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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속脫俗(단편소설)
2011년 12월 04일 07시 46분  조회:4452  추천:2  작성자: 견이
 탈속


 
 그의 부음을 들은것은 어제 저녁이였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오는데 나리가 전에 없이 칭칭 감돌며 묻어나오려고 설쳐대는것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꼭 뭔가 낌새를 맡고 그러는것만 같았다.
    
우격다짐으로 겨우 집안에 가둬놓고 문을 잠그고 나오다가 석연찮은 느낌이 등짝에 몰려와 얼결에 목줄을 세우며 언뜻 뒤를 돌아보니 나리가 유리창에 두발을 턱 버티고 선채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오갈이 든 괴성을 뽑아내고있었다.

    정리실업바람에 휘말려 남편은 해외로무를 나가고 나는 아들애를 친정에 맡겨둔채 여기 저기 일자리를 찾아헤매다가 어디 식당일거리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도시로 진출한것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중순이였다. 한 동창생이 교외에서 두 남자식구가 사는 집의 식모 일자리를 주선해주어 나는 면접을 보러가게 되였다.
    
적혀진 주소대로 내가 찾아간 곳은 향마을에서 사오리가량 동떨어져있는 한적한 골안이였다. 조잘조잘 흐르는 시내물을 끼고 량켠에 오밀조밀 늘어서있는 이십호남짓 되는 마을 맨 끝자락에 소담한 마을풍경과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새하얀 타일을 붙인 이층양옥이 우쭐 서있었는데 돈 꽤나 있는 시내부자들이 별장으로 지어놓은것인듯해보였다.
    
초인종소리에 이층 베란다로 귀가 당나귀 귀처럼 벌쭉하고 몸집이 늘씬한 세파트 한마리가 불쑥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좀 싱거운 모양 혀를 길게 빼물고 헐떡헐떡거렸다.
    이윽고 런닝그샤쯔바람에 색바랜 청바지를 입은 마치도 중국사람들이 즐겨먹는 기름튀기처럼 아래위 끝을 쭉 잡아 늘여놓은것 같이 길쭉한 인상의 사내가 나오더니 나에게 고개를 끄덕해보이고는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 문을 잠그지 않았으니 그냥 밀고 들어오세요. 이쪽 층계로.》
    내가 계단을 밟아올라가는 동안 그는 손가락마디를 딱딱 소리나게 엇누르며 찌푸린 눈살로 하늘을 쳐다보고 섰다가 내가 다 올라가서야 몸을 돌려왔다.
   《저, 상호 엄마의 소개로…》
    내가 주춤 란간을 짚고선채 자아소개를 하려는데 그는 진작 알고있었던듯 시무룩이 웃으며 안으로 들라는 시늉을 했다. 세파트는 별 볼일 없는듯 슬슬 앞장서 들어가버렸다.
    
이층 중간은 약 오십평방정도 되는 널직한 대청이고 좌우 량켠에 각각 방문이 한개씩 나있고 북쪽켠에 큰방이 하나 있었는데 활짝 열린 방문으로 언뜻 들여다보니 화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것을 보면 화실로 쓰이는 방인듯했다.
    《저, 집은 어데 있습니까?》
    그가 콜라 한병을 내앞에 따놓고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예, 룡정 지신에요.》
    《지신이라 거 좋은 곳에 사시는군요. 근데 홀로 삽니까. 아니면…》
    《예, 지금은 혼자서…》
    
《아, 알만합니다. 저 뭐 별로 크게 할 일은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식구가 단출하다 보니. 그저 하루 세끼만 굶지 않게 해주면 됩니다. 가끔 생각나시면 집안청소도 해주면 더 좋겠구요. 이거 홀애비 생활을 하자니 어디 때시걱 같은데 신경 쓸 형편이 돼야 말이죠, 허허허.》
    《예, 근데 식구는 두분이라고 들었는데…》
    《아, 그것 말입니까? 허허, 내가 미처… 얘 나리야, 와서 인사나 해야지.》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한쪽구석에 퍼더버리고앉은 세파트를 불렀다. 놈은 움쭐 일어나더니 스적스적 다가와 긴 혀를 빼문채 그를 쳐다보고 섰다.
    
《아니, 그럼?!…》
    내가 입을 딱 벌린채 세파트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는데 그는 대수롭잖게 씩 웃으며 세파트의 목덜미를 툭툭 쳐서 앉히고는 아주 진지하게 소개를 했다.
    《예, 그렇습니다. 얘는 나리라구 하는데요 역시 사내녀석입니다. 이제 한살밖에 안됐는데 자식이 철은 제법 들어가지고 아주 어른스레 군답니다. 야, 그리구 너두 건너가서 인사나 해야지. 앞으로 우리 둘의 때시걱을 걱정해줄 분이셔.》
   
 그가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놈은 스적스적 다가와 나를 쳐다보고 앉아서 청승맞게 코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놈이 악수를 청하는구먼요. 허허.》
    《어멋, 그래요?》
    내가 미타한 마음으로 한손을 슬쩍 내밀었더니 이놈도 냉큼 내 손에 자기 앞발을 척 얹어놓고는 긴 혀를 내뽑은채 능청스럽게 턱까지 주억거려 보였다.
    
내가 너무 신기하여 키드득 웃어주는데 그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에, 금시 익숙해질겁니다. 워낙 붙임성이 좋아나서요. 자, 그럼 집구경이나 시켜드리죠.》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세파트를 두고 하는 말인지 구별이 안가게 그렇게 얼버무리고나서 그는 나의 의사같은건 물을 필요도 없다는듯 앞장서서 주방이며 내가 있을 방 그리고 자기의 방과 화실 등을 두루 돌아보게 하였다.
    
나보다 세살 손아래라지만 독신사내와 한집을 쓰고 산다는게 아무래도 탐탁치가 않고 또 그의 독단적이다싶은 언행에 좀 당황하고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은 그 가식 없고 소탈해 보이는 첫인상때문이였을가, 아니면 서른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앳되보이는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에 비낀 측은함 같은것때문이였을가. 어쨌든 나는 좋다 궂다 내 의사 같은건 미처 내삐칠 경황도 없이 바보처럼 그가 안내하는대로 이곳저곳 돌아보며 가끔 머리도 까닥까닥해보이고 가끔은 어줍은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응수를 했다.
    
 
주방을 두루 거두면서 보니 쌀독은 한쪽 구석에 처박힌채, 밑굽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라면박스에는 라면 서너개가 간들간들 남아있었다. 그리고 랭장고에는 거의 다 말라붙은 고추장그릇과 콜라 서너병, 시들시들한 오이며 파 몇뿌리가 들어있었고 소고기가 좀 있었다.
    
 
아무리 사내가 홀로 하는 살림살이기로니 이렇게까지 때시걱에 등한시할수가 있느냐고 내가 책망조로 말하며 오후에 장부터 봐와야겠다고 하자 그는 시물시물 웃으며 내려가더니 아래층에서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 장까지 갔다오려면 거리가 꽤 되니 태워다주겠다는것이였다. 
 저녁을 갖추느라 한창 주방에서 지지고 볶고 분주히 서두는데 어느결에 맥주 한상자를 들어다놓은 그가 주방에서 서성거렸다. 내가 뭘 찾는가고 묻는 말에 그는 뒤더수기를 긁적이며 난감하게 입을 열었다.
    
 
《저, 나리먹이를 좀.》
    《예, 그거요, 근데 나리는 뭘 먹죠?》
    《그놈은 저 고기만 먹는데 그저…》
    나는 어이가 없어 피씩 웃으며 눈을 흘겼다. 자기는 고작  파뿌리에 라면이나 끓여먹으며 사는 신세에 나리한테는 매일 고기만 꼬박꼬박 대접해왔겠으니…
    
 
뭐라고 더 말하기가 거북했던지 그는 벌써 랭장고에서 고기덩이를 꺼내여 썩둑썩둑 썰고있었다. 내가 그의 손에서 식칼을 앗아내서야 그는 헤식은 웃음을 웃으며 한켠으로 물러섰다.
    《저, 대강 요만큼 큰 토막으로 쳐서 한 절반쯤 익혀주면 잘 먹어요.》
    《네, 알겠어요. 나가 있어요. 이젠 거의 다 됐어요.》
    《예, 그럼...》
   
 
 내가 시큰둥하니 내뱉는 말에 그는 씽긋 웃으며 맥주컵을 찾아들고 나갔다.
    상을 차려놓고 고기를 반쯤 익혀서 나리앞에 갖다놓으니 놈은 먹을 념은 않고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의뭉스런 눈길로 그를 쳐다보니 그때까지 맥주만 부어놓고 깍지낀 두손으로 턱을 고인채 앉아있던 그가 시무룩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시름놓구 먹어라. 아줌마가 해주는건 먹어도 괜찮아.》
    그의 분부가 있어서야 나리는 꼬리를 휘휘 저으며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릇에 주둥이를 갖다대고 아직 뜨거워서 조심스러운 모양 홀짝거렸다. 놈이 하는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섰다가 나는 식탁으로 다가가 앉으며 한마디 슬쩍 춰주었다.
    
 
《아주 제격인데요.》
    《예, 그놈이 종자가 좋아서 그런지 아주 영특한 놈입니다. 뭐나 한두번만 일러주면 다 안다니까요. 쟤 어미가 변방부대에서 2등공 세번 기입한 공신이라구요. 허허, 부대에 있는 친구가 처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젖도 떼기전에 앓아죽었다고 속임수를 써서 안아왔는데 어릴 때부터 내가 갓난아기 돌보듯 우유를 풀어먹이구 미음을 쑤어먹이면서 애지중지 키웠더니 아주 나를 자기 친어미로 아는지 정말 끔찍한 사이죠. 허허허.》
    
 
《예, 그랬군요.》
    그 말에 나는 동감조로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첫인상부터 놈이 하는 꼴이 어딘가 범상치 않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것이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지금까지 놈은 함부로 짖어대거나 헤덤비는 법이 없이 언제 봐도 그저 아주 점잖고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적어도 이름 값은 제법 하는상싶었다. 
    
 
《자, 그럼 이후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구 이후엔 그냥 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그럼 그렇다는 의미에서.》
    《예, 별로 재간은 없지만 있는 힘껏…》
    
 
나는 얼결에 맥주잔을 들어 댕강 맞부딪쳤다. 그의 말대로 과연 붙임성이 좋아서인지 우리는 얼마 안가 인츰 익숙해졌다. 나리는 내가 장보러 가거나 소풍하러 다닐 때면 제법 슬슬 앞장서서 경호원노릇을 했고 그도 말끝마다 누님을 붙여가며 허물없이 롱담도 해오고 가끔은 청승맞게 애들처럼 어리광도 부려볼가 했다. 나 또한 손아래 오라비 대하듯 그들 두 식구를 극진히 시발해주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나리를 데리고 뒤산 과수원까지 산책을 갔다오고 하루 세끼 밥 먹는 시간외에는 거의 전부 화실에만 붙박혀있다싶이했다. 가끔은 오토바이를 부르릉거리며 어딘가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보통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고 혹간은 그냥 묵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내가 한번은 왜 여태 장가도 안가고 이렇게 쪽쪽하게 사느냐고 넌지시 묻는 말에 그는 시큰둥하니 말했다.
    《전 결혼같은 거 그런 속스러운거 안합니다. 멋없게스리. 이렇게 혼자서 자유자재로 사는게 좀 좋아서요. 허허.》 



 9월중순에 접어들며 여름 내내 기승을 부리던 혹염이 차츰 수그러들면서부터 그는 진종일 화실에서 뚝딱거리며 캠퍼스를 메우고 풀을 먹이는 등 일로 분주하였다. 그리고는 매일 아침저녁 초조한 눈길로 먼 산을 바라보고 앞 내가의 해묵은 백양나무를 쳐다보기도 하며 한숨만 풀풀 내쉬곤 했다.
    
 
그날 그는 뭘 좀 사올것이 있다며 아침 먹고 나가더니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을 하나 어쩌나 망설이다가 소풍이나 할 겸 앞내가에서 얼쩡거리는데 내물 건너 쑥대밭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얼가 하고 다가가 보니 나리가 누르스름한 털빛의 트기 한마리를 타고 서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있는것이 보였다. 나는 못볼것을 본듯 황황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요즘 들어 매일 어디를 쏘다니는가 했더니 그런 판국이였구나. 공연히 달아오르는 량볼에 손부채질하며 헛기침을 하고나서 짐짓 몸을 돌려 나리를 불렀다.
    
 
《나리야, 점심 먹어야지.》
    한참만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리가 숲속에서 나와 내물을 훌쩍 뛰여넘어 정겅정겅 뛰여왔다. 흥이 깨져 서운한 모양 자꾸 뒤를 흘끔거리며 입을 쩝쩝 다셨다.
    금방 몸을 돌리려는데 홀연 고개길 쪽으로부터 웬 녀인의 부름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내가 미처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나리는 이미 휘딱 몸을 돌쳐 그쪽으로 치닫고있었고 저쪽 고개길로 청바지에 체크무늬 간 와이셔츠 앞자락을 질끈 동인 긴 머리의 녀인이 나리에게 손을 저으며 달싹달싹 걸어오는것이 보였다.
    
 
흙먼지를 폴싹폴싹 일구며 부리나케 뛰여간 나리는 몸을 풍풍 솟구치기도 하고 껑충 앞발을 쳐들고 허우적거리기도 하며 갖은 친절을 베풀었다. 그녀도 호들갑스레 지껄이며 무릎을 꺾고 나리의 목을 끌어안고 볼을 비벼대기도 하고 나리가 길고 끈적끈적한 혀를 날름거리며 이리 핥고 저리 빨고 하는대로 들이대고있다가 간지러운듯 가끔 캐득캐득 간드러지게 웃어대기도 하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수작질하고 나서야 멀찌감치 서있는 나의 존재를 의식한듯 몸을 일으킨 그녀는 긴 머리를 등뒤로 추슬려 넘기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 온걸 보니 어림잡아 한 스물네댓 돼보이는 꽤 귀염성스럽게 생긴 처녀였다.
    몇미터를 사이두고 어색하게 마주 서있는 우리 둘사이를 나리가 주인답게 말로써 인사시키지 못하는것이 무척 안타까운 모양 부지런히 오락가락 하였다.
    
 
《누구신지…》
    그녀가 목례를 해오며 먼저 말을 건넸다.
    《예, 나는 이 집에서 식모로 있는…》
    《아, 그러세요? 그런걸 난 또… 후훗 참, 수고 많으시네요. 전 이 집 주인의 학생인데요 은희라고 합니다.》
    그녀는 흰 이를 상긋 드러내며 깝삭 허리를 꺾었다.
    《네… 어서 안으로 드시죠.》
   
 
 나도 엉겁결에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먼저 몸을 돌렸다.
    《근데 선생님은 집에 안계시는 모양이죠?》
    《예, 아까 아침나절에 시내로 갔는데 아직…》
    그녀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까닥 해보이고는 나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질 치며 앞장서 들어갔다.
    
뒤늦게 올라가 보니 그녀는  갈증이 무척난 모양 바가지 채로 랭수를 꼴깍꼴깍 들이켜고있었다.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집안을 휘― 둘러보던 그녀가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히야! 아주머니 덕분에 우리 선생님 그동안 호강하셨겠다. 집안이 아주 기름기가 자르르 한데요. 우리 선생님 그동안 살두 많이 찌셨겠네. 그죠? 아주머니.》
    《뭘 별로…》
   
 
 새물새물 웃으며 말끝마다 아주머니를 들먹거리는것이 어지간히 기분이 잡쳤다. 그렇다고 내가 왜 아줌마냐고 따지고들 용기까지는 없었던터에 나는 마지못해 희미하게 웃어보이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한 내 심사를 골려주려고 작심이라도 한듯 그녀는 주방까지 따라오며 재잘거렸다.
    
 
《후후훗, 우리 선생님 있잖아요. 글쎄 일년 열두달 꼬박 라면만 끓여먹으면 먹었지 쌀밥이 아무리 먹구싶어두 밥같은건 죽어도 못한다는 위인이래요. 그래서 저렇게 라면만 끓여자시다보니 몸집도 국수오리처럼 호리호리하단 말입니다. 후훗, 량반이래도 웬만한 량반이 아니래요. 전에 제가 다닐 땐 그래도 한달에 서너번쯤은 색다른 음식도 해드리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자기 일이 바쁘다보니 미처…》
    
 
그녀는 문설주를 짚고선채 그렇게 찧고 까불다가 아마 내쪽의 반응이 좀 애매했던지 나리를 데리고 앞내가에 나가서 물장구를 치며 놀아댔다.
    그가 돌아온것은 오후의 농익은 해살이 서산마루로 기울어가며 앞내가의  해묵은 백양나무그림자를 훌쩍 길다랗게 땅우에 드리워놓았을 때였다.
    
 
느닷없이 나리가 컹컹 하고 흥분된 소리로 짖어대고 한참 후에 고개길너머로 부르릉거리는 오토바이소리가 들려오는듯했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나리는 고개길쪽으로 냅다 뛰고있었고 그녀는 맨발바람에 날씬한 종아리를 드러낸채 빨래돌우에 상큼 올라서서 나리가 뛰여간 쪽을 갸웃거리다가 이쪽을 흘낏 돌아보았다. 무망간에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나는 급기야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행주치마를 찾아 둘렀다.
    
 
한참만에 그녀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 그의 두런두런하는 말소리도 들려오고 두사람이 계단 밟아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왔어요. 누님.》
   《……》
    그는 주방을 피끗 들여다보고는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그녀를 앞세우고 화실로 건너갔다. 둘의 손에는 묵직한 구럭이 하나씩 들려있었는데 물감인듯해보였다. 
    
 
《와! 그동안 이리 많이 그렸어요? 와, 멋있다. 이건 지난번 그리던거구나. 이건 또 언제… 야! 선생님, 이젠 완전히 새로운 풍격이 잡혀가는데요. 히야! 이젠 정말 속티를 말끔히 벗어버린 모양이네. 어쩜…》
   
 
 뭐가 그리 좋다는건지 그녀의 호들갑스런 찬탄이 연방 터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 귀에는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사라기보다는 그저 비위를 맞춰주느라 너무 떠들어대는것 같은 속빈 아첨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긴 내가 보기로는 여느 실성한 놈이 남의 집 회벽에다 비자루로 아무렇게나 이러저리 아롱다롱한 색들의 페인트를 휘뿌려놓은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그림들을 두고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호들갑을 떨어댄다는것이 선뜻 납득이 안갈 법도 했을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화간데 하는 선입견때문에 여태 나의 그 천박한 견해같은건 섣불리 내색할 엄두는 못내고 딴에는 그래도 다문 얼마라도 해득해볼 요량으로 짬만 나면 문틈으로 그림 그리는 과정들을 내심히 지켜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 값비싼 물감들을 그저 낭비하는것 같아서 안쓰러울뿐 나의 어리석은 안광과 턱없이 좁은 식견으로 더 이상의 어떤 리해를 기대한다는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하긴 부룩송아지보고 모나리자 초상화를 감상하라면 납득이 갔을가.
    
 
《어허, 배가 촐촐한데 우리 저녁에 뭘 먹어요?》
    둘이서 한참 찧고 빻고 하더니 그가 불쑥 주방에 머리를 들이밀고 물었다.
    《글쎄, 랭면이나 하려던 참인데, 날씨도 더운지라…》
    《아, 그거 좋지유, 시원하게. 그리구 술안주두 좀 있었으면 좋겠군요. 쟤가 어쩌다 놀러 왔는데.》
    《네, 념려 마세요. 다 알아서 하고있어요.》
   《허, 근데 맥주가 이젠 아마 다 바닥났을 걸요. 어디…》
    
 
랭장고를 열어보던 그는 역시 그랬구나 하는듯 씩 웃고 나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야, 나 가서 맥주 좀 사올게 앉아있어 응.》
    《저두 같이 갈가요?》
    《아냐. 그냥 앉아있어. 심심하면 주방 일이나 돕구.》
    《네, 근데 저 맥주는 조금만 사오세요. 선생님 마실만큼만.》
    《왜 넌 안먹어?》
    《네, 전 지금… 술 끊었어요.》
    
 
《뭐? 술 끊었어? 히야, 며칠 못 봤더니 너 요조숙녀가 싹 돼먹었구나. 해가 서쪽에서 뜨겠걸. 하, 그것 참, 정말이야?》
    《네. 정말.》
     그가 피씩 웃음소리를 남기고 나간 뒤 그녀가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건너왔다.
    
 
《뭘 하세요? 어머, 랭면이네. 야, 시원하겠다. 어디 좀…》
     반색을 하며 랭면국물을 종지에 약간 떠서 후르륵 맛보던 그녀는 눈살을 쪼프린채 맛을 음미해보는듯 하더니 얼굴이 활짝 펴지며 혀를 꼴꼴 차댔다.
    《으음… 히야, 아줌마 음식솜씨 최고다. 복무대루 랭면국이 왔다가 울고 가겠는걸. 어쩜 히야, 꼴꼴, 그러길래 우리 선생님 그동안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하게 돌지. 히힛.》
    
 
그 깜찍한 수작질에 나는 새삼스레 정겨운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기만 꼭 차있는줄 알았더니 역시 붙임성도 좋고 사랑스러운 녀자애구나 하는 생각에 시름없는 웃음이 물씬 떠올랐다.
    어쩌다 세사람이 둘러앉은 식탁은 말 그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어느덧  아줌마소리에도 적응돼버렸는지 나는 이미 호칭따위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사양사양 하다 거품까지 다해서 겨우 한컵이 되나마나한 맥주를 더운물 마시듯 홀짝홀짝 불어마시는 바람에 나도 그만 멋적어져 겨우 두컵만 마시는둥마는둥 하고말았다.
    
 
그들은 해후상봉한 다정한 오랍누이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주고받고 걸쭉한 롱담까지 스스럼없이 들춰대여 가끔은 나까지 곁들어 한바탕 눈물을 찔끔 짜내기도 하였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피곤하다며 먼저 방에 들어가고 그녀는 나를 거들어 설거지를 마치고 텔레비를 보네 마네 하다가 나리와 한참 장난질하고는 내방으로 들어왔다. 그냥 누워 자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모기성화에 불만 꺼놓고 둘은 침대머리에 가지런히 기대누워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로는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였는데 나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그의 신상에 대해 궁금했던것들을 적잖이 알게 되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워낙 절친한 사이였던터에 그녀는 그의 신상에 대해 손금보듯 속속들이 알고있었다.
    
 
그는 삼형제중 막내로 국내와 국외에서 수차 개인전도 가진적 있는 젊은 화가들중 중견자로 꼽히는 축이라고 했다. 워낙 예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는데 그의 계몽선생이고 미술학부의 학부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해두고있을만큼 말하자면 젊은 나이에 땡잡은 유망한 실력파였다.
   
 
 그런데 그가 한창 잘 나가고있을 때, 그러니까 근 이태전에 환갑년세가 다된 그의 아버지가 개혁춘풍덕에 돈 좀 벌면서부터 외간녀자와 따로 살림을 차린 일이 들통나는 바람에 끝내는 부모가 리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불단행이라고 당금 결혼을 앞두고 끔찍하게 지내던 가무단 무용수로 있던 그의 약혼녀가 무슨 허깨비한테 홀렸는지 단연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인인가 미국인가로 날아가버렸단다. 
 
설상가상 타격에 타격을 련속 받은 그는 세상 볼 면목이 없다면서 교편이며 모든걸 팽개치고 타락의 변두리에서 방황하였다. 달빛이 밝으면 달빛에 취해서, 비가 내리면 비에 젖어서, 살구꽃이 흩날리면 꽃에 취해서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보냈다. 
 
안달이 난 그의 어머니가 혼사나 치러주면 좀 나아질가싶어 서둘러 색시감을 물색하여 혼사라고 치러줬더니 글쎄 신혼날밤에 몰래 빠져나간것이 사흘이 되도록 행방불명이여서 친척들이며 친구들이 총동원되여 온 시내를 발칵 뒤집었더니 웬 술집 녀자의 자취방에 어푸러져있더라나. 부득불 혼사는 파하고 그 가긍한 상을 보다못한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끌고 나가 다짜고짜 귀쌈부터 둬대 올리부치고 정신 좀 차리라고 추상같이 을러멨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뜨고 은사를 올리보고 내리훑고 하던 그가 한다는 말이 
    
 
《이 징그러운 세상이 싫습니다. 이 번거로운 속세가 싫단 말입니다, 이 못난 놈을 제발 죽여주십시오, 제발.》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뚤렁뚤렁 줴짜더란다.
   《이 못난 놈, 속세가 싫다면서 왜 속세에 머물러는 있는거냐? 미련한 놈같으니. 싫으면 떠나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게 싫다구 그래 앉은자리에서 제 손으루 자기 일생을 술에 말아먹을 셈인가. 이 드넓은 세상에서 그래 자기 몸 하나 담을 곳도 못 찾고 자빠져있단 말인가? 젊은 놈이 좀 꼴기 있게 놀란 말이야. 고만한 일에 무슨 대순가? 새파란 놈이 늙은이들보다 더 케케묵은 의식이 잔뜩 배겨가지구선.》
    
 
그 말에 눈을 슴벅슴벅하며 은사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무슨 생각을 굴리는가싶던 그가 은사의 발치아래 넙죽 절하며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하고는 언제 그랬던가싶게 훌훌 털고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훠이훠이 가버리더란다. 그렇게 떠나서 자리잡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 집을 갖추느라 굉장히 품이 먹었을텐데.》
    내가 불쑥 묻는 말에 그녀는 까르르 웃기부터 하였다.
    《이 집이 뭐 우리 선생님이 돈 내고 지은건줄로 아시는 모양이죠? 후후훗, 우리 선생님 저렇게 어리숙해보여도 아주 엉뚱한 분이래요. 이 집만 봐도 그렇죠. 글쎄 허망 교외에다 쓸만한 집을 갖추자니 돈이 적잖이 들테고 집짓는데 돈을 다 날려버리면 앞으로 먹고 살 일만도 아득하지. 그렇게 며칠동안 속구구를 하다가 하루는 불쑥 아버지를 찾아갔대요. 호호, 글쎄 마주앉자부터 한다는 소리가 <나는 아버지한테 다른 요구는 일절 없으니 그냥 자식취급 할거면 그저 시골에 있는 양옥만 내주시오.> 하더래요. 글쎄. 꼴꼴, 후에 선생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우리 집에 와서 그 얘길 하는걸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배꼽이 빠져나올번했잖아요. 후훗, 뒤늦게야 그 일을 안 형들이며 이붓엄마랑 그 처사에 의견이 굴뚝같아서 들고 일어나 야단들쳤지만 다 행차뒤에 나팔이지 뭐예요. 때는 이미 모든 번접수속을 끝마친 뒤였거든요. 꼴꼴,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허허, <자넨 그눔 자식 하나만은 잘 뒀네. 그놈은 돌꼭뒤에 올려놔두 석삼년은 문제없이 앉아 버틸 놈이여.> 하고 맞장구를 치지 뭐예요. 후훗, 우리 선생님 참 재미있는 분이시죠. 예?》
    
 
《예. 참 재밌네요.》
    나는 호호 입을 막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둠속에서 새별같은 두눈만 초롱초롱 빛나고있었다.
    《그분을 사랑하세요?》
    《예, 사랑해요.》
    《그분이랑 결혼할건가요?》
    《음, 글쎄 때가 되면 결혼두 해야겠죠.》
    《근데 들을라니 그 분은 결혼같은건 속스럽다고 안한다던데.》
     
 
무망간에 불쑥 랭수를 끼얹은것 같아서 그녀의 반응이 무척 불안해져있는중 의외로 그녀는 까르르 배꼽을 잡았다.
    《후후훗, 우리 선생님이 아주머니하고도 그런 얘길 했어요? 정말? 히야! 우리 선생님 참말 웃긴다 웃겨. 아무하고나 그런 말을 다하시네. 꼴꼴… 그래요. 우리 선생님은 항상 그 말을 입에 달고있는 분이래요. 사랑같은거 결혼같은건 다 치사한 물건이라구요. 사랑이란 동물은 그저 가끔 가다 목마를 때마다 잠간잠간 머물렀다 가는 실없는 동물이라고 그래요. 영원한 사랑이요 불멸의 사랑 같은건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구, 죄다 하릴없는 인간들이 조작해낸 한낱 황당무괴한 어리광대극에 불과한거라구요. 그래서 결혼같은건 스스로 자기 목에 올가미를거는 일이라구 죽어두 안한대요. 후훗, 재밌죠? 어쩜 그럴듯한 론리인것 같기두 하구요… 하지만… 언젠가는… 사랑의 단맛을 진정으로 터득할 때가 있을거예요. 언젠가는 꼭…》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달콤한 래일을 동경하는 순정의 소녀마냥 아미를 들어 별이 총총한 창밖을 응시하고있었다.
    귀뚤귀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귀기울이다 말고 내가 침묵을 깨뜨렸다.
    《두분 다 그림을 그리시니 스케치랑 함께 다니구 잘 어울리시겠군요.》
    《네? 예…》
    
 
 그녀는 어둠속에서 나를 흘낏 돌아보며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보였다. 그리고 아미를 다소곳이 숙이며 가느다란 한숨을 뿜어내고는 뜸을 들였다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저는요, 실은 저두 결혼같은건 속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구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그것도 자기 나름대로 하고싶으면 하고 싫으면 안하고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였어요… 대신 저는 우리 선생님을 그렇게 속스럽게 굴진 않을거예요. 적어도 우리 선생님을 내곁에만 묶어두려고 욕심부리진 않을거예요. 그냥 뭐든지 언제든지 하고싶은 대로 하게끔 내버려둘거예요. 결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죠. 그저 곁에서 지켜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거예요.》
    
 
《……》
    까무룩히 잠들었다가 깨고보니 옆자리는 비여있고 그의 방으로부터 야릇한 신음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여나왔다. 환희의 절정에로 치달리는 짜릿짜릿한 음성이였다.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나고 온갖 신경말초가 귀에만 집중되여 도저히 다시 잠을 청할수가 없어 머룩머룩 잡생각에 빠져있었다.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올 무렵에야 그녀는 살며시 내곁에 돌아와 누웠다.


오후 늦게까지 시름없이 놀다가 저녁녘에야 그녀는 그의 오토바이에 앉아 돌아갔다. 짧은 하루동안에 정이 들었던지 그녀의 뒤모습을 눈바램하는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갈마드는 서운한 기분을 나는 미연히 느낄수 있었다. 
    
그는 돌아오자부터 꾸역꾸역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 외출하실려구요?》
    《예, 이젠 좀 움직여봐야죠.》
    《어디 먼데 가세요? 얼마쯤 가있을는지…》
   
 《글쎄, 저 숭선쪽으로 움직여볼가 하는데 빠르면 한 열흘, 늦어서 아마 한 보름쯤 걸릴겁니다.》
    나의 좀 소침한 어눌때문이였던지 그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문가에 바재이고 섰는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누님 나 없는 동안 홀로 적적하시겠네요.》
    
《나야 뭘 나리도 있고 한데. 근데 나보담두 객지에 나가 있으면 때시걱이랑 불편할텐데…》
    《아, 그거요. 그건 하나도 걱정할것 없습니다. 가면 다 마련돼있어요. 전에 다니던 민박집도 여럿 있고 어쨌든 가서 절대로 굶어죽을 근심 같은건 안해도 된답니다. 허허.》
    저녁은 송별연이랍시고 있는대로 푸짐히 차려놓고 둘이서 맥주를 퍼그나 마셨다.
   
 이튿날 떠나면서 그는 나리가 언제부턴가 뒤산 과수원에 트기와 좋아하는 모양이니 가급적이면 홀로 뒤산으로 가지 못하게 단속해두라는 부탁만 남기고는 부르릉 떠나갔다.
    산과 들은 바야흐로 짙은 가을빛을 띠여가고있었다. 나는 진종일 집에 들어박혀 TV를 보지 않으면 음악을 듣고 가끔 그의 방에 아무렇게나 꿍쳐져있는 책들을 뒤적이는 등 일들로 소일하였다.
   
 그가 떠난지 한 보름만인가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오싹오싹 한기까지 느낄수 있을 무렵, 하루는 그녀가 불쑥 찾아왔다. 그런데 이전의 그 발랄하고 생기 넘치던 모습은 찾아볼수 없고 부은듯 부석부석한 얼굴에 우울한 눈빛은 나를 사뭇 불안하게 했다.
  
  아무래도 무슨 심사가 있는것 같아 내가 걱정스레 어디 아프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그저 머리만 살래살래 흔들며 나리의 목덜미를 어루쓸고 앉아있다가 내가 점심상을 갖추는걸 보더니 그대로 일어나면서 선생님이 돌아오시면 한번 자기 집에 들려가라고 전해달라는 부탁만 남기고는 조용히 떠나갔다.
    나리가 그녀를 그냥 그렇게 떠나보내기가 서운한 모양 칭얼거리며 나대신 앞내가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기운 없는 뒷모습을 눈바램하며 나는 아직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기같은것에 오싹해났다. 산비가 오려고 루각에 바람이 가득찬것 같은 그런 음산한 분위기였다. 녀자의 직감으로 그녀의 신상에 어떤 불행이 닥쳐올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이틀후 그가 돌아왔다. 그의 귀래에 나리가 좋아 날뛴건 더 말할것 없고 나도 오래동안 헤여져있던 친인을 맞는것 같은 기분에 퍼그나 들떠있었다. 
    몹시 허기가 진 모양 그는 씻을 념도 않고 그대로 식탁에 마주앉았다. 저녁상에 마주앉아서야 나는 그동안 몰라보게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여겨볼수 있었다. 볕에 그을러 까맣게 타버린 얼굴에서는 눈 흰자위부분만 유표하게 판들거리는것이 꼭 마치 아프리카 흑인을 방불케 하였고 얼마를 감지 않았는지 희뿌옇게 먼지를 들쓴 머리칼은 전쟁을 갓 치르고난 말갈기처럼 텁숙했다.
    
그 초라한 몰골을 지켜보다 말고 내가 입을 싸쥐고 쿡 웃어주자 그도 시무룩이 따라웃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변명처럼 했다.
    《예상 밖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바람에…》
    《그래도 굶어죽지 않고 왔으니 다행이군요.》
    
《아하, 그런게 아니라 실은 두만강을 따라서 쭉 내리훑는다는게 예상밖으로 좀 애로들이 생겨서… 허허, 근데 쟤는 지금두 그냥 그 트기를 찾아다닙니까?》
    그냥 변명하기가 멋적어졌던지 그는 나리에게 눈길을 주며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그 말에 나리가 잠시 입놀림을 멈추고 나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글쎄 어디 말려내는 재간이 있어야 말이죠. 그런다고 목을 매여둘수는 없는 일이구. 그리구 저들끼리 좋아서 어울려 노는것도 다 저들의 본성이구 자유일텐데 그런것까지 너무 속박한다는것도 좀 주책없는 일 같기도 하구 해서 한두번 말리는척 하다가 그냥 내버려뒀어요.》
    《본성? 자유? 허허, 하긴…》
    
 
그는 시죽이 웃어버리고는 한술 가득 밥을 떠넣고 우물거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내가 TV를 보고앉아있는데 그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의 물기를 툭툭 털어내면서 내곁에 와앉았다.       
    《그동안 많이 적적하셨죠, 누님?》
    《뭘, 별로.》     
    《참, 그동안 누구 왔다간 사람 없었어유?》
    
 
《참, 전날에 그 은희 학생이 찾아왔었는데 한번 들려가라고 그러던데요.》                 
    《그래요? 쳇, 그놈이 또 무슨 장난치려고, 심심했던 모양이군.》
    《장난칠 기분인것 같질 않던데요, 아주 의기소침해있는것이.》
    《소침해서요? 헛, 녀자애들 기분이란게 워낙 그런거 아니겠어요. 어제까지는 말짱하게 아지랑이를 모락모락 피우다가도 오늘은 찌쁘둥하니 눈송이를 펑펑 날리는 그런거 있잖아요. 어, 래일은 우선 쟤부터 처치하구 와야겠어요.》
    
 
《처치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예, 사냥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유. 전부터 나리를 욕심내서 한번이라도 데리구 사냥 좀 해보는게 소원이라구 비위를 쓰는걸 그냥 밀막아버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친구한테 보내서 단련 좀 시키는것도 좋을것 같아요. 저대로 그냥 놔두었다간 자식이 색에 빠져서 몸을 싹 망가먹는다구요. 고이고이 호강시켰더니 야성이란것도 싹 사라지고… 그래도 산발을 타고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뛰여다니는 게 저놈에겐 아주 적격일겁니다.》
    
 
이튿날, 아침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그는 서둘러 나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내가 가는 길에 먹이라고 삶은 소고기를 비닐주머니에 넣어주며 나리의 머리를 다독여주자 나리는 꼭 가야 되느냐는듯 그를 할끔할끔 쳐다보며 떼를 부릴가 하더니 안되겠던지 나에게 턱을 주억거려보이고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였다.
    
 
나리가 없는 집안은 괴괴하고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점심을 얼추 에때우고 한가로이 베란다에 서있는데 앞내가의 해묵은 백양나무아래에 뒤산 과수원의 트기가 어슬렁거리며 이쪽을 흘끔거리고있는것이 보였다. 그런데 트기의 배가 전보다 이상하게 불룩해져있는듯했다. 아마도 새끼를 밴 모양이였다. 순간 나는 유무의식간에 이틀전 그녀의 그 생기없고 주눅든 얼굴을 선히 떠올리며 그때 느꼈던 그 불안한 예감의 원인을 어렴풋이 깨달을  있을것만 같았다.  
    
 
그날 오후 막차로 돌아온 그는 매우 피곤한듯 돌아오자부터 방에 들어가 눕더니 저녁을 갖춰놓고 불러서야 뜨적뜨적 나와 밥 몇술 뜨는척 하고는 베란다에 나가 풀썩풀썩 애꿎은 담배만 빨아댔다. 그도 나리 없는 집안이 무척 적적한 모양이였다.
    이튿날 그는 시내에 좀 다녀오겠다며 아침해를 바라고 나가더니 밤늦게야 별을 이고 돌아왔다.
  
 
  술을 좀 걸친듯 코김을 씩씩 거칠게 내쉬며 쏘파에 퍼더버린 그는 한참 고개를 젖히고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보고있다가 내가 저녁 갖춰올릴가고 묻는 말에 도리질하면서 말했다.
    《밥은 됐구요, 우리 술이나 좀 마셔요. 오늘.》
    《술은 이미 마시고 온것 같은데…》
    
 
《아, 글쎄 좀 더 마시자구요. 나 오늘 좀 취하구싶어요.》
    내가 맥주 몇병과 마른 안주를 날라오자 그는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련거퍼 맥주 서너컵을 비우고 나서 땅이 꺼지게 긴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누님, 세상사는 게 왜 이리 힘들지요? 왜서 좀 제멋대루  활개치며 살아볼라니까 이리두 못살게 구는가 말입니다.》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뭘. 사노라면 이럴 때도 있구 저럴 때도 있구. 경우에 따라 자기가 하고싶은 일도 마지못해 팽개치는수도 있고 또 하고싶지 않은 일도 피눈물 삼키며 억지로 해야 할 때도 있구. 뭐나 다 자기 뜻대로만  된다면야…》
    딴에는 떡국이나 좀 더 먹었노라고 타이름조로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듬떠듬 주워대는데 그는 실고추빛피발 몇올이 선연한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입귀를 실룩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님두 다 알고있었군요.》
    《네? 내가 뭘…》
    내가 말뜻을 가늠할수 없어 눈만 올롱하게 뜨고있을라니 그는 내 눈길을 피해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두고 중얼거렸다.
    《걔가 임신했다는거 누님 알고있은거죠?》
   
 
 《?! 그럼 은희학생이… 정말…》
    나의 그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음이 확인됨과 아울러 나는 야릇한 긴장감에 몸을 흠칫 떨며 그의 옆얼굴을 할끗 훔쳐보았다. 그는맥주컵을 탁자위에서 빙빙 돌리며 입술을 움쭐거리고있다가 눈길을 떨어뜨린채 맥없이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어떡해야죠 누님?》
    《이젠 나이두 적잖은데 마음 정하구 결혼하시지 그래요?》
    내가 조심조심 권유조로 하는 말에 그의 입귀로는 실망 비슷한 랭소가 일순 스치고 지났다.
    《은희학생두 아직 나이가 어려 그렇지 아주 참하구…》
    《전 결혼같은걸 하고는 하루도 못살 놈입니다!》
   
 
 내가 변명처럼 보태려는 말을 뭉청 가로채고 나오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맥주컵을 들어 입안에 털어넣었다. 여태껏 어리숙하고 유순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어쩌면 일순간에 그토록 생소하고 거칠어질 수가 있을가 하고 나는 신기하게 그 옆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의 따끔한 시선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자기 생각에도 좀 과격했다고 느껴졌던지 그는 수굿하고 손가락마디를 엇누르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요. 누님 말씀대로 그 앤 좋은 애예요. 인정 있고 착하고 어데 가서나 사랑받을만큼 예쁘게도 생겼고… 솔직히 저도 그 애를 사랑한다는 점 부정하지 않습니다. 허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건 아니잖습니까. 서로 사랑한다고 꼭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묶어둬야만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 되는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근성인 점유욕의 변상적인 표현형식일 따름이지 결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길 가다 화사한 꽃이라도 눈에 띄면 꼭 꺾어들고야 시름 놓고 또 그보다 더 예쁜 꽃을 보면 그걸 꺾지 못해 바둥대고 하는 그런 치사한 인간들의 의욕을 두고 뭐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느니 보금자리라느니 하며 흥청거리고있는 인간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리기적입니까. 
 
제멋대로 그냥 내버려뒀더라면 더 아름답게 더 흐드러지게 피여날것을 하필이면 자기 손으로 분질러놓고 또 싫증나면 휙 날려버리는 그 야비한 심태를 어찌 사랑이라 말할수가 있습니까. 사랑은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진정 소중히 여기고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사랑이라면 그냥 그만한 거리에서 서로의 그 순수하고 뜨거운 정감을 마음속으로 감지하고 눈으로 보고 느끼는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어떤 형식적인 결합같은 건 그 순수함을 얼룩지게 하고 서서히 서로의 추악한 일면만 들춰내게 되고 종당에는 파멸에로 이르는 그런 불행밖엔 초래할수가 없어요. 
 
워낙에 만족이란 걸 모르고 허욕만 부리다가 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옛날엔 좀 보수적이긴 해도 그래도 그 보수적인 륜리도덕의 엄한 단속이 있었기에 우리네 조상들은 한번 정해진 인연은 귀신될 때까지 지켜야 한다는 숙명적인 도덕규범 밑에 무조건 순종하며 살아왔고 억지로나마 그것을 영위해왔던것입니다. 적어도 혼인으로 인한 가정파멸같은 추태극은 없었단 말입니다. 
 
헌데 지금은 뭡니까? 현대문명을 떠벌리며 걸핏하면 리혼이요 성해방이요 하며 흥청거리고있는 인간들, 소위 현대문명을 부르짖는 인간들이 고작 한다는 짓이 고작 륜리도덕도 모르고 자기 일신의 안락밖에 모르는 이따위 해괴망칙한 문명입니까. 그런 옹졸하고 비렬한것들을 그래 사랑이라고 할수 있는겁니까.》
    
 
그는 열변을 잠시 멈추고 맥주로 목을 축이고 충혈된 눈길로 나를 흘끗 일별하고 나서 긴 한숨을 토해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남들이야 어떻든 난 그렇게 허위적이고 비렬한 사랑은 못합니다. 단 한번 살다가는 인생을 그렇게 허무한 일들에 소모하고싶진 않습니다. 사내로 태여나서 좀 떳떳하고 자유롭게 온 세상을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싶었습니다… 하긴 이러는 내가 너무 어리석고 부질없는 놈일지도 모르지유. 쳇 내가 뭔데. 나 혼자서 뻐겨봤자 정신질 환자 취급이나 받고 말겠지…푸-―내가 뭔데…》
    그는 자조 비슷한 쓸쓸한 웃음을 입귀로 흘려버리며 초점 없는 눈길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있었다. 
   
 
《일찍 쉬세요. 그럼.》
    그 황당무계한 역설에 어지간히 현혹돼버렸던지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휘청거리는 뒤모습이 방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곁들어 맥주를 조금 마신 나는 가벼운 취기를 느끼며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좀체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의 그 엉터리 같으면서도 어쩌면 일리가 있을 법도 한 기막힌 사랑철학에 어지간히 매료된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같은 녀자로서 그녀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를 않게 안타까웠던것이다.
    
 
술기운 탓인지 이튿날 해가 엉덩이를 내리쬘 때까지 곯어떨어졌다가 비몽사몽간에 뭔가 끈적끈적한것이 얼굴에 와닿는 바람에 어슴푸레 눈을 뜬 나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백리밖에 가있어야 할 나리가 눈앞에 와있었던것이다. 잠기가 채가시지 않은 눈을 두번 세번 비벼뜨며 아무리 뜯어봐도 영낙없는 나리였다.
    《나리야, 네가 어떻게…》
    나는 반가운 김에 나리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내 몸에서 물씬 풍기는 역겨운 악취때문에 훌쩍 떠밀어내며 코를 싸쥐였다. 흙먼지와 아침이슬이 반죽되여 돼지털처럼 거칠고 희뿌옇게 돼버린 온몸 어데랄것 없이 가시열매들이 엉성하게 달라붙어있는 것을 보아 먼 산길을 뛰여온 것임이 분명했다. 몇끼를 굶었는지 배는 훌쭉하게 꺼져있었고 돌부리에 긁힌듯 발가락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배여나와 누른 털에 엉켜붙어있었다.
  
 
  나의 랭담한 태도에 실망했는듯 나리는 끼이잉 하고 원망 비슷한 소리를 뽑아내고는 절름절름 내 방에서 빠져나갔다.
    따라나가 보니 그의 방과 화실 문은 나리가 그랬는지 활짝 열려져있고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리는 내가 둬근 남짓이 익혀준 고기를 게눈 감추듯 말끔히 먹어버리고는 만족스레 입을 쩝쩝 다시며 꼬리를 휘휘 저어댔다.  목욕이나 시켜줄려고 전에 그가 하던대로 고무호스를 찾아 들고 나가니 나리는 기다렸던듯 냉큼 화장실에서 샴프를 물고 따라나섰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손놀림이 무척 서툴렀지만 나리는 가히 리해한다는듯 곱드라니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들이대고있었다.
    
 
고무호스끝을 압축해가지고 비누물을 헹구어내고있는데 홀연 나리가 두귀를 쫑긋 세우며 휙 돌아섰다. 언제 왔는지 과수원의 트기가 백양나무아래 오도카니 앉아서 이쪽을 기웃거리고있었다. 나리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목의 물기를 부르르 떨어내고는 정겅정겅 그리로 뛰어갔다. 둘은 코를 맞대고 씩씩거리다가 서로 핥아주기도 하고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아치기도 하며 살갑게 굴어댔다. 나의 존재같은건 안중에도 없는지 이쪽엔 곁눈 한번 팔지 않았다.
    
 
나는 물이 철철 흐르는 고무호스를 손에 쥔채 멍하니 놈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있다가 까닭모를 배신감같은것을 느끼며 고무호스를 걷어들고 층계를 밟아올라갔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갈 무렵 귀에 익은 발동음이 들려오는것 같아 머리를 돌려보니 나리도 언녕 그 소리를 가려들었는지 집적거림을 멈추고 귀를 쫑긋거리며 고갯길 쪽을 지켜보고있었다. 이윽고 고개길로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나리는 트기를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길로 줄달음쳐갔다.



나리가 마주오는것을 알아본 그는 오토바이를 멈추고 한참이나 나리를 지켜보다가 또 입을 하 벌리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기도 하더니 이윽고 혼자말로 뭐라고 구실렁거리며 부르릉 이쪽으로 왔다. 스스로도 뭔가 켕기우는 모양 그때껏 주저주저 그에게로 선뜻 다가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꼬리만 휘휘 젓고있던 나리는 멀찌감치 뒤떨어져 터덜터덜 따라오고있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오토바이 시동을 끄고나서 그는 뜨아한 눈빛으로 베란다에 서있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글쎄… 아까 아침나절에 불쑥 들어왔던데요.》
    《헛 참, 자식이 밤새 도주해온 모양이군.》
    
 
그는 기가 폭 죽어 걸어오는 나리를 흘끗 돌아보고 어이없는 웃음을 피씩 웃고는 층계를 올라왔다.
    들어오자부터 방문을 꾹 닫아건채 그는 내가 점심 먹으란 소리에도 근근해있었고 나리는 한쪽구석에 축 늘어진채 머룩머룩 눈치만 살피고있었다.
    하루해도 어느덧 다 저물어가고 저녁상을 갖추고 불러서야 그는 기지개를 켜며 뜨적이 방에서 나왔다. 내가 나리먹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가 움찔 일어나서 내 손에 들린 그릇을 넘겨받으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저런 도주병 같은 놈은 몇끼쯤 굶겨야 해유.》
    그리고는 나리더러 어디보라는듯 씽하니 주방으로 들어가 랭장고에 되넣어버렸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그가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측은한 눈길로 나리를 돌아보았다. 나리도 그의 행세가 좀 의외인지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하다가 체념한듯 선 자리에서 한바퀴 빙 돌더니 퍼더버리고 앉아 목을 축 늘어뜨린채 한숨을 푸 하고 내쉬였다.
    
 
《어떡할려구요? 나리를.》
    《래일 또 걸음 한번 해야죠. 뭘.》
    《그 사냥군한테 도루 돌려보낼려구요?》
    《그럭해야죠. 그 친구 지금쯤 아마 쟤가 없어졌다구 눈에 쌍심지를 켜구 찾아헤맬겁니다.》
    
 
《금방 돌아왔을 때 보니까 불쌍해서 눈뜨고 못보겠더라구요. 배가 홀쭉하구 발가락이 싹 갈라터져가지구… 고생이 막심했는가봐요. 오죽했으면 그 먼데서 밤새 도망왔겠어요?》
    《고만한 고생두 못견디구 어데다 써먹겠어요. 고작 집이나 지키구 밥이나 축낼거면 차라리 똥개를 기르기만 못하지. 그래두 명색이 1등공신의 후옌데 그냥 헛살만 찌게 내버려뒀다간 기능이 싹 퇴화되구 페물이 돼버린다니깐요.》
    
 
더 이상 말해봤자 괜히 그의 야기된 심기나 잘못 건드릴것 같았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그저 측은한 눈길로 나리에게 미안함과 동정을 표하는것뿐이였다.
    이튿날아침, 그들이 길을 떠나야 했으므로 평소보다 좀 일찍이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던 나는 문옆에 늘어져있는 나리를 보고 무망간 새된 소리를 지르고말았다. 나리의 발목에서 피가 즐벅하게 흘러나와 마루바닥을 즐펀히 적셔놓았던것이다.
   
 
 나의 비명소리에 그가 팬티만 입은채 황황히 뛰쳐나왔다.
    《뭡니까?》
    《저걸 보세요.》
    나의 손길을 따라 나리를 돌아보던 그도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나간듯 입을 딱 벌리고있더니 급기야 다가가서 조심조심 피가 즐벅한 나리의 앞발을 들고 살펴보았다. 나리는 목을 축 늘어뜨린채 두눈만 살아서 슴벅거릴뿐이였다.
    한참 그렇게 들여다보던 그는 어이없는 웃음을 입귀로 흘려버리며 화실에서 천쪼박을 가져다 상처를 대충 동여주고는 옷을 껴입고 나오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저 병원에 갔다 올테니까 누님은 걔 먹을거나 좀 덥혀줘유.》
    그때까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 한켠에 멍하니 서서 구경만 하고있던 나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먹이를 끓여서 나리앞에 갖다놨으나 놈은 입 한번 뻥긋 않고 근근해있었다.
    
 
내가 어르고 닥치고 하며 한창 애를 먹는데 그가 의사와 함께 들어섰다. 그 의사는 환자가 나리인것을 알자 큰 모욕이라도 당한듯 붉으락푸르락 해서 그냥 돌따져 나가려 하였다. 아마도 그가 사정이 긴박한김에 향위생소에서 당직서는 의사를 구슬려 데려온 모양인데 그 의사도 아마 접때 내가 이리로 오던 때처럼 그 집식구라는 말을 믿고 그냥 어리숙하게 따라나섰던 모양이였다.
    
그가 비난사정을 하며 의사의 팔을 잡고 늘어지고 나까지 곁들어 간곡히 만류한 덕에 의사는 툴툴거리며 비로소 왕진가방을 내려놓았다.
    처치를 마치고 또 그의 간곡한 청구에 의해 단백질주사까지 한병 사다맞힌 후에야 나도 겨우 한숨 돌리며 대체 어찌된 일인가고 물을수 있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나리를 지켜보며 피씩피씩 웃기만하던 그는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탁 소리나게 치며 이죽거렸다.
    
《헛, 글쎄 이놈이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자살?! 어머나 그럼...》
    나도 그 말엔 입이 딱 벌어지고말았다. 그렇다면 나리는 분명 엊저녁 우리 둘의 대화를 알아들었던것이다. 목숨까지 내걸고 안갈려고 버티는 그 리유는 과연 무엇일가… 정말 그의 말대로 야성이 없어지고 기능이 퇴화된 것일가… 종잡을수 없는 의혹들이 머리를 어지럽혀왔다.
    
《그래, 니가 이겼다. 자식아, 이젠 속이 좀 후련하냐? 이젠 그리로 다시 안 보낼테니까 시름놓구 이거나 어서 먹어. 자식.》
    그가 쭈크리고앉아 그릇을 코밑에 들이밀어서야 나리는 청승맞게 눈을 꺼벅꺼벅 하더니 먹이그릇에 코를 갖다대고 벌름거렸다. 승리자의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모습이였다.
    
그는 아침을 대충 먹고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침부터 찌쁘둥하던 하늘은 점심때가 좀 지나서부터 이슬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라고 몇번 불러도 아무 응대 없던 그가 방에서 나온것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 물안개처럼 잔잔하던 비발이 제법 추적추적 거칠어지고있을 무렵이였다.
    
《저 시내 좀 다녀올게요.》
    《……》
    그는 찌프린 눈살로 바깥을 흘끔 내다보더니 옷깃을 치켜세우고 휑하니 뛰쳐나갔다. 잠시후 오토바이 발동음소리가 부르릉 하고 멀리 사라져갔다.
    
이불보 같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을 무렵에야 그는 한구럭 가득 술안주와 양주 두병을 들고 돌아왔다. 또 무슨 속상한 일이 생겼나보다고 내가 술잔을 갖춰놓고 그의 기색만 살피고 앉았는데 그는 그저 시무룩히 웃으며 두잔에 골고루 술을 따라서 나에게 한잔 건네주었다.
   
 《저 결혼해요. 누님.》
    《?!….》
    《왜요, 축하 안해줘요? 믿어 안져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예, 허허, 물론 그러실테죠. 나두 좀 급작스러워서 아직까지 어지간히 당황한걸요. 허허.》 
    《어떻게 그런…》
    
《예, 글쎄 실은 나리가 나더러 이런 결심을 내리게 한거라구 해야겠죠. 그렇지? 나리야.》
    그는 나리를 힐끗 돌아보며 씽긋 웃고는 다시 나에게 잔을 들어보였다.
    아무래도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내가 아리숭한 표정을 하고있을려니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씩 하고 웃으며 뚬뻑 물어왔다.
   
 《나리가 왜 돌아왔는지 압니까?》
    《그거야 산의 생활에 적응하기 바쁘니까 그런것 아니예요?》
   
 《천만에요, 나두 첨엔 그렇게 생각했었죠. 근데 그게 아니였어유. 아까 아침에 의사 청하러 가는 길에 저 뒤산 과수원의 트기가 저앞에서 어른거리는것을 우연히 봤거든요. 근데 그놈의 배가 더부룩한게 새끼를 밴 게 분명했어유. 그러구 보니까 다 알만하더라구요. 
 
쟤가 그 백리길을 탈탈거리며 뛰여온것두 또 자기 발목을 물어뜯은것두 결국엔 그놈의 트기때문에 그러니까 그 트기 배속의 자기 피줄때문에 그런거였지유. 쳇, 그래서 결국엔 오늘 내가 쟤한테 훈시를 받은꼴이 된 거쥬. 쟤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고 자살까지도 서슴치 않는데 나는 뭡니까. 비겁하고 졸렬하게…나야말로 자기 일신의 안락밖에 모르는 자사자리한 놈 아닙니까. 허허, 정말 면목없게 됐습니다. 허허허.》
    
그는 고개를 젖히고 한동안 껄껄 웃어대였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그처럼 허탈하고 처량하게 들려올수가 없었다. 환희의 극치에는 눈물이 있다는데 어쩌면 그 웃음은 절규와 체념끝의 무가내와 같은 그런 처절함의 발설이였을는지도 모른다.
    측은한 눈길로 그 옆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 말고 내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오직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 결혼한단 얘긴가요?》
    《예? 책임? 허허, 물론 책임이야 질건 져야겠죠. 허허허.》
    《누가 책임지라고 강요하던가요? 그 은사님이?》
   
 《천만에요. 그 분은, 우리 선생님은 강직하고 또 배짱도 두둑한 분이시지만 절대 남한테 책임같은걸 강요할 그런 분은 아닙니다. 어떤 어르신이라구요. 걔가 그러는데 이번 일두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내삐치지 말구 혼자서 뒤일을 깨끗이 수습하라더래요 글쎄. 열살나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만 믿고 고이고이 자라온 앤데 그 말을 듣고는 어찌나 실망했는지 자기 아버지가 옳은가 하고 다시 쳐다봤다나요. 허허, 오늘 내가 마침 내려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애매한… 허허, 그리구 누님 말씀대루 걔 나이 좀 어려 그렇지 착하구 알뜰한 애 아닙니까? 허허.》
    
《하기는 그렇게 순진하구 참한 애들이 지금 세월엔 별로 흔치야 않지요. 하지만…》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쩐지 찜찜하다. 그거죠?》
    《……》
  
  《허허, 저란 놈은 워낙 천성이 그래요. 헛, 글쎄 좀 덤벙덤벙해 보일진 몰라도 저로 놓고 말하면 특유의 자본이라고나 할가요. 뭐나 일단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밀어붙이는것입니다. 아무때건 무시로 언뜰언뜰 뇌리를 스치는 그러한 순간적이고 우연한 감각들을 포착해서 그대로 화면에 옮겨담을수 있는 능력 그게 바로 제가 그림을 그릴수 있는 밑천이 돼주거든요. 그리구 저의 세계관이란것두 그래요. 한마디로 순간적이고 우연한게 우리 인생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모체에 잉태되고 이 세상에 태여난다는 자체부터가 우연이고 순간적인것 아닙니까. 그렇게 우연하게 태여난 우리는 또 언제 어디서 우연하게 순간적으로 꺼뻑하고 없어지고만다는것도 망각한채 딴에는 그 미지의 래일을 동경하며 아둥바둥 악을 쓰는것입니다. 허허허. 이거 뭐 쓸데없는 소리가 많아졌네. 잡담 이만 집어치우고 술이나 기껏 마시구 그래요. 앞으로 언제 또 이렇게 마주앉을 날이 있겠는지.》
    
《결혼은 언제쯤 할려구요?》
    《그거야 뭐 아무때나 래일이라두 하구싶으면 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허허, 근데 누님은 우리 결혼식에 오시는거죠?》
    《그럼요, 청하지 않아두 가봐야죠.》
    《하하, 그렇지. 역시 우리 누님 최고다. 참, 그리구 부탁할것 하나 있는데요.》
    
《무슨…?》
    《다름 아니라 저 나리 땜에요. 쟤를 시내로 데리고 간다는건 말도 안될 일이구 또 어디 맡겨놓을 곳도 마땅한 데가 없으니 될수 있으면 누님이 어떻게 한동안 보살펴줄수 없겠는지 해서요.》
    《전 아무래도 괜찮은데 나리가 말 들을가요?》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제 말 잘 들으니까. 야, 나리야, 너두 좋겠다. 이렇게 무던한 누님 만나서. 자식, 말 잘 들어야 해. 응? 이후에 종종 널 보러두 다닐테니까.》       
     나리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엉거주춤 일어나서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그렇다면 념려 마시구 제게 맡기세요. 정성껏 보살펴 줄테니까. 저 근데 언제 내려가실려구요?》
    
《예, 이왕 마음 정한바 하고는 래일 그냥 정리하고 내려갈렵니다. 제가 먼저 내려가서 택시를 한대 잡아 올려보낼테니까 누님은 그냥 문만 잠궈놓고…》
    《예…》
    나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지막이 응수했다.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깃들고 둘은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미안해요, 사전에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급작스레 굴어서… 그동안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냥 이대로 있는것이 좋았는데…》
    말끝이 조금씩 떨리는가싶더니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을 들먹거렸다. 물기 그득한 두눈이 등불아래 유난히 번들거렸다.
    
《차츰 뭐나 조금씩 적응해가노라면 다 좋아질거예요. 적자생존이란 말처럼…》
    그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나를 마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둬번 끄덕끄덕해보였다.
   《자, 그럼 두분의 행복을 미리 축원해서 깐베이!》
    내가 활짝 웃는 얼굴로 잔을 들어 보이자 그도 씽긋 따라 웃으며 잔을 맞들었다.
  
  멋모르고 권하는대로 양주를 받아 마셨더니 얼마 못가 사맥이 나른해지고 의식마저 가물가물해져갔다.
    이튿날아침, 눈을 뜨고 보니 그가 들어다놨는지 나는 내 침대에 말짱하게 누워있었다. 흐리터분한 정신을 수습하며 방에서 나와보니 그는 이미 간소한 행장을 꾸려놓고 나리와 뭐라고 지껄이고있었다.
    《왜요? 지금 떠나실려구요? 아침두 안먹구?》
    《아침 생각 없어유. 어차피 가야 할 길인데 일찌감치 가버리는게 좋지유.》
    
《그래두…》
    내가 미처 뭐라고 덧붙일 사이 없이 그는 이미 멜가방을 걸머지고 출입문을 향하고있었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얼추 손빗질 하며 그뒤를 따라나섰다. 나리도 그 불편한 다리를 가둬붙이고 따라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찌쁘둥하니 흐려있었고 간밤에 서리가 내렸는지 내가의 해묵은 백양나무가 노오란 단풍잎들을 수북히 떨어뜨려 놓았다.
    
묵묵히 오토바이를 밀고 백양나무아래까지 가서야 그는 오토바이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이거 순서가 좀 엇바뀐것 같아서 이상한데요. 허허… 나리야, 너 말 잘 들을거지 응? 그래, 잘해. 임마.》
  
  《그럼 살펴가세요. 잔치때는 제가 떡을 마련해갈테니까 어머님께 그렇게 여쭈세요.》
    부르릉…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렸다. 나리가 성한 앞발을 껑충 들어 그의 다리를 짚고 선채 눈물이 핑그르르해서 끼잉 끄응, 애처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역시 아쉬운듯 나리의 목덜미며 머리를 어루쓸어주던 그는 눈을 들어 아직 메마른 가지에 매달려 애처롭게 파르르 몸을 떠는 나무잎사귀들을 쳐다보고있었다.
    《누님…》
    《……》
    
불러놓고는 할 말을 잊은듯 머뭇거리다가 한참만에 말을 이었다.
    《누님, 참 편한 분이셨어요. 그동안 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는 버릇처럼 씩 웃어보였다. 쓸쓸함의 한자락이 입귀에 머물다 사라졌다. 부르릉 오토바이는 잠간새에 저만치 굴러가고있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처량해보이는 그 기름하고 야윈 뒤모습은 드디여 꿈결만 같이 아리숭한 운무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리가 불편한 다리때문에 몇걸음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서 목을 길게 빼들고 애처로운 소리로 울어댔다. 승냥이의 포효와 같이 몸서리치도록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내가 은근히 걱정해왔던 바와는 달리 우리 집 식구가 된 나리는 아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지냈다. 근데 내 머리속에서 시종 떨쳐버릴수 없었던 의혹은 나리가 여직껏 단 한번도 과수원  지키던 트기를 되찾아갈 그 어떤 조짐이나 반상적인 행위같은것이 없는 점이였다. 접때 사생결단을 하고 그 의리를 지키느라 물고 늘어지던 때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난해한 일일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체념해버린거겠지 아니면 그 의리란것도 이젠 시간의 흐름속에 색바래졌을 테고. 하는 막연한 추측으로 공연히 부질없는 일에 허황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눅잦혀 보려고도 했지만 그럴수록 과연 그때 나리가 일으킨 소동이 정말로 그 트기와 직접적인 련관이 있었던걸가 하는 의심의 농도는 점점 짙어만갔다.   
    
《에그, 지금 젊은이들 일은 정말 모른다니까 글쎄. 새파란 나이에 결혼한지두 석달배께 안된다더구마. 어쩌문 쯧쯧.》
    《그래 어째 그렇게 됐담둥? 술 취해서 그런게 아이람둥?》
   앞좌석에서 보따리장사꾼인듯한 년세 지긋한 두 안로인네가 주고받는 말소리에 나는 깊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그게 글쎄 아무리 봐두 그저 술취해서 그랜건 같재터라꾸마, 술은 좀 마셨더라만 취할 정도까지는 아이더라꾸마. 글쎄 그날에 우리 조카가 차를 몰구 나갔다가 딱 바루 곁에서 목격했다는데 그 있잼둥, 철길량켠에 기차가 올때문 올렸다 내렸다 하는 가름대 있재쿠 뭐임둥, 빨간 신호등이 케지구 그게 다 내레올 때까지 멀쩡하게 오토바이를 탄채 두다리르 내리우구 서있던게 글쎄 기차가 뿡― 하구 거의 다가올 임박에 불시루 그저 부르릉 하데만 그 가름대밑으루 쑥 빠저들어가더라잼둥. 
 
그래이깐 그저 낙재없이 기차대가리에 툭 치워서 몇십메터를 뿌려나가서 즉사했다지 뭐임둥. 에그, 그 참상이야 그저 생각만 해두 끔찍합지. 어쩌문 그리두 모질은지 각시랑 금방 학교를 졸업한게 인간 착하구 또 인물체격도 츨츨하다던데. 임신했다던게 어떻게 돼서 뭐 애가 떨어졌다던지 어쨌다던지… 마 그 일땜에 그랬는두. 아무리 그러기로 글쎄 산 사램이 중하지. 그런 일루 죽기까지야 하겠음둥. 쯧쯔쯔…》
    
《에그, 쯔쯔 그래게 말이오. 혼자 가믄 각시랑은 어쩌고… 모질기두 해라. 그러게 요즘 젊으이들은 그저 제 생각배께 할줄 모른다재오. 우리 그때마 해두… 그래 무슨거 하던 사램이라오?》
    《그림쟁이라 합더구마. 이름이 김아무개라 하던데 어쨌든 예 지금 그 나또래서는 꽤 한다하는 그림쟁이라꾸마.》
    
《에그에그, 그러게 지금 젊은 사람들 일이야 어찌 알겠슴둥, 그저 하루 새로운게 요즘 세월입지비. 쯔쯔.》
    뻐스는 이미 모아산 굽이를 내리달리고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을 소복소복 떠인 검푸른 소나무들을 근경으로 하고 멀리 보기에만도 매캐하고 숨막힐듯한 연무가 낮게 드리운 시가지의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선뜻 정이 가닿질 않는 혼탁한 풍경이였다.
  
  저 세상에서 좀 살아 버티기가 그토록 힘겨웠을가.
    그토록 총망히 떠나버려야 했던 그는 과연 소원대로 이 침침하고 매캐한 속세에서 해탈된것일가…
    한편 그렇게 시름없이 속세를 떠나간것도 그에게는 행복일거라는 생각을 문뜩 했다.
    그의 기름하고 초췌한 뒤모습이 저 몽롱한 연무속 어디에선가 어른거리고있는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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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견이
날자:2011-12-14 06:33:18
youngok님, 초라한 집에 들러주시고 자취까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1   작성자 : youngok
날자:2011-12-13 16:37:47
견이씨,
오늘 우연히 동녘해 작품을 보다가 방문 흔적을 남긴 견이씨 들판에 들어섰습니다...
아직 작품을 읽을 만한 시간을 갖추지도 못했고...
회사 출근 여유를 내서 잠간 들러본 공간이기도 합니다.
사사로운 것들을 벗어나서 공유할수 있는 세상이 열져있는것이 어찌보면 다행스런 일이고 진부적인 일이라 판단되면서...
견이씨 건강과 사업을 비롯하여 모든 일들이 성취될것을 기원할게요...
좋은 작품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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