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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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김정룡)
2008년 03월 07일 09시 06분  조회:5024  추천:58  작성자: 김정룡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07년 8월 말 필자가 중국에 갔을 때 연변00잡지사 사장님이 <<장백산>>, <<도라지>>, <<연변여성>>, <<청년생활>> 등 조선어 잡지들을 나에게 한 보따리 주었다. 무거운 대로 메고 한국에 와서 시간 나는 대로 뒤적여 보았는데 한 가지 ‘아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조선족문학평론가들이 아직도 조선족문학을 평론하는 글에서 이른바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민족대학 00교수는 조선족문학사를 평론하는 장편의 글에서 ‘봉건’이란 어휘를 무려 수십 차례 사용하면서 ‘봉건’으로 도배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 생각된다.

잘못된 표현의 요점을 말하자면 조선족문인들은 아직도 중국과 조선의 수천 년의 봉건역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고, 우리민족전통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500년을 거쳐 생겨나고 자리매김 된 것을 마치 수천 년 동안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민족역사에는 아예 봉건사회가 존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역사에서 봉건제는 서주시기 중국, 중세기 유럽, 중세기 일본 등 세 곳에만 존재했을 뿐 기타 지역과 나라들에는 아예 봉건제가 없었다.

이른바 봉건제란 왕이 기존의 토지 혹은 군대를 이끌고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생겨났으며, 땅을 분봉 받은 영주들은 장원 내에서 정치적으로 인사권이 있고, 경제적으로 세금을 받아들일 권리가 있고, 군사적으로 군대를 소유할 권리가 있어 독립적인 왕국의 형태를 갖춘 소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봉건제는 중국, 유럽, 일본 등 세 곳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중국은 서주 초기 정전제와 분봉제에 의해 봉건제가 실시되었고 따라서 각 제후국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왕은 허수아비가 되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춘추전국시대에 진입했고, BC221년 진영정이 천하를 통일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시대에 접어들었고 중앙집권제는 청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중국은 진나라부터 청말까지의 정치제도가 봉건제가 아니라 통일중앙집권제였다.

중세기 유럽은 왕이 각 지방호족들에게 군대를 내줄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장원영주제가 실시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왕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영주들이 소유한 땅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고 한다. 영주들이 실권을 갖고 있는데 비해 왕은 虛權에 허덕이었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봉건제였다.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과 달리 이민족의 땅을 정복하여 장원영주제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 백성과 최하층 관리로부터 자신들이 개척한 땅을 층층이 위로 헌납하는 데서 장원영주제가 생겨났고, 이것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다른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이며 봉사의 문화이다. 현재 한국인들이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하여 봉사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즉 봉사란 일본인의 특유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쇼오군은 백성을 다스리는 행위를 통치라 여기지 않고 천황에 대한 의무적인 봉사라고 여긴다. 봉사란 일본인의 神道에서 유래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개념에서 형성된 특이한 문화이다. 그러므로 횡적이거나 위로부터 아래로의 복무를 봉사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어폐가 있다.

봉건제의 개념은 대충 이러하다. 그런데 왜 현대중국에서 봉건이란 말을 그토록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예로부터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 즉 역사관이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맹자가 말한 태평시대가 되었다가 혼란시대, 혼란시대로터 또 다시 태평시대를 반복하는 一治一亂의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사회는 목저지가 있고 역사는 마치 우리가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해서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 것처럼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기독교적인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이다.

칼·맑스는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에 의해 인류사회를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 등 5단계로 나누었는바, 이것을 이른바 맑스 역사5단계설이라 한다.

칼·맑스의 이론을 천하의 유일진리로 받아들인 현대중국은 그의 역사5단계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울러 중국역사를 5단계설에 두들겨 맞추느라 애썼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획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고 곽말약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시대 획분에 각기 다른 설을 내놓았다. 결국 곽말약이 권위를 갖게 된 이유로 중국역사 시대 획분은 그의 설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근대사회라 금을 긋고 그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진의 통일중앙집권제 역사까지 봉건사회라고 단정해버렸다. 아울러 전통사회 문화, 사상, 습관 등등을 통상적으로 ‘봉건’을 붙혀 말해왔다.

중국문화환경에서 자라고 배워온 조선족들은 필터의 여과장치 없이 현대중국역사관, 즉 맑스의 역사5단계설에 물젖어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왔고 아울러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쩍하면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가 ······”라는 말을 쓴다.

물론 이북이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체제였고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을 받아들여 줄곧 통일중앙집권제로 흘러온 우리민족역사를 이 이론에 두들겨 맞추고 추광해왔기 때문에 중국과 이북의 영향을 받은 조선족들은 더구나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인 예와 효, 이혼불가, 재가불가, 여성의 정조문제 등등은 근근이 조선조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일 뿐 “수천 년의 봉건사회를 통해 수립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려 말기까지 이혼자유 재혼자유였다고 한다.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丈家에 간다는 뜻인데 조선조 초기까지 남자가 결혼하면 먼저 여자 집에 가서 일정 시간을 살다가 여자를 데리고 남자 집에 와서 사는 관습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민속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소위 우리민족의 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전통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유교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현재 조선족들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말할 때 쩍하면 수천 년의 봉건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수천 년 역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문화혁명시기와 후기까지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등으로 말하던 것을 근래에는 중국에서 TV매체에 돌풍을 일으킨 易中天 교수를 비롯해 학자들과 문인들이 역사에 관련해 쓴 글들을 보면 ‘전통사회’, ‘전통사상’, ‘전통문화’, ‘전통습관’으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대신에 ‘전통’이라 말한다.

중국인이 말하는 ‘전통’이란 본능적으로 도교를 받들고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해온 전통(물론 불교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을 의미한다.

우리민족의 수천 년 역사는 ‘멋’을 의미내용으로 하는 풍류도의 仙史이며, 1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 적게나마 받아들인 도교적 요소,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때 정치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두들겨 맞춰 놓은 ‘봉건’이란 말을 버리고 ‘전통’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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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참고
날자:2008-03-08 10:48:31
http://www.baidu.com에서 '봉건사회'를 검색하니 아래와 같이 출력되였습니다. 참고하십시오. 封建社会 封建社会的定性 在封建社会中,形成的自然经济是以土地为基础,农业与手工业结合,以家庭为生产单位,具有自我封闭性、独立性,以满足自身需要为主的经济结构。这种经济结构中的关键生产资料掌握大部分都掌握在地主(或封建领主)手中,故而能够形成“地主(封建领主)剥削农民”的阶级关系。 在封建社会,地主阶级统治其他阶级的根本即为封建土地所有制。地主阶级通过掌握土地这一生产资料,对使用土地的农民通过榨取地租、放高利贷等手段剥削其他阶级。同时封建土地所有制的形式也不尽相同,有通过契约租赁、缴纳地租、雇用佃户等方式实现,但其本质依然是一种剥削与被剥削的关系,不会改变封建社会作为一个阶级社会的本质。 独有的封建思想 封建社会中往往存在相当明显的阶级制度,如中国的宗法制,西欧的教主-国王-领主-爵士制,形成金字塔式的统治架构,但是它们之间的关系并不也是如此完善的,通常领主的爵士不会再对国王效忠,也因此有了一句名言“我的附庸的附庸,不是我的附庸”。然而这种统治结构能够长期维持下来的,就是封建社会的思想观念:通常以“君上大权”为骨架,融入一些有利于统治阶级的思想而汇集成,其中也含有一些优秀的道德价值观,最典型的是中国的“儒家思想”。 封建社会的变化 在根本上动摇封建统治的,就是对其生产关系的破坏,农民起义、资产阶级革命都是旨在改变封建土地所有制(从而改变整个封建制度)的阶级斗争。其中最为典型的就是资本主义的基本生产关系——雇用劳动力。 最早的资本主义诞生于当时商品经济发达意大利,如佛罗伦萨、威尼斯等地区。 代表资本主义的自然经济,是以商品交换与商品生产为核心的商品经济。由于生产的目的由单一满足转变为向社会提供产品,从而决定了生产关系将有别于原有的封建制度。由于商品经济的发展,原有的自然经济受到冲击,开始解体,农民与手工业者开始丧失生产资料,成为无产阶级,再由工厂主——最早的资产阶级与他们签订雇用协议,形成新的生产关系,雇用劳动力。 随着资本主义经济对原有封建自然经济的解体进程,日益强大的资产阶级有能力扫清一切有悖于发展资本主义的因素,如“天赋神权”、“三纲五常”等思想,男耕女织等生产结构,最终推翻封建社会,建立资本主义国家。 封建社会的归宿 通常封建社会由于生产力的发展会转型为资本主义社会,根据资产阶级对封建阶级的各种关系,形成君主立宪制(英国、沙皇俄国、德意志第二帝国、日本等)、共和制(法兰西共和国、德意志联邦共和国、美利坚合众国等)。 不过也有特殊的变化关系,如中国由封建社会形成半殖民半封建社会,再越过资本主义社会成为社会主义社会。(参见共产党、共产主义、共产主义国家) 同一时期可以存在各种生产关系构成的社会。 说明: 以上的词条解释应该是经典的中国马克思主义政治经济学里的观点.这是一种源自欧洲历史研究习惯的社会形态划分方法,这种舶来品并不适用于中国历史上存在的社会形态的划分。让我们仔细分析一下: “封建社会”一词,就其最原始的释义来讲,应该是指其字面意义:封土建国。 即分封制,在中国盛行分封制的时期应该是秦始皇建立的中央集权之前的时期,尤其是西周时期,周武王灭商以后,周天子分封天下,那时诸侯小国林立,一个面积几平方公里的小城邦,其统治者被周天子分封为君主,以“国”自居,这个时期的社会形态被奇怪地称为“奴隶社会”(马克思政治经济学中所常用到的一种称谓),到东周时期,诸侯小国逐步被兼并成诸侯大国,直到战国末期,秦国并吞六国,建立起郡县制的中央集权制国家,这时的社会不应该叫做封建社会,因为在当时大一统的中国,已经废置了封土建国的分封制,没有王侯可以受封而自行建国,自立为君主是不被允许的,所谓的皇帝只有能有一个,因此,自秦始皇开始至辛亥革命的这段中国历史时期,最合适的名称应该是:(中央集权的)宗法专制社会。而同时期的欧洲经历的黑暗的中世纪才是真正意义的封建社会,那时的欧洲,没有一个强有力的中央集权统治,大大小小的君主受到分封后各自为政,建立属于自己的城邦,是一个真正封土地而后建国的封建社会。也可以说,中国在农业社会时期的社会形态发展是领先于欧洲社会形态的发展的,中国的“宗法专制社会”比同时期的欧洲的“封建社会”更加进步,而且两种社会形态有着很明显的区别。 但是为什么中国的“宗法专制社会”被我们称为“封建社会”,而真正意义上的“封建社会”却被我们称为“奴隶社会”呢? 其实,对于中国历史上社会形式的划分,应该这样对应地改称为: 传统称谓:原始社会---奴隶社会-----封建社会-----社会主义社会 修正称谓:原始社会---封建社会---宗法专制社会---社会主义社会 这是引用欧洲历史学划分方法到中国后引起的水土不符的结果,宗法专制社会才是具有中国特色的社会形态。 关于封建的含义人们争论很多。 在中国,“封建”的概念可以意指三个不同的对象∶第一是指中国古代的封建,如西周的“封建亲戚,以蕃屏周”;第二是指中国从古代延续到近代的“封建社会”,久讼不已的中国何时进入封建社会与中国封建社会为何长期延续等问题即由此而来;第三是指欧洲中世纪的一种社会制度,它常被看作是各种封建社会的参照原型 马克思用做研究对象的西欧封建制度,是指王权集中以前的领主各自为政的状态。显然,这种状态不利于资本主义经济的产生和发展。当王权集中后,在经济上则有利于资本主义萌芽。 我国固有的封建含义类似,即分封建国。秦朝以后基本就不是主流了,尽管汉初明初有过反复。 但是,我们通常意义上用的“封建”二字,似乎与这两者都没相似之处。我们的历史书上认为“封建制度”的起源时期就很奇怪。 西欧的王权集中后对资本主义的起源发展起了促进作用,而中国皇权集中的结果却是扼杀资本主义因素。可见,西欧封建制度是阻碍经济发展的因素之一(因为关税等原因),而在中国,封建制的确阻碍了经济,但皇权制却是有意扼杀经济的发展。 关于中国何时进入封建社会,有三种观点,我们课本上的——西周开始进入封建社会,还有两种是秦汉论(秦汉时期进入封建社会)、魏晋论(两晋时期进入封建社会)。
2   작성자 : 연기
날자:2008-03-07 11:08:21
가령 김정룡 씨의 말대로 '봉건사회'라는 개념이 틀렸다 치더라도 이 글의 서두에서처럼 학계에서 장기간 통용되는 개념을 사용한 조선족 문인들을 특정 대상으로 타매한다는 것은 억울한 것 같다. 그리고 '전통사회'라는 개념으로 '봉건사회'를 대체하자는 제의도 매우 우습다. 어불성설. 易中天의 팬인가 본데 그를 천박한 문인이라고 질책하는 학계의 견해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1   작성자 : 허동식
날자:2008-03-07 10:57:52
옳은 말씀입니다. 역사에서 봉건이란 어휘의 의미는 협애적의미로 사용하여야합니다. 문화적인 의미에서는 광의적함의를 슬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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