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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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학가에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3393  추천:48  2009-07-03
          대학가에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글 / 강 순 화    세월이 무정타하지만 정으로 이루어지고 정으로 남는 게 세월인것 같다.   30여년간 연변대학에서 일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희노애락들을 보아 왔지만 대학교수들인 한족 진경지(陈琼芝)와 조선족 리경숙(李京淑)의 사연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안겨주는 감동적 이야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1960년 가을,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변강을 건설하기 위해 연변대학에 찾아 온 한쌍의 청년교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현대문학을 전공한 미인 진경지(陳琼芝)와 고전문학을 전공한 미남 두영재(窦英才) 두 한족 젊은이였다.    중국 남방의 사천 출신인 두영재와 호남출신인 진경지는 혈기왕성한 젊은시절 산 설고 물선 연변 땅에 찾아와서 고생을 락으로 삼으면서 장장 26년 세월을 우리 조선족들과 함께 살아왔다.    1960년대초“3년 재해”시절, 이들은 우리 조선족과 함께 나무껍질로 만든 대식품을 먹었고“문화대혁명”때는“구린내 나는 지식분자”로 몰려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온갖 수모와 괄시를 다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시종일관 조선민족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교학 일선에서 자신의 청춘과 정열을 고스란히 바쳐왔다.    리경숙은 연변출신으로서 연변대학 화학학부를 뛰여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은 청년 녀교원이였다. 1970년 12월의 어느 하루 그녀가 화학실험실에서 유기합성실험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실험실의 150대기압의 염소통이 갑자기 고장났다는 아우성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실험실에 있는 5명의 학생들이 생명의 위험에 처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안전은 추호도 념두에 없이 선뜻 그 위험한 구역에 뛰여 들어갔다. 엄동설한이라 창문들은 신문지로 단단히 봉하고 있었는데 우선 빨리 문을 열어 제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공구도 찾을새 없이 맨손으로 창턱에 뛰여 올라가 안간힘을 다하여 문을 뜯어 열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두손은 피투성이가 되였고 련속 사흘동안 의식을 잃었다. 병원측의 갖은 노력과 구급치료로 요행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의 중추신경과 기관지가 크게 상하였다. 여러 달의 입원치료를 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종종 아프고 잠을 못자는 고생을 하고있다 한다. 그 당시 병원에서는 그의 건강상태로 보아 교학할수 없다고 하였고 학교측에서도 그더러 학교도서관에나 가서 외국어서적이나 관리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교단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그후의 30여년간 하루도 교학일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그는 항상 녀성강자였다.     당시 진경지와 리경숙은 연변대학교의 독신숙사에서 벽을 사이 두고 이웃으로 지냈다. 둘은 어느새 절친한 친구로 되었으며“문화대혁명”때에는 사회문제를 보는 견해나 관점이 서로 비슷하여 그야말로“같은 전호속의 친밀한 전우”로 되었다. 하여 이들 두 녀성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도 간직되고 있었다.     1967년 8월 파벌투쟁이 고조에 올랐을 때다. 어느 날 저녁 진경지는《극좌파를 비판한 언론》이 있다고 홍위병들의 추격을 받게 되였다. 평민백성이 마음대로 총까지 들고 날치던 때라 만약 무지막지한 그들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물매를 맞고 어딘가에 감금될 판이였다.     진경지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리경숙은 얼른 그녀를 자기 숙소에 숨겨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허리까지 넘치는 푸르하통하를 건너서 하남거리에 있는 리경숙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홍위병들은 진선생의 침실에 뛰여 들었으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화가 동한 그들은 온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고 상해표 손목시계며 량표, 우산, 탁상등 등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 그 뒤에도 홍위병들은 진경지가 숙소에 돌아오면 붙잡으려고 가끔 숙사 주위를 돌아보군 했다.     그 무렵 남편 두영재선생은 자치주의 당학교에 학습하러 갔는지라 임신 5개월이 된 진경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리경숙의 집에 얹혀 살수밖에 없었다.     리경숙의 친정집에는 부모님과 함께 오빠네 부처간이 살고있었다. 그런데 식구마다 여러 반란조직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에 제각기“백공”,“홍련”, “8.27”, “홍색”등 조직에 가담해 있었다. 이들 네 식구는 밥상에 마주 앉기만 하면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갑론을박으로 아옹다옹 다투었다.    하지만 일단 진경지만 들어서면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입을 다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부모님은 몰론이요, 오빠네 부처간도 진경지의 생활을 구석구석 보살펴 주었다. 한달 남짓한 피신 생활에서 경숙이네 부모님과 오빠네 부처간은 진경지를 마치 친정집에 찾아온 딸이나 누이동생처럼 살뜰하게 대해주었기에 진선생은 그집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지낼수가 있었다.     1986년,“변강에 가서 20년 이상 일한 지식인들은 원적지로 돌아 갈수 있다”는 정책이 시달되자 진경지 내외는 정든 연길을 떠나 수도 북경에 있는 중국청년정치학원에 전근하여 교수와 연구를 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3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진경지와 리경숙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두 녀성은 자주 편지를 하고 한달에 두 번씩은 꼭꼭 전화를 주고받았다. 몸은 수천 리 떨어져 있었지만 친자매와 같이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의 풍운조화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다. 대학교의 중견교수로 맹활약을 하던 리경숙은 1990년대 초반에 남편을 불치의 병으로 저 세상에 떠나보내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였다. 그의 남편은 할빈공업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연길시설계원에서 일했었다. 그는 연길시의 체육관, 박물관, 소년궁전 등 건물들을 설계한 유명한 건축가였다. 남편을 잃고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리혼을 하게 되었다. 리경숙선생은 엄마를 잃은 네살짜리 철부지 손자를 받아 안고 키워야만 하였다. 강의를 해야 하고 연구를 해야 하며 손주까지 보아야 하는 그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통을 힘으로, 고생은 락으로 바꾸고 대학교의 강당에서 쓰러질지언정 교편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사범학학원 부원장 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고 거기다가 15년간이나 자치주 정협 부주석과 전국정협 상무위원 등 중책까지 맡고 조선족녀성으로서 참정의정에 놀라운 재능과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매년 전국정협회의 차로 북경에 가게 되면 진경지는 어김없이 호텔에 찾아와 리경숙과 한 침실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한것 같다. 이처럼 아름다운 두 녀성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혹하니 말이다.           2001년 4월, 진경지는 청천벽력같이 유방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였다. 5년 남짓한 동안 4차례의 수술과 20여 차례의 화학치료를 거듭 받았지만 병세는 점점 심해만 갔고 다시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것을 운명으로 받아 드렸고 명지한 선택을 해나갔다. 시간을 쪼개가며 파금(巴金)에 관한 연구저서《생명의 불꽃》을 마무리했고 기타 현대문학에 관한 학술저서들도 꼼꼼히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일들도 하나하나 마무리를 지어나갔다.     진주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2005년의 어느 하루, 진경지선생은 조용히 남편을 자기 곁에 불렀다.    《여보, 당신 몸도 든든치 못한데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구만요. 저는 아무래도 이렇게 먼저 가겠지만 당신 여생이 큰 걱정이구만요.》    《무슨 소리요? 나는 큰 병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소. 건강관리만 잘하면 별 문제가 없을거요.》    《그래도 자꾸 마음이 불안하구만요. 당신 나 없으면 어떻게 혼자 살겠어요? 애들도 밖에 있지… 아무래도 다른 녀성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    《무슨 소리요? 이 나이에 다른 녀성이라니? 이제 학교의 강의가 마무리 되면 차차 애들한테 가면 되지.》    《아니, 지금의 젊은 세대와 우리는 완판 달라요. 늘그막에 마음 착한분이 옆에 있어야 편히 지낼수 있어요. 저의 청을 들어줘요 … 내 친구 경숙이를 당신 곁에 데려 오면 어떻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수 있을텐데 … 》     안해의 진정에 넘치는 간곡한 부탁을 들으며 두영재는 할말을 잊었다. 그것은 안해의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안해의 바다같은 사랑을 가득 담고 한없이 한없이 흘러내릴 뿐이였다.      안해를 하늘나라에 보낸지 1년이 훨씬 넘는 어느 하루, 두영재는 자신의 서재에 외롭게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해의 유상을 바라보노라니 그녀의 유언이 떠올랐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긴장되였다. 송수화기를 손에 들었지만 다이얼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드디여 용기를 내서 다이얼을 눌렀다.      《경숙선생, 그간 잘 지냈소? 나, 오래동안 고민해 보았는데 안해의 소원대로 우리 합하면 안 될가? 》     리선생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16년동안 일편단심 사업에만 몰두하였고 아들의 가정풍파로 말미암아 철없는 손자를 떠맡아 키워오느라 다른 일에는 전혀 눈을 팔 새가 없었던 것이다. 단 한번도 자신의 여생을 두고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두선생님, 너무나 뜻밖입니다. 저는 여태껏 재혼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저 아직은 손자녀석 때문에 한시도 연길집을 떠날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혼자 살렵니다.》    《아니, 손자가 무슨 큰 문제요? 북경에 데려다 우리 둘이 함께 공부시키면 되지 않겠소?…》     너무나도 고마운 말씀이였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한 조선족 동료에게 맡기려는 진경지선생의 그 믿음도 눈물겨웠지만 두선생님의 바다같이 넓은 흉금 또한 그처럼 고마울수가 없었다. 일본에 류학중인 경숙의 딸은 이 소식을 듣고 재삼 어머니를 설복하면서 혼자 여생을 고독히 보내지 말고 두선생님과 한 가정을 이룰것을 재삼 권고하였다.       그후 몇 달간, 리선생 역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친척친우 하나 없는 두선생의 처지에 대해서도 동정의 마음이 생겼다. 그들의 진정어린 따뜻한 대화는 전화선을 타고 수천리 상공을 오갔고 그들의 저녁노을은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소유라고 하였던가? 인생의 풍상고초를 다 겪은 이 두 민족 로일대의 사랑은 어쩌면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2006년 9월, 두 민족 가정의 짝 잃은 두 남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꽃을 피워갔고 그 향기는 북경과 연변 사이를 오가면서 많은 친구, 동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다. 모든 편견과 관습, 민족과 세속을 초월한 이들의 사랑과 행복에 그 누가 두 손 모아 축복하지 않으랴!     두영재와 리경숙 두분 교수 모두 연변대학교의 교육사업에서 지울수없는 기여를 하였기에 학교 령도에서는 이 희사를 매우 중시하였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연회를 베풀어 원로교수님들과 함께 그들의 행복을 축원하였다. 동료와 친구들도 분분히 축하파티를 마련하여 그들의 영원한 사랑과 건강을 기원해 주었다.    오늘도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수도 북경의 천안문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올 겨울방학에는 리경숙선생의 고향이자 두영재와 진경지선생의 제2의 고향인 연변에 다시 찾아와 옛 친구들과 상봉할 약속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다고 한다.     이 어찌 대학가에서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랴! 이들은 이렇게 비통을 힘으로 바꾸고 역경을 이겨내며 자신의 두손으로 만년의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의 우정과 사랑을 가득 싣고 멀리멀리 저 구중천에 날아올라 진경지선생께 전해질 것이다. 그이께서도 이 세상에 남겨둔 시름을 훨훨 털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좀 더 마음편히 보내시리라는 애틋한 바램으로 재삼 기원해본다.                                        <중국민족>잡지  2008년 제5기에 실렸음 
4    우리의 청춘은 저 산 너머에 댓글:  조회:3385  추천:59  2009-07-03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지식청년 회고록》을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부터 울렁거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시 찾을 길 없는 그 청춘을 아무런 보상도 바램도 없이 7년간이나 고스란히 바친 그 땅에 아직도 사랑과 련민의 정이 남아서 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킨 정열과 랑만, 방황과 아픔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잊혀지고 색바래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녀고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26살 애기엄마로 되기까지 하많은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힘들고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의연히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나의 농촌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던 향촌학교에서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뒹굴고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인생의 멜로디였다.        지식청년하향 4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새삼스레 그 옛날의 일들을 돌이켜 보노라니 저도 몰래 가슴이 뭉클해진다. 20세기 6-70년대 중국대륙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 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이는 확연히 중국 당대사의 일대 사변이였고 한 세대의 8천여만 젊은이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 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리하여 66년급, 67년급, 68년급, 3기의 초,고중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가의 가정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마주하고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양머리소녀가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검은5류》자녀들과 같이《집권파》의 딸로 전락되였다. 고급중학 3학년의 공청단서기로 북경정법대학에 추천되였고 학교에서 유일한 학생발전대상이 되여 입당비준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전도는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여지없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의 희망은 하루밤새에 사천 문천의 8급지진마냥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변할수 없는 철칙이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실려 아무런 주저도, 고려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도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기고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농촌이란 어떤 곳인지 막연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애들은 그냥 엉덩덩한 기분에 들떠 있기만 했다.《지식청년》들을 만재한 트럭은 어느덧 연길과 룡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붉은사상을 간직하고 있은 때문인지, 아니면 셈이 덜 들어서인지 하나같이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하기만 했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의 산촌마을 백금향이였다. 향정부마을에서 일행의 한 절반을 부려 놓은 후 또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는 열 다섯호의 인가들은 하얀 벽들에 기와를 얹어놓아 언제인가 그림에서나 보아왔던 전통한옥을 방불케 하였고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이라고 하는 검실검실한 중년 사나이가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그의 열정적인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집체호》에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져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온《지식청년》들을 맞는 일이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우리들을 환대하였다.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정신없이 퍼 먹어댔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끼다보니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의 그 저녁 같은 진수성찬은 평생 다시 맛볼수 없을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너머로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고장이였다. 뒷산에는 살구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들이 울긋불긋 자연과원을 이루었고 산골짜기로는 맑은 샘물이 졸졸 흘러내려와 그야말로 에덴동산 같았다.            도시의 연립주택과 아스팔트길에서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도시의 애들은 시골마을의 산등성이에서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정답게 이어진 기와집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등 그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수가 없었다. 더구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친구들끼리 산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신나고 재미있을것 같기도 했다. 15살부터 19살까지의 14명의 애티나는《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신생사물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에서의 새 기분도 잠간 일뿐 농촌에서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부터 일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벌판에서 헤매였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수 없었고 깨끗한 의복 한번, 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작업복바지에다 초록색 군복 모양의 웃옷에 네모난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서 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환하거나 꽃무늬 간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절대 엄금했었다. 하지만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적등황록색 그대로 인생의 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생산대장의 일 포치대로 벼가을이 끝나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둘씩 짝을 무어가지고 몰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사달이 생겼다. 벼단을 가득 싣고 옆에서 소를 몰다가 다리맥이 없으니 소수레 앞채에 걸터앉는다고 몸을 솟구친 것이 그만 소궁둥이 뒤쪽에 허망 떨어졌다. 그 찰라 나는 진짜로 그 무거운 수레에 깔려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커다란 두 바퀴가 내 작은 몸둥아리를 가운데 놓고 지나가버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비명횡사를 할번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 소름이 끼친다.        또 한번은 생산대 우사칸의 소를 끌어내는데 고놈의 소도 풋내기라고 업신여겼는지 그 육중한 발로 나의 작은 발등을 꾹 밟아 놓아 당장에서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맨발의사라 자칭하는 집체호 재현이게서 수태 아픈 침을 맞으며 열흘나마 쩔룩거리면서도 무슨 정신이였는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밭에 나갔다. 물불을 모르고 그렇게 덤비고 당하면서 1년 농사를 다 짓고나니 어느덧 농사군이 된것 같았다. 겨울에는 어른들도 힘든 땔나무도 제법 아치를 탁탁 쳐 가며 수레에 싣고는 굵은 바줄로 단단하게 죄여 가지고 산등성이에서 집체호까지 끌고 올수도 있었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탈곡을 해야 하는데 60년대 말에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며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무서리가 내리는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이나 며칠 쉬고나면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그냥 들기에도 힘든 쇠곡괭이로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김매기를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하게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은 장알이 박히다 못해 피멍까지 들었다.         이른 봄에는 아침부터 살얼음이 낀 논판에 들어서서 벼모를 뽑느라면 발은 물론 장단지까지도 시려났다. 그때 어데 장화나 갖춰 신었는가? 녀자애들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를 참을 수 없어 남몰래 찔끔 눈물을 떨구곤 하였다. 실로 따뜻한 집이 그리웠고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러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 《홍위병》,《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진짜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이러구려 3년 세월이 지난 후 부터는 하나둘씩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고 학교에 가면서 《집체호》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가든지 모두가 사회의 중견인물이 되어 자신의 빛과 열을 발휘하고 있었다. 초년고생은 천금을 주고도 못 산다고 농촌에서의 시련은 우리 모두를《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수 있는》강한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어찌보면 그 시대의 불행아가 오늘의 행운아로 되었는지 모른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산골도 보통 산골이 아니고 두메산골인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가장지물의 전부였고 로동력이 많아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개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유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시내의 큰아들이 사주었다는 17촌짜리 흑백텔레비 한대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그집 정주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일본드라마를 보았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약속하여 똑같이 만들고 나누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봄이 오면 집체호에서도 앞마당에 남새를 심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밭에 가기 전에 남자애들은 삽으로 땅을 파놓고 녀자애들은 호미로 밭이랑을 만들었다. 나와 성희는 집에 남아서 마늘을 심기로 하였다. 둘이 마늘 종자를 까서 열심히 거의 다 심느라 하였는데 이웃집 할머니가 오셔서 한참 들여다 보더니    《아이고, 다시 파서 심어야겠네!》     하고는 우리가 심은 마늘을 몽땅 파내서 당신이 다시 심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우리 둘은 마늘 종자를 전부 거꾸로 땅에 밖아 넣은 것이다. 먹을줄이나 알았지 언제 한번 심어나 보았는가? 마늘 종자의 뾰족한 쪽을 땅에 심어 넣으면 그냥 자라는 줄로만 알았던 한심한 인간들이였으니 말이다.        농망기에 들어서면 소도 찰떡을 쳐서 먹인다고 하는데 집체호 애들은 허구한 날 고기점도 별로 먹어보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먹새 좋은《집체호》애들한테는 하루 삼시 먹거리를 장만하기도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였다. 열네명의 식구가 살다보니 밥은 항상 큰 한족솥에 쌀이 절반이나 차게 앉혀야 했고 반찬도 무엇이든 한 소래씩은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둘씩 조를 짜가지고 화식당번을 섰다. 반찬은 그날 당번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야 한다.         나의 차례가 된 어느날 마침 촌 소매부에 감자국수가 왔다기에 우리는 그것을 사다가 국수탕을 만들기로 했다. 파를 닦다가 물을 몇 바가지 넣고 간을 맞춰 한시경이나 끓이니 맛있는 국수탕이 되였다. 저녁상을 갖추려고 준비하는데 밖에 나갔던 우리당번 경화가 웬 계란 두개를 들고 들어왔다. 웃집 마당에 있는 닭광주리에 수없이 많던데 딱 두개만 삶아서 먹어보자는 것이였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남의 계란까지 쥐고 왔으랴만 주인 없는 집에서 가지고 왔다니 좀 미지끈하기도 했다.      《주인이 돌아오면 말하고 돈을 드리면 되지않니? 》하는 경화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딴 솥이 없는지라 그냥 국을 끓이는 솥에 넣어 삶을 수밖에 없었다. 경화가 계란을 씻어서 끓고 있는 솥에 넣자마자《툭!》하더니 웬 덜 된 병아리 새끼가 터져나왔다. 혼비백산한 경화는 꽥 소리를 질렀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바가지로 채 생기지 못한 병아리와 계란껍질을 건져서 밖에 내다 재더미 속에 파묻어 버렸다.         이를 어쩐담? 종일 일하고 배가 고픈 애들이 당장 무리쳐서 들어서겠는데 저녁반찬은 무엇으로 한담? 이제 새로 할수도 없고, 김치쪼가리도 다 떨어지고, 맨 된장을 먹을수도 없고... ... 둘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드디어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막부득이한 일이니 아예 없었던 일로 하자는 약속이다. 일밭에서 돌아온 애들은 국수탕이 요즘 반찬에서는 제일 맛있다고 칭찬하며 저마다 한 사발씩 게눈감추듯 먹어치웠다.        경화와 나는 먼저 먹었노라고 시치미를 뗏다. 사실 둘은 그날 저녁을 쫄쫄 굶는 수밖에 없었고 애들은《보지 않으면 약》이라고 저마다 만포식하고 늘어졌다. 알고보니 웃집 씨암탉이 알을 품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꺼내온 닭알이라 그만 그런 사건이 버러지게 된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 둘은 웃집에 찾아가 사과하고 비밀에만 부쳐줄것을 약속받는 연극까지 하게 되였다. 물론 그《비밀》도 며칠 가지 못하고 들통이 났지만 그날 저녁 한때만이라도 무사히 넘긴 것이 천만다행인듯 싶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기에 량식이 흔하지 않았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집체호》애들한테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을 심으라고 종자를 주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무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검대기를 뭍혀가며 콩서리를 했고 초가을 강냉이는 여물기 전에 다 뜯어서 삶아 먹곤 하였다.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먹는 물건을 먹겠다는 애들을 욕하랴, 때리랴?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우리《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이만저만 고생하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급중학교 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하물며 우리 66년급 고중졸업생들은《문화대혁명》이전에 고급중학교 3학년까지의 지식을 다 배웠고 또 그 자리에서 2년을《혁명》한답시고 눌러앉아 고급중학교만 5년을 다닌 셈이니 배울건 다 배운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어문, 수학, 기하, 물리, 화학 등 중학교의 모든 과목들은 별로 막힘이 없이 강의할 수 있었다.         2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심포학교 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백금 1대부터 5대까지의 애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하여 그 무슨 모자 쓴 중학(戴帽子中学)이라고도 불렀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데 교장이든 평교원이든 할것없이 모두다 교단에 올라야 했다.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좌우로 갈라 앉혀놓고 흑판 가운데 줄을 그어 계선을 나누고는 시간마다 복식강의를 하였다.       향촌교원의 월급은 32원이였는데 시골에서는 그것이 최고 수입이였다. 감농군들이 일년내내 땀 흘려 벌어도 량식대와 생산비용을 제하고 나면 년말분홍에 단돈 100원도 손에 쥐기 힘든 세월이였으니 말이다. 그 월급에 손색이 없이 교원들의 사업열정은 아주 높았다. 과당교학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하학 후에도 산마루를 넘나들며 학생들에게 과외보도를 해 주었기에 룡정현의 통일고시에서는 항상 우수한 점수를 따내군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우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자기 손으로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시골애들은 시골정기를 타고 자라서인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도시의 큰 학교에서만 공부해온 나로서는 그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향촌학교가 참으로 재미났다. 세세대대로 땅을 파며 살아 온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 그것도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 작은 애들이 매일 한집식구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였다. 휴식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전교 애들이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고 쫓고 하면서 즐겁게 뛰노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산촌의 푸르른 풍경이요, 변강마을의 찬란한 희망이였다.          1973년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찍은 우리 학급의 11명 아이들을 보시라. 하나하나가 그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아닌가? 이젠 모두가 불혹의 나이도 훨씬 넘겼겠으니 언녕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여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이 땅 어디서인가 살고 있겠지? 천진란만하고 순박하기만 하던 그 시골의 아이들이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청춘의 힘을 되살려 주었고 내 아픈 인생에 보람을 가져다 준 것이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패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 했다. 나는 그간 입고 쓰던 옷이며 신발이며 궤짝과 책 같은 물건들을 몽땅 가난한 집들에 나누어 주었다.        귀성(回城)호구수속을 하는 동안 나는 하루라도 놀수 없는 성질이라 친구들과 함께 연길맥주공장에 찾아가 림시공으로 일했다. 도시의 일은 촌에 비하면 그야말로 누운 소 타기였다. 하루해가 기준인 농촌과는 달리 어김없는 8시간 로동제인데 언뜻하면 반나절이 지나는것 같았고 그 어느 차간의 일도 농촌 일에 비하면 모두 식은 죽 먹기였다. 농촌에서 단련된《지식청년》의 일본새로 뛰여다니면서 열심히 일했더니 생산과의 리과장은 나를 보고 호구수속만 되면 공장화험실에 배치하겠으니 아예 우리공장의 정식직원이 되라고 했다. 맥주공장에서는 아마 화험실이 제일 고급인것 같았다.        그런데 매일 출근길에 연변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면서 나는 언녕 다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9개월 만에 농촌호구가 연길시호구로 되는 수속이 끝나자 나는 그날로 연변대학교 인쇄공장에 달려왔다. 맥주공장에서 매일 맥주나 만드는 일보다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생들의 교재를 만드는 일이 더 뜻있는 사업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 때문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인쇄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 받아주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교란 이 신성한 일터에 나절로 찾아와서 일하고 배우고 진보하면서 30여년이 되는 오늘까지 이 직장을 지켜 온 것이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로3기 고중졸업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10년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2년만 대학입시자격을 달라》고 시위하고 청원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대학입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서른이 다가오는 년령이였고 이미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아이인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찾아 복습하며 2개월간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1978년 7월, 연길시제2중학교 시험장에서 대학본과시험을 칠 때였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갓난애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 애는 집에서 울어대고 엄마의 젖은 탱탱 붓다 못해 절로 흘러넘쳐 적삼 앞자락을 흥건하게 적셔버렸다. 시험감독 선생님은 부지런히 수지를 가져다주면서 하도 기가막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교 한어학부 성인교육반에 입학할수 있었고 영광스럽게 대학생의 영예를 받아 안을수 있었다. 그 후 5년간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우수졸업생》이 되였고 오늘날까지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였다.   《지식청년 회고록》을 마무리면서 나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그 특수한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으로 달리고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했지 않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당년의《지식청년》답게, 씩씩하고 후회 없이 인생의 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변지식청년회고록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0월   
3    시어머니와 주고 받은 사랑 이야기 댓글:  조회:3621  추천:49  2009-07-03
         시어머니와 주고 받은 사랑이야기                                                                               글 /  강 순 화     인생이란 워낙 생면부지이던 사람들이 서로 연분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거늘 이런 삶의 길에서 부부간, 고부간에 미운정 고운정 쌓아가는 것도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반평생 넘어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어찌 한두가지랴만 시어머니와 주고 받던 사랑이야기들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 갔다가 다시 연길에 돌아와 맥주공장에서 림시로 출근하던 그때 나는 작업반장 리아주머니의 소개로 전기기계공장 기술원과 결혼하게 되었다. 시집에는 80고령의 외할머니와 60되시는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시어머니는 스물다섯 꽃나이에 남편을 객지 목재판 사고로 잃고 유복자로 된 외동아들 하나에 평생을 걸고 살아오신 분이였다.        아들애가 일곱 살이 되여 학교갈 나이가 되니 한 아녀자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서 가정생계를 유지하고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월이였다. 시어머니는 큰 마음을 먹고 얼마 않되는 가장집물을 묶어서 이고 지고 아들애 손목을 이끌어 소영촌에서 연길시내에 있는 공신촌으로 무작정 들어오셨다고 한다. 50년대 초기라 금방 해방직후인 그 년대에 그처럼 담찬 행동은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공신채대에 낡은 집 하나를 얻어 가지고 생계를 위해 아들을 위해 시어머니는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고 뛰여 다녔다. 남새밭 삯기음도 맷고 길거리 청소도 했으며 공장의 림시공으로 학교식당 취사원으로 못해본 일이 없었다. 좀 더 벌어보려고 춘하추동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 일하며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외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이다.        어데 그뿐이랴. 열여덟살에 일본놈에게 맞아 정신병에 걸린 친정 오라비를 마흔살이 되어 운명할 때까지 집에서 거두어 주었으며 병환에 계시는 친정부모님까지 모셨으니 그 고생은 이루다 말할수 없는 것이였다.              하늘나라에 가신지도 어언간 20년이 되어 오건만 그 자애롭고 사리 밝고 부지런하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세상 더 보지 못하시고 고생에 고생만 하신 일들이 가슴 아프고 잊지 못할 추억의 에피소드들로 마음이 무거워지군 한다.        연변대학인쇄공장에 정식으로 취직되여 통계, 출납 업무를 맡은 나는 거이 날마다 은행을 드나들어야 했다. 공가차도 택시도 없는 그 세월에 제일 좋은 교통도구는 자전거였다. 그날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은행가는 길에 직장에서 멀지 않는 집에 피뜩 들리기로 생각하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대문을 열고 보니 시어머니는 항창 손자를 등에 업은 채 불볕에 앉아 닭모이를 쫒고 계셨다. 나는 그 사이라도 어머니가 좀 허리 펴고 일하실수 있게 하려고 애를 받아 업고 은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일로 큰 사달이 날줄이야. 돌아오는 길에서 애한테 얼음과자를 사 먹인 외에는 어데도 들리지 않았는데 집앞에 당도하니 자전거 핸들에 걸어 놓은 헌겁 들가방이 오간데 없어졌다. 은행문서와 현금 200원까지 몽땅 잃어 버린것이다. 80년대 초 200원이면 그당시 나의 석달 월급도 더 되니 그 가치는 지금의 열배도 넘는 큰 돈이였다.        정신이 아찔해났다. 다급히 되돌아가며 찾고 또 찾아도 그 어디에서 찾으랴!  언녕 자취를 감춘것을. 후에 안 일이지만 집으로 굽어드는 골목의 올리막 길에서 내가 등에 업은 아이를 돌아보며 정신을 팔 무렵 가방이 땅에 떨어졌는데 동네 아줌마가 멀리서 볼라니 웬 밀차군이 지나다가 길에 떨어진 가방을 밀차에 던져 넣어 가지고 가더라는 것이였다.    《어머니 은행에서 찾은 돈 200원을 몽땅 잃어 버렸습니다.》    맥없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며 나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새파랗게 질린 나의 얼굴을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얼른 애를 받더니 나무람 할 대신    《괜찮소, 애를 업고 갔는데 그래도 운수땜을 했다고 생각하기오. 더 큰 일을 막은셈 치고... ...이제 집을 팔면 그까짓 돈 갚으면 되지.》라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때 우리집은 공신대대의 초가집이였는데 집터가 꽤나 넓었기에 집 옆에 벽돌집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낡은 집을 팔아야 2000원도 안될 때인데 붙는 불에 키질은 커녕 그렇게도 너그럽게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너무도 고마워 그만 눈물이 났다.        허나 그때 그 200원은 정말로 그까짓 돈이 아니였다. 며칠동안 보위과 일군과 함께 온 시내 200여대의 밀차군들을 살피다 못해 결국은 찾기를 포기하고 그 후엔 나의 매달 월급에서 얼마씩 제하여 근 2년이 되어서야 겨우 그 돈을 다 갚았으니 말이다.        그 이듬해 어느날 내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부엌에서 불을 때는 시어머니의 기색이 말이 아니였다.《어머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사연인즉 배급소에 량식타러 가서 줄을 섰는데 차례가 되어 돈을 물자고 보니 바지호주머니의 돈지갑이 어느새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긴 줄을 서고 있는데 뒤에서 웬 사람이 자꾸 밀더니 깜쪽같이 훔쳐간 것이였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래일 내 월급이 나오면 배급을 타지요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러자 시어머니의 기색은 대뜸 밝아졌다.    《에구!  우리 독보조 노친들이 나보고 며느리한테서 쫓겨나겠다 하더니 우리 며느리 하는 소리를 보오! 》라고 하며 기뻐하시는 것이였다.        사실 어머니한테서 배워서 말했을 따름인데... ... 나는 얼굴이 뜨거워 졌다. 이렇게 서로 리해하여 주니 고부간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나는 새 직장에 정식으로 출근하여 탄 첫달 월급을 몽땅 넣어 회색털실 두근 반을 사가지고 짬짬이 정성들여 어머니 쟈켓트를 떠 드렸다. 난생처음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 본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헌데 생활이란 워낙 복잡다단하기 마련인가?  바로 시어머니 회갑때 일이다. 집안 친척과 아들 며느리 직장의 손님들은 청해야 하겠는데 어디 지금처럼 식당에서 몇상 차리면 될 때인가?  집에서 밤도와 콩나물 녹두나물도 키워야 했고 낮에는 떡가루도 내야 했다. 솜씨 좋은 시어머니는 탁주까지 빚으려 하시니 애를 등에 업고 이 모든 일들을 하시기엔 너무나도 무리였다.        우리는 잠시 얼마간이라도 애를 직장의 유아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할머니 손끝으로 금쪽같이 키우던 애를 유아원에 처음 보내 놓고 나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중간휴식시간이 되기 바쁘게 뛰여가 유리창문으로 애를 들여다 보군 했는데 그날은 마침 간식시간이라 선생님이 검스레한 밀가루 만두 하나씩을 애들한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난 이런거 안 먹겠슴다. 이팝 먹겠습다. 》    《안먹겠으면 그만둬! 》울먹이는 애를 향해 처녀선생은 꽥 소리치며 만두그릇을 탁 빼앗아 창턱에 놓아 버렸다. 그 관경을 들여다 본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와락 문을 밀치고 들어가 애를 안고 나와 버렸다. 애를 등에 업고 집으로 가며 나는 내내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 세분이 가마목에 모여 앉아 한창《쓩이야, 몽이야!》하면서 윳을 치고있지 않는가?    《애는 울어 죽겠는데 무슨 쓩이고 몽입니까?》나는 앞뒤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에구, 애 보다 에미가 더 울었구만, 어서 가져오오, 밥을 먹이게... ...》하고 일어나 아이를 받아 안으시는 것이였다. 순간 나는 저도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온종일 일하신 어머니가 동네 로인들이 놀러 와서 잠깐 허리쉼을 하면 어떠랴?!  너무도 철딱서니 없는 행패로 하여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물론 애는 다시 유아원에 보냈고 그 후엔 내가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해 갔으며 유아원의 소반, 중반과 대반에서 줄곧 반장까지 하였다.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한 10여년간 나는 이렇게 울며 웃으며 싸우고 배우면서 고부간의정을 쌓았고 시어머니는 이 며느리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산같은 분으로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오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짐작이 가서 얼른 자전거를 돌려 타고 원예농장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가 닭모이로 솎은 배추를 꽉 눌러 넣은 마대를 등에 짊어진 채 밭머리에서 끙끙거리며 일어나지 못하시고 있지 않는가!     《뭘 이렇게나 많이 담았어요?》      나는 어머니를 나무라며 얼른 짐을 벗겨 함께 자전거에 실어 올린 후 집까지 밀고 돌아왔다. 마당에 쏟아 놓으니 산더미 같았다. 이렇게 어머니가 애쓰시며 10여마리의 닭을 울안에서 키웠기에 우리집은 매일 닭알 한바가지씩 거둬들였고 그 닭알로 애들한테 과일과 얼음과자를 바꿔 먹이군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새볔,  잠결에 볼라니 아직 어슴프레한 새벽인데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시여 마당에 닭사료 가리러 나가신다는 것이였다. 항창 잠많은 젊은 때이라 날이 환히 밝아서야 아침하러 일어나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었다. 불길한 예감에 급히 문을 열고 내다보니 글쎄 어느때 그러셨는지 어머니가 마당에 쓰러져 있지 않는가?!  황급히 안궁환을 찾아 대접하고 마을에 달려나가 밀차를 빌어 시립병원에 모셔가니 뇌출혈이란다.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청천병력이였다. 밤낮으로 링겔주사를 들이대니 그저 쉴새없이 소변으로 자리만 적실 뿐 정신은 차리지 못하였다. 본래 몸집이 좋으신 분이 맥을 다 버리니 그 몸이 천근같아 갸냘픈 내 힘으로는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아예 침대우에 올라서서 몸을 조금씩 움직여가며 하신을 씻어 드리고 기저귀를 바꾸군 하였다.        몇일째 밤낮으로 정성껏 호리하는 모습을 보고 옆 침대의 환자와 가족들은 효녀가 따로 없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라 효성할 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럴때엔 정말로 자식 여럿인 집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며칠동안 정신을 못차리시던 어머니가 닷새되던 날 불현듯 눈을 뜨시더니《아! 아!》하며 손을 저었다. 분명 손자를 찾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일어나시려는 모양이구나 하고 기뻐하며 급히 애를 데려다 침상앞에 앉혔다. 어머니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가까스로 손을 들어 손자의 머리를 쓰담더니 다시 천천히 눈을 감으시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영별일줄이야!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침상에 누운지 딱 아흐렛만에 총망히 저세상으로 가시고 말았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그 귀한 손자 한번 더 보시고 아들 며느리 한테도 인젠 더 부담 주지 않으시려고 한시 급히 떠나신 모양이였다.        시어머니와의 인연이 내 인생에서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 추억은 오늘도 나를 울린다. 당신이 추울세라 더울세라 만날 등에 없고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 키워 오던 그 손자가 이제는 명문대의 경영학 석사까지 졸업하고 어엿한 청년이 되여 예뿐 손주며느리감까지 데리고 왔으니 어머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시랴!        가끔 고인이 된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생전에 더 효도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며 조선왕조의 옛시인 송강 정철의 시조를 떠올려 보군 한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어느덧 이 며느리가 또 시어머니로 돼 버린 오늘,  존경하는 나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열두치마폭 같은 너그러운 마음씨와 하해와 같은 자식사랑, 그리고 인생의 스승다운 그 가르침에 이 며느리가 셈이 들고 성숙해 왔음에 하냥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 연변녀성잡지-- 2005년 제11기 )                                                        
2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강순화) 댓글:  조회:3918  추천:176  2007-05-21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강순화      미모는 녀성 매력의 기본이라고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의 미를 미처 알기 전에 우선 외모의 미를 흠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정형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인위적 미와 천생적인 미를 갈라 보기 힘든 것이 사실임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얼굴만 아름다우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 역시 녀성 매력의 자본이다. 홍루몽의 림대옥과 설보채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남성들에게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림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병색어린 갸날픈 미인은 수시로 깨여 질수 있는 유리 꽃병에 불과하니깐.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녀성이면 모두다 감지하고 있듯이 미모와 건강만 가지면 다 되는 것이 아닌 것이 또한 현실이다. 녀성의 경제적 독립이야 말로 인격적 독립의 본전이니깐. 녀성이 자신의 지식으로 자본을 바꿔 독립함은 멋지고 우아한 것이며 또 그만큼 능력과 재간이 겸비 되였음을 말하고 있으니 이 아니 금상첨화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지식있고 재능있고 미모도 있으나 애정이 없다면 그 또한 마음 한 쪽이 비여 있는 것이요, 그 심태 또한 불안하여 쉽게 좌절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아무리 출중한 녀성이라 하지만 옆이 비여 있으면 뭇사람 눈에 처량함이 엿보이고 그 빛깔도 차갑기 마련이다. 녀성은 약자이지만 엄마는 강자라 하지 않는가? 안전감이 없는 녀성은 실제적이지 못하니깐.         그러니 미모도 건강도 재간도 혼인도 모두 갖추어야 만이 정녕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는 녀성이라는 말이다. 미모가 녀인을 빛나게 한다면 재능은 녀인을 매력에 넘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완전완미가 어디 쉬운 일인가? 선천적인 조건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부단히 보완해야 하고 전통적인 관념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고쳐가야 하는 것이 오늘 날을 살아가는 녀성들의 삶의 지혜인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가늠해 보자. 이 정보화와 지구화의 새 시대에서 나는 어떻게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정녕 부단한 배움으로 자신을 승화하고 있는가? 강한 의지와 끈질긴 추구로 과감히 현실에 적응해 가고 있는가? 자신의 인격적인 매력을 가꿀 줄도 알고 창조할 줄도 아는가?       녀성의 매력은 어디에? 현시대의 녀성이라면 그 누구든 정녕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다.  
1    프로필 댓글:  조회:4930  추천:182  2007-05-21
강순화 연변대학 조선-한국연구중심 연구원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겸직 연구원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 , 상담연구소 소장 1985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한어전업졸업 1985 -- 1989 연변대학한어학부 사무실주임            (중급직함) 1989 -- 2008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연구원      (고급직함) 1993 -- 2008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겸직연구원      (고급직함) 2008 -- 현 재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 상담연구소   소  장 저서로 《억센사나이》(상,하),《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중국조선민족 민속연구》,《중국조선족 녀성연구》》,《파란많은 인생길》등이 있고 편저공저로《중국에서의 조선한국명인연구》,《정판룡 세계를 가다》,           《녀성연구》(1),(2),(3), 《조선한국학 연구총서》(1--7), 등 20여권 있음. 90년대 초부터 ,,,,,등           각종 잡지와 ,,,,,           등 각종 신문에 다수의 기행문, 칼럼, 단상, 수필 등등 100여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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