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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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가 본 미국땅의 이모저모 (5) 댓글:  조회:7609  추천:58  2009-12-18
        내가 본 미국땅의 이모저모 (5)                                                               글 / 강순화   상업정신: 1.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미국이고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유태인이라고 한다. 미국 전체 인구의 2%(600만)가 미국 50대 기업중의 17개를 차지하고 세계 7대 메이저 석유회사 중 6개가 유태인계 소유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의 아세아계 평균 가구 소득은 6만 6.103달러로 미국내 인종그룹 중 가장 높다. 유태인들은 하루 25시간 로동하고 한국인들은 하루 26시간 로동한다고 한다. 그와같이 악착스레 일한다는 뜻이다. 1965년 10월 죤슨대통령이 새로운 이민법을 반포하여 미국은 구라파 백인위주의 이민사회로부터 비구라파 비백인위주의 이민사회로 전변되였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지금의 한인1세들은 바로 그때에 대거 이주해 온 이민들이였다. 그들은 처음 이 아메리카대륙에 건너와 말을 모르고 법을 몰라 온갖 기시와 고생을 밥먹듯하며 싸우고 일하여 오늘의 가계들을 이루어 온 것이다. 그리고 뉴욕 플레싱에서 반가웠던 것은 그 미국 땅에 우리 연길의 <진달래식당>과 <풍무꼬치구이> 집이 큰길 옆에 붉은 간판을 환히 걸고 있는 것이였다. 한번 찾아들어가 보아야지 하는데 마침 돌아 올때 친구들이 그 식당에서 나를 환송한다고 연회를 베풀어 맛있는 연변음식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음식맛이 고유의 우리맛이여서 좋았고 더우기 타향살이 설음을 안고 사는 우리 동포들의 따뜻한 사랑방이 되어주어서 더욱 좋았다. 주말이면 자연히 우리 조선족 동포들의 모임터가 되어서 한방 가득이 모여 서로 반기고 권하고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워가는 정에 넘치는 풍경을 흔히 볼수 있다한다. 뉴욕 맨하탄의 32가는 선에서 말하다시피 번창한 상업과 서비스업의 시장으로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민족의 근성이라할가 한인 가계들은 서로 경쟁하고 경계할 뿐 서로 단합하지 못하는것 같다. 그래서인지 원래는 한인가계들로 꽉 찼던 플레싱거리가 지금은 중국인들에게 다 먹히고 겨우 몇 골목밖에 남겨지지 않았다. 몇해 아니면 그 골목들도 사라질듯 싶어 서 서글프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한상들은 10년이면 흑인들 속에 들어가 장사하고, 백인들 속에 가서 산다고 한다. 흑인들은 이런 한인들을《흑인동네에서 돈을 번 노랑 병아리들이 백인동네에 가서 돈을 펑펑 쓴다》고 불만한단다. 2. 미국 뉴욕에 간 중국상인들은 대부분이 대만이나 중국남방 복건성에서 건너간듯 하였다. 거리 도처에는 대만 혹은 복건인들의 모임광고와 활동장소들이 있었고 당인거리에 세워진 민족영웅 림측서동상도 복건인들이 세웠다고 한다. 중국상인들은 우선 단결심이 강하여 한사람의 힘이 안되면 여럿이 돈을 모여서라도 한개 빌딩을 몽땅 사서 타민족가계들을 밀어내고 그 지반을 차지해 버린다고 한다. 플레싱이 한국거리에서 중국거리로 변한것도 대만과 복건상인들이 단합하여 한인거리를 점령하였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온 시내가 중국인 천지이다. 중국은행, 중국상점, 중국식당, 중국병원, 중국마켓, 중국여행사, 심지어 지하철 매표구 컴프터 장치에까지도 중국글이 들어있어 영어를 못하는 중국인들께는 매우 편리하였다. 그래서 같은 미국 땅에서라도 로산젤레스 코리아타운이 한국어만 알면 살 수 있듯이 뉴욕의 당인거리와 플레싱만은 영어 한마디 몰라도 중국인들에게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수 있는 곳인것 같았다. 3. 뉴욕관광을 하면서 나는 중국인들의 경영정신에 또 한번 놀랐다. 내가 중국여행사에 신청한 관광일이 마침 주중이라 우리 차에는 두 중국류학생과 산동제남대학에서 온 녀선생 한분에 나까지 모두 4명 관광객 뿐이였다. 중국 같으면 차가 차지않아 후에 가라던지 취소하던지 할것이지만 그들은 아니였다. 12명이 타는 소형 버스에 4명 고객 뿐 이어도 가이드는 똑같은 서비스로 수많은 관광지들을 열심히 설명해 가면서 <뉴욕하루관광>을 순리롭게 마친 것이다. 정말로《1$라도 벌려하며》적게 벌지라도 자기들 회사의 신용과 의미지만은 목숨처럼 지키는 그들의 경영정신은 참으로 탐복할만하였다. 4. 또 희안한 것은 한인 택시기사 90%가 불법 운영이라 한다. 매달 400달러씩 내야하는 영업세를 회피하기 위해서란다. 택시기사 아저씨들은 자기들의 고급 자가용차를 가지고 보증금 2000$-3000$를 내고 기사들끼리 모여서 매일 24시간 련락을 끈지 않고 영업하는데 중계료 100$를 제하고도 한달에 3000-4000$는 쉽게 번다고 한다. 한 택시기사 부부는 함께 한달에 만달러도 벌었다고 하며 하와이 같은 유람지에서는 혼자서도 한달에 만달러는 잘 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에게 걸리면 첫번에는 400$, 두번째는 1000$의 벌금을 내야하며 세번 걸리면 차량을 압수한다고 하나 택시패쪽을 걸지 않은 수백대(뉴욕에만 500대)의 콜택시들이 밤낮으로 온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전화 한통만 걸면 즉시 달려오는 코레안택시들이 우리고객들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서비스업이 되고 있었다. 차에 앉아 택시기사아저씨들과 이야기해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공항이 제일 불안전한 곳이라 한다. 일단 돈을 주고받는 것이 경찰에게 발각되기만 하면 붙잡히니 말이다. 그런데 마음씨 고운 당지의 손님들은 곧 알아 차리고《택시비가 아니다. 내가 고용한 운전사한테 휘발유 값을 준다.》고 하면서 변명도 해주고 녀성손님일 경우《이분은 나의 누님입니다. 공항에 전송해요.》라고 하면 경찰은 두말없이 물러간다고 한다. 그들로의 영업방식은 이미 이렇게 굳어져 있었다. 5. 근년의 한국인 무비자 입국 정책은 많은 한국 로무일군들의 미국입국을 초래하였다. 우선 허용된 3개월의 체류를 마치고 돌아갔다가 재 입국시에는 더 긴 시간의 비자가 나올수 있다니 말이다. 또 중국조선족 아줌마들과는 달리 한국녀성들은 산후조리, 맛사지, 네일 등 업체에서 여러 가지《자격증》을 따 가지고 오기에 취직에서도 조선족만 우세였다. 때문에 한국인의 미국 무비자 입국은 한국 로무인들과 극소수의 한국국적을 취득한 조선족 아줌마들에게는 좋은 기회이나 다수의 재미 조선족동포들에 한해서는 취업의 길이 더 졻아진 셈이다. 한국 베이비시터(애기보기 한국할머니)들의 매달 공자도 2000$ 좌우되니 반년이면 그 할머니들도 만달러씩은 거의 벌어가군 하였다. (다음에 계속이음)
15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4) - 강순화 댓글:  조회:7908  추천:78  2009-12-14
     내가 본 미국땅의 이모저모 (4)                                                                                                                                              글 / 강순화    미국 뉴저지의 한 개인 자택    시장경제 변화에 따른 새로운 현상:   (1) 불경기를 모르는 실버 비즈니스가 인기였다. 지금 미국의 65세이상 시니어 인구는 14세 미만 인구보다 많다, 인구 10명 중 한명이 65세 이상이고 미 전국적으로 3700만명, 즉 12%가 로년층이며 85세 이상은 53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미국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의 전망이 밝았다. 례하면 노년 데어케어 센터, 차량편 제공 교통 서비스, 여가시간이 많고 경제도 허용되는 노인들에 한한 여행사업, 건강식품 판매사업, 또 대다수 로년층은 수십년 투자로 인해 재산이 많이 쌓인 상태이므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원함으로 로후를 위한 재정플랜 금융서비스도 인기라 한다. 지금은 시니어라고 컴맹으로 생각하면 실수란다. 그들의 온라인 쇼핑 년간 소비액이 70억$이며 로인들도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의 자동차를 선호하고 있었다.    미국내 로년층들은 머니마켓 계좌의 7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년간 소비액은 1000억$이고, 새차 오너의 41%가 시니어층이였다. 병원도 처방약 환자의 74%가 로년층이며, 약국 고객의 51%, 고급여행자의 8%가 로년층들이 차지한다고 한다. 하여《비즈니스는 12%의 인구를 잡아라》고 한다.   (2) 미국의 대학들이 경기침체기에 비싼 학비로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오하이오주 우스터 대학은 올여름에 작년보다 3배 많은 200여명 학생들에게 창문닦기, 나무심기, 교내 식물원 등 일자리를 제공하여 학생들의 재정난을 해결하고 전학하거나 퇴학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한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상점들에는 시간별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이 흔하게 보였다. 한 한인 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그애들이 월급보다 서비스 팁을 더 잘 받으므로 매주 몇백달러는 문제없이 번다는것이다. 방학때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4000달러 좌우씩 벌면 3만7천달러에 달하는 학비에 좀 보탬이 된다고 한다.     생활과 복지: (1) 미국 시민권자로 65세이상이면 로인아파트를 신청할수 있는데 그 렌트비는 100-300$밖에 안된다고 한다. 보통 아파트 렌트비가 1500$좌우 되는데 비해 매우 싼 가격이다. 그리고 매 사람의 평생 공적에 따라 로후 생활보조금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은 2000달러좌우도 되지만 (변호사직업 같은 경우) 최저로는 700-800달러 된다고 한다. 그 돈으로 아파트 랜트비를 물고 생활하고도 나머지가 있어 건강한 분들은 자주 국내외 여행도 한다고 한다. 만약 로인들이 분배받은 아파트 층계가 가파로워 오르내릴때 넘어지기나 하면 국가에 소송하는데 거의 100%가 성공하여 2-3만달러의 보조금을 받는다고 한다. 한인 거리인 뉴욕의 플러싱에도 노인복지센터가 있어서 무료급식, 생활상담, 노래교실, 컴프터, 영어학습, 스포츠 등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2) 무릇 60세 이상이면 교통비를 40%밖에 받지 않는데 대국다운 것은 이런 대우를 자기 국민 뿐 아닌 외국인들에게도 다 허용하고 있는 것이였다. 나도 60이 넘었으므로 누가 알려 주어 기차를 탈 때면 매표구에서《시니어시리즈 디켓!(로년우대권 주세요)》하면 더 묻지도 않고 또 그 무슨 여권같은 증명을 보자는 말도 없이 우대표를 끈어 주는데 뉴욕 맨하탄에서 뉴저지 오렌지까지 본래 5$인 차표도 2$만 받으므로 주말 휴식때마다 오가면서 항상 기분 좋은 혜택을 받군 하였다.   또 의료보험에 참가한 시민권자는 무료 검진을 받을 수 있는데 의사 검진은 반드시 수일 전에 예약해야 하였고 또 수시로 부를 수 있는 개인지정 의사와 상담사, 변호사도 있었다. 장기적인 의난병은 무료검진 한다는 광고가 항상 신문에 실렸고 장애인 보험에 참가하면 평생 무료로 간호하고 치료비, 수술비도 무료로 되였다.   지난여름 미국에 신종풀루(H1N1)가 갑자기 확산될때 뉴욕시장은 직접 텔레비 방송을 통해 시민권자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두 무료로 치료할테니 증상이 보이면 즉시 병원을 찾으라고 호소하였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고마운 목소리였다. 또 만약 시민권자가 모종 수술로 하여 일할 수 없을 때에는 병이 낳았다는 진단을 받을때 까지 매주 500$의 기본생활 보장금도 지급하고 있었다.     생육의 천국: 그 어느나라에서 왔건 미국땅에서 반년이상 거주하고 생육하면 그 아이는 무조건 미국 국적을 가질 수 있고 18세 까지의 양육비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매 아이에게 월 300-500달러의 생활비가 나오고 학교에서는 점심을 무료로 공급한다. 하여 미국 서쪽에 잇대인 멕시코 사람들은 미국을 안방나들듯 왕래하면서 애들은 5-6명씩 낳아서 그애들이 타는 생활비로 어른들이 살아간단다. 그들은 금방 국경을 건너와서는 집단수용소처럼 침대 10개씩 놓고 매인 100달러씩 받는 강당같은 건물을 세맡아 무리로 살다가 일단 짝을 무으면 따로 나가서 애부터 낳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자기세대가 불법체류로 인해 이루지 못하는《미국의 꿈》을 이미 합법화 된 다음세대에 기탁하려고《맹렬히》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또 멕시칸들은 무겁고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잘하며 인권비도 싸게 받으므로 한인 가계들에서는 그들을 많이 채용하고 있었다. 지금 미국에서의 스페니쉬 수자는 2003년 270만명으로부터 2008년에는 400만명으로 지난 5년간 50% 증가하여 이미 흑인수를 초과하며 거의 백인수와 동등하다고 한다   미국 뉴욕 금융중심 앞거리에서 미국의 주택: 보통 아파트의 값은 40-50만$이고 단독주택은 모두 100만$ 좌우였다. 극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평민들은 모두 집값을 나누어 지불하고 있었는데 500평이상의 큰 단독주택들은 매달 3000$좌우의 엄청난 집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단독주택들의 집집마다는 널따란 앞뒤 마당과 뜰을 가지고 있었으며 집주위는 온통 파란 잔디를 펼쳐심고 주일마다 잔디밭을 기계로 다듬는 일이 큰 일과로 되고 있었다. 뉴저지의 산속에 위치한 별장같은 자택들에서는 사슴, 공작새, 다람쥐, 두더지를 흔하게 볼수 있었고 각가지 새들은 주인이 사서 뿌려주는 먹이를 찾아 제집처럼 날아들었다. 밤이면 곰새끼들이 쓰레기통을 뚜지고 길에 나서면 알락달락한 사슴들이 길옆에 멈춰서서 까만 눈을 때롱거리며 행인들을 쳐다본다. 아침에 일어나니 앞마당에 공작새 네 마리가 날아와서 아릿다운 깃을 부채처럼 활짝 펴고 끼륵끼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도 신기하여 나는 얼른 그놈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 이곳에서는 전혀 볼수 없는 자연과 인간이 평화로이 공존공생하는 생태환경이였다. 꽃나무속의 단독주택들은 그 다양한 모양새와 꾸림새로 아름다운 화원을 이루었고 집과 집사이가 50m도 더 떨어져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보였다.    최근에는 경기침체로 이런 고급주택들의 구매자가 감소되고 오피스 렌드도 지난해 동기 보다 44%나 하강되였다고 한다. 뉴욕지대에서 일하는 조선족 동포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과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플레싱이라는 거리에서 집을 세맡고 있었다. 보통 일터에서 지하철로 한시간 정도되게 멀지만 집세 값이 뉴욕중심 보다 싸기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는 중국계 이민자들처럼 플레싱 다운타운과 한인 노던블러바드 상권이 련결되는 지점에《중국조선족타운》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것이다. 새벽이면 아파트 옆의 넓다란 운동장에 30-40명의 조선족 남녀들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서로 일자리정보도 교환하면서 한고향 친구들처럼 지내고 있었다. 조선족들은 보통 한달에 집세 1000-1500$씩 하는 아파트를 5-6명이 함께 세맡고 침실은 나누어 쓰며 주방과 화장실은 함께 쓴다. 재미있는 것은 세맡은 사람들이 산지사방에서 모이므로 남자도 있고 녀자도 있지만 주인은 그것을 가리지 않고 받는 것이다. 처음엔 서로 좀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한집에서 살면서 정도 들고 혹은 짝도 무어지는듯 하였다. 우리 이곳에서는 볼수 없는 괴상한 풍경이다.     생활비: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수입에 비해 아주 싼 편이고 특히 부식품 가격이 아주 저렴하였다. 보통 로동자의 한달 최저 수입이 2000달러 넘는데 비하면 쌀 10kg에 10여$, 밀가루 1kg에 2-3$, 소고기 1kg에 10$좌우, 닭고기 한근에 2-3$, 수박 하나에 2$, 감자 1kg에 1.8$, 고추 한 도시락 1.5$, 상추한묶음 1$, 닭알10개에 1$ 등으로 한달 생활비가 2-300달러면 충분하다고 한다. 특히 도시마다 널려 있는 99센트(nine nine cent)상점들에서는 식품을 포함한 모든 물건들이 세금까지 합하여도 1달러 좌우이므로 평민백성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주말에 고된 일터에서 돌아오면 친구들끼리 노래방에 가서는《고향이 그리워도...》,《나그네설음》등등 망향가들을 밤새껏 부르며 타향에서의 설음을 달래고 나오면 100$, 두셋이 조선족 음식점을 찾아가 채 몇개 차려 먹으면 70-80$, 된장찌개나 칼국수같은 간단한 음식은 일인분에 10-12$, 택시비는 거리내에서 5-10$좌우, 빵 하나에 2$, 커피 한잔에 1$, 광천수 한병에 1$씩 하니 미국에서의 1달러 가치는 우리 이곳의 인민페 1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것이다.                                                                (다음기에 계속)                   뉴욕 맨하탄당인거리 한골목  
14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3) - 강순화 댓글:  조회:4362  추천:59  2009-12-07
내가 본 미국땅의 이모저모 (3) 강순화   시민들의 투철한 준법정신: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 제도는 매 주마다 조금씩 법이 달랐다. 그래서 뉴욕에서 범법한 사람이 뉴저지에 건너가면 무사할 수도 있다고 하여 두 주사이의 지하 수로를 이라 이름 지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교통규칙은 위반만하면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기에 사람마다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골목길마다에는《STOP》라는 붉은 패말이 세워져서 모든 차량들은 그곳에서 잠간 멈추었다가 전후좌우를 다 확인하고야 재출발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었다. 신호등을 위반하여 사고가 생기면 위반한자가 죽었어도 운전자한테는 책임이 없도록 법이되여 있었고 음주운전이나 교통규칙 위반시에는 보통 3000달러의 벌금에 변호사비 3000달러를 더 내야 간금되지 않을 수 있단다. 그러나 이렇게 거액을 벌금하고 감방에 가지 않았다 해도 그 사람의 평생 시스템에는 범법 전과자로 락인이 딱 찍힌다니 그 누가 감히 교통규칙을 위반하겠는가? 연길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을 그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차하느라 어지러운 물이 동네를 어지럽히면 이웃은 즉시 위생환경 부분에 신고하여 500$의 벌금을 내도록 하며 이웃에서 잔디를 깍지 않아도 신고하고 개 배때기를 발로 차도 신고되면 6개월 간금되는 괴상한 일도 있다. 아이가 아빠와 놀다가 상하여도 엄마가 신고하면 아이한테 벌금 200$를 주어야 하고 남편이 음주 후 폭행하면 안해가 신고하여 경찰이 잡아갈 수도 있었다. 커피숍에서 종업원의 부주의로 손님에게 커피를 쏟았으면 신고당하여 수천달러의 벌금을 물면서라도 그 커피숍의 이미지를 살려야 하며 식당에서 손님이 종업원을 욕하고 때리면 수만달러의 벌금을 내야 하므로 오히려《맞으면 번다》는 설까지 돌고 있다. 여성들이 가슴증대 실리컨의 집단소송으로 한 성형병원에 2억달러의 배상금을 안긴적도 있다. 차를 살짝 건드렸는데 싸움이 터져 흑인애가 쇠몽둥이를 휘둘렀는데 그 소송으로 150만달러의 벌금을 해야 했다고 한다. 아이 네댓씩 쌍용밀차에 끌고 다니는 멕시칸들이 희구하여 내가 카메라로 찍으려 하니 곁에 있던 친구가《자칫하면 신고 당하여 큰 벌금을 한다》고 알려주어 나는 흠짓 놀랐다. 신고, 소송문화가 우리와는 너무나 달라서 어떤 일들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어린애 5-6명씩 끌고 다니는 재미 멕시코인들  례의문화: 아침운동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나 출근길에는 언제나 서로《하와유?(How are you?)》,《꿋모닝!(Good morning?)》하고 인사를 나누며 퇴근 할때도《씨유 투모루! (See you tomorrow, 래일 다시 만납시다)》하고 꼭 서로 찾아서 인사를 나눈다. 자가용 차안에서도 밖에 가는 사람한테 인사를 하고 먼길을 갈려면 자기 차를 타라고 말을 건넨다. 마당에서 자기 차를 닦다가도 뒤에서 내가 걸어오니 얼른 돌아서서《헤로!(Hello!)》하고 인사한다. 그리고 감사하다(Thank you)와 미안하다(I'm sorry)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마다 거의 입에 달고 있는다. 처음에는 이런 환경이 좀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습관화되고 다정해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식사시간에는 누구나 자기로 자기밥을 챙겨먹고 서로 권하지 않았으며 식당에 가서도 자기 몫은 엄격히 자기가 결산하는 모양이 좋기는 하나 좀 어색하기도 하였다. 권하고 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며 큰솥 밥을 먹는 우리 문화와는 확연히 달라서 어쩐지 좀 린색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기부문화: 억만장자들이 재산기부로 기쁨을 누린다는 기사가 종종 신문에 실린다. 400억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최고부호로 꼽히는 빌 게이츠 MS창업자는 작년 6월부터 경영에서 손을 떼고 재산의 대부분을 부인 멜린다와 함께 2000년에 설립한 세계 최대의 자선기관 빌&멜린다 재단에 기부하여 빈곤,질병퇴치와 교육불평등 해소 등 자선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모든 억만장자는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자신이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자녀가 행복해지며 세계가 더 좋은 곳으로 변한다... ...엄청난 부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으로 이전되여야 한다 ...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거나 자신을 위해 일부를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는 그가 한 말이다.    370억$의 재산으로 세계 제2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 버그셔 헤서웨이 회장도 2006년 307억$의 주식을 빌&멜린다 재단에 기부하였다.   나와 함께 있었던 복지센터의 간호사를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이 국내외의 장애인 아동들을 입양하고 있었는데 정상적이지도 못한 그 아이들을 천사의 마음으로 돌보고 있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가정들에 한해 국가에서도 일정한 보조금을 정기적으로 준다고 한다.    미국 LA타운에 한국계 미군 용사이며 미군에서는 아세아계 첫 대대장을 지닌 고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딴《김영옥 중학교》가 지난 9월 개교하였다. 이 학교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랄프안 박사를 비롯한 김영옥 대령의 친구 20여명이 단체를 무어서 후원하여 지은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고등학교도 건립할 타산이였다. (다음에 이음)  
13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2) 댓글:  조회:6037  추천:68  2009-12-05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2)                                                                 글 / 강순화     미국정세의 일각 : 대통령이나 상하원위원은 물론 지방정권 대표까지도 온 국민이 투표로 선거하는 민주선거방식은 한국과 흡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나 지방의 정권선거경쟁에 한인들과 중국계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고 또 성공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이였다. 2005년11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한국계 최준희씨(34세)가 12년간 재직해 온 현직시장 후보를 1000표의 차이로 따돌리고 60%이상의 백인인구를 가진 뉴저지주 에디슨시에서 첫 한인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그 실례의 하나이다. 그 외에도 정계에 뛰여 들어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이민출신들이 적지 않다. 색다른 인종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민대국이라는 특색을 다분히 표연하고 있었고 자본주의 선거민주화의 한면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63%의 지지률과 그 인기는 력대의 그 어느 대통령만 높았다. 특히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가 지난 8월 펴낸 현대속어사전에 오바마(obama)가 형용사로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 해석은 멋지다(cool)혹은 근사하다(rad)였다. 미국 젊은이들은《 넌 참 오바마스럽다(you are so obama)》라고 하면 최고의 평가라고 한다. 학생들은 또 오바마를《미국 최초의 힙(hip. 세련되고 유행을 선도하는)》한 대통령으로 꼽는다.    뉴욕타임스와 ABC, CBS, NBC, PBS 등 메이저 언론사 기사 1261건을 분석한 결과 오바마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기사 42%, 비판적 기사 20%인데 전임 대통령 클린턴은 우호적 기사 27%, 부시는 22%인데 비해 너무나 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하여 일부 언론들에서는 오히려 지나친 찬미가 아닌가? 비판기능의 소홀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보이고 있었다.   이밖에 힐러리 클리턴 국무장관의 유려한 연설이나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매너는 여론계의 호감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클리턴 전 대통령이 지난 8월 조선 평양을 방문하고 그 행차로 인하여 4개월간이나 억류되였고 12년 판결까지 받았던 미국적 녀기자(중국계와 한국계)가 조선법정에서 석방되여 자기나라 가족의 품에 돌아오게 된 사건은 온 나라를 들성 할 만큼 국민의 흥분을 자아냈다.                 미국총통 오바마부부 밀랍형상 앞에서 기념촬영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서만 방송되고 있는 한국어 방송은 저녘 8시부터 10시까지였는데 방송의 80% 이상은 기독교 설교였고 나머지는 한국뉴스와 는 프로, 그리고 일일드라마 을 방송하고 있었다.   중국어방송은 신당인텔레비(新唐人電視)로 저녘10시부터 12시까지 였는데 법룬공에 대한 찬미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대륙에서의 부패한 일들이나  중국 국가지도자와 정책을 비방하는 프로들이 대부분이고 12시 이후에야 중국의 중앙방송 제4널을 전파하고 있었다.《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코큰 사람들이 사는 지구 반대쪽 미국땅에서 우리말 방송이나 중국어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어두운 밤길에 밝은 등불을 보는것 같이 기분이 좋았고 또 중국어를 모르는 미국사람들 보기에도 신나는 일이였다. 다행이 내가 취직하여 거주했던 뉴저지《레쥬드(Ledgewood)》복지센터는 백인지구이지만 위의 텔레비프로들을 다 볼수 있었다. 나는 밤이면 시간을 맞춰가며 유익한 프로들을 골라보았고 특히 중앙방송제4채널로 대륙의 소식도 제때에 잘 알게되여 타향에서의 고독과 외로움도 달랠수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카지노도시 라스베거스의 밤풍경    카지노(CaSiNo): 지난해에는 미국서부관광의 중요한 코스로 세계적인 카지노 도시 라스베가스에 가 보았고 금년 미국동부에서는 아틀랜드 시티 도박장을 참관하였다. 나이가라폭포에 가서는 또 나이아라강 맞은켠 캐나다 땅에서 불야성을 이루고 영업을 하는 카지노 고층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외국인들은 비자가 있어야지만 미국인들은 비자 없이도 캐나다의 카지노장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1978년 이후 도박이 합법화되면서 행운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밤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전국 지어 세계각국에서 모여든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카지노에서 뿜어대는 불빛으로 온 시가지 전체가 동이 틀때까지 불야성을 이룬다.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다가 잃으면 분해서 일어 못나고 따면 더 따보려는 부자의 꿈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다는 자석같고 마약같은 자리가 바로 카지노이다.   나는 주말휴식에 한번 카지노에 가 보기로 작정했다. 나의 하숙아파트가 있는 뉴욕 플레싱에서 승차권 10$면 두시간반 거리의 카지노에 갈수 있었다. 아침 일찍 지정지점에 가니 시간마다 출발하는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차량마다 사람들이 꽉 차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둘러보니 남녀로소로 부동한 년령층 사람들이 다 있었다. 카지노에 도착하면 차에서 내릴때 구폰 한장씩 주면서 도박에 참여하게 한다. 도박에 전혀 외항인 나는 그저 카메라를 들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노랑머리 흰 얼굴 파란 눈동자들이 그 오색찬란한 컴프터 화면속에서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숫자에 정신을 팔고 있는 관경들을 찍어대며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한 한국아저씨가 옆에 와서 놀지 않으려면 구폰을 팔라고 하였다. 나는 얼른 좋아라고 그가 주는대로 20$를 받고 팔아버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사실 그 구폰으로 점심도 먹을 수 있고 또 가격이 실제는 40$라는 것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뻐스에서 이야기들 나눠보니 옆좌석의 대만할머니는 500$를 잃었다하고 앞좌석의 중국청년은 400$를 잃었다 하며 건너 좌석의 한국아주머니는 돈신부럼을 왔다가 반나절 놀았는데 300달러를 땃다고 하였다. 온 차안의 40여명중 기분좋게 웃는 사람은 한두명도 안되고 모두 피곤에 지쳐 있었으니 그날도 카지노주인이야 톡톡히 딸라를 벌지 않았겠는가? 코큰 부자들이 몇천몇만 달러씩 잃고 따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겠으나 못사는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큰돈 들여 그 머나먼 아메리카 땅에까지 가서 카지노에 빠져 있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우리 동포들이 미국가서 처음 1-2년은 돈이 아까워 그런 곳은 념두에도 없다가 한 3년 지나면 버는 돈에 비해 카지노에서 잃는 돈이 별로 큰것 같지 않아 휴식일이면 줄창 카지노에 밖혀 산다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 함께 주숙하고 있는 한 녀성친구는 내가 오기 전 주일에 3000달러를 잃었다면서 그 돈을 도로 찾겠다고 더 정신없이 다니고 있었다. 내가《힘들게 번 돈을 그렇게 처넣고 언제 돈을 모아 집에 가겠는가》고 하니《돈만 벌면 무슨 재미에 살겠습까?》라고 한다. 일부 남성 도박군들이 한주에 1000달러쯤 잃는 것은 보통이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에 계속) 
12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1) 댓글:  조회:5035  추천:95  2009-12-01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1)                                                       글 / 강순화       금년 봄 나는 또다시 두번째로 미국땅에 들어설 기회를 가졌다. 작년 첫걸음은 15일간의 미국서부관광이였으니 진짜《말타고 꽃구경》하였다면 금년의 6개여월간의 체류는 어느정도 미국사회에 대해 료해 할수 있는 계기였다. 비록 짧은 소견이나마 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필을 들었음을 밝히고 싶다.         뉴욕 맨하탄 중심거리    미국이란 나라는 북미대륙의 48개 주와 본토 밖의 알래스카 및 하와이를 합쳐 총 50개 주로 구성된 인구 2억8천만명의 련방공화국이다. (2000년인구조사국) 국가의 정식 명칭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수도는 워싱턴이다.    미국은 마치 한 주가 한 나라를 방불케하는 광활한 대지, 다양한 지형과 기후, 다민족, 다문화의 결합 등으로 다양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융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나라였다. 일찍 전쟁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계 도처에서 각기 다른 희망과 꿈을 품고 머나 먼 바다와 륙지를 건너와 삶의 터전을 열었던 미국의 이민역사와 같이 미국은 실로 세계 방방곳곳에서 이민하여 온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세계인종시장》이요, 문명과 우매, 광명과 암흑이 공존하는 대천세계이며 이민자들에게는 실로《자유와 기회의 땅》이였다.    금년 7월4일은 미국 독립 233주년이다. 짧은 200여년의 력사를 가진 나라가 세계의 초대국이요, 고도로 발달한 선진국이 된것은 그들의 투쟁사가 보여주고 있다. 수도 워싱턴에 있는 2차세계대전참전 기념비에는《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져 있다. 즉 목숨을 내건 지도자들의 용기와 수많은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 및 인민들의 피의 대가로 미국의 독립이 쟁취되였음을 말한다. 8년간의 독립전쟁에서 미국군 5만명, 영국군 6만8천명이 사망하였다 한다.    현재 미국내 아세아 인구는 1520만명인데 그중 25세이상 인구에서 대학 학사이상 학령자 50%, 대학원 석사 이상이 20%로서 미국인의 28%, 10%보다 훨씬 높다. 이는 아세아 이주민들의 문화적 소질과 높은 교육열을 충분히 보여준다. 아세아계 인구중 중국계가 354만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필리핀 305만명, 인도계 277만명, 베트남 164만명, 한인 156만명이다(2007년 7월). 미국내 류학생수는 72만 2272명인데 그중 한국류학생만 11만으로 15.2%를 차지한다(2008 한국외교통상부).    미국땅에 들어서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일한 만큼 소득할수 있는 나라, 세금의 나라, 팁의나라》라는 것이다. 그 누구든 일단 그땅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먹고 자고 쓰는 등 소비를 해야 하는데 모든 상품 가격의 5-9%의 세금을 내야하고 식당, 호텔, 미용실, 택시 등 서비스업에는 소비의 10-15%의 팁을 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에 사는 매 사람이 국가에 대한 공헌이고 그 나라의 서비스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서 이런 합리적인 시스템은 이미 시민의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권자라면 매 사람마다에 평생의 시스템이 이루어져서 그 언제 어디에서나 이미 입력된 그 사람의 경력과 공과여부를 확연히 들여다 볼수 있었다. 하기에 취직이던 퇴직이던 그 기록에 따라 공평합리하게 혜택을 받거나 혹은 영향을 받게되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선진대국의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이 아닌가.     불법체류자도 직장의《온라인 직원신원확인 시스템》으로 확인하면 금방 들어나게 되어 있어 최근에는 봉제공장, 건축업, 음식점 등에서 수색되고 있는데 2008년에는 도합 1.100명이 적발되였고 그중 고용주가 처분 받은 것만 1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세아계 상인은 비법이민 총인수의 11%나 차지하고 있다니 온라인 확인은 아직도 대다수 직장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로산젤레스(L0s Angeles):   천사의 도시로 불리는 미국 서부의 관문도시 로산젤레스는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방대한 도시이며 전세계 방방곳곳에서 밀려들어 온 이민자들의 도시이다.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꿈과 믿음, 언어 풍속과 음식 그리고 건축물들이 여러 문화와 문명으로 어우려지고 뒤섞여져 오히려 로산젤레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여 있었다. 하여 로산젤레스는 미국 이민의 사령탑이고 이민자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총 인구는 383만명인데 그중 라틴 아메리카 41%, 백인 36.9%, 아세아인 11.5%, 흑인 10.3%이다. 작년에는 밤 비행기로 도착하였기에 불야성을 이룬 로산젤레스를 보았었는데 금년에는 한낮에 도착하게 되어 비행기 창구로 내려다 본 로산젤레스는 그야말로 거대한 공룡마냥 온 대지를 누비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산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는 100만의 한인들이 집거하여 있었다.《명동교자》, 《뉴서울호텔》,《김씨전기》,《약손한의원》,《종로설렁탕》,《한복이불》,《목마르죵》,《머리하는 날》,《코리아 플라자》등등 한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걸려져 있었고 한인 방송국, 한국신문과 잡지 그리고 한인학교와 병원, 한인교회까지 구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 서울종로의 한 거리를 방불케 하였다.     로산젤레스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들도 8천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 단체가 KAWA한미여성회와의 문화교류활동으로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자 재미조선족협회에서 소식을 듣고 우리를 찾아왔다. 연변대학법률계 출신인 강성 리사장과 연길복장창 싸이판 출신인 김정화 상담소장은 재미조선족들을 위해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민자들의 주거마련과 취직을 위해 항상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며 자기 집에 직접 데려다 한동안씩 거처시킨 조선족들만 하여도 3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현재 강성이사장은 한 합자기업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김정화씨는 상담소 출근 외 짬짬의 시간으로 조선족들의 우편배달과 카드판매, 보건품, 의학품 전달 등 업무들을 맡아하고 있었다.     헐리우드(HOLLY WOOD):    로산젤레스 코리아타운 북서쪽에 위치한 세계적인 영화의 중심인 헐리우드는 1915년 닭농장을 전환하여 영화 스튜디오를 열고 40년 이상 방문객들에게 헐리우드의 흥분을 선사하여 왔다고 한다. 스튜디오에는 전성기 시절의 옛 건물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관들 그리고 중국사원식의 호화로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콘서트 전용 극장에서는 신비한 우주여행을 할수 있었는데 좌석에 앉아서도 《지구》를 몇 바퀴씩 돌고돌며 대기속에서 뿌려지는 물기로 옷깃을 적시는 등 환상적인 체험을 할수 있었다. 유명한 영화 촬영현장에서는 헐리우드 최고의 스턴트 맨들의 묘기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기묘묘하고 온몸이 소림에 오싹하도록 사람을 놀래우는 300여가지의 아이템과 영화에서의 비행기 충돌 장면, 강력한 자동차 추격장면, 건물들이 불타고 폭팔하는 장면 그리고《미래에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홍수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라들이 물속에 잠기는 시대》를 묘사한 어마어마한 액션장면들이 실제로 표연되여 관객들의 끝없는 환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헐리우드는 참으로 혼자 보기엔 너무도 아까운 환상의 세계였다.    뉴욕(New York) :   뉴욕시는 맨하탄, 브롱스, 브루클린, 퀸즈, 스테튼 아이랜드 등 5개 큰 보로로 구성되였고 큰거리 옆의 고충건물들은 하늘을 찌르는 듯 높이 솟아 있어 그야말로 웅장하고 번화하고 휘황찬란한 현대화의 도시였다. 뉴욕은 미국에서 제일 큰 도시이고《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 밤이나 낮이나 할것없이 건물 한면을 뒤덮고 있는 대형의 영사막들에서는 오색현란한 광고모델들이 끊임없이 바뀌여가면서 연출되고 있어 말 그대로 천변만화하는 대천의 세계였다.  《세계인종시장》이란 이름에 손색없이 매년 수많은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뉴욕에 몰려들고 있는데 지난 한해만도 5만 3400명의 인구가 증가되여 현재 뉴욕 인구는 836만명이나 되었다. 온 거리에는 갖가지 피부와 머리색갈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움직이는 인간 광고맨들의 익살굿은 유모아적 모습들은 무시로 행인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던져주었다. 맨하탄의 중심심거리 아이랜드를 활보하느라면 꼭대기가 아득히 바라보이는 100여층의 고층건물들이 가지각색의 건축자료와 설계들로 현대화적이기도 하고 또 서양화하여 고풍스럽기도 하였으며 온통 푸른 유리벽으로 이루어 진 건물들은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어 저도몰래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참으로《뉴욕은 세계 문화의 중심이자 금융의 중심이구나》하는 것을 한가슴 뿌듯이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문명의 도시였다.      코리아타운(Korea Way): 뉴욕시티의 맨하튼 32가도 코리아타운이였는데 이전에는 언어적 장벽과 독특한 구조로 외부인들에게 《숨겨진 세상(Hidden World)》,《맨하탄의 또다른 세상》으로 알려졌었다 한다. 지난 40년간 한국 이민자의 대량유입으로 이곳은 풍부한 먹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업의 새로운 시장으로 되었다. 한인타운의 심장부격인 브로드웨이-5애브뉴 사이의 32스트리트는 24시간 운영되는 식당과 뷰티스파, 해질역에 문을 여는 노래방, 새벽 3시에는 한인타운에서만 즐길수 있는 "올나이트 스파" 등으로 다양한 서비스업들이 흥성하고 있었다. 외국 류학생들이 제일 많이 몰려들고 또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인터넷판 톱기사로 이 코리아타운을 집중 소개하였고 금년 뉴욕시 정부는 이곳을《2009년 뉴욕시 9대 관광명소》로 제정하였다. 지하철 환승역을 옆에 끼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이 코리아타운의 길 량옆에는 고려당, 고려서점, 한국은행, 신세기백화점, 한국옷가계, 한국사우나, 한국맛사지업체와 여러가지 음식점, 만두집, 네일살롱과 미용실 등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길거리에서는 잔잔한 한국 말씨들을 무시로 들을 수 있었고 밤이고 낮이고 서양인들과 함께 붐비며 지나다니는 한인남녀들을 수시로 볼수 있었다.    자유녀신상(Statue of liberty):   뉴욕시 뉴욕만의 리버치 아일랜드에 있는 자유녀신상은《아메리카 드림》을 안고 뉴욕항구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횃불을 치켜 든 거대한 녀인상》이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수만리 물길을 헤쳐 온 사람들에게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위풍당당하고 단호한 녀인의 모습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징표처럼 보인다. 이 자유녀신상은 1886년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우호증진을 위한 선물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녀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녀신상의 무게는 225톤, 높이는 47.5메터, 지면에서 횃불까지 높이 93.5메터이고 녀신의 손가락 하나가 2.44메터나 된다니 참으로 거대한 규모의 녀인상인 것이다.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박물관:   자유녀신상 바로 옆에 있는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박물관은 실로 미국 이민사의 애환이 서린 유서 깊은 곳이였다. 미국 국민의 근 절반이 이곳을 거친 이민자들의 후손들인데 1892년부터 1954년까지 약 1200만명의 이민자들이 증기선 3등 칸에 고단한 몸을 싣고 미국에 처음 들어오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다. 이민들은 이곳에서 법적 절차와 신체검사를 통과한 뒤에야 비로서 미국 입국을 허가받았었다. 하여 현재 미국인 40%이상인 약 1억명의 《뿌리》가 이 섬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1990년에 자유의 녀신상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만들어져 개관하였고 해마다 200만명의 세계 각국 유람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뉴욕 당인거리에 있는 공자동상 앞에서   뉴욕시의 당인거리(唐人街)   리틀 이태리와 로어 이스트 사이드 사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차이나타운은 현재 미국 최대의 중국인 거리가 되었다. 네거리 량옆 가계의 간판은 온통 울긋불긋한 중국어로 뒤덮혀 있었고 건물들은 물론 전화 부스조차 탑 모양의 디자인으로 되여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끈다. 더욱 감명 깊은 것은 중국의 대 성인이요 동방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동상이 당인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었고 그 길 건너편에는 1840년 영국의 아편을 몰수해 불태운 청나라의 애국 흠차대신 림측서의 동상이 의젓히 자리잡고 높이 서있는 것이였다. 엄연한 미국땅인데 마치 중국의 한 직할시나 된듯이 그 기나긴 력사와 함께 중국인들이 그처럼 당당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의로왔다. 지금 뉴욕지구에만 중국인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니 실로 중국 대륙의 한 도시가 아닌가 착각할 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무역중심: 세계의 3분의1의 금이 저장되여 있다는 110층으로 된 금용중심과 2001년 9월11일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로 충돌하여 2750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내고 사라진 세계무역중심 쌍둥이 빌딩 자리는 지금 추모공원을 세우기 위해 재건축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충격적인 테러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 현장에서 기념촬영을 남기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주목한 세계의 심장이 바로 그곳이였기 때문이리라.     련합국총부: 어마어마한 세계적 기구인 련합국총부도 개방하여 대외로 관광하게 하고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련합국총부 복도 곳곳에 줄지어 걸려있는 력대 련합국 사무총장들의 초상화였다. 제8대 사무총장 자리에 한국인 반기문총장의 미소띤 얼굴이 환하게 보여서 같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가슴 뿌듯하고 감개무량하였다. 비록 그의 저자세와 겸손(low profile)이 미국인들에게는《유엔의 보이지 않는 사람(lnvisible man)》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반총장의 측근들은 그를 조용한 외교의 달인으로 묘사하면서 유엔 평화유지군 배치나 기후변화 문제를 세계 지도자들의 화두로 올린 점 등 막후에서의 그의 역할은 컸다고 말하고 있다.    라상관(蜡像馆): 뉴욕중심 시대광장 옆에 있는《라상관》에는 미국의 력대 총통과 유명인사들 그리고 우주항공 등 과학계와 문예체육계 공신들의 형상이 밀랍으로 만들어 산 사람마냥 전시되여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아 냈다. 사람들은 그 형상들 옆에서 쉴새없이 카메라 샤터를 누른다. 나도 오바마대통령 부부 밀랍상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친구들이《뉴욕에서 오바마부부도 만났었는가》라고하여 웃음보를 터트렸었다.    세인트 페드릭스성당: 록펠러센터 건너편에 있는 세인트 페드릭스성당은 미국에서 가장 크며 가장 유명한 성당이다. 1879년 5월 25일에 개방하였다는데 그 높이는 101메터이고 건물에 19개의 커다란 종이 달려 있으며 성당내에는 좌석이 2400석이나 되지만 주일미사에는 항상 자리가 없다고 한다. 웅위롭고 화려한 성당은 마치 고대 로마의 황궁마냥 고풍스럽고 신성하여 그곳에 들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였다.                                       워싱턴의 백악관    워싱턴특구(WASHINGTON D.C.) :   워싱턴 D.C는 1776년 당시 독립군 사령관이며 미국의 제1임 총통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인구 598.000명을 가진 워싱턴 D.C와 그 주변 지역은 미국 건국의 력사적 현장이다. 미합중국 헌법이 이곳에서 채택되였고 독립선언도 여기에서 선포되였다. 1791년에 세계 최초의 계획형 수도로 건설되였고 웅장한 건물들과 인상적인 기념물들 그리고 련방정부의 최고 행정기관들이 몰려 있어 워싱턴 D.C는 살아 있는 미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늘을 찌를듯 우뚝 선 워싱턴 기념탑, 몰 주위에 즐비하게 들어선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들, 그리고 삼권분립의 현장을 보여주는 백악관, 의사당, 대법원 등은 미국의 민주주의 심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워싱턴주는 면적의 55%가 산림지대로 상록수의 푸르름과 대자연의 싱그러움이 넘치는 곳이다. 태평양을 따라 펼쳐진 산과 바다에 110개의 공원이 있고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 선 숲과 맑은 호수가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미국의《스위스》라고 불릴만 하였다.    백악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뉴스의 산실이자 미합중국 대통령이 거처하는 관저이다. 미합중국 건설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이곳에서 살지 않았고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대통령이 1801년 이곳에 처음 입주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행정부 관저》였으나 1812년 전쟁 당시 불에 탄 흔적을 지우기 위해 흰색으로 외관을 칠하면서《백악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한다. 미국 권리의 상징인 백악관은 건물 꼭대기 복판에 성조기를 휘날리고 있었고 량옆 건물들은 푸른 나무숲에 싸이여 그 진면모를 가리고 있어서 더욱 신비하고도 존엄스러웠다.    링컨기념관: 몰의 서쪽에 위치한 노예해방의 수령으로 불리는 미국 제4임 총통 링컨의 기념관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감동적인 명소중의 하나였다. 링컨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1914년에 세워진 이 기념관은 미국현대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내 50개주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스타일의 웅장한 건물 안에는 거대한 링컨 대통령 동상이 앉아 있다. 링컨 기념관은 앨링턴 국립묘지와 함께 미국에 온 각국 정상과 귀빈들의 단골 방문장소로 되고 있다. 은빛 대리석으로 된 높은 계단 우에 웅장하게 세워진 건물은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느낄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기념관 : 링컨 기념관과 워싱턴 모뉴먼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기념관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만들어 진 기념물과 거대한 광장으로 구성되여 있다. 광장을 둘러 싼 56개의 대리석 기둥은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병사 1천600만명의 출신지인 50개주와 지역을 상징한다. 남쪽과 북쪽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의미하는 대리석 조형물이 있고 주변에는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히로시마 원폭투하까지 시간순으로 2차세계대전 격전지들이 새겨져 있다.     국립 우주항공박물관: 오바마대통령이 취임연설을 하였던 국회산장의 파란 잔디로 뒤덮힌 넓다란 광장을 세로 질러가면 푸른색 유리건물로 찬란한 빛을 반사하는 국립우주항공박물관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모두 23관으로 나누어 진 전시관에는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로부터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을 실현시켰던 아폴로11호, 달 착륙선과 달에서 채취해 온 화석, 화성의 무인탐사위성 등 수만점의 전시품이 진열되여 있었다. 또 대기권 상공에서 지구의 모습을 내려다보거나 우주선을 타고 우주비행을 하는 경험을 할수 있는 아이맥스 영화관도, 태양계 이외의 천체를 경험할 수 있는 알버드 아인슈타인 천문관 등도 마련되여 있어 그야말로 현대과학의 극치를 체험할 수 있었다.        비성(費城): 비성은 미국의 10년 수도였고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되는 큰 성시이다. 이곳에는 미국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미국독립기념당이 있다. 기념당 앞에는 1752년《권리헌장(权利宪章)》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 졌고 1776년 7월 8일 독립선언의 발표를 위해 울렸던 2000파운드나 되는《자유종》이 있다. 이《자유종》은 미국 노예해방의 상징이고 미국 독립 투쟁의 상징으로 빈주 정부대청에서 90여년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로 닳고 금이 가서 소리가 나지 않치만 의연히 력사의 견증자로서 사람들에게 과거를 잊지 않도록 경종을 울린다고 한다.《자유종》에는 영문으로《이 땅에 자유의 소리를 불러 일으켜 매 국민의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하리라 》는 글발이 뚜렷이 쌔겨져 있었다.   라리동(羅利洞): 미국 동부 관광에서 뉴욕으로 돌아 오는 마지막 코스는 라리동관광이다. 1879년 세 아이가 산중에서 놀다가 발견하여 유명한 관광코스로 되었다 한다. 중국 운남성 려고호의 100여메터 높은 산우에 있는 신비한 석굴《녀인동》도, 한국 제주도의 천년기념물《만장굴》도 가 보았지만 이번 미국의《라리동》처럼 화려하거나 현대화적이 되지는 못하였다. 라리동 동굴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미니 수화기가 마련되여 있어 20개 구간으로 나뉘여진 동굴 안의 매 구간에 대해 능히 우리 언어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동굴 속 암석들은 온통 황금빛으로 되어 있어 더없이 황홀하였고 더우기 자유자재로 구간마다에 대해 상세한 해설을 듣게 되니 참으로 편리하고도 생동하였다.     니아가라대폭포(NIAGARA FALLS 尼加摞大瀑布): 누군가 미국에 갔다가 니아가라대폭포를 못본다면 평생의 유감이 된다고 하기에 역시 하나의 중요한 여행코스로 잡았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이 거대한 대폭포는 말 그대로 세계 3대 폭포의 하나로서의 그 장관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었다. 니아가라대폭포는 온타리오호와 이리호를 있는 나이아라강에 있으며 강 가운데에 있는 고트섬(미국령토)을 경계로 48메터 높이의 캐나다폭포와 51메터 높이의 미국폭포로 나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신비롭고 황홀한 신부면사포 폭포요, 안개속의 녀신 폭포요, 말발굽 폭포요 하는 것처럼 7색 무지개비낀 폭포의 아름다움과 천군만마가 달리는듯한 거세찬 물결 소리는 련속 관광객들의 환성을 불러 일으켰다. 캐나다 폭포기선을 타고 동양도 월량도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감상하는 폭포도 장관이였지만 전등불 찬란한 7색 야경의 폭포는 더더욱 신비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1800개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자연보물고 천도명승지의 섬들에는 억만부호들의 별장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는데 작은 섬에는 집 한채 나무 한그루, 큰 섬에는 5성급의 호화로운 호텔식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애정의 섬》이라는 곳은 포선생이라는 한 부자가 발렌타인 데이(情人節)에 부인에게 선물한 섬이라고 하는데 하루 한칸씩 쓰라고 365칸의 호화별장을 지었었다. 그런데 건물내부 장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인이 불행하게도 별세하였다고 한다. 하여 그 포선생은 그 섬을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그대로 국가에 바쳐 관관코스로 만들었었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세계에서 제일 짧은 국제다리인데 그 총 길이가 고작 7.5메터 밖에 안되였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다리 끝에는 두나라의 국기가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다.   (다음기에 계속)  
11    유태인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 댓글:  조회:4946  추천:62  2009-11-22
유태인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                                   강 순 화     흔히들《유태인은 우수하다》고 말한다. 력사상에 이름을 남긴 각계의 1인자만 들어도 위대한 사상가 칼 맑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스타인, 에디슨, 심리학자 프로이드, 작가 토마스 만을 비롯하여 로스 차일드와 같은 미국의 재벌이나 경제인, 키신저 전 국무장관,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매들린 울브라잇 전 국무장관, 마이클 블럼버그 뉴욕시장 등 유태계 출신 지도급 인사들을 꼽으려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죠셉 리버만 등 미국 상원의원의 10%가 유태계라고 하니 크게 성공한 유태인은 놀랄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률은 2%(약600만)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심장인 뉴욕과 워싱턴의 유명 법률회사 변호사의 40%가 유태인이며 아이비리그 대학교수의 60%가 유태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50대 기업중 17개가 유태인이 경영하는 것이며 세계 7대 메이저 석유회사 중 6개가 유태계 소유이다. 노벨경제수상자의 41%가 유태인이며 전체 수상자의 30%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유태계가 이처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유는 일찍부터 유태계가 정치, 금융, 법조계, 학계는 물론 언론계에 이르기 까지 사회 각 분야에서 이미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태인의 이런 특유한 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가? 유태인의 두뇌가 처음부터 우수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만약 민족에 따라 선천적으로 우렬이 있다면 아득한 옛날에 이미 머리가 특히 뛰여난 단일민족에 의해 세계는 지배되였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되풀이 되는 인류의 력사는 인종이나 민족간의 유전학적 우렬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물며 유태인의 5000년 력사는 그 대부분이 박해의 력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태인은 오래동안 조국을 갖지 못한 방랑민이였다. 토지도 돈도 지위도 없는 민족으로 오직 의지할 수 있은 것은 자신의 머리 속에 축적할 수 있는 지혜나 지식 뿐이였다.    사회학자들은 유태인의 파워는 모계사회에서 비록되였으며 유태어머니들의 교육열을 우선으로 꼽는다. 교육열이라 하면 우리민족도 둘째가기 서러워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 유태인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적은것은 무었때문인가? 우리의 교육이 유태인의 교육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심사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지식이다》라는 것은 유태인의 격언이다. 여기에 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숫한 부자들이 호화한 기선을 타고 서로 돈자랑을하면서 세계일주를 떠나다가 그만 해적에게 랍치되여 모든 재산을 다 잃었다. 그런데 몸에 아무것도 없는 한 선비만은 뺏길것도 없이 그냥 한 부두에 내려졌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그곳에서 서당을 차려 크게 번성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선민족도 세세대대로 교육을 중히 여기며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그 어느 민족에 비해 높다고 자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육방법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게 된다. 례를 들어 입시위주의 교육방법이라던가 부모위주의 교육방법, 교원위주의 교육방법 등에서 유태인들의 교육방법과 확연히 다른 점들을 보이고 있다.   아이 본위의 가정교육,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는 교육방법은 확실히 우리부모들이 배우고 갖추어야 할 자녀교양 상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태인의 자녀교육은 어떠한 것일가?  《남보다 뛰여나라》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되라》고 가르친다.   유태인의 어머니는 례외없이《교육열이 있는 어머니》이다. 때문에 유태어머니(Jewish mother)란 말에는 아이에게 학문의 필요성을 귀 아프게 들려주는 어머니라는 뜻이 포함되였다고 한다.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우리 부모들은 거의 동일하게《학교에 가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태인의 엄마들은 반대로 아이한테《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많이 질문하여라》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인 것이다. 교사가 혼자서 강의하고 학생들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면 많은 앵무새를 기르는 결과이므로 학생은 교사 강의에 질문을 하여야 교사와 학생 간에 대화가 활발해 지면서 교육효과는 상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집에서 피아노를 배우면 우리 애도 배워야 하고 또 모두가 일류 대학을 지망하니 우리 애도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하는 생각은 유태인 부모들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리유라면 아이들에게는 제각기 개성이 있는것 만큼 어느 아이나 획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발전시켜야 하며 우렬을 다투면 승자는 항상 소수에 그치지만 누구나 타인과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은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어디가 다르다는 것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을 육성하는데 정력을 몰붓는다고 한다.《너 문학을 잘하니 이제 수학만 잘하면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다 》하는 말들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성을 충분히 살리고 머리로 구사하고 두뇌를 충분히 발휘하여 일을 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은 그들 생활 전반에 스며있는 자연스런 교육적 태도였다. 그런데 같은 머리를 쓰는 방법에도 지식 그 자체를 가르치는 것과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유태인의 속담에《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수 있지만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가를 가르치면 평생을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옮겨 넣어 어쨌든 시험에 합격하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물고기 한 마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체계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하는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배우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 방법을 학문에 응용하면 배움의 흥미가 증대되고 따라서 더 깊은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태인은 모든 기회를 통하여 아이의 머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자녀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   《지식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수 없다》고 가르친다.    유태인의 격언에는《만약 당신이 살아남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운동하고 일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지식을 갖는 것으로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력사가 시작되여서 부터 늘 박해에 시달려 온 유태인에게 머리속에 축적된 지혜와 지식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례하면 중세기 유럽에서는 유태인에게 토지의 소유가 금지되었고 직능별 조합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유태인이 가질수 있는 직업이란 의사와 방랑자 뿐이였는데 교육을 받아 의사로 정착하거나 아니면 어느 고장에 수요되는 재간을 익혀 그곳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써서 장사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유태인의 유일한 재산은 지혜라고 한다.   지혜가 결여된 자는 모든 것이 결여되고 지혜를 가진자는 모든것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19세기 초 유럽의 유태인들은 미국에로의 이주운동이 일어났다. 독일의 바비리아에 페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아이들을 어떻게든지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여 미국으로 이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장남인 조셉을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다짐하였다. 로동자로 생계를 꾸려가던 남편은 그런 돈이 어데 있느냐며 반대하였지만 페니는 남편 몰래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아직 열살인 조셉을 에르랑겐대학에 입학시켰다. 대학에서 조셉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이스어, 헤브라이어 등 6개 나라의 언어를 정통하고 졸업 후 17세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어머니가 준 지페 100달러 한 장 뿐이였다. 지혜를 가진 자에게 신대륙인 미국땅은 장래가 약속된다고 모자는 생각한 것이다. 그후 그는 형제들을 불러 뉴욕에서 은행을 설립하고 자신의 어학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제 금융시장을 좌우지 하였으며 무수한 이민자 중에서 우수한 인재로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싫으면 하지 말라,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고가르친다.    우리는 보통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여 박사, 교수, 의사, 공정사, 작가, 법관, 경영인 등등 큰 인물이 되라고 말한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하며 업여 시간에는 여러 가지 학원에 다니며 재간을 배우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유태인은 커서 무엇이 되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선택은 아이들 자신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부모의 욕심에 의해 좌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공부외의 취미활동에 대해 절대 강요하지 않으며 피아노이건 바이올린이건 아이가 배우고 싶다면 배우게 하고 싫다면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으며 무엇인가는 아이에게 시켜야하겠다는 것은 금물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여야 할 말은《싫으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려거든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힘껏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진해서 하고 싶다고 한다면 거기에 후회없는 노력을 하도록 가능한 충고를 하는 것이다.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가 마음대로 선택하여 억지로 하게 한다면 그 효과는 정반대로 될것이다.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그들 스스로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며 공부하는 분야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힘으로 키워나가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좋은 례가 바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프로이드이다. 17세에 비인대학에 입학했을때 아버지의 희망으로 의학학부에 들어갔지만 결국 의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13년간 연구실에 머물으면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의학연구에 몰두하여 종래의 심리학적 수준을 훨씬 릉가한 정신분석 학설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배움을 중단하면 20년에 걸쳐 배운 것도 2년만에 잊게 된다》   《사람은 평생 배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유태인이 가진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신념이기도 하다. 아무리 재간있는 사람일지라도 배움을 중단하면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을 급속도로 잃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현인”이나 “바보”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있느냐“ ”배우고 있지 않느냐“의 구별밖에 없다고 한다.   유태인은 옛날부터 <책의 민족>이라고 불려 왔다. 그들에게는《돈을 빌려 달라는 것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라는 것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속담이 있다.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유태민족이 책으로 지혜를 얻어 내여 정의를 끝까지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한다. 평생을 두고도 다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에 비길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문의 정열을 평생동안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긍지이다. 동양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배움을 포기하기 일수이며 배운다는 것도 직업이나 결혼을 위한 방패로 삼으며 결혼하여 엄마 아빠가 된 후에는 학문과 인연을 끊고 배우지 않으면 애써 수년간 배워 온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며 이런 부모는 적어도 아이들한테 장차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는 가정교육에서의 중요한 일환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은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미국에서의 통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갖는 시간은 하루 평균 3분간이라고 한다. 현재의 우리 사회 젊은 아빠들도 크게 례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근하랴 술을 마시랴 2차 3차를 다니느랴 한 밤중에 집에 오면 애는 자버리고 아침에는 서로 제갈 길이 바쁘다 나니 이야기 할 새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유태인 가정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자녀는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일가의 중심으로 존경하고 아버지 역시 구심점다운 행동을 취하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모방하면서 자라는데 공부하는 습관도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것이 상례라 한다. 평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집에 일찍 들어오며 휴식일이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일주일간의 공부에 관한 것과 일주간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보고하게 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서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주인으로서의 아버지 형상이 분명하게 새겨진다. 대화의 시간은 30분 정도이지만 어린이에게는 일주일간의 총 정리를 하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유태인 철학자인 칼 맑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간파하면서 그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늘 걱정하여 항상 아들에게:《이성을 잃지 말라. 행동을 조심하라, 교양을 쌓도록 하라, 은혜 베푼 사람을 공경하라, 반항적이며 비 사회적으로 흐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한다. 이것은 유태인으로 말하면 극히 평균적인 아버지상이라 한다.       《세계는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 그리고 자선을 바탕으로 성립되여 있다》    위의 말 역시 유태인의 속담이다. 제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일을 잘해도 “자선”을 잊으면 세계는 설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어릴 때부터 작은 저금통을 만들어 주어 “자선용”으로 돈을 모이도록 가르친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건이나 돈을 보내는 “자선”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주입되는 사회교육이다. 물론 어른이 되어도 이 습관은 계속 되는데 풍부한 사람은 수입의 5분의 1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10분의 1을 “자선”으로 돌린다고 한다. “자선”은 라틴어로 <베푼다>는 말인데 유태인은 “자선”은 정의(正義) 그 자체라고 한다. 아이들은 작은 저금통을 매개체로 하여 자신의 생활이 항시 사회와 결부되여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성장해 간다. 때문에 유태인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 하는데 그것은 자선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영위해 가는데 당연한 행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지능개발에만 급급하기 보다는 사회에 눈을 돌릴 동기를 마련하는 것이 결국은 건실한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데 기초를 닦아 주는 것이다.    정해진 일은 정해진 시간내에 해내는 습관을 기른다    어린이들에게 습관 속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 까지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가족 전원이 저녘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하며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유효적절한 가족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이와같이 정해진 일은 정해진 시간내에 마치는 훌련을 항상 철저히 받고 있는 것이 유태인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또 금요일에는 방과 후 서둘러 집에 돌아 와서 숙제를 마친다음 목욕을 하고 지체없이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모든 일들은 일몰과 함께 어머니가 촛불을 켜 놓을 때 까지 마쳐야 한다는 “규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정된 시간내에 해내는 습관을 자연히 익혀가고 있다.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는데 그때의 선물은 시계를 줌으로서 시간을 랑비하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식사는 30분 이내에 하고 아침에는 텔레비를 보지 않으며 기상, 세수, 식사, 옷을 갈아 입는 시간을 정하므로서 시간의 효률을 높이도록 습관한다. 이렇게 어릴때부터 습관되여 오는 시간 관리는 앞날의 능률적인 학습방법을 가지는데 기초로 되고 있다.   유태인에게 시간은 삶의 모든 것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은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재생이나 윤회(輪廻)를 믿지 않는다. 즉 다시 태여난다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이 짦은 생애를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는가에 항상 고심하는 것이다.     신체를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이나 외모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들은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할때 맨 먼저가 량호한 위생 습관이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는다던지 항상 자신의 몸을 단정히 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하나의 의무로 되고 있다. 물론 조선족도 청결을 중시하지만 유태인과 다른 점이라면《손을 씻으면 마음도 개운해지고 맑아진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씻으라고만 강요하면 어린이의 마음속 깊이 호소되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유태인이 깨끗한 것을 좋아 하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라고 하는데 중세의 유럽에서 페스트란 전염병이 떠돌아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지만 유태인만은 한사람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인해 오히려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요언이 떠돌아 오히려 박해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위생과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리도록 유도하므로 이런 습관은 그들이 단정한 태도,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배양할 수 있었다.    로인을 존중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주는 유산이다    로인은 전통의 메신저라 한다.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는 격언이 있다시피 인생을 아는 늙은이와 인생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 세대 간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 부모와 아이들의 두 세대 가족으로 변해가는 문명사회에서 로인들이 푸대접 받거나 문화전통을 잃어버리는 경향들이 보이는 것이다. 가족제도의 붕괴로 로인들이 자녀의 버림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는데 늙은이가 혼자서 쓸쓸히 죽어 한달 만에 발견되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유태인들에게는 문화적 전통을 공기와 물처럼 소중히 여기고 로인들은 전통의 메신저로 생각하고 절때 푸대접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로인을 박대함은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오히려 멸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로인이란 <육체>가 아니라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정신>이라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였기에 로인을 련민의 대상도 아니며 버려둘 사람도 아닌, 자녀들이 살아가는데 지혜와 충고를 주는 사람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로인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는 후세에 전하고 젊은이들은 로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려 유태 5000년 력사를 일관하는 삶의 방법을 터득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민족의 긍지를 익혀가게 한다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태인들은 활약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유태인이야” 하고 기회만 있으면 애들게 가르쳐 준다고 한다. 때문에 유태인계에 위인이 나오면 아이들은 강한 민족감, 친밀감을 보여 주는 동시에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민족이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자랑하듯이 오래동안 조국을 갖지 못한 민족으로서 다만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려 하고 튼튼히 뭉쳐지며 두터운 친밀감을 가진다. 또한 우수한 유태인들을 안다는 것으로도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되며 장래를 위한 격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민족 역시 우수한 민족이지만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 심지어 자기 민족의 언어 문자를 뒤로 하고 앞으로 대륙에서 살아가려면 대국의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우리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므로 그들이 세계에서 이룩한 업적들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너와 같은 성장과정을 거친 조선민족이 해 놓은 업적이라는 우수한 민족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감이 부족하다. 사실 이는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도 사회활동에서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임을 망각하고 있다.     이상으로 유태인의 자녀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를 살펴보았다. 이 글이 자녀를 키우고 있는 우리민족 부모들에게 저그마한 도움이라도 될수 있다면 그에 만족할 따름이다.             
10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 댓글:  조회:5279  추천:46  2009-11-17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                                                                       강 순 화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아름다운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수양에 있습니다. 즉 선천적인 조건보다 후천적으로 배양된 풍격과 지혜와 능력의 종합적인 체현이 엄마의 매력이지요. 그럼 아래에 몇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 해 볼가요?     첫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현대적인 것입니다.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사회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거대한 변화와 충격을 수시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계산기, 인터넷, 정보화, 지구화... 등등의 현대적인 감각은 우리들의 생활에 놀라운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회는 격변하고 가정은 변화하며 사람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새 시대의 어머니 형상은 전통적인 것만 고수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상인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가치관으로 새 사물을 접수하며, 새 세대의 관념과 행위에 마주하여 그에 새롭게 도전는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어머니 상인 것입니다.            둘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드넓은 마음입니다.    새 시대의 엄마라면 우선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뿐이 아닌 사회의 한 일원으로 보아야하며, 아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이며 엄마의 의무는 오직 아이의 특점과 사회의 수요에 맞추어 아이 스스로가 앞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힘껏 밀어 주는 것입니다. 엄마의 책임은 아이에게 성장환경과 학습조건을 창조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학교뿐이 아닌 넓고 큰 사회적 공간에서 노력하고 분투하며 발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배움의 길에서 고생을 겪더라도, 또한 모종 원인으로 성적이 잠시 떨어졌더라도 아이를 책망하지 말고 항상 고무 격려해 주며 그 어디에서 넘어지면 그곳에서 다시 일어설 줄 알도록 인도하는 대범한 모성애인 것입니다.    셋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평등성인 것입니다.    새 시대의 엄마라면 항상 웃어른의 신분으로만 아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고 아이들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하며 아이들의 의견과 요구를 내심히 듣고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희망대로 자신을 발전하게끔 도와주는 것입니다. 엄마는 언제나 긍정적 사유와 발전적인 안광으로 아이를 보고 그들 몸에서 반짝이는 개성을 일찍 발견하여 키워줄 줄 알아야 합니다. 정보의 다원화와 각종 매체의 대량적인 전파는 아이들의 정보지식이 부모를 초과할 때도 있으므로 항상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그들한테서도 모르는 것은 허심히 배우는 태도를 가지며 함께 배우고 함께 진보하며 함께 성장해 가려 하는 것이 현시대 엄마의 새로운 정신 경계(境界)인 것입니다.    넷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새 시대의 엄마들은 자신의 매력을 가꿀 줄도 알고 창조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한 부단한 학습으로 모든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식과 방법을 배우며,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적응되는 사상과 주위 사람들의 고귀한 품성을 자신의 몸에 용화시켜 그러한 사유와 행동으로 자녀를 교육하며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어릴 때 부터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훌륭한 가정환경을 창조하고, 과학적인 방법과 규률을 부단히 모색하며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 능력과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강한 의지력 입니다.    엄마는 항상 자녀의 정신적인 기둥이지요. 천변만화하는 세상살이에서 사회에 어떠한 풍랑이 일던지, 가정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던지, 생활에 어떠한 좌절이 있던지를 막론하고 새시대의 엄마는 언제나 량호한 심리상태를 유지해야하며 견강한 의지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가는 모범을 보여 줘야 합니다. 시종 자립 자강하며 과감히 현실을 초월해 나아가는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아이들한테는 가장 설복력이 있는 산 방향으로 되는 것이지요. 속담에 녀성은 약자이지만 엄마는 강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약자”는 현시대의 훌륭한 엄마로 될 수 없습니다.    여섯째로  현시대 젊은 엄마의 매력은 부단한 추구(追求) 인 것입니다.    사업에 대한 추구가 있고 없는 엄마가 창출하는 가정교양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한 인간의 정조와 품덕、기질은 어려서 부터 가정의 훌륭한 분위기에서 키워지지요.엄마의 사람됨과 가치관 및 인생에 대한 태도는 아이들의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업에 대한 추구가 없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피곤한 사랑부담만 줄 뿐 인생은 오직 자신의 부단한 추구로만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엄마의 꾸준한 노력과 부단한 추구는 바로 그 어떠한 말과 행동으로도 아이들을 감화시킬 수 없는 엄마의 인격적인 매력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엄마의 아름다움이나 젊음이 못해 질수는 있으나 아이들에게 있어서 엄마의 매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 매력은 더더욱 풍부한 내용으로 자녀들에게 해빛처럼 따스히 비춰주고 이슬처럼 맑게 적셔주며, 마음속에 평생 지울수 없는 락인들을 찍어 줌으로서 그들이 천진한 어린이로부터 성숙된 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 엄마의 힘인 것입니다. 새 시대 젊은 엄마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쌓여지는 소질과 수양의 전면적인 제고 및 그에 따르는 시대적 정신의 부단한 승화는 바로 엄마 매력의 원천입니다.                                    ( 청년생활잡지--2005년 제7기 )                                                                                                               
9    여성의 발전과 평생교육에 관하여 댓글:  조회:5628  추천:36  2009-11-13
        여성의 발전과 평생교육에 관하여                                                      강순화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연구원)       들어가면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흐름은 평생학습의 시대를 열어주고 있다. 교육 령역이 학교교육이라는 제한된 범위에서 사회교육으로의 전파, 그리고 다시 평생교육이라는 광범하고 끝없는 광야로의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바로 정보화시대의 푸른 바다 속에서 무한한 지식을 낚을 수 있는 현시대의 생활에 뜨거운 도전을 느끼고 있다.     평생교육은 태여 나면서부터 일생을 마칠 때까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제나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갖도록 하는 공교육의 리념이며 또한 자신의 삶과 사회를 반성하고 개혁하려는 정신이며 더욱 보람되고 열린 삶을 살기 위한 자신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를 위하는 교육정신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부지런히 배우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정보화, 세계화의 첨단기술사회에 적응하기 힘들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평생학습이 절실하게 수요되는 것이다. 우리는 배움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와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고 살아가면서 부딫치는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一. 평생교육의 기본 개념     평생교육이란 말은 1965년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聯合國敎科文組織)본부에서 개최된 성인교육발전을 위한 국제위원회에서 이 기구의 책임자인 프랑스 --랭그랑(保羅.郞格朗)의 기조론문에 의하여 제기 되였다. 그는 론문에서 평생교육의 개념을 “교육의 전 과정의 생활화,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한 계속적인 교육, 모든 형태의 교육의 통합적인 련대조직, 그리고 개개인의 출생으로부터 죽을 때까지의 생의 전 기간을 통한 수직적 통합과 개인 및 사회생활의 모든 국면을 포함한 수평적 통합을 포괄한 교육적 리념”이라고 강조하였다. 국제위원회는 그 론문을 검토한 후 현대적 의미의 평생교육의 개념을 수립하고 교육개혁의 지도 리념으로 중시하여 국제적으로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후 평생교육은 1996년 유네스코의 21세기 특별위원회 보고서에 반영되여 세계 각국의 모든 사람을 위한 기초교육과 평생교육체제로의 개편으로 기조를 삼게 된다고 하였으며 “평생학습의 개념은 21세기를 여는 열쇠이다”, 평생교육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배움, 알기 위한 배움, 실천하기 위한 배움,  존재하기 위한 배움”이라고 하였다.     1995년3월18일 반포한《중화인민공화국교육법》제11조에서는 국가는“교육개혁을 추진해야 하며 각급, 각류형의 교육발전을 촉진하여 평생교육 체계를 건립하고 완선화해야 한다” 라고 규정하였다. 특히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 중국 특색의 평생교육체계를 가지는 것은 하나의 긴박한 임무로 되였으며 이것은 교육개혁과 발전의 방향이며 종합국력을 제고하는 관건으로 되였다.         二. 녀성 평생교육     녀성 평생교육도 위 개념에 준하여 정리하면 “녀성을 대상으로 녀성의식을 함양하고 능력과 자질을 개발하여 자아실현을 도모하며, 평등, 평화, 발전을 구현하는 사회를 이루어 갈수 있도록 하는 정규학교교육 이외의 모든 조직적인 교육활동”을 말한다.     녀성 평생교육은 녀성의식교육, 직업기술교육, 사회교양교육, 학력인정교육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어느 내용도 모두 녀성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초적으로 우선 녀성의식을 가질 때 녀성은 자신의 직업을 탐색하고, 직업활동을 할 때도 자신감 있는 녀성으로서의 가치를 높일수 있다. 또한 녀성의식을 가질 때 사회 교양교육과 학력인정 교육의 필요성도 느낄 수 있으며 더욱 명확한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은 우리 녀성들의 삶의 현장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 질 것을 예견하고 그에 따른 대처 방안과 수행되여야 할 많은 교육과제들을 찾아 왔다. 녀성 평생교육에 관심을 두고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 연구가, 지도자와 전문가들이 속출하였으며 또 이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녀성평생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속에서 이미 많은 성과들을 거둬 왔다.     국내외 먼 실례를 제외하고라도 우리 신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평생교육의 성공적 실례는 너무도 많은 것이다. 우선 우리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에서 발기한《직업녀성신세기문화교육연구반》은 국외에서 의 직업녀성 평생교육의 교학모식을 도입하여 1999년10월에 개학하였는데 이미 5년이란 교학과정을 거쳐 왔고 200여명의 녀성 기업가, 공무원, 교원, 직원, 경영인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규정한 학업을 마치고 연변대학 총장이 서명한 수료증을 발급받았다. 이 연구반의 교학 내용에는 기업문화, 경영학, 민족문학, 녀성미학, 심리학, 교육학, 외국어, 컴프터, 예술교양 등 다양한 학과들로서 학원들의 지식면을 넓이고 직업녀성들의 문화적 소질을 한층 제고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회교육과정도 훌륭한 평생교육의 일례인 것이다. 1995년8월부터 금년9월까지 이미 열한기의 학원, 800여명을 교육시켰으며 그중 196명이 원만한 학습과정을 마치고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 수료증을 발급받았다. 주로 특강형식으로 된 이 사회교육의 내용을 보면; 국내외 정치시사, 조선민족력사, 가정법률지식, 조선민족교육, 혼인가정교육, 녀성심리학, 음식건강상식, 청소년 성교육, 전화상담 리론과 실제 등 비교적 실용적인 주제로서 학원들의 환영과 사랑을 받아 왔다. 이런 사회교육이 바로 녀성 평생교육의 주요과제로 되여 녀성들의 사회적 위상을 부단히 높이고 있으며 녀성들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에 새로운 변화를 부여하고 있다.         三. 평생교육의 방법     모든 교육활동은 어떠한 교육방법을 선택하여 어떻게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하는가에 따라 그 교육의 효과와 성패가 좌우지 된다.      성인의 평생교육에는 성인이 갖는 여러 가지 상황, 경험과 문제의 다양성에 다라 다양한 방법들을 융통성 있게 응용할 수 있다. 그 특성면에도 교육대상이 다원적이며 년령, 학력, 직업, 직위, 경제적 배경, 학습동기, 참여 의도의 다양성,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간의 수평적인 상호관계 등이 학교교육과는 판이한 점이다. 따라서 그 방법도 부동한 것이다.     첫째, 평생교육은 교육시기부터 교육의 장소, 교육대상, 교육체제, 교육과정, 교수와 교재 등에서 학교교육의 폐쇄성과 규칙성을 떠나 보다 개방적이고 자률적이며 비 규칙적 교육요소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둘째, 평생교육은 타인의 강요나 외부의 압력과 요구에 의해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자원적 의지로 자기 주도적인 학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학교교육은 준비교육이고 미래지향적인 속성을 지닌 것과 달리 평생교육은 현실 지향적이고 실용적이며 즉시적인 적용가치를 지니는 교육이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현재 사업과 생활 중 본인의 수요에 의해 배우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 학교교육이 비교적 일방적이고 지시적, 명령적 학습과정이라면 평생교육은 원칙적으로 상호학습 즉 모두가 가르치고, 모두가 배우는 인격적 교류를 통한 학습이 중요시 되는 상호학습의 특성이다.     다섯째, 평생교육은 학교교육의 성적 또는 결과중심의 교육과 달리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중시되며 성과에 있어서도 외재적 성과보다 내재적 성과, 즉 학습자 자신의 만족감과 성취감이 훨씬 중시되는 특징을 지닌다.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육은 그 평가 척도를 무엇으로 정할수 없는것이다.     여섯째, 평생교육은 자발적이고 비 의무적인 참여에 의한 자원적 학습이므로 무엇보다도 학습자체가 즐거운 일이 되여야 하며 학습자에게 배움을 통한 내적만족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즉 학습생활의 만족감과 지적 욕구의 충족을 통한 자아성취감이 중시 되여야 한다.     四. 녀성의 위상과 역할의 변화       21세기는 녀성의 시대라고 하듯이 남성들에게만 기대여 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녀성들의 사회적 진출의 증가는 그 지위와 위상을 날로 높혀가고 있으며 그 역할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첫째, 여성들은 가정에서의 주부 뿐 아니라 일터와 사회의 각 분야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다양한 경제활동들도 벌리고 있으므로 하여 현명한 소비자로, 유능한 관리자로, 그리고 책임있는 경제활동자로서의 가정적 사회적 이중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 열린 연길시 제10차부녀대표대회에서 표창받은 수십명의 녀성기업가, 녀성강자들의 감명깊은 사적들은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둘째, 오래 동안 남성들만의 영역인양 여겨 온 고급 과학연구 분야에서도 남성과 어께 나란히 전문인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녀성 특유의 인내력과 직관, 그리고 섬세함과 침착함 등은 정보화와 컴프터화 시대에서 남성에 못지 않는 연구성과들을 창출하고 있다.      전국 고등학교 100명 명교사 광영방에 연변대학 녀교수 채미화박사가 오르게 된 것도 훌륭한 실례가 아닌가?     셋째, “맹모 삼천지 교” 라거나 많은 훌륭한 이들의 어머니 례를 보더라도 자녀교육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그 중요성을 홀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 사회인을 대상으로 배우고 가르쳐야하는 교육자적 역할도 녀성들은 달갑게 감당하고 있으며 또 아주 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조선족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한국에 못지 않는 세상의 미담으로 알려진 것이다.      넷째, 오염되여 가고 있는 환경과 파괴되는 자연을 살리고 보존시키며 가족과 이웃을 일깨워 주고 민족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주도자로서 그리고 이를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녀성들은 솔선하여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교육을 위한 학부모회의에 줄쳐가는 어머니들, 토요일 등산길에서 환경보호를 위해 앞장서 쓰레기를 주어 모으는 중년 녀성들, 이들의 참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다.      다섯째, 모성애와 포옹력을 지닌 녀성으로서 사회의 그늘진 곳에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돌리는 일들을 솔선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질병으로 시달리는 늙은 부모들을 보살피는 일이나 사회 그늘에서 외로워하는 로인들을 돌보는 양로원의 아줌마들, 그리고《사랑의 집》소년 소녀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주고 있는 엄마들, 이들 모두가 천사의 마음을 지닌 녀성들이 아닌가?!     五. 녀성평생교육의 전망과 과제     미래는 단순히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며,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 녀성들의 삶도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는 삶이 아니라 녀성들의 의지와 뜻으로 하나씩 만들어 가는 삶”이 되여야 할 것이다. “녀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것은 녀성이 주체가 되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발전시켜 나가자는 의도이다. 결국 녀성평생교육도 녀성들이 자신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향상시켜 평등하고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녀성평생교육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회는 녀성들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고 있고 녀성들도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녀성은 가정, 남성은 사회” 라는 말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관념되고 있으며 녀성들의 사회적인 정체감은 평생교육속에서 날로 이루어 지고 성숙되여 가고 있다.     현대와 미래 사회는 날로 기술이 발전되고 정보처리능력, 창의력, 기획력, 판단력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 질 것이며 업무를 자동화시키고 서비스를 중시하게 되는 등 직업구조에 큰 변화가 올 전망이다. 이에 대비하여 녀성들도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져야하며 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새롭게 연구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선 녀성평생교육 관련 인력을 확보하고 전문성을 제고함이 매우 중요하다. 교육담당자와 수업자 간의 평등의식이 향상되여야 하며 교육시설 및 설비가 확보되여야 한다.     녀성평생교육을 위한 종합정보 싸이트를 구축해야하고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며 관련 조직들과의 련대를 가강하여 녀성들의 교육참여를 진일보 촉진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재정의 확보인데 평생교육의 발전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원과 사회 각 부분의 협력도 시급히 요청되는 바이다.          나가면서     녀성평생교육은 녀성을 가정에서 직업세계에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회의 발전은 녀성의 기능과 역할의 개발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보아도 인생주기의 변화와 여가시간의 증가에 따라 녀성들의 자아실현 욕구도 제고되고 있으므로 이는 평생교육의 활성화를 진일보 수요하고 있다.     “평생교육은 21세기의 생존 개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21세기는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지구적인 녀성교육이 필수되는 때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평생교육은 모든 개개인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간단없는 학습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교육적 필요가 최대한 충족시켜지고, 개개인의 다양한 평생학습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뒷받침이 되여 지며 그리고 평생교육의 기획 및 제반 여건이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질 수 있는 교육 조건이다.      녀성 평생교육은 우선 녀성 자신의 발전 수요이기도 하다. 그것은 녀성 교육정도의 높고 낮음이 녀성지위의 종합 지표중 관건적 인소이며 사회적 지위 평등을 쟁취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저명한 민족독립운동가 간디는 “영원히 살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 처럼 살라”고 하였다. 인간은 오로지 교육을 통하여 인간이 되듯이 인생의 배움은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배움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와 잠재력을 확장시킬 수 있고 래일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오늘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화산책 (문화총서7)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6월
8    행복한 가정 만들기 댓글:  조회:4170  추천:52  2009-11-10
                                 행복한 가정 만들기                                                                                강순화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가? 어떤 사람은 재물이라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명예라고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가정이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모두 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은 우리의 피곤한 육체가 안정을 가지고 새 힘을 얻는 휴식터이고 부부간이나 가족 간에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며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재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그런데 최근년간 우리 민족사회의 가정들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시장경제의 충격과 외국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사람들의 도덕관이 흐트러지면서 더 흔들리며 또 서로간의 신뢰가 옅어지면서도 흔들리고 있다.    세상을 둘러보면 국력이 튼튼하고 번영이 따를 때에는 어김없이 가정들이 튼튼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할 때였다. 그러나 가정이 무너질 때에는 나라도 쇠락케 되었음을 력사가 보여 준다. 고대 에집트가 그러 하였고 그리스나 로마같은 사회의 흥망성쇠에서도 이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시대에서나 가정들이 건강하여야 사회가 건강하기 마련이고 가정들이 흔들리게 되고 허물어지게 되면 사회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튼튼한 가정을 세우고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한 가정의 문제 일 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문제요, 나라 전체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알라바마(Alabama)대학교수인 스티닛부부(Nick & Nancy Stinnet)는 가정들이 해체되고 많은 가정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들은 역시 많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갈라지지 않고 멋지게 잘 살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25년간에 걸쳐 미국의 50개주 뿐 만 아니라 25개 국가의 무려 일만사천여 가정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고 연구하여《환상적인 가족 만들기(Fantastic Families)》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야기 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비결”에 관해 필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가족 성원들 호상간의 헌신적인 정신이였다.    헌신적 정신은 튼튼한 가정을 세워나감에 필요한 다른 모든 요소들의 토대가 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튼튼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 하였던 사람들이였음이 발견되였다. 가정에서의 헌신적 정신은 부부간의 헌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식들에 대한 헌신, 부모님에 대한 헌신 그리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헌신으로 넓혀 간다. 가족들은 서로의 헌신적 행동에서 신뢰와 안정감을 얻고 그를 바탕으로 삼아 시련과 실패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이런 가정에 속한 가족들은 자신의 약한 감정이나 약한 모습을 가족에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 각자의 습관이나 버릇을 서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며 실패나 착오 라 할지라도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째는 가족 서로가 감사와 애정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또는 부모와 자식 지간에 형제자매지간에 항상 감사를 표시하고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는 데에 적극적인 가족이 바로 행복을 누리고 있는 튼튼한 가정의 성원들이라는 지적이다. 흔히 우리 조선민족은 “대범하다”는 구실로 감사한 마음과 애정의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 사실 가족들 간에 사소한 일에서도 서로 고마움을 말로 드러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할 때 서로 간에는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아래에 한 어머니가 시집간 딸이 아이를 낳고 보내온 편지를 읽고 너무 행복해 한 대목을 보자.  《딸이 아기를 낳고 나한테 편지를 썼어요.〈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정말 기분이 최고로 좋았어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표현할 수 조차 없어요》   엄마는 그 딸을 길러 시집보낼 때 까지 숫한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 한구절에 그렇게 행복해 한 것이다. 언듯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이런 작은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 튼튼한 가정의 기초로 되는 것이다.     셋째는 가족 서로 간에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의 긍정적인 대화는 그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토록 아버지로부터《잘했다》,《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는 등의 말을 들어 보지 못하고 자랐던 한 아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도 아버지로 된 후 아버지 무덤에 앞에 앉아 이런 말을 하였다 한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처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의 그 같은 양육방식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진정 느끼게 되었어요.》   그는 가정을 이룬 후 가족끼리 서로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뜻을 표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항상 서로를 인정해 줌을 명심하며 그렇게 실천하여 그의 가족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넷째는 될수록 시간을 내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은 꼭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일주일에 한번 씩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미래를 위해 대화를 나누며 가족들의 사소한 기념일이라도 기억하고 서로 축하하여 줌으로서 가정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가족모임이나 들놀이 여행 등 여가시간을 자주 만들어 가족간의 교류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걱정과 불만과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며 절대로 아이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 것을 부모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만 보아 주어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스트레스와 위기를 대처하는 능력이다.    인생살이란 절대 평탄할 수 없다. 사느라면 가족간에도 여러 가지 골치꺼리가 생길수 있고 생활난에 부딪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이를 정시하고 극복해 나가는가가 삶의 지혜인 것이다.《소리를 지르는 일이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때란 오직 집에 불이 났을 때 외엔 없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인내성을 갖추어야 함을 비유한 것이리라. 사랑은 나누면 커지고 불행은 나누면 작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매사에 희망을 가지고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꾸어 가며 가족간 서로 지지하고 고무 격려해 가는 적극적인 분위기라면 생활의 압력은 동력으로 전환될 것이요 스트레스는 저절로 해소되여 갈 것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The Art of Loving)은《사랑은 즐거운 감정만이 아니라 인격이 뒷받침 되는 기술이며 사랑은 받는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주는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사랑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일에서의 첫걸음이 된다. 우리 모두가 사랑을 알고 가족 모두에게 사랑을 주며 온 가정에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자.  세상에 이 이상 더 신나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7    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댓글:  조회:5124  추천:67  2009-07-03
            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지난 3월초, 미국 로스안젤레스 한미녀성회의 초청으로 나는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북경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을 건느며 13시간, 2만여리를 날아 넘어 도착한 곳은 바로 미국 서부에 위치한 로스안젤레스였다. 인구가 천만이나 된다는, 미국에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생각밖에 이 도시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코리아타운>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연변을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에서 건너간 조선족들도 수천여명이나 체류하고있었다.《종로설렁탕》이요,《원조할머니보쌈》이요,《순천고추장》이요 하는 한글간판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코리아프라자 마켓>이며, <나리학교>, <우리은행> 등 한국식 이름의 건물들이 줄을 이어선 거리의 모습은 마치 서울의 종로나 인사동의 한 거리를 방불케 하였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중국 류학생들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한식점에 들어가 뜨끈뜨끈한 된장찌개도 먹을수 있었다. 우리가 려장을 푼 <뉴 서울호텔>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고 있어서 영어에 서투른 우리도 불편없이 지낼 수 있었다. 장밤을 비행기에서 자며말며 태평양을 건너 날아왔었는데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하니 또 초저녁이였다. 그냥 잘수만 없어서 온밤을 이야기하며 지새웠더니 이튿날에는 흐리멍텅하여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중국과 로스안젤레스는 이렇게 16시간의 시차로 밤과 낮이 바뀌여 있었던것이다.     호텔에서《한미녀성회》와 련락을 취하고 행사일정을 잡고 있는데 우리 일행 중 친척집에 갔던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연변아줌마가 우리를 자기집에 모시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국호텔에서 하루 120달러나 되는 숙박료에 비싼 음식을 사먹으면서 지낼 건 뭐람? 우리 집에 와서 계셔도 되는데... ...> 하고 자기 일처럼 걱정하며 이튿날 저녘에는 호텔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자기 집에 데려가려 하였다. 물론 초청측인《한미녀성회》에서 주식배치를 다 하겠다고 하였지만 그 연변아줌마의 따뜻한 인정이 더 마음에 끌리여 우리는 결국 그 아줌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은 모양이다. 정작 만나고보니 그녀는 연길 서시장에서 떡장사를 하였던 녀성이였다. 비록 서로가 생면부지였지만 어찌나 다정하고 살뜰히 대해 주는지 우리는 어느새 언니, 동생하며 친자매처럼 마음 편하게 지나게 되였다.    《한미녀성회》에서 매일매일 빈틈없이 안배한 일정에 따라 여러 가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보통 밤 10시가 다 되군 하였는데 그녀는 언제나 한밤중인 11시 가 지나서야 일터에서 돌아왔다. 밤은 깊어 가건만 우리는 마치 친자매가 서로 오랜 세월 갈라져 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밤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인생이야기는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녀는 가난한 농민의 딸로 나서자랐단다. 어려서부터 일로 뼈가 굳어진 그녀는 50대 초반의 나이지만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었다. 그녀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시골에 있는 한 마을에서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꿈은 언젠가는 연길시내에 가서 남 보란듯이 사는 것이였다. 그녀는 스므살이 잡히자 친척의 소개로 연길시교의 한 농촌에 살고있는 운전기사이며 종가집 막내인 최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남편은 날마다 뻐스를 몰고 다녔고 그녀는 시가편의 두 시형과 동서를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사철 허리가 휘게 일해도 가을에 차례지는 수입은 별반 없었고 살림은 늘 쪼들리고 궁색했다. 마침내 시장경제의 세찬 바람이 불어쳤다. 망둥이가 뛰니까 전라도 비자루도 뛴다고 촌사람들도 터밭에서 나는 고추며 오이며 감자를 캐 들고 장거리에 나섰다.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나도 돈을 좀 벌어 보아야지... ... >     그녀는 빚을 내서 서시장에 작은 매대를 임대하고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날마다 한밤중에 일어나 100여근 남짓한 쌀을 씻고 찌고 떡을 빚었다. 방안에는 열기가 후끈후끈하고 시허연 김이 꽉 들어차서 온몸이 물자루가 되였다. 날이 밝으면 떡함지를 밀차에 싣고 시장에 끌고나가 팔았다. 온종일 서서 사구려를 부르고나면 두 다리가 물러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튿날 새벽이면 또다시 어김없이 일어나  이를 악물고 떡을 만들었다. 어느덧 이런 세월도 3년이 흘렀다.     그런데 괘씸한것은 남편이였다. 밤낮 다람쥐 채바퀴 돌듯 허리 한번 펼 사이 없이 일했지만 남편은 출근한답시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만 했다. 아궁이에 불 한번 지펴주지 않았고 떡함지 한번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 울화가 터졌다.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는데 잘살아 보려고 아득바득하는 나를 좀 도와주면 안되는가? 내가 그래 나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이렇게 발버둥이를 치는가? 모두 이 가정, 이 식구들을 위해서가 아닌가... ...>일이 고된것 보다도 남편의 처사에 더 울화가 치밀어 못살것 같았다. 그녀는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고 그만큼 남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날마다 거친 욕설을 듣고 있느니 아예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가서 뼈빠지게 일해 먹더라도 저 꼴을 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녀는 마침내 독한 마음을 먹고 90년대 중반에 8만원이라는 거액의 변돈을 꿔가지고 위장결혼을 해서 한국으로 갔다. 그런데 마디마다 옹이요,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한국에서 만난 상대는 감옥을 집처럼 들락거리는 범죄전과자였고 사기군이였다. 같이 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는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 시달림을 5년이나 견뎌내야 하였다. 그녀는 찜통같은 주방에서 온갖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혼자 도맡아했다. 아글타글 번 돈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놈의 호주머니에 다 들어갔다. 더군다나 만날 때마다 퍼붓는 욕설과 기시는 차마 들어 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4년만에 연변에 돌아와 보니 워낙 일하기 싫어하던 남편은 직장에서 물러나 놀고 있었다. 그는 안해가 피땀으로 벌어 보낸 돈으로 매일 흥청망청 먹고 마셨고 웬 계집을 끼고 딴 살림을 하고 있었다. 9살 때 동서에게 두고 간 아들애는 공부를 하지 않아 고중에도 못가고 엄청 많은 학비를 내야 하는 사립학교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학교는 다닌다는 명색뿐이고 날마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몰려다니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였다. 옛날의 따뜻한 가정을 이젠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억이 막혔다.     <애들은 엄마만 없으면 공부도 못하고 철도 못 드는가? 아빠라는 인간은 어쩌면 저렇게 정신이 빠져가지고 자기가정 하나, 자기새끼 하나 온전히 건사하지 못할가?>    참으로 환장할 일이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한국에 갔다. 이를 악물고 뻗치면서 5년간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다행히 빚은 다 갚게 되었다. 하지만 그 위장결혼을 한 <남편>은 그냥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악에 바친 그녀는 <시집>에 찾아가 <남편>을 신고하겠다고 울러메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젠 한국을 떠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그녀는 한 친구의 권유로 6000달러의 거금을 내고 카나다, 멕시코 관광길에 올랐다가 용케도 미국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 정착한지도 어느덧 6년 세월이 흘렀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그녀는 그 어디를 가나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그녀는 얼마간 돈을 모이게 되었고 지난해는 3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오매에도 그리던 아들애를 미국에 데려와 일식집에 취직시켰다. 지금 그들 모자는 밀입국 비용으로 낸 빚을 갚느라고 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그녀는 <나루터술집>의 떡시루같은 주방에서 하루 12시간씩 소고기, 돼지고기를 삶고 닭과 물고기를 기름에 튕기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천하의 엄마 마음은 다 같은지, 그녀는 날마다 그토록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항상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고 연변에 두고 온 놀부남편이지만 그래도 애들 아빠라고 한달 건너 500달러씩 꼭꼭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단다. 그동안 애를 키워준 시집도 등한시하지 않고 가끔 용돈을 보내주고 있고 동서들과도 자주 통화를 한다고 했다. 아직은 손에 쥔 돈이 별로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그래도 돈벌기 좋은 미국 땅에서 뭔가를 더 해보려고 짬짬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봉제사가 되여 순박한 멕시코애들을 데리고 복장업을 경영해 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살이는 시장경제의 폭풍취우에 부대껴온 우리 민족 녀성들의 삶의 축도에 다름 아니다. 칠전팔기하는 그녀의 인생살이에서 나는 우리 연변아줌마의 강인한 의지과 근면한 성격을 보았으며 남성을 초월하는 드넓은 흉금과 끈질긴 모성애를 보았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조선족농사군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외화를 벌어 들여 나라의 재정수입 증가에 기여하고 있는 고마운 분들이 아닌가.    안해를 외국에 로무일군으로 내 보낸 남편들 중에 아직도 집에 앉아 마작이나 뒤섞고 술판이나 벌리며 무도장을 휘젖고 다니는 분들이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라. 개도 안먹는다는 그 돈때문에 안해가 이국타향에서 참고 견디고 있는 그 험악한 모욕과 기시, 어려운 로동현장에서 흘리고 있는 그녀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매번 안해가 부쳐오는 그 외화의 무게와 가치를 깊이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음만으로라도 안해와 함께 그 아픔과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도 잘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가정도 반듯하게 지킬 수 있지 않을가, 재삼 생각해보게 된다.                                            ( 연변녀성잡지--2008년 제6기 )                                                                     
6    대학가에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3394  추천:48  2009-07-03
          대학가에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글 / 강 순 화    세월이 무정타하지만 정으로 이루어지고 정으로 남는 게 세월인것 같다.   30여년간 연변대학에서 일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희노애락들을 보아 왔지만 대학교수들인 한족 진경지(陈琼芝)와 조선족 리경숙(李京淑)의 사연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안겨주는 감동적 이야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1960년 가을,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변강을 건설하기 위해 연변대학에 찾아 온 한쌍의 청년교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현대문학을 전공한 미인 진경지(陳琼芝)와 고전문학을 전공한 미남 두영재(窦英才) 두 한족 젊은이였다.    중국 남방의 사천 출신인 두영재와 호남출신인 진경지는 혈기왕성한 젊은시절 산 설고 물선 연변 땅에 찾아와서 고생을 락으로 삼으면서 장장 26년 세월을 우리 조선족들과 함께 살아왔다.    1960년대초“3년 재해”시절, 이들은 우리 조선족과 함께 나무껍질로 만든 대식품을 먹었고“문화대혁명”때는“구린내 나는 지식분자”로 몰려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온갖 수모와 괄시를 다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시종일관 조선민족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교학 일선에서 자신의 청춘과 정열을 고스란히 바쳐왔다.    리경숙은 연변출신으로서 연변대학 화학학부를 뛰여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은 청년 녀교원이였다. 1970년 12월의 어느 하루 그녀가 화학실험실에서 유기합성실험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실험실의 150대기압의 염소통이 갑자기 고장났다는 아우성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실험실에 있는 5명의 학생들이 생명의 위험에 처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안전은 추호도 념두에 없이 선뜻 그 위험한 구역에 뛰여 들어갔다. 엄동설한이라 창문들은 신문지로 단단히 봉하고 있었는데 우선 빨리 문을 열어 제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공구도 찾을새 없이 맨손으로 창턱에 뛰여 올라가 안간힘을 다하여 문을 뜯어 열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두손은 피투성이가 되였고 련속 사흘동안 의식을 잃었다. 병원측의 갖은 노력과 구급치료로 요행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의 중추신경과 기관지가 크게 상하였다. 여러 달의 입원치료를 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종종 아프고 잠을 못자는 고생을 하고있다 한다. 그 당시 병원에서는 그의 건강상태로 보아 교학할수 없다고 하였고 학교측에서도 그더러 학교도서관에나 가서 외국어서적이나 관리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교단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그후의 30여년간 하루도 교학일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그는 항상 녀성강자였다.     당시 진경지와 리경숙은 연변대학교의 독신숙사에서 벽을 사이 두고 이웃으로 지냈다. 둘은 어느새 절친한 친구로 되었으며“문화대혁명”때에는 사회문제를 보는 견해나 관점이 서로 비슷하여 그야말로“같은 전호속의 친밀한 전우”로 되었다. 하여 이들 두 녀성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도 간직되고 있었다.     1967년 8월 파벌투쟁이 고조에 올랐을 때다. 어느 날 저녁 진경지는《극좌파를 비판한 언론》이 있다고 홍위병들의 추격을 받게 되였다. 평민백성이 마음대로 총까지 들고 날치던 때라 만약 무지막지한 그들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물매를 맞고 어딘가에 감금될 판이였다.     진경지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리경숙은 얼른 그녀를 자기 숙소에 숨겨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허리까지 넘치는 푸르하통하를 건너서 하남거리에 있는 리경숙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홍위병들은 진선생의 침실에 뛰여 들었으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화가 동한 그들은 온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고 상해표 손목시계며 량표, 우산, 탁상등 등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 그 뒤에도 홍위병들은 진경지가 숙소에 돌아오면 붙잡으려고 가끔 숙사 주위를 돌아보군 했다.     그 무렵 남편 두영재선생은 자치주의 당학교에 학습하러 갔는지라 임신 5개월이 된 진경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리경숙의 집에 얹혀 살수밖에 없었다.     리경숙의 친정집에는 부모님과 함께 오빠네 부처간이 살고있었다. 그런데 식구마다 여러 반란조직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에 제각기“백공”,“홍련”, “8.27”, “홍색”등 조직에 가담해 있었다. 이들 네 식구는 밥상에 마주 앉기만 하면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갑론을박으로 아옹다옹 다투었다.    하지만 일단 진경지만 들어서면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입을 다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부모님은 몰론이요, 오빠네 부처간도 진경지의 생활을 구석구석 보살펴 주었다. 한달 남짓한 피신 생활에서 경숙이네 부모님과 오빠네 부처간은 진경지를 마치 친정집에 찾아온 딸이나 누이동생처럼 살뜰하게 대해주었기에 진선생은 그집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지낼수가 있었다.     1986년,“변강에 가서 20년 이상 일한 지식인들은 원적지로 돌아 갈수 있다”는 정책이 시달되자 진경지 내외는 정든 연길을 떠나 수도 북경에 있는 중국청년정치학원에 전근하여 교수와 연구를 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3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진경지와 리경숙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두 녀성은 자주 편지를 하고 한달에 두 번씩은 꼭꼭 전화를 주고받았다. 몸은 수천 리 떨어져 있었지만 친자매와 같이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의 풍운조화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다. 대학교의 중견교수로 맹활약을 하던 리경숙은 1990년대 초반에 남편을 불치의 병으로 저 세상에 떠나보내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였다. 그의 남편은 할빈공업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연길시설계원에서 일했었다. 그는 연길시의 체육관, 박물관, 소년궁전 등 건물들을 설계한 유명한 건축가였다. 남편을 잃고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리혼을 하게 되었다. 리경숙선생은 엄마를 잃은 네살짜리 철부지 손자를 받아 안고 키워야만 하였다. 강의를 해야 하고 연구를 해야 하며 손주까지 보아야 하는 그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통을 힘으로, 고생은 락으로 바꾸고 대학교의 강당에서 쓰러질지언정 교편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사범학학원 부원장 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고 거기다가 15년간이나 자치주 정협 부주석과 전국정협 상무위원 등 중책까지 맡고 조선족녀성으로서 참정의정에 놀라운 재능과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매년 전국정협회의 차로 북경에 가게 되면 진경지는 어김없이 호텔에 찾아와 리경숙과 한 침실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한것 같다. 이처럼 아름다운 두 녀성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혹하니 말이다.           2001년 4월, 진경지는 청천벽력같이 유방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였다. 5년 남짓한 동안 4차례의 수술과 20여 차례의 화학치료를 거듭 받았지만 병세는 점점 심해만 갔고 다시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것을 운명으로 받아 드렸고 명지한 선택을 해나갔다. 시간을 쪼개가며 파금(巴金)에 관한 연구저서《생명의 불꽃》을 마무리했고 기타 현대문학에 관한 학술저서들도 꼼꼼히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일들도 하나하나 마무리를 지어나갔다.     진주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2005년의 어느 하루, 진경지선생은 조용히 남편을 자기 곁에 불렀다.    《여보, 당신 몸도 든든치 못한데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구만요. 저는 아무래도 이렇게 먼저 가겠지만 당신 여생이 큰 걱정이구만요.》    《무슨 소리요? 나는 큰 병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소. 건강관리만 잘하면 별 문제가 없을거요.》    《그래도 자꾸 마음이 불안하구만요. 당신 나 없으면 어떻게 혼자 살겠어요? 애들도 밖에 있지… 아무래도 다른 녀성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    《무슨 소리요? 이 나이에 다른 녀성이라니? 이제 학교의 강의가 마무리 되면 차차 애들한테 가면 되지.》    《아니, 지금의 젊은 세대와 우리는 완판 달라요. 늘그막에 마음 착한분이 옆에 있어야 편히 지낼수 있어요. 저의 청을 들어줘요 … 내 친구 경숙이를 당신 곁에 데려 오면 어떻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수 있을텐데 … 》     안해의 진정에 넘치는 간곡한 부탁을 들으며 두영재는 할말을 잊었다. 그것은 안해의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안해의 바다같은 사랑을 가득 담고 한없이 한없이 흘러내릴 뿐이였다.      안해를 하늘나라에 보낸지 1년이 훨씬 넘는 어느 하루, 두영재는 자신의 서재에 외롭게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해의 유상을 바라보노라니 그녀의 유언이 떠올랐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긴장되였다. 송수화기를 손에 들었지만 다이얼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드디여 용기를 내서 다이얼을 눌렀다.      《경숙선생, 그간 잘 지냈소? 나, 오래동안 고민해 보았는데 안해의 소원대로 우리 합하면 안 될가? 》     리선생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16년동안 일편단심 사업에만 몰두하였고 아들의 가정풍파로 말미암아 철없는 손자를 떠맡아 키워오느라 다른 일에는 전혀 눈을 팔 새가 없었던 것이다. 단 한번도 자신의 여생을 두고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두선생님, 너무나 뜻밖입니다. 저는 여태껏 재혼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저 아직은 손자녀석 때문에 한시도 연길집을 떠날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혼자 살렵니다.》    《아니, 손자가 무슨 큰 문제요? 북경에 데려다 우리 둘이 함께 공부시키면 되지 않겠소?…》     너무나도 고마운 말씀이였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한 조선족 동료에게 맡기려는 진경지선생의 그 믿음도 눈물겨웠지만 두선생님의 바다같이 넓은 흉금 또한 그처럼 고마울수가 없었다. 일본에 류학중인 경숙의 딸은 이 소식을 듣고 재삼 어머니를 설복하면서 혼자 여생을 고독히 보내지 말고 두선생님과 한 가정을 이룰것을 재삼 권고하였다.       그후 몇 달간, 리선생 역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친척친우 하나 없는 두선생의 처지에 대해서도 동정의 마음이 생겼다. 그들의 진정어린 따뜻한 대화는 전화선을 타고 수천리 상공을 오갔고 그들의 저녁노을은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소유라고 하였던가? 인생의 풍상고초를 다 겪은 이 두 민족 로일대의 사랑은 어쩌면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2006년 9월, 두 민족 가정의 짝 잃은 두 남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꽃을 피워갔고 그 향기는 북경과 연변 사이를 오가면서 많은 친구, 동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다. 모든 편견과 관습, 민족과 세속을 초월한 이들의 사랑과 행복에 그 누가 두 손 모아 축복하지 않으랴!     두영재와 리경숙 두분 교수 모두 연변대학교의 교육사업에서 지울수없는 기여를 하였기에 학교 령도에서는 이 희사를 매우 중시하였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연회를 베풀어 원로교수님들과 함께 그들의 행복을 축원하였다. 동료와 친구들도 분분히 축하파티를 마련하여 그들의 영원한 사랑과 건강을 기원해 주었다.    오늘도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수도 북경의 천안문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올 겨울방학에는 리경숙선생의 고향이자 두영재와 진경지선생의 제2의 고향인 연변에 다시 찾아와 옛 친구들과 상봉할 약속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다고 한다.     이 어찌 대학가에서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랴! 이들은 이렇게 비통을 힘으로 바꾸고 역경을 이겨내며 자신의 두손으로 만년의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의 우정과 사랑을 가득 싣고 멀리멀리 저 구중천에 날아올라 진경지선생께 전해질 것이다. 그이께서도 이 세상에 남겨둔 시름을 훨훨 털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좀 더 마음편히 보내시리라는 애틋한 바램으로 재삼 기원해본다.                                        <중국민족>잡지  2008년 제5기에 실렸음 
5    우리의 청춘은 저 산 너머에 댓글:  조회:3385  추천:59  2009-07-03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지식청년 회고록》을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부터 울렁거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시 찾을 길 없는 그 청춘을 아무런 보상도 바램도 없이 7년간이나 고스란히 바친 그 땅에 아직도 사랑과 련민의 정이 남아서 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킨 정열과 랑만, 방황과 아픔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잊혀지고 색바래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녀고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26살 애기엄마로 되기까지 하많은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힘들고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의연히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나의 농촌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던 향촌학교에서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뒹굴고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인생의 멜로디였다.        지식청년하향 4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새삼스레 그 옛날의 일들을 돌이켜 보노라니 저도 몰래 가슴이 뭉클해진다. 20세기 6-70년대 중국대륙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 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이는 확연히 중국 당대사의 일대 사변이였고 한 세대의 8천여만 젊은이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 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리하여 66년급, 67년급, 68년급, 3기의 초,고중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가의 가정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마주하고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양머리소녀가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검은5류》자녀들과 같이《집권파》의 딸로 전락되였다. 고급중학 3학년의 공청단서기로 북경정법대학에 추천되였고 학교에서 유일한 학생발전대상이 되여 입당비준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전도는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여지없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의 희망은 하루밤새에 사천 문천의 8급지진마냥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변할수 없는 철칙이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실려 아무런 주저도, 고려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도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기고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농촌이란 어떤 곳인지 막연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애들은 그냥 엉덩덩한 기분에 들떠 있기만 했다.《지식청년》들을 만재한 트럭은 어느덧 연길과 룡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붉은사상을 간직하고 있은 때문인지, 아니면 셈이 덜 들어서인지 하나같이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하기만 했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의 산촌마을 백금향이였다. 향정부마을에서 일행의 한 절반을 부려 놓은 후 또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는 열 다섯호의 인가들은 하얀 벽들에 기와를 얹어놓아 언제인가 그림에서나 보아왔던 전통한옥을 방불케 하였고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이라고 하는 검실검실한 중년 사나이가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그의 열정적인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집체호》에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져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온《지식청년》들을 맞는 일이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우리들을 환대하였다.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정신없이 퍼 먹어댔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끼다보니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의 그 저녁 같은 진수성찬은 평생 다시 맛볼수 없을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너머로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고장이였다. 뒷산에는 살구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들이 울긋불긋 자연과원을 이루었고 산골짜기로는 맑은 샘물이 졸졸 흘러내려와 그야말로 에덴동산 같았다.            도시의 연립주택과 아스팔트길에서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도시의 애들은 시골마을의 산등성이에서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정답게 이어진 기와집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등 그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수가 없었다. 더구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친구들끼리 산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신나고 재미있을것 같기도 했다. 15살부터 19살까지의 14명의 애티나는《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신생사물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에서의 새 기분도 잠간 일뿐 농촌에서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부터 일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벌판에서 헤매였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수 없었고 깨끗한 의복 한번, 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작업복바지에다 초록색 군복 모양의 웃옷에 네모난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서 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환하거나 꽃무늬 간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절대 엄금했었다. 하지만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적등황록색 그대로 인생의 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생산대장의 일 포치대로 벼가을이 끝나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둘씩 짝을 무어가지고 몰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사달이 생겼다. 벼단을 가득 싣고 옆에서 소를 몰다가 다리맥이 없으니 소수레 앞채에 걸터앉는다고 몸을 솟구친 것이 그만 소궁둥이 뒤쪽에 허망 떨어졌다. 그 찰라 나는 진짜로 그 무거운 수레에 깔려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커다란 두 바퀴가 내 작은 몸둥아리를 가운데 놓고 지나가버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비명횡사를 할번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 소름이 끼친다.        또 한번은 생산대 우사칸의 소를 끌어내는데 고놈의 소도 풋내기라고 업신여겼는지 그 육중한 발로 나의 작은 발등을 꾹 밟아 놓아 당장에서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맨발의사라 자칭하는 집체호 재현이게서 수태 아픈 침을 맞으며 열흘나마 쩔룩거리면서도 무슨 정신이였는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밭에 나갔다. 물불을 모르고 그렇게 덤비고 당하면서 1년 농사를 다 짓고나니 어느덧 농사군이 된것 같았다. 겨울에는 어른들도 힘든 땔나무도 제법 아치를 탁탁 쳐 가며 수레에 싣고는 굵은 바줄로 단단하게 죄여 가지고 산등성이에서 집체호까지 끌고 올수도 있었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탈곡을 해야 하는데 60년대 말에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며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무서리가 내리는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이나 며칠 쉬고나면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그냥 들기에도 힘든 쇠곡괭이로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김매기를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하게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은 장알이 박히다 못해 피멍까지 들었다.         이른 봄에는 아침부터 살얼음이 낀 논판에 들어서서 벼모를 뽑느라면 발은 물론 장단지까지도 시려났다. 그때 어데 장화나 갖춰 신었는가? 녀자애들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를 참을 수 없어 남몰래 찔끔 눈물을 떨구곤 하였다. 실로 따뜻한 집이 그리웠고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러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 《홍위병》,《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진짜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이러구려 3년 세월이 지난 후 부터는 하나둘씩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고 학교에 가면서 《집체호》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가든지 모두가 사회의 중견인물이 되어 자신의 빛과 열을 발휘하고 있었다. 초년고생은 천금을 주고도 못 산다고 농촌에서의 시련은 우리 모두를《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수 있는》강한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어찌보면 그 시대의 불행아가 오늘의 행운아로 되었는지 모른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산골도 보통 산골이 아니고 두메산골인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가장지물의 전부였고 로동력이 많아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개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유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시내의 큰아들이 사주었다는 17촌짜리 흑백텔레비 한대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그집 정주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일본드라마를 보았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약속하여 똑같이 만들고 나누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봄이 오면 집체호에서도 앞마당에 남새를 심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밭에 가기 전에 남자애들은 삽으로 땅을 파놓고 녀자애들은 호미로 밭이랑을 만들었다. 나와 성희는 집에 남아서 마늘을 심기로 하였다. 둘이 마늘 종자를 까서 열심히 거의 다 심느라 하였는데 이웃집 할머니가 오셔서 한참 들여다 보더니    《아이고, 다시 파서 심어야겠네!》     하고는 우리가 심은 마늘을 몽땅 파내서 당신이 다시 심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우리 둘은 마늘 종자를 전부 거꾸로 땅에 밖아 넣은 것이다. 먹을줄이나 알았지 언제 한번 심어나 보았는가? 마늘 종자의 뾰족한 쪽을 땅에 심어 넣으면 그냥 자라는 줄로만 알았던 한심한 인간들이였으니 말이다.        농망기에 들어서면 소도 찰떡을 쳐서 먹인다고 하는데 집체호 애들은 허구한 날 고기점도 별로 먹어보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먹새 좋은《집체호》애들한테는 하루 삼시 먹거리를 장만하기도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였다. 열네명의 식구가 살다보니 밥은 항상 큰 한족솥에 쌀이 절반이나 차게 앉혀야 했고 반찬도 무엇이든 한 소래씩은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둘씩 조를 짜가지고 화식당번을 섰다. 반찬은 그날 당번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야 한다.         나의 차례가 된 어느날 마침 촌 소매부에 감자국수가 왔다기에 우리는 그것을 사다가 국수탕을 만들기로 했다. 파를 닦다가 물을 몇 바가지 넣고 간을 맞춰 한시경이나 끓이니 맛있는 국수탕이 되였다. 저녁상을 갖추려고 준비하는데 밖에 나갔던 우리당번 경화가 웬 계란 두개를 들고 들어왔다. 웃집 마당에 있는 닭광주리에 수없이 많던데 딱 두개만 삶아서 먹어보자는 것이였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남의 계란까지 쥐고 왔으랴만 주인 없는 집에서 가지고 왔다니 좀 미지끈하기도 했다.      《주인이 돌아오면 말하고 돈을 드리면 되지않니? 》하는 경화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딴 솥이 없는지라 그냥 국을 끓이는 솥에 넣어 삶을 수밖에 없었다. 경화가 계란을 씻어서 끓고 있는 솥에 넣자마자《툭!》하더니 웬 덜 된 병아리 새끼가 터져나왔다. 혼비백산한 경화는 꽥 소리를 질렀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바가지로 채 생기지 못한 병아리와 계란껍질을 건져서 밖에 내다 재더미 속에 파묻어 버렸다.         이를 어쩐담? 종일 일하고 배가 고픈 애들이 당장 무리쳐서 들어서겠는데 저녁반찬은 무엇으로 한담? 이제 새로 할수도 없고, 김치쪼가리도 다 떨어지고, 맨 된장을 먹을수도 없고... ... 둘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드디어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막부득이한 일이니 아예 없었던 일로 하자는 약속이다. 일밭에서 돌아온 애들은 국수탕이 요즘 반찬에서는 제일 맛있다고 칭찬하며 저마다 한 사발씩 게눈감추듯 먹어치웠다.        경화와 나는 먼저 먹었노라고 시치미를 뗏다. 사실 둘은 그날 저녁을 쫄쫄 굶는 수밖에 없었고 애들은《보지 않으면 약》이라고 저마다 만포식하고 늘어졌다. 알고보니 웃집 씨암탉이 알을 품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꺼내온 닭알이라 그만 그런 사건이 버러지게 된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 둘은 웃집에 찾아가 사과하고 비밀에만 부쳐줄것을 약속받는 연극까지 하게 되였다. 물론 그《비밀》도 며칠 가지 못하고 들통이 났지만 그날 저녁 한때만이라도 무사히 넘긴 것이 천만다행인듯 싶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기에 량식이 흔하지 않았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집체호》애들한테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을 심으라고 종자를 주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무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검대기를 뭍혀가며 콩서리를 했고 초가을 강냉이는 여물기 전에 다 뜯어서 삶아 먹곤 하였다.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먹는 물건을 먹겠다는 애들을 욕하랴, 때리랴?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우리《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이만저만 고생하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급중학교 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하물며 우리 66년급 고중졸업생들은《문화대혁명》이전에 고급중학교 3학년까지의 지식을 다 배웠고 또 그 자리에서 2년을《혁명》한답시고 눌러앉아 고급중학교만 5년을 다닌 셈이니 배울건 다 배운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어문, 수학, 기하, 물리, 화학 등 중학교의 모든 과목들은 별로 막힘이 없이 강의할 수 있었다.         2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심포학교 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백금 1대부터 5대까지의 애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하여 그 무슨 모자 쓴 중학(戴帽子中学)이라고도 불렀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데 교장이든 평교원이든 할것없이 모두다 교단에 올라야 했다.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좌우로 갈라 앉혀놓고 흑판 가운데 줄을 그어 계선을 나누고는 시간마다 복식강의를 하였다.       향촌교원의 월급은 32원이였는데 시골에서는 그것이 최고 수입이였다. 감농군들이 일년내내 땀 흘려 벌어도 량식대와 생산비용을 제하고 나면 년말분홍에 단돈 100원도 손에 쥐기 힘든 세월이였으니 말이다. 그 월급에 손색이 없이 교원들의 사업열정은 아주 높았다. 과당교학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하학 후에도 산마루를 넘나들며 학생들에게 과외보도를 해 주었기에 룡정현의 통일고시에서는 항상 우수한 점수를 따내군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우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자기 손으로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시골애들은 시골정기를 타고 자라서인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도시의 큰 학교에서만 공부해온 나로서는 그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향촌학교가 참으로 재미났다. 세세대대로 땅을 파며 살아 온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 그것도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 작은 애들이 매일 한집식구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였다. 휴식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전교 애들이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고 쫓고 하면서 즐겁게 뛰노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산촌의 푸르른 풍경이요, 변강마을의 찬란한 희망이였다.          1973년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찍은 우리 학급의 11명 아이들을 보시라. 하나하나가 그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아닌가? 이젠 모두가 불혹의 나이도 훨씬 넘겼겠으니 언녕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여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이 땅 어디서인가 살고 있겠지? 천진란만하고 순박하기만 하던 그 시골의 아이들이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청춘의 힘을 되살려 주었고 내 아픈 인생에 보람을 가져다 준 것이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패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 했다. 나는 그간 입고 쓰던 옷이며 신발이며 궤짝과 책 같은 물건들을 몽땅 가난한 집들에 나누어 주었다.        귀성(回城)호구수속을 하는 동안 나는 하루라도 놀수 없는 성질이라 친구들과 함께 연길맥주공장에 찾아가 림시공으로 일했다. 도시의 일은 촌에 비하면 그야말로 누운 소 타기였다. 하루해가 기준인 농촌과는 달리 어김없는 8시간 로동제인데 언뜻하면 반나절이 지나는것 같았고 그 어느 차간의 일도 농촌 일에 비하면 모두 식은 죽 먹기였다. 농촌에서 단련된《지식청년》의 일본새로 뛰여다니면서 열심히 일했더니 생산과의 리과장은 나를 보고 호구수속만 되면 공장화험실에 배치하겠으니 아예 우리공장의 정식직원이 되라고 했다. 맥주공장에서는 아마 화험실이 제일 고급인것 같았다.        그런데 매일 출근길에 연변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면서 나는 언녕 다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9개월 만에 농촌호구가 연길시호구로 되는 수속이 끝나자 나는 그날로 연변대학교 인쇄공장에 달려왔다. 맥주공장에서 매일 맥주나 만드는 일보다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생들의 교재를 만드는 일이 더 뜻있는 사업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 때문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인쇄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 받아주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교란 이 신성한 일터에 나절로 찾아와서 일하고 배우고 진보하면서 30여년이 되는 오늘까지 이 직장을 지켜 온 것이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로3기 고중졸업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10년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2년만 대학입시자격을 달라》고 시위하고 청원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대학입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서른이 다가오는 년령이였고 이미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아이인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찾아 복습하며 2개월간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1978년 7월, 연길시제2중학교 시험장에서 대학본과시험을 칠 때였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갓난애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 애는 집에서 울어대고 엄마의 젖은 탱탱 붓다 못해 절로 흘러넘쳐 적삼 앞자락을 흥건하게 적셔버렸다. 시험감독 선생님은 부지런히 수지를 가져다주면서 하도 기가막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교 한어학부 성인교육반에 입학할수 있었고 영광스럽게 대학생의 영예를 받아 안을수 있었다. 그 후 5년간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우수졸업생》이 되였고 오늘날까지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였다.   《지식청년 회고록》을 마무리면서 나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그 특수한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으로 달리고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했지 않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당년의《지식청년》답게, 씩씩하고 후회 없이 인생의 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변지식청년회고록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0월   
4    시어머니와 주고 받은 사랑 이야기 댓글:  조회:3621  추천:49  2009-07-03
         시어머니와 주고 받은 사랑이야기                                                                               글 /  강 순 화     인생이란 워낙 생면부지이던 사람들이 서로 연분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거늘 이런 삶의 길에서 부부간, 고부간에 미운정 고운정 쌓아가는 것도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반평생 넘어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어찌 한두가지랴만 시어머니와 주고 받던 사랑이야기들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 갔다가 다시 연길에 돌아와 맥주공장에서 림시로 출근하던 그때 나는 작업반장 리아주머니의 소개로 전기기계공장 기술원과 결혼하게 되었다. 시집에는 80고령의 외할머니와 60되시는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시어머니는 스물다섯 꽃나이에 남편을 객지 목재판 사고로 잃고 유복자로 된 외동아들 하나에 평생을 걸고 살아오신 분이였다.        아들애가 일곱 살이 되여 학교갈 나이가 되니 한 아녀자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서 가정생계를 유지하고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월이였다. 시어머니는 큰 마음을 먹고 얼마 않되는 가장집물을 묶어서 이고 지고 아들애 손목을 이끌어 소영촌에서 연길시내에 있는 공신촌으로 무작정 들어오셨다고 한다. 50년대 초기라 금방 해방직후인 그 년대에 그처럼 담찬 행동은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공신채대에 낡은 집 하나를 얻어 가지고 생계를 위해 아들을 위해 시어머니는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고 뛰여 다녔다. 남새밭 삯기음도 맷고 길거리 청소도 했으며 공장의 림시공으로 학교식당 취사원으로 못해본 일이 없었다. 좀 더 벌어보려고 춘하추동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 일하며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외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이다.        어데 그뿐이랴. 열여덟살에 일본놈에게 맞아 정신병에 걸린 친정 오라비를 마흔살이 되어 운명할 때까지 집에서 거두어 주었으며 병환에 계시는 친정부모님까지 모셨으니 그 고생은 이루다 말할수 없는 것이였다.              하늘나라에 가신지도 어언간 20년이 되어 오건만 그 자애롭고 사리 밝고 부지런하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세상 더 보지 못하시고 고생에 고생만 하신 일들이 가슴 아프고 잊지 못할 추억의 에피소드들로 마음이 무거워지군 한다.        연변대학인쇄공장에 정식으로 취직되여 통계, 출납 업무를 맡은 나는 거이 날마다 은행을 드나들어야 했다. 공가차도 택시도 없는 그 세월에 제일 좋은 교통도구는 자전거였다. 그날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은행가는 길에 직장에서 멀지 않는 집에 피뜩 들리기로 생각하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대문을 열고 보니 시어머니는 항창 손자를 등에 업은 채 불볕에 앉아 닭모이를 쫒고 계셨다. 나는 그 사이라도 어머니가 좀 허리 펴고 일하실수 있게 하려고 애를 받아 업고 은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일로 큰 사달이 날줄이야. 돌아오는 길에서 애한테 얼음과자를 사 먹인 외에는 어데도 들리지 않았는데 집앞에 당도하니 자전거 핸들에 걸어 놓은 헌겁 들가방이 오간데 없어졌다. 은행문서와 현금 200원까지 몽땅 잃어 버린것이다. 80년대 초 200원이면 그당시 나의 석달 월급도 더 되니 그 가치는 지금의 열배도 넘는 큰 돈이였다.        정신이 아찔해났다. 다급히 되돌아가며 찾고 또 찾아도 그 어디에서 찾으랴!  언녕 자취를 감춘것을. 후에 안 일이지만 집으로 굽어드는 골목의 올리막 길에서 내가 등에 업은 아이를 돌아보며 정신을 팔 무렵 가방이 땅에 떨어졌는데 동네 아줌마가 멀리서 볼라니 웬 밀차군이 지나다가 길에 떨어진 가방을 밀차에 던져 넣어 가지고 가더라는 것이였다.    《어머니 은행에서 찾은 돈 200원을 몽땅 잃어 버렸습니다.》    맥없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며 나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새파랗게 질린 나의 얼굴을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얼른 애를 받더니 나무람 할 대신    《괜찮소, 애를 업고 갔는데 그래도 운수땜을 했다고 생각하기오. 더 큰 일을 막은셈 치고... ...이제 집을 팔면 그까짓 돈 갚으면 되지.》라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때 우리집은 공신대대의 초가집이였는데 집터가 꽤나 넓었기에 집 옆에 벽돌집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낡은 집을 팔아야 2000원도 안될 때인데 붙는 불에 키질은 커녕 그렇게도 너그럽게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너무도 고마워 그만 눈물이 났다.        허나 그때 그 200원은 정말로 그까짓 돈이 아니였다. 며칠동안 보위과 일군과 함께 온 시내 200여대의 밀차군들을 살피다 못해 결국은 찾기를 포기하고 그 후엔 나의 매달 월급에서 얼마씩 제하여 근 2년이 되어서야 겨우 그 돈을 다 갚았으니 말이다.        그 이듬해 어느날 내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부엌에서 불을 때는 시어머니의 기색이 말이 아니였다.《어머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사연인즉 배급소에 량식타러 가서 줄을 섰는데 차례가 되어 돈을 물자고 보니 바지호주머니의 돈지갑이 어느새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긴 줄을 서고 있는데 뒤에서 웬 사람이 자꾸 밀더니 깜쪽같이 훔쳐간 것이였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래일 내 월급이 나오면 배급을 타지요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러자 시어머니의 기색은 대뜸 밝아졌다.    《에구!  우리 독보조 노친들이 나보고 며느리한테서 쫓겨나겠다 하더니 우리 며느리 하는 소리를 보오! 》라고 하며 기뻐하시는 것이였다.        사실 어머니한테서 배워서 말했을 따름인데... ... 나는 얼굴이 뜨거워 졌다. 이렇게 서로 리해하여 주니 고부간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나는 새 직장에 정식으로 출근하여 탄 첫달 월급을 몽땅 넣어 회색털실 두근 반을 사가지고 짬짬이 정성들여 어머니 쟈켓트를 떠 드렸다. 난생처음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 본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헌데 생활이란 워낙 복잡다단하기 마련인가?  바로 시어머니 회갑때 일이다. 집안 친척과 아들 며느리 직장의 손님들은 청해야 하겠는데 어디 지금처럼 식당에서 몇상 차리면 될 때인가?  집에서 밤도와 콩나물 녹두나물도 키워야 했고 낮에는 떡가루도 내야 했다. 솜씨 좋은 시어머니는 탁주까지 빚으려 하시니 애를 등에 업고 이 모든 일들을 하시기엔 너무나도 무리였다.        우리는 잠시 얼마간이라도 애를 직장의 유아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할머니 손끝으로 금쪽같이 키우던 애를 유아원에 처음 보내 놓고 나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중간휴식시간이 되기 바쁘게 뛰여가 유리창문으로 애를 들여다 보군 했는데 그날은 마침 간식시간이라 선생님이 검스레한 밀가루 만두 하나씩을 애들한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난 이런거 안 먹겠슴다. 이팝 먹겠습다. 》    《안먹겠으면 그만둬! 》울먹이는 애를 향해 처녀선생은 꽥 소리치며 만두그릇을 탁 빼앗아 창턱에 놓아 버렸다. 그 관경을 들여다 본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와락 문을 밀치고 들어가 애를 안고 나와 버렸다. 애를 등에 업고 집으로 가며 나는 내내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 세분이 가마목에 모여 앉아 한창《쓩이야, 몽이야!》하면서 윳을 치고있지 않는가?    《애는 울어 죽겠는데 무슨 쓩이고 몽입니까?》나는 앞뒤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에구, 애 보다 에미가 더 울었구만, 어서 가져오오, 밥을 먹이게... ...》하고 일어나 아이를 받아 안으시는 것이였다. 순간 나는 저도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온종일 일하신 어머니가 동네 로인들이 놀러 와서 잠깐 허리쉼을 하면 어떠랴?!  너무도 철딱서니 없는 행패로 하여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물론 애는 다시 유아원에 보냈고 그 후엔 내가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해 갔으며 유아원의 소반, 중반과 대반에서 줄곧 반장까지 하였다.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한 10여년간 나는 이렇게 울며 웃으며 싸우고 배우면서 고부간의정을 쌓았고 시어머니는 이 며느리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산같은 분으로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오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짐작이 가서 얼른 자전거를 돌려 타고 원예농장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가 닭모이로 솎은 배추를 꽉 눌러 넣은 마대를 등에 짊어진 채 밭머리에서 끙끙거리며 일어나지 못하시고 있지 않는가!     《뭘 이렇게나 많이 담았어요?》      나는 어머니를 나무라며 얼른 짐을 벗겨 함께 자전거에 실어 올린 후 집까지 밀고 돌아왔다. 마당에 쏟아 놓으니 산더미 같았다. 이렇게 어머니가 애쓰시며 10여마리의 닭을 울안에서 키웠기에 우리집은 매일 닭알 한바가지씩 거둬들였고 그 닭알로 애들한테 과일과 얼음과자를 바꿔 먹이군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새볔,  잠결에 볼라니 아직 어슴프레한 새벽인데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시여 마당에 닭사료 가리러 나가신다는 것이였다. 항창 잠많은 젊은 때이라 날이 환히 밝아서야 아침하러 일어나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었다. 불길한 예감에 급히 문을 열고 내다보니 글쎄 어느때 그러셨는지 어머니가 마당에 쓰러져 있지 않는가?!  황급히 안궁환을 찾아 대접하고 마을에 달려나가 밀차를 빌어 시립병원에 모셔가니 뇌출혈이란다.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청천병력이였다. 밤낮으로 링겔주사를 들이대니 그저 쉴새없이 소변으로 자리만 적실 뿐 정신은 차리지 못하였다. 본래 몸집이 좋으신 분이 맥을 다 버리니 그 몸이 천근같아 갸냘픈 내 힘으로는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아예 침대우에 올라서서 몸을 조금씩 움직여가며 하신을 씻어 드리고 기저귀를 바꾸군 하였다.        몇일째 밤낮으로 정성껏 호리하는 모습을 보고 옆 침대의 환자와 가족들은 효녀가 따로 없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라 효성할 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럴때엔 정말로 자식 여럿인 집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며칠동안 정신을 못차리시던 어머니가 닷새되던 날 불현듯 눈을 뜨시더니《아! 아!》하며 손을 저었다. 분명 손자를 찾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일어나시려는 모양이구나 하고 기뻐하며 급히 애를 데려다 침상앞에 앉혔다. 어머니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가까스로 손을 들어 손자의 머리를 쓰담더니 다시 천천히 눈을 감으시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영별일줄이야!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침상에 누운지 딱 아흐렛만에 총망히 저세상으로 가시고 말았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그 귀한 손자 한번 더 보시고 아들 며느리 한테도 인젠 더 부담 주지 않으시려고 한시 급히 떠나신 모양이였다.        시어머니와의 인연이 내 인생에서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 추억은 오늘도 나를 울린다. 당신이 추울세라 더울세라 만날 등에 없고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 키워 오던 그 손자가 이제는 명문대의 경영학 석사까지 졸업하고 어엿한 청년이 되여 예뿐 손주며느리감까지 데리고 왔으니 어머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시랴!        가끔 고인이 된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생전에 더 효도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며 조선왕조의 옛시인 송강 정철의 시조를 떠올려 보군 한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어느덧 이 며느리가 또 시어머니로 돼 버린 오늘,  존경하는 나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열두치마폭 같은 너그러운 마음씨와 하해와 같은 자식사랑, 그리고 인생의 스승다운 그 가르침에 이 며느리가 셈이 들고 성숙해 왔음에 하냥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 연변녀성잡지-- 2005년 제11기 )                                                        
3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 (강순화2) 댓글:  조회:3708  추천:145  2007-06-02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강순화 연변대학 여성연구중심 연구원           조선족녀성발전추진회 회장세상을 움직이는 손은 바로 요람을 움직이는 손이라고도 한다. 가난하고 말끔한 집안일지라도 오직 그곳에 정직하고 선량하며 근신하고 락관적인 어머니만 있다면 그 가정은 곧 마음의 성당이고 아이들 성장의 락원이다. 녀성은 약자이지만 어머니는 강자라 하지 않는가! 어머니가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은 일생을 이어가는 명줄이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힘이다.    어머니의 손길은 갓 태여난 애에게 온기를 주고 그 온기는 태양과 더불어 자라는 애에게 따스함과 편안함을 안겨준다. 어머니의 미소와 격려는 상처를 치유하는 명약이요, 어머니의 자애로움은 하냥 봄날의 단비마냥 아이들 마음을 적셔 주며 그들이 건실히 자라도록 밀어주는 동력이다. 어머니가 가르키는 옳고 그름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배우게 하며 그들의 정신과 령혼을 맑게해 주어 아름다운 품성과 인생의 가치를 키워준다.      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은 이 사회 청소년들의 도덕 질서와 가치체계를 수호하고 있으며 그들이 고상한 품질과 성공적 인생을 만들어 가는 기반이다. 세계적인 위대한 과학자 에디슨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을 보자.     학교에서 항상 “하나에 하나를 합하면 왜 둘이냐?” 하는 따위의 괴상한 물음만 들이대는 에디슨을 남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냐고 하였다. 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아버지는 교장선생을 찾아가《우리애가 장래 무슨 직업을 하면 출세할수 있을가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교장선생의 대답은《당신의 아이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똑같이 출세할 수 없을거요.》라는 것이였다. 이럴듯 어릴때 부터 사람들한테서 이상한 애로 불리여 온 아들을 사랑과 기대의 힘으로 성공의 길에 이끈 것이 곧 그의 어머니였다.    한번은 에디슨의 어머니가 친구들과 함께 애를 데리고 교외에 놀러 갔다. 다른 친구의 아이들은 모두다 강에서 자맥질하고 산에 오르고 하면서 뛰노는데 유독 에디슨만은 강가에 묵묵히 앉아 강물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가만히 에디슨어머니를 보고《쟤는 왜 강물만 쳐다보고 앉아 있어요? 신경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어서 병원에 가서 보이세요.》라고 하였다.《우리 에디슨은 아무런 모병이 없어요. 당신들은 몰라서 그래요. 지금 쟤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거얘요. 앞으로 꼭 훌륭한 대학교수로 될 거예요.》에디슨 어머니의 대답 이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구불멸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 그리고 사심없는 방조는 아이를 분발노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가 없었다면 에디슨은 훗날 그같이 위대한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과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기대는 언제나 아이의 특점에 부합되여야 하며 또한 아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아이에 대한 적당하고 열정적이며 진정한 기대는 바로 성공의 길로 이끌어주는 힘이다. 에디슨의 어머니가 위대함은 바로 그가 자식에 대한 올바른 기대를 시종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출세 못한다고, 쓸모없는 애라고 할때도 그러했고 애가 힘들어 할 때엔 더욱 그러했다.    기대에 넘치는 눈길로 사랑스럽게 애를 바라보는 것은 어머니가 애한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아이의 성공을 기대하고 인재가 되는것을 기대한다면 인정과 사랑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아이들에게 항상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하며 그들의 흥취와 애호에 따라 자신심을 배양하고 재간을 키우도록 열심히 밀어 주어야 한다.    국외 전문가들의 연구는 부모의 기대가 아이들의 심리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고 있음을 표명하였다. 성장적 기대는 아이들에 대한 찬상(贊賞)과 격려, 지지와 보살핌이다. 부모와 가정의 이런 적극적인 성원의 분위기는 아이들에게 압력이 아닌 동력으로 된다.    아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며 부모들의 희망이다. 그 희망은 다양한바 어떤어머니들은 항상 아이의 성적이 높을것을 기대하며 장차 대학을 졸업하고 학술상 성과를 가져올 것을 바란다. 또는 애한테 경영자의 두뇌가 있어서 장래 큰 돈도 벌수 있기를 바란다. 또 일부는 아이의 흥취를 보아 신체가 건장하고 체육을 잘하며 기록을 돌파하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또 어떤 부모는 연약한 아이가 그저 건강하고 평안하게 일생을 보내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많은 경우 어머니의 절박한 기대는 아이가 분발상진하는 동력이 되지만 실제를 탈리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무거운 압력이 될수도 있으므로 그들의 성장에 불리하다. 지나친 기대는 또한 실망도 가져올수 있으며 어머니의 실망적인 감정은 아이들의 정상적인 실수도 큰 문제로 보여지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가 자신이 좀 더 뛰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때에는 자각적으로 그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는 오히려《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락심하게 되고 신심을 잃게 된다.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욕심에만 의하고 아이들의 실제에는 맞지 않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적인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때 우선 아이의 지력특점과 흥취 애호, 및 개성 특징을 평가해 보고 애들과 함께 그들의 우세는 무엇이고 부족한 점은 어느 면인지를 분석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너무 낮은 기대는 동력을 상실케하고 지나친 기대는 신심을 잃게 만든다. 오직 아이의 실제에 맞게 리성적으로 적당한 분투목표를 제출해야 아이들은 신심가득히 자신의 예정 목표를 향해 분발노력하여 성공의 령마루에 오를 수 있다.
2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강순화) 댓글:  조회:3919  추천:176  2007-05-21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강순화      미모는 녀성 매력의 기본이라고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의 미를 미처 알기 전에 우선 외모의 미를 흠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정형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인위적 미와 천생적인 미를 갈라 보기 힘든 것이 사실임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얼굴만 아름다우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 역시 녀성 매력의 자본이다. 홍루몽의 림대옥과 설보채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남성들에게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림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병색어린 갸날픈 미인은 수시로 깨여 질수 있는 유리 꽃병에 불과하니깐.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녀성이면 모두다 감지하고 있듯이 미모와 건강만 가지면 다 되는 것이 아닌 것이 또한 현실이다. 녀성의 경제적 독립이야 말로 인격적 독립의 본전이니깐. 녀성이 자신의 지식으로 자본을 바꿔 독립함은 멋지고 우아한 것이며 또 그만큼 능력과 재간이 겸비 되였음을 말하고 있으니 이 아니 금상첨화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지식있고 재능있고 미모도 있으나 애정이 없다면 그 또한 마음 한 쪽이 비여 있는 것이요, 그 심태 또한 불안하여 쉽게 좌절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아무리 출중한 녀성이라 하지만 옆이 비여 있으면 뭇사람 눈에 처량함이 엿보이고 그 빛깔도 차갑기 마련이다. 녀성은 약자이지만 엄마는 강자라 하지 않는가? 안전감이 없는 녀성은 실제적이지 못하니깐.         그러니 미모도 건강도 재간도 혼인도 모두 갖추어야 만이 정녕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는 녀성이라는 말이다. 미모가 녀인을 빛나게 한다면 재능은 녀인을 매력에 넘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완전완미가 어디 쉬운 일인가? 선천적인 조건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부단히 보완해야 하고 전통적인 관념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고쳐가야 하는 것이 오늘 날을 살아가는 녀성들의 삶의 지혜인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가늠해 보자. 이 정보화와 지구화의 새 시대에서 나는 어떻게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정녕 부단한 배움으로 자신을 승화하고 있는가? 강한 의지와 끈질긴 추구로 과감히 현실에 적응해 가고 있는가? 자신의 인격적인 매력을 가꿀 줄도 알고 창조할 줄도 아는가?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현시대의 녀성이라면 그 누구든 정녕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다.  
1    프로필 댓글:  조회:4930  추천:182  2007-05-21
강순화 연변대학 조선-한국연구중심 연구원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겸직 연구원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 , 상담연구소 소장 1985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한어전업졸업 1985 -- 1989 연변대학한어학부 사무실주임            (중급직함) 1989 -- 2008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연구원      (고급직함) 1993 -- 2008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겸직연구원      (고급직함) 2008 -- 현 재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 상담연구소   소  장 저서로 《억센사나이》(상,하),《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중국조선민족 민속연구》,《중국조선족 녀성연구》》,《파란많은 인생길》등이 있고 편저공저로《중국에서의 조선한국명인연구》,《정판룡 세계를 가다》,           《녀성연구》(1),(2),(3), 《조선한국학 연구총서》(1--7), 등 20여권 있음. 90년대 초부터 ,,,,,등           각종 잡지와 ,,,,,           등 각종 신문에 다수의 기행문, 칼럼, 단상, 수필 등등 100여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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