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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의 죽음(단편소설)
2011년 12월 04일 07시 34분  조회:4119  추천:1  작성자: 견이
영호의 죽음
김 견



영호는 군인출신이였다. 그는 참군해서2년만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제대한후에는 고향인 룡정시 모 향정부에서 공청단 지부서기직을 력임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향정부 행정일군이라 하면 철밥통을 갖춘거나 다름없었고 또 누구 못지 않은 남자다운 인물체격을 갖추고있어 향정부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중매군들이 문턱이 닳게 드나들었고 용모가 이쁜 꽃나이의 처녀들이 무시로 추파를 던져오군 하였다.
하여 얼마후 영호는 그중 가장 아련하게 생기고 중등전문학교를 나와 향 세무소에서 출납원사업을 하는 분녀라는 처녀와 결혼하여 이듬해에 귀여운 아들까지 보았는데 부부간의 금슬은 말그대로 깨가 쏟아지게 자르르했다.
그러던 얼마후 아들이 다섯살나던 해부터 분녀가 사업상 일로 연길로 자주 드나들면서부터 끔찍하기만하던 그들 부부간의 사이에 차츰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녀가 외박하는 날이 많아짐에 따라 영호의 술주량도 날로 늘어나 술마시고 주정부리는 일들이 많아졌다. 분녀가 세무소 일을 핑게로 연길에 분주히 드나들면서 한국상인인가 뭔가 하는 웬 중년사내와 배가 맞아 돌아간다는 어지러운 소문이 떠돌았던것이다.
분녀가 외박해서 사흘만에 집에 돌어오는걸 기다려 그가 단단히 따지고들었더니 분녀는 이거 생사람 잡는다고 동네방네가 떠나가게 울고불고 하더니 그날 저녁으로 짐을 싸들고 눈물코물 줴짜는 어린 금석이까지 매정하게 떼버려둔채 본가집에 가있는다며 떠난후론 이태가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였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국상인이라는 작가와 언녕부터 약속을 해놓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중 영호가 그날 저녁 슬마시고 행패를 부렸다는것을 핑게로 얼씨구나 하고 몸을 빼여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말도 있고 또는 위해에서 미장원인지 뭔지 차리고있다는 말도 돌았다.
입에서 입으로 번져지는 말들이라 어느것이라고 딱히 짚기는 어렵지만 처가편에서도 행방을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영호의 평온한 생활은 엉망이 되여버렸다. 어린 아들이 자기와 함께 자주 굶게 할수가 없어 부모님들한테 맡겨놓고 영호는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보냈다. 그러다보니 자연 사업에도 영향이 많아 차츰 상급의 신임을 잃게 되였고 또 감원이다 뭐다 해서 얼마 못가서 정리실업당하였다.
옆에서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여러 모로 보탬도 해주고 조언도 주었지만 그러한 조언들이 먹어들리 만무했다. 영호의 부모님들도 몇번이고 찾아와서 얼리고 닥치고 했어도 막무가내였다. 십전짜리던 이십전짜리던 돈이라는 명색을 띤것이 눈에만 보이기만하면 무작정 집어들고 소매점으로 달려가 술을 사먹었으며 돈이 정 없으면 비위를 무릅쓰고 외상을 달라고 소매점주인을 닥달하군 하였다.
하여 짧디짧은2년사이에 전에 그렇게 듬직하고 삶에 충실하던 영호의 원모습은 오간데 없고 아침나절부터 게슴츠레한 두눈에 희뿌연 머리가 들쑹날쑹하고 때국이 흐르는 누더기같은 옷을 걸치고 술좌석이란 술좌석은 결혼, 환갑, 생일은 물론이요, 강건너 송포수네 집 사냥개가 새끼를 낳았다 해도 어김없이 찾아가 축하의 말을 해주고는 술 한잔이라도 얻어먹고야마는 술귀신으로 타락해버렸다.
하루는 초겨울의 맵짠 추위도 무릅쓰고 어린 아들을 보러 왔다는 핑게를 대고 시골집에 술 얻어먹으러 갔다가 뒤가 부옇게 아버님한테 혼쌀만 얻어먹고 돌아져나오는데 그래도 자식이라고 측은히 생각했던지 로모가 따라나오며 겨울솜옷을 싼 보따리속에 돈10원과 꼬량주 반병을 몰래 감춰가지고 나와 영호 손에 쥐여주며 장탄식을 하였다.
《에그, 에미가 언제까지 네 술시중을 들어줘야 하겠느냐? 이젠 제발 좀 정신을 차리구 살도리를 해야 할게 아니겠냐? 래일은 네 아버지랑 금석이두 데리구 연길에 있는 오라비네 막내 결혼잔치에 다녀올것이니 너 배가 고프거들랑 집에 와서 절로 챙겨먹거라. 찬장에 술두 좀 찌워두구 가겠으니.》
눈굽을 찍으며 돌아서는 로모를 멀건 눈길로 바라보던 영호의 뇌리에는 기발한 생각이 획 떠올랐다.
(그렇지, 차비두10원 있겠다. 래일은 연길로 쳐들어가는거다. 오래간만에 연길구경두 할겸 말이야. 꿩먹구 알먹기지, 히히. 가만 있자. 근데 연길에 있는 엄마 오라비네 막내라면 오! 그렇지 용우란 놈이겠구나. 히야, 그 녀석이 벌써 장가를 들다니. 세월 빠르긴 빠르다. 엊그네까지 코물 지지 흘리며 형님, 나 참외 먹구싶다 하던 녀석이 벌써 장가를 들게 됐으니. 그래, 오래 살다보니 네 잔치술두 얻어먹게 되는구나.)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모가 찔러준 꼬량주를 입에 털어넣으며 걷노라니 세상이 오늘처럼 평화로울수가 었다. 길 지나다가 한쪽 다리를 힌둥 쳐들고 오줌을 찍 싸대는 동네 똥개도 귀염성스럽게만 보였고 달구지를 끌고 올리막을 톺아오르느라 코김을 킁킁 뿜어내는 둥굴이도 친근하게만 느껴졌고 수탉 한마리가 암탉을 타고앉아 교미하는 모양도 그처럼 재미있을수가 없었다.
이튿날아침, 주린 창자를 달래며 뻐스역에 도착해보니 마침 연길가는 뻐스가 막 시동을 걸고있었다. 냉큼 뻐스에 뛰여올라 자리를 잡고앉으니 뒤좌석에 앉은 안면이 있어보이는 한 청년이 무슨 심심풀이라도 생긴 모양, 장난끼 어린 말투로 물어온다.
《허, 이거 지부서기나리 아니유? 어쩐 일루 이렇게 신새벽에 길을 떠나슈?》
《연길에 좀 볼 일이 있어서…》
《보나마나 또 술 얻어먹을 일이 생긴 모양이구먼.》
《사촌동생이 결혼하다는데 갈 사정이 좀 그렇다는데두 기어코 오라길래…》
《사촌동생이 결혼잔치라. 그럼 가봐야지, 가봐야구말구. 그런데 서기나리는 부조를 얼마나 준비하구 가시는게유?》
《?!》
말문이 막혀 뒤더수기를 긁적이는 영호를 보고 여기저기서 킬킬거렸다.
(아참, 그걸 미처 생각못했구나.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 사촌형인데 부조야 다문 얼마라도 해야 할게 아닌가. 부조란 워낙 성의를 표시하는거니만큼 단돈5원이라두 성의로 내놓으면 외삼촌두 좋아하실거야. 나머지로는 오는길에 배갈 두냥만 쪽 하면 될게구. 근데 가만 있자.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한다? 한쪽 차비가3원 넘어하는데 올 때는 무슨 돈으루? 에라, 모르겠다. 사촌네 집에서 어련히 차비를 대주지 않을라구? 이미 표까지 끊었는데 도루 물릴순 없는 일이구, 때가 되면 어떻게 풀리겠지. 이왕 내친 걸음에 연길구경 한번 하는 셈치구. 가만 있자, 이번 연길행이 몇해만이던가. 아마 사오년은 될걸. 히야, 그동안에 연길두 많이 변했겠구나…)
인간의 도리를 한다는게 영호에게는 이미 낯선 일이지만 이날만은 어쩐 일로 사촌이라는 명분을 지킬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연길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영호는 그동안 너무나 변모한 도시의 모습에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수가 없었다. 얼마동안 못봤던가? 영호가 아들 첫돌사진을 찍는다며 안해와 함께 왔던가? 그때는 둥둥 뜬 기분에 아기자기 서로 자기가 아이를 안겠다고 달콤한 싱갱이질 하면서 왔던 기억이 났다. 순간 영호의 가슴에 짜릿한 아픔이 일었다. 이젠 다시 기억하고프지 않는 옛일이다. 지금까지 그냥 자신을 기억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며 하루하루를 보낼뿐인데 왜 갑자기 기억의 보따리가 풀어질가!
길손 하나 붙들고 옛날 외삼촌에가 살던 동네 이름을 기억하는대로 떠듬떠듬 들려주며 길을 물어 겨우 찾아간 외삼촌네 집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영호는 정신없이 양철판을 씌운 대문을 두들겨댔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누구세요?》
거의 절망적으로 하늘을 퀭하니 쳐다보고 섰는데 옆집에서 요란하게 문두드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늙수그레한 아낙네가 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며 조심히 물어온다.
《아주머니, 이 집이 리학수라구 하는, 거 림업국에 다니던 그 분에 집 맞지유?》
영호는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모든 희망을 그 아낙네의 대답 한마디에 건채 마음을 조이고있었다.
《맞는데유. 근데 어떻게 되는 분인지?》
《그분 조카되는 사람인데요. 저기 막내아들이 오늘 결혼한다 하길래…》
《그 집에서 다 결혼식장에 나갔겠는걸유.》
《아니, 결혼식장이라니. 그럼 집에서 결혼식하는게 아니구 다른데 가서…》
《그럼 손님은 결혼식장이 어딘지 모르고 오셨단 말씀이슈?》
영호는 게면쩍게 웃으며 뒤더수기를 긁적이였다.
《결혼식장을 아마 저 신라호텔인가 어디에다 잡았다는가 하던데유.》
《예? 신라호텔?》
《시골서 오신 분 같구먼유. 저 이 길루 쭉 나가서 큰길에 가면 뻐스정류소가 있는데유. 거기서2선 뻐스를 타면 신라호텔에 갈거유.》
영호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연신 허리를 굽석이며 물러섰다.
영호는 신이 잔뜩 나서 막 날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어마어마한 결혼식장에 자기가 척 귀빈대접을 받으며 들어설걸 생각하니 온몸이 붕 뜬 기분이였다.
2선 뻐스를 잡아타고 차비40전을 물고나니 이젠 부조돈밖에 남지 않았다. 승무원처녀가 귀찮아할 지경으로 거듭거듭 신라호텔을 지나치지 않았나 하고 묻고 또 물으며 네댓정거장 지나니 과연 신라호텔에 이르렀다.
어데로 들어가면 좋을지 몰라 두리번두리번거리는데 길 저편에 외삼촌과 숙모가 손님들을 맞아들이느라 바삐 돌아치는 모습이 멀찌감치 보였다.
영호는 단숨에 큰길을 뛰여건너 다짜고짜로 외삼촌을 얼싸안고 돌아갔다.
《어엉?! 이게 누구야, 이 눔 영호 아니냐? 네눔이 어떻게 여기까지? 이거 좀 내려놔! 망신스럽게 이게 뭐야?》
영호의 당돌한 출현에 기겁초풍할듯이 놀란 외삼촌 내외는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귀빈들이 한창 막 들이닥치는 판국에 중뿔나게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으니 그럴만도 했을것이다.
《삼촌, 그동안 잘들 보내셨수? 외숙 모두 그냥 깨깟하시구유?》
멍해서 어쩔바를 모르는 외삼촌내외를 번갈아보며 영호는 자기가 너무 반가와 그러는줄 알고 입도 못다물고 흐물거리고있었다.
《어서 저리 비켜섰거라. 사돈들이 들이닥치는가보다. 나 원, 지지 부탁했는데 쯧쯧…》
외삼촌이 신경질적으로 영호를 한켠으로 밀쳐내고는 옷깃을 여미며 만면에 웃음을 짓고 손님들을 맞아나갔다. 외숙모도 흰자위만 잔뜩 남은 눈으로 영호를 흘기며 뭐라고 통통 부은 소리를 하더니 인차 만면에 웃음을 떠올리며 사돈들을 맞았다.
어정쩡하게 한켠으로 떠밀려난 영호는 좀 머쓱해지긴 했지만 외삼촌내외가 바삐 돌아치는 모습들을 보고있노라니 너무 분주하다보면 나같은 가까운 친척들도 미처 돌볼 사이가 없어서 그러겠지 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한켠에 비켜선채 문켠으로 몰려오는 손님들을 보고 누구라없이 굽석거리며 반가운양 제법 주인행세를 했다.
새각시 온다.
오구작작 떠들어대는 쪽을 바라보니 까마반지르한 승용차가 스르륵 다가와 서는데 차체앞에 달린 금빛 동그라미안에 사람 인자가 박힌 멋진 상표가 눈을 끌었다. 이윽고 차문이 열리고 멋진 례복차림을 한 신랑 용우가 성큼 내려섰다. 몇해 못본 동안 키도 훤칠하게 컸고 인물도 희멀끔하게 잘 번져있었다.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새색시가 수태를 머금은채 머리를 잔뜩 수그리고 조심조심 차에서 내리자 신랑 용우가 새색시를 번쩍 안아들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영호가 구경군들 틈을 비집고 나오며 손벽까지 쩍쩍 쳐대자 이쪽을 힐끗 건너보던 신랑이 못볼것을 본것처럼 대번에 눈살이 꼿꼿해가지고 휭하니 들어가버린다.
(허허, 이젠 제 형두 몰라보는 모양이군, 허참.)
영호는 맹랑하듯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그것도 잠시뿐 이내 벌씬벌씬 웃으며 래빈들 뒤를 늘쩡늘쩡 따라갔다.
여유만만하게 출입문께로 다가가니 이건 또 뭐냐? 들어가는 사람마다 입구 량켠에 보초병처럼 갈라서서 허리를 갑삭거리며 반갑게 맞아주는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하얀 봉투들을 하나씩 쥐여주는것이 아닌가. 또 그옆에는 테블 하나를 놓고 젊은 사람이 앉아서 손님들이 내놓는 돈을 받아넣고 종이에 이름을 적고있었다.
(가만 있자. 보아하니 여기서는 부조란걸 저렇게 봉투에 넣어서 주는가부다>)
나름대로 짐작하며 영호는 앞사람들이 하는 거동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고 일단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영호앞에서 걸어가던 이마에 피도 안말라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백원짜리 석장을 두툼한 지갑에서 쑥 뽑아내여 외삼촌에게 준다.
외삼촌이 침방울까지 튕기며 연신 차사를 하더니 돈을 넙적 받아서 미리 들고있던 가방안에 쓱 밀어넣고는 다음 손님을 기다린다.
(히야! 시내놈들이 어벌두 크긴 크구나.)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놀란 영호는 혀를 홰홰 내두르며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물러서서 부시럭부시럭 호주머니들을 뒤졌다. 온몸을 다 뒤져봤자 단돈6원밖에 없다는걸 모른는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뒤지고 또 뒤져 웃옷호주머니부터 양말목까지 샅샅이 뒤져봤으나 나오는건 먼지뿐이라 체념하는수밖에 없었다.
(에라,나같은 가까운 친척들이야 뭐 부조를 안한단들 탓할라구, 뭐 단돈5원이라두 성의만 표시하면 그만이지.)
영호는 마음을 다잡고나서 성큼성큼 출입문께로 걸어가서 걸어가서 꼬깃꼬깃한5원짜리 지페를 쪽 펴서 두손으로 정중하게 외삼촌한테 내밀며 말했다. 차비야 외삼촌네 어련히 주지 않으랴만 혹시나 해서1원은 남겨두기로 했다.
《에헤, 이거 약소하지만 성의루 받아주시우.》
기가 막혔는지 입을 딱 벌린채 서로들 쳐다보고만 있더니 한참만에 외삼촌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에끼, 이 놈. 예가 어디라구 이따위루 장난을 치는게냐? 얼른 썩 물러나지 못할고.》
그통에 영호도 그만 어리벙벙한 눈을 머룩거리며 외삼촌네 내외와 손에 든5원짜리를 번갈아보기만할뿐이다. 아무래도 외삼촌이 성내는 까닭을 모르겠다는것이다.
한참만에 외삼촌이 좀 과분했다싶었던지 뒤에 대고 누군가를 부르더니 아직 노기가 덜 가신 어조로 말한다.
《이놈아, 우리가 아무리 구차하기루 너같은 놈의 부조는 안받구두 넉넉히 산다. 덜돼먹은 수작을 하지 말고 얼른 애를 따라 들어가서 아무거나 얻어먹구 얼른 떠나거라.》
그리고는 부름을 받고 나온 한복차림의 젊은 각시에게 여차여차하라고 나지막이 분부한다.
하지만 영호는 그래도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한 인사치례를 하는 사람이다. 이 몇해는 호주머니사정이 안좋아서 술비렁뱅이가 돼버렸지만서도 그 한오리의 량심은 있엇다. 그래서 기어이 그 돈5원을 테블앞에 앉아있는 청년한테 쑥 내밀어주고는 의아해하는 청년의 표정은 관계하지 않고 입이 함박만해져서 한복차림을 곱게 한 외삼촌네 둘째며느리일듯싶은 젊은 각시의 뒤를 따라들어가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삼촌네 내외에 대한 치사를 해댔다.
영호가 안내된 곳은 례식장 맞은편에 있는 어둑시그레한 숙직실 비슷한 단간방이였다.
젊은 각시는 례식장쪽을 흘끔거리는 영호에게 눈을 샐쭉 흘기고는 어디론가 갔다가 한참만에 꼬량주 서너량 담긴 술병에 큼직한 사발 두개에 뭐가 뭔지 모르게 마구 엇섞여진 안주들과 증편 서너개를 얹어왔다.
술상을 갖춰왔다고 반색하던 영호의 얼굴에도 다소 그늘이 비꼈다. 젊은 각시는 영호에게 입을 삐죽거리고는 치마폭에 바람을 일구며 사라졌다.
너저분한 술상에 좀 고까운 생각은 없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술 몇냥이 오른것만도 다행이였다. 넙죽 다가앉아 술마개를 열었다.
알콜이 식도를 타고 쭉 내리꿰니 세상 살 때를 만난것 같았다.
안주도 이것저것 뒤집어보니 고사리와 콩나물인줄로만 알았던 그속에 그래도 고기 몇점은 들어있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잠간새에 술병을 다 비우고나니 너무 급히 마셨구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술을 좀 더 얻어올 요량으로 엉금엉금 나와보니 례식장에선 한창 결혼의식이 진행되고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안면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다가 에크, 눈살을 잔뜩 찌프린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쳤다. 어물쩍 찡긋 웃어보이고는 그 눈길을 피해 한쪽 구석으로 숨어들어 사람들 틈새에 비집고 들어앉았다. 초라한 행색에 술내를 풍기는 영호의 출현에 사람들이 열병환자를 피하듯 상을 찡그리며 멀지감치 피해섰다.
영호는 그 사람들이 자기한테 자리를 양보하느라고 그러는줄 알았던지 갖은 친절을 다 베푸며 누구라없이 벌쭉벌쭉 웃어주고는 상 맞은편에 앉은 중년사나이를 보고 너스레를 떤다.
《용우, 저 녀석이 조꼬만할 때 손목을 끌구다니면서 참외도둑질이랑 해서 줴주문 그저 좋아서 팔짝팔짝 뛰더니만 어이구 이젠 다 커서 장가를 다 가잼둥. 히야, 빠른게 세월이꾸마.》
점잖아보이는 그 사나이는 체면상 영호를 전혀 무시해버리기는 좀 안됐던지 인사치례로 응대한다.
《그럼 용우하고는…》
《저는 용우 색시 삼촌되는 사람이올시다.》
《그럼 사돈이 되겠구먼, 이거 정말 반갑습꾸마.》
영호의 과분한 친절에 그 사나이는 다소 면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영호야, 여기가 어디라구 예까지 와서 추물거리는게냐? 사돈어른들 앞에서 무례하게스리.》
노기엄엄한 소리에 머리를 뒤틀고 쳐다보니 아버지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노려보고있었고 그옆에는 영호보다 한살 손아래인 용우의 맏형 용철이가 찌그러진 얼굴을 하고있었다.
영호는 아버지의 노한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영호 아버지는 다시금 피발선 눈길로 영호를 쏘아보더니 다짜고짜로 영호 어깨죽지를 잡아채고 손님들 틈에서 끌어내였다. 영호는 질질 끌리다싶이 하면서도 사돈어른께 히죽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는걸 잊지 않았다.
《그럼, 이만 실례. 후에 다시 보깁소.》
《이 놈이 어떻게 알구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애를 먹이누? 에익.》
영호를 문어귀까지 끌고나온 아버지가 영호를 밀쳐버리며 분이 상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고있었다. 곁에서 량볼을 고무풍선처럼 잔뜩 불궈갖고 영호를 노려보던 용철이도 한마디 뚱겨준다.
《술이랑 얻어먹었으문 곱도록 돌아갈것이지, 이게 무슨 망신꼴이란 말이요?》
아버지와 용철이가 그토록 성내는 리유를 딱히 알순 없었지만 영호는 그만 주눅이 들어 얼음강판에 자빠진 소처럼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섰다.
《제수, 그러구있지 말구 얼른 이 사람을 보내주구 오우.》
영철이가 저편에 서있는 아까 영호를 안내하던 그 젊은 각시를 보고 하는 말이다.
젊은 각시는 입이 한발이나 나와가지고는 홱 돌아져 저만치 앞서나간다.
《자식아, 멀쩡하게 서있지 말구 얼른 따라나가. 에이구, 세상에 쯧쯧…》
아버지가 영호의 등을 떠밀어보내고는 이마살을 찌프린채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선다.
자기가 꼭 이 자리를 떠야만하는 리유를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저렇게 노하시는데는 필유곡절이리라 짐작하며 영호는 아쉬운대로 문을 밀고나왔다.
밖에서는 이미 젊은 각시가 빨간 승용차를 대기시켜놓고 껌을 쩝쩝 소리나게 씹으며 있었다.
《이거 덕분에 오늘은 승용차까지 타게 되는가보다. 헤헤…》
영호가 입이 헤벌쭉해서 다가가니 젊은 각시가 차문까지 열어준다. 너무 황송하여 굽신거리며 연신 치사를 해주며 차에 올라탔다.
《쑹타 또 커원짠.(려객운수역까지 태워주세요)》
말과 함께 차문이 쾅 닫히고 각시가 휭하니 돌아져 들어간다. 영호는 돌아져가는 젊은 각시한테 보지도 않는 손짓인사를 하며 고마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차가 소리도 고르롭게 스스륵 하고 미끌어져나갔다.
영호는 입을 헤벌린채 폭신폭신한 의자에서 엉뎅이를 들썩여도 보고 차창밖으로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도시의 풍경에 감탄을 련발했다. 십분남짓이 달리니 차가 아까 연길에 도착할 때의 그 운수역에 닿았다. 요행 문고리를 찾아 열고 영화에서 본대로 폼까지 잡으며 척 내려서는데 뒤여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게이챈나(돈을 줘야지)!》
《썬머 챈(무슨 돈)?》
영호의 뻔뻔스런 질문에 기사는 어이가 없다는듯 뻥긋 웃더니 거칠게 나온다.
《니 쭤처 뿌게이챈나(당신은 차타구 돈 안줄 작정이요)?》
《쩐머, 챈 타 메이게이마(그 녀자가 돈 안줬어요)?》
《쎄이 게이라(누가 줬게)?》
(하, 이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아니 그럼 그 각시가 차만 불러놓구 차비두 안줬단 말인가? 이거 참 미쳐버릴 일이군.)
상고머리를 긁적거리며 입만 하―벌리고있는 영호를 보고 기사가 시간이 급하다고 독촉했다.
《호우바(네, 좋아요).》
영호는 그제야 서둘러 호주머니를 뒤졌다. 요행 아까 부조하고 나머지1원짜리가 손에 잡혔다. 한시름 활 놓으며 불쑥 들이밀었다.
꼬깃꼿한1원짜리를 받아펴보던 기사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더니 침방울과 함께 욕설이 터져나온다.
《니타마디 쏴 런나(제길, 사람 놀리구있는거야)?》
돈을 주고도 오히려 욕만 얻어먹은 영호도 눈이 떼꾼해졌다.
《칸, 쩌이거(여길 봐?!》
기사가 가리키는 네모번듯한 전자시계같은것을 들여다보니 빨간 글자로6:20이라는 수자가 적혀있었다.
《쩌쓰 썬머(이건 뭐요)?》
《류콰이 얼아(륙원 이십전이란 말이야)》
영호는 입을 딱 벌린채 하늘만 펀들펀들 쳐다보고있었다.
(아니, 집에서 연길까지 그 먼 길을 와두3원60전밖에 안하는데 고작 십분이나 되나마나하게 온 거리를6원 넘어 내란 말인가? 시내놈들은 다 도적놈이야 뭐야, 근데 그 각시두 그렇지, 돈두 없는 사람을 무작정 태워보내고는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근데 가만 있자, 내가 여기는 왜 왔노? 뻐스표 살 돈두 없어가지구 여기 와서는 뭘 한단 말이야? 이거 정말 환장할 일이지.)
기사가 또 투박한 소리로 재촉하자 영호도 버럭 성내며 소리질렀다.
《워 메이챈 쩐머빤(돈 없는걸 어덕하란 말이요)?》
기사가 너무 어이가 없어 웃고잇다가 뭐라고 욕설을 퍼부어댔으나 영호는 머리만 쥐여뜯고있었다.
(가만 있자, 이 차를 타구 그냥 집까지 앉아가면 될것 아닌가? 손바닥만한 향내에서 까짓 차비 몇푼 못얻어낼려구, 내가 누군데. 과거에 그래도 단지부서기로 있으며 우쭐하던 최영호가 아니냐? 바로 그거다. 이 차를 타고 돌아가는거다. 요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구 골치를 앓구 쳇.)
영호는 벙긋 웃으며 차문을 도로 열고 들어가앉으며 가사에게 말했다.
《쩌우바(갑시다)!》
《쌍 나(어디루)?》
《룽징××쌍(룡정 모향).》
잔뜩이나 큰 기사의 눈이 하마 눈처럼 툭 불거져나왔다. 단돈 6원도 없는 주제에 거기까지 가선 뭘 어쩌자고 하는건가 하는 눈치다.
영호는 가슴을 탕탕 치며 돈을1전도 곯지 않게 준다며 향내에서 자기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둥 하고 자기 자랑도 실컷 늘여놓았다.
기사는 그래도 미타한지 영호를 가늠해보며 거기까지 가면 돈 액수가 많이 나올 텐데 하고 말하니 영호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아무 걱정 말구 가자고 졸랐다.
영호의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어느 정도 믿음이 갔는지 기사는 마침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난생처음 택시라는걸 타보는 영호인데다가 그것도 혼자서 연길에서 집까지 쭉 타고 가는 판이라 세상 오래 살다보니 이런 호강을 할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히물히물 웃음만 떠올렸다.
비록 술이나 기껏 얻어먹을 요량으로 왔다가 푸대접 받고 쫓겨가는 신세가 되여 섭섭한 생각도 들고 또 그 젊은 각시의 실수로 예상밖으로 택시기사와 불쾌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쳇, 전 향내에 이렇게 택시를 타구 연길로 들락날락하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하라. 그래도 이 최영호 내놓고는 아마 없을걸. 흐흐.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어서야 가자, 송아지가 엄마 찾는 언덕을 넘어―)
《워이, 유메이유 인웨야(여보, 노래같은거 없어요)?》
기사는 반사경으로 영호를 흘끔 들여다보더니 피씩 웃어주며 음악을 틀어놓는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비록 앵앵거리는 한족노래였지만 영호는 그런대로 듣기가 좋았다.
《워이, 씽이씽(어이, 일어나게).》
요람속처럼 따스하고 차체의 흔들림이 고르로운김에 코를 골던 영호는 기사가 어깨를 잡아흔드는 바람에 단잠에서 깨였다. 두눈을 비비며 부시시 일어나보니 어? 이거 벌써 다 왔잖은가.
(하품을 짝―하고 먼저 부모들이 사는 동네로 차를 몰게 해놓고 영호는 다시 머리를 쥐여뜯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거 집에 오면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탕탕 쳐놓긴 했는데 아버지가 알면 또 무슨 큰일 날라구? 안돼, 안돼. 거긴 갈수 없어.)
기사가 짜증스레 뭐라고 중얼거리며 차머리를 돌려 향소재지로 몰아갔다.
(먼저 차령감네 소매점에나 들려볼가? 그 령감이 좀 좀스러운데는 있지만 그래두 인정은 있는 령감이라서 비난사정을 하면 아마 도와줄지도 몰라.)
영호는 차를 차령감네 소매점 문앞에 세우게 하고는 얼만가 물었다.
《뿌둬, 류쓰우(많잖아요. 륙십오원이요).》
영호는 불에 덴 노루처럼 펄쩍 두디다가 이내 속구구를 하며 탄식을 내뿜었다.
(이거야 정말 큰일 났네. 내가 오늘 어쩌자구 이렇게 어벌이 크게 놀았나? 시내안에서 겨우10분동안 타구두6원 넘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쭉 타고 왔으니 어림짐작 그만큼 되구말구. 그나저나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좌우간…)
영호는 기사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용기를 내여 소매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딸랑, 하는 문방울소리에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를 빡빡 깎아버린 중머리 차령감이 안방에서 나오다가 영호가 이죽거리며 서있는걸 보고는 또 외상술 마시러 온줄로 알았는지 에험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매대우에 손을 얹은채 손가락으로 매대유리를 토닥거리며 먼 산만 바라보고 섰다.
《헤헤, 무고함둥? 저 무탁할 일이 좀 있어서…》
《오늘은 마수거리도 못해서 외상줄 술이 없수. 다른데나 가보슈, 에험.》
차령감은 빤질빤질한 중머리를 어루쓸며 등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아바이, 오늘 술이 문제가 아니구 지금 막 급한 사정이 있어서…》
차령감이 급한 사정이란 말에 다시 뜨아한 눈길로 영호를 돌아보며 뜨직이 묻는다.
《급한 사정이란게 뭐유? 어데 가서 금석이 에미라두 찾아왔나?》
차령감의 조롱섞인 말투에는 신경도 안쓰이는듯 영호는 다시 변명한다.
《그게 아니구. 사실은 연길에 갔다가 차비가 없어서 그만 택시를 그대루 잡아타구 왔는데…》
《뭐? 뭐라구? 택시를 타구 연길에서부터 왔단 얘긴가? 나 참기가 막혀, 이 치가 지금 온전한 정신으루 여기 와있는게야?》
영호가 두손을 모아쥐고 사정얘기를 하건말건 들을념도 않고 차령감은 매몰차게 영호를 문밖까지 떠밀어내보냈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닫히고 안에서 찰칵, 하고 문고리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몇마디 못해보고 욕만 얻어먹고 쫓겨난 영호는 입을 헤벌리고 소매점이라고 쓴 간판만 쳐다보고있었다.
뛰―하는 경적소리가 등뒤에서 울려서야 영호는 흠칫 몸을 돌려 차안에 들어가앉았다.
《쩐머양라(어떻게 됐수?)》
짜증어린 물음소리에 영호는 어물어물하닥 어줍게 웃으며 버릇처럼 두손을 마주 비비며 말한다.
《뚜이부치(저, 미안한테)…》
《또디 싱부싱아? 타마디(도대체 되는거요, 안되는거요? 제길).》
다짜고짜 욕설부터 튀여나오는 기사를 우두커니 마주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밸이 벌컥 났다.
(자식이 까짓 돈6원때문에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게 아니야?)
《씽, 쪼우(돼요, 갑시다)!》
영호가 맞다드는 기세에 좀 누그러든 기사는 그래도 뭐라고 씨부렁거리며 영호의 지시대로 차를 몰아갔다.
(옛날 당당했던 단지부서기가 그래 돈 몇십원을 못얻어낼라구? 자식이 사람을 보기로는 어디로 보나. 그렇지, 저 향정부옆에 달래식당에나 가보자. 저기 가면 그래두 무던한 장과부두 있구, 또 전에 나를 그렇게 따르던 상옥이두 있을게구. 틀림없을거야. 쳇, 언녕부터 저기나 갔어야 할걸 괜히 재수없이 번대머리 차령감한테 욕사발이나 잔뜩 얻어먹구. 그 령감 사람을 무시해두 분수있지. 두구봐라, 다시는 소매점으로 술 먹으러 안간다. 안가. 외상준다면 몰라도.)
달래식당문앞에 난데없는 택시가 스르륵 멈춰서자 무슨 귀한 손님이나 온줄 알았는지 식당문이 펄럭 열리더니 분을 뽀얗게 쳐바른 장과부가 비만한 몸집을 뒤뚱거리며 마주나온다. 그뒤로 복무원인 상옥이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내다보고있었다.
영호가 차문을 열고 내려서며 벙글써 웃어보이자 나오던 정과부가 처름엔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쓴외 보듯 외면하며 빈정거린다.
《아이구, 오늘은 어쩐 일루 이렇게 단서기량반이 하아야까지 척타구 이렇게…》
《헤헤, 그런 사정이 있어서. 저기 안에 들어가서 좀 얘기하깁소.》
영호는 자기 집 나들듯 문을 밀고 들어서며 문가에 서있는 상옥이와도 히쭉 웃어보이며 알은체를 했다.
식당안에는 술상이 두상 벌려놓았는데 얼핏 보니 모두가 얼마전까지만해도 영호와 부어라 마셔라 하며 극진하게 보내던 같은 또래들이였건만 영호의 출현에는 시치미를 딱 뗀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잔들을 기울인다.
이왕 같으면 비위를 무릅쓰고 언녕 술상에 끼여앉아 한잔이라도 얻어먹고야말 영호건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장과부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가 두손을 마주 비비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주마이, 오늘 좀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돈 칠십원만 딱 꿔줄수 없겠습둥? 내 래일이면 꼭 갚아드릴게.》
《뭐? 뭐야? 돈 칠십원? 어이구, 난 또 뭐 외상술이나 얻어먹을려구 온줄 알았더니 참 기가 막혀. 글쎄 내게 무슨 돈이 흔해빠졌다구 거기를 다 꿔주겠수? 어이구 이봐요, 무슨 렴치에 나보구 그런 소릴 하는거유? 응? 술을 외상으로 준것만도 얼만데 갚을 생각은 안하구 오히려 나더러 돈달라는거유? 별꼴 다 보겠네. 어서 나가유. 손님들 술맛 다 떨어지겠어유.》
영호는 말 몇마디 할 겨를도 없이 장과부에게 퉁을 맡자 행여 술좌석에라도 가서 좀 빌붙어볼가 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무작정 등을 떠미는 장과부의 등살에 못이겨 문켠까지 밀려났다. 상옥이가 저만치서 술병을 나르는것이 보이자 영호는 문설주를 붙잡고 기를 쓰고 버티며 머리를 뒤틀어 상옥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로 애원하였다.
《상옥이, 나 좀…》
《별 부실한 사람 다 보겠다. 남의 녀편네 이름이 뭐 아무나 함부로 부르는 이름인줄 아는 모양이지 흥!》
상옥이의 너무나 쌀쌀한 태도에 잠시 추줌해버리는 사이에 장과부가 콱 밀치는 바람에 영호는 문턱에 발이 걸려 힌둥 나동그라지고말았다.
다쳐서 얼얼한 팔굽을 문지르며 퍼더버리고앉아 한숨만 풀풀 내쉬는데 기사가 다가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떡 버티고 선다.
영호도 이젠 완전히 주눅이 들어가지고 상대를 쳐다볼념도 못하고 어물거리자 기사는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소리나게 탁 치더니 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식당문을 밀고 들어간다.
식당안에서 장과부와 기사간에 한창 싱갱이질이 벌어지는것 같더니 장과부의 서툰 한어말소리가 들려나온다.
잇따라 식당안에서 와그르르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택시기사가 씽하니 달려나오더니 다짜고짜로 그때까지 땅바닥에 멍하니 퍼더버리고 앉아있는 영호의 멱살을 잡아일으켜 불끈 쥔 주먹을 영호의 면상에 들이대며 씩씩거린다. 영호는 돌림병 걸린 닭처럼 목을 잔뜩 늘여뜨린채 나 죽여줍시사 하고 가만히 들이대고만 있을뿐이다.
(차라리 터지게 얻어맞아서 택시값이라도 면할수 있었으면 오죽 좋겠냐.)
기사가 무슨 생각에선지 영호를 놓아주며 차에 타라고 한다.
차가 움직이니 동네조무래기들이 우르르 차뒤를 따라 뛰여오며 소리를 질러댄다.
《주정뱅이 영호! 각시 떼운 주정배!》
(각시 떼운 주정배? 맞아. 그렇지 이제 생각난다. 처가편에 가볼걸 그랬구나. 그래도 한때 사위고 손자를 봐서라두 까짓 돈 몇십원 안꿔줄라구.)
영호는 금방 돈을 다 얻기라도 한듯 무릎까지 철썩 갈기며 기사에게 여차여차하게 가라고 길을 일러주었다. 거기 가면 향내에서는 둘찌가라면 섭섭할만큼 뜨르르하게 사는 장인네 집이 있다고 거기 가면 문제없다고 설명을 거듭하였다.
그 말에 오만상을 찌프리고 씩씩거리던 기사의 안색이 조금 풀리는가싶더니 그래도 시름이 덜 놓이는지 재차 다짐을 둔다. 이번까지 헛걸음하면 아예 연길까지 도로 끌고가서 한바탕 패주고 감옥밥을 먹게 하겠다고.
영호는 여우있게 너털웃음까지 쳐가며 호언장담을 하고는 제법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울퉁불퉁한 모래길을 따라 한참 기다가 검푸른 강물이 사품치는 다리를 건너 처가마을로 향한 달구지길에 막 들어서려는 때였다. 저쪽 버들방천에서 사람들이 한무리 웅기중기 모여있다가 웬 일인지 우야 하고 뿔뿔이 흩어져달아나는것이 보였는데 눈여겨보니 거기에는 장인과 처남도 끼여있는듯했다.
길옆까지 뛰여나와 헐떡거리며 서있는 처남곁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어릴 때 눈병을 앓아 술병밑굽만큼 두터운 안경을 건 처남이 간신히 영호를 알아보고는 볼부은 소리로 말했다.
《소를 잡는다는게 그만 헛매를 치는 바람에 소가 놀라서 아주 미쳐날뛴단 말이요. 게다가 고삐두 대강 매놔서 고삐가 풀리는 날이면 무슨 난판이 벌어지겠는지. 근데 여기는 어쩐 일루?》
처남이 곁사람 보기에도 어지름증이 나게 도수가 높은 안경알을 희번뜩거리며 택시와 영호를 번갈아보며 건성으로 물었다.
《실은 돈을 좀 꿀가 해서 왔는데. 처남 한70원만 어떻게, 헤헤…》
《뭐유? 70원? 거 참, 비위두 좋수다. 이 복새판에…》
깜짝 놀라 미끌어져내려오는 안경을 추슬려올리며 처남은 멀찌감치 피해가려 한다.
《무슨 일이든 좋으니까 시키기만하면 다할테니, 제발…》
옷소매를 부여잡고 간절하게 애원하는 영호를 처남이 두꺼운 안경알너머로 가늠해보더니 랭소를 머금으며 비아냥거린다.
《무슨 일이든 시키기만하라구? 거 어디 재간있으문 저 소나 한번 잡아보시지.》
《그 말 정말이유? 저 소만 잡으면 내게 돈70원을 꿔주겠다 그 말이지?》
《70원이 아니라100원이라두 문제없소.》
《처남, 그냥 해본 소린 아니겠지?》
《그럼.》
《좋아, 도끼를 가져오라구.》
영호는 웃옷을 벗어내치고는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으며 도끼를 어서 달라고 성화다. 처남이 영호가 하는 꼴을 쳐다보고있다가 시무룩이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되지두 않을거 덤벼들지나 마슈. 나도 안되는데 괜히 사고를 쳤다가 우리만 욕먹이지 말구.》
《내 이래봐두 깡단이 있다구. 요만한 일은 히쭉 웃고 해버린다니까. 자, 도끼하구 술이나 두냥 있으면 가져와. 그리구 잠자코 구경만하고있으라구.》
《아니, 이 복새판에 무슨 놈의 술이요? 한시가 급한데. 도끼는 저앞에다 팽개치고 왔으니까 절루 찾아보슈. 그리구 무슨 사고가 생겨두 절대 나하군 상관없으니까 그리 아슈.》
《그래 알았어, 좀스럽긴 까짓거, 거 약속이나 잊지 말라구.》
영호는 어정어정 버들방천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거뭇거뭇한 털빛의 둥굴소가 버드나무에 매인채 고삐에서 벗어날려고 용을 쓰고있었는데 어찌나 날쳐대는지 버드나무에 대강 얽어매놓은 고삐매듭이 거의다 풀리고있었다.
《저 놈이 죽구싶어 환장했나? 야! 영호, 그러다 큰일 칠라. 이 미련한 놈같으니…》
멀찌감치서 장인과 동네 어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영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슬금슬금 도끼를 주으러 다가갔다.
요행 돈 얻어낼 구멍수가 생겼는데 이대로 물러설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정말 감옥밥 먹게 될지도 모른다.
영호가 접근해오는것을 알아차린 둥굴소가 버둥질을 잠시 멈추고 앞발을 떡 버티고 서서 두뿔을 곤두세운 대가리를 잔뜩 수그린채 공격태세를 취했다.
그 기세에 영호는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려나고 등골이 오싹해났다. 이때 술 몇모금이라도 마신다면 할것 같은데 고놈의 술이 정말 원쑤다. 그러나 영호는 물러설수 없었다. 그 돈이 대단한 유혹을 주었다. 그 돈이면 그래도 영호라는 이 인간은 지금까지 구겨지고 구겨진 최후의 자존심을 세울수 있다. 영호는 마음을 다잡고 진땀이 흥건히 배인 두손바닥을 바지무릎에 쓱쓱 문지르고는 도끼를 거머쥐였다.
둥굴소와의 거리가1메터 정도 남았을 때다. 영호가 에익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번쩍 들어 도끼등으로 둥굴소의 이마빡을 내리치려는 순간 둥굴소가 영호를 비웃듯 킁―하고 코김을 내뿜더니 두뿔로 영호를 떠버렸다. 눈깜짝 새에 벌어진 일이라 영호는 미처 어쩔 새없이 붕 떠올랐다가 거꾸로 내리꼰졌다.
《에그, 끝내 일쳤구나. 저걸 어쩌나…)
멀찌감치 서서 마음을 조이던 구경군들이 연신 혀를 차면서도 누구도 감히 접근해오지 못했다.
성난 둥굴소가 다시한번 킁 하고 코김을 내뿜더니 몸체를 뒤로 뻗치며 대가리를 힘껏 뒤로 뻗치니 고삐가 툭―하고 풀려나갔다. 둥굴소는 더욱 미칠듯이 날뛰며 미처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있는 영호를 사정없이 마구 떠박아10여메터 정도 굴려버렸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는지 하늘이 낮다고 껑충껑충 날뛰며 뒷발질로 마구 걷어차고 짓밟고 했다.
탕―하는 귀청이 째질듯한 소리와 함께 둥굴소가 어흥―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더니 영호 몸에 피를 쏟으며 너부러진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온 송포수가 쏜 총알이 소눈통을 관통했던것이다. 소고삐가 풀린 바람에 더 멀리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그제야 우르르 몰려든다.
온몸에 뜨거운 쇠피를 뒤집어쓴 영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그는 눈을 간신히 뜨고 자기옆에 너부러진 둥굴소를 희뿌연 눈으로 돌아보고있다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택시…)
입가에는 안온한 웃음을 머금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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