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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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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8)
2018년 01월 26일 16시 05분  조회:1400  추천:1  작성자: 김장혁





                       14. 폭풍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의 후폭풍은 대학가에서 아주 거셌다.
홍희는 식사를 전페하고 이불을 들쓰고 침실에 들어누워 있었다. 그러나 승호는 오히려 아주 뻔뻔스러웠다.
“어, 재수 없다.”
그날 저녁에 망신당하고서도 숙사에 돌아와서 맞은 켠 성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이불을 들쓰고 쿨쿨 자는 척했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기로 돼지 엉덩짝 같다고 해도 승호라고 왜 부끄럽지 않겠는가?
허나 그는 동창생들 앞에서 결코 나약하게 나올 수 없었다.
(련인 사이에 놀다가 들켰는데 어떻단 말인가?)
그는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자기 목에 걸린 올가미를 벗어버리려고 애썼다. 다만 마음이 약한 홍희가 멍청이 같은 짓을 할가봐 두려웠다. 그는 밤중이기에 홍희를 찾아가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성호는 이불을 들쓴 승호를 보고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던 승호가 이번에는 역은 참새 방아간을 날아지나간 격이 되지 않았는가.
이때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싱거운 범송이랑 작달막한 종수랑 우르르 쓸어 들어왔다.
범송은 긴 목을 빼들고 승호의 침대를 들여다보면서 빈정거렸다.
“헤헤헤. 우리 부장님께서 벌써 잠들었네.”
승호는 귀에 거슬렸지만 이불을 푹 쓰고 못들은 척했다.
종수도 한마디 끼여들었다.
“항상 우릴 보고 학생기률을 잘 지키라더니. 흥! 하긴 잘한다, 잘해.”
“소 볼기짝이면 어디 저렇게 두텁겠니? 뻔뻔스럽긴…”
“뭐라니?!”
승호가 갈범처럼 버럭 고함지르며 벌떡 일어나 범송의 멱살을 틀어쥐였다.
“이 촌뜨기새끼들아! 개소릴 작작 치지 못해?!”
범송은 승호의 손을 풀면서 두덜거렸다.
“시내 새끼들은 바람이나 잘 피웠지! 뭘 대단하냐?”
승호는 범송의 면상을 한대 갈겼다.
“이 새끼 누굴 치니?”
범송도 승호를 한대 맞받아 쳤다.
종수도 아니꼬운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며 “어데 가 맞아서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다니다가 우리하구 해내니?” 하고 승호를 말렸다.
“이 촌새끼들이 몽땅 덤벼라!”
성호가 일어나 말렸다.
그는 승호가 계속 범송을 치자 훌 밀어놓으면서 “뭘 잘 했다고 이러니?” 하고 핀잔을 주었다.
승호는 범송을 놓고 성호를 이마로 떵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승호의 눈덕에 붙었던 반창고가 성호의 이마에 철썩 붙었다.
“촌놈새끼들이, 다 덤벼라!”
성호는 귀에 거슬렸다.
“야, 왜 쩍하면 우릴 촌놈새끼라고 욕해? 계속 우릴 깔보겠니?”
승호는 오늘 저녁 일을 분풀이할데 없어 속을 끙끙 알았다. 때마침 성호가 나서자 팔을 썩썩 걷어붙이며 을러멨다.
“걸고 들겠어?! 이 새끼들을 시켰지?”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째 아직도 덜 혼났니?”
이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낯선  녀대생이였다.
“밤중에 왜 이래요? 아래층에서 어디 자겠어요? 기말인데요. 제발 작작 떠들면 어때요?”
승호와 성호는 서로 틀어쥐였던 멱살을 놓았다.
녀대생이 문을 닫고 나가자 범송과 종수도 툴툴거리면서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에 성호 밖에 없자 승호가 또 걸고들었다.
“나가서 한판 붙어보겠니?”
성호는 침대에 들어앉으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촌뜨기여서 시내 애들하고 싸우지 못해. 어찌나 권투실력이 센지. 흥!”
승호는 성호한테 다가서면서 정색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성호는 씨무룩이 웃으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전번에 모든게 끝나지 않았니?”
“아니야. 너 아직도 은영을 사랑하느냐?”
승호는 질투가 번뜩거리는 눈길로 성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영이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싱겁잖니? 짝사랑을 해도 유분수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리해되지 않는다. 넌 도대체 홍희냐? 은영이냐?”
승호는 직답을 피했다.
“은영과 정리하겠다는 말인 거 같은데 좋다. 허나 우리 둘 사이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게 있어.”
성호는 의아한 눈길로 승호를 바라보면서 “또 뭐냐?” 하고 물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그만 둬라.”
성호는 승호가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더 중요하냐? 이번 일이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거 짐작이나 했니?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처분을 경하게 받는게 급선무야.”
그러나 승호는 아주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친구? 이런 놈과 아직도 친구야? 전번엔 널 촌놈이라고 너무 업신여겼어.”
성호는 진지해졌다.
“그래 농부 아들 주먹맛을 단단히 봐야 알겠니? 이번 일 말끔히 정리한 후 제대로 붙어보자.”
“좋다.”
승호는 씩씩거리면서 침대에 돌아가 두다리를 쭉 펴고 들어누웠다.
“참 재수없어.”
승호는 성호 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물었다.
“너희들 어떻게 돼 미리 짜고 든 것처럼 창고에 몰려 들었어? 네가 시켰지?”
성호도 승호 쪽으로 돌아누웠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야.”
성호는 승호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승호는 벌떡 일어나며 두덜거렸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등을 깬다더니. 원, 참. 재수없어.”
성호는 듣다못해 한마디 더 했다.
“누굴 원망하지 말고 네한테서 모든 걸 찾아야 해. 왜 그런짓을 자꾸 하니?”
승호는 침대에 되들어 누우면서 두덜거렸다.
“됐다, 됐어. 누굴 교육하니?”
승호는 이불을 들썼다.
침실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창문으로 서글픈 달빛이 비껴들어 침실바닥을 쓸쓸히 어루만졌다.
이튿날 큰 일이 일어났다.
점심때 쯤에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가 찾아와 승호를 불러갔다.
승호는 죄수처럼 머리를 숙이고 따라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교무실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진작 홍희도 있었다.
최교수의 주름이 간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흘러가고 있었다.
“뭐요? 어쩜 복도에서 그런 일을 다 치오? 정말 한심하오.”
홍희는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어깨를 흘러 지나간 긴 머리카락이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다.
승호는 머리를 조금 숙이며 손가락으로 소파를 쓱쓱 긁을뿐이였다.
“큰일났소. 누가 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 고발했소. 대학생들은 재학기간에 련애하지 못한다고 학생기률에 명확히 규정했는데 뭐요? 승호는 학생당원이기에 퇴학을 주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최교수는 승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승호는 학생회체육부장에 체육위원인데 어째 련애모범을 보이느라고 그러오? 졸업을 코 앞에 두고 뭐요?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오?”
승호는 “선생님, 선생님께 부담을 줘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반성했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 일을 어떻게 뒤수습하면 좋소?”
그는 권연을 꺼내 물었다. 승호가 옆에서 제꺽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드렸다.
최교수는 담배연기를 한가슴 가득 길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 뿜었다.
“저네 둘이 진정 사랑하오?”
승호는 “예.” 하고 기여드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홍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승호를 사랑하오?”
홍희는 그제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졸업하면 꼭 결혼식을 올리오. 그래야 때를 벗을 수 있소.”
“알았습니다. 이제 졸업하면 꼭 결혼하겠습니다.”
승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교수는 너무 안타까워 고함쳤다.
“헛참, 무슨 낯으로 허철만 서기를 만날가? 그러잖아도 내가 학생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평했는데. 에이, 참.”
최성균 교수는 성호와 홍희에게 여차여차 하라고 일러준 후 돌려보냈다.
오후에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서 승호한테 호출장이 내렸다.
승호는 성호를 피뜩 곁눈질해보더니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허철만 서기는 승호와 초면강산이였다. 그는 승호를 보자마자 날카롭게 질책했다.
“동무는 학생당원이고 학생회 부장 아니오? 그게 뭐요? 복도에서 부정당한 관계까지 발생하다니? 정신 있소?”
승호는 손으로 삿대질하는 허서기를 응시하면서 반박했다.
“전 부정당한 관계를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나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련인 사입니다.”
꽝!
허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 동무, 이게! 아직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했구먼. 대학교에서 누가 함부로 련애하라 했소? 학생기률을 엄중하게 위반했단 말이요.”
허서기는 의자에 되앉으면서 책상에 놓은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안되겠소. 호되게 처분해야겠소.”
승호는 풀썩 땅바닥에 꿇어 앉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 주십시오. 이제 한학기만 있으면 졸업하겠는데요. 저의 전도를 생각해서라도 선처를 해주십시오.”
허서기는 코방귀를 뀌였다.
“쳇, 호되게 처분하지 않으면 이후에 이 학교를 어떻게 관리하겠소? 영향이 얼마나 나쁜지 아오? 자산계급의 더러운 생활방식이 머리에 꼴딱 찼구만. 옳바른 련애관을 수립해야 하지. 뭐요? 이번에 버릇을 떼주지 않으면 장차 또 무슨 일을 칠지 모르겠소.”
승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잘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허서기는 뜻밖에 나지막이 묻는 것이였다.
“동무 아버지 시공안국에서 일하오?”
“예. 형사경찰대대를 책임졌습니다.”
“오, 그렇구먼. 동무 서류를 보고 진작 알았소.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는  거요.”
허서기는 승호를 앉으라고 하고나서
“이번 일은 덮어놓고 지나갈 순 없소. 먼저 잘 검사하오. 내 좀 돌봐주지. 누구한테도 비밀이요.”라고 하더니 희죽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가보오.”
“예.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승호는 선처를 받을 실오리만한 희망을 안고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책상에 마주 앉아 검사서를 줄줄 내리썼다.
한참 후 그는 검사서를 가지고 곧추 학교당위 규률검사위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허서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옆사무실을 찾아가 검사서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시공안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호는 무거운 심정으로 아버지 사무실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이게 웬 일인가?
아버지 사무실에 허서기가 와 있지 않겠는가!
승호는 몸둘바를 모르고 되나와버렸다.
뒤에서는 이런 말이 묻어나왔다.
“송파 일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승호 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거 번마다 신세를 집니다.”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허허허.”
승호는 오른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탁 쳤다.
“그럼 그렇겠지.”
그는 꽉 막았던 숨이 활 나왔다.
(‘송파’는 시내에서 한다하는 깡패인데. 허송파, 그 놈새끼가 허서기 아들이란 말인가? 참, 일이 별나게 돌아간다.)
승호와 송파는 시내 주먹세계에서 악연을 맺은지 오랜 라이벌이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서로 돕는 사이로 될줄은 천만뜻밖이였다.
이튿날 허서기가 승호를 찾았다.
“승호동무는 검사서를 아주 심각하게 썼더구만. 다신 련애하지 마오. 원래 동무는 퇴학을 맞아야 할 일을 쳤소. 그러나 동무 전도와 학교 위신을 봐서 학급에서 사상검토나 시키고 말 예산이오. 다시 이런 일을 치지 마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오. 알만 하오?”
“예. 허서기 감사합니다. 이후에 꼭 은공을 갚겠습니다.”
“에이, 그런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오. 이건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원칙’에 의해 선처한 것뿐이오.”
승호는 허리를 굽신거리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되돌아서 한마디 물었다.
“예, 알았습니다. 선처하는바에 학급에서도 검사를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허서기는 입을 떡 벌렸다.
“건 어렵소. 온 학교에 소문이 자자한데. 참, 괜히 보호우산까지 구멍이 펑펑  뚫리게 놀지 말고 검사나 잘 하오.”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산이 구멍 나는게 더 엄중한가? 창피해서 어떻게 동창생들 앞에서 검사한단 말인가?)
승호는 또 입을 열었다.
“혹시 성호랑 범송이랑 고발하지 않았는지?”
허서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걸 알아서 뭘 하오? 동문 검사만 잘하고 고치면 되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오.”
승호는 우둔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듯이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성호를 보는 순간 의심이 부쩍 들었다.
(꼭 저 새끼 고발한 거 같아. 이 기회에 나를 꺾어버리고 은영을 빼앗아가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순간 성호와 재차 결투를 벌리고 싶은 충동이 욱 치밀어 올라 흉벽을 쿵쾅쿵쾅 무섭게 두드렸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그럼 일이 복잡해지오.”
귀전에 허서기가 하던 말이 떠올라 으스러지게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며칠 후 학급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허철만 서기,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 외에 학생회 간부들과 학급 동창생들이 참가했다.
홍희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승호만은 개턱처럼 턱을 쳐들고 뻔뻔스레 앉아 있었다.
최성균선생이 직접 회의를 사회하였는데 거두절미하고 이런 일이 생긴 데는 담임교원인 자기에게 주요책임이 있다고 반성부터 했다.
뒤이어 승호가 검사했다.
“학생당원으로서 학생기률을 위반한 잘못을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해서 물의를 일으킬줄은 몰랐다.
“유감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교 학생기률은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을 보고 련애하지 못한다는 기률조목은 성인이 다 된 우리 대학생들의 실제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학교당국에서 개정할 것을 희망합니다.”
“아니, 저 동무, 저게!”
허철만 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망발이요? 엄숙한 비판대회장에서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하다니?!”
최성균선생도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발언하겠습니다.”
모두들 뒤로 머리를 돌려보니 꺽다리 범송이 일어섰다.
“보십시오.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자기 잘못을 근본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학생회 당원간부로서 창고 복도에서 련애한게 옳습니까? 창피한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학생기률을 잘못 정했다고? 뭐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그럼 학교에서 너처럼 숱한 녀학생들의 정조를 짓밟는 개 같은 새끼들에게 마음대로 하게 놔두라는 건가? 검사가 철저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후에도 또 개짓을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학급을 다 팔아먹고서도 뻔뻔스럽긴?!”
성호가 옆에서 범송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놔라! 어째, 저 새끼 항상 우릴 촌뜨기라고 깔보더니 잘 됐어. 퇴학이나 콱 맞아라!”
최성균선생이 제지했다.
“인격모욕을 하지 말고 비평하십시오.”
범송을 피뜩 쳐다보는 승호의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정희가 발딱 일어나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홍희하고 한 침실에 있는 동창생으로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승호 동무는 어쩜 처녀들의 정조를 헌신짝 다루듯 할 수 있소? 정조는 처녀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오? 그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정조를 잃고 고민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했습니까? 녀성들의 정조를 사정 없이 짓밟은 승호의 착오는 그저 학생기률로 처분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형사범죄로 처분해야 해요.”
숱한 학생간부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힘을 얻은 정희는 계속 대포를 퍼부었다.
“승호를 지금 엄격히 처분해 경종을 울려줘야 다신 이런 착오를 범하지 않게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호는 이른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홍희를 내놓고도 숱한 녀학생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만하오!”
뜻밖에 성호가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나 정희에게 면박을 주었다.
“칼모태에 오른 물고기를 잘 썰어서 선생님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마오. 이제 30년이 지나도 우린 동창생들이오. 우물에 빠진 승호 머리에 돌멩이를 작작 떨어드리란 말이오. 그런다고 학교에서 졸업배치를 더 잘 해줄 거 같소?”
뒤이어 성호는 선생님들을 돌아보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
“허서기, 승호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이제 한학기 지나면 결혼할지 누가 압니까? 련인끼리 련애한 게 무슨 잘못입니까?”
모두들 성호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어째 너도 속에 걸리는게 있니?”
범송이 성호에게 눈을 흘기며 두덜거렸다.
“쟤들 어디 그저 련애한 거야? 복도에서 뭘 했다고 그러니?”
“관둬! 량심을 지켜라.”
성호의 말에 범송은 펄쩍 뛰였다.
“야, 원칙을 지켜야 해! 뭐야? 동창생이라고 잘못을 보고서도 덮어줘서야 되니?”
성호는 범송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그는 범송과 “너는 은영과 련애하지 않았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때 허철만 서기가 총화발언을 했다.
“오늘 승호 동무는 심각하게 반성했습니다. 이후에 우리 학교에서 다신 이런  사고가 생기지 말 것을 바랍니다. 이후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땐 엄격히 처분할 것입니다.”
허서기는 대충 몇 마디 말하고는 최성균선생한테 끝내라고 눈짓했다.
최성균선생은 홍희한테 물었다.
“홍희는 진짜 승호를 사랑하오?”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홍희는 용기를 내 머리를 들며 천천히 일어났다.
“예. 이 몸이 죽어죽어 백골이 진토로 될지언정 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비판해도 승호를 사랑해요.”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킬킬 웃는 소리로 부산했다.
“웃지 마오. 이건 저 동무들 처분에 관건적인 대목이요.”
최성균선생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교실을 둘러보더니 계속해 승호에게 물었다.
“동무들은 졸업하면 결혼할 예산이요?”
승호는 사전에 시켜준대로 “예. 새해 9.3에 결혼할가 합니다.”
최성균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됐소. 앉소. 모두 들었지요? 물론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한 건 학생기률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건 도덕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차 이 동무들은 당장 결혼할 사이라는 것과 전도를 감안해 허서기께서 경한 처분을 내릴 것을 바랍니다.”
허서기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승호는 숙사로 돌아오면서도 정희와 범송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반면에 성호의  의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고 병 주고 약 주는 성호 속심을 누가 알아? 내놓고 대포를 쏘는 년놈들보다도 안팎이 다른 놈새끼 더 무서워. 저 자식 분명 자기 발등이 저려서 미리 방패를 들고 나선 거야. 넌 은영과 짝사랑을 하지 않았니? 퇴학맞을가봐 겁나지. 흥!)
승호는 침실에 돌아와 성호의 동정어린 눈길을 피하면서 침대에 털썩 들어누웠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피뜩 떠올랐다.
(자식, 날 물어재끼고 은영을 채갈 좋은 기횐데 왜 날 비호하지?)
며칠 후 후폭풍이 잔잔해지자 승호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까지 하고나니 심신이 홀가분해졌다.
승호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두 꾸러미나 사들고 최성균 교수네 집으로 찾아가 인사했다.  
최교수는 김이 문문 나는 소고기국을 떠서 안방에 홀로 계시는 늙으신 아버님께 드리면서 혀끝이 다슬 지경으로 승호의 인사성을 칭찬했다.
“승호는 인사성이 밝은 제자요. 효성과 의리가 강한 사람은 보답받기 마련이요.”
시름시름 앓던 사모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김치움에 가서 대야에 김치를 담아 내왔다.
승호는 “이번에 선생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으니 말씀이지요. 퇴학맞을 번했습니다.” 하고 입이 마르게 개여올렸다.
또 기회를 봐서 담임교원 앞에서 성호를 춰올렸다.
“최선생님, 이후에 성호를 좀 봐주십시오. 걘 진짜 의리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그날 비판회의에서 보십시오. 다른 애들은 저를 죽어라고 비평했지만 성호는 저를 두둔해 중점발언을 했단 말입니다.”
최교수는 승호를 타일렀다.
“성호 은혜를 잊지 않는 건 좋소. 그러나 뭐나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적게 말해야 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승호는 원래 허철만 서기한테도 인사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승호의 아버지 리철갑 과장이 떽 했다.
“야, 정신 있니? 까딱 말라.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해. 세상 사람들이 알면 너와 송파는 물론, 내하구 허서기까지 몽땅 끝장난다. 알겠니?”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리해되지 않았다.
(대체 내 무슨 죄를 졌다고 깡패들의 일을 덮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걸가?  허송파가 무슨 일을 쳤는가?)
세상에는 지하에 암장돼 흐르는 뭔가 있었다.
승호는 아직 세상의 피상만 보고 지하에서 흐르고 있는 지하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5. 목동과 파랑새
엄동설한은 대지에서 맥없이 스르르 물러가고 봄아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비단결로 얼굴을 쓰다듬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대지를 간지르며 산들산들  불어왔다. 처녀총각들의 설레는 가슴에도 훈훈한 봄바람이 스물스물 스며든다.
성호는 사랑의 눈길을 은영한테서 점차 떼려고 모지름을 썼다. 아무리 예쁘더라도 색마 같은 승호한테 사랑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잃은 녀자애를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날 한시에 깊이 뿌리 내린 감정을 단절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제야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은영이 아주 깊이 얼기설기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랑의 뿌리를 흔적 없이 빼려고 할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고 고통스러워났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은영을 잊자.)
성호는 몇번이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교정에서 우연히 흩날리는 체육머리를 보아도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사랑스러운 은영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외씨 같은 얼굴, 탄력 있는 몸매, 어데라 없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이성과는 달리 은영으로 인해 감정이 무섭게 파도치는 것에 무기력해지는 자기를 꾸짖은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꽃노을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영이 자기 팔을 끼고 사뿐사뿐  결혼례식장에 들어가는 꿈이 눈 앞에서 삼삼거리는 상 싶었다. 그런 은영을 허망 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였다.
그는 졸업론문을 쓰는데 도정신하면서 점차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황차 겨울이 물러간지라 빙장에 가서 스케트를 타는 일이 없었다. 아래학급이기에 교실에서 은영을 자주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간 은영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기말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그럴가. 자기가 땀을 흘려 가꾼 밭에서 나는 것만큼 곡식을 걷어들여 먹는데 만족하듯이 자기 기말성적에 만족했다.
승호는 성호의 그런 사상을 소농경제사상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를 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돈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성호는 승호의 그런 처세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호는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떠나게 되였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범송과 종수, 정희도 함께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가게 됐다.
성호가 뻐스정류소로 가는데 파랑새가 뛰여와 생글방글 웃으며 따라나섰다. 그러나 성호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어째 범송이랑 함께 가지 못하오?”
“또, 또. 무슨 일이 있어? 어째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정희는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아직도 은영을 잊지 못해?”
성호는 피씩 웃었다.
그는 정희를 데리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줄줄이 늘어선 화단에는 모란꽃, 빨간 장미꽃들이 활짝 피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원예사들이 연분홍 진달래꽃과  무궁화까지 심어 별유천지를 만들어놓아 유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성호는 소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가 정희와 마주 섰다.
“정희, 전번에 그게 뭐요? 승호와 홍희를 그렇게까지 사정없이 비판할 수야 있소? 동창생으로서 어찌…”
“픽!”
정희는 파랑새란 별명처럼 예쁜 얼굴이 대뜸 파랗게 질렸다.
“그래 승호가 잘 했어? 학생기률을 어긴 건  둘째고 그게 뭔가? 이 처녀 저 처녀 돌아가면서 정조를 짓밟고 있단 말이요. 대학교로 오기 전에 벌써 약혼녀가 있었다던데 그게 뭐요? 홍희하구 저렇게 망신스런 일을 쳤지. 어디 그뿐이야? 은영과도 지하독서실인지 세집인지 뭔지 하는데 들어가는 거 여러번 봤어. 개 같은 놈이 가만 놔뒀겠어? 나쁜 놈을 비호하는 네가 더 나빠! …”
“그만해!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
“퇴학을 줘야 해, 퇴학을! 걔는 별명이 ‘호랑이’라더구나. 이젠 발정 난 ‘수개’라고 해라. 호호호.”
정희는 어글어글한 눈이 떼꾼해지더니 정색했다.
“넌 아직도 승호가 련애를 구실로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유린하는게 옳다고 보니? 그래 너도 걔처럼 개짓을 하겠다는 거야?”
“아니지.”
“왜 자꾸 승호를 보호해나서니?”
“우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창생이 불쌍해서 그래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성호를 맑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그게 동창생을 구하는게 아냐. 승호가 그 개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이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아니? 전번 비평회의 때 짯짯하게 비평해줘야 했어. 쓴 약은 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승호를 비호한 건 구하는게 아니라 수렁에 떠밀어넣은 살인행위와도 똑같아.”
성호는 정희가 이렇게까지 똑똑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저도 몰래 정희를 다시 여겨보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정희가 은영을 비집고 자기 마음 속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정희가 묻는 소리에 성호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면서 되물었다.
“자기는 련애하지 않았겠구나.”
정희는 정색해 따지고 들었다.
“무슨 소리야? 이전에 승호가 련애를 하자면서 접어들더라. 난 바람기 있는 승호를 간파하고 단마디로 거절해버렸어.”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넌 그래 련애를 걸지 않았겠구나.”
“승호하고?”
“나한테.”
파랑새는 새파랗게 질린 복숭아얼굴에 홍조가 어리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랬던가?”
“모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은 보아도 자기 태산 같은 허물은 못 봐.”
정희는 주먹으로 성호의 넓은 가슴을 쾅쾅 팼다.
이윽고 그녀는 파도치는 굽슬굽슬한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 쓸어넘기면서 몸을 돌리더니 부끄러운듯이 두 다리를 배배 비틀었다.
“말이 나온바 하고 묻자. 아직도 은영을 사모해?”
“또, 또. 내 바보냐?”
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호~ 내쉬는 것이였다.
그녀는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바보야, 은영이란 애를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왜?”
성호는 직답을 피하고 반문했다.
“왜 은영한테 질기게 관심을 보여?”
정희는 소나무숲이 설렐 정도로 까르르 매력적으로 웃었다.
“내가?”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네 운명이 근심될뿐이야.”
뒤이어 그는 머리를 숙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짝사랑은 아주 고통스러운 거야.”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래났다.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성호의 가슴을 손으로 찌르며 따졌다.
“누가 짝사랑을 한다는 거야?”
성호가 주춤 멈춰서며 입을 떼려고 할 때다.
“성호야!”
“여기 있었구나.”
어디서 솟아났는가. 싱거운 꺽다리 범송과 실돌피 같은 종수가 소나무숲 속에서 나타났다.
성호가 황급히 돌려 맞췄다.
“어, 너희들을 여기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함께 천수해로 떠났다.
천수해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실습교원들이 련합문예공연을 할 때 성호는 정희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최성균선생은 정희를 보고 실습생을 대표해 독무를 추라고 했다.
정희는 중학생무용수들 속에서 키가 비슷한 연화라는 녀학생의 한복을 빌어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은은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화려한 독무를 선보였다.
훤칠한 키에 탄력 있는 몸매는 심산 속에 피여난 날씬한 장미꽃 같았고 날렵히 놀리는 그녀의 껑충한 다리나 손놀림은 호수가에서 백조가 날아예는 듯했다.
사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진짜 예뻐!)
성호는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인차 자기를 꾸짖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목동이 어떻게 규방 규수를 쳐다본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무대에 올라선 정희가 오르지 못할 벼랑 우의 도고한 진달래꽃으로 보였다.
(싹 걷어치워.)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날 무대에서 연화라는 녀학생의 쌍까풀눈에 눈길이 자꾸 갔다. 어찌나 금방울 굴리는듯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지 사생들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였다.
정희의 실습교수를 참관하러 교실에 들어갔다가 연화가 노란 샤쯔를 입고 제일 뒤줄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성호의 눈길이 저도 몰래 자꾸 연화의 우유빛얼굴에 가 멈춰섰다. 연화는 그 뜨거운 눈길을 감지하고 머리를 수깃하면서 쌍까풀눈을 곱게 살포시 내리떴다.
천수해중학교에서 교내운동대회를 열었다.
연화는 노래만 잘 부른 것이 아니라 달리기도 아주 날래게 달렸다. 다른 애들을 한 대여섯메터 떨궈놓고 400메터 코스를 뛰여 봉긋한 가슴에 흰 끈을 걸지 않겠는가.
학생들이 운동장 복판에서 고도를 날렵하게 뛰고 있었다. 성호가 가보니 고중생들이 1메터 50을 뛰고 있었다. 그런데 몇이 넘지 못하고 다 고도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성호는 슬금슬금 닫다가 고도대를 훌쩍 뛰여넘었다. 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 쳐다보다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체육교원은 성호가 얼마나 뛰여넘는가 보려고 대뜸 고도대를 1메터 60으로 올려놓았다.
성호는 고도대를 향해 닫다가 개구리 물에 뛰여드는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날아넘어갔다.
“와-싸-!”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체육교원도 혀를 끌끌 차며 성호를 흘끔 쳐다보는 것이였다.
성호가 자기 학급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희가 맡은 학급의 연화는 뒤줄에서 일어나 수건을 건네면서 “선생님, 땀을 닦으시오.” 하고 정답게 말했다.
정희도 건너와서 “어쩜 그렇게 날래? 실습생들의 본때를 보여줬구만요.”하고 감탄했다.
성호는 정희와 함께 뒤로 물러가서 연화를 가리키면서 “저 앤 예술의 싹이 보이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연화는 이쪽을 보고 생글방글 웃어보이면서 머리를 숙였다.
“글쎄 나도 전번 공연 때 저 녀학생이 노래를 잘 부른다 했어. 노래와 춤을 좀  가르쳐주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점심에 시내돌이를 하지 않겠어?”
“어째?”
“선물 할 거 있어.”
성호는 고의로 자빠듬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계속 운동대회를 하겠는데 어디로 가?”
정희는 단통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주겠다고 할 때 가지지 않으면 꼭 후회할 거야.” 하고는 자기 학급으로 돌아가 앉았다.
점심에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범송과 종수의 눈을 피해 가만히 천수해백화상점에 따라갔다.
자그마한 진의 백화상점 치고는 없는 것이 없었다.
정희는 성호를 데리고 옷매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줄느런히 걸린 남자 옷을 돌아보는 것이였다.
“뭘 하려고?”
“옷 한벌 선물하고 싶어.”
“그러지 마.”
“왜?”
“사내라는 게 녀자한테서 먼저 선물을 받다니?”
정희는 귀밑까지 홍조어린 걀죽한 얼굴을 들어 성호를 정겹게 바라보더니 애교섞인 어조로 말했다.
“주고 싶어 주는 거니깐. 괜찮아.”
“무슨 명목으로?”
“말해야 알겠어?”
나직한 귀속말이였지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몰라.”
정희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들어가며 외면했다.
성호는 가슴이 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백화점인지라 더 묻지 못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정희는 황급히 뒤쫓아와 성호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로 가? 부담 갖지 말아요. 교단에 선게 옷이 너무 헐더군요.”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저도 몰래 마음의 쪽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은영이 못잖않게 정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온 몸으로 느꼈다.
(사랑이란 뭐냐? 이 녀자 저 녀자 짓밟는다고 승호를 욕했는데. 왜 이래? 첫사랑 순희로부터 은영, 정희한테 서서히 옮겨붙는 사랑의 불씨, 참 알고도 모를 사랑이야!)
실련의 망망대해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성호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은   신세였다. 그는 마음먹고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와 함께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며 놀던 화려한 시절이 그리워지고 사랑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 뒤엉킨 사랑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는 은영이 사무치게 그리는 심정을 담아 시조 “장미꽃”을 써놓았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 그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별찌처럼 사라졌네
그리움 장미꽃으로 빠알갛게 꽃폈네
 
착잡한 내심의 갈등을 겪을 때 정희가 또다시 그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폈다. 그 따뜻한 사랑의 불길이 얼어붙은 성호의 마음을 서서히 덥혀주기 시작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에게 하나의 구명줄을 내리드리워주었다. 그녀는 고통의 심연에서 모지름을 쓰는 그를 끌어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성호는 믿던 도끼에 발을 찍힌듯 실련의 고배를 마신 후 처녀애들한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정희가 주동적으로 망망한 바다에 침몰하려던 쪽배에 사랑의 돛을 올리자 성호는 정희의 진심어린 사랑에 유혹돼 저도 몰래 조심스레 그 사랑의 돛배에 오를가 말가 망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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