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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주 부련회 제1임 주임 김찬해의 생애사를 통해 본 조선족 녀성해방 려정
2021년 01월 26일 08시 39분  조회:1207  추천:0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연변주 부련회 제1임 주임 김찬해의 생애사를 통해 본 조선족 녀성해방 려정
방미화

김찬해(1905-1972)는 중국 조선족혁명가이며 연변주 부련회 제1임 주임이며 연변 녀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족녀성해방의 선구자 김찬해의 생애와 항일활동과정, 연변으로의 이주와 녀성해방사업과정을 통해 녀성해방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김찬해는 1905년 4월 21일 경상남도 김해음 지내동 김해 김씨 부자집 장녀로 태여났으며 본명은 김필수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공부 성적이 마을에서 남자애들 이상으로 우수했던 김찬해는 단지 녀자라는 리유로 서당에서 공부를 할 수 없었으며 어머니를 도와 가사로동에 종사해야 했다. 그는 봉건사상의 속박하에 가사로동과 매서운 시집살이에 얽매여야 하는 녀성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불평등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인식은 그를 끝내는 서울로 가출하도록 추동했다.

1922년 가을, 서울의 사촌오빠 집으로 가출한 뒤, 김찬해는 오빠의 지지하에 서울 동덕녀자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공부에 대한 욕망이 강한 찬해는 동덕녀자대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을 하려고 했으나, 혼자의 힘으로 진학이 어렵게 되자 1926년 서울동덕녀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당시 학교에 재직 중인 권태희라는 선생님한테서 조선독립사상, 녀성해방과 사회주의사상을 전수받았고 녀성동지회, 녀자청년동맹 등 단체에 가입했다. 그 후에 또 '조선공산주의청년회'라는 비밀조직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사상을 더한층 접하게 되며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여 비밀임무를 잘 완수해냈다. 이에 서울지역 책임자 고광수는 김찬해를 의식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의 일원으로 양성하기에 노력했으며, 따라서 김찬해는 쏘련의 사회주의혁명에 동조하게 됨과 동시에 조선독립혁명의 녀성지하공작자로 성장했다.

1928년 10월, 김찬해는 조선공산주의청년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이하 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되였다. 동방대학은 김찬해가 반일투사로 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이였는데 바로 이 곳에서 그는 혁명가의 길에 들어섰다. 동방대학에 입학한 김찬해는 맑스-레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으며 특히 10월혁명을 통해 인민들이 봉건사상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녀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사회주의일원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과 똑같은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혁명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인생의 혁명동반자 림민호를 만나게 된다. 동방대학에 입한한 지 2년이 지난 1930년 김찬해와 림민호는 백년가약을 맺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1932년 5월, 4년간의 동방대학 공부를 마치고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어느 휴양소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국제로동운동 연구를 하고 지하사업에 관한 지식과 재능을 익히던 도중, 같은 해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조선의 함흠과 흥남 지구에 가서 홍색로동조합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였다. 이에 림민호가 먼저 모스크바를 떠나 김창섭이라는 가명으로 조선 함흥에 가서 활동하게 되였고, 가을 쯤, 김찬해도 아들을 모스크바 국제고아원에 맡기고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반일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1935년 1월, 김찬해는 본격적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려고 조선 함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10월혁명 선전삐라산포사건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원산운수로동자 조직이 검거되여 자신의 신분이 폭로된 것을 모르고 있었고 결국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였다. 함흥에서 3년 반의 도형을 받은 그는 감옥에서도 감옥생활개선 투쟁을 벌이고 외부동지들과 련락하여 비밀정신을 전달하면서 옥중투쟁을 엄밀히 진행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 후 동방대학에서의 학습경력으로 인해 로씨야어에 능숙한 김찬해 부부는 돈화에서 쏘련 홍군의 통역, 련락원으로 일하면서 그들을 협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 부대의 무장해제, 치안유지, 토비숙청 등 사업에 종사했다. 1945년 9월 20일, 돈화 영화관에서 돈화현 민주동맹 성립을 선포하고 림민호가 위원장으로, 김찬해가 민주동맹산하의 부녀부 부장으로 임명되였다. 민주동맹 부녀부 부장으로 당선된 김찬해는 광범한 녀성들을 동원하여 국민당토비들과 투쟁했고 또 돈화 부녀부의 명의로 조선전쟁 전선지원 집회를 열어 방직운동을 진행했다. 김찬해의 령솔하에 돈화 녀성들은 군복을 짓고 헝겊신을 만들어 전선에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담가대, 구호대를 조직하여 부상병을 이송하여 간호했으며, 전쟁의 나날에 돈화의 녀성들은 남편을 대신해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을 복구시켰다.

1949년 2월, 연변사범학교에서 사업중이였던 김찬해는 연변지위 조직부로부터 부녀사업을 책임지고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1949년 12월 연변지방사업위원회 부녀사업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였다. 그리고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성립에 잇달아 9월15일부터 20일까지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차 부녀대표대회가 연길에서 거행되였으며 대회에서는 정식으로 연변조선족자치구 민주부련련합회를 성립했다. 대회에서는 김찬해를 제1차 부녀련합회 집행위원으로 선거했으며 그 이후부터 그는 연변의 첫 부련회 주임으로 녀성해방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갔다.

부련회 주임으로 재직하는 동안 김찬해는 우선, 남녀평등의 조건이 문화라고 지적하면서 문명퇴치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는 직접 혁명가요를 배워주면서 녀성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의식을 제고시켰다. 결과 녀성들이 가마목에서 글을 읽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곳곳에 야학교, 동학반이 일떠섰다. 그리고 문화사업이 나라건설과 녀성해방사업의 근본임을 지적하면서 동학반을 농민학교로 건설하는 일을 적극 지지했다.

다음으로, 문명퇴치와 함께 남녀평등과 녀성해방사업도 김찬해 녀성사업의 중요한 부분이였다. 김찬해는 남존녀비 사상, 시부모의 학대, 가무전담 등을 녀자에 대한 불평등한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즉 온 하루 가사로동에 시달리지만 남자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녀자들이 바삐 보내는 것을 빤히 보기만 하는 것은 녀자에 대한 불평등이라고 인식했다. 김찬해는 당시 봉건사상의 영향하에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받으면서 살아왔던 녀성들을 대상으로 회의, 강연 등을 조직하여 녀성해방에 대해 선전했다. 그와 동시에 례절교양에도 중시를 돌렸다. 녀성으로서 가정에서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잘 공대하고 아이를 잘 기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은 학교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훌륭한 녀성이 있는 집은 훌륭한 학교에 다니는 것과 흡사하다고 선전했다.

그 다음으로, 김찬해는 조선족 녀성들도 쏘련 녀성들과 마찬가지로 당과 정부의 령도 밑에 고향건설에 이바지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에 쏘련 녀성들을 따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조선족 녀성들은 너도나도 사회주의건설에 뛰여들었다. 당시 농업생산뿐만 아니라 공업건설에 참가하는 녀성로동자들도 해마다 증가되였다.

마지막으로 녀성해방의 필수조건으로 녀성아동사업도 대단히 중시했다. 무엇보다도 해산할 때 의료위생과 보건이 큰 문제였다. 의료조건이 락후하다보니 집에서 해산하는 녀성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녀성들 중에는 난산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때문에 부련회에서는 조산사훈련반과 보모훈련반을 꾸려 조산사와 보육간부를 양성했으며 낡은 해산방법을 타파하고 새로운 해산방법을 선전했다. 그리고 임신부의 산전, 산후 보양에 대해서도 잘 료해하도록 했다. 그외에도 아이 돌봄도 녀성들을 해방시킴에 있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생산로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진출을 실현하고자 해도 어린애를 돌볼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였다. 어떤 녀성들은 아이를 업고 논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했는데 어린애를 업고 김을 매다보니 생산효률도 높지 못하고 또 어린애의 건강에도 해가 되였다. 어떤 때에는 논머리에 아이를 재워놓고 일을 하다가 미처 돌보지 못한 사이 어린애가 논도랑에 빠지는 소동이 일어난다든지 어린 아이를 집에 두고 나갔다가 아이의 불장난 때문에 화재를 일으키는 등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만이 녀성들이 실제로 가사로동에서 해탈되여 사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부련회에서 김찬해가 추진한 녀성해방활동들은 조선족 녀성들이 일정한 정도에서 녀성해방을 실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례하면, 문명퇴치, 생산로동을 통한 경제적 지위 향상, 녀성보건사업, 보육원 건설 등을 통해 녀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향상되였으며 녀성들은 기존의 관습이나 관념에서 벗어나면서 일정한 정도에서 녀성해방을 실현했다.

우선, 녀성들은 교육을 통해 문맹에서 벗어났으며 교사 등 직업을 통해 사회적 진출을 실현했다. 1957년 연변주 부련회 사업보고에 의하면, 문맹에서 벗어난 녀성이 60%를 차지해 신문, 잡지를 볼 수 있게 되였고 직접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였다. 다음으로,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1949년, 연변에는 고무, 방직, 농기, 제조, 석탄, 도자기, 가구 등 지방 공업이 64개가 있었으며 108개 수공업생산합작사가 있었다. 1949년도에는 이러한 공장에 녀직원이 902명(상업 부문 포함)이였으나 1956년에 이르러서는 6,479명에 달했으며 그중 683명이 선진생산자와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다. 그 다음으로, 녀성보건사업, 탁아소 및 보육원이 건설됨에 따라 녀성들은 몸, 양육, 가사 등 녀성 역할에서 일정하게 벗어나 자유롭게 사회적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되였다.

이와 같이 김찬해가 부련회에서 녀성해방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조선족 녀성들은 가정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며 녀교사 등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켰다. 그러한 의미에서 녀성들은 일정한 정도에서 녀성해방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김찬해는 반일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반일투사로서의 강인함과 완강함으로 기존의 녀성성, 성역할 등을 해체했으며,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하여 반일투사로서의 정체성을 생성했다. 뿐만 아니라 첫 부련회 주임으로서 당선된 이후 녀성해방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사회적 진출을 남녀평등의 가장 큰 조건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활동 및 지위에 큰 중시를 돌렸다. 반일혁명 및 녀성해방사업 과정에서 김찬해는 새로운 젠더 정체성의 수행을 통해 해방과 자유의 틈을 찾아가고자 했으며, 연변 녀성들을 이끌고 평등한 세상을 구축하기에 노력했다. 녀성해방의 가능성은 바로 이와 같은 기존의 성 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성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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