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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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2013년 07월 28일 10시 32분  조회:5941  추천:28  작성자: 김문학

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이글은 일본과 나의 만남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와 일본, 일본문화와의 만남은 일종 “운명적인” 만남의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만남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惡緣)의 만남이 있고, 반드시 만나야 할 길연 (吉緣)의 만남이 있다면, 나와 일본은 후자이다. “운명적”이란 것은 필연적인 것과 동연(同然)인바, 나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으로, 또는 생리적으로 일본, 일본문화가 좋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개인과 일본과의 만남의 레슨은 유년시절부터 일찍이 시작된 것 같다. 모든 만남(사랑 미움도)은 추상적인 것이기 보다는 구상적인 것에서 싹이 트는 법이다.

우리 집에는 값진 가보(家寶)라 할 만한 골동품은 없었지만 할머님의 장롱에는 두 가지 추억이 슴배인 “보배”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껴 쓰시던 단계 벼루(端硯)이고, 또 하나는 곤 색에 은회색 무늬가 디자인 돼 있는 일본제 넥타이였다.

그 넥타이는 일제식민지시기 지식인 (한방의이며, 선비)이었던 조부님과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지식인 나카무리씨에게서 받은 선물이라 하신다. 넥타이는 우리 가족과 일본과 연결된 이야기(역사)의 심벌이었다.

어린 내게 있어서 그것은 처음 느낀 일본의 향기였다. 조모님과 백 조부모님들은 모두 일본식민지의 체험자였기 때문에 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인 (병사?)에게 처음으로 “미깡”(귤)을 선물로 받았던 일화, 당시 아는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던 우정의 에피소드를 얘기하시면서, 일본인은 전부다 악인(惡人)이 아니었다고 가르쳐주었다.

향기 그윽한 일본인의 이미지, 이는 당시 모택동시기 항일영화에 꼭 많이 등장하는 “바카야로” 를 연발하는 콧수염의 일본군인의 추한 이미지와 오버럽되면서 기묘한 엇갈림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모든 일본인은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게 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적어도 “나쁜 일본인”중에 “좋은 일본인”도 있었다는 인식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어린 나에게 일본인은 좋고도 나쁜 양이미지가 동시에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한 것일 것이다.

소학교시절 숙부의 서가에서 들춰낸 일본어판 <<인민중국>>인지 하는 잡지의 페이지를 번지면서 최초로 접하는 가나문자에서 나는 신비스러운 묘한 감각을 느꼈다. 한자도 아니고 우리 한글도 아닌 기묘한 생김새에서 미적(美的) 妙味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읽고 뜻을 내는가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안게 되었다.

중고교에 들어가자, 홍수같이 유입되는 일본영화, 애니메이션에 매혹되었다.

<그대여, 분노의 강을 건너라!> (중국명은 ‘추적(追捕)’)의 다카쿠라켄(高倉健)이 맡은 남자주인공과, 나카노 요시코(中野良子)가 맡은 순정아가씨 마유미의 생머리의 표탕하는 美에 짐대하게 매료되었다.

잇따라 쇼오와(昭和)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주연의 영화, 드라마에서 청초하고 순진무구한 여성미에 또 깊이 침혹되었다. 나는 속으로 주제넘게 야마구치 모모에와 똑같은 여성과 만나서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결국 40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 관한 서적, 소설도 읽게 되었으며 일본문화에 포로 된 고교생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학수험전년인 고교 2학년 때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일본어가 좋아서 일 년도 안 되어 제법 숙달하고 마스터 하여 당시 유명한 동북사대의 일본문학과에 합격했다.

소학 때부터 “문학소년”으로서 문학이 좋아서 장내 작가나 학자로 되려는 꿈을 꾸고 있던 나는 대학 전공을 일본어과로 선택했던 것도, 생각하면 모종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때 수험 전에 지망대학 원서를 제출하는데 중국문학부, 조선문학부와 일본문학부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 망설이던 끝에 최종적으로 일본문학부를 동북사대 제일지망으로 택했다. “외국어를 아는 것은 또 하나의 文化를 아는 것이다”는 일본어 교사의 말씀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의 일어일문과 입학으로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일종의 “국내 유학”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어 교수님을 거의 일본문부성에서 파견되어 온 대하국문과 교수나 고교 국문교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일본인 교수님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본문화를 접촉하고 섭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독특한 청결함, 깔끔하고 스머트한 몸매나 친절성.... 이런 것들에서 나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항일영화에 익숙히 보아오던 콧수염에 바카야로를 외치는 조폭스러운 “왜놈”, “日本鬼子”의 이미지와는 전혀 운니의 차이였다.

조모님께서 들려주던 “좋은 일본인”의 이미지가 눈앞에 현실로 생신으로 나타난 셈이다.

일본어 반은 외국문학부에서 하나밖에 없었는데 전원 20명이었다. 급우는 동급생인 만 17세, 18세와 사회인에서 입학한 25세, 26세 정도의 ‘어른’들도 있었다. 그때는 문화대혁명후 회복한 대학수험제도라서 사회인도 많이 수용했던 것이다. 그 ‘어른’들은 나를 “小日本”(꼬마일본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나를 일본식 이름으로 “小金井(코가네이)”로 불렀는데, 나는 별 반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 중국식으로 나를 부를 때 ‘小金’(꼬마김씨)라서 그 “金”씨에 유사한 ‘小金井’이란 일본성씨를 붙힌것 같다. 내가 반감하지 않는 이유는 이름이나 별명을 내가 부르는 게 아니라 타자가 부르는 他者用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나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한 그들의 自由이니까. ‘小金井’은 일본 근대 문호의 작품(나츠메소세키 아니면 누구인지 기억은 잘 안난다)중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과 왜소한 체구인 나의 이미지를 오버럽 한 것일까?

나는 그때 이미 대단히 일본을 즐기는 일본애호가, 지금 식으로 말하면 ‘哈日族’(대만 젊은 작가가 창안해낸 명칭, 일본을 좋아하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에 속했다. 1982년 경이니까 교과서문제로 일본과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상황 속에 반일감정이 유행했던 시기였다.

그것을 감안 하면 나의 “哈日”은 ‘이단’적이였다.

대학 4년 동안 일본 교수님들의 일본어 특훈을 통해 덕분으로 나는 오리지널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학부도서관에 소장된 일본 직수입 도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은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었다.

그중에는 중국에서 공개 번역 출간되지 못한 세계명작, 사상서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일본어로 그런 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일본서적은 정신의 식량으로 되어 배고픈 나의 정신세계를 채워주었으며, 나의 가치관, 세계관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일본 펜 벗들이 우송해주는 일본어책들을 통해서 일본 文化의 레슨은 쌓이기 시작했다. 1983년 인가 처음 읽은 동포문인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일본에 대한 동경은 더 한층 중대되었다.

그리고 이어령선생에 대한 개인적 숭배의 싹도 트기 시작했다.

일본, 일본인 그리고 일본문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폭됨에 따라서 나는 왜 동양에서 그 작은 섬나라가 솔선하여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세계 경제, 문화의 대국이란 기적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강렬히 매혹되어갔다.

나는 고교 때부터 싹텄던 동일한자문화권인 중, 일 ,한 3국의 문화비교분야에서 탐구를 할 결의를 남몰래 내렸다. 그래서 나는 미구한 장래에 일본유학을 노렸으며 중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포기 해버렸다.

대학 근무 6년후 일본유학의 찬스가 나에게 지구에 떨어진 어린왕자같이 나타났다. 재일 한국인 비교문화학자 김양기(金 兩基)교수님의 알선으로 도시샤(同志社)대학의 니이지마(新島)장학금을 운 좋게 획득하게 되어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에 별 따기”라는 니이지마 장학금은 내 운명을 바꾼 일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 드릴 때부터 일본 녹차의 청향이 공항의 로비에 물씬 풍기던 일은 오늘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있다. 중국 공항에는 중국요리의 기름 냄새가 나고 한국 공항에는 김치의 냄새가 나는 것은 그대로 3국 비교문화의 상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처음인데도 어쩐지 낯익다”는 일본의 한국관광에 대한 광고용어가 유명하다. 이 말과 같이 처음 와보는 일본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했고 익숙한 고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항일영화에 나오는 잔혹하고 하품(下品)의 일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 가든 질서정연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일본이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서 일본에서 지내는 삶이 오히려 중국내에서 보다 내 개인적으로 행복한 기분인 것은 나로서도 불가사이 했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이 심경을 토로하자 “그러세요” 하면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표정의 이면에는 어딘가 석연치 못하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외국생활 경험이 없었던 탓으로 나의 이국생활감각에 대해서 미처 이해를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 뒤 프랑스에서 십여년동안 생활 해온 일본인은 나의 체험담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異文化체험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이문화 이해 정도는 물론 그 생활자체에 대한 감각도 판이 한 양상을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생활이 일점의 불편 없이 다 완미한 것은 아니었다. 순풍 만범한 것도 아니었다. 타민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얕잡아 보거나 경제적 수준이 나린 국가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에 대해 차별시 하는 일본인도 주변에서 만났다.

속으로 기분 나빴으며, 특히 입국관리의 그런 노골적인 외국인 차별 직원과도 나는 패스포트를 집어 뿌리면서 싸운 적 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他文化이해의 절박성에 대해 더 깊이 몸과 피부로 느꼈으며 비교문화를 통한 상호문화이해, 인식의 중요성을 터득하기도 했다.

학문을 하고 표현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학자, 작가, 오피니언)에 있어서 그 언론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 일본은 그런 자유가 발달된 나라였다. 이 자유의 공간, 서로 간섭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와 그 사회적, 학문적 자유의 바람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고  선렬한 자유로 와 닿았다.

대학원 연구공부와 함께 독서의 자유로운 세계.

그것이 나에게는 말 그대로 최고 지복(至福)의 자유였다. 자유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비교문화의 탐구는 박차를 가 할 수 있었다. “박차에 박차를 가한다” 라는 말과 같이 일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것, 따라서 중국과 한국에 관한 문제도 더 알아야 한다는 구지욕으로 나는 “탐욕” 하다시피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문화, 일본인론에 관한 연구에 도취된 동시에 福澤論吉, 內藤湖南, 水井荷風, 谷崎潤一郞, 涉澤龍彦, 坂口安語, 安部公房, 村上春樹, 梅原 猛, 中西進, 梅棹忠夫, 加藤周一, 鳥居龍藏...등의 책에 심취했다.

도시샤대학시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강연을 처음 청강하던 광경은 생애 망각할 수 없는 감동적인 한 광경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나는 도시샤 대학이 또한 우리 민족의 탁월한 문인을 배출한 모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지용, 오상순, 그리고 윤동주, 이들의 족적을 따라 나는 도시샤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역시 여기서 나는 이들 선각자들과 또 다른 만남을 이룩했다.

28세 청년의 만용으로 나를 이들의 뒤를 이어 문화사에 남기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도시샤에서 공부하던 족적을 추적가하기도 하면서 또 세상이 모르는 “발견”도 하기도 했다. (특히 윤동주에 대한 나의 연구작업도 이때 싹이 텄다. 앞으로 윤동주 인물에 관한 다른 시각에서 밝히는 작업을 책으로 낼 예정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일본학계의 비교문화영역에서 보수적 체질을 느끼게 되었다. 즉 일본문화를 항상 서구와의 비교만을 통한 것으로 시도하는 편향성을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좋으나, 동일 한자문화권에서 유사한자끼리의 비교를 통하여 각국의 문화특징을 보다 정확히 석출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이 비교원리를 자칭 “近色비교원리”로 이름 짓고 서양과의 비교보다도 같은 동색계열의 비교가 오히려 더 극명하게 그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일테면 “황색”이라면 “담황” “심황” “주황”.... 등 미묘한 차이를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인종, 문화상 비슷한 한중일의 비교가 더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 원리에 따라 나는 나름대로 한중일 3국 비교문화론을 전개시켰다. 그리하여 비교문화론, 문명비평 등 집필과 강연이 일본에서 먹히게되었으며, 잇따라 중국과 한국에도 파급되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팬의 옹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속속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면서 동아시아의 주목을 받으며 조선족의 글쓰기의 가능성을 알리고자 했던 나의 꿈을 이룬 셈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문화 활동을 두고 같은 조선족의 어떤 연변 지식인이 나를 “매국노” “친일파”로 격렬히 왜곡중상하기도 했다.

나에게 팬들은 반론을 안 한다고 야단법석이었으나, 나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나의 국경을 넘어선 모스코폴지탄적인 사상경계나 월경하는 글쓰기의 진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론을 해도 그들이 이해할 수 없으며 가치 없는 내부소모전으로 되기 십상이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연변의 어떤 학자가 나를 “매국노”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세월에 무슨 친일파고 매국노고 야단인가? 어디에 매국노가 있나? 외국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하는 시대에, 거 참 나 시골 할매 보담 생각이 짧은 학자도 있단 말이냐?!”

그러시면서 어머님을 웃으셨다.

“괜히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니 하고픈대로 하라. 사내가 작게 태어나도 맘은 넓어야 한다. 내 보건데 네 글이 바른 소릴 하던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무식자 어머님 역시 나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나의 월경적 문화적 코스모폴리탄적 사상에 이해 해 달라고는 하고 싶진 않다. 사람은 다 자신의 수준과 시야에서 말을 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자신을 “친일파”를 넘어선 “애일가”, 아니 “知日家” 로 본다. 정치이념을 넘어서 생리적으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그리고 일본도 중국과 한국같이 문화적 고향과 조국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게 일본을 무리하게 좋아하라, 사랑하라 권유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단 타자와 비교에서 타자의 결함을 비웃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결함을 끄집어내고 비판하여 자기성찰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사탕발린 찬미가를 부를게 아니라 앎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이야기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애초에도 지금도 나의 글쓰기를 이룬 큰 기둥의 하나이다.

따라서 자기와 타자, 타문화의 배척, 배제보다는 나는 상호의 대화, 이해와 융합을 주장하는 인간이다. 21세기는 그러한 대화와 공존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기실 일본에서 내가 발견한 일본문화의 경계성, 복합성 등에는 일본형의 공존, 융합의 미학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을 과거의 역사체험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비하하며 경멸하기는 쉬우나, 그보다도 생산적 인 것은 그들을 이해하고 일본문화 속에 숨겨진 장점들을 찾아내서 연구, 습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외국학습에 대한 방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화, 문명을 학습하는 학습의 우등생적인 체질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리하고, 상호인식에도 유익하며 공존공생의 기반을 구축해 주는 구체적 작업이 된다.

앞으로도 나는 체질적으로 맞는 일본문화를 한국, 중국문화와 함께 계속하여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기에 나는 그에 대한 결함, 약점을 비판, 성찰하는 연구, 비평의 글쓰기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美)의 나라 일본, 문(文)의 나라 중국, 그리고 정(情)의 나라 한국- 3개의 조국과 문화의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을 글쓰기로 향수하면서 만끽하고 있다. 간략하게 쓴다던 것이 또 길어졌다.

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문학연구자이며 일본을 사랑한 미국학자 도널드 킨(Donald Keene)의 말로서 이글을 접으련다.

“나와 일본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기묘한 운명에, 나는 장래에도 계속 감사해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지금 너무 명백히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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