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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제사편
2013년 07월 01일 16시 09분  조회:7426  추천:1  작성자: 玄盛元


현성원(무형문화재<조선족 장례풍속>대표전승인)


세번째 부분
제사(祭祀)
 
유래(由來): 제사의 본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어떤 소기의 념원의 실현을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으로는 의지 교류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초인간적 대상과 의지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소위의 초인간적 능력을 리용하려는 문화적 수단이였습니다. 제사문화는 이미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으며, 과학이 세계를 통치하는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막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능력의 보충수단이며, 신앙과 정감의 표현입니다.
중국 西周시기의 金文에서는 제사가 “孝”로 표시되여 있습니다. 례를 들면 《追簋》에 “用享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고, 《酒诰》에 “用孝养厥父母”란 문구가 있으며, 《文侯之命》에 “追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는데, 모두 제사를 뜻합니다. 이로부터 ”孝”의 사상이 초기에는 고대의 제사활동에서 기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찍이 上古 殷商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그 당시 제사 대상이 주요하게 일월성신, 나라강산, 선조선왕, 등이였습니다.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道敎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儒敎로 발전하였습니다.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孝道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키여,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켰습니다. 유가사상이 보급되면서부터 人文 제사의 주요 대상이 선조와 사망한 부모로 되였습니다.
제사는 선조와 사망한 부모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과 부모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정감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조상 음덕의 혜택과 유익한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가문의 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제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아도,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 지구에 생명인자가 생기면서 부터, 어류, 류인원, 현대인, 이렇게 기나긴 과정의 생명진화를 경과하여 왔으며, 우리의 선조들이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험악한 환경에서 완강히 생존하시면서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으시여 당신에 까지 내려온 것이며,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낳으시고, 전부의 심혈을 쏟으여 어렵게 키우시여 오늘에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 생명의 존재만 알고, 선조와 부모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의 생명은 아직 동물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문명 생명으로서, 현명하고 공덕이 많으셨던 우리의 조상들과 陰德의 뉴대가 이어질수 없으며, 다재다난한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생전에 쌓으신 공덕이 후대들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혜택을 주는 것을 陽德이라고 하고, 간접적으로, 정신적으로 두고두고 혜택을 주는 것을 陰德이라고 합니다. 유물의식으론 물론 해석이 안 되죠. 조상 음덕의 혜택을 얼마만이라도 받으시려거든 조상과 부모를 숭상하고, 그들과의 정감뉴대를 건실하게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조상 음덕이란 없다고 의심하십니까? 녜! 그럼 정말로 없습니다.
조상 음덕이란 있다고 믿으십니까? 녜! 그럼요, 확실히 있습니다.
 

분류
(分类)조선족 제사는 크게 네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중제(喪中祭); 바로 장례기간과 그후 3년 탈상하기전의 제사활동을 말합니다. 례하면 成服祭, 成墳祭, 虞祭, 安神祭, 卒哭, 小祥, 大祥 등입니다. 그외에도祔祭, 禫祭, 吉祭 등이 있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시제(); 冬至에 시조의 제사를 지내고, 立春에 고조이상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며, 매계도 중간달(음력 二월、五월、八월、十一월)에 고조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시제라고 할수 있는 행사는 정월 초하루날의 茶禮를 들수 있고, 기타의 시제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3)기제(忌祭);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忌日이라고 하는데 小祥(돐제)과 大祥(삼년제)을 포함하여 매년 이날에 지내는 제사가 곧 기제입니다. 지금 대상후의 기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4)묘제(墓祭); 원래는 청명, 단오, 추석, 중양에 산에 가서,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묘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그외에 祠堂祭, 禰祭, 練祭, 年中節祭 등이 있었다는데, 우리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 조선족 제사풍속은 보존된것이 많지 못하며, 순서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볼수 있는 기타의 제사들로는 또 生辰祭, 祀甲祭, 石物祭 등이 있습니다.
 
지방()사진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는 망자의 遺像을 만들수 없었으므로 사당에 조상들의 位牌를 모두 나무로 깎아 만들어 모셨습니다. 지방은 위패의 림시 대용품으로서 매번 제사에 즈음하여 종이를 접어 만들었는데, 제사가 끝나면 살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불운의 이민사에는 중국에 이민 와서 사당을 짓고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면서 뜨르르하게 사신 대부호 가문은 없었습니다. 또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神位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위패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지금 이 풍속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은 제사에서 유상을 쓰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 지방의 서식에서 조부 조모의 신위를 한개 纸榜에 써야 할 경우에, 북쪽을 향하여 종이를 놓고, 서쪽에 조부를, 동쪽에 조모의 신위를 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상(祭桌)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에 앉히며, 그 원인은 방위에서 남쪽이 양이 되고, 북쪽이 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아래의 제사상 진설원칙을 장악할수 있습니다. 령좌를 앉히고 그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령좌와 제사상을 한상에 할수도 있습니다.
 

제상진설 원칙
;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진설원칙 해설; 동쪽은 左陽이요, 서쪽은 右陰이라, 익은 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고, 생 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은곳에 달리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보통 땅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땅위에 있으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물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고,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습니다.
 
제상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는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줄에는 반찬류를 놓고,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합니다.
 

제사
순서(祭祀程序)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 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첨작()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석잔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지금은 이런 제사순서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으나, 한번 저세상 부모님에게 지극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사소물을 풍성히 차리기 보다, 이런 제사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알아 두었다가, 혹은 지도를 받으면서 라도, 한번 제대로 되는 제사를 지내 보는 것도 바람직 합니다.
 

우제
(虞祭)장례가 끝난후의 첫번째 제사인데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가 있습니다. 우제는 망령이 금방 신체를 잃고 몹시 불안해 하므로 련속 세번 제를 지내여 안신시킨다는 뜻입니다. 우제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지내는데 초우제는 장일 당날에 산을 내린후 해가 지기전에 지냅니다. 초우제를 지내고 상가에서는 모두 상복을 벗습니다. 재우제는 장일후의 첫번째 柔日(乙、丁、己、辛、癸),즉 초우제의 이튿날, 혹은 사흩날에 지내고 삼우제는 재우제후의 첫번째 刚日 (甲、丙、戊、庚、壬)즉 재우의 이튿날에 지냅니다.
지금 장례후 한번 안신제 지내는 것은 보편 현상이지만, 련속 세번 우제를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믑니다.
 

안신제
(安神祭)길림성 연변지구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안신제는 전통 우제와 조금 구별됩니다. 전통 안신제는 장일 이튿날 다시 산에 올라 새 봉분앞에서 지내는데, 냄비에 기름떡 세개를 구우면서 기름냄새를 피운다음, 기름떡이 익으면 제단에 올려놓고, 상주를 비롯하여 일동이 다 같이 세번 절을 합니다. 전통 안신제에서는 술을 붓지 않고 곡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은 고려때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부터 제사에서 의례 향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이민 들어와서 백성들은 향을 얻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가문에서부터인가 시작하여 기름 냄새 피우는 것으로 향 냄새를 대신하게 되였었는데, 그것이 전해져 내려 오면서 오늘에는 이미 우리 연변의 안신제 문화의 독특한 내용으로 고착되였습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는데, 안신제사의 의미는 우제와 기본상 같습니다.
지금 성시의 장의관에서는 유가족들을 위하여 뒤울안에 많은 제단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유체를 화장한후 유가족과 손님들이 다 함께 소위의 안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장례를 끝냅니다. 고인의 띠에 해당되는 제단을 찾아 골회함, 혹은 유상을 신주로 하고, 제단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상주로 부터 가문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하며, 손님들도 모두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사가 끝난후, 불을 피워 기름내를 피우면서, 혼 부른 옷과 상장 등을 모두 살읍니다. 소위의 안신제가 끝난후 손님들을 모두 식당에 모셔 식사시키는 것으로 장례행사가 전부 끝납니다.
 

소상
(小祥)돐제가 바로 소상입니다. 사망일 전날 저녁 해지기전에 집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낮에는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의연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상(大祥)두돐제가 바로 대상인데 삼년제 라고도 합니다. 제사의 절차는 기본상 돐제때와 같습니다. 삼년제가 지나면 혼백을 살으거나 묻어 버리고 탈상합니다. 몽상을 벗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여전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수효
(守孝): 중국에는 고대로 부터 “三年守孝”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를 치른후에 아들은 여전히 상복을 벗지 못하고 반드시 삼년동안 집에 머물면서 부모를 추모해야 하였습니다. 이 삼년 수효기간에는 결혼을 하지 못하며, 오락을 하지 못하며, 연회에 가지 못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며, 부부는 한자리에 들지 못하며, 가속에서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삼년수효의 상관 규정에 대하여 력대의 황제들까지도 감히 함부로 위반하지 못하였으며, 관청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벼슬을 사임하고 집에 와서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 다시 복직해야 하였습니다. 林语堂이 쓴 《苏东坡传》에서는 북송의 문학대가인 소동파가 부모의 사망때문에 선후하여 두번이나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삼년수효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만큼 삼년수효 규례는 중국사람들의 심중에 天規처럼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에서 상주의 삼년 복상기 제도도 중국의 삼년수효 규례에 기초한 것으로서 여전히 그 뿌리가 깊습니다. 이미 서거한 조선의 김정일 위원장도 부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후 온 나라국민과 함께 어렵게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야 정식으로 위원장직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 삼년수효와 상관하여 《论语·阳货篇第十七》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宰我问:“三年之丧,期已久矣。君子三年不为礼,礼必坏;三年不为乐,乐必崩。旧谷既没,新谷既升,钻燧改火,期可已矣。”子曰:“食夫稻,衣夫锦,于汝安乎?”曰:“安。”“汝安,则为之!夫君子之居丧,食旨不甘,闻乐不乐,居处不安,故不为也。今汝安,则为之!”宰我出。子曰:“予之不仁也!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
우리말로 해석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재아문,“삼년상 기한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삼년동안 례를 차리지 않으면 례를 버리게 되고, 삼년동안 례악을 울리지 않으면 례악을 망치게 됩니다. 묵은 곡식을 다 먹으면, 새 곡식을 받아 들여야 하고, 불씨도 해마다 바꿔야 하는데, 일년이면 충족하다고 봅니다.” 공자왈,“이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니 네 마음이 편안 하드냐?” 재아왈,”물론 편안하였지요.” 공자왈,“네 마음이 편안하였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군자는 상례기간에 무슨 음식 먹어도 맛이 없고, 무슨 음악 들어도 기쁘지 않고, 앉으나 서나 불안하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는 그래도 편안하였다 하니 그럼 너 맘대루 해 보려무나.” 재아가 나간후 공자왈,“저애는 너무 인의롭지 못하구나. 자식들은 태여나서 삼년후에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니라. 그러니 삼년상 치르는 것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니라. 저애도 삼년동안 자기 부모한테서 사랑을 받았으련만?”
이상의 론어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전통적인 삼년수효 규례는 공자의 전부터 이미 있었으며, 공자는 단지 그 규례의 합리성을 진일보 강조하였고, 자식으로서 부모의 바다같은 은정에 전부 보답할수는 없지만, 자기를 낳아서 걸음마 타기까지의 약 삼년의 사랑만에라도 보답하는 척 하여 성의라도 표시해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뜻이였습니다.
吉林省长春息园公墓에는 “孝子坟”이란 묘가 있는데,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清末光绪년간에 신경(지금의 장춘)에는 王梦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모친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고, 묘옆에 움막을 지어 놓고, 상복을 입은 채로 수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익은 음식을 먹지 않고 생쌀만 먹었는데, 아침에 한줌의 생쌀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 그것이 온 하루의 끼니로 되였습니다.
당시에 한 부대의 장관이 그와 절친한 사이여서, 늘상 그한테로 와서는 한담하고 돌아가군 하였는데, 그가 道敎에 대하여 상당히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를 살아있는 신선으로 여기면서 그의 모친 묘에 제사 지내 주고는 동전과 지전들을 놓고 가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따위 돈들을 상관하지 않으니, 결국에 류랑애들이 그 돈을 모두 주어 가군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많은 재부가 있는 걸로 알고 한 부랑뱅이가 그를 찾아 와 목에 칼을 들이 대며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가 돈을 내놓지 못하자 그 부랑뱅이는 칼로 그의 목을 찔러 놓고 도망쳤습니다.
이튿날 경찰이 왔을 때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누구의 짓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저 고개만 저었습니다. “그럼 하늘이 한 짓이란 말이냐?” 경찰이 짜증내며 물으니 그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였습니다. “하늘이 한 짓이라면,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자를 잡아서 징벌할 방법이 없구나.” 경찰은 수사를 걷우고 말았습니다. 1934년에 그는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의 모친묘에 합장시켜 주고, 그 묘를 “孝子坟”이라고 이름을 달아 주었습니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한후, 신경을 수도로 위만주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내 확장건설을 하면서 “孝子坟”을 옮기려 하였는데, 누가 묘를 파면 누가 쓰러지군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믿지않고 작탄으로 폭팔시키려 하여도 작탄이 폭팔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선통황제 부의까지 동원하여도 별 방법이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孝子坟”이 령험하다는 소문이 전 동북에 퍼지게 되여, 많은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여기를 찾아서는 향을 태우고 제사 지내고는 돌아 갔다고 합니다.
1958년 9월, 장춘시 인민정부에서는 “孝子坟”을 잠시 다른곳에 옮겼다가, 50년이 지난 2008년에 长春息园公墓에 정식으로 자리를 정하고, 지방 문물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청명제
(清明祭)매년 청명, 단오, 추석, 중양이면 산에 올라 묘를 다듬고 제를 지내는데 지금 단오와 중양에는 산에 가지 않습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삽으로 가볍게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는데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문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성진에서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한 사람들은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서는 산비탈 공용 제단에 가서 제사 지내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추석제(秋夕祭)추석에는 낫 한자루 가지고 산에 가는데 봉분우에 자라난 풀들을 깨끗이 베여 버립니다. 이것을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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