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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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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5)
2015년 09월 09일 11시 44분  조회:1810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9. 머슴
 
    먹장구름이 고향의 하늘을 지지누르면서 을씨년스럽게 기운봉을 핥으며 오만하게 흘러갔다. 산과 들은 먹장구름의 야만적인 억눌림을 받아 침침해 견디기 어력게 돼가고 길 옆의 눈더미에 깔린 진달래는 언 허리를 굽힌 채 쇠 발굽에 밟혀 간간히 신음하고 있었다.
    월선은 날이 감에 따라 은희를 더 못 살게 굴었다. 쩍 하면 밥이 설었다, 눅다, 되다, 돌이 씹힌다, 뭐니 뭐니 하면서 허물을 잡고 머리를 잡아 뜯어놓았다.
   암범은 늑대가 가만히 은희와 치근거릴까 봐 물을 길으러 가도 자위대원을 따라 보내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월선은 입을 앙다물고 아침 설거지를 하는 은희를 들볶아댔다.
   “다시 우리 영감과 치근거려 봐라. 가랑이를 찢어놓지 않는가.”
   월선은 선처의 맏아들 철주 녀석과 함께 마차에 앉아 우시장으로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떠나갔다.
   철주는 일본에 유학을 갔었다. 그는 금방 서울로 돌아왔다가 아버지를 보러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딸랑딸랑
   구리방울소리 절주 있게 들렸다. 네 필 말은 네 굽을 안고 우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만하면 마차 빠른데도 암범은 재촉이 성화 같았다.
   “빨리 몰아.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겠어.”
  어찌나 재촉하는지 머슴 병수는 연신 닫는 말에 채찍을 쨩쨩 안겼다.
   뭇 산들은 하얀 눈옷을 떨쳐입은 채 뒤로 물러갔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산들에서 흰 용들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듯이 눈보라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휘몰아쳤다.
   “철주, 저 눈보라 치는 산을 보오. 우린 신선들이 날아다니는 별유천지를 마차 타고 훨훨 날아예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런 거 같네요.”
   철주는 크림 내 확확 풍기는 월선을 피뜩 곁눈질하면서 비위를 맞추면서 씽긋 웃어 보이었다.
   “작은어머니, 짚고 넘어갈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맏아들과 무슨 ‘이랬어요’, ‘저래요’인가요? ‘야’, ‘자’ 하세요.”
   “호호호.”
   월선은 입을 싸쥐고 캐득캐득 웃었다.
   “맏아들? 그저 맏아들과 같이 꽃마차를 타고 아버지 모시러 가니 기분이 좋아 그래요.”
   “또, 또. 에이 참, 어머님도. 원.”
   월선은 개의치 않고 철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철주는 덴겁해 손을 훌 빼갔다.
   월선은 취한 듯이 몸을 철주에게 기대면서 나직이 소곤거렸다.
    “왜 안 되나? 어머니가 맏아들이 고와서 그래. 호호호.”
    철주는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 상을 찡그렸다.
    (늙으신 아버님 마음고생 많겠구나.)
   순간 월선은 깨 고소해 했다.
    (등신 같은 영감태기, 당신은 은희를 좋아하지? 내 당신 맏아들을 좋아한들 뭐래? 흥, 애 나지? 풍이나 맞고 콱 뒤져!)
    병수는 마차를 몰면서 뒤에서 연놈들이 하는 수작이 메스꺼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 잔등에 채찍을 안기며 박차를 가했다.
    마차는 모자간의 추잡한 희극을 싣고 눈보라 속으로 질풍같이 달렸다.
    한편, 한길수는 월선이가 우시장을 간 틈을 타서 은희를 고분고분 말을 듣게 길을 들이고 싶었다.
    그는 몸채 마루에 나가 앉더니 호통 쳤다.
    “영팔이, 은희를 끌어오게!”
    “예!”
   영팔은 응삼과 함께 사랑방에 가서 은희의 양팔을 잡아끌고 왔다.
   한길수가 독기어린 우멍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더러운 년, 자기를 생각하는 거 모르고 언감 그런 연극을 놀다니? 저 년을 기둥에 달아매라!”
    영팔과 응삼은 바 줄로 은희를 기둥에 끌어맸다.
    “주인어른, 왜 이랩둥? 난 아무 죄도 없어요. 제발 풀어 줍소.”
    “흥, 어디 주인의 비위를 거슬러 봐. 흥, 대가를 톡톡히 치를줄 알어.”
   한길수는 기둥에 매놓은 은희의 귀 쌈을 찰싹 찰싹 갈겼다.
  은희의 여윈 얼굴에 뻘건 손자리가 났다. 한길수는 손찌검질도 분을 풀기는 모자랐는지 손에 침을 퉤 뱉더니 가죽채찍을 찾아 들고 번들 이마를 번쩍이면서 은희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이를 사려 문 한길수의 우멍 눈에는 늑대 독기와 변태의 음충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쨩! 쨩!
  한길수는 채찍으로 그 여린 은희의 종아리고 허벅다리고 가슴이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앗, 아가!”
  신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한길수는 채찍질하면서 을러멨다.
  “주는 떡을 먹지 않더니 어떠냐? 응?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겠니? 안 듣겠니? 응?!”
  은희는 채찍소리 쨩! 쨩! 날 때마다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쳤다. 은희가 머리를 가로 툭 떨어뜨린 채 대답이 없었다. 한길수가 채찍자루로 턱을 쳐들어보니 은희는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경 칠 년, 다시 내 말을 듣지 않아 봐!”
  은희는 대답 대신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눈을 내리깔며 까무러쳤다. 그녀의 목과 팔, 종아리에 마디진 퍼런 굴뱀이 쭉쭉 갔다.
  한길수는 은희가 죽겠으면 죽어라고 모든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채찍을 놓자 마루에 앉아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었다. 눈치 빠른 아첨쟁이 응삼이가 부시를 척 꺼내 올리었다.
  한길수는 응삼의 손을 밀어버리고 호주머니에서 성냥 곽을 꺼내더니 성냥가치를 득 그어 담배 불을 붙여 물었다.
  “주인님, 건 뭣입둥?”
  응삼과 영팔은 신기해하자 한길수는 어깨 으쓱해 입을 널어댔다.
  “이 시골 놈들아, 끼무라 국장님이 나에게 준 성냥이야. 이거면 부시를 백번 치지 않아도 돼.”
  한길수는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안방에 들어갔다. 이윽고  나온 그느 성냥을  졸개 응삼과 영팔, 수길에게 한 통씩 나눠주었다.
   “와~ 신기하다.”
  응삼은 성냥 곽을 쥐고 이리저리 보면서 야단쳤다.
  한길수는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후 병완의 집에 림산파출소를 세우고 들어앉아있는 야마모도 소장을 등에 업고 마구 칼을 휘둘렀다.
  “저년에게 물을 치게.”
  영팔은 까무러친 은희를 풀어놓고 부엌에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퍼다 얼굴에 탁 쳤다. 그래도 은희는 깨여나지 못했다. 짐승 같은 놈 들은 초겨울 널마루바닥에 은희를 눕혀놓고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한길수는 은희 생사는 관계하지 않고 차디 찬 마루에 내버려둔 채 영팔, 응삼과 자위대 대원들을 끌고 덕팔이네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개자식, 성칠을 따라 사냥하러 갔지. 몽땅 독립군으로 처단할 테다. 네놈들의 처자들을 몽땅 내 종년을 만들테야. 으흐흐.”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덕팔이네 집으로 다가갔다.
  눈에 용마루가 짓눌려 푹 꺼진 집 안에서 필순의 쿨룩쿨룩 기침소리 들렸다.
  길수가 졸개들을 끌고 기척도 없이 뛰어들자 필순의 아들 철규와 딸 점순이가 화닥닥 일어나면서 공포에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일입둥?”
  한길수는 필순의 창백해진 여윈 얼굴을 쏘아보며 고래고래 을러멨다.
   “철규, 넌 오늘부터  우리 집에 가서 말을 먹여야 돼!” 
   “안 됩구마.”
  필순은 손으로 철규를 잔등 뒤에 빼돌렸다.
  “나그네가 사냥하러 가구 없는데 이제 열 살 푼한 애마저 머슴으로 끌어가면 어떻게 합둥?”
  한길수는 음흉한 우멍 눈으로 겨릅대 같은 필순을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덕팔은 독립군에 들어갔기에 죽은 목숨이야. 처자들도 다 목을 매 죽여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 어른이 야마모도 소장과 말해서 살려 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라. 흥!”
  영팔과 응삼은 와락 달려들어 필순을 활 밀어버리고 승냥이 어린 양을 채가듯이 철규를 훌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철규야, 철규!”
  필순은 따라 나가면서 손을 들어 철규를 불렀다. 마흔이 거의 돼서 어떻게 낳은 외동아들을 빼앗기고만 것이다.
  “오빠~ 응, 응~”
  점순도 따라 나가면서 통곡 쳤다.
  한길수는 음충한 눈길로 점순의 애티 나는 몸을 훑었다.
  (너무 애호박이야.)
  한길수는 우멍 눈을 점순에게서 떼더니 코를 싸쥐고 퀴퀴한 냄새 나는 집안에서 바람결처럼 나가버렸다.
 집 안에서는 필순이 모녀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끼꼬리 같은 겨울 해가 눈 덮인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야 병수가 모는 마차가 토성 안에 들어섰다.
  마차 풍을 젖히고 살진 월선의 낯이 쑥 나왔다.
  “여보, 아버님이 오셨어요.”
  위방 문이 삐꺼덕 열리더니 한길수가 끌신을 짝짝 끌고 바삐 나갔다.
  마차 우에서 백발이 성성한 염소수염이 풍막을 젖히고 나타났다.
  “가시아버지, 그간 무사했습둥?”
  “오, 그래.”
  염소수염을 기른 월선의 아버지는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면서 병수가 가져다놓은 나무 궤를 딛고 마차에서 내렸다.
  헌병 가메다가 마차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자는 한길수를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곤방와(안녕하십니까)?"
  그자는 월선의 아버지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했다.
   “하이, 오까께 사마데(예, 덕분에).”
  한길수는  이젠 제법 섬나라 오랑캐처럼 일본 말로 인사말을 받았다.
  이때 저쪽 토성 밑 우사에서 철규는 굽실거리는 한길수를 쓴 오이 보듯 하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철규야, 말을 마구간에 들여다 먹이를 줘라!”
  “알았습구마.”
  철규는 병수와 함께 말을 풀어 마구간에 들여다 매고 구유에 먹이풀을 주었다.
  “에구, 요 어린것까지 붙잡아왔구나. 쯧쯧.”
  열세 살 밖에 안 되는 철규는 고된 일에 지쳐 비틀거렸다. 그는 일을 마치고 마구간에서 나오면서 높이 쳐들린 몸채 추녀를 올려다 쏘아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자기에게 차려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가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은희 앞에 내밀었다.
  은희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네나 먹어라.” 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때 병수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섰다.
  “은희, 이건 네 몫을 가져 온 거야. 어서 억지로라도 먹어라. 이러다간 앓아눕겠다.”
  병수는 은희가 이를 옥 물고 간신히 일어나 앉아 밥술을 드는 은희를 보고서야 자기 곁방으로 나갔다.
  철규는 채찍 자국이 난 은희 팔을 보고 눈물이 글썽해지더니 이를 옥 물었다. 너무 힘들어 은희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내뱄다.
  은희는 숟가락을 드네 마네 하다가 한숨소리에 신음소리를 섞어내더니 철규의 부축을 받으면서야 간신히 자리에 들어 누웠다.
  철규는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창고 같은 사랑방에는 남녀 머슴들이 모이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10. 어린 장사꾼과 부자

  어느 날, 한길수가 병수와 철규를 데리고 말을 팔러 우시장 장터로 갔다.
  한길수는 번대 머리에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개화장까지 척 짚고 자위대 대원까지 끌고 나섰다. 돈주머니를 찼던 옆구리에 권총을 척 찼고 외눈깔박이로 된 것이 이전 한길수의 행차보다 달랐다.
  그는 걷기 싫어 자전거를 가져오라고 한 후 자위대원 둘을 떼 두면서 병수와 철규가 모는 소와 말을 잘 지키면서 우시장 장터까지 오라고 했다.
  병수와 철규는 자전거를 타고 바람결처럼 달려가는 길수와 자위대원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두덜거렸다.
  지어 자위대원들도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쳇. 재수 없어. 우린 걸어서 언제 가겠냐?”
  철규가 뒤 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도 말과 소라도 타구 갑시다. 아무튼 남에게 팔아야 될 소가 아닙니까?”
  자위대원 똘만은 철규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허허, 요놈이. 옳다. 우리라고 다리 아픈데 걸어가겠니?” 하고 말하면서 토성 안 쪽을 돌아다보았다.
  “대문이 꼭 닫겼네. 우리 둘이 말을 타고 자네들은 소를 타게.”
  똘만의 말대로 자위대원들은 말을 타고 병수와 철규는 소를 타고 우시장으로 떠났다.
  그들은 소와 말을 타고 닫다가도 걷고 걷다가도 달았기에 점심 전에 우시장에 이르렀다. 골목마다 이전에 비해 게다짝을 걸고 딸까  닥거리면서 다니는 일본인들이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하얀 백의를 입은 조선인들 속에 상시 옷 같은 화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섞여있는 골목은 정말로 조밭에 가라지가 섞인 것 같고 꽃밭 속에 쑥대가 섞여 넘실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들은 우시장 장터에 이르렀다. 이 도시의 이름을 우시장이라고 단것은 말 그대로 소장마당이 소문났기 때문이다. 소문대로   우시장 소장마당에는 숱한 살이 피둥피둥 진 소들과 말들이 말뚝에 매여져있었고 숱한 장군들이 한창 흥정을 하느라고 야단법석 했다.
  어떤 소는 “음메—” 하고 영각소리 울리었다.
  덩치 큰 수소는 다른 수소만 보면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 치며 싸움질하자고 뿌리를 곤두세우고 생 지랄이었다. 어떤 수소는 암소가 지나가면 노려보며 덮쳐들다가도 말뚝에 매놓은 고삐에 끌리어 입을 짝 벌리며 대가리를 쳐들고 눈알을 흡떴다. 어떤 둥글소는 암소를 쳐다보다가 아예 매놓은 말뚝에 매달리다가 뿌리로 말뚝을 떵떵 들이받기도 했다.
  늦어 가다나니 소와 말을 맬 자리가 없었다. 한참 소와 말 고삐를 잡고 있는데 요행 어떤 소장사군의 소가 팔리면서 말뚝 하나가 나졌다. 하여 눈치 빠른 철규가 제꺽 손에 쥐고 있던 말을 끌어다가 말뚝에 고삐를 매놓았다. 이렇게 한참 싱갱이 질 하며 눈치노름을 하여 겨우 말 두필에 소 한 마리를 말뚝에 매놓았다. 이제 소 두 마리만 말뚝에 고삐를 매놓으면 됐다.
  (팔리겠으면 팔리구. 나 하구 무슨 상관인가? 배고픈데 점심도 먹지 못한 판에 말뚝에 매놓고 편안히 앉아 쉬자.)
  소나 말을 하나도 팔지 못하였는데 점심때가 돼버렸다. 길수는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지면서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점심 먹으러 가면서 병수와 철규에게 부탁했다.
  “소와 말을 잘 지켜라. 이 놈의 소장마당은 생사람 눈을 빼먹는 곳이야.”
  "네?"
 철규는 눈이 데꾼해지었다.
 병수는  “예, 예.” 하고 꿉썩거리었다.
 그러나 천진한 철규는 핼끔핼끔 길수의 눈치를 보면서 소고삐로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두덜거렸다.
  “배고픈데 소만 지키라고?”
  “요놈새끼, 뭐라고? 소만 잃어버려 봐라. 네 놈 목을 쑥 뽑아버리겠다.”
  길수는 을러메고 나서 자위대원들을 끌고 가버렸다. 그는 점심도 점심이거니와 우시장 기생집의 옥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장터에는 병수와 철규만 남아 배를 촐촐 굶으면서 소와 말을 지켰다.
  철규는너무 배고파 배를 끌어안고 수척한 얼굴마저 찡그리었다.
  병수는 보다 못해 소고삐를 철규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내 가서 기름떡을 얻어와야겠다. 소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어라. 소를 잃어버리는 날엔 우린 죽은 목숨이다.”
  “예. 알았습구마.”
  병수가 떠나간 후 비단솜옷을 입은 한 부자가 다가와 수소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철규에게 물었다.
  “얘, 소 주인은 어데 갔냐?”
  “점심 먹으러 갔습구마.”
  부자는 소를 사지 못해 아쉬운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규는 배고파 병수가 간 쪽만 바라보면서 부자가 자꾸 묻는 것마저 시끄러워 했다.
  그런데도 그 부자는 살진 수소가 욕심나 빙빙 맴돌면서 자꾸 물었다.
  “얘, 네 주인이 이 소를 얼마에 판다더냐?”
  “한 백 원에 판다던데.”
  비싸게 말해 부자를 쫓아 보낼 속셈이었다.
  “오, 너무 비싸구나. 주인이 어데 갔냐?”
  부자는 주인을 찾아낼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철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말뚝의 소고삐를 슬슬 풀었다.
  “왜 이럽둥?”
  “요 망할 놈 새끼! 입 다물지 못할까?”
  부자는 자기 팔에 매달린 철규를 탁 밀쳤다.
  “이게 누구 손지 알고 이럽둥?”
  “누구 소냐?”
  부자는 소고삐를 풀던 손을 주춤 멈추더니 철규 쪽에 살진 낯을 돌렸다.
  “우시장 자위대장 한길수네 소입구마.”
  “엉?!”
  악명 높은 한길수의 소라고 하자 부자는 잔등에 식은땀을 쪽 흘렸다. 그러나 어린 애밖에 없다는 현실에 다시 도둑놈의 침착성을 되찾았다.
  “에끼, 이 놈 새끼, 한대장은 내 잘 안다. 겁낼게 뭐냐?”
  부자는 살진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위를 슬슬 살폈다.
  “야, 이 놈아, 주인이 백 원에 판다는데 좀 눅게 팔면 안 되겠니?”
  “내 어찌 소를 팝둥?”
 철규는 이런 생각이 피뜩 떠올랐다.
 (저 놈 소를 제꺽 눅게 팔아 엄마 병을 치료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철규는 발딱 일어났다.
  “한 50원에 사겠습둥?”
  “그럼 오죽 좋겠느냐? 그런데 서울깍쟁이도 울고 갈 한영감이 그렇게 눅게 팔겠냐?”
  “내게 50원 내놓고 소를 풀어 갑소.”
  부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웬 떡이냐?)
  부자는 동전을 스무나문 잎 꺼내 대충 세는 척하다가 돈주머니에 넣어 철규에게 주고 소고삐를 풀려고 했다.
  철규는 돈주머니를 제꺽 호주머니에 넣고 다급히 소 고삐를 잡았다.
  “이보소. 우리 주인 오기 전엔 소를 풀어가지 못합구마.”
  “이 자식, 왜 이래?”
  “안 됩구마. 못 갑구마.”
  숱한 장군들이 이쪽을 눈길을 보냈다.
  철규가 소고삐를 놓지 않자 부자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철규가 잡은 소고삐를 썩 뚝 잘라 버리고 소를 몰고 달아났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어디로 가?! 우리 주인에게 어디 혼나 봐라!”
  철규가 소리 칠수록 부자는 고삐로 소잔등을 쨩쨩 치면서 부랴부랴 장마당을 떠나갔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는척하면서 장마당을 벗어났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도 사람이 보이지 않자 뉘 집 동쪽의 재무지에 덮인 눈 속에 동전을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장마당으로 달아 왔다.
   그제야 장마당에 병수가 돌아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름떡 한 장을 내밀면서 황급히 철규에게 물었다.
   “수소 한 마리는 어쨌느냐?”
  철규는 기름떡을 뜯어먹으면서 병수의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
  “어떤 부자가 빼앗아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야, 이놈 새끼, 이걸 어찌니? 우린 목이 날아났다.”
 병수는 목을 매만지면서 풀썩 물앉았다.
  “겁도 많기도 많습구마.”
  철규는 병수의 귀에 대고 쏘근거렸다.
  그러나 병수는 질겁해 물앉은 채 와들와들 떨었다.
  “개소릴 치지 말라. 그러고도 살아 남을 거 같니? 난 도망갈 테다.”
   병수는 진짜 장마당에서 달아나 어디론가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철규는 말뚝에 매지 않은 나머지 소 한 마리의 고삐와 부자의 비수에 썩 뚝 잘린 소고삐를 한손에 쥐고 한손으로는 눈을 싸쥐고 머리를 숙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한참 후에 기생집에서 실컷 논 한길수가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장마당에 나타났다.
  그는 철규의 모양을 보고 우스워하면서 소와 말을 세여 보았다.
  “아니, 요 놈 새끼야, 소는 어찌 하고 눈을 싸쥐고 앉아 있느냐?”
  그제야 철규는 눈을 싸쥔 채 일어나면서 종알거렸다.
   “주인님, 생사람 눈을 빼먹는 세상이라기에 눈을 싸쥐고 있습구마.”
  “요놈새끼, 소는 어쩌구 빈 소 고삐를 쥐고 있니?"
  한길수는 불그락푸르락 해 세길네길 뛰며 고함쳤다.
  "소를 어쨌니? 엉? 요놈 새끼, 가죽을 벗겨놓지 않는가 봐라.”
  철규는 한길수의 독기서린 외눈깔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병수 삼촌의 말대로 소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었으니 그렇지. 안 그럼 나머지 소도 잃어버릴 줄 압소.”
  “에끼, 요 놈 새끼, 주둥이만 까진 놈 새낄 어쩌겠니?”
  길수는 철규를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면서 발길로 걷어찼다.
  그때 장군들이 몰려 왔다.
  “어떤 뚱뚱한 부자가 와서 소를 빼앗아 갔습구마.” 
  철규는 발길에 채워 대굴대굴 굴면서도 익살을 피웠다.
  “옳습구마. 내 그 뚱뚱보를 말리면서 소고삐를 놓지 않으니 비수로 소고삐를 베 버리구 소를 끌고 달아났습구마. 아이고, 그놈을 쫓아가면서 소를 놔라고 했는뎁슈. 더 따라오면 비수로 찍어죽이겠다고 을러메지 않겠습둥? 난 나머지 마소를 잃어버릴 가봐  장마당에 되달아 왔댔습구마.”
   철규는 속으로 병수 삼촌과 함께 달아나지 않은 것을 못내 후회했다.
   “요놈새끼야, 병수는 어데 갔니?!”
  똘만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길수에게 의문을 들이댔다.
  “혹시 그 놈이 소를 풀어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엉? 그래, 빨리 자전거를 타고 그 놈을 당장 붙잡아라. 소를 끌고 멀리는 가지 못했을 거야!”
  “예!”
  한길수는 자위대원들을 보내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똘만을 불러 세웠다.
  “헌병대에 돌아가 넌 오토바이를 타고 큰 길을 따라 쫓아가라.”
  “예. 알았습구마.”
  땅딸보 똘만은 자전거에 뛰어올라 부랴부랴 우시장 경찰국 사무청사 쪽으로 달려갔다.
  철규는 집에 돌아가 혼 낼 궁리를 하면서 길수는 먼저 자위대에 헌병대까지 동원해 수소와 병수부터 찾아내자고 날뛰었다.
  한참 후에 똘만과 자위대원이 장마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주인님, 소를 찾았습구마.”
  길수는 우멍 눈의 주름살이 쫙 펴졌다.
  “그래? 병수는?”
  똘만은 땀을 훔치면서 도리멀리 질 했다.
  “찾지 못했습구마. 명천에 사는 놈이 둥글 소를 끌고 큰길로 돌아가는 걸 헌병대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가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말이 어린 애에게서 소를 50원에 사갔다고 합더구마.”
   “뭐라고? 그럼 병수가 도둑질 한 게 아니란 말이지?”
   순간 길수는 의심에 가득 찬 외눈깔박이로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철규를 내려다보았다.
  “요놈새끼, 소를 팔았단 말인가?”
  그러자 철규는 핼끔 길수를 쳐다보더니 쿨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억울하게 굴지 맙소. 소도적놈이 철부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도 모릅둥?”
  그때 옆에서 구경하며 장을 보던 사나이가 끼어들었다.
  “아까 보니까 확실히 비수로 고삐를 베면서 위협합디다.”
  “그러잖고. 어린 애가 비수를 휘두르는 도적놈을 어찌 하겠소?”
  길수는 뭔가 짐작됐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좌우간 요 놈 새끼하구 소를 끌고 가던 놈을 경찰국에 가서 삼조대면시키자. 모든 게 드러날게 아니냐? 둥글소를 끌고 간 놈은 어데 있냐?”
  똘만은 자전거를 장마당 눈 바닥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가메다 헌병소대장이 둥글 소와 함께 경찰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음, 잘 됐다.”
  길수는 쾌자를 부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이젠 둥글소는 잃어버렸구나.”
   똘만은 중절모자를 벗어 쥐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는 주인의 번들 이마를 응시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경찰국 울안에는 소도적보다 더 무서운 날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걸 모르느냐? 아, 아냐?”
  길수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더니 혀끝을 감빨면서 누가 듣지 않았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넌 자위대원 몇을 데리고 나머지 마소들을 집에 몰아가라. 못 팔면 못 팔았지. 일본 사람들에게 몽땅 먹히겠다.”
  그제야 대장의 말속의 말을 알았는지 똘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소고삐를 말뚝에서 풀었다.
  “쥐에게 먹혀서는 아깝지만 고양이에게 쌀을 먹여선 아깝지 않다는데 난 쥐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다 아깝다. 아까워. 내가 어떻게 긁  어모은 재산이냐?”
  “예, 안 됐습구마. 꼭 실수 없이 마소를 집에 끌고 가겠습구마.”
  “장마당에 왔다가 둥글 소도 잃어먹고 병수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놈은 어디로 갔을까?”
  길수는 이를 악물고 자위대월들 서넛과 함께 철규를 끌고 경찰국 사무 청사 울 안으로 갔다.
  벌건 벽돌토성을 두른 울안에 들어가자 검정 비단솜옷을 입은 뚱뚱한자가 둥글 소와 함께 늙은 느티나무 아래 묶여 있는 것이 우멍 눈에 안겨왔다.
  한길수의 눈에 시뻘건 불티가 마구 튕겼다.
  “이 놈 새낀가?”
  그는 똘만에게 물으면서 뚱뚱한 부자한테로 다가갔다.
  “아니, 왜 이럽니까? 난 그 집 소를 샀을 뿐인데.”
  부자의 말에 길수는 우멍 눈으로 뒤에 머리를 숙이고 끌려오는 철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요 놈 새끼, 이 놈 새끼 맞니?”
  “예.”
  철규는 부자를 보자 머리부터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부자는 철규를 보자 망망한 대해에서 지푸라기라도 만난 듯이 허우적거렸다.
  “난 저 애에게 50원을 주고 샀습구마.”
  철규는 입이 뽀로통해지더니 도도거렸다.
  “난 돈을 받은 적도 없습구마. 자위대 한대장네 소라면서 빼앗아 가지 말라구 했는데  저 부자놈이 비수로 나를 위협하면서 소 고삐까지 잘라놓고 소를 끌고 달아났댔습구마. 어린애라고 깔보구 거짓말 작작 합소.”
  부자는 눈을 뚝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죄꼬만 새끼, 경찰국에서 나가기만 해라. 네놈 대갈통을 잘라버릴테다.”
  한길수는 부자의 귀쌈을 찰싹찰싹 갈기면서 욕했다.
  “이 죽일 놈 새끼, 네가 감히 내 소를 빼앗아가? 비수로 소고삐를 자르고 어린애라고 업신여겨 비수로 위협까지 했다지? 개를 쳐도 주인을 보고 쳐라. 이놈, 어디 죽어봐라.”
  부자는 철규에게서 소를 눅게 사가려다가 헌병대에 잡혀 한길수에게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았다.
  길수는 도적놈은 붙잡았지만 둥글소를 헌병대에 빼앗기고 말았다. 끼무라 국장이 잃어버렸던 둥글 소를 잃어버린 셈 치고 헌병대에서 잡아먹게 선물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깍쟁이 한길수는 소를 잃고 병수마저 사라져 속을 끙끙 앓았다.


        11. 뜻밖의 상봉


  사실 병수는 점심 때 우시장에 있는 길수의 집에 가서 은녀를 만나 기름떡을 얻어가지고 장마당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은녀는 병수에게서 아버지가 아들딸 근심에 속을 태우다가 기막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고, 우리 아버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시름시름 앓더니 이렇게 불쌍하게 돌아가시다니. 아이고, 내 아버지, 불쌍한 내 아버지, 흐 흐 흑, 흑 흑.”
   은녀는 대성통곡하면서 “아버지 장례에 가겠어요.” 하고 길수에게 사정했다.
  한길수는 소를 잃어버렸는데 은녀마저 달아날까 봐 근심됐다.
  “가긴 어디로 가? 네년이 가면 우리 집 밥은 누가 해?”
  은녀는 한길수 앞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아버지 마지막 길을 바래드리게 보내 줍소. 제발, 주인님.”
  인정머리라곤 꼬물만치도 없는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성대문을 나서더니 기생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 장례에도 가지 못한 은녀는 더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달밤에 그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월선의 호령에 못 이겨 물동이를 팔에 끼고 물을 길으러 비칠비칠 걸어갔다.
  (아버지 폐병치료에 일전 한 푼 돕지 못하고 장례에도 가지 못할 바엔 아예 죽는 게 낫지. 상호도 종무소식이고 은희마저 한 영감의 영월동 집에 머슴으로 끌려갔다지. 뭘 보고 이 세상에서 산단 말인가?)
  철렁!
  드레박이 우물에 떨어지면서 죽음의 비명소리를 질렀다.
  순간 은녀는 드레박처럼 우물에 철렁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 나겠는 걸 하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은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더니 우물 틀 우에 간신히 올라섰다.
  그녀는 얼음 쪼각 같은 눈썹달을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느님이시여, 아버지와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는 불효녀를 용서해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은녀는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 때다.
  순간 뒤에서 꺽쇠 같은 팔이 은녀를 꽉 끌어안아 우물 틀 우에서 내리웠다.
  가슴을 할딱이던 은녀는 자기를 안아 내리운 마차몰이군 병수의 거머틱틱한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었다.
  병수는 소를 잃어버리자 장마당에서 도망쳐 우시장 경찰국 뒷산 수림 속에 가서 동정을 살피면서 숨어있었다. 그는 뒷산 수림 속에서 똘만이가 자전거를 타고 경찰국 울안에 달려 들어오고 헌병대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눈보라를 흩날리면서 달려 나가는 것을 다 보았다.
   한참 후에 경찰국 대문 안에 뚱뚱보와 소가 들어오고 한길수가 똘만이 등 자위대원들과 함께 철규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묶인 뚱뚱보를 때리며 심문하고 철규는 묶이지 않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 철규 말처럼 소를 빼앗긴 걸까?)
  그러나 병수는 소를 잃어버렸기에 악마 같은 한길수에게 죽을지 살지 몰라 영월동에 돌아가지 못했다.
  병수는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자 산속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허기증을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서성거리면서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혹시 은녀 뒤를 밟는 자가 있을까봐 사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우물터에 머리를 돌리는 순간 물을 길으러 온 은녀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달려가 은녀를 안아 내리우지 않았더라면 은녀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길수는 이전에는 득호나 마을사람들을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는 척 하였지만 지금은 일본 놈들에게서 강도행세를 배워가지고 아예 일전 한푼 주지도 않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은녀나 은희나 일전 한푼 받지 못하고 여종으로 뼈가 물러나도록 일했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셨지만 딸로서 일전 한푼 치료비로 보태주지 못한 은녀와 은희의 아픈 마음이야 이루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 바에야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병수는 은녀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 얘기를 듣고 말리였다.
  “은녀, 죽어서는 안 돼. 우린 지금 아무것도 없이 힘들게 살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나가야 하오.”
   은녀는 우물 턱에 기댄 채 맥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길수 물이나 긷자구 살라오?”
   “집엔 엄마와 은희, 상호가 있지 않소?”
  그제야 은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 후~ 내 쉬었다.
  “오빠는 어떻게 돼 여기 왔소?”
  병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낮에 장마당에서 있은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녁도 못 잡쉈겠구먼. 내 물을 길어가지고 갔다가 올게.”
  병수는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쏟아 붓네 하고 안아 한길수의 집 쪽으로 들어다주었다.
  “됐소. 괜히 자위대에 들키겠소. 어서 우물에 가서 기다리오.”
  은녀 말에 병수는 은녀의 머리 우에 물동이를 올려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으로 비칠비칠 토성에 난 대문 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걸어 들어가는 은희의 뒷모습이 불쌍했다.
  한참 후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우물터에 나타났다.
  은녀는 물동이 안에 주먹밥과 누룽지 그리고 기름떡까지 넣어 왔다. 그것으로도 며칠은 먹을 것 같았다.
  “배고프겠는데 어서 잡숫소.”
  훤칠하게 생긴 병수는 기름떡을 먹으면서 말했다.
  “금방 은녀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소. 여기서 종살이를 한뉘 할게면 우리 간도로 달아날까?”
  뜻밖의 말에 은희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반신반의했다.
  “만주로 간다고 잘 살겠소? 엄마와 은희랑 어찌 하고? 들키는 날엔 한길수가 잡아먹자고 할게오.”
  병수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달아났다고 어쩔 거 같소? 상호가 달아나도 어쨌소? 은희를 부려 먹으려고 어쩌지 못하오.”
  은녀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손에 쥔 게 없이 산 설고 낯선 간도에 갔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겠소. 가지 말기요. 이 추운 겨울에 간도로 갔다가 얼어 죽겠소.”
  병수는 은녀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말했다.
  “나를 믿소. 우린 아직 젊소. 간도에 가서 우리 함께 잘 살아 보기요.”
  은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희읍스름한 달빛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병수의 길쭉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사람일 게요. 구명은인 오빠를 따라 이 놈 지옥에서 훌 달아났으면 좋겠소.”
  병수는 은녀를 꼭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어서 집에 들어가 옷이랑 먹을 걸 물동이에 넣어가지고 나오오.”
  “알았소. 내 인차 갔다가 나올게.”
  병수는 우물터와 좀 떨어진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숨어 우물터에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은녀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우물터에 나타났다.
  병수와 은녀는 골목에 들어가 옷을 보에 싸안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골목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은희는 병수를 따라 눈길로 달아나면서 말했다.
  “오빠, 금방 집에 돌아가니까 한영감이 ‘잃어버린 소를 찾았는데 병수를 잃어버려 큰일 났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 개소리를 믿어. 나를 한뉘 마차몰이꾼으로 부려 먹자는 게지.”
  병수는 은녀의 손을 잡고 더 빨리 달으면서 물었다.
  “철규는 무사하오?”
  은희는 숨이 차 할딱거리면서 대답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매를 맞았습니다. 영팔이랑 죽여 버리자고 하니까 누가 소를 먹이겠는가 하면서 철규를 잡아두고 덕팔이 삼촌이랑 잡자고 합데.”
   병수는 닫다가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다. 이대로 달아나지 말구 한영감 집에 불이라도 콱 싸질러 놓을 거 그랬다.”
  은희는 병수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두오. 헌병들이랑 자위대원들이랑 욱실거리는데 붙잡히겠소.”
  병수는 우시장 저 멀리 한길수의 집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은녀의 손을 잡고 다시 달아났다.
  은녀는 달아나면서도 속으로 고향마을에 있는 엄마와 은희가 근심됐다.
  (엄마랑 무사한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같이 간도로 달아나자고 해야지)
  한편 은희는 고향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를 뒷산 기슭에 장례지낸 후 날마다 악몽 속에서 허덕이었다.
  은희는 심란한 김에 이날 밤에도 내일 밥을 지을 물을 더 길으려고 일어나 몸채 부엌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 더듬으로 물동이를 더듬어 팔에 끼였다.
  “누구야!”
 위방 밀창문이 열리면서 한길수가 반쯤 몸뚱이를 일으키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은희예요.”
  “이 밤중에 뭘 떨꺽거리느냐? 잠을 깨우면서 성가시게. 에이 참.”
  “물을 긷자고 그래요.”
  “음, 알았다. 내일부턴 우리 잘 때 떨꺽거리자 말아라.”
  탁 미닫이문이 닫기는 소리 나고 두덜거리는 소리와 도도고리는 소리가 엇바꿔 들리었다.
  은희는 머리채를 뒤로 젖히고 물동이를 팔에 끼고 바깥으로 조심조심 나왔다. 그러나 연 며칠 자위대원을 시켜 은희 뒤를 밟게 해보아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자 월선이도 심드렁해져 오늘은 미행을 그만두게 했다.
  그녀는 희읍스름한 달빛과 눈을 사뿐사뿐 밟으면서 골짜기 막치기에 있는 우물가에 다가갔다. 가을바람에 나무들이 무섭게 비명을 질러 공포를 자아냈다.
  우물가에서 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푸려고 바가지를 우물에 넣던 은희는 처량한 반달이 비껴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할 바에는 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모든 게 끝이겠는데.)
  그런데 샘물에 비낀 달 옆에 총총 박힌 뭇별들이 차디찬 샘물에 잠겨 추위에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몇 해 전 여름에 은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우물가에서 성칠 오빠가 은녀의 눈을 두 손으로 싸쥐고 누군가 알아 맞추라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때 오빠는 은녀가 떠준 샘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시원하다고 하면서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지. 호, 오빠, 이젠 다시 볼 것 같지 않소. 성칠 오빠, 상호는 지금 어데 있소?”
   어려울 때마다 자기네 일가를 도와 나서던 성칠 오빠가 이 순간 더욱 그리웠다. 기실 성칠과 은희는 열대여섯 살이나 차 있기에 기실 삼촌 벌이 됐지만 어려서부터 성칠이 그렇게 습관을 시켜 은녀나 은희나 다 오빠라고 불렀고 상호는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은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흑흑 흐느껴 울면서 바가지로 우물속의 달과 별들이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동이에 담았다.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이 점점 물동이 아구리 쪽으로 올라와 차 넘쳤다.
   은희가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의 우에 바가지를 동동 띄워놓고 물동이를 이려고 할 때였다.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났다.
  은희가 머리를 돌려보니 골짜기에서 난데없는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아니, 검둥아, 네가 어떻게 돼 왔니?”
  검둥이는 은희의 치맛자락을 물어 당기더니 끼깅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뒤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은희 아니냐?” 
  나직한 부름소리가 들리었다.
  (아니, 이게 성칠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은희는 자기 앞에 두 사내가 달 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상호!”
  은희는 놀라 풀렁 물앉았다.
  “쉿~”
  상호가 식지를 입에 대면서 은희를 안아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성칠 오빠가 서있지 않는가?
  은희는 대번에 상호오빠의 품에 와락 안기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정말 왔구먼. 이게 꿈이요, 생시요?”
  “그래 이건 생시요.”
   상호는 은희의 파도치는 어깨를 다독이면서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샘물터에 오면 너를 만날 거 같아 여기 왔다.”
  은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칠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은희는 상호의 품에 안기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쳐댔다.
  “어데 갔다 이제야 왔니?”
  “사냥하러 갔지.”
  은희는 여기저기 살피면서 서있는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사라진 후 저 한길수가 오빠네 집을 빼앗아 림산파출소라는 걸 들여앉히고 일본 헌병들이 들어 살고 있소.”
  “그랬니? 여긴 얘기하기 위험하니깐. 저쪽 숲 속으로 가자.”
  성칠은 물동이를 안고 상호네 오누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그간 한길수란 놈은 별의별 악독한 짓을 다했소. 흐 흑 흑.”
  은희에게서 그간 고향마을에 있은 일들을 죽 들은 성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
  성칠은 은희에게서 한길수의 영월동 토성안집의 형편도 묻고 나서 말했다.
  “넌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안에 들어가라. 그 다음 철규와 함께 이렇게 해라.”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예~ 알았소. 그렇게 할게.”
  은희는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아 이고 허연 눈 위에 깔린 희읍스름한 달빛을 밟으면서 토성 안 집 쪽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성칠과 상호가 우물터 옆 소나무숲속에서 보복행동계획대로 손을 쓸 준비를 다그칠 때다.
  우물터 아래쪽에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들리었다.
  “쉿!”
  소나무숲 속에서 성칠이 입에 식지를 가져다대면서 허리춤에서 모젤권총을 쓱 뺐다. 상호는 시퍼런 비수를 빼들었다.
  저쪽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계속 걸어오면서 도란도란 말까지 했다.
  “은희는 늘 저녁에 여기로 물 길으러 올게오.”
  “글쎄 말이오. 한길수나 영팔이나 이렇게 추운 날에 여기로 오겠소?”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호는 성칠에게 다가서면서 “어째 은녀 누나 목소리 같소.” 하고 나직이 말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샘물터에 눈길을 돌렸다.
  두 검은 그림자가 샘물터에 가까워 올수록 여자의 목소리는 더 똑똑히 들리었다.
  “여기서 은희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소?”
  남자가 하는 말소리.
  “은희를 만나 고향 마을 정황을 안 후 엄마를 만나는 게 옳소.”
  분명 은녀의 목소리 아니겠는가.
  상호는 성칠에게 “은녀 누나요." 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칠은 상호의 팔을 걷잡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휴-휴-
  소나무가 설레는 소리 밖에 다른 동태가 없었다.
  “나가봐라. 옆의 사내를 주의해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소나무 숲에서 나가면서 조용히 불렀다.
  “누나, 은녀 누나.”
  “엇, 누나라니?”
  다가오던 남녀가 주춤 멈춰서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누나, 상호요.”
  “뭐라고? 상호?”
  은녀는 품에 안았던 보꾸러미를 툭 떨어뜨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은녀와 상호는 달려 나가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 선 사내도 다가왔다.
  “누구요?”
  그러자 저쪽 사내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상호야, 난 병수다.”
  성칠도 슬금슬금 소나무숲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면서 나갔다.
  “저건 누구냐?”
  은녀의 물음에 상호가 나직이 대답했다.
  “성칠 형님이오.”
  “오빠라고? 오빠가 살아 있어?”
  “그래, 난 살아있다.”
  성칠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은녀와 병수를 일일이 손잡아주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고생했니?”
  은녀는 너무 기쁨과 설음에 마음이 설레어 떨어뜨린 보꾸러미를 주어 안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말했다.
  “됐다, 금방 은희도 여기 왔다가 갔다.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소나무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
  뜻밖에 상봉한 그들은 소나무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간 서로들 있은 이야기를 했다.
 성칠은 은녀와 병수  말을 듣고 나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간도로 무턱 대고 어떻게 간다고 그래?”
  병수는 초신 감발한 발로 소나무 밑 둥을 탁 걷어차면서 성칠을 보고 물었다.
  “간도에 가지 않으면 여기서 어떻게 사오?”
  “우리 독립군에 들어가야 산다.”
  “독립군에?”
  병수는 놀란 나머지 소나무 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성칠이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둘러보자 병수가 물었다.
  “형님과 상호랑 독립군에 들어갔소?”
  “그래. 너희들도 독립군에 들어가 총을 쥐고 일본 놈들과 한길수 같은 개다리들을 이 고향에서 몰아내야 잘 살 수 있다.”
  은녀는 소스러치 듯 놀라했다.
  “상호야, 너도 독립군이냐?”
  상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생각 밖으로 은녀는 상호의 손으로 잔등을 톡톡 쳤다.
  “참 장하다! 우리 철천지원수 한길수를 처단해 우리 원수를 갚아라!”
  이윽고 병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몰이군도 독립군에서 받아주면 들겠소. 그런데 은녀랑 은희랑은 고향마을에 둘 수 없소. 한뉘 어떻게 한길수의 종살이를 하게 내  버려두겠소? 여자들도 독립군에서 받았으면 좋겠는데.”
  성칠은 선뜻이 대답했다.
  “독립군에 들어오라. 독립군에도 여자대원이 할 일이 가득하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총도 쏴야지.”
  성칠은 은녀에게 물었다.
  “독립군 소대장 진달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니?” 
  은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소. 그 돌멩이를 잘 뿌리는 처녀장군 말이 아니오?”
  “맞다. 지난 번에도 나를 구할 때 돌멩이로 일본 놈과 자위대 놈들을 여럿을 까 눕혔다.”
  “나도 진달래 언니처럼 독리군 여대원이 되겠소.”
  성칠은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좋다. 우리 힘을 합쳐 우리 고향마을에서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같은 일본 놈들을 몰아내자. 원수를 꼭 갚고야 말자.”
   뒤이어 그들은 성칠의 영솔 하에 은희가 알려 준대로 엄창렬의 산소로 떠나갔다. 그들은 눈이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뒷산 비탈로 올라갔다.
  한참 후 아버지 산소에 이르자 상호와 은녀는 아버지 산소에 절을 세 번 올리고 나서 풀쩍 엎드려 엉엉 통곡 쳤다.
  성칠이 다가가 은녀와 상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눈보라를 무릅쓰고 담대하게도 은녀의 집으로 내려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쳤다.
   한길수나 응삼이 지어 야마모도소장도 이 눈보라치는 야밤삼경에 성칠과 상호 그리고 은녀와 병수가 이 마을에 숨어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긴 반년 넘어 영월동의 성칠과 덕팔, 동욱, 상호네 집에 넓은 그물을 치고 밤낮없이 지켰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놈들은 겨울에 접어들자 몇 달째 경계가 허술해졌던 것이다.
   한편 야밤삼경에 명순은 은녀와 이태 남짓이 사라졌던 상호를 꿈결에서처럼 만나자 부둥켜안고 엉엉 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는 성칠은 그들 삼모녀의 통곡소리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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