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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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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③
2007년 12월 31일 16시 11분  조회:7913  추천:39  작성자: 김성룡
1929년 봄부터 1931년 말까지 2년여 시간 북경에서 지하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있던 김산은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선후로 두 차례 밀정에게 체포되여 갖은 혹형을 당했고 석방된후에는 또 당조직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갖은 시련 앞에서 그는 굴하지 않고 항쟁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지하투쟁을 계속하여 당조직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권립 교수) “1930년에 김산은 국민당 밀정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그는 적들의 잔인한 혹형 앞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1931년 11월 20일 김산은 북평 서성구(西城区)에서 체포되였다. 당시 김산은 동성(东城) 숭축사(崇祝寺) 납복호동(纳福胡同) 4번지에 위치한 천흥공반점(天兴公饭店)이라는 호텔 뒤뜰에서 류청화라는 이름으로 투숙하고있었다. 그는 비밀회의에 참가하러 갔다가 이를 탐지하고 미리 매복해 있던 밀정들에게 체포되였던 것이다.

 

 


일제 옥중에서의 김산

 

일제경찰들이 밝혀낸 김산의 신원

 

중국 경찰당국에서는 김산의 신분과 조직관계를 밝히려고 했지만 김산은 조선의 신문기자라고만 하였을 뿐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찰들은 그를 일본 천진령사관에 넘겼다.

왜놈들은 그의 입과 코로 가는 관을 넣고 머리카락을 끌어당겨서 머리를 낮게 만들었다. 사람을 질식시키는 이른바 ‘물료법’이였다. 뿐만 아니라 게다짝을 가지고 살이 터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정강이를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40일간 김산은 여섯차례 물료법을 받으며 갖은 비인간적인 혹형을 이겨내야했다. 그의 코와 페부에는 출혈이 계속되였고 몸은 허약해 질때로 허약해졌다. 그후 김산은 대련, 단동을 거쳐 천여명 정치범들을 수용하고있는 신의주 감옥으로 이송되였다. 그곳에는 대부분 동북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지사들이 수감되여있었다. 그리고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수천명 조선의 우수한 투사들이 그곳에서 이미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7일후 김산은 법정에서 판결을 받았다. 아무런 근거를 잡지 못한 놈들은 “중국사회에 대한 위험을 조성하는 자는 3년간 중국에서의 체류를 금지한다”는 조목에 따라 판결하였다. 그리하여 가혹한 고문에 페결핵을 가지게 된 김산은 병든 몸으로 고향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조선국내에서의 조선인민의 궁핍한 생활은 더욱 심했고 일제의 통치는 더욱 가심하였다. 땅 잃은 농민과 일자리를 잃은 로동자들, 일제의 수탈에 맥을 버린 상인들, 방향 없이 일제의 노예교육을 받아야하는 학생들 ...조선국내의 상황은 김산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그 아픔은 일제 혹형으로 인한 육체적인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였고 극한을 넘은 아픔은 최대의 의지를 불러일으켰고 최대의 정신력을 불러일으켰다. 김산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계속 혁명자들을 찾아 싸워야 했던 것이다.

 (권립 교수) “김산은 심한 페결핵에 시달리면서도 북경의 당 사업을 근심하여 북경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체포되였던 김산이 왜 살아서 돌아왔는가에 대해 조직에서는 의심을 가졌고 그에게 어떤 임무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1932년초 김산은 만기 석방된후 다시 조선을 떠나 북경에 왔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데 대해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안해 제숙용도 다시 찾지 못했다. 동지들의 불신임으로하여 김산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웠지만 계속 사업을 견지하였다.

중국 경찰당국도 김산이 다시 중국에 왔다는 보고를 받고 수색에 나섰다. 김산은 할수없이 해전구 선연교(善缘桥) 12번지에 위치한 조선지사 김기창(金基昌)의 집에 몸을 피하군 하였다. 경찰들의 색출이 심해지자 그는 북평 오이독서회(鏖尔读书会)의 소개로 하북성 보정에 있는 직예(直隸) 제2사범학교에 초빙되였다.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의 한사람인 리대소가 설립한 이 학교는 지금의 보정사범학교이다.

 

 


하북성 보정사범학교

 

김산의 사적을 설명해주는 동금의 로인(좌로 네번째, 원 보정사범학교 교장)

 

2003년 10월 23일 태항산 조선의용대 답사를 떠나는 길에 답사 팀은 보정사범학교를 찾아보았다. 이 학교 교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동금의(董金义) 로인이 기자들을 만나 주었다. 74세의 고령이였지만 기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나온 동금의 로인은 김산에 관련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당조직의 관심하에 북경으로부터 독서회의 소개로 장명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장북성, 장한삼이였는데 조선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력사를 가르치고 교과서를 만들어 진보적인 력사관을 전수했습니다. 그런데 북경의 국민당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였습니다. 당시 이 학교의 진보적인 교장이였던 장등소가 학생들과 함께 장명을 고양에 이전시켰습니다. 그 학교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었습니다.”

보정사범학교에서 김산은 장명(张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당 대표의 신분으로 사업하면서 당 조직을 도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자체로 력사와 지리 교재를 편성해 강의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잘 들었고 그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였다. 6월초의 어느날 중국경찰들이 학교를 포위하였다. 그들은 일본 경찰을 앞세우고 김산을 체포하려했다. 학생들은 소식을 듣고 대문을 꾹 닫았다. 진보적인 교장인 장등소(张腾霄)도 학교에 조선인 교원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한편으로 학생을 시켜 김산을 병원에 숨겨 놓았다. 이때 김산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계속 학교에 남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장등소 교장과 학생들과 작별하고 고양현(高阳县) 북신장(北辛庄)에 피신하였다. 그는 현지 사범반에서 농민들에게 력사와 정치, 철학을 가르쳤고 현지 농민대중들에게 혁명사상을 전수하였다.

(권립 교수) “김산은 1932년에 보정에 가서 자각적으로 당의 립장에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3백여명의 농민대오까지 조직하여 국민당의 백색테로에 대처하고 체포된 동지들을 구원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대중운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김산은 맑스주의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932년 그는 선후로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 《무신론》등 저서들을 번역, 출판하였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의 저택에서 우리는 김산의 이러한 유작들을 보게 되었다.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은 장북성이라는 필명으로 출판되였고 《무신론》은 일본학자의 저서를 중문으로 번역한것이였다. 그리고 김산이 친필로 쓴 한문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吊韩海同志)》 원본과 1930년 12월 5일 옥중에서 쓴 친필 자술서 복사본을 볼수있었다. 자술서는 자기가 조선독립혁명에 참가한 경위와 체포 당시 거주지를 밝히고 고향에서 부쳐오는 돈과 신문사에서 보낸 원고료로 생활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과는 관련이 없이 조선혁명가로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나뉜 혁명진영에 대해 애탄하는 내용을 적고있었다. 자술서를 보면 김산은 줄곧 중국 국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본경찰에 넘겨졌고 또 일본의 법에 따라 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하여 기타 체포된 중국공산당원들과는 달리 그는 국민당 반동파들에게 살해되지 않을수있었다. 이를 알지 못한 당시 북평의 중국공산당 조직에서는 김산의 석방을 오해하고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산의 역저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

 


김산의 옥중 자술서

 


김산의 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

 

김산은 혁명가이고 문필가이며 또한 시인이였다. 그의 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는 무산계급 혁명의 격정으로 차 넘치고있다.

하북 고양현에서 김산은 대중운동에 대해 검토를 진행하였다. 당시 당내 좌적 맹동주의가 우세를 차지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화북국에서는 무장폭동을 준비할 것을 김산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김산은 폭동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리유로 폭동계획을 반대하였다. 만일 폭동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많은 희생을 내야할것이고 당조직도 폭로되기 때문이였다.

1932년 8월에 김산은 계속 하북성 당위원회의 무장폭동계획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무장폭동 계획은 재검토 되지 않았다. 김산은 하는수 없이 성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고양에서 폭동을 준비하였다. 8월 20일 하북성 고양, 여현(蠡县) 농민무장 폭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막강한 적의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농민들을 보는 김산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무모한 지도력으로 인한 희생이 얼마나 막대한가를 그는 심심히 느끼게 되었다. 그는 북평으로 달려가 자기의 견해를 조직에 제기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정확한 의견을 접수하려 하지 않았고 도리여 사람들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당조직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김산은 허약한 몸과 빈궁으로 커다란 절망에 빠져있었다. 이때 누구나 그를 찾아주지 않았지만 조아평(赵亚平)이라는 젊은 녀학생만이 과일과 책을 사들고 자주 그를 보러 왔다. 김산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용히 체력을 회복하고 마음을 안전시키면서 다시 혁명을 시작하였다.

1933년 5월 1일 아침, 국민당 람의사(蓝衣社) 특무들이 김산이 하숙하는 방에 뛰여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당시 김산은 서성구 2룡로(二龙路) 서철장호동(西铁匠胡同) 15번지의 하숙방에 거취하고있었다. 답사팀이 북경시 중심거리인 장안가(长安街) 남부에 위치한 이곳을 찾았을 때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건설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최룡수 고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33년 4월 26일 아침, 남의사 특무들이 김산이 하숙하는 방에 뛰어들어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당시 김산은 서성 서철장 호동 15호에 위치한 하숙방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서성구 이룡로 40번지(西城二龙路40号)입니다. 놈들은 그곳에 대기했다가 김산을 찾아온 조아평까지 체포하였습니다. 호송차에서 김산과 조아평은 두려움 모르며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공사장 곁에는 서철장 호동 21번지로 된 옛 건물 하나가 있었는데 가도판사처로 사용되고있었다. 현지인들과 물어보았지만 당시 서철장호동 15번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로 공사장 부근이라고만 할뿐이다.

놈들은 김산을 체포한후 하숙방에 그냥 대기하고있다가 김산을 찾아온 조아평까지 체포하였다. 호송차에서 김산과 조아평은 두려운 기색은 조금도 없이 서로 격려하였다. 김산은 이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김상은 또다시 천진 일본령사관으로 넘겨졌다.

 

 


천진의 일본령사관옛건물(지금은 천진시 소년아동 도사관)

 


본령 옛건물 내부(일본 군경들의 구두발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천진시 안산도(鞍山道) 59번지에는 지금도 옛 일본령사관 건물이 남아있다. 2층 붉은 벽돌로 된 옛 건물은 지금은 천진시 소년아동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김산은 더욱 악독한 취조를 받았다. 놈들은 중국공산당원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대답하는 김산을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찼으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고 또 량쪽 귀를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 김산은 강의한 의지력과 지혜로 적들과 싸웠다.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한 놈들은 3년간 중국으로 가지 못한다는 명령을 어긴 것으로 김산에게 징역 1개월과 벌금 20원을 안겼다. 김산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2원씩 벌금을 갚기 위해 노역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산은 다시 대련, 봉천을 거쳐 조선에 이송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놈들의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풀려나게 되었다.

(권립 교수) “1934년 1월에 그는 북경에 돌아왔습니다. 이때 조직에서는 그를 더욱 의심했고 아무런 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산은 의연히 자각적으로 당의 사업을 밀고 나갔습니다.”

 

 


지하당사업을 조직하던시절의 김산

 

1934년 1월, 김산은 체력을 얼마간 회복하고 다시 중국에 왔다. 그는 북경 해전구의 김기창의 집에 기거하면서 다시 혁명사업을 전개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함께 체포되였던 조아평의 행방을 찾았다. 그가 천진 일본령사관에 구금되였을 때 보석출옥한 조아평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련인의 소식을 고대하면서 새로운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의 마음은 또다시 들끓게 되었다. 그는 격동되는 심정을 애써 참으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련인 조아평과 함께 체포되였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불렀던 그 노래였다.

“흰 새 두 마리가 두터운 구름 속을 날아가네

저 아래 세상이 닭알만하게 보이네.

그 자유롭던 나래가 지금은 우리 속에 갇혔구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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