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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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2013년 07월 03일 13시 42분  조회:5825  추천:37  작성자: 김문학

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필자는 2006-08년 사이<<중국 국민성 裏구조의 발견>>이란 저작을 집필 하면서 중국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비적”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다수 섭렵했다. 중국 “正統”사회라는 표면의 사회 외에 裏面에는 또 하나의 “비정통”사회로서의 인간 층이 중국사에 존재해 왔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비정통”이라 일컬어지는 良面의 인간 층, 즉 正統社會의 表面의 인간 층의 대극에 존재한 그들이야 말로 表面인간층을 뒤엎고 새로운 正統사회의 주인으로 되는 중국사회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 구조를 이룬 중대한 팩터가 곧 “비적원리”임을 깨달았다. 물론 “비적원리”라는 용어는 필자의 조어이다. 중국 사회를 지배해온 수많은 원리 중에서 우리가 홀시했거나 간과했던 덧이 이 “비적원리”였다. 흔히 중국을 지배한 유연한 원리로 “유교원리”로 포착하지만, 그것을 지배계급이나 위정자의 장식물로서의 典雅한 간판이며, 이 이면에 반거해 있는 것은 어느 조대나 공포 스러운 “비적원리”였던 것이다.

100년전인 1900년대 초기 신해혁명 1911년을 거쳐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될 때까지 중국역사에서도 비적이 창궐의 극성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근대사에서는 흔히 “혁명사”, “반제, 반봉건, 반식지투쟁사”로 만 기술에 편향하면서 이시기의 비적, 비밀결사, 유민(遊民)의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위정자들은 의도적으로 이들에 대한 기술을 은폐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에는 중국의 정통적인 혁명과 이들의 밀접한 관계성을 되도록 회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서구나 일본의 근대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1911년의 전후의 백년전 중국은 “그대로 거대한 비적의 공동체(4억의 무법체)”이므로 “이시기의 비적 연구에 따라 중국의 국민성이 규명 될 수 있다” 라고 단언한다.

근대 중국의 裏 사회의 주종을 이룬 비적을 다각적 시각으로 해부한 훌륭한 노작이 있다.

영국학자 Philp Richard Billingsley의 <<비적-근대중국의 변경과 중앙>>(1988년간행)사회학자인 저자는 근대 중국의 귀중한 사료를 구사하여 중국의 비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참신한 시점으로 근대중국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농민들은 생활이 궁핍해지면 왕왕 비적으로 전향하는 역사 룰을 지닌다. 전설적 도적이었던 도척(盜跖)은 비적의 “수호신”이었으며 도교의 유토피아 사상 중에도 분명히 무법자와 공존이 혼효되어있다.

그러므로 중국사에서 주기적으로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해온 배경에는 모택동이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다” 라고 지적 한 것 같이, 농민의 반란이 규칙적으로 반복된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 역대의 농민반란, 비적원리를 스스로 중국을 구제하는 방침으로 삼았다. 문약한 근대 중국 지식인의 “사대부원리士大夫原理”에 반기를 든 모택동의 폭력적이고도 획기적인 혁명방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농촌의 최하층 유민, 무산자, 룸펜(모택동 자신의 말대로 병사, 비적, 도둑, 걸인, 매춘부)들에게는 투쟁력이 왕성하므로 그들을 교육, 조직해 중국혁명의 주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거듭 고백하듯이 자신은 “녹림대학(綠林大學)” 졸업생이며 중국 문제의 해결은 “양산박 영웅을 배우는 것”이었다. <<수호전>>을 애독한 모택동은 양산박녹림대학원리의 충실한 실천자였다. 문화대혁명의 원리는 사실“계급투쟁” “조반유리(造反有理)”의 간판을 건 폭력원리(비적원리)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의 중국의 신문, 잡지를 통해 내륙부에서 비적으로 인한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의 잠언대로 “법의 숫자가 증폭되는 만큼 도적의 숫자가 늘어난다” 라는 상태였다. 1930년 비적의 총 숫자는 적게 치고서도 2000만에 달했다고 朱新繁의 글이 전한다. 신해혁명후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중국 신문은 중국을 “民國”이라 칭하는 대신 “匪國”이라 야유한다. “민국이 시작된 무렵 비적이 안 나타난 곳이 없었으며 비적이 소란피우지 않은 해가 없었다” 라고 載玄之는 그의 저서 <<홍창회>>에서 술회한다.

이런 비적, 의적은 그 신비성으로 인해 근대 중국 지식인, 문인사회에도 매료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무협소설, <<수호지>>같은 의적 문예의 계보가 중국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왕왕히 비적을 영웅시 했던 것이며, 비적의 심정에 본능적인 이해를 표시하기도 했다. 일종 비적집단의 형식인 “비밀결사”가 근대 중국 혁명과 밀접히 연관된 것은 근대 중국사의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黃建遠의 <<靑, 紅, 黑>>에 따르면, 청말 민초시기 天地會, 靑帮,紅帮 등 폭력적 비밀결사가 전국각지에 대두하며 지배층까지 영향력이 미친다. 민국의 총통이나 총리로부터 군, 경찰, 금융, 상공계, 매스컴, 문예계, 서비스업, 산업계 및 최하층 쿠리(苦力)까지 침투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손문의 신해혁명 자금은 일본의 지원 외에도 洪門天地會에 속한 비밀결사가 致公當의 지원이 지대했으며, 손문 본인 역시 하와이 치공당 당주이기도 했다. 장개석 역시 상해 靑帮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중국 뒷거리를 장악한 청방의 두목 황금영의 제자인 장개석은 1920년대 주가후정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 황금영의 추천으로 손문에게 기대게 된다. 장개석은 그 뒤 총통이 되었어도 청방과 늘 동맹관계를 보전하고 있었다. 민국의 대군벌인 吳佩孚, 張宗昌 역시 청․홍방의 멤버이기도 했으며 경극 스타 梅蘭芳, 周信帮 도 황금영문하생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1927년 지식인형의 도시점령방침을 포기하고 강서의 비적 文才등과 동맹을 결성하여 정강산 근거지를 개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자신의 혁명원리인 비적원리를 근대식 투쟁원리로 승화시킨 것이며, 이것으로 그가 중국 해방에 성공한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이며 독자적인 “혁명원리”를 발안한 희대의 혁명가로서 손색이 없는 근대 거물이다.

근대 중국인식에서 망각했거나 누락한 것은 이 같은 “유교원리”아래에 연면히 맥을 잇고 있고 있는 비적원리를 바탕으로 한 폭력, 투쟁원리이다. 그것을 신사와 유민이 공동으로 중국사회를 이룬 것과 같은 이치로, 중국 지배의 또 하나의 굵직한 원리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성의 하나의 구성구분이기도 하며, 근대 중국이 오히려 화려한 유교간판을 걸고 행해진 지배원리는 그 국민성의 뒷받침으로 가능해진 “폭력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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