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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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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4)
2018년 03월 11일 11시 08분  조회:1147  추천:0  작성자: 김장혁



             5. 낙향한 교수

        쨍쨍 내리쪼이는 땡볕을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신경질 밖에 나지 않았다.
       멍지뫼산 앞에서 흥수에게 조선특무로 한참 몰리고 돌아왔는데 이게 뭔가? 덕돌이랑 성욱이랑 동림이랑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글쎄 살구나무에 올라가 다닥다닥 달린 살구를 뜯어 먹느라고 야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야, 이 놈 새끼들아, 어서 내리지 못해?”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면서 버럭 호통쳤다.
      애들은 질겁해 살구나무에서 엉금엉금 기여내렸다. 애들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바자 문을 열고 와르르 도망쳤다.
덕돌이 내리자마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쨩쨩 쳤다.
“이 놈 새끼, 집이 빈 틈에 잘했구나. 살구를 팔아 넷째누나 병을 치료하자고 했는데. 살구나무를 전페했구나. 다시 그러겠니? 이 놈아!”
“아이 그러겠습구마.”
덕돌은 너무 아파 엉덩이를 왼손으로 만지며 울면서도 오른손에 잡은 노랗게 익어 톡톡 터진 참살구만은 놓지 않았다.
상순이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니 살구가 발갛고 노랗게 무르익다 못해 갈라 터져 꿀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구 한 알 뜯어 입에 넣으니 시큼하고 달달해 천하의 별맛이었다.
살구나무에 노라발간 참살구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다행히 애들은 높은 가지에는 올라가지 못해 아직도 숱한 참살구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상순은 집에 들어와 명옥이 퍼주는 멀건 죽을 후루루 마시고 사발을 밥상에 탕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이 막막했다.
바깥에서는 자기가 소개해서 입당시킨 흥수가 피 눈이 돼 자기를 잡아치우고 지부서기를 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흥수는 북조선으로 달아난 은숙의 꼬리마저 밟고 미쳐 날뛰지 않는가.
집에 돌아와보니 넷째딸 신자가 뇌막염에 걸려 앓아누워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셋째딸 홍자가 자꾸 실없이 웃다가도 죽어 누어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어야 겨우 살아났다. 집안 집 형내 조카에게 물어보니 신경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안팎에 시원한 날이라고는 없구나.”
상순은 농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마니를 똑딱똑딱 짜는 맏딸 순자를 보자 신경질이 났다.
(또 돈을 달라고 왔니?)
성이 발칵 난 상순은 구들에 있는 낫을 쥐고 일어나더니 순자가 짜던 가마니 새끼줄을 쭉쭉 베 버렸다.
“아버지, 왜 이래우?”
“에이, 신경질이 나 죽겠다.”
"가마니를 왜 이렇게 베버립니까?”
“가마니를 짜 뭘 해?”
“가마니 한 장에 29전인데요."
순자는 복숭아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두덜거렸다.
“가마니를 짜서 홍자와 신자 병치료에 보태려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왜 신경질을 쓰면서 이럽니까?”
“그랬니? 후-”
상순은 순자에게 미안해 다 큰 맏딸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안하다. 네 마음을 몰라줘서.”
상순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애는 순자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순자에게 미안하고 사회 압력에 너무 취약한 자기를 욕했다.
오후에 밭으로 일하러 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서기 있소?”
“있소. 누구요? 들어오오.”
상순이 바삐 대답하면서 바깥에 나가보니 뜻밖에도 정규상이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아니, 어떻게 돼 이런 산골에 다 왔소?”
“형님. 한마디로 다 말하기 힘드오.”
정규상은 울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둘러보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님, 사실 YB병원에서 날 보고 농촌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라고 했소. 그때 형내 선생이 병원에 말해서 광명가도위생원에서 일하게 했댔소. 그런데 이번엔 안된다오. YB병원에선 기어이 농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해야 한다오. 낯선 마을에 가기보다 형님이 대대당지부 서기를 하는 이 마을에 오면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거 같아 찾아왔소. 이번에도 형내 어른이 나서서 병원에 간청을 드렸소. 날 이 마을에 보내달라고.”
“어서 들어오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명옥에게 인사시켰다.
“여보, 동생 정규상교수 왔소.”
“아주머니, 안녕하오?”
명옥이도 조왕에서 설걷이를 하다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인사했다.
“전번에 시아버지 앓을 때 형내 조카와 함께 와서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위방에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유명한 정교수를 이런 산골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키다니? 에이, 정말. 이 놈의 세상이 무슨 세상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좌우간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이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 나가기요.”
“고맙소.”
정규상은 마음을 놓았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어두운 그늘이 더 늘어났다.
(정규상을 보호한다고 또 흥수나 학수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겠구나.)
허나 상순은 역경을 겪더라도 억울하게 우파로 몰린 정규상을 양심적으로 끝까지 보호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폐를 끼치겠소. 형님.”
“무슨 소리를 하오. 가만 있자.”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집이 비좁은대로 위방에 먼저 들어 있소. 이제 과수원과 멍지메 논밭을 다 푼 다음에는 식당 자리를 손질하고 들면 되오.”
“어떻게 폐를 끼치겠는지 모르겠소.”
“야, 형제간에 내의를 하지 마오. 옛날에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용정에 가면 당신네 아버지 신세를 얼마나 졌소. 그때부터 우린 형제간으로 되지 않았소?”
정규상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이때 덕돌이 검둥이를 데리고 순자와 함께 정지로 들어왔다.
“아들이 아니오?”
정규상이 묻는 말에 상순은 “옳소.”라고 하더니 “덕돌아, 삼촌이다. 얼른 인사해라.”라고 했다.
덕돌은 부엌 바닥에서 개 목을 끌어안고 놀다가 우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십니까? 덕돌입니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일어나면서 “에이구, 우리 조카 똑똑하구나.”라고 하더니 호주머니에서 2원짜리 돈을 꺼내 쥐어 주고 나서 구들 한쪽에 놓은 가방에서 사탕이랑 과자랑 꺼내 주었다.
“옜다. 먹어라.”
“야, 좋다.”
덕돌은 연신 경례하면서 사탕과 과자를 두 줌이나 쥐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성욱이랑 동림이한테 자랑하면서 함께 먹으려는 심사였다.
덕돌은 항상 먹을 것이 있으면 애들과 먼저 자랑한 후에는 나눠 먹군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애들은 덕돌을 좋아하고 따랐다.
순자와 성숙도 일일이 정규상에게 인사했다.
홍자는 자꾸 “히히히” 하면서 웃었다.
“얘, 웃지 말라.”
“예? 헤헤헤.”
홍자는 하얀 얼굴에 싱거운 웃음을 자꾸 웃었다.
“동생, 양해하오. 저 앤 웬 일인지 자꾸 싱거운 웃음만 웃소.”
정규상은 홍자의 납작하고 하얀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얘 신경이 좋지 않구먼.”라고 하더니
“약을 쓰면 인차 낫을 수 있소.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약을 먹기는 먹소. 저 맏딸이 얘를 데리고 용정에 있는 자준 의사에게 보이고 중약을 져다가 달여 먹이고 있소.”
“오. 자준 영감이야 우리 간도에서도 이름 있는 의사지. 만약 낫지 않으면 내 서약으로 치료해줄게.”
상순은 정규상을 보고 “고맙소.”라고 하면서 정지에 누워 있는 신자를 가리켰다.
“동생, 홍자보다도 저 넷째딸이 큰일이오. 머리에 열이 나더니 저렇게 누워만 있소. 정통편을 아무리 먹여도 쓸데없소.”
“뭐라오?”
정규상은 정지에 내려와 신자의 손맥을 짚어보고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짚어 보더니 황급히 말했다.
“큰 일 났소. 얘를 YB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야 하겠소.”
그는 뒤이어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그저 감기 같지 않소. 별로 뇌막염인 것 같소.”
“뭐라오? 뇌막염?”
상순은 너무나도 놀라 눈을 치뜨며 정규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규상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빨리 치료해야 하오. 생명이 위험하오.”
“에이고, 공부도 영 잘하고 얘기도 아주 잘해 선생들마다 머리 총명하다던 애를 이게 뭐요?”
명옥도 놀라 신자를 붙안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인차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요.”
상순은 황급히 우사에 가서 코깜쟁이 암소를 풀어 수레를 메워가지고 왔다.
명옥은 수레 우에 이불을 폈고 상순은 신자를 업어 수레 우에 실었다.
덕돌은 수레우에 누운 넷째누나의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 쳤다.
“내 제일 좋아하는 누나를 어디로 데려가니? 엉, 엉, 엉.”
성숙도 “언니, 병을 잘 치료하고 오라.”라고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가면서 옆에서 걷는 정규상을 보고 “이 난장판세월에 이런 산골에 와서 어찌 고생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그래도 형님이 서기를 하는 함흥대대에 오니 괜찮소. 속이 든든하오.”라고 했다.
그 말에 상순은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하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리 함께 이 어려운 세월을 이를 악물고 넘어 가기요. 세월이 흐르노라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날이 있겠지.”
상순과 명옥은 신자를 싣고 코깜쟁이야 우리 넷째 딸을 살려 달라고 바삐 정규상을 따라 YB병원으로 떠나갔다.
순자는 눈물을 닦으면서 신자를 실은 수레가 동구 밖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바래였다.
홍자는 그때까지도 자꾸 “헤헤헤.” 하고 웃었다.
순자는 홍자와 함께 풍로에 약을 달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성냥마저 없어 풍로에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두루 살펴보던 순자는 윗집 박성근의 맏아들 숭길이 풍로 불을 피우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집에 들어가 이불의 솜을 뜯어 나무가지에 감아가지고 윗집으로 달려갔다.
순자와 홍자는 숭길과 말하고 풍로 불에 솜을 감은 나무가지에 불을 붙여 가지고 달려 내려왔다.
숭길과 홍자는 동갑이었다. 숭길은 홍자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보호해주는 것을 못내 고맙게 생각하던 차여서 홍자와 순자를 보고 인차 불을 붙이게 했다. 원시사회를 방불케 하는 이 놈의 세월에는 성냥갑마저 흔치 않아 이집 저집에서 불을 붙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편 YB병원에 간 상순은 수레에서 신자를 둘쳐 업었다. 그때 신자는 거의 죽어서 까무러친 채 두 다리를 아버지 엉덩이 뒤에 축 드리운 채 줄줄 끌리었다. 상순은 신자를 자꾸 춰 업으면서 정규상을 따라 신경과 진찰실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우파지만 인간적으로 놀았기에 가까운 의사들이 많았다.
정규상의 면목을 봐서 신경과 진찰실의 주임 량 의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자의 병세를 아주 세심히 진찰했다.
그는 청진기로 신자의 여기저기 이리 저리 대보고 머리에 손을 대보기도 하더니 “옳소. 정 선생의 진찰처럼 뇌막염이오. 입원해 좀 치료해야 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형님, 근심하지 마오. 우리 량주임은 신경과 창시자요.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오.”라고 했다.
상순은 량주임의 두 손을 잡고 “우리 넷째 딸을 살려 줍소.”라고 애원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치료하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뇌가 손상받았기에 머리가 좀 부실할 거 같습니다.”라고 했다.
“부실하더라도 살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잖고.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하여 상순은 신자를 입원치료받게 했다. 허나 입원비가 없어 병원에서는 입원병실에서 내보내 관찰실에 눕혀 놓았다.
관찰실이란 어떤 곳인가? 임종 전 환자를 사체실에 내가기 전에 눕혀 놓고 관찰만 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명옥은 주사 한 대도 맞지 못하고 잠만 자는 신자를 들여다보면서 지키고 있었다.
어느 하루, 명옥의 사촌여동생 해옥이 찾아 왔다가 관찰실 침대에 누워있는 신자를 보고 놀랐다.
“언니, 어째 신자를 여기 놔두오?”
그러자 명옥은 “에이고, 여기 혼자 있으니 너무나 좋소. 숱한 사람들 속에 있으니 신자 몸에서 이 자꾸 기어 나오지. 창피해 죽겠소.”라고 했다.
“언니, 여기 관찰실은 죽기 전 환자를 관찰하는 곳이오.”
“뭐라오? 그래 우리 신자가 죽게 됐단 말이오?”
해옥이 황급히 의사들과 알아보니 병원에서는 신자의 치료비를 대지 못한다고 량주임과 말도 하지 않고 주사 한 대 놔주지 않고 관찰실에 옮겨가게 했던 것이다.
“앓는 사람을 돈이 없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해옥은 해당 책임자에게 바투 들이댔다.
“그래 치료비는 누구한테서 받겠소? 보아하니 그 집은 돈 일전 한 푼 없는 시골 농민들이더구먼.”
그러나 해옥은 신자를 살리려고 갈비뼈를 들이댔다.
“아무리 농민의 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앓는 사람을 치료도 하지 않고 이럽니까? 제가 치료비를 담보할 터이니깐. 치료를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신자는 다시 입원병실에 옮겨와 치료를 받게 됐다.
어느 날, 입원실에 눈에 퍽 익은 예쁜 간호사가 들어왔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상순은 눈에 익은 간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디에서 보던 간호사인데. 아, 옳지. 정규상네 심장내과에 있던 박윤희 간호사가 아닌가!)
상순은 하마터면 소리칠 번했다.
박윤희도 상순이 눈에 익어 자꾸 눈길을 주더니 먼저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주버니, 이전에 공학이라던가 입원했을 때 여기 온 적이 있었지요?”
“예, 혹시 심장내과에 있던 박 간호사 아니오?”
“맞습니다. 저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박윤희는 외까풀 눈을 살짝 치뜨면서 생글 웃었다.
“그때는 정규상 의사와 한 과에 있더니 어떻게 돼 신경외과에 왔습니까?”
“그저 그렇게 됐습니다.”
삽시에 윤희의 걀죽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얼버무렸다.
“한 병원 안에서는 과실을 자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넷째 딸이 저렇게 앓아서 어찌 하겠습니까? 크게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량 주임은 신경병과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니 한 보름 입원해 있노라면 치료될 거예요.”
그 말에 상순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절이라도 하겠소.”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옆에서 정규상도 “형님, 너무 근심하지 마오. 링겔주사를 며칠 맞으면 소염될 거요.” 하고 안심시켰다.
윤희는 키도 작달막한 농촌의 보통 노동부녀 명옥과 훤칠한 키에 멋진 나그네 상순을 번갈아 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짝이 엄청 기울어. 저렇게 멋진 나그네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작달막하고 인물이 없는 아낙네를 얻었을까?)
윤희는 신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다시 한번 상순과 명옥을 번갈아 보고 몸을 돌려 나갔다.
명옥이 신자를 거들어 주고 상순은 정규상네 집으로 가서 이사 짐을 함께 싸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정규상의 아내는 속으로는 이런 시골에서 어떻게 살겠는가고 불안해하면서도 내색을 내지 않았다.
허나 아들 문성과 딸 순임은 농촌 마을의 소똥과 진흙탕을 피해 밟으면서 상을 찡그렸다.
“에이, 더러워. 우리 시내 길을 걷다가 여기 오니 소똥이나 돼지 똥을 밟을 까봐 겁난다.”
순임의 말에 문성은 “난 진흙탕에 빠질 까봐 겁난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애들을 나무랐다.
“어지럽다고 말만 하지 말고 내일부터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래를 날라다가 펴라.”
“예.”
상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규상네 부부와 함께 이사 짐을 부리어 윗방에 들여 놓았다.
“비좁은 대로 참고 견디오. 이제 언제를 다 쌓고 과수원을 다 만들면 식당짜리를 세 칸으로 막아서 정 선생을 들게 하겠소.”
상순의 말에 정규상 내외간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상순은 순자를 보고 점심밥을 짓게 했다. 그리고 홍자와 성숙이랑 시켜 신자의 입원비를 마련하게 무르익은 살구를 뜯으라고 했다.
덕돌과 성숙은 살구를 뜯어 한 사발을 문성과 순임한테 먹으라고 윗방에 올려다 주었다.
“와, 맛있다.”
“새콤하고 달구나.”
순임은 자기보다 세 살이나 지하인 덕돌에게 사탕이랑 과자랑 두 봉지나 주었다.
애들은 인차 친해졌다.
오후부터 그들은 함께 태평강에 뛰어가 놀기도 하고 모래를 대야에 담아 마당과 길에 펴기도 했다.
상순은 은숙과 동선의 일이 답답해 멍지메산 앞으로 가기 전에 윗마을 함흥 촌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찾았다.
병완은 대대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겠는데요. 오후에는 일터에 나오지 마십시오.”
병완은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다가 눈을 뗐다.
“왔니? 요즘 머리 아프겠구나. 허나 너무 근심하지 말라. 사내대장부란 심지가 굵고 굳어야 한다. 그까짓 일이 다 뭐냐? 네 애비와 난 일제가 살판치던 시대에 일본 놈들의 총칼 밑에서도 굳세게 살아왔다. 알만 하니?”
“예. 허나 너무 억울합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은숙과 동선의 일로 머리 아프다. 좋기는 이제라도 편지를 띄워 동선과 은숙을 집으로 데려오너라.”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애들이 돌아오자 하겠습니까? 동선은 함흥에서 조선로동당에 가입한데다가 기관사질을 한다지 않았습니까?”
“은숙이라도 데려오라.”
“그 앤 혹시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으니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써라는데 그러니?”
“예?”
상순은 눈을 치떴다.
“또 조선과 내통한다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길게 빨더니 쿨룩쿨룩 기침을 깇으면서 곰방대 담뱃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애들을 시켜 가만히 국자가에 가서 부쳐라.”
“예- 알았습니다.”
그제야 상순은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늘이 그래도 잘 해주었다. 상순이 함흥 촌에 올라 올 때에는 먹장구름이 밀려오면서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울었다. 허나 오후에는 우레가 울뿐 소낙비는 내리지 않고 비 꼬치를 내리 뿌릴 뿐이었다.
(요만한 날씨에야 일할 수 있지.)
                                                6. 싱그러운 사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삼복염천에도 사원들은 상순의 지휘아래 열심히 돌을 캐고 다락밭 언제를 쌓았기에 가을 전에 과수원은 모양을 드러냈다. 이제 명년에는 다락밭에 사과배나무를 사다가 심으면 됐다.
“이제 5~6년 후면 우리 사원들이 사과를 먹을 수 있을 거요.”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과수원 자리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는 정규상을 근본 개조대상이거나 우파분자라고 여기지 않았고 대대 하향간부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들이 나란히 멍지뫼산 앞에 강 물곬을 돌리는 공사장에 가자 흥수가 눈알을 데굴데굴 부라리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쳇, 저렇게 정치각오가 낮아서야 어찌 지부 서기를 해?”
그 소리를 듣고 상순은 “자네가 그렇게 지부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자리를 내놓을 게. 네 놈이 콱 해봐라!”라고 쏴주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는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그러루한 말을 했다가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꾸지람소리가 귀전을 무섭게 때려 꿀꺽 삼켜버렸다.
학수는 옆에서 동생 흥수가 너무 하는 것 같아 못 마땅한 눈길을 보내더니 상순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서기, 그래 신자는 어떠렇게(어떻기에)?”
“며칠 치료하면 나을 거요.”
학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과 나란히 걸어 언제를 쌓는 곳으로 다가갔다. 학수는 흥수의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켰다. 무조건 형이라고 흥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상순이 없는 사이에 흥수가 어찌나 우파들을 투쟁하는데 열을 올렸는지 언제공사는 별로 진척이 없었다.
돌을 처넣으면 거세찬 강물이 돌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자꾸 무너지곤 했다.
상순은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양미간을 찌푸리고 궁리했다.
한참 후 그는 끝내 묘안을 내놓았다.
“돌을 하나하나 강물에 처넣어선 안 되오.”
그는 몸을 돌려 학수를 마주 보면서 과단성있게 말했다.
“쇠줄망태기에 돌을 수태 넣어 한꺼번에 강물에 처넣잔 말이오. 강물이 아무리 세차도 밀어가지 못할 거요.”
“오, 그게 좋은 방법이오. 우린 왜 진작 그런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과연 그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이튿날에  상순은 학철이랑 경학이랑 데리고 진수해공사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으로 쇠줄을 몇 수레나 사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쇠줄망태기를 만든 후 돌을 반 수레씩이나 넣고 강물에 굴려 처넣었다. 그러자 세찬 강물도 머리를 숙였다. 쇠줄망태기에 넣은 돌들은 태산마냥 강물을 떡 뻗치고 서서 물곬을 동남방향으로 돌렸다.
뒤이어 사원들은 상순의 말대로 물에 들어가 쇠줄망태기 돌 위에 올라서서 쇠줄그물을 트는 족족 쇠줄그물 안에 돌을 처넣어 차곡차곡 언제를 쌓아올렸다. 그리하여 한 보름 만에 “ㄱ”자모양의 20여 미터씩이나 되는 언제를 십여 개 쌓아 물곬을 완전히 동남방향으로 돌리었다.
연 몇달 동안에 1킬로미터도 넘는 언제를 쌓아 3헥타르나 되는 모래밭을 얻어냈다. 사원들은 환성을 올렸다.
“여기에 논을 풀면 명년 후년에는 배불리 먹고 살겠다.”
“김서기니깐. 이런 엉뚱한 궁리를 다 하지. 누가 하겠소?”
“그러기에 말이오. 저 흥수는 김서기 발뒤축에도 가지 못하면서 김서기 자리를 탐내서 계속 문단 말이오.”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고 정말 양심이 없소.”
뒤에서 일군들의 밥을 푸던 춘실은 화를 발칵 냈다.
“남의 나그네 말을 어째 그렇게 험하게 하오? 김서기 병원에 딸을 싣고 간 후에 우리 나그네 돌언제 공사를 지휘했지. 누가 했소? 보자보자 하니까.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다는데. 흥! ”
덕성이랑 춘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물러가 돌을 날랐다.
상순은 떡돌 같은 돌을 움쭉 들다가 그만 놓쳐 발등을 상했다.
돌을 들고 발을 빼보니 돌에 깔린 발에서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랐다.
춘실은 너무나도 섬직해 밥주걱을 든 채 달려와 치맛자락을 쭉 찢어 상순의 발을 싸매주었다.
“쩌! 쩌! 쩌!”
흥수는 먼 발치에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면서 입을 함박만이 벌리고 멍청하니 서서 엿보았다.
상순은 흥수를 흘끔 곁눈질해보며 나직이 말렸다.
“이러지 마오. 제 나그네 눈길을 보오.”
그제야 춘실은 치마폭을 걷어안고 땅 가마를 건 부뚜막 쪽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점심을 먹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을 싸맨 검정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는 순간 춘실의 눈물에 젖은 그윽한 눈길이 멀건 죽사발에 떠올랐다.
부뚜막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가마를 부시는 춘실의 뒷모습을 가만히 훔쳐보는 순간 아랫배로부터 가슴까지 무슨 줄이 뻗치면서 찡 저려났다. 상순은 참지 못할 옛정의 충동을 느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돼? 난 당원이야. 딴 생각해선 안돼.)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순간 끓어 번지던 정욕도 안개처럼 실실이 흩어져버렸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장면에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쪽 강변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에서 경주가 미란이랑 충국이랑과 나란히 앉아 죽물을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허참, 지주네 딸과 놀다니? 투쟁 맞자고 눈치코치 없이 놀아?)
상순은 인차 “경주, 여기 오라!” 하고 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주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눌러놓았다.
“이 놈아, 정신 있니? 왜 지주네 아들딸들과 노니?”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너 혹시 장미련을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에이고, 형님도 무슨 소리요? 미련은 내 보다 열 살도 더 먹은 노처녀인데. 되지도 않는 말을. 황차 미련은 지주네 딸이 아니오?”
상순은 경주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엄숙하게 말했다.
“미련과는 절대 안 된다. 저 지주네 아들딸 놈들이 서른이 넘도록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더니 너를 꾀려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엔 끝장이야. 너네 어미를 남조선특무로 몰아붙이는데 너까지 지주 딸을 좋아해서야 되니?”
경주는 한숨을 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가 무슨 한국특무라고 그래오?"
"이놈아, 무슨 뚱딴지 같은 한국이냐?"
" 흥! 난 그래 장가도 가지 말란 말인가요?”
상순은 주위를 눈짓했다.
경주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씩씩거리더니 휭 하니 일터로 가버렸다.
상순은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아들이지만 부리부리하게 생긴 자식이 아비처럼 사내다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식이 속은 파속처럼 시퍼런 놈이야.)
상순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경주와 거리를 두는 척 했다.
경주 김씨 후손인 경주는 기실 영월 김씨와 먼 한 집안이었다. 황차 경주는 상순의 사촌동생 김경수의 동복형제가 아닌가?
(난 진달래 큰어머니가 특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용천의 본댁이지만 남조선 특무 용천을 붙잡도록 정보를 우리한테 제공했다. 촌공소에서 용천을 제압할 때 돌을 날려 까 눕혔다. 우리를 도와 용천을 나포하지 않았던가! 진달래 큰어머니는 성칠 큰아버지를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발전시킨 로항일투사이다.)
“앗!”
이런 저런 생각을 끝이 없이 하다나니 상순은 그만 손이 미끄러져 돌을 들다가 툭 떨어뜨렸다. 상한 발등을 또 상했다.
춘실은 이번에는 먼발치에서 상을 찡그릴 뿐 다가와 싸매주지 못하고 흥수와 상순의 눈치만 번갈아 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절뚝거리다가 물앉은 상순의 앞으로 충국과 미련이 다가왔다.
충국은 상순의 피 묻은 치맛자락 천을 풀어냈다.
미련은 상순을 보고 전율했다.
“아이고, 이걸 보오. 피가 질벅하구먼. 뼈가 부서지질 않았을까? 오빠, 모질 아프지 않소?”
"오빠라니?"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괜찮다. 가서 일이나 해라.”고 했다.
상순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같은 흥수의 눈길이 싫어서 충국과 미련에게 손사래를 쳤다.
“놔두고 빨리 가래도? 오줌 약을 쓰면 괜찮다.”
상순은 상을 찡그리면서 충국의 팔을 붙잡고 일어나더니 쩔룩거리면서 외발 뜀으로 뚝뚝 뛰어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한발 두발 다가갔다.
모두들 상순이가 근심돼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때 흥수가 이해영의 아들 병진을 보고 빈정거렸다.
“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재국 낸다니께. 픽!”
그러자 병진도 맞장구를 치면서 두덜거렸다.
“항상 철저한상 하더니 당원의 영웅형상을 보여주자고 그러겠지. 뭐.”
병진은 이전에 5대 황소와 싸움을 시켜 죽인 일을 처분 받은 일이 속으로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상순은 병진의 가시집 집안 집 삼촌벌이 됐다. 병진은 자기를 좀 봐 주겠는가 했지만 꼬물만치도 봐주지 않고 배상시킨 상순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병진은 겉으로는 “집안 집 삼촌, 삼촌.” 했지만 속으로는 기회가 있으면 보복하려고 속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상순은 먼발치에서도 흥수와 병진이 주고받는 말을 바람에 실려오는 것을 듣고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줌을 상한 발등에 씩 내쏘았다.
“개는 짖어도, 어, 시원하다, 시원해!”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버들 방천을 보며 오줌을 손에 받아 피범벅이 된 발등을 씻었다. 단통 아픔이 누그러드는 감이 들었다.
(조상들이 물려준 약이 좋긴 좋아.)
그가 오줌을 다 누고 돌아서자 명옥이 흰 머리 수건을 풀어 쥐고 다가왔다.
“이걸로 동이기오.”
“괜찮소.”
상순은 명옥의 이슬 맺힌 눈시울을 내려다보면서 “수건으로 우둔하게 동이고 어떻게 일하겠소?”라고 하며 말렸다.
허나 명옥은 상한 발을 수건으로 꽉꽉 동여맸다.
“그래도 상처에 돌가루라도 들어가면 파상풍이라도 오면 어쩌오?”
(사람의 마음은 고약한 거야.)
상순은 엉덩이를 쳐들고 엎디어 자기 발을 정성껏 동이는 명옥을 내려다보면서 어쩐지 별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욕했다.
(한 고향에서 자란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조강지처건만 어째 춘실이 발을 동일 때보다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까?)
이래서 정은 애인에게 주고 가정은 조강지처에게 맡긴다고 했는가! 죽어도 조강지처와 함께 묻히겠건만. 사내들의 마음이란 고약하고 이상한 거야.
그는 저쪽 뒤 먼발치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서 행주치마를 벗어 함지에 담는 춘실의 엉덩이를 힐끔 곁눈질했다.
이윽고 상순은 수건으로 똥똥하게 동여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쩔뚝거리면서도 언제를 쌓는 제일선에서 계속 지휘하고 돌을 쌓아 나갔다.
노동이 사랑이라고 상순이 상해가지고서도 일하자 사원들은 마음속으로 감복하면서 일손을 다그쳤다. 그들은 멍지메산과 칼산의 돌을 캐 수레에 실어다 돌 제 언제를 부지런히 쌓았다. 돌을 실은 수레대오가 장사진을 치고 부르하통하 강가에 돌을 실어다 부리었다. 사원들은 돌로 제방을 쌓아 올리느라고 개미처럼 달라붙어 바글바글 맴 돌아쳤다.
계급투쟁이 백열화된 세월에도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장마철 전에 끝내 과수원 다락 밭 언제와 부르하통하 물곬을 돌리는 일을 끝냈다. 뒤이어 논물도랑까지 다 파놓고 아름드리 버드나무도 뿌리까지 뿍뿍 뽑아버렸다. 이제 가을 전에 모래밭의 능선을 따라 논두렁을 만들고 논판을 골고루 고루어 놓으면 새 해부터 논을 풀 수 있게 됐다.
짙은 신록이 점차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가을에 접어들었다. 벌써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산골짜기를 핥으면서 불어치더니 어느덧 산비탈의 옥수수 밭이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옥수수마다 애기를 업은 것 같은 강냉이 이삭에서 발간 수염을 흩날리고 있었다.
송이송이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활짝 피어 웃고 있었다. 허나 기실 해바라기는 꽃 뒤통수가 해 빛을 너무 받으면 해를 입을 까봐 두려워 자꾸 태양을 따라 돈다고 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해바라기는 따사로운 해빛을 받으려고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 태양을 따라 돈다고 노래했다. 참 무지하고 가소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 미련은 일 밭에서 돌아오다가 태평강에서 팬티 바람에 목욕하는 경주를 발견했다. 손을 씻는 척 하면서 경주를 여겨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저 뿔뚝뿔뚝한 팔뚝 근육을 봐라. 불뚝 튀어나온 넓은 가슴의 흉근, 아니, 그런데 저게 뭐야?)
팬티가 글쎄 앞의 그 꿋꿋한 물건에 걸려 더 내려가지 않았으니 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그 흉물스런 물건마저 드러날 거 같았다. 다행이 엉덩이만 반쯤 드러났을 뿐이었다.
순간 경주의 알몸을 곁눈질 해 본 노처녀 미련은 가슴이 뭉클 하더니 말 못할 충동이 생기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미련은 못 본 척 하고 강을 건너 지나갔다.
그때 미련을 본 경주는 내려간 팬티를 춰 입고 헤벌쭉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이제 오오?”
미련은 귀밑을 붉히면서 “응.” 하고 응대하고는 수건을 내리 눌러 고쳐 쓰고 바삐 소서구로 돌아갔다.
“미련이, 미련이!”
경주가 소리치며 옷을 입고 뒤따라 달려왔다.
“누가 보겠다. 어째 이래?”
미련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아 날 살리라고 달아났다. 허나 어찌 날듯이 뒤따라 달려오는 경주를 떼놓겠는가!
“왜 이래?”
당황해난 미련은 지지벌개 따라온 경주를 곱게 흘겨보았다.
“미련이, 내 사과를 뜯어 줄까?”
“뭐라니? 생산대 과일을 도적질 했다가 들통 나 투쟁받자고 그래?”
경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펄럭일 뿐 과수원 주위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투쟁 받기는 매 일반이야. 똥집에 넣어야 자기 거야.”
“그래도 경을 치자고 그래?”
“걱정 마. 지금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가서 아무도 없다. 네가 여기 옥수수 밭에 숨어 한참만 있어 봐라. 내 노란 사과 한 아름 따다가 줄게.”
경주는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위를 도적눈으로 흘끔거리더니 미련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야, 야, 이러지 마라.”
허나 경주는 미련을 옥수수 밭에 눌러 숨겨 놓고 도적고양이처럼 옥수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나갔다. 미련이가 보니 그는 옥수수 밭을 꿰질러 나가 조 밭에 이르자 엉금엉금 기여 과수원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미련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안절부절 못했다. 귀밑에서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가슴에서 심장이 높뛰는 감을 느꼈다.
한참 후 경주가 런닝구 가슴에 주먹만큼 한 사과를 불룩하게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응, 먹어라!”
“이래도 되니?”
“따온 걸 먹지 않겠니?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은 먹지 않고 산다니? 먹고 보자.”
“야, 이 놈아, 담짝도 크고나. 에덴동산의 과일도 마구 따 먹을 놈이구나.”
"에덴동산이라니?"
"그런 산이 있다. 아무나 들어가 그 산의 과일을 훔쳐선 안된다더라."
"응~ 듣다 첫소리다."
"울 아빠한테서 들었어."
미련은 누르스름한 사과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자 군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참지 못하고 경주의 손에서 와락 빼앗다 시피 해 사각사각 먹기 시작했다. 사과의 달달하고 시큼한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모든 공포가 산산 박산 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과 맛만 좋구나!”
“그래. 정말 맛있구나. 네 덕분에 사과 배 맛을 다 보는구나.”
경주는 사과를 먹다 말고 지지벌건 얼굴을 들어 미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커다란 쌍까풀 눈과 상큼한 코, 우유 빛 얼굴은 밉지 않았다. 미련의 귀밑머리가 가늘게 흘러내려 하얀 볼을 간지르며 가을바람에 하늘거렸다. 빠금히 열린 적삼 속에 풍만한 젖무덤이 숨소리와 함께 한들거렸다. 하얀 젖통은 쥐면 톡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으며 키스를 뻑 안겼다.
“야, 왜 이래?”
미련은 사과를 먹다가 놀라 경주를 밀어내며 곱게 흘겨보더니 귀밑까지 붉혔다.
경주는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특무 아들이나 지주 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데? 널 사랑해! 우리 함께 살자!”
“야, 너 정말 왜 이래?”
“우리 둘이 결혼해 살자. 난 너를 배불리 먹일 자신이 있다.”
“너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하는구나. 지주 딸이지 너보다 열 살이나 이상인데 뭘 보고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려니?”
미련은 꽉 끌어안은 경주의 팔을 풀어내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지주 딸과 특무 아들은 사람이 아니라더냐?”
“그래도 그렇지. 넌 그래도 항일투사 어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얼굴에 홍조를 띤 미련은 마흔 고개를 바라봐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
곱게 흘겨보는 미련이 예뻐 경주는 아랫배로부터 찡해 나는 감을 느꼈다. 그러나 경주는 용케도 참고 뒤 말을 이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도 항일투사였다. 북만의 한 항일유격대의 당당한 대장이었어. 허나 후에 우리 아버진 글쎄...”
미련은 사과를 뚝 떼 씹으면서 입귀에 괴나온 사과 물을 쓱 닦았다.
“우리 오빠와 아버지한테서 네 아버지 말을 많이 들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는 성분이 지주지만 항일투쟁 때 유격대에 쌀을 가만가만 지원했다. 우리 집 쌀은 먹고 나머지는 거의 다 항일유격대에 실어갔다.”
“나도 우리 엄마한테서 네 집의 말을 들었다. 그러기에 네 오빠와 아버지는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고 덜 투쟁을 받지 않느냐? 김서기는 지주라도 부모와 자식을 계선을 나눠 노동개조표현을 보는 것 같더구나.”
“픽, 우리 오빠는 글쎄 후에 국민당군에 가입했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아버지는 항일에 공로가 있지 않니? 그런데도 성분이 나쁘다고 한뉘 투쟁을 받고 개조해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았니?”
경주는 미련을 꽉 껴안으면서 정색해 말했다. “지주네 딸과 특무의 아들은 사람이 아니야? 우리 결혼해 살자.”
미련은 먹던 사과로 경주의 가슴을 두드렸다.
“야, 황당하다. 황당해. 넌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려.”
“사랑에 나이가 관계있소?”
“야. 우리 아빠는 지학사 고모부네 지괴호 오빠와 결혼하라고 한다.”
“사촌끼리 결혼하니?”
“그래서 노처녀로 늙지 않았니?”
경주는 입을 함박만이 벌리더니 개처럼 혀를 길게 빼 내둘렀다.
“부르르, 그래 쥐괴호와 정말 결혼할거니?”
“쥐는 무슨 쥐야? 지 씨를 가지고.”
미련은 조선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나니 꽤나 조선말귀를 알아들었다.
“경주야, 아무 말이나 했다간 경 친다.”
“내일 죽어도 괜찮다.”
경주는 미련한테 다가앉았다.
“쥐괴호고 뭐고 싹 걷어치우고 내게 시집오라.”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고 키스벼락을 마구 퍼부었다.
“이 새끼야, 야, 그만해. 정말 도깨비 수작을 하는구나!”
“그래, 난 도깨비야. 너만 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 짓도 할 테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우수수 가을바람에 춤을 추었다.
저쪽 과수원에서 싱그러운 과일 향기가 풍겨 노처녀와 총각의 코를 건드렸다.
오곡백과 무르익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 사과 맛은 별맛, 지주네 노처녀와 남조선 특무 아들은 사랑 맛이 사과처럼 새콤하고 달고도 싱그러워 용트림할 지경이였다.
그들의 비장한 사랑은 넘실거리는 황금빛으로 무르익는 오곡백과와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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