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zhengyinwenahua 블로그홈 | 로그인
정음문화칼럼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

천진지역 조선인의 력사와 조선족사회의 현황(전월매)
2018년 06월 29일 10시 48분  조회:2105  추천:0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천진은 중국 륙상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 오래동안 수도 북경의 문호역할을 해왔다. 수나라의 운하개발로부터 천진의 중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해 당나라 이후에는 강남의 곡식과 비단을 북방으로 운송하는 수륙교통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1860년, 천진이 개항하자 서양렬강은 앞다투어 조계를 설립했고 1902년 직례총독아문이 천진으로 이전된 후 중국북방 개항의 최전방으로서 중국의 양무운동을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천진은 우리 나라와 각국 간 교역의 관문이자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조선반도와 천진은 청나라 초기부터 근현대, 당대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와 교류가 있었다.

천진은 청나라 초기에는 조선에서 건너와 관직을 맡은 관원이나 장사를 하는 상인, 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였고 근대에는 조선인애국자들이 활동하는 항일독립운동의 관문이였으며 당대에는 조선족공동체사회가 새롭게 형성되여있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청나라 초기에 조선인 안씨부자(安氏父子)가 일가의 재력으로 천진의 상징인 성벽을 쌓아올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천진이란 도시 명칭은 ‘천자가 지나는 나루터’(天子渡津)란 뜻으로 명나라 황제 주체가 고하(沽河)를 건느면서 출병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위찬탈에 성공하여 1404년 12월 23일 영락제 2년에 “성을 쌓고 강을 만드는데 이름을 천진이라 하사한다”는 유지를 내리면서 생긴 것이다. 천진은 성을 쌓고 방위를 실시하여 군사요충지가 되여 천진위라 불리긴 했지만 흙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매년 홍수가 지면 허물어져서 물란리를 일으켰고 도시에 재난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옹정(雍正)황제 3년 즉 1725년에 천진은 대홍수가 들어 천진도성 전체가 물에 잠겼다. 그해 9월, 천진에서 소금장사를 하여 대단한 부를 축적한 조선상인 안상의(安尙義, 또는 安尙仁)와 그의 아들 안기(安岐) 부자는 자신들이 새로 성벽을 쌓겠다고 조정에 신청하였고 이는 황제의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어가를 받은 후 자신들의 재력과 로동력을 전부 동원해 한편으로는 낡은 성벽을 허물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고 튼튼한 새 성벽을 쌓아갔다. 6년간 이어지는 성벽 쌓는 고된 로동과 피로로 아버지 안상의는 세상을 떠났고 안기의 형 안도(安圖)는 조정의 년갱요(年更尧),룽커둬(隆科多) 사건에 련루되여 사형당하였다. 가족에 닥쳐온 일련의 불행과 어려움 속에서 안기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새롭고도 견고한 푸른 기와로 된 성벽을 완성하였다. 황제는 친히 성벽의 동문을 '진해(鎭海)'로 남문은 '귀극(歸極)', 북문은 '대하(帶河)', 서문은 '위안(衛安)'으로 특별히 안자를 넣어 이들 부자를 장려하였다. 현재 천진 옛거리에는 '위안리(衛安里)' 혹은 '위안남리(衛安南里)'의 지명이 남아있다. 청나라시기 전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여러 부자들이 재력을 합하여 한 것이지 안씨부자처럼 일가의 재산을 쏟아부어 거대한 공사를 완성한 것은 유일무일하다. 

그 뿐만 아니라 안씨부자는 자연재해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굶어죽는 모습을 보고 죽공장을 세워 매일 대량의 죽을 끓여 무료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대신이며 저명한 시인인 전진군(錢陳群)은 <안기 50수서(安岐 50壽序)>라는 글에서 "안기는 6년간의 공을 들여 거대한 공사를 완성하였는데 은 십만을 썼고 가난한 백성 수천인을 살려냈다"고 썼다. <천진현지(縣志)> 권21 <안상의전>에서도 안씨가문이 남문에 죽공장을 세워 10여년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랬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안기는 또한 력대 서예와 그림의 수집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수집한 국보급 수집품들은 북경국가박물관, 천진박물관, 대만고궁박물원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근대에 천진은 양무운동을 이끈 도시로서 무기제조기지이기도 하다. 1881년, 조선은 천진에 령선사를 파견해 근대 무기체제와 제조법을 배우도록 하는 중국식 개화를 추진하였다. 1894년, 조선의 종속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는 종결되고 대등한 근대적 관계가 맺어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계는 1910년 망국으로 곧 단절되였다. 이후 천진은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집결해 대일투쟁을 전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많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항일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특히 천진은 국제교류가 활발해 중국의 근대화를 이끈 도시로, 학교가 많아 류학하기 좋았고 서양렬강의 조계지를 리용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기에 많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천진에서 활동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천진조선족은 조선반도로 귀환하지 않고 남은 일부 조선인과 일자리 전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일자리를 찾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였다.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동북삼성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은 농촌을 떠나 대거 해외나 연해도시로 진출하였다. 1992년, 중한수교 이후 삼성, 엘지, 현대, 대우, 금호 등 한국대기업들이 천진으로 진출함과 더불어 만여 명의 조선족들이 이런 회사들에 취직하면서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하여 조선족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2010년, 제6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천진조선족 호적인구는 18,464명인데 2018년 현재 호적이 없는 상주인구까지 합치면 천진조선족인구는 약 5~6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진조선족사회는 1988년 11월에 민족사무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정식 성립된 천진조선족친목회(일명 련의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천진조선족친목회는 1993년 11월에 <천진시 사회단체 법인등록관리 잠정규정>에 근거하여 법인사회단체로 정식 등록되여 일체 행사는 법적관리궤도로 진입하였다. 친목회산하 소속협회에는 천진조선족상회(2006), 천진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천진조선족로인협회(1995), 천진조선족배구협회, 천진조선족축구협회(2006), 천진조선족녀성협회(2016), 천진조선족산악회(2016) 등 단체들이 있다. 그리고 천진조선족상회 산하에는 골프협회, 요식업회(2015)와 천진조선족주말학교(2016)가 있다. 그외에도 천진조선족자녀교육사랑회(2012), 메이쟝정음우리말학교(2017), 벌리향우회, 성화배구팀 등이 있다.

천진조선족사회는 매년마다 각종 민족문화행사들이 펼친다. 전반 천진조선족사회의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규모가 가장 큰 민족문화행사로는 2년에 한번씩 주최하는 단오운동축제, 천진시조선족노래자랑대회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도 천진조선족로인대잔치, 6.1어린이축제, 각 협회에서 정기, 비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화행사들이 있다. 

이러한 문화행사들은 조선족공동체의 성원들이 자기 확인과 자기 인식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식을 고양하고 사회적 결속력 강화와 통합을 도모하며 무엇보다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사회적 기능과 전통문화교육의 교양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끝으로 천진조선족사회가 존재하는 문제점 가운데서 정보의 부진, 특색의 부진을 말하고자 한다. 정보부진은 언론매체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언론매체는 민족사회정보의 교두보이고 교류장의 활력소이다. 천진조선족사회의 경우, 언론매체의 부재는 민족사회의 응집력, 정보의 홍보력을 약화시킨다. 북경이나 동북삼성 조선어언론매체를 리용한 천진조선족사회 홍보가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하나는 특색의 부진인데 천진조선족으로서의 특색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천진이란 지정학적 특색을 리용한 특색 있는 천진조선족브랜드의 발굴과 창출, 경제활성화를 위한 콘텐츠의 모색, 브랜드로서의 문화 조성 등이 필요하다. 안씨부자의 이야기 등은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천진조선족만이 아닌 중국조선족이 공동으로 모색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인민넷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62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02 한국에서 소담히 핀 진달래꽃 여덟송이(최유학) 2018-12-12 0 2158
101 한국에서 소담히 핀 진달래꽃 여덟송이(최유학) 2018-12-12 4 2076
100 해외에서 바라보는 개혁개방 40주년(예동근) 2018-11-23 0 2043
99 이우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안성호) 2018-11-07 0 2075
98 소비 속에 숨어있는 경기의 변화(리천국) 2018-10-24 0 2078
97 '개체화'에서 신형의 '합작경제'로(박광성) 2018-10-16 2 3374
96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권진홍) 2018-09-19 2 4027
95 인생에도 작전타임이 필요하다(김부용) 2018-09-04 1 2128
94 [리성일]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1) 2018-08-14 3 2469
93 한국의 핀테크 모바일결제방식은 왜 중국에 뒤쳐졌는가? 2018-08-01 1 2041
92 정보화 시대와 평생학습사회(최선향) 2018-07-10 0 1920
91 천진지역 조선인의 력사와 조선족사회의 현황(전월매) 2018-06-29 0 2105
90 조선족마을의 앞날은?(허명철) 2018-06-13 1 2054
89 녀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녀성 항일운동(방미화) 2018-05-31 0 2062
88 김치를 못먹으면 조선족이 아닌가?!(허연화) 2018-05-16 1 2588
87 우리네 부모님들과 황혼의 재혼이야기(리화) 2018-05-03 3 1972
86 연변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 변화(김화선) 2018-04-17 0 2389
85 색채의 경제학-눈(雪)의 자원 활성화에 대한 소고(예동근) 2018-04-03 0 1777
84 항주 조선족사회의 과거와 현황(안성호) 2018-03-27 1 1950
83 현단계 중국경제에 대한 단상 2018-02-27 0 1830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