족으로 발돋움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부과되고 있다.위해서는 조선족 스스로가  문화 교육을 발전시키는 과업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절박하다.   세계화 물결과 자신이 처한 지정학적 원인으로 이 동네 조선족의 인구수는 끊임없이 늘고 내 아이가 민족문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다. 이 씨앗들이 뿌리내릴 토양을 만드는 역할은 기성세대의 몫이요 신성한 의무이다.미래 세상을 알 수 없는 천진한 아이들,오늘은 좌충우돌하며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지만 이 동자소랑(童子小娘)들이 다가오는 시대를 짊어지고 풍미할 인재들이고 그들의 희망과 가치관은 우리의 내일을 가늠할 잣대이고 평가기준이 된다.오늘 이 요람을 지키며 돈을 모으는 지성인들이 이 미래 세대의 영광을 공유할 지배주주(控股股东)들이다. (끝) 2017-01-24길림신문
50    송구영신과 선물 댓글:  조회:2113  추천:1  2017-01-06
매일없이 택배물을 수거하는 순풍 택배원에게 장사 형편을 물었더니 일단 생계유지는 문제없는데 매출이 하락의 일로를 걷고 있다는 이야기다.과열되었던 시장 경기가 주춤하고 경쟁자가 많아지는 구조적 변화가 근원이지만 주고받는 선물이 급감하는 물종(物种) 구성의 변화도 큰 요인이라고 말한다.최근 몇년간 선물이 해마다 전년대비로 반쪽이 되더니 올해는 있으나마나 할 정도라는 것이다.중앙의 반부패 시책과 일벌백계(一罚百戒)의 추궁이 특효를 낸다는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초적인 선물은 앞문으로 들어가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당당함이 특성이다.사람들은  어쩔수 없이 인간 관계 속을 살아가면서 문안、감사、격려、위로、칭찬、지지、신뢰 등 인정나눔의 목적으로 촌지를 돌리며 돈독한 정의를  표시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문화 속에 아름다운 소행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러한 선물은 분명히 아름답고 따스한 심정의 표현으로서 시비 대상이 될 수 없다.이러한 선물 거래가 없다면 아마 인정이 매마르는 야박한 세월이 된다고 모두가 수런거릴 것이다.   그러나 천박한 금전숭배의 만연으로 순수해야 할 선물이 뢰물로 변질되어 사화 문제가 된지 오래이다.사익을 위하여 권력자에게 선물의 명목으로 재물을 넘겨주며 은밀하게 뒷문으로 거래하는 부정 행위는 법제와 규제를 능멸하는 행악으로서 사회 여론과 매체들이 지탄하고 적발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주는 자는 그 반대급부로 뒷문 열쇠를 넘겨받고 받는 자는 공권력을 남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제공한다.선물의 외피를 쓰고 공여되는 이런 금품은 여자수자(与者受者)가 동시에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침식하는 부패균으로 전화되고 있다.인민이 부여한 권좌에서 알량한 권세자들이 로 전락되고 부정축재를 감행하는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며 인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현실 생활에서 선물과 뢰물 사이의 선을 확실하게 긋기가 애매하기에 선물을 정중히 전달한다는 자체도 그리 록록치 않은 문제인 것이다.비록 사교적 명목이고 관습적인 사례(谢礼)로 제공되는 금품의 수수(授受)라도 대가 관계가 발생되는 경우라면 뢰물로 규정된다.이러한 회뢰 방식으로 사회의 공익과 법제를 무시하는 위법행위가 시장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대량 존재하며 권력자들은 친분이라는 뉴대를 통하여 수뢰 목적을 달성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이러한 불투명한 직무범죄는 합법 혹은 불법의 정성(定性)에서 상당한 혼란을 조성하게 되고 동시에 사법 행정에서의 난제로 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선물에 대한 유연한 사고방식이 공직 사회의 금품 수수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어느 나라에서는 (일명-김영란법)란 법률을 제정하여 공직자가 원활한 직무수행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사교의례、부조 등의 목적으로 접대하거나 제공되는 금품의 상한액을 설정하고 관련 공직자들을 규제하면서 부패 방지의 일정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소문이다.장기적인 사회적 효과에 대하여 두고 볼 일이지만 부실한 공직자의 아집을 다스리는데서 참고로 두고볼 조치이다.아무튼 부패 방지의 고민이 절실한 현실에서 자정청렴이란 공직관이 재정립되어야 할 과제가 우선이지만 선물과 뢰물에 대한 대중적 관념의 쇄신도 청렴사회 건설의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 된다.   선물과 뢰물이 뒤썩이고 사례와 매수가 햇갈리는 일그러진 선물문화가 상품사회에서 부패를 키우는 부식토로 되고 있는 오늘이다, 선물의 외피를 쓴 뢰물의 환부를 도려내는 제도적 장치 다시 말하면 권력이 해빛 아래서 운행하도록 새장 속에 가두는 개혁적 조치,공직자들이 부패와 절연한다는 결연한 의지, 나라를 정화한다는 참뜻이 슴배인 대중의식이 삼위일체를 이룬 이성적인 선물 문화가 이 땅에 정착되기 바란다. (끝) 2017-01-05 길림신문
49    진정한 애족(爱族). 댓글:  조회:2633  추천:3  2016-12-14
인습에 굳어진 관념의 뿌리를 뽑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요즘 사이트를 들여다 보니 우리 민족의 단점을 지적하고 병폐를 까밝힌다고 반민족이요 반역자요 등등 옛날 들을 비판 투쟁할 때 써먹던 독설이 유령처럼 떠돌아 기분이 씁쓸했다.그들의 근거라면 자기를 비판하였으니 죽어야할 놈이고 덮어진 치부(耻部)를 까밝혔으니 불공대천의 원쑤이다라는 이것이다.력사담 속에 깊이 묻혀졌던 덤터기와 오명을 주어들고 을러메는 작태를 보며 조선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반문화적 언어도단이라고 의식했다.   어느 민족의 내부에나 다 부동한 가치관과 견해의 충돌이 불가피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가타부타 여지없이 정상적으로 당연하다.인간는 이런 갈등 속에서 부단히 합의하여 의견일치를 가지거나 구동존이(求同存异)하며 진보를 이룩하는 것이다.여기에서 호상비판은 모순 해결의 자연발생적 선수단(善手段)이고 집사광익(集思广益)으로 난제를 풀어내는 최고의 해법이다.허심탄회하게 비판을 주고받는 민족이어야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원동력을 극대화시켜 인류 진보의 앞장에 서게 된다.세계가 일체화로 나가는 마당에서 부동한 나라와 민족 사이의 자본、지식、정보、인재 등등 자원적 요소들은 서로 활발하게 융합되어 발전하고 있다.우리가 비판으로 자기의 환부를 치유하고 면역성을 제고하는 것은 이 력사적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우선,반격자들의 반박 론리를 보면 부동한 개념을 혼동하거나 슬그머니 바꿔가지고 둘러방치기(偷梁换柱)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대는 것이다.선의적인 비판인데도 나를 반대하고 증오하는 것이라며 어거지를 쓰거나 민족을 해치는 고의적 가해행위라며 억지감투를 씌우며 적대모순을 조장하는 것이다.거기다 니는 흰색이 아니니 꼭 흑색이라는 조폭한 이분법을 치켜들고 상대를 죽으라고 파몰아치며 여론을 오도하고도 그 호의에 대하여 어정쩡(模棱两可)한 선입견으로 엉터리방터리 결론을 내려버린다.이런 지레짐작으로 타인의 진언을 속단하고 정문일침(顶门一针) 충고에 단세포적으로 되트집을 잡는 소행이 애족인가?를 스스로가 생각할 바이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부족점과 결함이 있을 것은 당연이고 지어 결함투성이인 경우도 많고많다.다만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그를 묵살하고 방관시한다면 적어도 부작위적 소극 행위일 것이고 만약 다수가 묵시하고 페목(闭目)하며 방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잠재한 민족 위기이다.례하면 우리 민족의 결함으로 거론되는 원칙보다 편법을 추구하고、근면보다는 한탕치기에 열중하고、정의보다 물질유혹에 쉽게 끌려가며、내면보다 외면을 중요시하고、상생보다 질시와 헐뜯기를 잘하고、문화정신보다 물질주의가 팽배하는 등등 부끄런운 폐단들이 수두룩한데 이를 털어내고 비판하여 반복을 막는 것이 반민족이라 찍어말한다면 얼토당토도 아니하다.   우리의 민족 사회가 해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민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재도약을 실현하는 것이 시급하고 시급하다.민족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자체 민족 특색의 변증적인 비판관을 민족 의식에 뿌리를 심어야 한다.자기 민족에 존재하는 흠결이나 착오에 대하여 비판의 날을 세운다면 이것은 냉철한 사랑이다; 민족의 융성발전에 찬사를 올린다면 이것은 자긍스러운 사랑이다; 민족의 수난이 비통하다면 이것은 련민의 참사랑이다.지구촌이 한 부락으로 되어가는 때 단점을 감싸안고 숨긴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남에게 따돌림을 당해 패전하는 온상이 된다.민족의 사멸이란 남에게 소외되어 돌림쟁이가 되였다면 시작이 걸린 것이다.   우리는 수시로 자기를 반성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예지로서 민족사회의 강인한 체질을 확보하고 민족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시켜야 한다.우리는 나라 땅에서 세계 한민족의 교두보로 되어야 하고 중국이 세계 한민족과 교류하는 전진기지로 되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위하여 신랄한 비판정신, 이것은 우리가 세계 민족의 수림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필수적 내공이고 기본기임을 명기해야 하겠다.   민족의 융성발전을 위하여 생동활발한 조선족의 비판문화를 수립하고 정착시켜야 한다.우리의 문화 화원에 이성적이고 자연스러운 비판、자아비판과 역비판의 현대문명  화단을 꾸리려 한다면 부질없는 시도일가!? (끝) 흑룡강신문 주일특간 2016.12.3
48    늦가을 서정 댓글:  조회:1913  추천:0  2016-11-23
달의 운행 궤도에서 성공과 원만을 상징하는 만월은 선조적(线条的)적으로 기우는 만월(弯月)과 공존하기에 거룩하고, 바다의 미세기(潮汐)에서 파죽지세를 상징하는 밀물의 만조(满潮)는 썰물의 미련없는 퇴조가 있어 도도하게 장엄하다.가을이 저물어가니 수목들에 붙딸리어 살던 잎새들이 한살이 사명을 마치고 착생하던 가지를 별리(别离)하며 서슴없는 리별을 선고한다.나무는 오는 엄동을 대비하여 묵은 이파리를 떨어내고 나목으로 되며 환생을 위한 동면의 초읽기로 들어간다.사철의 리듬에 맞춰 버림과 부활을 거듭하는 나무의 야멸찬 용단을 만월이나 만조의 숭엄한 자태에 슬그머니 비견해 보게 된다.   요즘은 일교차가 심하여 해가 떨어지면 아쓸한 한기가 몰리는데 건넛산 상록수들은 아직도 녹색 풍경을 고집하며 도고한 생명을 뽐내고 있다.그러나 이 동네의 가로수 주력인 은행나무과 단풍나무는 잎에다 노란연두와 연황동 물색을 잔뜩 올리며 늦가을의 물후(物候) 풍경을 연출한다.그들은 봄여름의 햇빛 속에서 산소를 방출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광합성 작용으로 병육(并育)하던 나무에 연륜을 쌓아놓고 락엽귀근(落叶归根)이란 갸륵한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아직도 취동(吹动)에 우슬거리며 조락을 강열히 저항하는 잎사귀들의 모습은 한생의 대미(大尾)를 화려하게 장식 못한 아픔을 감추려는 몸부림이 아닐까.때가 되면 비장히 작별하는 수엽들이 무아주의와 애타주의를 실천한다고 인간화하여 음미해 보니 남에게 행복을 반납하고 자연에 회귀하는 당돌한 소행을 지켜가는 그 생명철학에 주옥같은 글귀를 남기고 싶다.   수목들의 세계에서 잎의 령락은 새로운 생과 사를 거듭하는 숙연한 륜회 법식의 순간이다.그들은 천리에 따라 자기를 비우고 포기를 선택하며 또 다른 봄언덕을 바라며 새 생명의 유신(有娠)을 꿈꾸는 계절잠의 세계에 몰입한다.그럴진대 세월의 춘하추동의 세파를 감내하며 신진대사의 철칙으로 참삶을 이뤄가는 나무들의 생애야말로 소행은 범상해도 생명의 명상적인 선율이 아니겠는가.락목한천(落木寒天) 삼동의 동해를 피하려 몸에 달린 군덕지들을 떨어버리는 결행은 위급하면 꼬리를 자르고 내빼는 도마뱀의 눈물겨운 생존전략과 일맥상통하다.나무의 금과옥조(金科玉条) 같은 삶의 신조와 가치철학은 인간들이 음미하고 재음미해야 할 오묘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이 만추를 일년의 계절로 가름하면 늦가을이고 하루의 시간대에 견주면 보리저녁인데 인간의 일생일대(一生一代)에 투영해 보면 로연에 흡사하지 않을까.요즘 어떤 사람들이  이순이 인생의 늦가을이라 되뇌이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그런데 회갑 개념이 없는 어느 나라에서는  65~75세까지를 은퇴활동기라고 부르고 있다.비록 은퇴지만 사회활동에는 충분한 나이고 로인이란 별칭이 딸리면 신수가 불길하고 재수가 날아난다며 질색을 부린다.혹시 75세 넘어가면 시니어시티즌(资深公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혜와 경륜을 많이 쌓은 원로에 해당된다.사람의 인생에는 영원한 노동과 창조가 따라야지 세월아 네월아 운수타령을 부르며 어험대면 꼴불남에 꼴불녀라라는 게다.   세월은 필경은 사람 편이 아닌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로쇠를 부인하는 부실한 고집이 있다.육체적 년령은 외면하고 정신적인 젊음만 있다면 영원한 청춘이라며 우쭐댄다.경쟁과 생계의 곤혹으로 혼돈스런 현실에서 20세 청년보다 70세라도 분발하면 그게 청춘이고 전자가 로인이라는 아집이다.이젠 80인 고령인데 좀 쉬세요!라는 아들의 권고에 라고 퇴박을 주며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의 오상고절(傲霜孤节)은 동네 로인들의 귀감에 되어 있다는 전언이다.   가는 세월이 아쉬운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도 내가 그게 아니라고 고집하면 말공부질이라 반상(反想)할 것이지만 인생의 길에서 한탄과 회한을 숨기고 상실의 아픔도 달갑게 감내하면서 그냥 매진하면 이것은 또 하나의 인생이 아닐가고 생각한다.만약 당신의 생애가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할 운명이라면 다리가 떨려도 그 독목교를 즐겁게 걸을 때 그 모습 역시 천사의 자태라고 간객들이 찬미할 것이 당연할 것이다..   늦가을의 결실과 풍요를 만끽하면서 창백한 기억、애틋한 동경、지절한 기대를 미련없이 내쳐버리며 그냥 새 삶을 엮어가는 늦가을 나무의 경전적인 참삶, 인생도 이대로라면 구경꾼의 갈채가 쏟아질 무대가 된다고 말하고 싶다 . (끝) 2016-11-09 연변일보
47    고향을 잃는 아픔 댓글:  조회:1974  추천:2  2016-11-11
내 고향 마을이 개발의 물결에 휘말려 통째로 도시 밑층에 깔려 들어간다. 부모님들이 적성으로 가꿔오시고 내가 태어나자란 고토가 아주 자취를 감춘다는 소식에 이름할 수 없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된다.고향이 하는데 힘없는 누구는 찍소리도 야무지게 못하고 완벽한 실향자가 되고 있다.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 부모님들이 조선반도를 탈출하여 중국의 어느 산골에 정착하시면서 우리 가족의 력사 장막을 올리셨다.새 중국의 건립 직후 아버님께서는 철부지 아이들을 보며  란 생활철학을 주장하시며 시내로 오신 것이 내 고향의 발단이다.그 후 부모님들은 이 땅에서 토지개혁、호조조、합작사、3폭붉은기 이벤트(총로선,대약진,인민공사)、、개혁개방 등 격변의 나날을 맞이하시고 인간의 모든 고초를 경험하시며 지나온 것이다.혹시 한가하여 그 나날들을 되새길 때면 기근과 추위와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형극으로 꽉 막혔던 세월의 터널을 부모님들이 어떻게 헤치고 나오셨는지 불가사의하다.열애의 마음을 쏟아붇고 자식들의 미래를 심어주던 이 땅에는 부모님들이  력사를 창조하는 인민 대렬을 따라가시며 남겨놓으신 영욕、희비와 고난에 찬 피어린 사적(史跡)의 편린(片鳞)들이 산적(山积)하여 있다.그 시기 부모님과 수천만 로동인민들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행복의 열망이 개혁개방의 장엄한 서막을 열었으리라. 내가 태어나 청춘을 보낸 안태고향(安胎故乡). 내 유소년 시절에 우리 초가집에서 부모님들이 가족의 생계와 집단사업을 위하여 분주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다.보릿고개 춘궁기때면 영양 실조로 얼굴이 프러누렇게 변색하시고 추위가 몰려오면 온몸을 웅크리고 다니셨는데 부모님들의 지친 그 육신에서 그 힘이 어떻게 나왔는지 실로 신비한 생명현상이다. 형님 누나들이 앉을 자리가 모자라 베개를 걸상으로 무릎을 책상으로 공부에 정진하던 희한한 장면도 눈앞에 삼삼하다.더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지혜와 생산성이 무시된 무식한 집단로동의 나날은 얼마였고 청운의 꿈을 휘날리며 주경야독(昼耕夜读)으로 지새운 밤은 얼마였던가.바로 이 력사의 땅이 깨끗하게 사라진다.그래도 조석으로 바라보던 고향 산맥이 예전같이 의연하고 부모님의 핏물과 눈물과 땀물을 바다로 실어보내던 고향 하천이 예와 같이 흘러흐르기에 고향 산천이 남았다는 위안이 남아있다. 타향살이의 허구한 날 무시로 고향을 건너보며 를 얼마나 들먹였는지 모른다.초가지붕에 박넝쿨이 매달리고 울바자에서 나팔꽃풀들이 꽃을 피운 봄날이면 늘찬 제비들이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애기를 키우다 강남으로 가는 광경을 상상하기도 했다.혹시 나들이로 갔다가 고향의 옛모습이 콘크리트숲 밑으로 퇴각하는 장면을 보며 개발자들의 현대화 블도저(推土机)가 미워도 어지간히 미웠다.인간의 과거사와 추억을 산산히 지우는 행동을 감행할 때 한 쪼각의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쯤의 유적이라도 남기려는 문화적 아량이 있다면 과거와 미래를 조화롭게 연결되는 고향 도시가 되리라는 푸념도 쏟아냈다.  경세(警世)의 명인도, 명품도, 명물도, 명승지도 없는 촌락에 뭔가 남겨달라 애걸한다면 가소롭지만 력사와 현대가 어울려야 현대화 도시라는 누구의 리론을 실제에 결부시킨다면 일부러 찾아서라도 뭔가를 남기는 것이 리치일 것이다.물론 기획자는 개발 발전의 당연성을 들고 개발자는 매매 성립의 당위성을 핵무기처럼 들고 을러메며 어느 민초가 애절한 향수(乡愁)를 누리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다만 팽배하는 돈의 힘 앞에서  실향의 못된 아픔이 있다고 무력하게 호소할 뿐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문화 본성이고 고향을 동경하고 그 유전자를 차세대에 전승하려는 희망도 인류의 본능이다.이런 리유로 과거,오늘과 력사를 상생시키면서 선배의 발자취를 현시대 속에서 이어간다면 이는 금상첨화가 아닐가 생각하니 몸부림도 나갔다. 외형적인 멋진 변화와 육욕의 포만감을 위하여 문화와 력사가 걸레로 취급되는 이른바 발전은 발전이 아니고 발전에 대한 조롱이고 오만이라는 비평도 하고 싶다. 고향 땅에서 고고성을 울리고 륙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오니 내 인생의 정원에 가을이 왔다. 나이와 실향의 아픔은 정비례라 말한다.그러나 발전하는 세월이 사람들께 남기는 영원한 아픔은 이라 하였으니 이 아픔은 마땅한 아픔이고 잊어야 할 아픔이겠다.그래도 실향의 상흔은 만지면 아픔이 묻어나며 아프지 않을 때가 없다. (끝) 2016-11-10 연변일보
46    더듬어 본 오복관(五福观) 댓글:  조회:1963  추천:2  2016-10-24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놀음을 하고 취기에 풍악놀이를 즐기고 돌아와 잠에 골아떨어졌다.이틑날 아침 공항 출발이란 전화 소리에 번쩍 깨어나니 앞이 샛노랗고 일신이 비리비리하는데 그래도 가야 하니 침대 머리를 잡고 이를 물고 일어났다.정신이 들락날락 하는대로 집에 돌아와 뭔가 대충 끓여먹고 들어누웠는데 이튿날도 삭신이 쩌릿쩌릿하고 사지가 옥신옥신하며 백해구통(百骸俱痛)이 여전하고 나간 넋이 안 돌아온다.   지독히 마신 술도 아닌데 어쩐지 증후가 이상하다.원래는 이 정도 숙취면 한잠에 말끔히 사라지었는데 술기가 그대로 남고 다리마저 말 안듣고 후들거린다.피할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게 나이인데 이것이 체내의 생물시계가 송파(送波)하는 내구년한(耐久年限)의 경고 신호로 판단했다.왠지 마음이 시들시들해나며 뭇사람들이 쩍하면 들먹대는 오복이란 대체 무어냐!는 생각이 달처럼 떠올라 캐보기로 작심하였다.   첫째 복은 장수이다.옛날에는 회갑、회혼을 지났다면 거의 만수무강이라 말하였다.이젠 물질 생활의 제고와 과학의 발전으로 백세 인생은 단골소리고 옛날의 복운장수가  오늘의 박명단수(薄命短寿)이 되어버린다.시이사왕(时移事往)으로 고령사회라는 오늘에는 불로장수에 별 재미가 없어지고 건강을 앞세우는 무병장수가 가담항설이고 컨센서스(共识)로 형성되고 있다.인간 수명을 둘러싼 해묵은 론쟁이 불쑥불쑥 재연되지만 비들비들 천년을  살아야 들숨 날숨이나 헐떡이는 생물 생명이지 결코 인간적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복은 부유이다.부자는 고대광실(高台广室) 저택에서 주지육림(酒地肉林)을 헤매다 죽으면 광광한 유택을 가지고 행복한 영생을 누리는 같다.대비하여 가난한 백성들은 초가삼간에서 애옥살이를 하다가 척지(尺地) 땅에 오척 단신을 눕히거나 싸늘한 벌집 납골당에 유령을 의탁하지 않던가?그러나 육체적 복、정신적 복과 물질적 복을 교차시켜 따져보면 누가 더 행복했을가 하는 판가름이 어렵다.만약 약두구리에 매달리거나 수술대를 오르내리며 살았다면 그 복이 얼마일가?    세 번째 복이 강녕(康宁)이다.옛날에는 육신이 강건하면 건강이라 하였었다.그러나 무한경쟁이라는 환경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의 건강이란 질병 해탈뿐이 아닌 정신적으로 안녕한 상태에 있어야 건승을 누린다고 말한다.아무튼 육체의 건강을 우선으로 하겠으나 안심이 없는 겉맵시나 뻔뻔한 외화내빈의 건강이다.정신적 불안이 없어야 정상건강 몸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복이 인덕(仁德)이다.덕을 쌓고 베풀고 남의 덕을 입는 것이다.남에게 착한  이것이 남의 덕을 입을 수 있는 기본 전제이다.위하여서는 건강해야 한다.아무리 위대한 독지가라도 몸이 아파 대굴거리면 어진 마음이 나올 확률이 너무 낮고 남의 덕을 입어도 복이 없다.덕이 깊은 선인들도 무병한 건강체여야 덕을 주고받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위인이 되려해도 건강체가 뒤를 떠받쳐야 한다.   다섯 번째 복이 선종(善终)이다.사람 인생의 운명(殒命)은 자신의 선택 사항일 수 없는 창조주의 몫이다.영생불멸이나 비명횡사나 생명박탈이나 와석종신(臥席终身)이나 다 곰곰히 생각하면 결국 운명에 맞겨야 할 프로그램이다.완미한 선종은 결국은 무탈한 자연사인데 애매하게 말하면 여유롭게 살다가 고스란히 무병 무통 속에서 이승의 삶을 접는 것이다.이런 복을 지녔으면 분명 축복이다.   우리 민족의 전설에는 치복(齿福)、처복(妻福)、자식복、사위복 등등이 오복에 속한다는 설법이 있으나 온전한 정설이 없다. 중국에도 이 오복이라는 다른 주장이 있다.이러고 보면 행복이란 제가끔 인식하는 기준에 따라 천변만화이고 천자만태이고 내용 역시 제각각이다. 오복에다 모든 행복을 망라시킬 수 없고 그것을 그저 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행복의 무한집합으로서 간단히 이해하는 것이 정론일 것으로 본다.   디지털 생산력이 인간의 생활을 뿌리채로 변화시키는 오늘 모든 사람이 수용할 행복 철학이 있을 수 없고 어느 성인이 그 오복을 정립하려 해도 역부족일가 완전 불가능이다.오로지 건강만이 천복만복을 풀어내는 행복의 핵이고 공분모이다.육신이 들차야 희망이 발광(发光)하고 사는 맛이 있다는 도리를 몸살풀이를 하며 터득했으니 거저 건강이라는 일복(一福)이 나의 진솔한 야망임을 고백한다.   몸이 찌근대고 정신도 제정신이 아니니 만사가 귀치않다.백년을 잘 산다며 호들갑을 떨어도 몸이 말째면 부질없는 공염불이다.무조건 건강해야 한다. (끝)   길림신문 10월 21일자  
45    마이크로시대(微时代)의 후시대 댓글:  조회:2026  추천:3  2016-10-14
요즘 사무실의 종이、통신、볼펜、출장과 접대 등 비용이 급감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인턴넷 기능의 비약적 향상 그리고 이동통신의 번영과 더불어 업무 속도와 효률은  빨라지고 사무 처리가 편리할 뿐인데도 비용이 원래의 반전(半钱)이 되나마나하다.핸드폰 하나로 임의의 곳에서 무료통신、정보수집、서류작성、자료저장 등 조작이 지장이 없고 음성、영상、동영상이 촬영하는 동시에 송수신이 가능한가 하면 폰 액정  화면에서 그룹 회의도 무난히 진행하는 세월이다.하여 지금을 마이크로시대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애플리케이션(앱-应用软件)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며 작을 미(微)자를 전치하는 신조어들이 쉴새없이 불거지는 오늘이다.트위트(微博)、마이크로뉴스(微新闻)、위챗(微信)、힌트픽션(微小说),마이크로영화(微电影)、마이크로동영상(微视频)、마이크로게임(微游戏) 등등 신형 가상물들이 인터넷과 합류하여 현존하는 출판、도서、신문、방송、텔레비 등 매체에 강펀치 충격을 주고 있으며 전통적인 사회、산업、문화 구조와 가치관도 어쩔수 없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인터넷 정보 전달의 편의성、순간성、이동성、연동성은 사회 생활을 풍부히 하고 인간의 창조 활동의 대활약을 부추기는 동시에 사회관리방식의 혁신을 불어 옴으로 하여 사람들의 사상 세계에는 신구 이념이 혼류되는 새 가치관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새 매체의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다.살포되는 정보의 다반이 쇄편화되고 완전한 표술과 세밀한 론리성이 결여하여 객관적 판단이 어려워지고 대중의 착각을 일으키는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한다.그리고 허위적 정보와 립증이 없는 소문과 해롭고 저급한 멧세지들이 란무하여 사회적 불안과 충격을 조성하는 사건들도 빈발하고 있다.더구나 어떤 불측한 친구들은 그가 은페성이 강하고 대중 이해가 부족한 틈을 타 범죄 수단으로 교묘하게 이용하는 난제도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사람들은 깊은 사색이 필요없는 마이크로표달(微表达)에 습관화되고 있으며 책을 들고 내용을 음미하며 열심히 필기하던 장면은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모두가 핸드폰만을 들고 세상 뒤를 덜렁거리며 따라가는 모양새이다.   매체의 마이크로적 변화와 동시에 세기의 발명품들이 출시되여 인류사회 혁신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빅테이터(大数据)、클라우드컴퓨팅(云计算)、3차원프린터(立体打印)、 가정로봇(家庭机器人)、사물인터넷(物联网)의 등 첨단 기술이 제품화로 전화되었고 대중적 보급이 시간적으로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다.지금까지 정보통신 기술은 사람과 사물의 상호작용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다음에는 사물인터넷 환경을 구성하고 사물 스스로가 인간이 설정한 기능에 따라 정보를 수집 가공하고 인간의 개입없이 스스로 혹은 저들끼리 결탁하여 의사결정도 내리며 임무를 완성하게 된다.오늘의 마이크로시대 현상은 이 지능화 시대에 바야흐로 돌입한다는 전주곡인 것이다.    오늘 사무실 비용에서 반영되는 수치들 역시 새로운 문명 시대에 들어선다는 예고이다.최근에는 회사 업무를 재택근무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서서히 증가되고 인터넷 쇼핑도 세찬 물결을 이루고 있다.도어투도어서비스(门到门服务)와 방문판매가 급속히 발전하여 아예 문밖 출입을 체념하고 두문불출(杜门不出)하는 젊은 세대가 급속히 불어나 폐칩남녀(宅男宅女)라는 무리들이 량산되고 있다.사람 손이 가야하던 일자리가 대량적으로 사라지고 인간은 육신이 무골이 되고 사지가 무력한 동물로 진화되거나 차라리 컴퓨터 식물인이 될 것이라 잘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가부간 사회는 누구의 시시비비를 불문곡직하고 자기 궤도만을 따라 급급히 가고 있다.   이 사회의 생산방식,사업방식,로동방식,관리방식에서 전면적인 변화가 일고 기존의 직업 대량이 소실되고 신종의 서비스 직업이 우후죽순으로 탄생하고 있다.이 충격적 변화 속에서 오래지 않아  인력에 대한 최우선 요구는 언어기능이고 특색이 선명하고 심미적 쾌감과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대인 서비스 기능 즉 맨투맨(面对面)서비스라고 미래학자들이 말한다.그때 가면 이 두가지 기능 소유자가 구인자들이 눈을 뒤집고 쟁탈하는 대상이 될 거라는 그들의 판단이다.그렇다면 오래지 않은 미래의 사회에서 조선족이 이 최요(最要)의 두 기본기를 타고난 소유자라 단언하여도 공념불은 아닐 같다.   이중언어 즉 두개 외국어 언어기능과 전통적으로 전승되고 현대적으로 계승되는 고상하고 고아한 대인 서비스 문화는 누구도 대체 못할 우리의 민족 자원이다.조선족 민족사회는 이중언어와 민족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사업에 주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조선족의 최우선 생존법、발전법과 영생법이라 할 수 있다. (끝) 2016-10-13 흑룡강신문
44    진화하는 소비자 댓글:  조회:1979  추천:6  2016-08-22
삶이 윤택해 지고 과학이 약진하면서 사람들의 소비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소비문화도 하루 다르게 변하고 있다.지난 시기 의식주행의 소비수준을 지출의 절대 금액으로 정도를 가늠하던 성향이 바뀌어 이젠 동일한 가치로 더 좋은 물건을 입수하고, 시간과 비용을 최대로 절감하며, 최고의 편리성을 도모한다는 스마트소비(智能消费) 기준이 확산되고 있다. 요즘 오랜 친구를 만나 술대접이나 하려고 단골 식당을 찾아갔다. 이 동네서 지역민의 입맛을 꿰뚫으며 먹거리를 만들어내 소문을 내는 오랜 가게이다.그런데 평일이면 북적거리던 장면은 가뭇 사라지고 넓다란 객석에는 몇 팀이 않아 식사를 하는 정도인데 웨이트리스(女服务员)들의 뜨거운 응접도 온데간데 없다.그러나 주방에는 오히려 료리사와 시중군들이 여럿이 증가되여 부지런히 서두르는데 스테인리스(不锈钢) 박스를 들고 반찬 배송을 대기하는 사이클배달자들이 4,5명 대기하고 있었다. 카운터 담당자는 손님 결제를 받는 한편 핸드폰과 사이트로 주문을 받고 완성 즉시 배달자를 출동시킨다.경영이 변해도 작게 변한 것이 아니다. 사장과 한담을 나누었다.지금의 소비자는 옛날처럼 밥먹으려 거리를 헤매이는 경우가 훨씬 적어지고 인터넷이나 핸드폰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급증하고 있단다. 소비자들은 사이트에서 건강성,경제성과 편의성을 이상할 정도로 추구하고 있으며 인트넷 주문 방식의 가족연회를 열고 싱글족(单身族)과 맞벌이 부부들은 매식에 편향하는 경향이 신기루마냥 솟아나고 있다.회사들의 오찬도 인터넷 주문이 류행되는데 이 전통적인 가게는 이 시장 개발에 주력하여 톡톡한 매츨을 올리고 있다.년말이 되면 련쇄점 2개를 확충한다고 선언한다.인터넷 기기에 물젖은 소비자들, 그들이 인터넷에서 음식의 검색、비교、주문、확인、결제까지 원스톱(一条龙)으로 해 버리는 정보화 식사 시대이다.식사、건강、절약、편의、감독이 한방의 온라인에 겹쳐진 고객이 하느님이신 시대에 들어섰다.이 시류를 따르지 못하는 장사군은 엄동에 동사(冻死)하지 않으면 고한(枯旱)에 고사(枯死)하게 된다.사장님의 단언이다. 시장의 변천에 따라 공급자는 소비자가 살아가는 방법이나 가치관의 변화에 동승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오늘 식당의 정보통신화적 변화 추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경제생태와 사회생태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하고 있다.층생첩출(层生叠出)하는 정보통신 수단은 생활도구가 아니라 이미 삶의 불가결인 공기와 물과 토양이란 생태환경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백성들은 과거처럼 얻어들은 정보로 섣부른 결정을 내리는 어영부영 추종자들이 아니라 사물을 꿰뚫듯 렴탐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현인군자로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 소비자는 선택 범위가 비좁고 시간 공간적 제한을 심히 받으며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였다.현재는 누구나 쪽걸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해도 세상만사를 속속들이 살피며 천하를 한눈에 보는 엉큼대왕임을 알아야 한다.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며 그를 깔보고 덤비다간 랑패를 보기가 일수이다.그들이 어느땐가 능동적으로 백전백승의 기세로 따지고 들지 모른다.그러므로 소비자의 수요를 따른다는 도리를 철저한 결심으로 실천하지 않고 외면하면 패업하고 몰락한다는 절박한 현대의식과 위기의식을 수립해야 한다.아니면 적어도 찬밥신세나 쪽박신세로 살아야 한다. 정보통신이 변화를 거듭하며 그 파장역(波长域)을 어딘지도 모르고 넓혀가고 있다.식생활이 외식화에로의 변화는 그 분야 자체에서만 아니고 사회적 지각에 변동이 일고 있다는 방증이다.모든 경제、문화 분야와 사회관리행정 전반에서 인터넷+를 강요하는 시대, 더 말하자면 오늘은 정보지능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생산력 변혁이 몰아오는 이 시대 소비자의 사상혁명에 따라 새마음으로 새행동 무대에 오른 자에게 나 차례진다. 공농상학병관(工农商学兵官) 전민은 자기의 제조상품과 서비스상품을 사가는 소비자들이 바야흐로 지능화 시스템으로 완전무장하고 디지털화(数字化) 특기로 일신을 꾸둥친 으로 되고 있다는 사실을 꼼꼼히 새겨봐야 한다. (끝)
43    장인정신이 몸값을 올린다. 댓글:  조회:2076  추천:2  2016-07-12
요즘 이 동네의 대중 매체들에서 장인정신(工匠精神)이란 합성어가 기록의 빈도수(频度数)를 높여가며 핫워드(Hot word-热词)로 되고 있다.선진적 로동문화를 대변하는 이 단어는 우리 나라가 제조 대국에서 제조 강국으로 부상하는 필요조건이며 현대사회를  건설하는 불가결의 정신요소라며 그 의의를 설파한다.현재 장인정신으로 민족성의 높낮이를 평가하는 성향을 보며 조선족이 더 우수한 로동 민족으로 부상할 수 없는가는 우자천려(愚者千虑) 를 해봤다.   원초적인 장인정신의 의미는 수공업자들이 어느 한 손재주에 정통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제품을 다듬질하는 태도를 말하였는데 세월의 변천에 따라 그 의미에 새로운 뜻이 부가되고 내용의 폭이 증가되면서 현재는 모든 제조업、서비스업과 행정직에까지 확장되어 인간의 사업 정신를 수식하는 미사려구로 되어있다.분해 해석을 한다면 이것이다.이 정신은 수요자의 최대의 만족을 끌어내는 직업 륜리이지만 최고 제품(서비스)으로 등량의 보상을 받는다는 등가교환적 경제 리념이 포함되기도 한다.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제1、2차 산업 분야에서의 로동력 수요는 대폭으로 줄어들 것이지만 상응하는 새 서비스 일터는 지식과 장인정신을 동시 구비하고 기술을 생산력으로 능란하게 전화시키는 대량의 일꾼을 수요하게 된다.정보지능사회가 발전할수록 하등 직업의 전반에서까지 완벽한 기술을 장악하고 충실한 로동 관념을 소유한 자가 고용주의 우선 선택으로 되게 된다. 학력의 고저를 과신하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모든 일터에서 전력투구하는 정신이 수요자들의 우선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현재 선직국들에서는 단순로동、기계로동과  행정로동 등 직업 사이의 차별(급여포함)이 대폭 줄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예의전심(锐意专心)으로 투신하는 일군들이 선발에서 우선시하고 있다.   취직이란 시점에서 장인정신의 필요성 언명해 본다,요즘 박사생마저도 직장 찾기에 고민이 깊어지며 일자리 창출이 정부의 중대 과제로 상정되어 있다.그러나 절대적 취직이란 여래불이 통치자로 군림해도 만능 묘책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이다.이 문제를 슬기롭게 타개하는 데는 학력 고저를 불문하고 직업에 귀천을 두지않고 림하는 자태가 전능 묘약이다. 이 관념을 보편사상으로 토착화시키는 실천이 취직의 골목를 대통로로 전화시키는 결정적 대안이고 구직자들이 장인정신으로 생계와 안락의 길을 찾는 것이 최선책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이름 날리는 일본인들의 제품이 세인의 찬탄을 불러낸지 오래다.그들을 쑬쑬하게 보는 부류들마저 억지로라도 머리를 뒤로 끄덕이며 그렇다고를 표시한다.지진의 위협 속에서 덜덜 떨며 살아가는 그들이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는 최대의 충성과 정력을 쏟아 최대 정밀을 실천하는 범민족적 장인정신이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그들의 령혼 심처에 뿌리내린 이 정신은 사회 대격동 속에서도 경제 강국으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인류가 공동히 추구하는 절대가치라는 시점에서 진지하게 배워야 할 바이다.   조선족은 일거에 빈곤을 내칠 수 있었던 행운의 민족으로서 난의포식(暖衣饱食)의 초요(稍饶) 시절에 들어선 지가 한참이다.이젠 물질적 추구로부터 직업 관념과 륜리를 전환시켜 물질문화생활의 전면적 향상에 눈길을 모아야 할 때이다.특히 소문이 많던 민족의 단점과 결점들이 지금도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어디에 가도 피부로 느끼게 된다.충성심의 결여、기술의 부족、향학열(向学热)의 저하、직장의 빈번한 교체、사고방식의 경직、포용정신의 빈약、한탕치기 냄비 관습 등등은 무성하게 쉬쉬한 소문이다.거기다 심지가 삐뚤어진 언론인들이 간혹 뛰어나와 매체에다 이타저타해 놓으면 그 추종자들이 뒷따라 침소봉대(针小棒大) 과장을 하고 가시 돋힌 추문을 살포하여 우리 얼굴들이 심심찮게 고쳐지기도 한다.생계가 절절하여 눈코 뜰 새 없었던 시대적 불미(不美)이리라.일단 민족의 공익을 잠식하는 해코지군들의 쓴소리는 제쳐놓고 우리에게는 확실히 반성하고 때닦이해야 할 비문화적 병집들이 많다는 점은 수긍해야 할 바이다.핵심은 장인정신의 부족이다.   두루 돌아보면서 로동문화를 승화시키는 작업이 우리 민족이 새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 자세라는 점을 절감하였다.매개 민족 구성원은 충직、최선、최고를 지향하는 소신을 물질 문화 생활에서 전통으로 만들어 나가야 디지털 사회와 동행하게 된다.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장인정신을 수립해야만 로동의 질과 량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는 안로취수(按劳取酬)의 목적을 이룰 수 있고 세인과 공존공영하는 살길을 넓혀갈 수 있다.   조선족이 춤노래에 능란하다는 소문은 두었다가 할 옛말이다.우리 민족은 구시대에 도취되는 태고연한 모습에서 벗어나 자기를 장인정신이 구비된 로동자 집단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민족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한다.약소 민족이 시대의 앞장에 서지 못하면 바로 세월 속에 침몰되고 사멸하고 만다는 력사의 교훈은 살려야 할 바이다.최고 품질의 상품과 최선의 봉사를 사회에 헌납하는 민족이 될 때에 전도가 무궁하다.숭고한 장인정신을 조선족의 민족정기로 키워간다면 가능성이 없을 것인가!!! (끝) 2016-07-06 연변일보
42    년말년시 한마디 댓글:  조회:2517  추천:5  2016-02-07
묵은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다는 년말년시입니다.해마다 이때면 지난해 회한같은 뭇생각을 뒤집으며 새해는 뭔가를 이뤄달라며 도깨비경 외우듯 곱씹었었습니다.그런데 행방없이 어째봤자 복된 운수는 귀신같이 피해가고 쏟아놨던 너스레들은 번번이 공념불이 되어버렸습니다.하여 올해부턴 부질없었던 헛짓은 접어두고 무상무념(无想无念)의 상태로 한해한해를 넘겨가려 작심하였습니다.그런데 오늘 모니터의 한 장면이 나의 생각을 발작적으로 뒤집어버리고 체념했던 속마음을 불어살궜습니다. 2015년12월22일, 운남성고등인민법원에서는 사실이 불명확하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리유로 운남성소통시교가현(云南省昭通市巧家县) 에서 독극물투입죄로 무기형 언도를 받았던 전인봉(钱仁凤) 소녀의 법죄사건을 재심하고 의사봉을 내리치어 무죄석방을 선고하였습니다.17세 꽃나이에 13년 옥살이를 치른 끝에 자유라 부르는 자유를 되찾았습니다.어린 딸의 출옥을 기다리지 못하고 끝내 타계하셨다는 그의 어머니에게 련민을 보내기 싶었습니다.딸을 낳아 키웠던 어미들이야 그 속을 알고 있겠지요! 그래도 소녀를 행운아로 봐야만 했습니다.그의 형벌이 확정되는 때는 그가 17세 나이로서 미성년이란 형사책임한계로 무기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1년 앞서 태여났더면 생명 처분이 가해지지 않았을가?는 아슬아슬한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더 하나,그가 자라는 바로 지금은 나라가 법치를 지향하는 사회건설에 가속페달(油门踏板)을 내리디디는 국가적 영광의 시대라는 현실입니다.소녀는 그래도 팔자치레만은 했다고 봐야 합니다.소녀가 물결처럼 흘리는 눈물을 보며 그가 흘리는 눈물은 물이겠으나 너무 흘린 눈물은 무색의 핏물이라고 느껴졌습니다.그 피눈물이 바로 인민력사를 끌고 가는 렬차의 에너지로 전화되고 있으며 수천만 인민의 법제나라를 건설하려는 강대한 의지를 철로 다져주고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웠을 지리한 감옥살이 속에서 설욕의 신념을 굳게 다진 소녀, 가난한 오빠의 드팀없었던 후원,정의의 기발을 추켜들었던 사심없는 변호사,시대의 물결을 탄 수만만의 네티즌(网民),신성한 의무에 충성하는 법조인들의 법치정신과 인간량심은 한 줄기의 세찬 물결로 합류되어 소녀의 섬약한 손목에서 무거운 철쇄를 끊어버렸습니다.소녀가 사랑하는 오빠와 정의로운 변호사 손목을 잡고 법정의 문턱을 넘어 자유를 향해 걸어 나올 때, 이 나라에 잠재한 정의와 량심의 력량이 얼마나 큰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이 아름다운 화폭은 우리나라가 법제나라로 향해 매진하는 찬란한 력사적 장면이었음을 실감하였습니다.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가 부강과 태양을 향해 나가는 축소도이며 명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살고보니 주제도 모르고 도를 넘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겠습니다.이젠 로령인구에 편입되고 육신에 가려진 하드웨어(硬件)도 마모지시음(磨损指示音)을 심심찮게 내보내고 있으니 희망도 따라가며 소박해 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디에 애정을 쏟고 열정을 불살라야 한다는 원생적 념원이 잔재한게 원인일가요! 내 사는 내 나라가 번영하고 창성하라는 일념은 더워질 뿐 차가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내 아이들, 내 친인들과 내 버팀목이 되고 지렛대가 되던 정든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살아가게 됩니다.이들을 위해서라도 내 나라 륭성을 돈수재배(顿首再拜)하며 기원하려 합니다.이마 껍질이 몇번 벗겨지고 고래고함을 질러 그들에게 도움된다면 부끄럼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꺼리낌없이 납함(呐喊)하겠습니다. (끝) 2015-12-25 동북아신문
41    조선족의 <얼치기말> 지키기 댓글:  조회:2633  추천:2  2016-02-07
누가 두 개 언어에 능란하다면 영어로 바이링거리스트(Bilingualist)라 부릅니다.어느 땐가 미국과 일본 친구들이 니는 얼마나 좋겠냐? 그 값비싼 언어를 두 개나 공밥 먹듯 먹었으니…라는 찬사를 들으며 볶은 깨처럼 고소하던 기억이 아련합니다.언어 장악의 어려움과 귀중성의 방증 사례입니다.   조선족 언어란 조선족의 중한 두 언어의 동시장악이란 의미로서 조선말이라 정의합니다.조선족은 숙명적으로 두 언어(双语)를 가지는 민족으로서 바이링걸네션(双语族)이라 불러도 명실상부합니다.조선말은 중국의 생활에서 형성된 두 모국어이고 조선족에게는 쌍방향으로 리용되는 두 외국어로 되어 민족사회 발전을 힘차게 떠미는 추동력으로 되어왔습니다. 특히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전민족이 사회 격변기를 무난히 뛰어넘도록 뒷받침한 창조신(创造神)이었습니다.현재의 조선족 발전상이 바로 빛뿌리는 명증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언어를 놓고 이타저타 시비가 지속되는 지금입니다.   지난 세기 90년대,중한 교류의 봇물이 터지면서 다량의 조선족들이 통번역을 주도하였습니다.그런데 협력의 초기부터 조선족은 중국어도 조선어도 다 반숭건숭한 얼치기말을 한다고 야유하는 잡음이 심심찮게 울려왔습니다.조선족을 맞대고 고아대는 장면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이 땅에서 태나살며 그까짓도 모르냐!는 것입니다.언어의 성격,법칙과 인간의 언어 장악 한계를 무시하는 무지의 소치(所致)이고 나라 실정을 엉뚱하게 외면하는 아다모끼의 극치(极致)었습니다.말 공부를 상추쌈 먹듯 싸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동화세계의 천진란만한 해자(孩子)들의 단세포적 발상이라 하겠습니다.   하여 한 때 타민족 전문생을 채용하는 바람이 일었었습니다.그러나 솔선하여 도섭부리던 위인들부터 도저히 불감당(不堪当)이라며 조선족 찾기에 반전하였습니다.한국 생원들은 중국어→한국어 번역에서 강세이고 한족 생원들은 한국어→중국어 번역이 강세인 것 사실입니다.그러나 동시통역의 현장과 맴돌이쳐야만 되는 업무 마당에서는 상대방에게 즉시 의사를 전달해야 하고 두 언어로 업무를 속단 속결해야 하고도 술좌석까지 관여해야 합니다.이것은 한 사람이 여럿을 당한다는 일인다역(一人多役)으로서 상당한 시간적 문화 담금질이 필요합니다.그런데도 는 억지를 부리니 기막혀진 젊은이가 한둘이 아니였습니다.   요즘 동네의 공공기관이나 회사에서 타민족이 중국어나 한국어 전화를 받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틀에 박힌 상투어 몇마디는 수준급이나 몇개 복문(复句)을 들이대면 단통 입귀가 막혀 저레 조선족에게 대신을 부탁합니다.우리에게는 조상이 물려준 문화 세포핵이 있고 이 땅의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장독에서 숙성되고 수련된 날카론 언어 감수성이 있기 때문입이다.화려하게 겉발린 말 수준으로는 언저리에 붙자해도 뼈를 녹이고 피를 태우는 힘을 내고도 모자랍니다. 조선족은 이중언어란 쌍검을 휘두르며 사업,통신,상담,분쟁해결 등 상무잡사들을 자의(自意)에 따라 처리할 수 있습니다.두 언어를 종합리용하는 최종 우승자나 패권자는 조선족이라 해도 충족리유률로 설득할 수 있습니다.   분수없는 자화자찬인지 모릅니다만 조선족의 조선말 수준에 확실히 고민이 깊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요즘 년차로 열리는 학우회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100여명 참석자 중의 연설자 숱해가 웬일인지 한어 수준을 대대적으로 과시하며 열변을 냅다 쏟는데 온통 착어(错语)투성이고 바닥을 기는 수준인데 조선어마저 대수 무치고 버무리는 초급생 정도였습니다.이상한 것이라면 조선어가 능한 남녀들의 한어 수준이 다 갑급을 웃돌았다는 실정입니다.자리에서 민족어의 홀시,이중언어교육의 성과,민족문화의 생명력 등이 교차되면서, 헷갈리는 민족의 명암(明暗)을 실감하였습니다. 이 민족은 제풀에 제 언어를 줴뿌리며 제 문화 옥토를 사막화시킨다는 란상(乱想)이 자꾸 반짝거렸습니다.   북경의 어느 조선족 학자의 력설입니다.조선족에게 날리는 이 납함(呐喊)은 조선족 생사존망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으로 들어둬야 합니다.민족의 사멸이란 언어의 상실이 발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조건과 민족 정책만을 리용하며 슬렁슬렁 조선말 장사를 해도 세계 한민족의 교두보로 될 것은 불보듯 빤하다는 명약관화(明若观火)입니다.피타는 노력이라면 세계 최강의 이중언어 민족으로 될 것으로 자신합니다.지금 우리 민족의 수많은 트레이링걸(三语者)들은 맹위를 떨치며 세인을 놀래우고 있습니다.그 중 4개어 5개어를 겸용하는 많은 영재들은 남들을 악연하게 만듭니다.타민족에 누가 있었던가 세어보는데 손가락이 곱히지 않습니다.건데 누구는 제절로 언어 리탈을 감행하며 후세의 언어 유전자마저 제거하는 행각을 벌이는데 이것은 는 인간성에 잠재한 취약점의 발로인가요! 말마따나 있는대로 때려먹는 찰나주의(刹那主义)란 조선족의 허무한 민질(民疾)의 산출물인가요!   조선족은 공동체의 재분화 재조합의 불운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하지만 이것은 급변의 충격에 부딪쳐 내뿜는 유심적 탄식일 뿐입니다.리성적으로 본다면 이 위기는 발전도로에서 지나야 할 단계이며 현세대들에 부여된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세계경쟁의 릴레이트랙(接力赛跑道)에서 문화와 언어의 계주봉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이 미래 시대의 선두주자로 되게 해야 합니다.아니라면 조선족은 력사책에나 몇 줄 남아 도서관 구석에 매몰되야 할 것입니다.   인구는 격감인데 인재 수요는 급증하고 언어 가치가 반등하는 시대가 지척에 다가오고 있습니다.장사판에서는 공급이 딸리는 공부응구(供不应求) 시장이라 부릅니다.매개  민족성원은 언어 수준을 재점고하고 부응할 대안을 세워야 합니다.내 사는 나라의 발전과 국제교류의 물살 위에서 혹시 잠시는 안 쓰더라도 두고 써도 얼마던지 써먹을 민족어입니다.후대에게 뿌리를 심어준다면 그들에게서는 이미지,몸값,돈벌이가 동반상승하는 시너지(协同效应) 효과과 솟구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키워온 조선족의 은 민족의 천량 재산이며 우리나라와 인류의 불멸의 재부이기도 합니다.기성세대의 어깨에는 이를 승화시키고, 개화시키고, 번영시켜야 할 천직(天职)이 있습니다.까딱하면 후세들에게서 얼방둥이 조상이었다는 쌍욕을 뒤집어써야 합니다.조선족이 언어를 잃고 웃다 울며 사라지는 커뮤니티(共同体)로 되어서야 안되지요! (끝) 2016-02-04 연변일보
40    초겨울날의 늦은 반성 댓글:  조회:2488  추천:1  2015-12-26
누가 꾸몄는지 라는 격언이 글 마당에서 간혹 오르내린다.나름대로 뜻풀이 해보니 여인네는 봄의 흐름과 젊음의 실추를 겹쳐보며 애석해 하고 남정네는 일개년계획이 락공(落空)하여 가는 가을을 미련한다는 뜻이겠다.그래도 이맘때면 입이 귀밑까지 째지는 위인이 다수이고 대운이 텄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녀자팀도 푸슬하니 이 설법이 꼭 이렇지는 아니하고 확증성도 부족한 것만은 틀립없다.그런데 어디의 누구는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비추의 에 시달리군 한다.   말머리를 돌려,상강이 지나고 립동에 들어서니 이 동네 산간의 나무 무리들이 낳아키우던 이파리를 사정없이 락엽시키며 년차 환절의 자연순환을 연출한다.년부년(年復年)으로 되풀이되는 우주 조화는 세월을 초동에 밀어붙이는데 어떤 사람은 환절의 언덕에서 처연한 심정이 되어 서산락일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다.본능욕에 좌지우지되어 뭔가 차지하려고 애면글면하다가 기진하고 맥진하여 어깨를 처지우는 것이다.농사를 망친 농부가 고생스럽던 한해의 삼시삼농(三時三農)을 돌아보며 락심하는 기분이다.어깨에 걸려있는 훌쭉한 망태도 보기 민망하여 쑥스런 모양을 짓는다.식물계가 한해의 결실을 정리하고 천시운회(天時運回)를 재촉하고 있는데 그는 이지러진 욕망의 환멸과 무능함의 자학으로 꺼지는 탄식을 작년과 똑 같이 반복한다.   그는 남들의 화려한 리력을 부러워한 적이 수도 없이 많을가 뭔가를 더 점유하고 어딘가 더 나으려 아득빠득 애를 얼마나 써왔는지 모른다.허나 달려와 보면 늘 원점과 꼭같아 번번이 랑패감에 쌓여 속앓이를 랭가슴 앓듯 해야 한다. 할일과 안 할일에 분별이 명석하고 가당찮은 번뇌는 쓸어내고 뒤틀린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도리는 입버릇처럼 되뇌인 그 사람이다.그런데 하고보면 무엇인지 모자라 종당에는 헛물켰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거듭되는 지난해 케이스다.   남다르게 무언가를 쌓으려면 무수한 잔노릇을 출중하게 해야 한다.비범이란 완미한 평범의 집합이다.변증법이란 공구로 그 리치를 분해하면 비범이란 무수한 평범 속에 내재하고 소원이란 비범한 평범을 끊임없이 창조할 때만이 성취되고 절호의 기회는 당신을 용납하고 성공이란 피안은 그 상륙을 허락한다.큰일 작은일 모두에 정성을 다하는 품격이야말로 립신양명의 기본 자태일 것이다.허나 이 친구는 일한답시고 늘 징검다리 건너뛰듯 이리저리 오가면서 뚱땅대며 만든 것이란 구멍난 항아리고 우쭐하고 하는 짓이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인생을 떵떵대며 살자면 더 가지려는 갈퀴질 잔꾀보다 불필요한 무엇을 먼저 버리는 재치를 키워야 하고 문뜩문뜩 앞을 가로막는 위기를 해소하는 림기응변의 기지를 갖춰야 한다.위급하면 꼬리를 잘라버리며 위험에 대처하는 도마뱀의 눈물겨운 생존전략과 촌퇴(寸退)하고 척진(尺進)하는 기는 벌레의 지혜로움은 두고두고 배워야 할 본보기이다. 진퇴의 슬기로운 종합기법을 잘 습득해야 한다.그러나 그는 고루하고 편협한 마인드를 고집하는 것이 상투적 수법이고 콧대 목대가 벽창호같아 유아독존의 게지레한 모습이 불변의 자본이다.허심해야 하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며 버릇처럼 되뇌이면서 고쳤나보면 그냥 원모양이다.   인생길을 자기 두 발로 걸어야 할 것은 인간의 피치 못할 숙명이다.그 친구는 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하고 자기 푼수가 진짜 부족하다는 명철한 자아인식이 있어야 한다.오늘이 추하더라도 일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듯 정화한다면  약간은 곱게 달라질 것이다.막연히 뭘 바랄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해야 한다.   올농사도 헛농사라며 긴 숨을 쉬는 그에게는 설익은 꿈의 환영이 상심을 자초한 장본인이리라.이젠 무가내로 인생의 모년을 걸으면서 만각(晩覺)의 아쉬움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전심전력이란 의지를 살리고 무언가 희망을 품어야 한다.   허나, 욕심은 퍼럿게 살았어도 정수리가 듬성드뭇하고 귀밑머리에 흰눈색이 비꼈는데 아랫다리도 늘크데해졌다. (끝) 2015-11-12 동북아신문-2015-12-04  
39    근로빈곤자 댓글:  조회:2925  추천:1  2015-11-11
근간에 난감한 로동 장면을 목격하고 건강해서 근로해서만 실로 치부하는가?고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우리 동네 뒷산의 산사태방지 공사 현장에서 60대 경비원의 잠자리가 하도 보기 구차하여 눈을 감고 싶은 적이 있었다.천막은 기름떡칠이 된 방수포로 되고 4㎡ 정도 면적에 높이가 1m나 될가 하는 공간이였다. 그는 맨땅에 널판자를 깔고 헌 이불 위에서 자고 먹고 하는 모양인데 구석에 페트병과 숙식(熟食)이 무더기로 쌓인 것을 보아 배를 채우는데는 분명 지장이 없었다.때는 무더운 때라 밤이면 모기 성화이고 대낮은 찜통 더위인데 안에서 견디기 어려워 서성거리다가 토끼잠으로 졸음을 쫓는 것이 하루의 수면이란다.모기장 사려면 돈이 30원이 아깝고 목욕도 과분한 사치인데 수건을 음료수에 적셔 대충 문지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그래도 3000천원 정도의 임금을 받을 수 있으니 모자람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생존을 위하여 실망스러운 로동환경을 감내하고 용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존엄을 상실한 로동이겠으나 그 수입으로 의식(衣食)에는 족할 것이 뻔하다.허나 이들의 마주하고 있는 것은 로동의 안전과 보장 권리의 빈곤이고 그 고용주 도덕의 빈곤이다.번영과 번화를 자랑하는 이 도시에서 현지인들의 양상과 천양지차를 보인다. 거기다 천민의 취급을 받으며 응분의 권리를 잃은 착한 막벌이군들,이들을 신빈곤 계층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는 정서의 물결이 일었다.눈부신 발전을 표방하는 오늘 빈곤의 발생,개념,대상과 범주에서 분명 과거와 다르게 나타난다는 방증이다. 우리 50년대 출생자들과 빈곤이 뭔가고 묻는다면 거개가 배고파 기아에 허덕이던 때라고 말한다.고픈 배를 채우려고 파먹던 풀뿌리가 맛있던 기억이 새삼스럽고 누가 데려다 쌀밥을 먹여주던 과거사도 짙은 감동으로 남아있다.부모님들은 초근목피로 허기를 달래며 무거운 로동에 부대끼시고 동네 어르신들이 영양부족으로 부종을 앓던 모습 같은 눈물겨운 사연들이 기억 속에 천첩(千叠)으로 쌓여있다.바로 이 빈곤을 내치려는 궁칙사변(穷则思变)의 천리가 개혁개방의 장엄한 새 장막을 열었으리라.우리의 첫 목표는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난의포식(暖衣饱食)이었다. 그 허기지던 과거사를 안고 몇십년 동안 혈한을 쏟은 결실로 현재 사람들은 떡배 같은 배를 슬렁슬렁 만지며 덜먹기를 외쳐대는가 하면 살찐다고 다이어트에 정신이 빼앗겨 굶어대는 친구들도 부지기수다.이들과 빈곤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아이를 섬기기 어렵다거나 남들이 멋진 아파트에 자가용을 과시할 때 짝지어 수사납다거나 혹은 남들이 호화 결혼식을 올리는데 힘이 모자라 맥이 풀린다거나 아니면 남들이 호화유람을 가는데 가담하지 못하여 마음에 씨운다거나 등등을 말한다.새 형태 가난의 구제는 새로운 리념과 해법이 아니라면 풀어낼 실마리가 없을 것은 뻔하다. 앞에서 제기한 사례와 같이 물질의 부족으로 생기는 절대 빈곤과 타인과의 차별 혹은 권리박탈과 인위적인 사회적 소외에서 야기되는 상대빈곤이 오늘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만포식에는 근심 걱정이 없으나 법권과 기타 사회적 불평등으로 발생하는 빈곤 이것은 발빈치부(拔贫致富)의 새로운 국가적 난제이다. 생존과 직결되는 물질로부터 보는 절대적 경제관점과 권리부족,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비경제관점을 결합하여 빈곤 해소의 방침과 방법론을 과거보다 달리하여야 되지 않을가. 신빈곤 문제는 소득의 증가만으로 해소가 불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권리보장,사회보장,법제보호 등 비소득적 요소의 결핍이 소득의 함금량 높낮이와 생활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데서 일으키는 작용의 중요성은 너무 명백하다.지난날보다 복잡한 생활요소의 유기적 결합과 사회 다원화의 시점에서 빈곤문제 해결에 착안해야만 정확한 측정기준과 해결의 정책방향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근근히 소득의 증대로 비곤해탈을 부르짖는다면 적어도 과학적 발전관이란 명제를 리탈하게 된다. 지난 세월에 빈곤을 바라보던 렌즈를 교체해야 될 때임이 분명하다. 소처럼 일하고 돈벌레처럼 돈을 모아 잘 산다는 상식의 진리성은 권리보장이 없는 로동자의 어처구니 없는 로동 현상에서 무너지고 있다.단순한 화페 소득으로 빈곤을 가늠하는 측정법도 탈시대적 유물로 되어 버렸다. 위하여,새 시기 빈곤을 뿌리치는데 필요한 사회적 인프라(基础设施)를 재건하고 절대빈곤과 상대빈곤 상태가 뚜렷하게 투영된 변이곡선(变异曲线)을 그려내는 걸출한 대안이 따로 없을 것인가. (끝) 2015-11-12일 延边日报
38    부패하기와 부패당하기 댓글:  조회:2763  추천:2  2015-10-17
요즘 누구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톤(T)단위 현금회뢰를 받았고 거기 달라붙었던 가족,친족,친구들과 정부(情婦)들까지 뭉칫돈 돈벼락을 맞았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항간에서는 혀바닥을 차며 쯧쯧거린다.듣다 첫 소리인 부패 범죄가 응분의 징계를 받을 것은 마땅할 것이나 음미해 봐야 할 될 바라면 부패에는 부패와 부패 사촉의 요소가 불가결이라는 것이다.곱씹어 말하면 부패의 발생은 깊은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패자와 부패제공자 유착의 결합물이라는 것이다. 올해 초 거액의 수뢰죄로 언도를 받은 원 남경시 시장-계건업씨의 법정진술을 듣고 개살구 씹은 듯한 느낌이었느나 내가 이 처지라면 부패를 얼마 멀리하였을가?고 언뜻 생각한 적이 있다.그 범죄의 대부분은 20여년 동안 호형호제하던 절친들을 도와주고 반대급부를 얻었다는 것이다.그는 며 친구들에게 마지노선을 격파당했다는 회한의 소리를 구절구절 곱씹었다.의리가 불의를 저지르는 부패균으로 돌연변이했다고 피력한다.전화 한 통이나 눈기짓 하나로 떼돈을 좌우지할 고관대작이 우리들이 숭상하는 의형제 문화에서 보면 엄큼한 생소리는 아닐 같다.그는 부패했지만 당하기도 한 기본형으로 홍보하기 싶었다. 지금의 모임터에는 부패자들이 락마하여 씨원하다는 소리가 곁들이 화제이다. 요즘 고향에서 친구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아니나다를가 반부패 쾌재를 부르는데 아이러니라면 공직에 있던 친구들을 말밥에 올리고선 누구는 부탁만 하면 묘수를 써서라도 해결해 주는데 누구는 능갈치며 꾀를 부린다고 이러쿵저러쿵 운운한다.전자는 의리파이고 후자는 배신자라는 것이다.옛날 누군가 친구의 청탁에 부대끼며 며 딱한 사정을 호소하던 장면이 선히 떠올랐다. 계건업씨도 친구들과 한통속이 된 것이 말썽의 단초가 아니었겠는가. 만약 리권을 탈취하기 위한 경쟁에 친구 권력이 리용되였다면 그에 대한 대접은 무엇이었겠는가는 불보듯 뻔하다.이런 구태연하고 고질적인 우정이 바로 부패하기와 부패당하기의 양날검(双刃剑)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무수하다. 우리의 체면지키기 문화는 유교문화 중의 인의례지신(仁义礼智信)이란 도덕을 최고선으로 하는 의리관념이 원인(远因)이라 주장하는 데는 별로 반론이 없다.이리하여 유교권을 인격주의 사회라고 론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적 서구사회에서 획일적인 계약관계를 지향한다면 우리 사회는 의리(義理)라는 체면과 정으로 얽힌 정감관계를 선호한다.대폿잔을 함께 나누면 갑을은 친구에서 형제가 되고 리익이 공동하면 동지에서 테거멀(铁哥们-절친)이 되어 공생관계를 제꺼덕 건립하는 우리들이다.이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즉시 음밀한 갱도진지로 전락하여 그 속내평과 속사정을 공략하는 데는 어떠한 쾌도리검(快刀利剑) 도 찌르기 어려워진다.조금 더 기후가 조성된다면 권력은 리익공동체와 안전망 속에서 무소불위의 지랄룡천도 불사한다. 공공권력은 일종의 특수한 사회적 력량으로서 그는 강대한 지배력,제어력과 강제력을가진 사회관리의 무기이며 인간관계의 특수한 지위에서 집행자의 의도에 따라 리익제공,자기방어,음페보호 가능의 막대한 기능을 동시 발휘할 수도 있다.만약 이것이 개인적 목적에 이용된다면 막대한 이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은 물론 그 꽁무니만 따라다녀도 먹을알이 대단하다.그러기에 그는 특유의 매력을 가지게 되며 돈벌이에 이골이 난 숱한 친구들이 동맹을 맺아보려 벼라별 수작질을 다 한다.영양분이 많은 음식물이 쉽게 부패하듯 권력이란 이 영양단지에서 부패가 쉽사리 발생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유교문화 사회에서 권력의 주위에 친구 동아리가 형성되었을 때 그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는 신통한 반부패 조요경(照妖镜)이 비춰져야 한다. 부패의 근절이란 어떠한 정치구도 속에서도 불가능하고 여하한 견제와 감독도 상당한 한계가 있다. 권력을 새장 속에 가두고 그가 밝은 햇빛 아래서 움직이는 메카니즘(机制)을 형성하여 최대한으로 조기 혹은 초기에 적발하는데 주력해야 한다.특히 의리 문화에 젖어있는 사회에서 공권력을 틀어잡고 손버릇이 변질하는 행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타 누구도 공동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이리하여 우리 의리 문화의 토양에서 부패 바이러스가 번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을 반부패 작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의리란 인간 관계를 돈독히 하는 윤활제이지만 권력이 뒤섞인 의리는 한 치만 넘어도 부패의 촉매제、부패의 배양기、부패의 토치카로 변해진다.동아리를 만들고 부패해지고 부패당하는 교훈은 귀감으로 두고 봐야 할 교육교재이다. (끝) 2015-11-26日 延边日报
37    잃은 것,잃는 것,잃을 것 댓글:  조회:2967  추천:1  2015-09-13
1966년 7월,선생님의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소학교 문을 나설 때 우리는 이것이 정규교육의 종막이었다는 것을 알수 없는 10대 초반 철부지었다.이후는 10년의 문화혁명, 인생의 유일한 황금기인데 우리는 어쩔수없이 이 이벤트 속에서 방황과 혼돈의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더덜이없는 봉시불행(逢时不幸)에다 재수도 없는 타조세대라 말한다.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 허탈감으로 하여 동기생들이 모인 장소마다에서는 이 아픔을 호소하는 넋두리가 다반상담(茶饭常谈)으로 되었다.하여 소학교는 우리 맘속의 영원한 성당이고 추억을 낚아올리는 조어대(钓鱼台)로 되는 것이다. 근간에 볼일로 고향에 갔다가 모교가 문뜩 그리워져 찾아보고 말았다.학교는 연길 서쪽의 작은 진에 있는데 1928년 설립된 유구한 력사와 수많은 후대를 키원낸 성공탑으로 하여 졸업생들에게는 애시적의 자긍과 회억을 담아놓은 회고의 호수로 된지 오래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 기억을 더듬으며 보니 옛적의 모습이라면 그 때의 벽돌 한 조각도 없는 것이고 파란만장의 력사를 자랑하던 아름드리 백양나무와 운동장 주위를 감쌌던 수목들도 깔끔하게 흔적을 감추었다.으리으리한 기세를 자랑하는 교사는 분명 유적지를 전부 잃은 현재의 학교일 뿐 맘속의 학교가 아니었다.옛모습을 안고 떠나며 모교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는 상실감으로 쓸쓸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여기에는 분명 내 유소년 시절의 희노애락이 숱하게 담겨 있었다. 사회발전에 동반하여 낡은 물건에 대하여 구닥다리 처분을 진행하고 새 건물을 신축하는 개발은 불가피할 것이나 선조들의 지혜와 지성이 담긴 유적 전부에 불도저를 마구잡이로 들이댔다면 이것은 력사와 문화를 산산히 짓부시는 우행이 아닐 수 없다.늘 되뇌이는 리치대로 말하면 도시 개발에는 력사의 보존이란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건설과 보존은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 중에서도 일반 상식일 것이다.이것은 누구가 아닌 누구나 지켜야 할 사명임을 알아야 하는데 지내 몰라 이랬을가? 치적이나 돈에 혈안이 되어 이러이러하다면 어디가 어지간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 현재도 돈벌이를 위한 무차별 철거가 비일비재라는 소문이 무성하다.력사와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건설 이 역시 현대화 건설이라는 점과 이는 당사자들의 신성한 책임임을 더 부르짖어야 할 때인 같다.변혁이 목표로 되었다면 선조들의 노력과 지혜에 대한 보호도 목표중의 목표라는 이 진리를 망각하지 말아야 마땅하다.눈앞의 리익만을 위하여 문화의 가치를 걸레쪽 같이 취급한다면 현대 하등인의 발상 이하는 아니이다.세세대대 인민들의 노력과 세월이 쌓아온 침적물을 두두려 마슬 때 약간의 사정이라도 본다면 력사를 이어갈 후세에 무가지보의 정신 유산을 남겨줄 수 있다. 현실을 보면 도시 개발의 충동이 계속 암장마냥 꿈틀거리다가 세차게 분출하군 한다.허나 력사를 릉멸하는 비문화적 작태가 후세들에게 전승된다면 오늘의 이 학교도 때가 되면 누가 휘두르는 함마의 강타에 배기지 못할 것이다.바로 우리들의 오늘 행실이 력사 훼멸의 악성 순환을 자초할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살아온 흔적을 싹 지우고 선배의 업적을 빈손 털듯 털어버린다면 이 방자한 행동에 누군가 시비를 걸고 트집이라도 잡았다면 응당하다.도시개발을 표방한 떠들썩한 파티 속에서 문화 전승과 력사의 보존이라는 현대문명의 하한선만은 지켜야 한다. 심리 상태가 일그러진 욕가마리 착상인지는 모르나 고대광실 같은 교사가 엄청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잃어버린 문화유산이 너무도 가석한 것이다.우리 후대들은 영고성쇄의 역사속에서 우수한 것은 양기(扬弃)하고 저렬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선배들을 초월한 새 세대여야 할 뿐 숭고한 전통의 혼을 잃고 콩크리트 궤짝 같은 껍질만 움켜쥐고 살아가는 문화 가난뱅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잃은 것이 아깝고 잃는 것이 안타깝고 잃을 것도 군걱정이다.선조의 고적과 내 살던 흔적을 넘겨주기 위하여 돈에 눈이 뒤짚이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모두가 도정신해야 한다.성야(星夜)에서 성광(星光)이 반짝이듯 사람이 사는 곳마다에 력사 모습을 감입(嵌入)시키자 한다면 터무니없는 남가일몽이라고 누가 삐쭉거릴지는 모르겠다. 2015-09-12 흑룡강신문
36    콜택시(滴滴打车)의 철학 단상 댓글:  조회:2750  추천:2  2015-08-25
이 동네의 길이 막히어 형편없다고 타발을 늘어 놓은지 어느 땐데 더 형편없어질 뿐 나아질 낌새가 안 보인다.그런데 시민들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더 덤덤해 지고 두덜렁거리던 불평이 구름같이 사라지고 있다.길에 나서면 차량의 동작이 꿈뜨기로 쩔뚜배기 거북의 걸음이 부러울 구경감인데도 차에 실려 승객들은 말하다 맥빠졌는지 용케도 감내하는데 아마 불가피적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생물이 환경의 변화에 응화(应化)하는 적응형질(适应形质)의 작용이겠다고 생각했다. 각설하고,차타기와 주차가 힘들어 근자에는 택시를 부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체증이 심해지다 보니 택시마저 찾기 어려워지고 혹시 불러세워도 행선지를 묻고는 손사래 치며 안간다!가 례삿일로 되어 버렸다.막히는 곳이라며 구실을 둘러대기가 일수이고 내빼기가 다반사이다.이런 시세가 원인인지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을 리용한 콜택시 애플리케이션(앺-应用软件) 다수가 나들이객들의 봉사에 리용되어 편리를 봐주고 있다.생산력 발전했다는 정보시대의 산물이라 하겠다. 어느 날인가 핸드폰으로 전용차(专车)를 불렀다. 길옆에서 잠간 기다리니 년배되시는 어른이 산뜻한 닛산(日産) 승용차를 세우고 깍듯한 초벌인사를 올리고는 짐짝을 훌쩍 들어 트렁크에 넣고 목적지를 안내한다.한담에서 아들에게 사 준 차인데 교통이 어렵다보니 아들은 차라리 버스로 출퇴근하고 주말이나 부득이한 경우에만 몰고 나갈 뿐이란다.그러니 세워두면 어쩌고 차라리 콜택시에 등록하고 이른바 경영을 하는데 퇴직한 몸이라 소일거리가 있고 수입도 생기는데다 고객들도 기뻐하니 늘 즐겁다고 말한다.행선지에 도착하여 지피에스(GPS-卫星导航系统)로 거리를 계산하고 원 택시 비용의 9할을 받는데 가슴 쪽이 따따샜다. 택시도 호출하였었다.말말결에 운전사와 전용차를 화제에 올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이라는 열변을 토하는데 택시 시장을 교란하며 자기들의 장사를 빼앗아 간다며 죽으라고 욕한다.내가 매일매일 어려지는데 그들까지 끼어들면 죽도 먹기 어렵다는 고충이다.빈발하는 승차 거부에 대하여 슬쩍 물었더니 침체가 심한 곳으로 한 번 들어가면 하루의 장사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막부득이한 선택이라는 당당한 리유이다.그러면서도 콜택시를 취체 조치를 대야 할 관리 부문이 무능하다며 육두문자 쌍욕을 퍼지른다.발바닥에 불이 일도록 뛰어야 사는 세월인데 다니기에 얼기설기 꼬인 난해한 모순들에 해결책이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끼었다. 요즘 콜택시의 활약에 대하여 기존 택시업자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심지어 파업으로 유관부문에 압력을 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방에서는 현행법에 기록이 없다는 리유로 불법이란 딱지를 붙이고 퇴장시키는 레드카드(紅牌)를 내 들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적잖은 지역 정부는 자신의 관리 플랫홈에 올려놓고 질서있게 유도하면서 시민의 생활에 편리를 도모하는 한편 내포된 각종 부정적 현상들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다수의 지도자들은 이는 과학 발전의 결과물인 신생사물로 긍정하고 그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법제의 궤도에서 사회에 융합되도록 마당을 내주고 길을 열어주고 있다.동일한 현상에 대하여 리익,인식,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에 의하여 발생하는 부동한 태도에 대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곰곰히 짚어봐야 할 일이다.. 콜택시의 류행은 전통적 교통방식에 대한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경쟁 환경을 조성하여 업자들의 서비스 수준을 제고하도록 추동하는 정보통신기술과 교통도구가 결합된 새 업종이 틀림없다.이는 사회 발전을 상징하는 새싹이며 디지털 사회의 추세로서 누가 가로막고 왈가불가하는지를 불문하고 왕성한 생명력으로 산생과 존재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지난날 개혁 방향을 놓고 자본주의냐,사회주의냐(姓社姓资)며 시야비야가 분분할 때 등소평이 3개유무익여부(3个有利于)의 실사구시를 주창하며 밥을 죽이라고 우기는 친구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던 장면이 생생하다.유물론적 론리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이 론리를 콜택시 시비 마당에 대입시켜도 무난할 것이다. 맑스주의를 견지한다는 주장이 실천면에서 그의 세계관과 방법론인 유물변증법과 유물력사관을 이탈한 공념불이 되어서는 안된다.사물이 부단히 변화발전하는데 자기 기득권을 고수하고 낡은 규제에 안주하여 대처한다면 필연적으로 사회 전진을 가로막고 심지어 뒷걸음 치게 된다.과학적 발전은 리론적 사고가 선행해야 하고 그 기초로서의 철학 사상이 무기로 되어야 한다.모택동의 는 명언이 감회가 깊다. 사회의 진보란 경제만이 아닌 정치,문화,의식형태의 동반발전을 의미한다.바로 여기의 전후시말 전반에서 맑스주의 철학이 지침으로 되어야 하다.금전만능의 수전노(守钱奴) 가치의식과 유물변증법을 도외시하는 형이상학적 혹은 편의주의적 사고가 자원랑비,환경오염,빈부격차,부정부패와 불평등을 량산한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멀어져 가는 철학을 가까이 해야 될 때이다.이것이 사회주의 핵심적 가치를 확립하는데서 전제가 아닐가! 과학적 사고를 도외시하는 철학의 절대적 빈곤과 현실의 변화에 방만한 철학의 상대적 빈곤에서 탈피해야 될 때다.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철학의 번영을 만끽하고 싶다. (끝) 2015-06-27 2015-08-22일 흑룡강신문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