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만 해도 문학은 수많은 조선족청소년들의 꿈이였다. 1975년 6월, 조양공사 방송소에는 한 고중생이 견습기자로 들어섰다. 그가 바로 조양공사 5.7중학교 고중문학반의 문학에 각별한 애호를 가진 문학청소년,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김장혁이라는 학생이였다.
김장혁은 김진산선생의 지도하에 학교작문써클에서 활동하는 한편 짤막한 신문보도와 학생작문을 써서 연변인민방송국과 연변일보에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고중을 졸업하던 1976년에는 대학입시가 없었기에 농촌에 내려가 소몰이군을 해야 했다. 그때 그는 조양공사 문화소 소장인 김재권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많은 소설책을 읽으면서 문학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민담정리와 소설창작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밭일을 나갈 때에도 소설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쉼시간이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을 멀찍이 떨어져 물도랑 옆이거나 논두렁 아래에 누워 소설책을 열심히 읽었다. 소방목 할 때면 항상 책을 가지고 가서 소를 산이나 강가에 몰아놓고 소설책을 읽군 하였다. 문학에 뜻을 둔 청소년은 소궁둥이를 치는 자기 신세 너무 쓸쓸하고 답답하면 산에 올라가 소몰이를 하면서 한 많은 사래긴 밭을 내려다보며 쓸쓸히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책을 놓지 않고 탐독하였다. 그리하여 "농촌에 뿌리 박을 생각을 하지 않는 "책벌레"로 빈하중농들의 눈에 나기도 하였다. "독서무용론"이 살판치거나 "더러운 아홉째(지식분자를 홀대하던 말)를 비판하던" 당시 세상형편도 문학의 꿈을 꾸던 한 청소년의 독서와 창작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대학에서문학을배우고 중학교에서문학을가르치다
그 이듬해 대학입시가 회복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입시복습을 하려하였지만 생산대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그는 교하현에 시집간 큰누나네 집에 가서 숨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진학하였고 그 시절 그의 꿈은 대학을 졸업한 후 현문화관에 들어 마음껏 문학창작을 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룡정중학교에 배치받아 조선어문 교원으로 되여 거의 절망상태에 빠진 그를 보고 룡정시문련 주석으로 사업하던 김재권 선생이 그에게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문학창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힘과 용기를 주었다.
계몽스승님들을 모시고 문학창작을 시작
손바닥만한 조양천에 비하면 룡정은 큰 도시였고 그때만 해도 룡정시 문화관 창작실의 김재권, 리태수, 황병락 등 연변에서 꽤 유명한 작가들과 문학애호가들이 많았다. 김장혁은 그들을 따라 ‘보름회’라는 문학단체에 다니면서 문학창작수업을 하였다.
그는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수많은 조선족할아버지들의 이민사와 그들이 일제 통치하에서 정든 고향을 떠나 신음하며 살아온 피 눈물 나는 이야기, 항일투사들의 피어린 투쟁사 그리고 해방 후 당의 영명한 령도하에 눈리는 행복한 생활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아마 김장혁 작가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는 용기를 내여 1980년대 초에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힘든 교원사업보다도 당시 대하소설 출판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저울질하면서 약 55만자가량 쓰고 필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작가의길을걷다
그가 마음껏 창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연변인민방송국의 기자와 연변인민출판사의 편집사업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동안 그는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와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를 출간하였고 그후 문학작품집 《사랑환상곡》, 《사랑은 요술쟁이야》와 실화집 《빨간 장미꽃 함정》과 중편과학환상소설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모험기>,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 중편소설 <애인바람>, <무덤으로 향한 참사랑> 등 300여편의 중단편소설과 동화, 수필, 실화를 발표하였다.
《로년세계》잡지주필시절.
그의 말을 빈다면 아동문학창작을 하게 된 계기는 그가 연변인민출판사 《소년아동》잡지와 《별나라》잡지 련합편집부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였다. 그 시기 그는 아동문학 작품집 《호랑이와 사냥꾼》과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를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으면서 “성인문학 작가가 아동문학창작을 잘 할 수 없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잠재웠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문학창작에서 신심을 얻은 김장혁은 20여년 전에 접어두었던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창작을 다시 조용하게 꺼내들었다.
그는 장황한 미사려구에 기댄 문학성보다도 그저 백성들이 재미있게 즐겨 읽는 통속적인 소설을 창작하는데로 방향을 잡았다.
독자와문단의인정을받다
“독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평론가들이다. 문학이 텅 빈 내용으로 장황한 미사려구나 음풍영월을 늘어놓으면 인민성을 떠나고 사실주의를 떠나게 되여 생명력이 없어 질 것이다.” 이는 김장혁 작가가 늘 하는 말이다.
지난 9월 16일에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77학번 동창회의 주최로 연길시 한성호텔 커피숍에서 개최된 <김장혁소설문학좌담회> 에서 문학평론가 김룡운은 다산작가 김장혁의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은 ‘대 서사시’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번 좌담회에서 김장혁작가의 작품들에 대해 “년대기식 대하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한 세대를 새롭게 조명했다.”, “허구적인 인물을 통하여 시대적 인물을 재조명했다.”, “정착의식, 망향의식, 주인공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장혁 작가가 근 40년 시간을 들여 창작한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중국으로 온 고난의 이민사, 당의 령도하에 형제 민족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운 감동적인 항일투쟁사 및 토비숙청, 토지개혁, 항미원조, 사회주의 건설시기와 개혁개방시기 등 부동한 시기를 반영했을 뿐만아니라 해방후 이 땅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고 반우파투쟁, 대약진 등 정치운동, 개혁개방이후의 민족 대이동까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 서사시’라는 평을 받는 동시에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대하소설이라는 평을 받는다.
제1회두만강수필문학상을수상하고
작가의 꿈을 가졌던 당돌하고 끈질긴 문학소년 김장혁은 대학을 졸업하고 선후하여 중학교 교원, 방송국 기자, 출판사 편집을 거쳐 편심으로 정년퇴직하는 비교적 원만한 인생행로에서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총 4권),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 7권), 3부작 대하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중문), 장편정탐실화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 수필집 《리별》, 아동문학작품집 《호랑이와 사냥군》, 문학작품집 《사랑환상곡》 등 저서 20여권을 펴냈다. 백두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전국소수민족아동문학작품우수상 등을 30여차 수상하면서 문단과 독자들의 인정을 받는 실력파 작가로 성장하면서 작가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여기까지가 아니다.
꿈에이어사명을다할터
“작가의 평생 사명은 창작이다.” 작가로 되는 꿈은 이루었지만 사명을 끝까지 하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요즘 그는 새로운 혼인 풍속도를 그린 장편소설 《졸혼》(총 6권)을 창작하여 인터넷에 련재하고 있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이다. 현시대 중, 로년들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생활상을 그린 이 작품은 온라인에서 꽤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단편으로 시작했다가 중편으로 넘어갔고 다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응원에 힘입어 현재 계속 6권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은 온라인시대이다. 출판여부를 떠나 댓글을 통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념두에 두면서 창작하고 있다. 네티즌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창작방향을 수정하는 것 또한 작가의 즐거운 경험이다. 오직 독자들에게 작품으로 인정되여야 오래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의 사명을 다해가는 김장혁 작가의 내심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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