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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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2006년 05월 21일 00시 00분  조회:3760  추천:47  작성자: 우상렬
짝사랑

사춘기, 짝사랑의 환타지계절.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발광나는 계절. 그러면서 사랑은 신비에 쌓인 두려운 것. 그래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이가 없는 계절. 바로 이때 우리는 짝사랑에 빠진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혼을 절반 빼앗는 나날들... 그런데 이 짝사랑은 자기주제를 몰각한 一廂情願의 기껏 부픈 기대치에 놀아나는 환타지의 사랑.

나는 사춘기 때 조선영화『꽃파는 처녀』의 꽃분이를 짝사랑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사랑 사랑 내 사랑-‘꽃파는 처녀’. 영화관 게시판에 나붙은 꽃바구니를 들고 은근히 웃고 있는 대형 포스터의 꽃분이를 보는 것이 집과 학교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최대의 낙. 거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 그러다가 빗물에 색이 바라진 꽃분이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아려났는지. 꽃분이에 대한 짝사랑은 결국 이제 크면 꼭 꽃분이 같은 처녀한테 장가가리하고 막을 내렸다. 물론 내가 장가를 갈 때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꽃분이하고 영 다른 여자한테 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까맣게 잊어진 듯한 꽃분이에 대한 짝사랑이 언젠가 또 한번 나를 들끓게 하며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내가 조선에 갔을 때다. 어느 공식적인 행사에 갔다가 바로 꽃분이-꽃분이배역을 한 홍영희를 지척에서 우연히 만났다. 새물새물 웃는 모습은 뛸 데 없는 꽃분이. 순간 나의 피는 끓어올랐다. 나의 젊음의 정열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다. 나는 막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를 찾아 헤맸습니다. 나의 여신이여! 나는 이렇게 부르짖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와 눈길이 부딪치는 순간 나는 그만 온 몸이 굳어지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입속말로 ‘당산을 사랑합니다, 당신을...’하고 되뇌었다. 얼굴은 지지벌개가지고. 못난이 같으니라구!

신라 때 지귀라는 총각이 있었다. 언감생심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다. 선덕여왕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구중궁궐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덕여왕이 절로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간다. 그런데 어느 새 여왕은 절로 들어가고 절문은 덜컹 닫기고. 허탈감에 빠진 지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곤기가 몰려오고 소르르 잠이 든다. 그 사이 여왕은 절에서 나와 옥팔찌 하나를 깊이 잠든 지귀의 몸 위에 놓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 옥팔찌를 발견하고는 다시 失之交臂의 허탈감에 빠진다. 그리고는 온 몸을 활활 태우며 불의 귀신이 된다. 짝사랑의 정열, 사랑의 정열, 불 자체.

나는 이미 50대를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다. 다시 한번 짝사랑의 순정과 정열을 불태우고 싶다. 다시 한번 짝사랑의 순정에 말이 나오지 않는 떨림을 맛보고 싶다. 지귀처럼 사랑의 정열에 타죽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미 그런 순정과 정열이 없다. 단지 담담하게 사랑을 바라보며 음미하는 조용함만 남았다. 이것이 성숙이런가. 그래도 나는 오늘 내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며 환타지속에서나마 순수한 짝사랑의 정열을 맛보고 싶다.

200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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