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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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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창의적인 언어 조합 댓글:  조회:895  추천:0  2020-04-02
                                                                                                                             시의 산책6/방순애    시를 쓰면서 언어의 재치있는 결합은 일상에서 새로운 맛을 주고 따라서 매우 세련된 인상을 준다고 하겠다. 현대적 감각에 맞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권리이다. 계절이 바뀌면 나무잎이 바뀌여 옛것은 떨어지고 새것이 돋아나 듯 언어도 역시 창의적 언어로 생존과 행적을 보존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언어는 아주 복합적인 소리를 자기의 생각과 결복시켜 상대방에게 뜻을 전달시키는 것으로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언어는 제 자리에서 머물러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인지능력의 한계에 따라 끝없이 확장하는 무한의 크기를 가졌다고 본다. 언어가 어느곳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고 생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의 한계를 뛰여넘어 새로운 령역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고 새로운 언어조합을 만들어 상징으로 보여주기에 애를 쓴다고 하겠다. 그럼 아래에 강시나 시인의 시를 례를 들어 보자. (바람 멜로디에서) (파랑 려행에서)    강시나 시인의 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에서 합성되여 있다. 서로 엇갈려 엉키며 각각의 공간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한 공간에 마구 던져 재구성을 하고 있다. ‘아침소리’를 긁을 ‘무엇’이 없다. 그 무엇이라는 가상 현실은 상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상상력이 확장되여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 순간이동으로 진행되는 이미지 창작법을 잘 리용하게 되면 생동감과 운동감이 있을 뿐만아니라 영상감도 있다. 그러므로 감각으로 보나 영상화로 보나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에서 이미지 창작은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되지 않는 리좀적 글쓰기이다. 사고의 확장과 무한한 련결 가능성을 통해 다양체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글쓰기에서 다양체 차이가 차이 자체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소슬바람’ 자체가 소방울을 싣고 올 수 없는 현실을 상상의 현실로 만들어 차이가 차이자체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갖는 시에서만이 통하는 가상현실이다. 서로 아무런 련관없이 련결된 이미지들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낄수 있을까? 언어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는 카멜레온 같은 존재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러한 시구들은 하이퍼시 시작법을 리용하였다. 리좀의 기능을 적용하여 이질적이고 거리가 먼 언어의 합성을 통하여 ‘낯설기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행과 행의 낯설기 하기, 련과 련의 낯설기 하기, 제목과 내용의 낯설기 하기를 통하여 신선한 감각을 가져다 주고 사유의 시간과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것이 하이퍼시 시작법이다.     언어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 음향적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더욱 예술성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변화무쌍하고 정답이 없는 삶이기에 더욱 상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나아가서 예술의 필요성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에서 초월적 상상력 세계의 추구뿐만 아니라 시를 쓰기 위한 직관과 령감의 작용은 시인의 무의식의 범주화 작업으로 상징을 발산하여 시의 세계를 분리하고 은유화 하는 것이다. 강시나 시인의 는 청각이미지가 연장되여 시각이미지로 돌아오는 몽환성을 띈 상징이다. 어떻게 보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그것을 쓴 시인의 개성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관적 묘사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상적구조를 통하여 새로운 시적 감각을 생성시킴으로써 낯설기 하기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2020.2.1
8    새로운 언어조합의 향기 댓글:  조회:941  추천:0  2019-03-16
                              --"연변일보" 2018년 3월29일 실린 리성호 시를 읽고                                                       -- 시의 산책3/방순애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생각이 많다고 시를 지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다룰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연변일보" 2018년3월29일에 실린 리성호의 시 "석양" "빛" "뉘시던가" "사랑의 미소지을 때" "바람" 작품들 속에서 "석양"이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는 "석양"에서 주관과 관념을 배제하고 설명적이지 않고, 해석적이지 않는 언어조합들이 독자의 참여 공간을 확대시켰다. 아래에 시 "석양"을 보기로 하자 연지 바른 저녁이 웃는다 보금자리 찾는 새들 이쁜 깃 자랑한다 노래하던 내물 눈 감는다 고개 숙인 풀 향기가 젖는다 목동의 노래소리 고요가 웃는다 하루의 눈섭 옷 벗는다 그리움 초불 켜들었다 사랑은 아픔 핥았다 서산 너머 별들이 출근준비 바쁘다. -- "석양" 전문     시를 보면 시행이 짧고 련이 간단명료하며 전체적인 시 형태 또한 간결하다. 하지만 시어를 잘 살리고 언어조합이 독특하기에 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어 시의 저력을 느끼게 해준다.    "연지 바른 저녁", "내물 눈", "고요가 웃는다", "하루의 눈섭 옷 벗는다", "그리움 초불 켜든다", "사랑의 아픔 핥는다", "별들의 출근" 등은 새로운 언어조합의 새로운 생성물이겠다. 서로 성질이 다른 단어들을 결합하여 신선한 시의 세계를 펼치였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언어조합은 예술적 총체성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면서 참신한 언어들의 예술 현상을 만들어가는 구성요소가 되겠다.    시 1련 '연지 바른 저녁'은 저녁 노을을 말한다. 이인화하여 묘사한 것이다. 석양을 연지 바른 저녁이라 한것은 시인이 창조한 실재이며 욕망이라 본다. '보금자리 찾는 새들 / 이쁜 깃 자랑한다' 밤자리에 드는 새들의 형상이다. 시인의 마음과 감각에 의하여 떠오르는 새라는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쁜 깃"이라고 하였다. 이쁜 깃이란 묘사를 통하여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사물을 노래한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이쁜"이란 두글자를 잘 썼다고 생각한다.   시 2련 '노래하던 내물 눈 감는다' 내물은 눈이 없다. 하지만 내물에 눈을 그려넣어 땅거미 드는 풍경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눈이다. 없는 눈을 만들어 넣음으로써 내물이란 언어를 해체하였다. '고개숙인 풀 향기가 젖는다'는 땅거미속에서의 풀의 모습이다. 현실의 향기는 젖을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되지 않는 말로, 틀린 말로 가상현실을 만들었다. 시 속의 가상현실은 통한다고 하겠다. '목동의 노래소리/고요가 웃는다' 아주 조용하고 잠잠한 밤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정적인 추상어 고요를 웃는다는 동적인 언어와 결합시켜 놓아 이미지가 생동하게 재현된 같다. 영상이 은근하고 아름답다. 고요를 뜨는 달의 효과와 결합한듯 하여 고요가 웃는다는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시 3련 '하루의 눈섭 옷 벗긴다' 밝은 날이 끝나고 어둠이 깃든다를 뜻한다. 하루의 눈섭 옷 벗긴다는 강압적 언어결합이다. 하루에는 눈섭도 팔도 다리도 없다. 하루의 눈섭이라는 새로운 언어조합으로 자연의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한 것이다. 그리움 초불을 켜들었다는 별들의 반짝임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아픔 핥는다'. 핥는다는 혀가 물체의 겉면을 살짝 닿으며서 지나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정적인 추상어에 핥는다는 동적어를 조합함으로써 촉각화를 하였다. '별들의 출근'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란 말이다. 언어를 치환하였다. 인간들이 일터로 근무하러 나가는 것을 출근이라 하는데 별이 출근을 한다고 하였다. 언어를 대체한 셈이다. 이 시는 깔끔하고 선명하면서도 감각적이라 하겠다 .   웃는다, 감는다, 젖는다, 벗는다, 켜들었다. 핥았다 등의 현재형 종결이미지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사실(현상)의 순간적 변화가 의식의 흐름이 아닌 무의식의 깜박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각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불연속적인 언어들인 노을, 새, 사랑의 아픔, 그리움 초불, 별들의 출근 형상이 담겨져있다. 그의 시는 석양이란 언어의 다양체를 구성하면서 사물자체의 의식을 넘어서서 표현하였다고 하겠다. 무의식으로 건져 올린 사물의 형상을 순간적이면서도 순수언어로 드러냈다는 점이 독특한 같다.   그의 시는 자기만의 신비한 시의 세계를 그려냈다. 또한 시에서 많은 이미지를 생성하고 언어를 분렬하면서도 련합시켜 새로운 언어령역을 개척하였다. 거이 행마다 횡적구성이 되였고 횡적으로 구성된 시구의 내용들은 윗 구절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시로 이루어져 신선한 예술작품으로 승화하였다고 볼 수 있을 같다. 시의 언어 사용은 평범한 것 같으나 평범하지 않고, 모호하면서도 선명한 사고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새로운 언어조합은 상식적인 언어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언어질서를 건립하게 되며 새로운 언어조합으로 된 이미지는 하나의 세계이고 우주이다. 리성호 시인은 변형의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다양한 시각으로, 예술적 감각으로 소화시켜 언어를 해체하고 조합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다양체의 전도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다양한 시로를 통해 시의 예술령역을 무한히 넓혀갈 수 있었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018.11.8 다  
7    사물들의 공감대를 부각한 시 댓글:  조회:525  추천:0  2018-05-25
                                            -                                                  --시의 산책2 /방순애    박문희 시인님은 늦갂이 시인입니다. 시를 창작하여 일년만에 시집을 낼 정도로 시론을 열독하고 시를 연구하여 시집 를 출간하였습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시를 시작하여 이같은 성과를 올릴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무한한 상상공간과 내면의 눈을 보았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박시인님의 시집출간을 축하드립니다.    하이퍼시 쓰기는 배치를 통한 시쓰기로써 한 사고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열어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좀적 글쓰기입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나면서 수목적인 나무와 달리 자신의 어떤 지점과 다른 지점을 련결 접속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형되고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령토화 되는 유목적 시쓰기입니다.   질 들뢰즈는 리좀의 원리1과 원리2에서 련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련결접속될 수 있고 또 련결접속 되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령토화의 운동들과 재령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끌어내고 교대하며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아래에 박문희 시인의 시 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사한 허공에 말뚝을 박고 처마 밑에 숨어든 달빛 소나타 물틈으로 샌 부나비 작은 불빛 잔등에 걸터앉아 부항 든 가슴의 낭만을 앵금으로 떨어낸다 바람과 다툰 노을 기와의 귀에 아픔을 호소하고 음달 안고 자던 꿈에서 깨며 꿀벌레 넋은 밤 노래 열창한다 뽕잎 포식한 밤 누에 하현달 흘린 미음 베고 잠들고 세월에 비틀린 고목 달빛 잔해로 허기 달랜다 시집
6    방순애의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보고 댓글:  조회:417  추천:0  2018-05-23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            -방순애의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보고                                     최흔 들어가는 말 필자는 흥분된 심정으로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본다.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하이퍼시가 싹이 트기 시작한것은 아마 2006년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려순희 황정인 심예란 허옥진 박장길 김견등 시인들이 하이퍼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하겠다. 하지만 하이퍼시를 써서 시집을 낸 시인들은 아직 없었다. 하이퍼시, 다선구조로 된 이시는 지금 유령마냥 일부시인들의 시상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하겠다. 다시점, 다초점,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하퍼시가 방순애의 머리를 삼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끼까지 방시인은 간고한 려정을 거쳐 [시간은 원이 되여]를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시인은 동시 240여수를 썼고 현대시60여수를 썼고 하이퍼시 170여수를 썼다. 오늘 시인은 하퍼시 170여수중에서 88수를 선재하여 시집을 내놓았다. 한수의 시가 그녀의 한방울의 피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88방울의 피가 오늘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도전이며 혁신이다. 하이퍼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묶은 [시간은 원이 되여]를 어떻게 읽을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나름대로 말하려고 한다 도약하는 이미지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는 도약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낸것이 하나의 특점이라고 할수 있겠다. 도약을 통하여 이미지들은 분렬도 조성하고 집성도 조성하면서 한수의 시를 이룩한다고 하겠다. 시인의 시는 산문적인 필치와 운문적인 필치 두가지 형태로 쓰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산문적인 필치로 쓴 시 한수를 보자 어떤 바위 스님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심에서 우는 천둥이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이 시는 시집의 첫수이다. 보는바와 같이 1련은 스님에 대하여 쓰고 2련에서는 구름에 대하여 쓰고 3련에서는 귀뿌리에 대하여 쓰고있다. 스님에서 구름에로 도약하고 구름에서 귀뿌리로 도약하면서 시는 마무리를 짓고있다. 련과 련사이가 큰 도약을 이룩하였을뿐만 아니라 한개련에서도 도약이 진행되고 있다. 1련에서 스님은 전설쪼각이 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가는가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줄거리가 나온다. 2련에서는 구름이 의인화되면서 여러가지 사실이 나오고 있고 3련에서는 작은 귀뿌리, 열쇠가진 사람들이 나오는가 하면 진펄에서 헤매는 발걸음이 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시가 대잡탕으로 이루어진 감이 난다. 이미지들이 아래와 같은 특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각련의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결이 되는것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고 이미지들이 각자 존재를 한다. 어느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의 결과이거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중심에 의하여 조직된것이 아니라 중심을 떠나고 있어서 탈중심, 무중심을 이룩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또 현실적인 사실인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되여있는 허구이며 가상현실이라고 말할수 있다. 운문으로 된 시 한수를 더보기로 하자 상아의 노래 재빛나는 바다의 아침 상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현기증나는 우수를 넓은 가슴에 대고 바순다 천개의 북이 물의 정적을 깨뜨리고 하늘속의 기류 바다의 조류를 률동키안에 주어담는다 [상아의 노래]전문이다. 의인화된 상아가 검은 옷을 입고 요트놀이를 한다[1련] 2련은 일년과는 관계없는 멍청한 후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3련은 천개의 북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가는것을 가히 도약이라고 하거나 뜀질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오던 시의 구성이랄가 구조랄가 하는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온 시는 단선구조이다. 단선구조는 하나의 사실을 중심으로 썼다. 하지만 이시에서는 상아, 멍청한 후렴 그리고 천개의 북이 나오고 있다. 이 세가지 이미지는 종적구성을 이를수 없는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는 횡적구성을 이루면서 병렬적으로 배렬되고 있다. 시인의 시적사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유의 공간이 확장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느한 초점에 매여있는 시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자유로운 상상의 산물의 태여남이며 움짐임으로써 시적상상의 자유분방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하이퍼시가 다시점 다초점으로 된다는것을 이러한 수법으로 쓴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하고 짚어보게 된다. 시인은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 공간 혹은 간격을 주어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 167쪽)는 조지p.란도의 말이 떠오르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겠다.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던것이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순애시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 방시인의 시는 어떤 시인가? 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시간은 원이 되여]하는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동상 96쪽) 원이 되여 굴러간다 원에 붙어 달리는 다리 그리고 원을 꺼꾸로 돌리는 개미들 보송보송한 구름이 땅에 내려올 때 갈고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방랑자들 모래위에 집을 짓고 텅빈 갑옷만 입고 너덜거린다 한치도 안되는 삶의 공간은 무대위에서 졸고있다 어두운 밤 잠자는 눈을 움직여본다 문자 없는 필기장에 글을 갈겨본다 환히 밝아진 벽빛을 남의 눈에 주지 말고 나에게 비춰보라 그러면 찌그러졌던 얼굴이 보름달로 변해간다 들끊는 대기는 게으른 손을 잡아준다 활기찬 발걸음은 앞을 재촉한다 -전문 이 시는 이미지 집성으로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토막들의 모임이다. 시인은 어떤 고정된 감정으로 시를 쓰고 있는것이 아니라 열린 상상으로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겠다. 시간,원, 다리, 개미, 구름, 갈고리,방랑자, 집, 갑옷, 무대, 구름, 필기장, 벽빛, 얼굴, 손, 발걸음 등등 사물들이 독자적인 이미지로 되여 한시속에서 움직인다 한수의 시라기보다는 한수의 환상곡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런 이미지들은 다 자기의 독립적인 토막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문덕수시인은 토막을 단위라고 함] 이 토막들은 또 시인의 배렬처럼 요렇게만 놓이는것이 없다, 누구든 자신의 상상에 의하여 바꾸어놓아도 별문제이다. 어느것이 시작 인지 어느것이 결말인지 분명치가 않다. 사실 제일 마지막행을 앞에 가져다 놓아도 무리가 아니다. 줄글로 된 2련시인데 2련을 1련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어느한 이미지나 다 앞에 있어도 되고 뒤에 있어도 되고 중간에 있어도 된다.우리가 대 사막의 가운데 서있다고 하자. 어디가 사막의 시작이고 어디가 사막이 끝인지 보이지 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바다속에 서있다고 하자 사면은 수평선이다 어디가 시작 이고 어디가 끝인지 누가 알랴. 하지만 사막은 사막대로 넘치고 바다는 바다대로 넘친다. 사막에 섰다면 선자리가 사막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되고, 바다에 섰다면 선자리가 바다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되였지만 하이퍼시의 이미지들은 독립적인 각자 존재이면서 한시에 집합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이러한 시를 이미지덩어리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련계없이 절대적인 고립으로만 존재하는것이 하나도 없다. 어떠한 사물이나 한가지 성분으로만 구성된 사물도 없다. 하이퍼시구성은 자연과 문화와 우리의 사유에 부합될뿐만 아니라 오늘의 글로벌시대와 컴퓨터시대에 부응하 는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시문학력사를 소급해보면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시인 SJ 생종페르스의 시도 이런 수법이였고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도 이러한 수법이였다. 21세기에 와서 한국의 시인들인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등 한국시단을 리드하고 있는 전위적인 많은 시인들의 시들도 이러하다. 그러니까 방순애시인은 로 우리시와 세계의 시 흐름을 접목시키고 있다겠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완전완미하다고 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폭력적 조합으로 된 이미지의 산재 방순애시의 이미지창출은 예측불가능이다. 한이미지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이미지와 이미지 링크도 느닷없이 새롭게도 돌발적으로 기이하고도 괴상하게 산출되고 있다겠다 하이퍼시의 언어로 명명해 본다면 알렉스이다. 여기서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불을 지펴 자기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위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는 마지막 시의 첫구다. 모순되는 언어들의 집합이다. 의미가 심장하다. 하늘이 언제는 돌을 품고있었는데 버렸다는것이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할 어떠한 과학가도 고대학자도 없을것이다. 시인이 창출한 이미지는 그로데스크하여 기이하고 괴상한 발상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하늘이 돌을 버렸다는것이다. 이 허구는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너무 폭력적으로 조합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아래 시구도 그렇다 갈대숲이 하얀 불을 켜고 겨울이면 자기를 지킨다고 한다. 갈대꽃을 불로 전의시켰음이 확연하다. 그런데 이 불은 불이 아니다. 불이면 갈대가 다 타버릴것이 아닌가. 모순 어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백한 손은 , 등등 이러한 이미지조합들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일상적인 사유로서는 맞지도 않는 말들의 조합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억지로 주어맞춘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이야 말로 시구를 새롭게 하고 시를 새롭게 하는 현대시의 데크놀로지 이 다. 다시는 펴지지 않는 잔디들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이 놓여있다 세상 파도는 닫혀진 막을 열고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 새로운 고뇌보따리는 새끼를 꼬고 밤거리 모퉁이를 지나 차도를 넘어 등에 착 달라붙는다 에서 심장이 톡톡거리며 멈출줄 모른다 대굴대굴 굴러가며 돌아가는 빛은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달빛에 용해된 몸은 도시로 들어간다 가고있는 발길에 말랑말랑한 물방울이 달린다 에서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있는 커다란 바위덩이위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있다 읽혀지는바와 같은 폭력적으로 창조된 이런 이미지들은 방순애시의 도처에 심심찮게 산재해 있다. .(에서) (에서) () 선형적인 언어에 대한 일탈과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창조로 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언어의 흐름을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문법을 파괴하는 빛이 찬란하다고 해야 하리라. 시는 언제나 낡은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떠올리는 언어의 화살을 날림일 것이다. 이런 새로운 언어화살을 날리는것이 없다면 시의 창의성을 무엇으로 말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언어로 된 이미지 창출이 많을수록 읽어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 를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시인만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없는 시들은 왕가물속의 풀잎처럼 나부라져 맥을 추지 못할것이다. 이러한것들은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은 현대시의 문턱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문턱을 넘어서야 현대시에 입문했다고 할수 있으며 하이퍼시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문턱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다. 언어연금술을 장악하면 이 문턱은 낮은것이요 언어연금술을 장악 하지 못하면 이 문턱은 높아지는것이다. 이 문턱은 다리가 길어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고 키가 커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고 시를 오래 썼다하여 절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다. 시적예술에 대한 피타는 노력과 새로운 탐구만이 이 문턱을 넘어서게 할것이다. 방순애시인은 이 문턱을 넘은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창의성이 강하고 다채롭고 상상이 포만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자유롭게 풀의 세포속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우주의 해나 달속으로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행운아일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가 걸어온 시문학의 길은 대개 이러하다고 할수 있겠다. 해방이 되여서부터 문화혁명까지 대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고, 개혁개방후에는 자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다겠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으며 우리의 시인들중 현실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시인들이 무아의 시문학을 추구하고 있다. 무아의 시를 추구하는것은 지금은 시내물처럼 조잘대지만 앞으로는 대하로 굽이 칠것이다 시내물처럼 조잘대고 있는 시가 하이퍼시가 아닐가.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는 하이퍼시로서 우리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는 시의 다선구조로 단선구조를 대체하였고, 객관이미지로 시인의 독백을 대체하였고, 사물을 변형 시키고 변현물의 움직임으로 설명과 해설을 대체하였고, 이미지의 편집자 자격으로 시에서의 자아를 축출하였다. 고정된 관념에서 일탈하여 무한한 상상을 펼치는 방순애의 시는 읽고 생각하던 시로부터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의 전의를 꾀한것 같다 애기가 금방 태여나면 눈도 뜨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나날이 자라고 커가면서 어른으로 되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지금은 갓 태 여난 한 아기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 아기는 눈눈을 뜰것이며 말을 할것이며 힘차게 달아다닐것이며 싱싱한 어른으로 자라날것이다. 방순애시인에게 아직도 과제가 없는것은 아니다. 시e는 추상성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때가 간혹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령혼에서 맛 보고(나비) 내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피부에 입력한다(마음의 그림) 몽상도 좋고 환상도 좋다 (감초의 그림자) 가는 가을날 잡고/가슴에 남은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그리움만 우두커니 세워놓고(서쪽달) 이러한 시구들은 형상성보다 추상성이 짙어서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희미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극복할바라고 생각한다. 시구는 사물운동의 세부를 섬세하게 그릴수록 그 힘이 더 강해진다. 추상적언어라렬의 멋진 말은 시에 손색을 주기가 일수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에 류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빈퉁재는 소리는 잘 나지만 속에 든것이 없는것과 같다. 쌀이 골독한 퉁재를 두드리면 소리는 잘 나지 않지만 속에는 쌀알이 가득 차있어 좋은것이다. 방순애시인은 또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더 다채롭게 쓰겠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방순애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하면서.                                                                                                         2013년 5월 8일 서재에서
박문희시집출간세미나 페회사 존경하는 여러분! 끝까지 성의를 갖고 진지하게 회의에 임해주신 여러분들의 덕분에 오늘의 박문희시집 출간세미나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함께 주체단위로 되여주신 도라지 잡지사, 송화강잡지사, 길림신문사, 기조발언을 하신 김룡운평론가님, 최룡관 명예회장님, 최삼룡평론가님, 그리고 자유발언을 하신 시인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자리를 함께해주신 연길TV,연변문학, 조글로,여러 매체 기자님들과 시인, 평론가들에게도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세미나에서 최룡관 시인은  박문희 시집은 첫째로 탑구성 허물기. 둘째로 나열적 횡적구성, 세째로 성엮깨기 등 세가지 방면으로 살펴보면서 시집의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김룡운 평론가는 박문희시인은 시창작과 리론을 병진하는 시인이라고 평하면서 상상과 공상을 결합시키는 판다지 관점으로 몇수의 시를 해부해보았습니다. 강시나 시인은 박문희의 시 '우주의 방언' 을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라는 관점으로 평하면서 A와 B 구조를 론하였고, 강려 시인은 박문희 시 '봉황새'가 엉뚱한 약탕관이라고 해석하면서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방순애 시인은 박문희의 시 '공감대'를 리좀으로 해석하면서 사물의 공감대를 부각한 시라고 하였고 김현순 시인은 박문희의 시 '조화', '핸드폰' '세상' 등 세수로써 하이퍼시의 상징성을 립체적으로 규명해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두분 평론가님과 자유발언을 하신 시인여러분이 있어서 오늘 세미나가 더 뜻깊은 것 같습니다. 박문의 시집의 출간세미나를 보면 시의 본연으로부터 시를 평한것이 특점이였고, 시를 쓰는 시인들이 시를 평하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시인이 시를 평하는 길로 힘차게 걸어나갈 것입니다. 다음 페회의 자리를 빌어 연변동북아문학에술연구회에 대하여 간추려 말씀올리겠습니다. 동북아문화예술연구회는 2012년에 설립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7년째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큰 도전에 직면해있었습니다. 우리가 애로들을 하나하나 극복하고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연구하는 행열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최룡관명예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회원님들의 피타는 노력과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박문희시집이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축도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번 박문희시인님의 시집까지 5권의 하이퍼시집을 출간하였고 연구회의 회지 "비비"를 비롯한 내부 문고를 7기까지 출간하였습니다. 도라지잡지사, 송화강잡지사와 연변일보, 연변문학,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등 매체들은 해마다 우리 회원들의 하이퍼시를 많이 실어주었습니다 .특히 도라지잡지, 송화강잡지, 연변일보에서는 우리의 하이퍼시 전문란을 해주어 너무너무 감사하였습니다. 한국 "시문학"에서도 3년간 우리의 하이퍼시를 전문란으로 발표해주었고 한국 "자유문학"에서는 최룡관시인님의 "이미지 창작론"과 "하이퍼시 창작론"을 련재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순애시인의 "황금률 하이퍼시" 10수를 특선으로 실어주었을 뿐만아니라 우리 회원들의 하이퍼시 물론 민조시를 많이 실어주었습니다. 한국 "동방문학", "조선문학"에서도 우리회원들의 하이퍼시를 실어주었습니다. 이렇게 국내외 신문,잡지 등 매체에서 서슴없이 우리의 하이퍼시를 실어주어 우리단체가 시를 연구하는데 많은 힘이 되여주었습니다.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연구하면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성원들은 거이 모두가 아래와 같은 책들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조지 p 란도의"하이퍼텍스트 3.0", 자크 데리다의 "해체",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 력사", 테렌스 호옥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 니콜로스 로인의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 ",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 0도",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과 꿈", "몽상의 시학", 질 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 아리스토 텔게스의 "시학" 등 서구의 위대한 저서들을 탐독하였고, 일본의 우치다 다츠루의 "푸코,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한국의 문덕수. 심상운. 김기덕, 박진환, 이선 등등 현인들의 현대시와 하이퍼시에 대한 리론들을 통독하였습니다. 중국 고전의 유명한 문학평론집 "문심조룡"을 독파하였고 적지 않는 회원들이 주역, 노자, 공자 , 장자, 맹자등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하여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실재, 일상어와 시어, 기억과 생성, 단선과 다선 등등 여러방면에서 나름대로 깨침을 얻었고, 모든 사물은 각자 존재이면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모든 언어는 자유로 결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이퍼시작에서 커다란 성적을 따냈습니다. 하지만 연구회에서 중견시인이거나 시작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리신 일부분 회원들이 퇴회하는 진통도 겪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현재 연구회에는 20대 30대 회원이 7명이나 되고 그들중에는 석사,박사들도 있습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 연구회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2,3차의 시연구회를 가지고 두달에 한번씩 시살롱도 가집니다. 윤동주문학상과 리상화문학상을 운영하면서 해마다 우수한 시들을 평선하여 2,3명 시인들에게 시상하고 있습니다. 목하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인터넷문학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 시인도 부단히 사상을 해방하고 기성관념에서 떠나 시창작에 정열을 몰부어야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으며 장래에도 가치있는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 시인들이 많은 시를 창작하여 국내외에 발표할 수 있고 하이퍼시집 5권을 출간하고 연구회 문고 7기까지 출간할 수 있은 것은 모두 이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실적들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하여, 시도 쓰고 평론도 쓰고 하이퍼동시도 쓰면서 시의 광도와 심도를 더 넓혀가면서 실제적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간 연구회 발전을 위해 물심량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주문련, 주민정국 관계자들, 문학상제정위원회들과,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올립니다. 계속해서 저희 연구회의 발전을 지켜봐 주시고 또한 아낌없는 귀한 조언은 물론 많은 성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장 방순애                                                    2018.4.29
4    탈령토화 댓글:  조회:1090  추천:2  2017-10-16
                                                                          --시의 산책1   탈령토화, 혼자서는 결코 탈령토화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두개 이상의 사물이 있어야 합니다. 탈령토화를 거친 여러개 령토는 재령토화됩니다. 재령토화된 것이 새로운 풍경이 되는데 그것이 집합을 이루어 한수의 하이퍼시가 됩니다.   질 들뢰즈는“탈령토화의 최대치는 때로는 내용의 특질로부터 오고 때로는 표현의 특질로부터 온다. 이 특질들은 서로 상대방과 관련할 때 탈령토화라고 하는데 한쪽의 특질이 다른쪽의 특질로 데리고 가서 자기 자신의 력량으로 고양시킨다” (p272)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느끼는 감정, 관념을 그대로 쓰는 시가 있는 반면에 하이퍼시는 한사물의 특질로부터 다른 특질로 이미지를 발전시키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탈령토화하여 비현실적인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탈령토화에서 중요한 것은 링크입니다. 링크에서 초링크, 그것들이 서로 이끌며 다시각, 다층차적인 예술적 이미지를 창출합니다.   자유로 결합되는 언어는 시의 자률성을 제공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것은 의미로부터 벗어나고 현실로부터 벗어나면서 또 하나의 탈령토화된 현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이퍼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기능을 령활하게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탈령토화된 내용과 가장 탈령토화된 표현을 다시 가져와 결합시키면 사물과 언어 사이에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그 풍경의 특징은 긍정적인 탈령토화의 양자들을 따라 효과적으로 다양체가 창조되면서 리좀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제3회 리상화문학상 수상작품인 정두민의 시 ”련결고리”를 살펴봅시다 련결고리 려명의 피를 뽑아 안테나 맑은 날씨를 예보한다/1 펌프로 길어올린 흑토의 숨결로 움튼 라체의 귀저기를 갈아주는 바람/2 날짐승 깃소리 질렬대 세우려고 종달새 목청을 대패질 하던 계곡은 하프 튕귀며 흐름의 선률을 편집한다/3 꽃사슴에서 탈출한 흰점의 집합들 한토막 빛살의 배를 따 먹고는 천수관음의 청궁을 유람한다/4 진달래꽃 지키는 피뢰침에 아득히 줄행랑 놓는 번개의 마른 웨침/5 변성수술 거절한 민들레 향기가 담벽을 허물어 하늘을 늘군다 /6   위의 시는 정두민 시인이 로서 봄을 노래한 전문입니다. 제목을 주목하여 봅시다. 련결고리는 무엇을 련결할가 하는 사색의 고리를 몰고 가는 제목입니다. 수선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시에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시의 제목이 우선 한개의 이미지이며 령토입니다. 시인은 이 령토가 어떤 여섯가지 령토로 분활되였는가를 쓰고 있습니다. “련결고리”라는 이 제목이 어떻게 탈령토화와 재령토화가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이른 새벽을 보고 안테나가 하루의 날씨를 말합니다. 제목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상관물입니다. 시적 내용은 다른것으로 되여 이미지가 원 령토를 떠나며 탈령토화를 시도합니다. 이것을 첫단위라고 할 수 있고 첫고리라고 할 수 있을 같습니다. 시인은 첫고리에 머물지 않고 다음 고리를 설계하였습니다. 그것이 이미지의 둘째 단위입니다. 여기서 안테나는 아나운서의 대용으로 환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펌프로 이라고 하는데 는 새싹의 은어이고 는 겨울의 남긴 잔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어가 자유로이 부여되면서 봄이 다가옴을 제시합니다. 탈령토화로써 한쪽의 특질로부터 다음쪽의 특질로 이끌어가 상대편의 문턱을 넘어가게 합니다.   세째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절대적인 탈령토화의 선을 추적합니다. 현실로 보면 은 어처구니 없는 어구의 련결입니다. 하지만 시의 특징으로부터 보면 언어에서 언어를 떠나 새로운 이미지안에서 멈추고 또 그곳에서 탈령토화란 중개물을 거쳐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것입니다.   네째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이미지들입니다. 이미지가 현실을 떠나는 현대시의 특징을 잘 리용하여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속에서 벗어나 말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상상의 공간에서 재령토화를 구성합니다.   다섯번째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허구적이 포인트를 가진 무의식의 반영입니다. 하이퍼시의 이미지가 인간을 떠난다는 특징을 살려 일상적인 인간의 사상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새로운 사물로 변형시켜 비현실적인 것을 촉구합니다. 진달래꽃 지키는 피뢰침은 꽃샘을 이기는 진달래의 강의성을 이야기하는것으로써 자연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지를 자연물들의 모순과 조화로 탈령토화의 특점을 살려보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단위의 중심어는 입니다. 아주 적고 세부적인 언어들의 련결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시인의 상상력이 암시의 예술을 리용하여 자기만의 세상을 개척합니다. 는 신비하고 의미심장한 이미지입니다. 이는 겨울에 대한 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초적인 것을 제창하여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됩니다. 시각과 후각이 혼연일체를 이룬 공감각적인 탈령토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두민시인의 시는 각각의 이미지가 독립적이고 각기 다른 탈령토화입니다, 링크와 초링크를 잘 소화하였습니다. 제목이 한개 령토라면 6가지 탈령토화로부터 재령토화된 표현으로 시를 구성하였습니다. 사물이자 언어이고 언어이자 사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모아 다양체를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상상력과 정서의 조화를 통하여 하이퍼시의 초링크 기능을 충분히 리용했고 탈령토화 특징을 잘 리용하여 대담하게 새로운 이미지들을 창출하여 냈습니다.   세상사물의 안전, 평온, 평행은 오랜 시간을 걸치면 결코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습니다. 사물은 자연속의 부단한 변화속에서 변화합니다. 시속의 사물도 탈령토화되고 다시 재령토화되며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기존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변형시키고 객관화하는 데는 깊은 상상이 필수적입니다. 탈령토화는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재령토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련결고리입니다. 탈령토화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가는 길이기도 하고 한사물의 다른 사물로 변하는 다리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만질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이 길과 다리는 시인의 상상의 과정으로서 무의식속에서 진행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方顺爱  2017.10.11
3    산다는 것 댓글:  조회:1309  추천:1  2016-12-23
   어느덧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다. 격변하는 시대라 그에 발맞춰 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뛰다보니 어느새 일년이 다 지나가 버렸다.    사람은 가끔 스스로 뒤돌아 보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디까지 걸어왔으며 어느곳에 어떤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자기의 삶을 지배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년말이면 항상 달고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일년 내내 어수선하고 흐트러지던 발걸음을 다잡고 곧바르게 걸어가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롭움과 고독, 원망과 분노, 슬품과 괴로움을 하나둘씩 가슴속에서 부리우고 희망과 행복을 향해 자아계발을 해야 한다.    새벽별을 안고 자신을 읽다보면 나 자신이 자기 인생의 예술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은 일분일초가 지나갈 때마다 인생의 백지장에 그리는 자화상이다. 그 예술작품이 아름답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작품이 되려면 내가 매일 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어떤일을 하던 관계없다. 그러나 하는 일에 충성을 다 했느냐? 그 일을 하는데 얼마만큼 정열을 쏟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모든 일에 대한 진심, 사람에 대한 진심에는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다. 그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자체만은 똑 같다. 남에게 신금을 울릴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것은 모든 일에 대한 진심이다.    세상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새해가 되면 삶의 터전을 잘  닦으려는 욕심이 더 커진다. 시대의 변화가 발바른 변화를 바란다. 바로 행동에 들어가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앉은 자세에서 그저 말로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 행동에 옮기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잡초에 파뭍혀버린 오솔길에서 삶의 무상함을 볼 수 있듯이 항상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내가 할 일에 정력을 몰붓다 보면 가치가 있는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라태함과 싸워야 한다. 고독을 이겨내야 한다. 뿌옇게 보이는 눈을 싹싹 비벼닦고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도전을 해야 한다. 늘 새로운 의식으로 세상과 같이해야 한다. 그러면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고 도시에서도 향토맛을 느낄 수 있다.    지난해에 꼴지가 되였다 해도 주저할 게 없다. 꼴지는 나로 하여금 새로 시작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사회와 자연과 남들과의 조화로운 만남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                                                                          길림신문 2016-12-22
2    문학의 꿈 댓글:  조회:835  추천:0  2015-09-17
                                                           누가 나에게 경찰직을 하던 사람이 무슨 시를 쓸 줄 아느냐  한다면 나는 노력하는 사람과 탐구하는 자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어떤시를 쓰는가고 묻는다면 이미지 돌담을 쌓는다고 할 것이다.   우주와 산천, 그리고 심리세계를 누비며 구미에 맞는 돌, 좋은 돌들을 찾아 기초로부터 차곡차곡 쌓아볼 것이다. 아직 기초나 겨우 쌓는 처지이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때묻고 거친 돌들을 싹싹 문질러 닦고 터밭의 모서리거나 오솔길 주변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머리를 내민 돌들을 주어 보아야 하고 모양도 다르고 소리도 다른 돌들을 캐내려고 쉼없이 발걸음 재촉해야  한다.     신선한 시어들을 모아 매끈한 돌담을 쌓는 것이 나의 문학의 꿈이다. 그 고된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을 들어 하나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1    방순애 황금률하이퍼시 서언 - 최룡관 댓글:  조회:774  추천:0  2015-09-09
방순애 황금률하이퍼시 서언(클릭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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