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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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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7)
2018년 08월 16일 11시 36분  조회:1194  추천:0  작성자: 김장혁






                4. 숲속에 피어난 나리꽃

떵떵 얼어붙은 대지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단장돼 은세계를 방불케 했다.
풍설도 기세 사나왔지만 덕돌은 이젠 악렬한 환경에 습관돼 모든 것을 당해낼 수 있었다. 황승연의 정신압력도, 힘든 담임교원의 엄청난 부담도, 물독이 얼어 터질 지경으로 추운 당직실의 혹한도 완강한 의력과 생명력을 가진 덕돌을 꺾어버리지 못했다.
그는 청춘의 뜨거운 정열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용감히 앞길로 나가며 교원사업을 참답게 해나갔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애들의 기말성적도 놀랄 지경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그가 맡은 학급은 전 교 “문명학급”, “선진학급”의 상까지 탔다. 그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정말 반년 전에는 전교 교원들 앞에서 비판받았는데 전교 교원들 앞에서 두 개 상장을 타는 그 기쁨은 코마루가 시큼해날 지경으로 눈물겨웠다.
방학식을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고 덕돌은 수일과 해숙, 해금을 데리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이 철교를 지날 때었다.
“서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다리목에서 한 무리 애들이 뛰쳐나오며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허나 덕돌을 보는 순간 애들은 다 달아났다.
허나 억대우 같은 동철과 그의 삼촌 철석은 다리목에 두 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덕돌을 노려보았다.
“김 선생, 주먹이 그리 세다는데. 어험, 어째 붙어볼까? 겁나오?”
철석이 어깨 으쓱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거들먹거렸다.
“사내 대 사내로 자웅을 나누기요.”
(이 자식, 정말 놔둬선 안 되겠구나.)
덕돌은 애들 보고 먼저 집 쪽으로 달아나라고 나직이 말하고나서 희죽이 웃었다.
“그래, 그 새 몸을 뺄 새 없었는데 오늘 붙어보자.”
애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려 덕돌은 스적스적 다가가며 손짓으로 철석을 오라고 불렀다.
“야, 한번 붙어보자.”
그러자 철석은 다리 아래를 가리키면서 “저기서 붙자!”라고 했다.
덕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가 4미터 가까이까지 가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려고 잔등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철석은 불시에 둑의 돌을 쥐어 덕돌의 뒤통수 노리고 탁 쳤다.
수일은 저쪽에서 “선생님, 주의하십시오!” 하고 고함쳤다.
“억!”
덕돌은 어느 결에 자세를 낮춰 뒤에서 날아드는 주먹을 피했다. 재차 날아드는 주먹을 몸을 돌리면서 꽉 틀어쥐어 비틀며 발길로 철석의 발뒤꿈치를 탁 걷어찼다.
손에 쥔 돌이 저만치 날아났다.
재차 발길로 면상을 휘감아 찼다.
절구통 같은 철석은 썩박나무 쓰러지듯 쿵 넘어갔다.
“야, 멋있다!”
저쪽에서 수일이랑 해숙이랑 박수갈채를 보냈다.
허나 동철이 철길 옆의 돌을 쥐어뿌리자 겁을 집어먹고 그만 웃고 떠들었다.
덕돌은 발길로 철석의 면상을 툭 걷어찼다.
“일어나! 비열한 놈!”
덕돌은 더 치지 않고 철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철석은 불의습격에 패하자 창피하고 자존심이 꺾여 씩씩거리며 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평평한 강바닥에 내려가 해보자!”
덕돌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주제에 장소 탓도 많구나.”
그런데 저게 뭐야?
철석은 자기가 근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철다리 위로 냅다 도망쳤다.
“어디로 도망가?!”
저걸 어떻게 해?
덕돌이 뒤쫓아 뛰어가다가 몸을 훌쩍 날려 머리 위로 날아 곤두박질치며 뒤발로 철석의 면상을 걷어찼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철석이 낯을 싸쥐고 푹 꺼꾸러졌다.
덕돌은 무송이 호랑이를 무쇠주먹으로 치듯이 쓰러진 철석을 가로 타고 앉아 한매를 치고 한마디씩 먹였다.
“다시 우리 수일을 때리겠니?”
“아, 살려주오.”
“말해? 다시 동철이랑 시켜 여기서 우리 학급 애들을 막겠니?”
“아, 아니, 살려만 주십시오.”
그제야 덕돌은 허연 눈 위에 뻘건 피범벅이 된 철석의 대가리를 툭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얼빠진 건달 놈 새끼, 언감 나를 건드려?”
“다신 아닙니다.”
“교원이니 어째 업신여겨?”
“아니,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랐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덕돌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비는 철석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다시 우리 학급의 애들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너네 집에까지 쳐들어가 없애치울 줄 알아.”
덕돌은 눈을 쥐어 철석의 낯에 푹 치며 을러멨다.
“동철이랑 데리고 꺼져!”
“예, 예, 예.”
수일이랑 꽤나 고소해 하는데 철석은 죽는 상을 하며 꿇어앉은 채 신음소리를 냈다. 저쪽에서 동철이랑 숱한 애들은 눈보라 속에서 멀어져가는 수일이랑 보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 후 동철이랑 다시는 진짜 수일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제야 덕돌은 한시름을 놓았다.
방학이 되자 덕돌은 신문사 기자로 전근돼 간 성환 형님이 소개한 교외 한 공사병원의 간호사 처녀를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눈 덮인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진수해 교외로 달려갔다.
22세 밖에 안 된 그 간호사 처녀는 성환의 동료기자 명수의 사촌여동생인데 꽤나 예쁘다고 했다.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는 처녀라고 하니 처음에는 그리 썩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덕돌이 만난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별의별 처녀 서른일곱이나 만나보았다. 이번 처녀가 딱 서른여덟 번째 처녀였던 것이다.
뭐 향진 기업국 국장의 막내딸로, 텔레비전방송국 부총편의 딸로, 한 살 이상 대학교 여동창생으로, 자기보다 세살이나 지하인 예술학원의 학생 송영자로 처녀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그러나 이치저치 해서 약혼하지 못했다. 더구나 어떤 처녀들은 덕돌이 농민 부모를 모실 외동아들이라고 나무라면서 그만두기도 했다.
상순은 덕돌이 방학에 집으로 가기만 하면 며느리비위가 동해 자꾸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라고 재촉했다. 명옥도 스물여섯이나 먹은 아들이 노총각으로 늙을까봐 일찍이 손을 써 각시 감을 찾아두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부모가 아무리 졸라대도 학교 일이 잘 되지 않는데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공사마을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려고 국장이나 인대 주임 네 딸이라고 해도 치마사다리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대상문제를 미루어 왔던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진수해중학교를 벗어난 후 대상문제를 고려하고 싶었던 것이다.
덕돌은 눈 위로 자전거를 힘겹게 타고 평란촌으로 달려가면서 피씩 웃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상한 거야. 어쩜 어떤 간호사처녀인가고 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할까? 진수해중학교 그런 악렬한 환경에서는 약혼이고 결혼이고 다 그만둬야 하는 건데. 우리 학교에 와서 조사하면 누가 날 좋은 교원이라고 하겠나? 전교 교원들 앞에서 비판까지 받은 사람인데.”
공사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그 간호사처녀 이명숙은 전날 직일을 서고 집에서 쉰다고 했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 눈길에 자전거를 타다가도 눈더미에 길이 마겨 자전거를 밀고 힘겹게 평란촌으로 갔다. 가는 길에 이 사람 저 사람 물어 4촌민소조 제일 앞집으로 다가갔다.
그때 낮다란 초가집 앞에서는 웬 육십대 노인과 청년이 작두로 소먹이 벼 짚을 썩썩 썰고 있었다. 노인이 앉아 작두에 벼 짚을 먹이면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추녀 끝에 달린 바 줄을 잡고 서서 발로 작두를 밟아 벼 짚을 썩 뚝 썩 뚝 썰고 있었다.
덕돌은 자전거를 밀고 다가가 가죽털모자까지 벗고 “말씀을 물읍시다. 여기 이명숙이 네 집이 어느 겁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벼 짚을 먹이다가 말고 “우리 집이오. 어디서 오오?”라고 하며 덕돌을 유심히 살폈다.
청년의 눈길도 덕돌에게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수해중학교에 있는데 명수선생이 보내서 왔습니다. 명숙이 있습니까?”
“오, 집안에 있소. 들어가 보오.”
덕돌은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청년을 보고 “오빠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동생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집안에 들어가 먼저 알렸다.
덕돌은 어떻게 생긴 처녀인가고 보려고 염치를 불구하고 문을 뚝 떼고 들여다보았다.
어깨 넘는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가 덕돌을 놀랍게 쳐다보았다.
“들어오십시오. 누굽니까?”
“아, 난 진수해중학교 교원입니다. 명수선생이 보내서 왔습니다.”
“우리 오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감기에 걸려서 페니실린 주사를 얻어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덕돌은 능청스럽게 둘러대면서 처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스리슬쩍 여겨보았다.
부엌 널판 위에서 바깥을 내다보는데 어쩜 저렇게 예쁠까? 어깨 넘어 풀어헤친 파도치는 머리카락,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격, 우유빛 얼굴에 복스러운 이마, 어글어글한 눈… 참말로 숲속에 핀 나리꽃 같았다.
(어쩜 이런 초가집에 저렇게 예쁜 처녀가 있을까?)
“들어오십시오.”
그 처녀가 말했지만 덕돌은 문고리를 놓으면서 “아니, 저기 나가서 얘기 합시다.”라고 했다.
첫눈에 반한 덕돌은 몇다미 말이나 나누고 싶어졌다. 그는 자전거를 밀고 북데기 속에서 낟알을 쪼아 먹는 닭들이 모여 있는 탈곡장에 가서 집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파란 조끼를 입은 처녀가 사뿐사뿐 탈곡장으로 다가왔다. 다시 여겨 보아도 훤칠한 체격이나 하얀 박 씨같이 걀쭉한 우유 빛 얼굴, 어글어글한 외까풀 눈, 오똑한 코, 작은 입이나 예쁘기로 그지없었다.
목소리 또한 청동방울을 굴리는 듯이 예뻤다.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오빠 무슨 일이 있습니까?”
덕돌은 선의적인 거짓말을 얼버무렸다. 
"명수선생이 아파서 페니실린 주사를 가져다 달랍디다. 난 신문사에 갔다가 심부름을 시키니 왔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진수해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합니다.”
“그럼 집에 들어갑시다.”
“괜찮습니다.”
허나 덕돌은 처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코신에 양말도 신지 않은 발에 가서 멎었다.
“발이 시리겠구먼. 양말도 신지 않고.”
“괜찮습니다.”
덕돌은 모자를 벗어 쥐고 저도 몰래 지나친 관심을 보였다. 연애에서는 금기었다. 특히 처음 만난 녀자한테 너무 넘어지면 한 수 지고(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솜옷도 입지 않았구먼. 추운데 길게 말할 게 없지. 후에 명수선생을 찾아가 보십시오.”
“예, 심부름을 하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눈길에 어떻게 가겠습니까?”
“추운데 안됐습니다. 안녕히!”
덕돌은 게걸스레 명숙을 한번 또 훑어보고 자전거를 밀고 탈곡장을 떠났다. 명숙이도 덕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사뿐사뿐 떠나갔다.
눈보라가 싸늘한 숙사 창문을 두드렸다. 덕돌은 싸늘한 당직실에 돌아왔지만 빨간 나리꽃 같은 예쁜 명숙을 만나본 기쁨에 겨워 마음이 흐뭇해났다.
(이렇게 악렬한 환경에서 명숙이 내 생활에 뛰어들었구나.)
덕돌은 가슴이 후련하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자 덕돌은 명숙에게 첫 꽃 편지를 써서 날려 보냈다.

명숙동무, 전번에 페니실린 심부름을 갔던 덕돌입니다. 피 끓는 청춘의 심장이 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눈보라는 휘몰아쳤지만 피 끓는 더운 심장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마라토너의 첫 신호탄이 울렸습니다. 이 코스에 처녀총각선수가 나섰습니다. 잘 달리면 마라톤처럼 기나긴 여정을 달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두 청춘의 맑은 순정의 결합이며 진정으로 피 끓는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라고 봅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지 1년이 됐지만 문학창작에 뜻을 둔 열혈청년입니다. 이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나이는 세상에 아직 해놓은 일도 써놓은 글도 없습니다. 개학 전 18일 오전에 XX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편 덕돌의 편지까지 받은 명숙은 집에 가져다 부모형제에게 보였다. 집에서는 덕돌을 두고 의론이 분분했다.
명숙의 아버지 종호는 “인기야 우리 두 사위보다 썩 낫지.”라고 했다.
동생 춘수도 “그만 하면 잘 생겼지. 그런데 키 그리 크지 않소.”라고 한마디 했다.
옥선도 “나는 보지 못해 모르겠다. 키 커서 뭘 하니? 천표나 많이 들었지.”라고 했다.
그러자 종호는 “대학생이지. 키 그만하면 됐지. 키를 떼먹고 살겠냐?”라고 했다.
명숙은 편지를 구들에 놓으면서 “편지도 아주 수준이 있게 썼습니다.”라고 한마디 보탰다.
그러나 명숙의 큰언니 은자는 “그래도 종신대사인데 신중해야지. 나와 함께 명수 오빠를 찾아가 어떻게 아는 선생인가 알아보고 사귀든지 해라.”라고 했다.
이튿날에 은자와 명숙은 신문사에 가서 명수를 찾았다.
명수는 원래 현당위 비서과 과장을 하면서 이계삼 부서기의 비서를 하다가 서로 물고 뜯는 정객들이 싫어 그의 말처럼 “죽은 글을 다루는 문자 사업을 하려고 신문사에 왔던 것이다.”
명수는 자기 견해를 말했다.
“그 청년이 남자 같더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그러나 명숙은 덕돌에게 이런 편지로 화답해 보냈다.

저는 이제 겨우 22살을 먹었어요. 아직 시집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허나 만약 만나보려는 의향이 있으면 그날 아침차를 타고 역에 나오세요.

그리하여 스무날 후에 덕돌은 진수해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속한 역으로 달려갔다.
역에서 내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역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쪽에서 회색외투를 입은 훤칠한 처녀가 덕돌을 불렀다.
“김 선생님,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그제야 서로를 확인하고 철길을 따라 뚜벅 또박 걸으면서 서로 집안 부모형제 형편이랑 사업에 관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덕돌은 첫눈에 반한 명숙을 놓칠까봐 외동아들이라는 것을 속이고 슬쩍 화룡 림업국에 형님이 있다고 했다. 기실 그에게는 한 마을에 있다가 화룡 투도진에 이사 간 이수봉 양형님이 있었다. 그런데도 슬쩍 친형님처럼 착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어떤 때에는 착한 거짓말은 우정을 지키는 술수로 될 수도 있었다.
덕돌은 처음 만난 명숙을 놓치기 싫어 애정관과 혼인관, 가정관에 대한 이야기를 숱한 소설에서 본 말을 인용해 늘어놓았다.
간호사처녀는 하얀 눈에 눈이 시린데다가 어린 나이에 부끄러워 덕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느덧 해가 숫구멍을 비췄다.
덕돌은 갈라지면서 처녀의 새하얗고 긴 손을 잡고 나서 불쑥 이런 말 한마디 했다.
“남이 헐뜯는 말을 소홀히 믿지 말고 자기 절로 서로 지내보고 결론을 지읍시다.”
(이 선생이 도대체 단위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었기에 이렇게 말할까?)
그날 덕돌과 갈라진 후 그녀는 오빠에게 편지로 학교에 가서 덕돌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명수는 황승연과 아는 사이인지라 알아보았다.
황승연이 좋은 말을 했을 수 있었겠는가!
싸움꾼이요, 깡패 두목이라는지, 술주정뱅이라는지, 교원사업에 열중하지 않고 글이나 쓸 궁리나 하는 불량배라는지 별의별 상말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지어 교원들에게 비판받은 일까지 다 말했다.
명수는 편지로 자기가 한 단위 동료 성환의 말을 믿고 사람을 잘 못 소개했으니 명숙을 보고 과단성 있게 덕돌과 그만두라고 했다.
명숙은 편지를 써서 자기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주풍이 나쁘면 흔히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사업도 안착해 하지 않고 교내외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허나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일반청년들과 완전히 다른 뭔가 있어 소홀이 결론을 내리지 못해요…

덕돌도 자존심이 면도칼처럼 시퍼래 노기등등해 편지를 날렸다.

동무는 내 옛 상처를 건드리는구먼. 남의 말을 믿고 나를 주풍이 나쁘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모욕입니다. 그만 두겠으면 그만 두오. 그래도 나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공동한 이상, 흥취, 언어로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구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근과 외교를 하려고 술을 마신 것은 사실입니다. 술 재간이 없어 술을 조금만 마시면 얼굴에 펴서 홍당무가 되고 토합니다. 그러다나니 우리 학교 술은 제가 혼자 마신 것으로 소문나고 주풍이 나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건 변명이거나 동정을 바라는 해석도 아닙니다. 다만 나쁜 놈들이 여린 동무의 마음에마저 대고 나를 헐뜯으니 애 타고 억울할 뿐입니다. 한편 어쩐지 나는 명숙동무와의 만남을 소홀히 버리고 싶지 않구먼. 그래서…

사실 명수선생은 자기 여동생을 딸처럼 아끼었다. 그는 명숙이 농촌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자기 집에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집에는 명숙보다 세 살 지하인 아들 문걸이 있었다. 그들 둘은 기실 아재와 조카였지만 오누이처럼 한 구들에서 자랐다. 집이라야 15평방미터도 되나마나 한 외통 온돌방이었는데 중간에 미닫이문이 하나 있었다. 명숙의 전도를 위해 명수 부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공부시켰다. 시내 학교에 붙여주고 인맥을 통해 명숙을 도와달라고 담임과 과임 한족선생들에게 술도 사 대접하면서 부탁했다. 명숙이 부탁하자 명수는 덕돌이 어떤 청년인가고 알아보려고 황승연을 찾았는데 반영이 아주 나빴던 것이다. 그리하여 명숙에게 편지를 써서 덕돌과 그만두라고 했다.
며칠 후 덕돌에게 명숙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미안해요. 선생님의 옛 상처를 건드렸다고 하니 더욱 그래요. 편지를 받고 보니 기뻤는데 읽고 보니 괴로워요. 전 요해하려고 물은 것 뿐이예요. 그래 요해도 하지 못해요? 맑스의 부인 옌니는 한 사람을 요해하려면 1, 2년은 아무것도 아니고 4~5년, 지어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어요. 저도 어쩐지 우리 이 우정을 소홀히 그만두려고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두 첫사랑이 평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해요. 물론 아직 우정에 불과해요.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과 오래 사귀여보면서 호상 요해하고 싶어요…

“이 처녀 나를 좋아하는구나.”
덕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어찌나 바빴던지 덕돌은 명숙과 편지로 우정을 주고받았다. 그러다나니 사귄지 넉 달이 다 돼가지만 세 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덕돌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내 우전국에 가서 공용전화로 공사병원에 걸어 명숙과 몇 마디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그들의 순결한 우정은 점차 훈훈한 봄바람을 맞아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 웃다가 꾸러미 터질 우스운 일도 다 벌어졌다.
어느 하루, 황승연이 덕돌을 불렀다.
“또 뭘 잘 못했다고 훈계하려는 걸까?”
교장실로 불리어 가면서 덕돌은 이것저것 잘 못한 데 없나 생각해보았다.
그가 문을 떼고 들어서자 황승연은 생각 밖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멍눈에 별스런 빛이 번쩍이었다.
“앉소, 앉아.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소.”
덕돌은 항상 우멍눈으로 쏘아보던 황승연이 불시에 웃음을 짓자 적이 어리둥절하다 못해 더욱 당황해났다.
“무슨 일입니까?”
황승연은 이전과는 달리 자기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덕돌의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우리 집에서 이사하는데 짐을 좀 들어줄 수 없소?”
“예? 됩니다. 황 교장은 스승인데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제가 성심껏 해드리겠습니다.”
덕돌은 한시름을 놓으면서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말이지. 덕돌은 황승연 교장은 자기 스승이기에 옛날에 어떻게 대했든지 간에 관계를 개선하려고 술도 사가고 노력했다. 허나 황승연이 제자의 정성을 받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비를 죽인 원수를 진 일도 없었다. 다만 반란파 두목을 한 황종연은 자기절로 자초해 감옥에 갔을 뿐인데 황승연은 덕돌의 아버지와 원수 취급을 하면서 덕돌을 미워했던 것이다.
한편 덕돌은 황승연이 이사한다는 것을 알면 학교에서 숱한 아첨쟁이들이 달려가 짐을 메고 뇌물을 사갈 것이었다. 허나 황승연은 태도를 일변해 이런 일에 딱 자기를 알리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덕돌은 속으로 명숙에게마저 자기를 헐뜯을 수 있는 사람은 황승연 밖에 없다고 짐작했다. 허나 명숙이 누구한테서 들었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형편에서 딱 그렇다할 증거도 쥔 것이 없어 추측에 불과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어서 덕돌은 이사 짐을 메러 황승연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학교에서 온 교원은 자기 밖에 없고 나머지 사람들은 알고 보니 황승연의 가시집 식구들뿐이었다. 덕돌은 땀을 뻘뻘 흘리며 황교장의 이사 짐을 날라주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넙죽한 처녀애가 환하게 웃으면서 덕돌이 짐을 둘러멜 때마다 뒤에서 춰올려주면서 “혼자 멜만 해요?”라고 하며 어색한 한국말로 문안하군 했다.
뒤에서 그 처녀애는 “힘도 장사로구먼. 딱 로지심 같아요.” 라고 찬사를 혀끝이 다슬게 하곤 했다.
일할 때 다리를 살짝살짝 젓는 10대 처녀애였지만 춰주니 덕돌은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이사 짐을 날랐다.
그날 처음으로 덕돌은 식당에 가서 황승연 교장과 마주 앉아 손수 따라주는 술까지 받아 실컷 마시고 게트림을 하면서 당직실로 돌아왔다. 만순과는 황 교장네 집으로 갔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어느날 황승연이 또 교장실에 불렀다. 덕돌은 이젠 황교장이 자기를 욕하지 않겠지 하면서 교장실에 스스럼없이 들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황승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정적으로 맞아 주었다.
그는 덕돌의 옆에 다가와 나란히 앉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일이 아니오. 난 덕돌이 말썽을 일으켰지만 사내대장부답다고 보오.”
욕만 하던 황승연이 스리슬쩍 춰주자 덕돌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워했다.
“정말이오. 여자들도 덕돌 같은 사내대장부한테 시집가면 행복할 거요.”
그제야 덕돌은 황승연이 명수선생에게 자기 말을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됐다.
(배후에선 나를 주정뱅이요, 깡패요, 부랑배라고 헐뜯고 앞에서는 슬쩍 춰주면서 양면 파 수법을 써? 가랑잎으로 작작 제 눈을 가리우거라.)
덕돌은 속으로 황승연의 낯에 침을 뱉었다.
황승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지껄였다.
“나한테 처조카 여자애가 있소. 인물이 아주 이쁘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덕돌을 쳐다보며 계속 늘여놓았다.
“아마 너도 어제 이사 짐을 나르면서 보았을 거다. 그 해사하고 활발하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 말이다. 다리를 살짝살짝 젓지만 사는 데야 대수냐? 남녀가 어디 다리로만 사니?”
덕돌은 대뜸 염오감이 울컥 치밀어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 같아선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입니까? 다리를 젓는 당신 병신 처조카와 살라고?!” 하고 욕설을 시원히 퍼붓고 싶었지만 점잖고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전 이미 말이 있는 처녀가 있습니다. 처조카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라고?”
황승연은 노여워 우멍눈을 부릅뜨고 광대뼈에 붙은 살까지 푸들푸들 떨었다.
“사람으로 봐주니 좋은 줄을 모르고 그 주제에 누구 네 귀한 처조카를 차버려? 내 처조카딸과 결혼해봐라. 내 너한테 학교 단위 서기를 시킬 테다. 그뿐이겠냐? 우리 학교에서 몇해 단위 서기로 있으면 내 현 단위에 말해서 부서기로 추천할 테다.”
허나 덕돌은 “감사합니다. 허나 사랑과 벼슬은 다릅니다. 마음에 없는 여자와 어떻게 삽니까? 아무리 서기요 부장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황승연은 “가만 한마디만 더 듣고 나가라.”라고 하며 덕돌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네 같은 주정뱅이, 깡패와 누가 결혼하자고 하겠니? 너 약혼하려니 하니? 쉽지 않을 거야. 우리 처조카를 소개할 때 약혼해라. 그럼 네 전도는 창창하다. 그러지 않아 봐라. 어떻게 되는가?”
덕돌은 황승연을 똑바로 쏘아보며 냉소했다.
“처조카 딸과 약혼시키자고 혼사반간을 놓았겠구먼. 알만합니까? 남의 혼사반간을 놓으면 죽어 파묻어도 묘지 꼭대기에 풀이 나지 않는답디다.”
말을 마치자 덕돌은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뒤에서 “너 약혼이나 하는가 두고 보자.”라고 하며 욕하는 황승연이 복도에서도 다 들리었다.
어느 날, 덕돌이 전 시 학생육상경기대회를 앞두고 애들을 데리고 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었다.
고중 고도선수 넷이 와서 고도 뛰기를 연습했다. 남자선수들이 1.5미터를 겨우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창 씽씽 날 애들이 고작 그것밖에 뛰지 못하니?”
그러자 그 선수 애들이 “선생님은 뭐 얼마나 뛰기에? 큰 소립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수일이랑 선화랑 학급의 애들도 모두 덕돌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한번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덕돌은 핍박에 의해 고도 앞으로 가서 고도대를 쥐어 단번에 1.55미터 올려놓고 이쪽으로 스적스적 걸어왔다.
체육교원들과 애들의 눈길이 몽땅 덕돌에게 쏠렸다. 덕돌은 별로 몸 풀기도 하지 않고 속도를 내 달리다가 두 손을 머리 앞에 대고 개구리가 물에 뛰어드는 동작으로 씽 날아 넘어가 살짝 모래에 손을 대며 내려 곤두박질쳤다.
“우~와!”
사생들은 모두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고도선수들은 날렵한 덕돌을 보고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바지가 쫙 찢어졌다.
“저걸 어쩌니?”
수일은 얼른 달려와 선생님의 바지를 여미어주었다. 그래도 안 되자 선화가 제꺽 달려와 빈침으로 잡아매주었다.
그날 애들을 다 훈련시키자 덕돌은 바느실도 없어 바지를 기워 입을 수도 없어 바삐 백화상점에 가서 새 바지를 사 입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는 간장에 파를 찍어 묵은 밥을 대충 먹네 하고는 황급히 버스 역으로 달려갔다.
사실 덕돌과 명숙은 모두 사업을 하느라고 언제 연애할 새도 없었다. 덕돌은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치다나니 일요일에만 시간이 있었는데 명숙은 대부분 일요일에 병원 당직을 서는 때가 많았다. 만난 지 반년이 다 돼갔지만 네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나니 늘 편지거래를 많이 하다가 오늘에야 시간이 나서 전날에 전화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망아산 기슭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덕돌이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망아산 고개를 올라가며 보니 저 멀리 고목아래 자전거를 세워놓고 땀을 들이는 명숙이 보였다.
덕돌은 버스에서 내려 스적스적 명숙한테 다가갔다. 고목 아래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마중하는 명숙은 진짜 숲속에 피어난 나리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직도 ‘예’, ‘예’ 입니까? 이젠 허물없이 말합시다.”
“알았습니다. 그러지요.”
“또, 또.”
명숙은 외까풀 눈을 곱게 흘기었다.
“양, 알았소. 허허허.”
순간 그들 사이에 있던 담이 허물어지며 가까워 진 감이 들었다.
명숙은 우리 사랑을 기도하듯이 습관적으로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쥐고 덕돌을 따라 훈훈한 봄바람에 술렁거리는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나무 숲 속에서 한 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이 말 저 말 하다가 덕돌은 명숙을 보고 “동무는 사람들이 붐비는 대도시가 좋소? 아니면 조용한 농촌이 좋소?” 하고 물었다.
“전 조용한 시골 농촌이 좋아요. 생각 밖이죠?”
명숙은 고이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허나 덕돌은 속으로 호리호리하게 생긴 숲속의 나리꽃 같은 명숙은 나이는 어려도 자기 관점이 있고 똑똑하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
침묵이 흐르는데 소나무 숲이 설레는 소리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명숙은 나무꼬챙이로 땅바닥을 쪽쪽 긁더니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거 같은데요. 키는 얼마나 돼요?” 하고 물었다.
덕돌은 피씩 웃으며 “1.68. 키 작다고 나무라는 거요?” 하고 물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 같았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키 작아 나무라면 그만 두기요.”라고 하며 바지엉덩이를 툭툭 털고 소나무 숲에서 달아날 것 같았다.
“아니. 그만하면 작은 키 아닌데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제야 덕돌도 명숙도 한숨을 후~, 호~ 내쉬었다.
덕돌은 이쁜 명숙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기 어린 큰 눈, 날이 선 코, 작은 입, 복성스레 생긴 이마! 아, 실로 어쩌면 숲 속에 피어난 나리꽃처럼 이렇게 예쁠까!
삽시에 덕돌은 가슴이 뭉클 했다. 부글부글 끓어 번지는 감정 같아서는 그녀를 마구 포옹하고 털이 보송보송한 복성스러운 하얀 이마에 뽀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허나 덕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저도 몰래 어망 간에 명숙의 손을 그러쥐었다. 명숙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렸다가 가만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덕돌은 “내 손금을 봐 줄까?” 하고 능청스레 물었다.
그녀는 덕돌을 똑바로 마주보다가 손을 뽑아가면서 “전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아요.”라고 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었다.
속으로 덕돌은 명숙을 보기만 하면 감정이 북받치고 흥분되고 격동되면서도 임기응변도 척척 하고 에둘러대는 자기를 발견했다.
후에 덕돌은 명숙을 만나는데 편리하게 자전거를 샀다. 하여 그 후부터 덕돌은 새 자전거를 타고 비 내리는 날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명숙을 약속해 만났다. 그리하여 그 후에 그들은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해란강변에서, 지어 비 오는 날에는 수술실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청춘 남녀의 사랑은 뜨거운 두 심장 속에서 싹 트고 우썩우썩 자라나 얼기설기 뻗쳐나가고 있었다.
은빛 달빛이 반짝이는 어느 날 밤에 덕돌은 자전거를 타고 명숙을 불러내 바깥에서 만나려고 했다. 명숙은 습관처럼 두 손을 모아 쥐고 해란강 둑으로 나아갔다. 덕돌은 그녀를 따라 자전거를 밀고 해란강 둑에 가서 세워놓고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덕돌은 저도 몰래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인차 내리웠다.
“미안하오. 팔을 올려놓아서.”
“별 말씀을.”
명숙은 덕돌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다소곳이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콩크리트 바닥을 긁었다.
해란강물은 수천만 개의 은파가 부서지며 뛰노는 은 잔디 금잔디를 싣고 세차게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강변에는 철썩 철썩 강둑을 치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덕돌은 뭉클 하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덥석 그녀를 끌어안고 한손으로는 그녀의 따스한 손을 잡았다.
“난 명숙을 마음속으로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겠소.”
“예? 참말인가요?”
“양. 난 피 끓는 청춘의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명숙을 사랑하오.”
“예.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토론하지도 않았는데 그들 둘은 함께 일어나 뜨거운 포옹과 함께 첫 키스를 나누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덕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달님도 지켜보다가 부끄러운 듯이 얇은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며 구리바라 같은 둥근 얼굴을 가리었다…


              5. 우물 안에서 솟아난 용

       세월이 유수와도 같이 흘러 덕돌이 명숙과 결혼한지도 어언간 2년이 다 돼가고 그들의 아들 운선이가 돌 생일을 쇠게 됐다.
상순은 얼마나 손자가 귀여운지 몰라 아장아장 걷는 손자 놈이 희구해서 “이리 오라, 할아버지 안아보자.”라고 했다.
운선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와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애고사리 손으로 할아버지 주름이 밭고랑같이 파인 얼굴의 허연 수염을 매만졌다.
“에이고, 이 놈아, 이걸 희구해서 어쩌겠니? 이 놈아, 넌 우리 영월 김 씨네 19대 장손이야.”
상순은 운선의 엉덩이를 툭툭 다독이며 장해 희죽이 웃었다.
그는 사돈보기를 할 때 사돈집과 며느리 명숙이 3년 후에 결혼하겠다고 하자 펄쩍 뛰었었다.
(3년 후라니? 내 칠순이 다 돼도 손자 놈 하나 보지도 못하겠다.)
상순은 발끈 성을 냈다.
그래도 덕돌이 난 놈이었다. 상순은 아들의 수완을 탄복했다.
(그 놈이 사돈보기 때부터 자꾸 가시집에 가서 명숙을 얼려 데리고 자더니 끝내 이겼구나. 본가 집에 벽돌집을 지어주고 3년 후에 시집오겠다던 명숙은 인차 시집가겠다고 했다. 사돈도 사돈보기를 할 때와는 달리 “줄 건 줘보내고 시름을 놓자.”고 하면서 막내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순이 음력설 이튿날로 결혼 택일을 해 보냈더니 인차 동의했다.
운선을 임신했을 때 명숙은 이상한 태몽을 둘이나 꾸었다. 별나게 나무 구멍에서 뱀 같은 것(용)이 두 마리나 대가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소다리 새에 커다란 소불알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덕돌의 태몽에는 웬 커다란 호랑이가 “따웅” 하고 울면서 뛰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들을 척 낳았지. 명옥의 태몽에는 덕돌이 용정으로부터 황소를 가져 왔다고 했다. 덕돌의 넷째누나 은자의 태몽에는 높은 층집에서 덕돌이 웬 여자들 셋에게서 총 세 자루를 받아가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상순은 약한 명숙을 처음 보는 순간 앞에 세워놓고 넌지시 아들에게 “저리 약한 여자 애내기를 할 만 할까?” 하고 근심한 적이 있었다.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자 상순은 닭을 고아 먹이려고 잡아가지고 아들 집으로 찾아 갔다. 허나 며느리가 신랑과 함께 본가 집으로 가고 없으니 닭을 가지고 사돈집에까지 찾아 간 적도 있다. 기어이 당신의 손으로 잡은 닭고기를 며느리를 먹이고서야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덕돌은 명숙을 모로 눕혀놓고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면서 “요게 아들일가? 딸일까?” 하고 물었다.
“글쎄 다 동무 재간에 달렸지. 뭐.”
“아니요. 내 뿌린 씨를 동무가 선정하기에 달렸지.”
“생리학적으로 말하면…”
“됐소. 돼. 다 명숙에게 달린 게요.”
이럴 때가 많았다.
명숙은 독자신랑을 만나 꽤나 딸을 낳을 까봐 근심했다.
총명한 애를 낳으려면 태아교육부터 잘 해야 한다고 덕돌과 명숙은 늘 불룩한 배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은은한 음악을 감상하군 했다. 명숙은 배속의 애도 음악소리 좋은지 움직이는 감이 난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85년 양력설을 쇠고 며칠 안 돼 해가 질 무렵에 드디어 운선이가 태어났다.
덕돌이 집에 가서 애 포대기를 가지고 산원으로 가는데 바깥에서부터 애가 “응아” “응아” 하고 우는 소리가 아주 쟁쟁하고 높이 들렸다.
“뭘 낳았을까?”
덕돌은 궁금하고도 딸을 낳았을까봐 긴장해 황급히 산원으로 들어갔다.
명옥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애를 안고 와서 “아들이오. 애 아버지 안아보오.”라고 했다.
“정말 아들입니까?”
그러자 가시어머니 옥선도 웃으면서 “아들이지 않고. 7근 2냥이나 되는 큰 아들이오. 애 아버지, 빨리 안아보오.”라고 했다.
덕돌은 포대기에 싼 갓난 아들을 꼭 껴안자 속이 든든한 감이 들었다.
(이젠 나에게도 든든한 아들이 있다. 대를 이을 후계자가 있단 말이야.)
덕돌은 아들을 껴안고 얼굴에 꼭 대고 있다가 명숙이 나오자 “애 어미도 안아보오.”라고 했다.
“예. 안아보지.”
명숙도 갓난애를 꼭 안았다.
허나 산후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바지에 뻘건 피가 아직도 줄줄 흘렀다. 그리하여 황급히 애를 본가 집 어머니에게 안겨주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애지중지 한해를 키운 아들애가 벌써 생일을 쇠게 됐다.
상순과 명옥은 손자 운선의 생일을 잘 쇠려고 집에 있는 닭 12마리나 몽땅 잡아 튀를 해 심장과 똥집까지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몽땅 가져다 손자 생일상에 올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중국의 액수가 다른 돈을 대표하는 18원 88전을 생일상에 올렸다.
가시집 부모와 형제들인 은자와 순자, 경수, 춘수, 춘식까지 몽땅 와서 생일상에 부조를 내놓았다.
덕돌의 누나들인 춘자와 은숙, 홍자와 은자, 성숙까지 몽땅 와서 운선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날 덕돌과 명숙은 운선을 안고 영원한 기념사진을 찰칵 찍었다. 운선은 공부를 잘하겠는지 제일 먼저 만년필을 쥐었다.
“야, 그 놈이 아비를 닮아 공부를 잘하겠는 모양이다.”
상순이 희구해서 혀를 끌끌 찼다.
운선은 다음에 돈을 쥐었고 주산과 만년필을 쥐고 오곡그릇을 마구 휘 저어놓았다.
그러자 상순과 명옥은 “아비가 이전에 돌 생일에 저러더니 딱 닮았구나.”라고 하며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종호와 옥선도 외손자를 안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렇게 할아버지 때부터 면목을 안 세교지간에 사돈을 맺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통쾌하게 웃었다.
사진사가 외손자를 안은 종호와 옥선을 찰깍 찍었다.
덕돌과 명숙은 학교와 병원의 소님을 다 접대해 보내고 나니 밤 8시가 다 됐다. 그들은 부모로 된 의무를 하는 첫 발걸음을 떼고 나서 부모를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됐다.
덕돌은 아들까지 보았지만 글을 쓰려는 꿈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전근이 어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렵지.)
전근하려고 애를 쓰면서 덕돌은 이렇게 깊이 느꼈다.
명숙은 “공사병원에서 진수해로 전근해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또 전근을 해?” 하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덕돌은 “전근해왔기에 얼마나 평안해?”라고 했다.
하긴 만삭이 돼가지고서도 버스를 타고 15리 길을 통근하느라고 첫애까지 유산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항상 퇴근해 밥과 장국을 다 끓여놓고 어두운 저녁이면 시병원에까지 마중 가서 팔을 끼고 부축해 조심조심 집으로 데려왔다. 혹시 만삭이 된 몸으로 얼음 진 길을 걷다가 넘어져 애라도 떨어질 까봐 서였다. 그러나 전근해 온 다음에는 500미터도 되나 마나 한 거리에 있는 병원에 출근해 아주 편리해졌다.
명숙은 진수해가 너무 좋다고 했다.
“동창생들과 친척들도 많아서 정이 들어 살기 좋은데 전근해 뭘 하는가?”
허나 덕돌은 황승연과는 “문화대혁명”때부터 아버지와 원수를 맺어놓아서 진수해중학교에서 기를 펴고 살기 힘들다고 하면서 기어이 전근하려고 했다. 황차 학교에서 코흘리개들과 씨름하다나면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돌은 육촌형인 성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형님, 어떻게 신문사 기자로 전근시켜 주오. 어릴 때부터 이상이 기자로 되는 건데 도와주오. 형님은 주임이니까 힘을 쓰면 내 전근 안 되겠소?”
성환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노력해보자. 기회 있으면 전근해오라.”
덕돌은 형님이 동의하자 아주 기뻐했다. 성환 형님은 대답한 일을 실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성환은 자기 제자이자 동생인 덕돌을 텔레비전방송국으로, 라디오방송국으로 소개했다. 그 단위들에서 글을 몇 편이라도 쓴 덕돌을 받으려고 했지만 번번히 진수해중학교 황승연 교장이 훼방을 놓으면서 덕돌의 뒤다리를 꽉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전근수속 기회를 놓쳐 전근하지 못했다.
열이 불끈 오른 덕돌은 황승연을 찾아가 바른 말을 했다.
“선생님, 진수해중학교에서 써주지도 않으면서 왜 남의 뒷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까?”
허나 황승연은 능청스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덕돌이, 옛날 일은 다 잊고 우리 학교에 있소. 그럼 내 학교 단위서기로 써 줄게. 몇 해 단서기를 하다나면 교도 처 주임도 할 수 있고 나아가서 교장도 할 수 있소. 저는 재간도 있고 지식도 있지 않고 뭐요?”
그 감언이설에 얼릴 세 살짜리 덕돌이 아니었다. 분명 “벼슬”을 미끼로 덕돌을 낚아 학교에 얽어매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덕돌은 궁리 끝에 명숙을 먼저 전근시키기로 했다.
명숙의 육촌형부의 고모사촌형님이 시내 모 국의 과장을 한다고 했다.
“에이고, 우리와는 먼 사돈의 팔촌이구먼. 힘을 써주겠소?”
덕돌이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허나 명숙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다.
덕돌은 한달 로임에서 절반이나 되는 25원을 가지고 가서 다리를 놔보라고 했다.
며칠 후 생각 밖으로 전근시켜주겠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하여 덕돌은 명숙을 데리고 가서 시내 병원 원장과 서기, 인사과장을 만나 인사로 술상을 한상 차려 드렸다.
이젠 진수해진병원에서 명숙을 놓아야 했다.
그런데 진병원의 채 원장은 간호사지식콩쿠르에서 1등을 연속 해 기준병으로 까지 된 명숙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전근하기 위해 덕돌과 명숙은 로임만 나오면 거의 한달 로임 어치나 술과 돼지고기 등을 한 꾸러미씩 채 원장네 집으로 사 들고 가 명숙을 전근시켜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어디 여자가 남편 먼저 전근해 가는 법이 있소?”
허나 탐욕스런 큰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원장은 술이나 돼지고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번쩍번쩍 하는 라이터를 찰칵 켜 담뱃불을 붙이면서 덕돌을 보고 으스댔다.
“내 친구가 사온 이 라이터 얼만지 아오? 120원이나 하오.”
그 말인즉 시시하게 그따위 술병이나 사오지 말고 현금을 몇 백원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집 살림을 하는 그들이 언제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탐관오리 같은 자식, 배때 탁 터져 썩어져라! 얻어먹지 못해 기를 쓰는구나!”
밸이 난 덕돌은 맥이 풀려 몇 달 동안 찾아가지도 않았다.
후에 덕돌은 채원장의 동생이자 한 실에 있는 채 선생네 이사 짐을 날라주고 점심술상에서 우연히 채원장과 마주 앉게 됐다.
그때 뚱뚱하게 생긴 채 원장이 한다는 말은 이러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이 의식을 촉진한다는 것을 아직도 잘 모르오. 또 알아도 물질이 풍부하지 못해놓으니까 뒤를 꼬지 못한단 말이오.”
그 말뜻은 불을 보듯이 빤했다. 배때 뚱뚱해서 탐욕스러운 채 원장은 아직도 더 얻어먹어야 전근시켜 주겠다는 암시 아니고 무엇인가.
“개새끼, 잔뜩 얻어먹고도 전근시켜 주지 않으면서 더 얻어먹으려고 하는구나. 배때나 탁 터져 썩어져라!”
덕돌은 그렇게 욕하면서도 명숙을 보고 채 원장에게 계속 사가라고 했다. 그 후부터는 명숙을 시켜 애를 업고 가져가게 했다. 그는 뚱뚱한 채 원장의 유들유들한 낯을 보기도 싫었다.
그렇게 반년이나 사 들고 가자 채 원장은 끝내 미적지근한 대답이라도 했다.
“진수해중학교 교장이 동의하면 보내겠소. 저를 보낸다는 건 진수해중학교 교원의 전근을 동의한다는 거 아니고 뭐요?”
그리하여 공은 다시 덕돌네 어린 부부에게로 넘어왔다.
덕돌은 가만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승연이 동의할 리 만무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야 하겠는데…)
양미간을 찌푸리고 궁리하던 덕돌은 피뜩 옛날에 무도장을 새겨가지고 일본까지 유학을 간 사람도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난 덕돌은 진수해 시내 거리에서 개인도장집을 찾아가 돈을 주고 진수해중학교 도장과 교장 황승연의 도장을 새겼다. 그리고 밤중에 학교 교장 사무실에 다가가 가만히 유리를 뜯어내고 기어들어가 황승연의 서랍에서 공백 소개신을 뜯어냈다. 그런데 서랍에 진짜 학교 도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도장집을 열고 소개신 서너장에 뚝뚝 찍어 찢어내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유리창문을 제대로 맞춰 놓고 창문틀과 창문턱을 쓱쓱 닦아 흔적을 없애버렸다.
집에 돌아와 소개신에 황승연의 필체를 본 따 한어로 이렇게 썼다.

채 원장, 우리 학교에서는 덕돌 교원의 아내 명숙 동무가 먼저 전근하는 것을 동의합니다. 명숙 동무의 전근수속을 도와줄 것을 바랍니다.

            진수해중학교 교장 황승연.
                                             XX년 6월 17일

덕돌은 황승연의 이름 옆에 돈을 주고 새긴 황승연의 네모난 도장을 꾹 찍었다.
덕돌은 명숙이 돌아오자 희죽이 웃으면서 자작 소개신을 내밀었다.
“자, 얼마나 멋있는 소개신이요? 내일 채 원장에게 가져다주오.”
명숙은 소개 신을 보고 아주 기뻐하면서 물었다.
"그래, 황 교장이 어떻게 돼 동의했어요?” 
덕돌은 가짜 소개신인 것을 명숙이 알면 떨려서 채 원장에게 들킬 같아 속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황 교장이 그래도 옛 사제 간의 정을 생각해 동의하더구먼.”
허나 명숙은 황승연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아할 지경이었다. 소개신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명숙은 비슷해 보였던지 별 다른 말이 없이 애 기저귀를 넣는 가방에 걷어 넣었다.
이튿날 저녁때까지 덕돌은 집에서 명숙이 퇴근하기를 속을 바질바질 태우면서 기다렸다.
저녁에 명숙이 운선을 업고 집에 들어서자 덕돌은 마주 나가면서 다급히 물었다.
“채 원장이 동의하던가?”
“동의합디다.”
“뭐라고?”
“동의했어요.”
“야, 이젠 살았다!”
덕돌은 너무 기뻐 두 돐이 되는 운선을 업은 명숙을 안아 한 바퀴 빙 돌렸다가 내려놓았다.
뒤이어 그는 명숙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 소개신은 가짜요. 내가 만든 거요.”
“뭐래요? 가짜라고?”
“쉿~”
덕돌은 식지를 입술에 댔다.
“살자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소. 숱한 탐관오리들이 배때 터지게 얻어먹자고 악어 주둥이처럼 짝 벌리고 있는 세월에 머리를 써서 속여 넘기지 않고 어쩌겠소? 그래 소개신을 보고 어쩌던가? 다른 말은 없었소?”
명숙은 운선을 구들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 소개신을 들고 보더니 ‘내일 전근수속을 하오.’라고 합디다. 소개신은 가지고 갑디다.”
“허허허. “세상에 살자면 별 수를 다 써야 하는구먼.”
“들키는 날엔 큰일인데.”
“무슨 일? 얻어먹은 소가 똥을 눈다고 배때 터지게 얻어먹은 채 원장인들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정말 후에 채 원장은 그 가짜 소개신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1년 동안 몇 백원을 팔아 예물작전을 벌려서야 첫 문턱을 겨우 간신히 넘어 섰다. 경험교훈을 쌓은 덕돌은 시내 사돈인 김 과장의 면목을 빌어 위생국 인사과장에게 통사정을 들이대 전근수속지에 도장을 뚱 찍게 했다. 물론 또 덕돌이 인사과장이 퇴근하기를 기다려 그의 집을 정찰해 놓은 후 명숙을 내세워 예물을 가득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일이 되려니까 하느님이 돕는 것 같았다. 인사국의 김 과장이 간병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됐는데 우연히도 명숙의 내과에 입원했다. 그 기회를 틀어쥐고 덕돌은 명숙을 보고 인사 과장을 살뜰히 보살피며 친해놓으라고 했다.
그 후 덕돌은 거짓으로 신랑이 예술학원에 있는 교원이라고 써넣은 전근 수속 지를 들고 과장을 찾아갔다. 물론 사전에 또 한 꾸럭 사들고 갔었다.
국장은 전근 수속지를 읽어보더니 도장을 꽝 찍어주었다.
"젊고 예쁜 색시가 신랑과 두 곳에 나뉘어 사느라고 고생했구먼. 어서 시내에 전근해 가서 신랑과 함께 깨알이 쏟아지게 사오.”
한 문턱, 한 문턱 넘어 덕돌은 명숙을 시내 병원으로 전근시켰다. 관리들은 직위를 빌어 문턱을 높여 놓고 각종 수속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서 배때 터지게 얻어먹고서야 수속을 해주었다. 썩어빠진 관리들은 고기잡이꾼이 채발을 놓고 물고기가 뛰어들기를 기다리는 격이었다. 재수 좋게 통이 큰 자를 만나면 잉어도 잡고 허연 붕어도 채발에 뛰어든 놈을 건져 먹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벼슬의 짭짤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재수 없으면 채발에 뛰어든 물고기가 오히려 채발을 뛰어넘으면서 고기잡이꾼에게 물똥을 튕기게 할 때도 있었다. 얻어먹다가 들키어 부패분자로 몰리어 철직 받고 당내 처분을 받기도 했다.
덕돌은 그런 부패분자들이 지키는 관문을 하나하나 아리랑 고개를 넘듯이 힘겹게 넘어가야만 했다.
그는 황승연을 찾아가 색시가 시내에 전근해간 일을 당당하게 알려주고 두 곳에 나뉘어 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전근수속을 하겠다고 들이밀었다.
그러자 황승연은 펄쩍 뛰었다.
“야, 염치 있니? 어떻게 아내를 먼저 전근시키니? 완전 불법이야!”
그는 사무 상을 꽝 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덜거렸다.
“채 원장도 말이 아니야.”
그는 전화를 들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채 원장이오? 당신 뭐요? 어찌 남의 학교 교원의 아내를 먼저 전근시킨단 말인가!”
저쪽의 격한 대답소리도 덕돌 귀에까지 챙챙 하게 들리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를 전근시키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당신이 우리 병원의 원장인가!”
저쪽에서 전화를 쾅 놓아버렸는지 황승연은 전화를 들고 쳐다보다가 쾅 놓았다.
“나쁜 놈 새끼, 수태 얻어먹은 모양이구나.”
그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덕돌을 손가락질을 하며 꽥 소리쳤다.
“얼른 꺼져라! 보기도 싫다!”
그러자 덕돌은 황승연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며 기를 채워주었다.
“황 교장, 작작 밸을 쓰십시오. 괜히 혈압이 올라가 중풍에라도 걸리겠습니다. 아무 때 놔도 놓아야 할 나를 그만 붙잡고 늘어지십시오.”
그러나 황승연은 악이 나 이를 딱딱 다시었다.
“개새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시내에 들어가는가 봐라.”
덕돌도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냉소하며 교장실에서 나왔다.
그가 교연 실에 돌아가 교수안을 착실히 쓸 때었다.
총무처에 쫗겨 간 남철수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좀 보기요.”
덕돌은 교수시간도 없는지라 남선생을 따라 교사 뒤로 돌아갔다.
남철수는 교사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나직이 말했다.
“전근해 가려면 먼저 나와 함께 저 황승연을 꺼꾸러뜨려야 하오.”
“무슨 수로 꺼꾸러뜨린단 말입니까?”
남철수는 덕돌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황승연이 우리 학교 낡은 교사를 허문 목재를 두 자동차나 실어서 처남 네 집을 짓는 데 빼돌렸소.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그뿐인 줄 아오? 내하고 장춘에 갔을 때 학교 돈으로 실컷 술을 먹자고 했소. 내가 학교 돈을 맹탕 낭비하지 말자고 했다고 황승연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별 야단을 다 쳤소. 또 학교 지신청년공장에 자기 바람쟁이 딸과 절름발이 처조카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신공장장을 내쫓았소. 학교 공장의 돈도 수태 탐오해내 먹었소. 저 황승연은 ‘문화대혁명’때 반란 파 두목이오…”
한참 죄장을 말하고 난 남철수는 “우리 연명으로 고발 신을 써 올려 보내면 꼭 당의 기율로 저 황승연을 말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거요. 한번 해보기오.”라고 했다.
덕돌과 남철수는 황승연의 죄상을 낱낱이 깨알처럼 써서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와 선전부, 조직부 그리고 교육국 당위에 올려 보냈다.
물론 그 고발 신에 덕돌은 “문화대혁명”때 반란파 두목 황승연이 청년 교원인 덕돌을 억울하게 비판한 일도 죄증으로 적어 넣었다.
고발신을 받아본데다가 덕돌이 찾아가 직접 검거하는 말을 듣고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이계삼은 덕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 서기네 아들도 똑똑하구먼. 언제 이렇게 컸을까?”
허영주도 차를 마시고 나서 결단성 있게 말했다.
“황승연은 안 되겠소. 우린 그래도 반란파 두목 황종연을 감옥에 보내고 졸개 황승연은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방침’으로 구하려고 들었는데 말이오. 사상개조를 하기는커녕 아직도 ‘문화대혁명’ 때 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쩍하면 교원들에게 억울한 모자를 씌워 비판투쟁한단 말이오.”
덕돌은 깨 고소했다. 이때만큼은 그도 고독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기 주위에는 그래도 좋은 간부들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현인민정부 울안에서 나왔다.
며칠 후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 조사소조가 학교에 내려왔다.
그날부터 학교 교장실은 발칵 뒤집혔다. 황승연은 이전처럼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지 못하고 복도에서 덕돌을 봐도 머리를 숙인 채 한쪽으로 피해 걸었다.
덕돌은 그래도 옛 스승이라고 다른 교원들 앞에서는 황승연과 체면과 예의를 지켜주었다.
한 달 후 현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와 현 교육국의 책임자가 진수해중학교에 내려와 교원대회를 열고 황승연 교장에 대한 처분결정을 공포했다.
“부패분자 황승연을 출당시키며 진수해중학교 교장 직을 철직한다. 황승연을 현 도서관 일반직원으로 전근시킨다.”
황승연은 미쳐 날뛰며 교원들을 못 살게 굴던 그제 날과는 달리 머리를 두 다리 새에 푹 파묻고 쳐들지도 못했다.
숱한 교원들은 평시에 혹독한 황승연이 나떨어지자 속이 시원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남철수 선생은 교원들을 대표해 앞으로 뛰어나가 황승연을 손가락질하며 발언했다.
“황승연아, 너도 이런 날이 있고나. 네가 어디 교장이냐? 넌 도적놈이다. 넌 우리 학교 목재를 도적질해 처남에게 집을 짓게 준 도적놈이다.
넌 악감을 먹고 정치적으로 교원을 탄압한 독재자이다. 네가 고중도 온전히 졸업하지 못하고 교원을 해도 괜찮았지. 교장을 어떻게 해먹었느냐? 문화대혁명이 지나간지 얼마라고 계속 대학문을 나온 교원들을 변태적으로 못살게 굴고 배척하고 타격하고 못 살게 굴었는가!
네놈이 학교 돈을 맹탕 술을 사 처마신다고 내가 말렸다고 보복해 교수사업을 하지 못하고 총무처에 쫓아 보내지 않았는가? 덕돌 청년교원이 뭘 잘 못했다고 교원대회에서 비판했는가! 네 같은 놈은 더 엄중한 처분을 받아 싸다. 네 같은 놈이 어떻게 당원 자격이 있느냐?! 진작 타도 맞아야 할 놈이다!”
덕돌을 비롯한 교원들은 속이 시원해 또다시 박수를 쳤다.
며칠 후 황승연은 쉰도 안 돼 중풍을 맞아 입원했다.
새 교장 천을주 교장은 학교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덕돌이 시내로 전근해 가려고 하자 처음에는 인차 동의하지 않았다.
“기실 동무가 전근해가면 우리 학교에는 손실이오. 우리 학교에 본과생이 몇이 남소? 재간 있는 본과생들이 다 가면 우리 학교는 어쩌오?”
그러나 덕돌이 문화관 관장으로 있는 옛 은사 김재국 선생을 찾아가 전근에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정황은 달라졌다.
재국 선생은 친히 자기 이상 처남 주교장에게 쪽지를 써서 덕돌을 보고 가져다주게 했다.
“천 교장, 청년들이 문학창작을 하겠다고 전근하려는데 보내는 것이 옳다고 보오. 우리 늙은이들은 청년들의 전도에 디딤돌이 돼야지 장애물이 돼선 안 되오. 덕을 많이 쌓읍시다…”
쪽지를 훑어보더니 천 교장은 “허허. 이 나그네 바로 우리 학교 교장인 상 다 하오. 우리 학교 일에 삐칠 게 뭐요?”라고 했다.
그러나 쪽지를 사무 상에 넣더니 덕돌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동무는 재간도 있고 사업열성도 있소. 허나 어떻게 하겠소. 보내기 아깝지만. 동무는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어째 글을 그렇게 쓰기 좋아하오? 기자로 되는 것이 소원인데. 색시와 두 곳에 나뉘어 통근하게 해서야 되겠소? 가서 좋은 글을 많이 쓰오. 그럼 나도 기쁘겠소.”
덕돌은 너무 기뻐 허리 굽혀 인사했다.
“천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글을 쓰겠습니다.”
덕돌은 아주 기쁜 심정으로 시내로 달려가 성환 형님을 찾았다.
허나 성환은 김빠진 소리를 했다.
“얘야, 신문사에서 급히 사람이 수요 돼 그새 다른 사람을 받아 넣었단다.”
덕돌은 눈앞이 캄캄해 났다.
그러나 성환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었다.
“천천히 어데 자리 있는가 알아보자. 제수가 시내에 들어왔으니까. 조만간에 너도 들어올 수 있다. 근심하지 말라.”
덕돌은 그날 성환과 명수 두 형님과 술을 실컷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 후에 결국 성환 형님과 이상처남 명수가 힘쓴 덕분에 덕돌은 시내 어느 가도의 문화소로 전근해 가게 됐다. 성환은 시내 문화소 소장의 작품집을 출판사에서 내게 주선해주고 대신 덕돌을 문화소에 받게 했던 것이다.
명수는 현 교육국과 진수해중학교에서 본과대학생을 다 빼간다고 덕돌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교육국 국장을 하는 자기 학생과 교장을 하는 동창생 천을주 교장도 찾아가 말해 놓게 했던 것이다.
덕돌이 인사국에 전근 소개신을 들고 갔을 때다.
전근 령을 떼는 인사일군은 덕돌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문화소에 편제 없소. 자그마한 가도 문화 소에 대학 본과생을 받아 넣을 필요 없소. 문화국에서는 뭘 하는 거요? 욕심이 대단하구먼. 전근하려면 연구할 시간이 걸리오.”
덕돌은 맥이 풀려 걸상에 주저앉았다.
듣는 말에 의하면 관청의 인사부문 문턱을 드나들면서 들을라니 이른바 “연구하자”는 말은 담배(연)와 술(주)을 가져오라는 말이라고 들었다.
(아니, 현교육국과 인사국에서 다 동의했는데 인사국에서는 또 연구하자면서 술과 담배를 한 아름 사다 안겨줘야 전근 령을 떼 주겠단 말인가?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부처 간이 두 곳에 나뉘어 몇 해나 살았는데 또 이런 문턱에 올가미를 걸어 놓고 얻어먹으려 한단 말인가?)
덕돌은 너무 기가 막혀 인사일군이 훌 쥐어뿌려주는 전근 소개신을 들고 인사국 문을 나섰다.
아내 전근수속을 하면서 병원과 위생국, 인사국 문턱을 넘을 때마다 돈을 얼마나 썼던가? 전근도장을 하나 찍는데 힘이 들지 않건만 간부들은 얻어먹지 않으면 근본 전근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그자들은 바로 그런 기회에 치사하게 얻어먹어야 권리를 향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짭짤한 수입은 퍽 유혹이었다. 돈이 있으면 술도 있고 돼지고기도 있고 미녀도 있는 시장경제 시대다. 권리를 팔아 금전을 챙기는 작업을 관사의 부패한 나으리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덕돌은 더러운 부패관리들이 득실거리는 관청의 문들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관청의 문들은 그에게 쫙 벌린 범의 아가리처럼 보였고 뭔가 먹으려고 벌린 독가시 터덜터덜한 악어의 주둥이처럼 보였다.
허나 별수 없었다. 자기 뜻을 이루려면 뻔히 알면서도 그 악어 입에 뭔가 집어 던져줘야 했으니까. 듣는 말에 의하면 악어는 뭐라도 받아 물기만 놓칠까 봐 다시 아가리를 벌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허허. 이게 관사 악어들의 현실이었다. 그러다가도 기율검사위원회나 반탐오국에 걸려 으리으리한 관사로부터 쥐굴 같은 감방에 이사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정부청사에서 처장으로 사업하는 최일웅 형님이 피뜩 떠올랐다.
(옳지, 형님을 찾아가 말해 보자.)
덕돌은 용기를 내 으리으리한 정부청사를 찾아갔다.
일웅은 덕돌의 큰고모의 맏아들 근덕(봉순)의 아들이자 둘째외할아버지의 맏손자여서 덕돌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척집 형님이었다.
일웅은 아주 열정적으로 동생을 맞아주었다.
그는 덕돌에게서 사연을 들은 후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무슨 연구, 연구가 필요해?”
그는 사업에 분망하면서도 정부 회의 쉼 시간에 다시 인사국에 달려가 말해 주고 돌아왔다.
 “당장 인사국에 가봐라. 문화소에 가서 일을 잘 해라.”
“형님, 감사하오. 관청에 들어오니 백성들이 아내와 만나 한 곳에서 살자고 해도 일이 잘 안되오. 쩍하면 연구, 연구 하면서.”
그러자 일웅은 희죽이 웃으면서 “세상 일이 그렇다.”라고 하며 덕돌의 손을 잡아 주고나서 부랴부랴 정부 회의실로 바삐 들어가는 것이었다.
덕돌이 다시 인사국으로 가니 그 인사일군은 “정부의 최 처장은 어떻게 아오?”라고 묻는 것이었다.
“친척집 형님입니다.”
그러자 그 인사일군은 두 말 없이 전근령을 쓱쓱 써서 도장을 뚝 찍어 떼 주었다.
인사국에서 나오면서 덕돌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사, 인사라고 인사국에 가면 인사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던데. 형님이 말하니 인사도 하지 않고 처음 도장을 찍었네 그려.”
(그 인사일군은 얻어먹지 못해 속이 좋지 않았을 거야. 혹시 일웅 형님을 속으로 욕했을 수도 있었을 거야. 얻어먹을 기회를 망가뜨렸다고.)
덕돌을 시내에 전근시키려고 숱한 친척들이 도와주었다. 덕돌의 고모사촌매형 차대균은 일웅의 고모부였다. 그는 선후하여 덕돌을 자기 일하는 예술학원 정치교연실에 전근시키려고 연줄을 달아 본적도 있었다. 그는 연극단 서기로 있을 때에는 덕돌을 연극단 창작조에 받아들이려고 연줄을 달았다. 허나 세집살이를 하는데다가 명숙의 전근에 돈을 너무 많이 쓸어놓고나서 덕돌이 제때에 해당 부문 코밑 치성을 하지 못해 일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은 되지 않았지만 덕돌은 자기를 도와주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덕돌은 여러 형님과 친척들의 방조를 받아 가도 문화소로 전근했다. 문화소에 가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항상 고마웠고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았다.
덕돌은 비록 자그마한 가도 문화소지만 재담이거나 소품이나 가사 같은 문예공연 자료라도 쓰는 단위어서 마음에 들었고 열심히 일했다. 코흘리개 애들과 씨름하는 학교보다 책을 보고 글을 쓸 시간이 많아 아주 좋았다. 더구나 생지옥과 같던 진수해중학교 쇠살창을 까부시고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덕돌에게는 우물 속에 갇혔던 용이 솟아 난 것보다 못하지 않게 기뻤던 것이다. 실로 지옥 같던 진수해중학교에 있던 나날들을, 아니 악몽 같던 그 한 많은 나날들을 돌이켜 생각하기조차 소름이 오싹 끼쳤다.
진수해중학교를 떠날 때 교단에 다시 오르게 된 남철수 선생이 덕돌을 바랬다.
“덕돌이, 문화소에 가서 잘 하오. 마귀굴에서 벗어났으니 이제야 진짜 살만한 때 왔소. 나도 이젠 교수사업을 하게 됐소.”
덕돌은 남철수 선생의 손을 꼭 잡았다.
“제일 어려울 때 남선생님이 저를 동정했고 악마 같은 황승연을 제거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때 예술학원 입학통지서를 받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선화와 현 체육학교 씨름선수로 된 수일이 등 애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떠났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덕돌은 용이 하늘로 솟아올라 갔다는 유서 깊은 용정 우물터에 가서 남선생님을 모시고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찰칵 찍었다. 마치 하늘로 솟아오른 용이나 된 것처럼.
버스가 달려 왔다. 덕돌은 흐릿한 하늘 아래 진흙탕 속 같은 진수해를 다시 돌아보았다. 차에 오르면서 그는 남철수 선생과 선화, 순희, 홍화, 수일 등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가슴이 울먹여 손을 저었다.
버스는 조용히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그는 눈을 딱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선화와 순희, 홍화 등 애들은 사내대장부 덕돌 선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고 손등으로 눈시울을 닦고 또 닦았다.
     버스는 어느덧 사랑스러운 선화와 수일, 순희를 진수해에 남겨두고 굽이굽이 열두 아리랑 고개 망아산 고개를 부르릉 부르릉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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