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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실, , 민지사 1992
2009년 05월 16일 21시 25분  조회:1970  추천:0  작성자: 방룡남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개별 시인과 작가들에 대한 여구 이외에 첫째 주로 비교문학적 측면에서 외국의 문예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롤 고찰하는 방법, 둘째 문학사, 정신사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방법, 셋째 근대성과 모더니즘을 연결시킴으로써 30년대 모더니즘의 사회적 생산조건을 고찰하는 방법 등을 통해 연구되어 왔다.(13)

-한국 모더니즘이 영.미 이미지즘과 서구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그것의 원천이 되는 문예사조를 중심으로 영향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이해에 선행되어야 할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비교문학적 고찰은 작품의 원천을 중요시한 나머지 한국문학이 얼마나 정확하게 외국 문예사조를 수용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둠으로써 그 변용과 굴절을 폄하해 왔다. 주로 이론상의 허점이 보인다거나 서구문명의 피상적 노래, 시적 깊이의 결여, 경박성 등이 그 부정적 평가의 내용이다. 외국의 문학은 한국의 사회, 문학적 특징에 의해 굴절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미시적 비교로는 그 굴절의 원인과 타당성을 밝힐 수 없기에 모더니즘의 문학사적 위치는 부정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13-14)

-일제 강점기의 문학은 국가 상실시대의 문학으로서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로틱한 것에 대한 병적 열망에 기울고 그 결과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의식의 진공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상 등의 문학에 나타나는 권태는 바로 모더니즘의 이러한 한계를 노출한 것이다.(14-15)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은 시나 소설에서 기법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건설된 도시인 경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에 의하여 생산된 문학으로 규정된다. 서구 모더니즘을 배태시킨 파리, 런던, 베를린 등 도시화의 상황과는 다른 특수한 타율적 도시화의 상황이었기에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문학은 서구와 다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상시에 나타나는 자아는 민족적 주체가 붕괴된 상황에서  근대적 자아의 절망적 모습을 표상한다거나 박태원, 이상, 최명익 소설은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 과잉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상이 앓았던 결핵은 전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모성 질환이며 그의 작품이 근대 식민지 건축 교육의 제도적 장치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적 가공기술의 혁신과 언어의 세련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 문학에 당대 사회를 대비시킬 경우 리얼리즘 문학에 비해 현실반영의 문제에서 열등감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모더니즘 문학은 기껏해야 개인과 집단 사이의 분열을 묘사한 것이거나 소시민적 지식인의 자의식문학으로 낙착될 뿐이다. 더구나 근대 산업사회의 융성기에 생산되는 것이 모더니즘 문학인데 당시 한국의 사회상황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근대 식민지 경제로 왜곡되어 있었다. 이런 불완전한 산업사회에서 서구에 못지 않은 문학적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외면하고 서구문학에 탐닉해 들어간 댄디보이들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라도 모더니즘 문학이 우리 근대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양적, 질적 비중은 그것이 잘못된 문학이란 비난만으로 무시될 수 없이 큰 것이다. 따라서 이 비중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국 근대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접근법에 의해 그것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모더니즘이 과연 근대 산업사회만을 원인으로 해서 나타난 예술이론인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더니즘은 근대를 기반으로 해서 배태된 예술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매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성으로 사물의 보편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론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직접성의 인식론은 인간의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하므로 그것에는 형식예술에 대한 친근감이 내재해 있다. 그런데 형식예술은 모방해야 할 현실의 대상들이 없음으로 해서 소재로부터 자유로이 형식 그 자체의 순수한 유희를 즐기며 설령 대상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자극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재현한다. 모더지즘 예술이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외면한다거나 내용이 없다거나 하는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예술 특히 사회,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약속인 언어를 질료로 하는 문학이 그 역사, 사회적 토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이 배태된 원인을 시대상황에 지나치게 기대어 찾으려는 태도는 자신의 문학이론을 어떤 부정할 수 없는 실질적인 존재, 힘있는 것에 기댐으로써 손쉽게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일 수도 있다고 본다. 한 시대를 한 문학이론이 반영한다면 여러 문학이론이 대립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당연히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은 도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연히 존립하고 있는 모더니즘 미학이 갖고 있는 주관적 보편성을 산업사회의 몰락계급인 쁘띠 부르조아들이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서 자기 내부로 침잠하는 현상으로만 설명한다면 우리는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에 의하여 예술이 지니는 다양성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직접성의 인식론은 근대 부르조안만의 세계관이 아니었다.
 <특수성>의 미학범주를 가진 예술과 비교해 볼 때 <주관적 보편성>의 미학범주를 가진 예술이 어떤 특성을 갖는가를 고찰하여야 비로소 한국 모더니즘 문학은 그 문학사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토대가 미약하더라도 <주관적 보편성>의 미적 범주를 가진 예술은 정도의 차이를 두고 존속해 왔기 때문에 30년대 한국의 특수상황에 의해 이런 종류의 예술이 어떻게 굴절되었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더니즘의 범주를 너무 크게 잡은 감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서구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나타난 여러 문학양식들이 10여년만에 한꺼번에 이입됨으로써 생긴 한국 모더니즘의 혼재와 혼란의 와중에서 그 본질과 의의를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모더니즘의 특성인 선험적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은 이상 문학을 해명하는 관건이 된다.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근대건축술은 근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하나 또다른 면에서는 선험적 구상능력을 신봉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자의식 분열, 난해함 등은 식민지 지식인이란 시대상황에서 파악되어야 함과 동시에 미학적 방법론과 병해하여 고구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문학과 사회, 역사 또는 그것을 창조한 작가의 심리 혹은 계층의 심리에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면서도 정작 같은 범주에 드는 예술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1930년대 구인회는 연극, 영화에 종사하는 예술가들로 이루어졌으며 문학 동인들은 미술, 영화에 종사하는 예술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류는 사적 친밀감 정도로 문단 이면사에서 다루어지고 있을 뿐 예술 자체 내의 상관성은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확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논쟁중심의 평론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론을 찬반의 명확한 논리로 포착할 수 있는 프로문학에 비해 모더니즘 문학은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연구자들은 논리가 아니라 작품에서 상관성을 추출해야 하므로 선명한 논리의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상과 구본웅 등의 관계는 술좌석에서의 에피소드, 인척관계 등 사적 교류를 벗어날 수 없었다.(15-18)

-지금까지 심리주의소설은 의식의 흐름과 자동기술법 등 기법의 측면에서는 상세히 다루어졌으나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체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심리주의 소설이 종래 모더니즘의 합리적 직접성에 반발하여 직관적 직접성을 주장하는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이론에서 나왔음을 밝혀 이미지즘, 이상의 문학, 한국 심리소설을 <주관적 보편성>의 미적 범주로 묶어 넣은 후 순수지속의 상태로서 산책과 승차의 태마를 고찰하고 모더니즘의 시간개념을 밝혔다.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4차원성은 운동감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반하여 박태원의 소설에 나타나는 시간은 심리소설의 전형적 시간관념인 <지속적 현재>임을 밝혔다.(18)

-문학사를 하나의 양식사로 보려는 견해는 문학사서술의 보편적 방법중의 하나이다. <양식>의 개념은 예술사의 기초이자 핵심을 이루는데 이는 예술이 개인의 무의식적 충동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대립을 이룬다. 문학의 대상은 서술수법을 통해 형상을 얻은바, 이 문학의 기술수단을 '형상(Gestalt)'이란 개념으로 묶어 의미내용(Gehalt)에 대치시킨 것이 양식이다. 따라서 양식은 구조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217) 예컨대 음악에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멜로디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음조로 연주가 되어도 그 멜로디를 알아듣는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귀에 들리는 음 하나하나는 모두 변했지만 음조들이 상호 관련된 모습, 음조의 구조 자체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음의 구조, 그 형태적 특성의 기본형식이 바로 그 음악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식적 특징은 간단히 반복될 수 있는 도식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작품에서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다.(20)

-그러나 예술양식이 그 자체만의 합목적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의 개성, 민족, 풍토, 유파 등에 의하여 표현형식이 제약받은 삶의 방식이 작품 속에 나타나는 패턴이라는 것이다(조요한, <예술철학> 경문사 1980 115). 여기서 당연히 상반되는 역사적 필연성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신칸트주의 사론(史論)에 의해 해결의 모색이 시도된다.
 사물에 대한 미적 인식은 취미판단에 의거한다. 하나의 사물이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우리의 판단의 근거는 우리의 감정이 대상표상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여기서 취미판단은 오성과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성은 현상적 실재에 대해서 선천적 법칙들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반면 판단력은 오성과 이성을 매개하며 인지능력과 욕구능력의 중간개념인 오성에 상관한다.
 따라서 미적 판단에 대한 보편타당성은 오성만의 작용이 아니므로 쾌/불쾌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오성과 결연된 것이 아니므로 성실한 개인적 판단력이 보편적 판단력과 일치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술에서 참된 진술은 특수한 객관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며 판단하는 사람이 그가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는 한 언제나 동일한 관념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력은 몇가지 점에서 오성이 갖는 선험적 타당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이 타당성(Geltung) 개념에 의거하여 개인의 양식은 전체적 양식사 속에 합류되게 된다. 예술가의 내부에 작용하고 있는 개인적 기호나 민족적 성향은 그 시대의 보편적 표상형식(Vostellungsformen), 視形式(Sehf-ormen)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이다(하우저, 앞의 책 135). 예술가의 표현수단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그 색조와 선명도가 계속 변하고 있는 그리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안경을 통해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일정한 시각적 장치, 특별하게 조직된 시각성으로써 현실과 만난다. 따라서 예술사는 자연모방의 역사가 아니라 예술적 시각의 역사이다.(20-21)

-뵐플린은 시형식의 기초개념 5쌍을 도출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예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선험적/회화적, 평면적/심오함, 닫혀짐/열려짐, 다수적인 것/통일적인 것, 절대적 명료성/상대적 명료성의 개념은 형태의 대칭개념을 표본으로 문학에서 상이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의도이다(조요한, 앞의 책 121). 뵐플린 등에 의하여 형태의 대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소 변모하나 <선험적 범주>, 나아가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갖는다.(21)

-현대 추상의 양적, 질적 팽창을 자본주의의 소외 등 부정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현상 양극중 하나로서 비중을 두어 고찰할 수 있다.(23)

-근본적으로 양식 심리학은 내적 타당성에 변화원리를 두고 있으며 그 변화원리는 자유스러운 형식의 유희에 입각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심리적인 경험이 보편적 만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칸트의 미에 대한 견해와 유사한테 칸트에 의하면 미적 판단은 개인의 사적 감정 속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다. 또 그것은 무관심적 만족이다. 어떤 사물이 개인의 사용, 인식, 실용과 관계없이 단순히 고찰의 대상으로 사용될 경우 개인의 인식과정에는 개념적 판단은 없으나 오성과 구상력이 공동작업을 하여 합목적적 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미적 판단은 논리적 인식과 흡사하게 선험적(a priori) 근원을 가지며 보편적, 펼연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면 칸트의 이론은 개인의 사고가 시대정신에 필연적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행복한 일치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23)

-모더니즘이 추상과 감정이입의 예술의 두 경향이 반복되는 가운데 전자에 해당한다는 견해에 반하여 역사가 계속 발전한다는 발전사관에 입각하여 모더니즘을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보는 또다른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 문학론자들은 모더니즘의 과도기적 경향을 지극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데 예를 들어 루카치는 헤겔의 미학을 토대로 모더니즘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미학은 "예술과 현실과의 관계의 물음"이었다. 따라서 이념적 주체가 미적 행위를 하는 보편적 토대로서 '보편적 세계상태'가 미를 창출하는 중심 과제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 세계상태는 미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이며 더욱 상세하게 말하자면 특수한 예술형식들과 그들의 변천을 위한 특수한 조건들이다. 생동하는 주체인 미적 주체는 그들의 예술적 실현을 위한 보편적 토대로서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필요로 하며 이것은 주어진 역사시대의 상부-하부 구조의 총체성 즉 물질적 욕구체계, 권리와 법률의 세계, 가족의 생활, 신분분화, 국가의 총괄적 영역, 종교와 지식, 인식의 총체인 학문 등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헤겔은 이 보편적 세계상태를 토대로 산출된 인류의 예술형식을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의 세 부류로 나누고 삼자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논하고 있다. 헤겔에 의하면 예술의 발전과정은 정신이 그의 내면 속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지반에서 이루게 되는 화해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먼저 상징주의 예술형식을 보면, 동방세계는 주체가 자기 내에 인격으로서 어떤 법도 지니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자기 근거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자아를 상실한 채 보편적 실체나 어떤 특수한 측면에 예속된다는 정치적 전제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방의 예술은 유한자와 무한자, 이념과 형태가 일치하지 않고 양자의 상호교체적 결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단지 양자가 의미함(Bedeutung), 지시(Verweisung)의 관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즉 의미와 형상 사이가 역동적으로 상호침투되지 못한 단순한 지시관계이며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정형화된, 생명없는 예술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29-30)

-낭만주의는 다시 고전주의의 자아와 세계와의 화해를 부정, 이념과 형태의 새로운 분열을 거쳐 고전시대에서 달성되는 보다 높은 통일성, 즉 예술미의 본원적 실현을 꾀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 분열은 ① 자기 내에서 완성된 정신적 왕국, 스스로 화해하는 감정의 세계와 ② 경험적 현실로 변한 외면성 자체의 세계로 나타난다. 낭만적 예술형식의 이러한 이중성은 정신과 자연,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새로운 분열로서 미의 과정 속에서 고전시대의 행복한 이념상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로, 앞서 상징예술 형식이 보여준 분열을 반복한다. 이 분열된 세계상을 극복하기 위한 한 시도로서 "개체적 특수성의 형식적 자립성"이 등장하는바 여기에서 실현된 사실주의는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것이 이념상의 구체적 보편성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던 고전주의의 특성을 지양, 개체의 자립성을 강조한 형태이다. 그 러나 이 개별성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성 속으로 함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이 개개인의 가변성, 무상함 속에서 파악됨을 의미한다(G. Lukacs-황석천 역 <현대 리얼리즘> 열음사 1986 20).(30-31)

-모더니즘의 추상성이 근대사회를 기반으로 나왔다는 견해 중에서는 그것이 분열되어 버린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잘못된 예술, 죽어버린 예술'이란 폄하가 있는 반면 모더니즘이 근대 산업사회가 낳은 예술이며 기술, 기계중시의 거대한 산업구조가 갖는 모순을 비판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 이론도 있다. 그중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으로 지더펠트(Anton C. Zijderveld)는 모더니즘 예술이 추상적 사회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Anton C. Zijderveld-윤원일 역 <추상적 사회> 종로서적 1989 91). 현대사회라고 불리는 기술, 산업적 복합체는 점차로 거대하고 고도로 분할된 상부구조로 발전함으로써 종래 소규모 공동체에서 자신의 정체감 및 뚜렷한 경험을 갖고 살던 인간은 사회를 낯설고 이상한 현상으로 느끼게 된다(앞의 책 56). 현대인은 더이상 세계의 구성적 부분으로서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자연에서 격리되어 있으며 사회를 자신에 대립되어 있는 존재로 감내하게 된다. 가족이나 종교, 교육, 정부, 군대 등 인간을 위해 존재했던 제도적 부분들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이 이들 관할에 들어오는 한에서만 개인에게 통제를 행사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그 제도의 부분적 결속만 집착할 뿐 전체적인 정체감을 상실하는데 이 상실감과 소외감이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기계, 도구, 실험, 합리성, 비유기적 분업 등은 인간을 자동화로 만든다. 이 자동화와 단편화는 현대음악과 현대미술에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이 일원색만을 차용하여 똑같은 기하학적 형태 속에서 단조롭게 변화시키는 수법은 내용이 형식에 의해 대체되고 재료가 방법에 의해, 본질이 기능에 의해 대체되는 세계의 최종적 결과이다.(32-33)

-그러나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는 사회의 예술에 대한 단선적 주입적인 관계가 아니랄 복잡한 교호관계가 설정되어야 좀더 타당성있는 이론으로 성립될 수 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예술이론이 그것이다. 아도르노는 우선 모더니즘의 치명적 약점으로 비판받는 기교(형식)를 옹호하여 그것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한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으로 정의한다(P.Burger-김경연 역 <미학이론과 문예학 방법론> 문학과 지성사 1987 92-100). 또 내용적 측면에서는 모더니즘 예술에 드러나는 절망과 무조건적 상황비판을 자신의 부정적 변증법(Negative Dialektik)이론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헤겔이 그의 변증법에서 正-反의 조정이 合(Synthesis)에 이르고 이것이 절대정신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아도르노는 合이라는 변증법적 결과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正-反의 통합(Voreinigung)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仲裁(Vermittlung)이다. 合이라는 중간적 존재(Mittlers)는 양극의 정-반을 통해 이미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굳이 독립된 범주로 상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고는 주체와 객체의 일치, 즉 그 합을 부정한 부정의 변증법이란 성격을 띠고 있다. 합이란 그 자체가  결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진정한 지양에 대한 힘을 결여하고 있고 어떤 해결을 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따라서 상황을 부분적으로 부정(bestimmte Negation)함으로써 결과의 내용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 지양 자체를 향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진실이며 올바른 인식력을 갖춘 것이다. 부분적 지양은 단지 모순적 힘일 뿐이고 굳이 합을 찾는다면 초월적이며 메시아적 미래가 그것이다. 유토피아적 미래란 합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고 또 실현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언젠가 이루어질 역사의 차원이 아니라 불확실한 실현과 관계맺고 있다(신일철 편 <프랑크푸르트학파> 청람 1985 101-106). 이 부정적 변증법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현대의 위기는 '개인성의 종말'이다. 예술은 이 개인성의 종말을 부정함으로써 진리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이 후기 시민-자본주의 사회 단계에서 뚜렷해진 우중성격, 사회적이며 동시에 자율적인 생산품이 되는 이유는 예술이 사회에 반대하고 동시에 사회로부터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회에 대한 반대입장(Gegenposition)을 통해서 사회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입장은 자율적인 입장으로서만이 예술에 관련될 수 있다. 자율적인 예술이 비사회성을 띠는 것은 바로 '국부적인 부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부정으로써 현대예술은 시작되었고 그 심미적 질서를 모방(Mimesis)이라는 작업행위에서 행방시켰다(앞의 책 113).(33-34)

-사회부정이 현대예술이 갖는 자율성과 통한다는 아도르노의 견해는 벤야민의 '산책자 이론'에서 구체적이고 명쾌하게 설명된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에 관한 논문에서, 비유기적인 사물과 타락한 상품들, 파리라는 도시의 떠돌아 다니는 군중에서 발견되는 덧없고, 새로우며 회의적인 도시적 경험의 낯선 충격에 도취된 상태로 굴복한 시인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역설적으로 도시에서의 인간성 해체를 고발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거대한 도시의 건물, 군중, 교통기관에서 사물에 대한 총체적 지신인 인간의 경험(Erfahrung)은 해체되고 군중은 단편적인 반응에 불과한 체험(Erle-bnis)에 안주하게 된다(Walter Benjamin-이태동 역 <문예비평과 이론> 문예출판사 1987 19).
 반면 시인은 통일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즉 생존적 필요에서의 체험의 인정과 시인으로서 느끼는 외부자극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개방 경험에 대한 갈증이란 양극 사이에 놓여 있다. 결국 자아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충격을 수용하는 것이 시인의 딜레마이자 목교가 된다. 현대 익명의 도시에서의 죽음과 같은 자기상실의 감정, 현대예술은 죽은 대상들, 영혼의 사물화와 상품화를 역설적으로 이용해서, 노예화되고 노예화 시키는 대상으로서 일상적 관습적 존재로부터 그 사물들을 폭발시켜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화의 용도로 그것을 해방시키려 한다(벤야민, 앞의 책 193), 결국 '산책자'는 소외자로서 사회와 격리됨으로써 오히려 상품화된 사회를 부정하는 존재로서 의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34-35)

-하우저는 뵐플린의 양식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예술사회학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전자는 플로티누스의 '만물은 一者로부터 유출된다'는 형이상학적 유출사의 변종일 뿐이며 '세계정신'은 이미 역사들 안에 거주해 있으며 그것들은 이미 사전에 정립, 형성된다. 따라서 거기에 관련된 개인들은 세계정신의 대변자일 뿐이라는 주장인데 하우저는 예술에 있어 개인의 사적인 동기와 주관적인 방법은 그 개인을 넘어서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는 무엇인가를 실현시킨다는 입장에서 이를 비판한다. 예술사회적 관점도 예술의 발전사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사회변천에 맞추어 발전해온 것만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비판되고 있다(A. Hauser- 황지우 역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151-152). 어떤 역사적 시대도 그 시대 자체만의 예술을 새로이 시작하지 못한다. 예술과 사회의 완전한 일치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 같은 사회 내에서도 예술들 사이에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하우저의 논리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미리 주어진 초개인적, 초 역사적 의미란 칸트적 선험론에서 온 것으로 진리의 객관적 판단 기준은 '間人間的(zwischenmenschlich)' 성격을 지닌 것이지 '超人間的(ubermenshlich)'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유관습과 사고방식은 미리 주어진 무엇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시도의 결과이다. 특히 뵐플린의 양식주기반복설은 모순된 것이다. 우선 예술사에서 순환과 반본을 논한다는 것은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예술적 경향들은 이미 선행하는 것에 대한 발전의 결과이고 이 경향들은 언제나 이미 앞서 진행된 예술사의 성격과 또다른 독특한 상황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적 바로크가 17세기의 바로크와 같을 수 없다(하우저, 앞의 책 179-183, 203). 그러나 반대로 어떤 역사적 시대에서도 예술과 사회의 완전한 일치란 없었다. 사회적 조건이 미뉴에트의 형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고, 한 시대의 사회적 조건을 아무리 깊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시대 성당 탑들의 선을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18세기 사회는 어떤 면에서 미뉴에트 속에 내포되어 있었지만 미뉴에트가 그 시대의 사회적 형식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예술형식이란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시대의 물적 조건에서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4-36)

-중세말 이후 서구의 역사는 위기의 역사였다. 각 시대간의 짧은 막간은 항상 새로운 붕괴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확연치 않은 막간의 하나가 르네상스였다. 처름 르네상스에는 과도한 단순화의 도움을 빌어 고전적 형식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온한 평화, 어떠한 사건에 의해서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는 그 평정, 무감동한 객관성, 형식의 완벽한 안정과 균형을 갖고 있었으므로 붕괴의 시기가 갖는 혼란을 설명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마니에리즘의 패러독스가 탄생한다. 이 시대 예술가들은 생의 풀기 어려운 모순을 알아채고 그 모순을 더욱 강조하고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합리적 사상이 불충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이 합리적으로 종합될 수 없음을 통찰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므로 윤곽을 흐트러뜨리거나 일그러뜨림으로써, 즉 그 반대의 측면에서 진실을 찾으려 했다(앞의 책 22-24ㅋ).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 이후 진행된 소외의 극복의 한 방법이며 제도화에 대한 역설적 비판이다. 예컨대 모든 마리에리즘 양식은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기계적 반응을 보이거나 독자성, 예리한 감수성, 방잣함 등을 유달리 과장된 형태로 전개함으로써 이러한 부자연성 및 기계성에 반역하려는 고툭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우저의 마니에리즘은 부정의 부정을 모더니즘의 철학으로 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예술이 한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온 불안정함 때문에 마니에리즘과 일맥상통한다고 밝힘으로써 뵐플린의 양식주기반복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바로크기와 현대와의 차이점을 설명하여 문학과 사회와의 통신관계를 설명하고 있다.(36-37)

-결국 모더니즘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는 미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37)

-주관적 목적은 보편개념이 특수성을 통하여 개별성과 연결하는 추리(G. W. F. Hegel-임석진 역 <철학강요> 을유문화사 1983 200)라는 헤겔의 견해는 모방의 철학적 근거로서 리얼리즘 미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일상적 실천, 과학적 인식, 예술적 창조 세 경우가 다 동일한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나 특히 예술에 있어서 특수성의 개념은 중요하다. 현실에서 개별성, 특수성, 보편성의 범주는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바,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양극단의 중간항이 특수성이다. 그런데 이 툭수성은 일상생활과 과학에서는 단지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예술적 반영에서는 문자 그대로 중심(Mitte)이 되며 운동들의 포괄지점이 된다. 예술에서 특수성으로부터 개별성으로의 운동이나 특수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의 운동 중 어떠한 경우에도 특수성으로 향한 운동이 가장 결정적인 운동이 된다. 즉 현실의 예술적 형상화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특수성으로의 지양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개별성은 특수한 것 속에서 지양하면서 동시에 보존되어야 한다. 루카치는 문학에서 '전형'이라는 개념으로 이 특수성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하나의 전형이지만 동시에 특정의 개별인, 다시 말해 헤겔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 사람(ein Dieser)'이고 또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예술가가 인간에 대한 개별적 지식과 세계에 대한 개별적 지식이 풍부해지면 질수록, 예술가가 여기서 특수성의 매개를 더욱 더 많이 발견하고 필요에 따라서느 최종적인 보편성에 도달하기까지의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이러한 지양은 더욱더 활발해진다. 그리고 예술가의 조형력, 형상화 역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만큼 더 뚜렷하게 그는 발견된 매개들을 새로운 직접성으로 환원시키고 유기적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것이다(G. Lukacs-여균동 역 <미와 변증법> 이론과 실천 1983 165-168).
 한마디로 특수성이란 종래 보편성을 중시했던 미학관에서 개별자가 그 의의를 획득하게 하는 모방의 철학관의 핵심적인 이론이 될 수 있다. 루카치는 이 특수자 설정으로 종래 모방 개념이 플라톤에게 받았던 모욕을 설욕할 수 있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하나의 물질은 그 물질 자체의 존재나 비존재 또는 변화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론적 지위(idea)를 갖는다. 제작자는 이 이데아(idea)의 개념적 파악에 인도를 받아 현실의 물질을 제작하는 반면 화가는 그 현실의 물질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물질은 이상적 상(eidolon)이며 그림은 물리적 물질의 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만든 작품은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인데다, 결핍된 대상(object manque)이기까지 하다. 예컨대 그림 속의 칼은 현실의 칼이 갖고 있는 자르는 기능마저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얼리즘은 단순한 모방의 개념으로 편하되고 만다(M. C. Beardsley-이성훈 역 <미학사> 이론과 실천 1988 28-31). 그런데 헤겔, 루카치는 예술가의 작품(그림의 칼)을 특수자로 규정함으로써 껏이 개별자(현실의 칼)의 모방이 아니라 개별자와 보편자(이데아의 칼)를 이어주는 매개로 격상시켜 리얼리즘이 구체적 현실반영이 갖는 미학적 가치를 정립시켰다. 한 마디로 예술에 있어 자연모방이란 자연적인 것의 외면성을 모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중요하고 성격적인, 의의 깊은 자연형식을 취한 것이다(헤겔, 앞의 책 450).
 그런데 특수성의 강조는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여 내용중심의 미학이 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에 있어 본질적으로 내용은 형식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 속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형식은 내용에 있어서 외면적이다. 여기서 헤겔의 유명한 "내용이란 것은 형식이 내용으로 전환한 것, 그리고 형식이란 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정의가 나오게 된다(헤겔 <철학강요> 156-157). 그러나 헤겔은 근본적으로는 내용의 先在性을 언급하고 있다. 즉 결과적으로는 상호관련되지만 발생론적 관점하에서는 "형식은 구체적 내용 자체에 내재하는 생성"이라고 본다(헤겔-임석진 역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1988 108-117). 예술 속에서 내용은 형식을 산출시키며 형식은 내용의 산출물이다. 왜냐하면 특수자 속에 보존되어 있는 개별자의 강조란 바로 현실 자체의 구체적 상황, 인물, 사물, 배경 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37-39)

-진정한 미적 형식은 항상 '특정한 내용'을 지닌 형식이다. 심지어 예술의 표현 방식은 내용으로부터 도출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작가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을 썼을 때 그 작품을 구분하는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그 조직화하는 중심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형상화된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강조되고 무엇이 무시되는가, 무엇이 소멸하는가를, 다시 말하면 예술적으로 반영된 현실의 어떤 특징과 어떤 계기가 작품의 구성요소로 되는가와 그것이 작품을 수록해 나갈 � 어떤 구체적 역할을 담당하는가가 작품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헤겔주의자들이 '특수자'를 설정함으로써 종래 칸트의 미학 개념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특수성'개념의 업적은 단순한 현실의 묘사로 격하되었던 미메시스 개념을 미학으로 승격시켰으며 특히 종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서사양식을 철학적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 그것이 미학의 전 범주를 포괄한다고는 볼 수 없다. 칸트의 미학은 음악, 추상미술, 디자인, 건축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39-40)

-칸트의 주관적 보편성(미적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즉 개인의 선험적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성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構想(Entwurf)'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구상은 이성의 자발적 활동이며 어떤 보편타당한 것을 그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고 바른 생각이다. 정신은 이같이 자발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이 있어서 저 자신에 의하여 산출한 도식적인 형식을 사물에 投射(werfen)하여, 그것에 의하여 만물 자신으로부터 정신에 대하여 있는 사물을 만든다. 정신이 대상들에 한 형식을 던져주는 한 정신은 한 구상을 행하며 대상들을 범주적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이성은 하나의 立法者이다(김용민 <칸트의 판단력 비판 연구> 예진문화사 1989).
 칸트는 이성에 대한 이런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미학에 있어서 개별과 판단이 어떻게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미학적 판단은 개개인으로서 각자에게(jeden als einzelnen) 타당하다. 그러므로 미학적 판단은 개별판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Gefuhle)에 근거하기 때문이고 감정은 성질상 단일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판단은 동시에 미학적 만족 자신이 모든 개인에게 타당한 한 보편적 판단이다.(칸트에 의하면 미적 만족은 주관적, 보편적(間主觀的)이며 필연적이다. 이 말은 대상이 주어지기만 하면 누구나 펼연적으로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느끼게 됨을 의미한다.-N. Hartmann-전원배 역 <미학> 을유문화사 1983 69, 377. I. Kant-이석윤 역 <판단력 비판> 박영사 1986 70-74). 그러면 어떻게 개인의 감정이 보편적으로 假傳達的일 수 있는가? 이는 쾌의 감정이 개인의 욕구에 제약되어진 특수관심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상의 고찰에 있어서 우리의 표상력들이 활동하여 객관을 형성하면서 또 이해하면서 결합한다. 이 형성적 결합을 완성하는 것은 상상(Phantasie)이요, 이해적 결합을 완성하는 것은 오성(Verstand)이다. 상상은 표상에 직관적 통일을 주며 오성은 합법칙적 통일을 준다. 그런데 대상의 미적 고찰은 구상력과 오성이 개념이 성립할 때처럼 결합하지 않고 공동작업 속에 병립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의 산물인 개념과 미적 판단을 서로 차이를 두어 설명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양자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임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인식이란 구상력과 오성의 결합에서 생겨나고, 미적 판단이란 양자의 병립 속에서의 협력에서 생겨난다는결론이기 때문이다.(40-41)

-이는 칸트의 모든 철학적 사색이 순수수학,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에서 나온 때문이다. 칸트는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경험에서 도출된다는 로크(L0cke)의 이론에 반대하는 한편, 生得觀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선천적(a priori) 지식은 정신이 경험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고 경험과 동시에 그것에 의해 촉발되는 인식능력이다(F. Copleston-임재진 역 <칸트> 중원문화사 1988 55-61). 우리의 수한 감정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형상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 일반의 개념과 삼각형 하나의 형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각형 개념은 모든 개개의 삼각형을 포함시키는 범주를 갖고 있으나 개개의 삼각형은 보편적 삼각형의 한 부분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일반도식은 결코 사고 이외의 어느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고 공간의 순수한 형체에 관하여 구상력의 종합의 한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순수기하에서 도출된 원리를 생활속에 접맥시킨다. 예컨대 개(犬)라는 개념은 경험이 나에게 제시하는 어떤 특수한 형체나 혹은 내가 구체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상에 제한받지 않고, 나의 구상력이 네 다리를 가진 형체의 동물을 일반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다.(I. Kant-전원배 역 <순수이성비판> 삼성출판사 1983 170)

-칸트는 순수수학에서 도출해 낸 선험적 인식론의 개념을 계속 연장시켜 예술적 심미적 이론에 있어 선험적 입장 또한 '구상'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노래를 지을 경우에 우선 작가는 어떤 멜로디를 자발적으로 착상하며 이 멜로디가 몇 개의 낱말을 리디미컬하게 결합하고 이 낱말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처음의 한 소설을 형성한다. 즉 작곡가는 자신의 예술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규칙에 구속되어 있고 이미 그 노래의 최초의 한 소절에서부터 그 규칙을 정식화하지 않아도 자발적 활동을 일관하여 구속하는 것에 의하여 자율적인 타당성을 표명하는 것이라 한다.(김용민, 앞의 책 18-19)
대상을 직관함으로써 어떤 표상을 떠올리고 이 다양한 표상의 종합에서 인식이 산출되는바 이 종합의 능력이 구상과 오성이 된다는 칸트의 인식론은 과학이 '개별성'을 지닌 현실의 '보편적' 반영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칸트. <순수이성비판> 111-116) 과학적 정신은 그것이 행한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 더 보편적이고 더 포괄적일수록,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직접적인 감각적. 인간적 현상태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데 더 정열적일수록 더한층 고도의 것이 된다. 모든 과학을 수학화하려는 것은 하나의 유토피아일지 모르나 그 속에 과학적 사고의 지향이 표현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수학에는 가능한 한 많은-외견상으로는 이질적인-개별적 사례들을 포함하고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과학은 개별적인 사례 속에 은닉된 본질적인 공통의 계기를 발견해냄으로써 법칙성 그 자체를 박진적으로 적합하게 표명할 수 있도록 한다. 한마디로 개별적인 자질구레함이 가장 단순하게 즉 보편적으로 표현되는 공식이야말로 과학적이다(G. Lukacs <미와 변증법> 186-187).
칸트의 미학이 비록 세부적인 차이는보이나 기본적으로 순수 수학의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는 점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을 엄밀히 구분하는 헤겔류의 미학과의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는 점, 동시에 칸트 미학의 요체가 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미적 판단의 요체가 '구상'의 능력이므로 당연히 순수한 미는 경험이 아니라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에게 무수한 개별적인 대상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경험의 대상들이다. 반면 취미판단은 그 규정근거에 경험적 만족이 혼입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 순수하다. 잔디밭의 녹색과 같은 단순한 색이나 바이올린 소리와 같은 단순한 음색은 양자가 표상의 질료에 대한 감각을 기초로 한 쾌적의 감정에 불과하므로 개인의 사견에 불과할 뿐 미의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다양한 녹색들 중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규정된 녹색을 의미한다. 순수한 취미판단은 형식적이요, 경험적 취미판단은 질료적이다. 인간의 선험적 능력이 어떤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구상능력일진대 순수함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칸트로 보아 당연한 논리이다(칸트 <판단력 비판> 84).그에 의하면 건축예술에서 미적인 것을 느낀다 함은 부분적인 색, 장식, 조각 들의 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안에 있어서 취미에 맞는 일체의 구도의 기초를 결정하는 것은 감각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그 형식에 의해서 만족을 주는 것이다. 다른 부수적 색채들은 단지 자극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형태의 유희에 있어서는 도안이요, 감각의 유희에 있어서는 작곡"이라는 그의 미에 대한 결론이 도출된다(앞의 책 85).(41-43)

-...모더니즘 미학에서의 인식능력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사물을 이성적 진리의 체계로 논증하려는, 합리적 직접성(Im-mediat rational)의 추구가 그것인데 칸트는 이성의 합리적 구성으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 그에 의하면 사실의 진리나 설명의 원리는 우리의 이성작용 속에서 구해지므로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이성의 합리적 구성이나 해석을 떠나서 실재에 대한 인실을 할 수 없다. 형식 예술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예술은 대부분 이 범주와 관련된 것이다.
둘째, 베르그송 등은 사물의 인식은 그것을 합리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직접 만남(contact immediat)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이 근본적으로 직접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칸트는 감성적으로 주어진 잡다한 오성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오성을 매개해야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성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사고형식, 집단이나 시대가 갖는 편견, 개인적 성격이나 이견, 나아가서는 여전히 상대적인 것에 머무는 과학적 지식까지도 사물의 진리를 은폐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직접적인 것은 인류가 이제까지 형성한 모든 관념이나 이론이 피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어떠한 주관적 해석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성에 기반을 둔 철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식론적 순수성(epistemological puriy)이 요청된다.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순수한 것이며, 이 순수성을 지향하는 우리의 의식도 역시 순수해야 한다. 이 순수한 의식-'순수의식(con-scence pure)', '변질되지 않는 의식(conscience inulteree)'-은 직관으로 불리우며 이것은 또한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 대상을 반성하고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무사심하게 된 본능(instinct desinteresse)"이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직관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베르그송(Bergson)은 그 방법으로 생에 주의하고 있는 의식을 지양하하고 생활에서 벗어나 무관심의 상태에 빠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인간은 방심, 몽상, 잠, 꿈과 같은 상태에서 기억의 총량을 감지해내며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특히 직관(intuition)은 종래 지성의 공간적 사고방식을 지양한다. 지금까지의 인과율은 공간의 추상적 작용을 통해 사물이나 사실간의 관계, 법칙을 인식해 왔는데 이것은 공간과 시간을 분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과 시간의 융합, 과거가 현재 속에 침투해 끊임없이 새로운 단위를 구현하는 지속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성립할 수 없다. 사물의 인식은 그 사물 속의 과거와 현재의 침투 속에서 자연으로 나타나는 그 무엇의 총량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직관은 인간의 내적 자아의 의식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의 철학을 문학화했다는 주장은 여기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요컨대 직관의 철학은 심리소설의 이론적인 모태가 된다 하겠다. (43-44)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수학이 '인간 이성의 자랑'이라는 칸트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이성을 예술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은 추상을 의미하고 언제나 현실을 빈곤하게 한다. 과학적 개념에서 기술되고 있는 바의 사물의 형태는 공식화된다. 공식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뉴턴의 인력법칙처럼 단 하나의 공식이 우리의 물질적 우주의 구조 전체를 그 속에 담고 또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칸트는 예술적 판단에 속하는 '미적 보편성'과 논리적, 과학적 판단에 속하는 '객관적 타당성'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두고 있으나 양자가 '다양성에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미가 현실의 빈곤화로 떨어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45)

-언어와 과학이 현실의 간략화라면 예술은 현실의 강렬화이다. 우리들이 어떤 주어진 대상을 과학적으로 기술할 때에는 무수한 관찰에서 시작하는데 이 관찰들은 언뜻보아 다만 분리되어 있는 사실들의 막연한 집합이다. 과학은 이것을 몇몇 중심적 특징들로 범주화시키고 다시 그 범주로 개별자들을 연역할 수 있다. 즉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에 상호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예술은 어떤 보편개념으로 개개의 사물들을 연역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 추구한 '다양성에의 통일'은 과학과 달리 번복될 수 없다.
 순수과학의 이러한 약점을 루카치는 탈의인화라는 용어를 사용해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과학을 인간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즉자태들에 대한 동질적 매개항의 연구라 보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유클리드 가하학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量化라는 추상작용이 수행됨으로써 전체적 인간의 일상생활 중에는 어떤 유사점을 갖지 않는 개념구성과 개념구성 결합이 생긴다. 자연의 대상은 인간의 의식이나 그 사회적 발전에서 독립하여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의 과학적 반영이란 즉자적(ansich)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우리에 대하여 존재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문학처럼 반영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의식에 의해 세계를 지배하는 대자적 존재와 구별된다고 한다(G lukacs-木幡順三 역 <美學> 勁草書房 1968 164-218)(45)

-예술에서 정신이 객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어떤 감성적 질료 속에 구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각종 질료들은 오직 특정 종류의 형성만을 허용하고 또 이 종류의 형성에서는 오직 특정한 내용만이 향수되고 현상한다. 즉 예술에서 질료형성 과정인 前景形成의 방식이 後景形成의 한계를 규정한다. 따라서 질료는 예술작품의 소재(주재)선택과 형성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다.
 질료의 영향은 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훨씬 이념에 가까운 이유를 설명하는 데 좋은 증거를 제시한다. 이 질료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은 벌써 객관화의 성격을 가졌고 기호체계와 대응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문에 비해 언어의 조탁이 강조되는 시조차도 비록 평소 사용하는 말보다 더 고차적인 형식으로 형상화되어 恒存과 지속성을 보유하게 되더라도 그 언어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 가지는 객관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으로서의 시는 비예술적 종류의 객관화, 다시 말하면 문학이라는 표제하에 포괄될 수 있는 광범한 정신적 창조의 영역에 밀접하게 접근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시적 작품과 시적 작품과의 사이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고대의 역사가의 설화들과 경전보고와 북구인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문학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 결과물은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시문학은 그 주제를 직접적으로 여러 종류의 질료로 형성하여 감성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여 읽는 자나 듣는 자의 환상을 자아내게 한다.(46)

-...문학에서는 추상적 기호만이 전경으로 나타나 독자는 이미 역사적, 사회적으로 객관화된 질료인 언어를 갖고 자신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문학에서는 미술에서처럼 평면 자체에 나타나는 감성적인 형식의 유희가 결여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기호의 단일한 층을 매개로 곧바로 이념적인 것, 후경으로 나아가 버린다. '주전자'라는 단어를 듣고 '칼'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와 독자가 평생을 두고 받은 언어에 대한 교육은 여타 예술의 질료에 비해 언어라는 질료가 갖는 자율성을 억압한다. 이미 인간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똑바로 알아차릴 규약에 익숙해진 것이다. 언어가 갖는 그 형식의 유희는 이 규약의 깨트림, 은유, 비유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은유조차도 그 효과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갖는 기본의미의 차이가 다른 데서 기인할 뿐 그것은 언어 자체가 갖는 의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언어 자체의 자유로운 전경층보다는 이념의 후경층에 집착하게 한다. 또 언어가 가진 지시적 속성-사물을 가리키는 속성-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내면이 되었건 외면이 되었건 현실의 지시-현실의 모방-가 되게 한다. 도대체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언어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현실의 모방을 미학의 근간으로 삼는 리얼리즘 미학자들은 문학을 역사발전의 최고봉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47-48)

-상징적 예술형식에는 건축이, 고전적 예술형식에는 조각이, 근대예술에는 음악, 문학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된다. 특히 문학은 각 시대마다 서사시, 서정시, 드라마가 드러나는바 문학은 제반 예술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가 상이한 장르들로 분화되는 예술이다. 헤겔은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상호대립으로 미의 과정을 파악하는데 발전의 초기에는 의미와 형상간의 대립인 상징적 예술형식이 등장한다. 최초의 예술의 진료에는 이념이 침투하지 못하여 그의 형식은 외적 자연의 형상이며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정신의 쓸데없는 외적 반영만이 나타난다. 다음 단계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매개가 감각적인 것의 '매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각이 나타난다. 다음 단계인 낭만주의에서도 그 주관성의 반영으로 정신적 주관성이 자신 속에서 직접적인 주관적 통일 상태에 있게 되는 음악이 중요하다. 이념을 중시 여겼던 헤겔에게 가장 훌룡한 질료였던 언어는 그 밖의 질료들과 비교해서 감각성의 정도가 가장 적으며 다른 질료들과 달리 언어는 단순한 자신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 의미있게 디면서 감각적 질료의 층을 항상 정신적인 것에로 고양시킨다. 따라서 초기 서사시가 이념과 감각을 통합한 고전주의시대에 발생했고 그것이 훼손된 근대에 또다른 의미로 나타난다는 논리는 가장 친이념적인 언어질료에 대한 편애라 볼 수 있다. 결국 리얼리즘에는 현실묘사에 대한 친근감과 더불어 감각 및 이념에서 전자를 폄하하는 논리가 은밀히 스며 있는바 이는 건축, 음악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과 엄밀히 대립되고 있다.
 반면 모더니즘 미학인 주관적 보편성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부에 나타나는 구상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이는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개개의 사물들을 특수성 속에 지양과 동시에 보존함으로써 예술을이루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현실묘사를 탈각한 이론이다. 따라서 이는 작품에서 어떤 정신적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형식에 적합하다. 어떤 소재나 제재,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그 예술의 속성상 거의 무시되어 있는 순수 음악, 건축, 장식은 묘사해야 할 직접적인 현실의 대상들이 없음으로 해서 주체로부터 자유로이 형식 그 자체의 순수한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유희의 기본방침은 순수수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음의 대위법과 리듬, 건축의 강성과 중력과의 투쟁, 장식의 대칭, 균형은 수학의 기본개념 없이는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수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음악에서 말미암은 것이다.(48-49)

-회화는 감성적이고 가시적이다. 반드시 무엇에 대한 '봄'이 필요하고 무엇에 대한 표현이므로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모방이란 용어가 회화처럼 빈번히 쓰이는 예술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추상미술은 바로 이 회화의 '무엇에 대한 모방'에 반기를 드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미술가는 대상을 출발점, 자극으로 삼아 마치 음악가가 단순한 주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일정한 법칙에 따름으로써 그의 일관된 형식의 의해 인정된 곡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수많은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미술가는 지성적, 객관적 수단에 의해 대상의 실재적 성격이나 눈에 보이는 장면을 재현하고자 하지 않고 다른 선험적 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49)

-이제 미술은 내용을 담는 수단이 아니라 질료 자체의 자율적 의지를 표명할 수 있게 된다.(오광수 <추상미술의 이해> 일지사 1988 89)
 이것은 음악의 세계와 흡사하다. 음악은 외부세계에서 받아들인 오랜 체험의 작용이 전혀 배제되지 않지만 외부세계에서 수용도니 지각을 기록하기 위해 조직되지 않는다. 음악의 기본요소인 리듬은 수학에 기초를 둔 것이며 지적 창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음악을 지향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모든 예술은 외부적 모방의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순수한 창조적 열망을 지향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칸디스키가 미술에 음악의 작곡(composition)적 요소를 도입한 데는 바로 대상표현의 속박을 벗어나 창조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음악이 자연보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한 예술이라 보았다. 형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 음악은 회화가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 음악은 원래 외향적으로 속박을 벗어난 것이어서 음악의 표현을 위해서는 아무런 외적 형식도 필요하지 않다. 외적 형태를 재현하기 위해 음악적 수단을 쓰려는 시도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하는 것은 표제음악에서 잘 드러난다. 불과 몇 세기를 제외하고 오랜 세기 동안 음악은 자연현상을 재현하지 않고 예술가의 정신을 표현하고 음의 독자적 구성을 창조하는 데 전념해 왔다(W. Kandinsky-권영필 역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열화당 1989 46-47). 음악은 내적 필연성을 적용함으로써 가장 비물질적 예술이 되고 있다. 칸딘스는 음악에 나타나는 자체 구성적 요소, 순수한 형식을 미술에 도입함으로써 작곡은 그의 미술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그에 의하면 미술이 예술가들의 심성에 진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합목적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앞의 책 55). 결국 그는 회화에서 '대위법'을 성립시키려 한 것으로 판단되단.
 사실화에서는 대상적인 것이 전면에 대두되지만 추상화에서는 예술적 수단이 전면에 대두된다. 즉 사실화의 표현양식에서 예술가는 구체적인 사실적 대상을 '비예술적'으로 단순히 재현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추상화는 대상적인 것을 외관상으로 완전히 배제시키고 형태와 색채를 일차적인 단순한 요소로 삼는다(Kandinsky-차봉희 역 <점.선.면> 열화당 1989 192).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현대 모더니즘 예술의 기본적 발상과 일치한다. 현대예술은 질료를 통하여 대상을 표현하는 종래의 방식을 비판하고 자체의 질서를 작품의 미적 척도로 삼는다. 예를 들어 종래에는 회화의 질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한계-평평한 표면,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속성 등이 어떤 환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이와 같은 질료의 한계야말로 회화의 특징이라고 여긴다. 종래 화가들은 2차원의 화면을 3차원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원근법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반면 모더니스트들은 이 모순을 역전시켜 회화의 평면성을 확인, 즉 회화예술이 화면구조의 평면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서 예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칸트의 형식 중심의 미학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편승하여 건축은 근대에 이르러 다시 예술분야로 승격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미술은 기본적으로 건축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50-51)

-순수시론의 대표격인 발레리(Paul Valery)의 시론이 사실상 음악과 건축 미학에서 미롯되었음을 통해 현대예술의 기본적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문학'은 문학이 현실참여를 하지 말고 오직 예술 자체의 생의 의미만을 천착해야 한다는 식의 또다른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큰 부분에 있어서 모방예술, 표현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문학에 형식예술의 미학을 적용하려는 노력의 발로일 뿐이다. 또 그것은 대상의 잡다한 개별성에서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형식을 추출해내려는 노력에서의 '순수'일 뿐이다. 순수란 단지 형식에 집착하다보니 현실의 구체성들이 추상화되고 따라서 구 구체성들 가운데 하나인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분위기, 정취(Stimmung)를 매개로 해서 현실을 상기시키게 됨으로써 형식이 부각되고 내용이 간접화되는 상황을 내용이 없다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비난이다.
 그 '순수예술'이 이루어지 이유가 근대 시민사회의 몰락이나 당시 예술가들의 기질 때문이라는 사회반영론의 입장은 상당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반 상황들이 근대예술에서 보여지는 순수로의 노력(das Strebennach Reinheit)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본다. 순수로의 노력은 지금까지 인간이 가져온 '미'의 한 속성의 표현일 수 있다. 이 표현은 물론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저마다의 변모와 특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했던 '순수'의 정체를 텍스트 자체 내에서 세밀하게 연구하는 일이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첩경이 되리라 여겨진다.(51-52)

-30년대 본격적으로 논의 된 모더니즘 소설의 이론이 작가와 세계의 분열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소설을 쓰기에 불리한 상황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52)

-모더니즘 미학은,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개개의 사물들을 특수성 속에 지양과 동시에 보존함으로써 예술을 이루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현실묘사 우위에 반하여, 인간의 내부에 나타나는 구상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 예술에서 현실 반영은 분위기, 정취를 매개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현실의 직접적 재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서가 <날개>를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의 면에서 평가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처한 지식인의 모랄 의식과 그에 따른 사회 반영의 욕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53-54)

-작가가 주장할려는 바를 표현하려면 묘사되는 세계가 그것과 부합되지 않고 묘사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과 그것이 일치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실을 있는대로 그리면 작품 가운데 선 작자가, 인생에 대하여 품고 있는 희망이란게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작가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는 <띠렘마>에 빠지는 것이다(임화 " 태소설론"<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346-347)
 이 딜레마 때문에 성격과 환경의 조화를 단념한 데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그의 이 세태와 내성의 양분론은 루카치의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예술인식론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루카치에 의하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토대는-현실이 사회이든 자연이든-외부 세계의 객관성, 즉 그것이 인간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어떠한 파악도 단지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세계의 의식을 통한 반영인 것이다. 이런 인식론을 기반으로 반영이론은 의식을 통한 이론적, 실천적 현실 획득이 모든 형식에 대한 공통기반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민 미학에서의 반영 이론은 의식과 존재와의 올바른 상호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경향의 일면적 고립적 등장으로 분열되고 만다. 그 하나가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입장에서 시작했으나 운동, 역사 등의 문제를 파악할 수 없는 기계론적 유물론, 다른 하나가 그 자체의 특수한 본질로써 보편 개념을 파악하는 조야한 관념론이다. 여기에서의 '기계론적 유물론'과 '조야한 관념론'은 각각 세태소설과 내성소설에 해당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54-55)

-...그들은 모더니즘 문학이 근대의 문화, 경제의 토대 위에서 산출되었음을 역설하면서도 왜 그것이 기교의 특징밖에 갖추지 못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에 시민계급이 역사의 방향성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피상적 기교주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리얼리스트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기교의 의의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노선을 손쉽게 변경하고 만다.(56)

-기교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 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이므로 모더니즘이 동시대와 유리된 기교주의란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P. Burger-김경연 역 <미학이론과 문예학방법론> 문학과 지성사 1987 78). 설사 그들 자신이 기교주의임을 시인했다 하더라도 예술 작품들은 그 시대의 자신에게조차 무의식적인 역사 서술이므로 예술가가 전적으로 예술적 재료와의 대결에 집중할 때 한 시대의 사회는 작품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T. W. Adorno, Asthetische Theorie(Surkampf, 1970) 78).
 그러나 당대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했던 감각 내지 기교는 재료와의 본격적인 대결이 아니었다. 그들은 의식의 밑바닥에 자신의 기교가 영.미의 이론을 수동적으로 이입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고 사소한 반박과 압력에 쉽사리 자신의 견해를 비판해 버렸는데...(56)

-기교, 또는 형식은 예술 작품이 지니는 논리성이나 나아가 일관성의 계기, 전체의 총괄개념이다. 형식을 통해 모든 작품은 단순한 존재자와 구별된다. 형식은 주관적 활동의 산물인 동시에 본질적인 어떤 객관적 규정이니 앞에서 정의한 바대로 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이다. 오직 딜레탕트만이 주관성과 진정한 의미의 기교를 혼동한다.(57)

-인간은 감각경험을 귀납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능력을 지녔다. 모든 사례들을 열거하여 진행되는 귀납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類槪念에 도달하는데 이것은 추상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Rudolf Arnheim-김정오 편역 <시각적 사고> 이화문고 1983 25). 형체는 개념이다. 사고 없이는 볼 수 없으며 역으로 개념형성은 형체의 지각에서 비롯된다. 망막에 투사되는 상은 물리적 대상을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기록한 것인 반면, 이에 상응하는 시각표상은 그렇지 않다. 형체지각은 자료에서 발견되거나 거기에 부여된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둥글다고 보는 사물들은(예: 사과) 완벽한 원이 아니라 단지 원에 근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둥글다고 지각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한 형체의 틀에 다양한 자극들을맞추는 구조능력, 구상능력 때문이다(앞의 책 50). 현대 추상회화에 나타나는 사물을 단순화시키는 경향은 인간이 가지는 구상능력에 입각한 것인데...현실로부터 '이탈된 관찰'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통찰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잘 보기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선다. 즉 우연발생적인 디테일을 떨쳐버리고 본질요소들이 더 잘 나타나 보일 만큼 충분한 거리를 취하기 위해서 한걸음 물러서서 살핀다.(84)

-시에 있어서 완전히 규칙적인 운율이 견딜 수 없이 단조롭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또한 조형예술에 있어서 만물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있던 어떤 기하학적 비례는 규칙적인 척도이며 예술은 그것에서 미묘할 정도로 벗어난 것이다. 그 이탈의 정도는 시인이 리듬에 운율과 변화를 줄 때와 같이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본능이나 감수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현대 디자인/추상이론의 근저에는 개인의 감수성이 미의 보편적 법칙(Gemeingultigkeit)인 일반법칙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깔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H. Read-윤일주 역 <예술이란 무엇인가> 을유문화사 1988 31).(85)

-한 작품에서 사적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기본태도가 아니며 신비평에서 강조하는 "의도의 오류(intentionalfallacyd)"에 빠질 위험성을 다분히 안게 된다. 극단적으로 작품을 쓰고 있을 때 작가의 의도는 작가 자신 조차도 단언하여 말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우리 앞에 가장 확실하게 놓여져 있는 것은 텍스트뿐이며 작품 자체에서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놓여야 한다고 본다.(90)

-우리는 예술사에 있어서 소설의 지위부상이 미학의 특수성 개념의 부상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칸트에 의하면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의 지양이 예술이 되며 그의 미학이론은 비표현예술인 추상미술, 건축, 음악에 잘 적용된다. 예컨대 음악의 기본요소인 리듬은 수학에 기초를 둔 것이며 지적 구상능력의 산물이다. 반면 문학의 질료인 언어는 여타 예술의 질료에 비해 자율성이 결여된 존재이다.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기표(signifie) 속에는 깊은 역사적 전통과 사회적 약속이 잠재해 있다. 언어를 쓰는 그 누구라도 이 역사적, 사회적 규약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언어 자체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게 된다. 특히 이야기를 조상으로 탄생한 소설 장르에서 누가, 어디서(사회적), 무엇을, 어떻게 했다(사회, 역사적)는 줄거리를 사상시키는 행위는 소설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인데 이야기라는 것은 반드시 '특정한 내용'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모방(mimesis)일 수밖에 없다.(100-101)

-문학에서 문학적 해석이 본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있는 경우 그 원관념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해독(decode)작업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누님 얼굴은 보름달"이라는 문장이 있을 경우 원관념인"누님얼굴"과 보조관념인 "보름달"의 의미충돌과 융합이 독서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이상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수학공식이라는 보조관념에서 독자는 어떤 원관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종내 문학가들은 그 수학적 요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저히 구명해내기에 앞서 그것의 문학적 의미를 구명하는데 급급해 사상누각의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게 된 결과를 낳아왔다.
문학 텍스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상상력은 필수적이며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과학의 공식처럼 논리적인 논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해독의 비논리성 강조는 종종 작품해석을 턱없는 비약으로 이끌고 가는 예가 없지 않아 왔다.(102-103)

-본질적으로 담론은 다른 담론들과의 연관성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음소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다른 음소와의 관계하에 놓일 때 가능하듯이 텍스트 구성요소 역시 그들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 구조들은 내적 요소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텍스트와 텍스트 외적 사항과의 관계까지도 고려하여야 비로소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같은 시인의 작품들을 상호 관련시켜 파악하는 일, 대상 텍스트를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의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위에 놓아 보는 일, 그리고 이것을 문학외적 텍스트와 상호관계 위에 놓아 보는 일이 실현될 때 그 텍스트는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133-134)

-'실재 사물'과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은 외양은 같으나 본질은 판이하다. 전자는 실재 존재하는 사물임에 반해 후자는 눈에 비치는 하나의 가상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나' 아닌 다른 물체를 거울에 비출 때 양자의 차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실재 사물이나 반사된 가상이나 둘다 '나'에게는 나의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가상일 뿐 '물자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재 푸름과 돌의 단단함, 눈의 흰색은 우리가 일상적 지적에서 알고 있는 푸른 것, 단단한 것, 또는 흰 것이 아니다. 물 자체의 색과 나의 지각에서 나온 색을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 속에 반사된 영상과 실재 사물의 모습은 어차피 물 자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한 마찬가지의 피상적 내용이 된다. 그러나 거울에 비추인 존재가 '나'일 때 양상은 달라진다.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은 항시 대타적인 타인의 입장이 되지만 나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근원적 물음이 된다. 따라서 실재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결코 비교될 수 있는 동격으로 놓을 수 없다. 인격과 사고를 갖춘 나에게 있어 거울 속의 '나'는 위조의 반사물일 뿐이다.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적어도 '나' 자신에 있어서 거울은 대칭축이 될 수 없다. 이런 균형감각이 깨어짐, 대칭점의 동요에서 나오는 당황감이 이상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 계열의 시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136)

-예술에서 정신이 객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어떤 감성적 질료 속에 구속됨으로써 가능한테 이 질료들은 특정 종류의 형성만을 허용하므로 질료는 예술작품의 소재선택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다. 그 예로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질료를 비교해 보건대 문학의 질료는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른 예술의 질료와는 전혀 다른 성질과 힘을 갖고 있다. 언어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약속이다. 말과 글은 이미객관화된 성격을 가졌고 기호체계와 대응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언어가 조탁되더라도 그 언어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 갖는 객관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비예술적 종류의 객관화, 즉 문학이란 표제하에 포괄될 수 있는 광범한 전신저거 영역에 밀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165)

-작자가 자신의 생활을 그린다는 사소설의 내용은 一元描寫 時點이라는 독특한 문학적 형식을 낳는다. 岩野泡鳴은 일원묘사를 "작자가 먼저 중간의 한 사람의 기분이 된다. 그것을 갑이란 이름의 주인공이라 한다면 작자는 갑의 기분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태도와 심중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의, 아래와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작자

                                      갑

                                 병        을
                                 구체적 인생
(三好行雄. 竹盛天雄 編 <近代文學 10> 有斐閣雙書 1977 50-51)
철저한 작자의 엘리트의식의 소산인 이 시점은 1925년 김동인에 의해 도입되어 한국에 소개된바 있다(김동인 "소설작법" <조선문단> 1925 4-7). 이로 미루어 한국근대소설의 시점은 일본의 사소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소설은 작자 내부의 고백이므로 어느 선상까지는 내성소설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백행위를 곧바로 사회와의 단절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小林秀雄은 이런 맥락에서 '사회화된 사'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부르조아의 난숙기에 발생한 자연주의 문학은 '나'를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 의식이 사회상과 미묘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객관성을 획들했다고 보는 것이 小林의 관점이다(三好行雄. 竹盛天雄 編 <近代文學 10> 有斐閣雙書 124).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소설을 위협하던 마르크스 주의 소설과 신감각파 소설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이 두 문학유파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사소설이 내포한 여러 결함에 반발함으로써 사설에 대해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신감각파 소설이 의도한 것은 소설의 허구성의 회복이며 마르크스주의 소설이 의도한 것은 사회성의 재건이었다.(168-169)

-일본에서 프루스트, 조이스 등의 신심리주의 경향이 처음에는 큰 반향을 부러 일으켰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이유는 일본 특유의 형식인 사소설 때문이라 여겨진다. 사소설이란 초기에는 일인칭소설이란 단순한 뜻이었는데 여기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이나 주정적, 고백적인 작품이 연상되어 그 뜻에 들어가고 허구를 배척하여 진실을 묘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자연주의 문학이념이나 낭만적 이상주의에 기인한 자기중심의 自華派의 문학이념도 여기에 첨가된어(三好行雄 編 <近代文學 4> 193-204) 근대 일본의 가장 본격적 소설형식을 이룬다.(171)

-원래 심리소설은 간접적으로는 프로이드의 의식과 무의식에 직접적으로는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이론에서 연원한 프루스트의 창작방법론이다. 프로이드를 위시한 융, 아들러 등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심리는 의식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 있어 이것을 분석해야만 완전한 인간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무의식은 의식보다 깊은 심리적 영역에 있으며 인간이 갖는 원천적 욕구로 되어 있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이 무의식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정이며 의식적 세계는 이 근원적 욕구를 현실적으로 만족시키는 구실을 한다. 무의식 욕구는 현실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충족되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그것은 억압되고 변장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억압된 욕구를 분석해야 한다(R. Osborn-유성만 역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이삭 1984 37).
 이런 무의식 세계의 추구는 곧장 다다이즘에 영향을 미쳐 1924년 부르통의 '제1 선언'은 프로이드의 꿈이론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J. J. Spector-신문수 역 <프로이드 예술 미학> 풀빛 1981 203). 곧이어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을 계발하게 된다. 이 방법은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에 의하여 말하기, 쓰기, 기타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는 이성에 의한 일체의 테제를 배제한 가운데 일체의 미적. 도덕적 관심을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구술이다.이러한 받아쓰기-글쓰는 사람은 오직 '목소리(la voix)'의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니까-는 순조로운 조건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은 일체의 주위 분위기로부터 독립되어야 하고 가능한 한 외부세계 쪽으로 열린 문들을 꼭 닫고서 꿈꾸는 것과 유사한 상태 속에 잠겨 있도록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나서 생각의 가속적인 흐름을 따라 귀를 기울리며 글을 써야 한다(Tristan Tzara/Andre Breton-송재영 역 <다다/쉬르레알리즘 선언> 문학과 지성사 1987 246-247. Marsel Raymon-김화영 역 <프랑스 현대시사> 문학과 지성사 1986 363)
 그러나 무의식은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언어로 표현된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무의식은 명백히 의식 외에 존재하니까 무의식 그대로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적 표현에 나타난 상징에서 추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열거하면 상기된 꿈, 공상, 빗나간 말, 오필 등에서이다. 즉 무의식은 어떤 대치물(의식 위에 있는 상징)을 통하여 표현된다(Leon Edel-이종호 역 <현대 심리소설연구> 형성출판사 1983 84-85).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자체에 목적을 둔다기보다는 기성의 언어적 결합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비전에서 탈피하는데 의의를 찾아야만 하고 부르통이 후기 쉬르레알리즘 선언에서 그것의  파괴성을 마르크스시즘의 현실변혁과 연결시킨 것도 자동기술법이 갖는 이런 모순 때문이었다. 요컨대 순수한 쉬르레알리즘만으로는 작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극단성은 베르그송의 순수기억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완화되고 있다. 인간이 행위에 밀착해 있는 현재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의 생에서 부주의할수록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의 총량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 즉 현실적 생에 무관심할수록 과거의 모든 기억, 참된 자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직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직접성을추구한 칸트의 비판철학에 부합하면서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감성적으로 주어진 잡다한 것에 오성의 형식을 부여, 오성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학적 사변에 있어 직접성(immediat)과 매개(mediation)의 대립은 고대 희랍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것인데 후자는 헤겔에 의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순수존재'의 관념은 '순수무'와 같은 것이다. 실재는 사고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하고 의미가 부여된다. 이 과정 속에 나타나는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에 대해 결코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직접성이 관념자체가 이미 매개의 관념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가 있으며 모든 것은 의식의 반성작용 속에서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반면 전자는 테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 함으로써 확보되었다. 이 사상은 위에서 논한 것처럼 칸트에 의해서 합리적, 직접성으로 나타나며 베르그송에 의해서 직관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한 사물을 아는 것은 그것을 합리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사물의 설명의 원리와 그 근거는 사물 자체 안에 내재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불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육안을 가지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을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지성적 사고를 폐기하고 무관심(desinteressement)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성적 사고는 공간적 사고를 의미한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추상화하며 법칙을 세운다. 이런 공간표상의 사고방식에서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뿐 그것의 본질을 캐낼 수 없다. 오직 과거가 현재 속에 끊임없이 새로운 단위를 구현하는 지속의 심리상태에서만 사물의 본질이 파악된다는 것이다.(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772-79)
 여기서 우리는 심리소설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즉 작가가 소설에서 작중인물의 심리상태를 끊임없이 캐어 들어가며 세계의 사물들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얽혀 있는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인물의 의식구조에서 묘사하는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자는 순수지속의 상태에 떠오르는 갖가지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그 사물의 참된 의미를 표출해 내는 것이다. 이는 매개를 전제로 해서만 사물의 의미가 표출되며 매개의 묘사가 예술의 창작 방법론이라는 리얼리즘과는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며, 개인의 의식의 직접적 인식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이론에 속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견해는 이성 즉 공간표상으로는 궁극적인 사물파악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닌 직관을 믿는다는 점에서 칸트의 구상능력과는 구별되고 있다.(172-175)

-...사소설은 작자가 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일원묘사라는 점에서 심리소설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형식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을 지닌 형식적 장치일 뿐이지 인간의 순수의식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케 한다는 확고한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사소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호함을 갖고 있다.(175)

-...모더니즘 소설은,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소재의 측면이 내면세계의 흐름을 파악하는 형식의 측면과 대응되어 있어야 한다...(178)

-...바보는 바로로, 영리한 사람은 영리한 사람으로, 신념이 있는 사람은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각자 이데올로기를 갖고 만들어지는 장소, 그것이야말로 사회이며 역사이다(小林秀雄 앞의 책 172-173)(179).

-초기 일본문학이 유럽의 자연주의 문학을 수입했을 때 이 문학의 배경인 실증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일본의 근대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일본은 자신의 독특한 문학전통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 있었다.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없는 상황 속에서 문학의 상과를 기법의 편에 해소하는 일보다 즐겁고 자연스러운 일은 없었다.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들은 이 즐겁고 자연스런 일을 가장 안전하게 수행하려는 입장에 처해 있었으니 그 기형적 결과가 사소설이라고 본다(앞의 책 115-116). 이에 따라 작가들은 문학의 밖으로부터 생겨나는 사회화되고 조적화된 사상의 칼을 고려하지 않고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의 배치, 성격의 뉘앙스만을 받아들인 결과 작가들이 무엇을 묘사할 것인가를 고르지 않고 묘사할 방법을 표현할 대상으로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즉 묘사할 방법을 재료로 해서 작품을 창조하는 순서, 현실보다도 현실을 보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마지막에 제재를 공급하는 것이다.(179-180)

-환경이 인간과 직접 교섭하여 그의 일상생활을 통해 흡수되어진 개인의 숙명적 진실은 '교양'이란 의미로도 해석되는데 한 개인의 이 교양은 그의 본질이므로 그가 인생을 살아나가는 변함없는 방법이 되어 인생을 결정짓는 숙명이 된다...(180)

-1930년대 전향의 개념은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해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들의 근대화 수행의 최대 난제였던 사상범들을 억압하기 위해 自力과 更生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법체계의 전통을 근간으로 전향 제도를 만들어 낸다. 이 사상개조는 '외부로부터의 협박과 개인의 자발성'의 양 측면을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전향문제를 다룬 소설 또는 전향문제를 주요 제작 동기로 한 소설을 전향소설이라고 하는데...(김동환 <1930년대 한국전향소설연구> 서울대대학원 1987 2-3)(187)

-흔히 운동는 공간의 이동이라고 하나 이는 이미 제논 등에 의해 그 문제성이 지적되었으며 운동은 주체의 의식이 과거와 현재를 보존, 연결하기 때문에 감지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이 과거의 어느 한 위치와 현재의 위치를 기억 속에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에 있어서 공간의 한 위치와 물체가 그 위치에 존재했던 시간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그 위치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의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운동을 지각하는 와중에 현재의 위치와 우리의 기억이 과거의 위치라고 부르는 것과의 사이에서 우리의 의식은 종합을 형성하고 여러 이미지들이 상호침투하고 서로 보완하여 연속되도록 만든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달리기를 하거나 말을 몰 때는 달리는 것 자체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에 중요한 '방심상태'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교통기관이 발달하면서 승객은 지극히 수동적인 상태에서 급격한 공간이동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행위에의 무관심'은 순수기억(memoire ou pure)을 유발시키는 조건이 된다는 것은 전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제 승객은 이미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차 안에서 그 목적지 도달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해방되었다. 승객은 주어진 순간에서 절박한 행위-어떤 목적을 위해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끝없는 방심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주체의 자아는 정신의 팽창에 의해 분산되고 이 분산은 과거 일회적인 뉘앙스와 질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기억들의 총량에 의식을 접하게 된다. 이 의식은 과거와 현재가 논리적인 계기에 의해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공간과 현재의 공간들이 상호 교호하면서 나타나는 뒤엉킴이다. 그리고 이 뒤엉킴은 급격한 공간이동 속에서 조금전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을 연결시킴으로써 성립되는 자아의 운동감각과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풍경을 바라볼 때 인간의 회상체계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즉 운동을 느끼는 감각과 회상체계는 구조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190-191)

-한성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독립국 소도로서의 통치기능(대외연결, 변경 통제의 기능 등)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일부 지역의 관리를 맡은 지방적 수도(subnational capital)로 격하됨과 동시에 그 규모도 축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와서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었고 그 역할은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직전에 가장 활발히 수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기능 및 식민지 수도 경성의 통치와 행정기능도 늘어나는 등 점차 발전되는 경성부의 현상을 소규모의 도시계획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이 마련되었다. 이 영에 의거 조선총독이 조선의 시가지 구역내에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의 풍치지구, 미관지구, 방화지구, 풍기지구를 지정할 수 있게 되어 서울 시내 기간도로들을 따라 공간 재조직이 한국인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속속 진행되었다. 특히 일본인 주거지역으로서 용산이, 일본인을 위한 편의시설, 관공서, 생필품 판매의 상가로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 장곡천정(소공동), 본정(충무로)이 구획정리되어 경성은 외관상으로도 근대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京城出版社 1930)(199)

-도시 산책은 인간의 순수 기억 재생의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과 감각은 첫째 명료하고 정확하나 비인칭적인 것, 둘째 막연하고 무한히 동적이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의 두 양상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는 대상을 명확히 지칭하는 언어들로 외면적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 싶으나 실제로는 대상의 본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각의 방법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감각의 불변성을 기초로 고착되는데 실제로 동일한 감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시각각으로 개인에게 다르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같은 곳에 산책한다 하여도 오늘 그 대상을 느끼는 감각과 과거에 느끼는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대상을 느끼는 주체로서 내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섬세한 인상들 속에 공통적이고 안정된, 따라서 개성이 없는 부분만을 택하여 고착화된다. 따라서 개인의 섬세함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보다 그 언어를 매개로 의식에 투영되는 회상들을 언어화함으로써 고착화된 언어사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상은 단순한 습관 기억이 아니라 순수기억(memoire-pure)이어야 한다. 순수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검열관 역할을 하는 습관기억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 제거 방법이 현실의 생에 대한 무관심(desinteressement)이다(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597-98). 절박한 행위는 기억의 모든 활동을 한 점에 집중시키므로 당연히 습관 기억에 치중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생활과 직접 관련된 모든 상황을 벗어나 방심상태가 되어야 순수기억을 떨올릴 수 있다. 이 방심상태의 전형적인 예로 꿈을 통하여 주체는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전체성을 지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책도 행위의 세계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주체로 하여금 생활에서의 직접적 반응을 차단시켜 방심, 몽상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산책'과 마찬각지로 '카페' 혹은 다방체험도 '행위에의 무관심'을 조장하는 환경조건이 된다. 잠자리에 들어있는 시간, 식사시간, 또는 산책을 할 때 우리는 해야 할 어떤 절박한 행동에 구애받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산책 때와 마찬가지로 이웃사람에 대해 간섭을 받을 필요도, 간섭할 필요도 없으므로 관찰자는 어떤 목적 중심의 행동도 불필요하다. 즉 실리적인 지성의 활동이 둔화되어 자아의 내면과 참된 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카페에 앉아서 음주, 식사, 담소, 음악감상을 하거나 대상자가 없을 경우 혼자서 관찰과 명상에 잠기는 행동은 행위에의 무관심의 요건을 종합적으로 갖춘 방심상태가 되는 것이다. (202-203)

-사소설은 작자가 한 인물을 설정하여 그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야 한다는 엄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작자 자신인 '나'일 경우 자연히 체험이 한정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고백을 듣거나 아니면 그의 편지나 일기를 공개하는 독특한 형식이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내면구조를 단순히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사적인 언술구조인 일기와 편지, 고해성사적인 고백이야말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효과적 장치인 것이다.(205)

-사소설의 소재는 병, 가족간의 애정, 돈문제 등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일상적 문제가 인생 전체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성패는 오직 작가 자신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하겠다. 실제로 사소설만큼 문사의 엘리트의식에 의지하고 있는 소설장르는 없을 것이다. 보편적인 일의 극한을 넘어서 혐오감까지 드는 비상식적인 일일지라도 그것이 문사의 생의 위기의식의 체현이므로 독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ㅣ. 다시 말해서 비록 상식적으로는 패륜이요 신경쇠약적인 고민일지라도 문사가 그 사건에 철저히 고뇌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성실성을 보게 되므로 그 소설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207)

-일제 강점기의 철도는 근대화와 식민통치화의 양면적 요소인바, 이곳은 물자와 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이자 몰락한 농민과 도시 실업잗르의 집합소라는 명암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213)

-대도시에서 기술. 상업적 발전이 가져다 준 제도의 운용을 배움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누리게 된 대중인들은 이 편리성 속에 빠져 제도설립의 도덕적 지적 노력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지적. 패쇄적 메카니즘에 빠져버림으로써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하는 묵계 등에 안주하게 된다.(213)

-구보는 이들의 무관심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군중의 전형적 속성인 '익명성'에 파묻혀 자기 인식의 경지에 몰입한다. 구보에게 있어서 군중이란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존재이나 동시에 그로 하여금 행위의 절박함, 필연성에서(예컨대 누구와 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든가 하는 행위) 벗어나게 하여 '생에 대한 또다른 몰두'를 하게 되는 효과적인 장치일 것이다.(213-214)

-우리의 의식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혼합되어 불가분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기억의 과정에는 일정한 시각과 장소는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이 파악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장소는 동시에 우리의 삶 속의 한 순간을 의미하며 또 그 장소는 그것이 어떤 시간적인 계수와 무관하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현실성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어떤 시기에 대한 기억은 특정한 장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운동에서 잘 나타난다.(219)

-의식의 흐름이 시간과 공간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처럼 명백히 지적해 주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영화의 이중 노출(over lap)...
...즉 현재의 공간과 과거의 공간이 차례차례 병치되며 앞 장면 위에 뒷 장면이 겹쳐지면서 서서히 앞 장면이 사라져 갈 것이다. 영화는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다. 과거의 시간은 과거의 공간에 의해 표현되며 또 관객은 그 공간에 소속되어 있는 과거의 시간, 현재의 시간을 본다.(219-220)

-서로 다른 공간을 잡은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하며 영화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듯이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영화는 미래이든 과거든 마음대로 갈 수 있으며 분리된 사건을 함께 볼 수 있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분리해서 볼 수도 있다(R. Stephenson-송도익 역 <예술로서의 영화> 열화당 1989 146-148). 이에 따라 영화 속에서 시간은 계속성을 잃게 되며 일상생활 속에서 뒤바꿀 수 없다는 지향성을 잃게 된다.(220)

-그런데 개인을 일상생활의 문제에서 탈피시키는 데 가장 유용하고도 손쉬운 방법인 산책과 카페체험은 도시와 군중의 발달이란 근대의 물적 토대와 맞물려 있다. 19세기에 발달된 자유 민주주의와 기술에 의해 역사의 표면에 부상한 대중은 지금까지 장원제도, 농경사회의 분산된 소집단의 모습에서 거대한 집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는 카페이건 호텔이건 극장이건 기차의 좌석이건 산책로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설이 군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 군중 속에서 주체는 고독을 느끼는 동시에 군중이 주는 익명성(anonymic)을 즐기게 된다. 결국 도시 공간은 개인이 자신의 생활을 매개로 하지 않고 풍경의 관조자가 될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소인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도시공간에서 산책자(flaneur)의 의식구조는 농촌공간에서의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비교, 대조할 때 그 비생활성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감에 뚜렷한 경험과 이해를 갖고 있었으나 대도시에서는 그 이해와 경험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물화로 변해버린다. 대인관계는 개인적인 사생활 원칙에 입각해서 소수의 친구들 사이로 국한되고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 �문에 유지하기조차 힘들어진다. 대도시 군중들의 관계는 역할 수행자와 소비자의 추상적 존재일 뿐이지 전인적 관계는 아닌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존재들이 아니라 역할 분담에 의한 형식적 추상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반면 농촌에서는 도시와 같은 추상성은 있을 수 없다. 농촌에 살고 있는 자연적 개인(naturliche lndividiuem)은 도시처럼 풍경의 관조자 내지 방관자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대지는 풍경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모든 생활 수단, 생활 자료 나아가서는 노동주체인 인간조차도 그 가운데 포함되는 <寶庫> 역할을 한다. 노동을 매개로 자연과 인접해 있는 농민들에 반해 도시인들은 자연에 근접할 매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도시 속에 사록 있지 않고 불가해한 풍경에 직접 마주대하고 있는데 익숙해져 있다.(222-223)

-인간의 사물을 알게 되는 것 즉 인식의 본질에 대한 태도는 사물이 의식에 직접 소여됨으로써 인식된다는 견해와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견해가 있는데 전자를 바탕으로 한 미학이 모더니즘이며 후자의 미학이 리얼리즘이다.(233)

-본고에서는 리얼리즘의 미학적 범주에서 문제적 개인의 유형이 나타나듯이 모더니즘의 주관적 보편성의 미학에서 대칭, 산책, 승차의 테마가 나타남을 주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직접성 추구의 노력은 둘로 나뉘어 지는데, 첫째 이성의 합리적 구성을 중요시하는 태도에서 대칭의 테마가 나타나고, 둘째 사물의 인식은 이성이 아닌 직관으로 사물을 직접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견해에서 산책과 승차의 테마가 나타난다.
 첫째의 견해는 그 속성상 형식에 대한 친근감을 포함하고 있어 형식 자체의 순수 유희를 추구하는 순수음악, 건축, 추상미술에 많이 등장한다. ...
 둘째, 직관에 의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견해는 문학에서 심리소설로 나타나는데 직관의 심리상태 추구는 산책과 카페체험, 승차의 테마로 드러난다. 본격적인 심리소설은 사소설과 구분되어야 하는데 사소설은 주로 작가가 한 인물의 눈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일원묘사로 되어 있으므로 한 개인의 심리를 그리는 심리소설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형식적 장치를 갖고 있으나 이 형식은 인간의 순수의식이 사물의 본을 파악한다는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233-234)

-보편성이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된 특수성을 통해야 하는 리얼리즘 소설에서 시간은 자연히 역사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어야 하므로 주체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시간이 나타난다. 반면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주체의 의식이 현실의 특수성에 의해 매개됨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므로 시간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 현재'로 작용한다.(235)

-특히 현대에는 일상성의 의미가 제도적이며 구조적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있다. 농경 사회의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반본 속에서 어떤 종류의 일상성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 반복성은 자연과 합일체가 되는 안정감 때문에 권태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반면 공업화와 대량생산과 대중사회로의 진입은 인간에게 조직화된 일상성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의 잘 짜여진 조직과 제도 속에서,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인적 윤리와 창조적 능력을 존중하는 노동윤리는 점차 사라졌다. 이제 안정 내지 일상성은 제도적으로 되었다. 자연은 멀어졌고 생산적인 노동을 할 때조차도 분업, 연속동작 때문에 생산물과 접촉이 사라져버렸다. 그대신 사회 전체에 대한 고도의 조직화가 생산뿐 아니라 소비에까지 미치게 되어 소비를 통해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구조화함으로써 현대인은 여기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종래 자연과 일치함으로써 느꼈던 일상성을 제도로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은 종래보다 더 완강한 것이었다(Nenri refebere-박정자 역 <현대세계의 일상성> 세계일보사 1990 85).
 이미 현대인은 대량생산과 대중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제도 속에서 적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상을 지겨워하면서도 그것에 일탈할 때,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이미 일상성은 현대사회의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단지 그것을 폄하하거나 무시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240)

-근대에 이르러 역사주의자들은 대개 역사법칙의 한 구성요소로서 어떤 진보개념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 역사 현상의 무한한 혼동과 연속 가운데 하나의 일관된 구조가 있고 합리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서으이 진보라는 주장이 있다. 진보는 인간이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시간이 가장 유용한 도구라는 심념을 나타낸다. 여기서 어떤 '가치'는 시간의 경과나 시간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Hans Meyerhoff-김준오 역 <문학과 시간현상학> 삼영사 1987).
 그런데 이얼리즘 소설은 보편성은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화인 특수성을 통해서 재현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히 역사, 사회의 총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근대 역사의 시간개념에 맞닿아 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런 근대 소설의 시간체험의 역할을 루카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에 이르러 선험적 고향(원리)이 사라진 훼손된 세계에서 소설은 본질을 찾아야 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재로 삼게 됨으로써 시간은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시간은 현대적 의미에 반기를 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저항이 된다. 소설에서 의미와 삶은 서로 분리되어 본질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으로 분리됨으로써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G. Lukacs-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263)

-모더니즘 소설은 주체 내부에 주관적인 상대성을 갖는 경험적 시간을 중시한다. 이 소설에서 주로 사용되는 의식의 흐름은 시간에 있어서 지속적 자아의 양상을 밝히는 데 유용한 기교이다. 이 기교는 개인의 백일몽과 환상 속에 부유하는 무질서한 파편들을 결합하여 어떤 종류의 통일체로 만듬으로써 시간과 자아의 내부에 있는 사호침투라는 동일성을 표현한다. 자아 속에 나타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선조적이며 인과율적인 시간으로 분열되지 않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 현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회상은 항상 현재 의식의 심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회상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의식 속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회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시간적 차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어난 날짜와 관계가 없는 '영원한 정수'의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회상의 의식의 흐름을 주요 방법론으로 하는 심리소설에서 표면적 시간이 원점회귀의 순환구조에 기대고 있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탄생, 성장, 노쇠, 죽음의 순환이나 사계절, 하루의 순환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역사나 이성, 논리 밖에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무시간적이며 초시간적이다. 조이스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표면적 시간을 하루로 잡은 것은 심리소설의 의식의 흐름이 갖는 초시간적 속성 때문이다.(264-265)

-'일상성(Alltaglichkeit)'이란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을 매일매일의 테두리 속에서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Karel Kosik-박정호 역 <구체성의 변증법> 거름 1985 66). 그들의 삶의 기능의 반복 가능성이 매일매일의 반복 가능성, 매일매일의 시간배분 속에서 고정되는 것이다. 물론 일상성은 공적인 삶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도, 고상한 삶에 대비되는 저속한 생활도 아니다. 일상성 속에서 활동과 생활양식은 본능적이고 잠재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생활의 메카니즘으로 전화된다. 사물들, 사람들, 운동, 일, 환경은 이미 알려진 세계의 구성물로서 모든 것이 손쉬운 것이며 개인들은 이 손쉬움 속에서 그 자신의 경험, 그 자신의 가능성, 그 자신의 활동을 기반으로 한 관계들을 발전시켜나간다.
 일상성은 한 마디로 '생활의 리듬'으로 단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장 예외적며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환경 속에도 생활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집단 수용소에도 나름의 일상성이 있을 수 있다. 매일매일 일상적인 모든 나날들은 다른 대응하는 날로 대치될 수 있으며 이번주 목요일은 지난주 목요일 또는 작년 목요일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목요일은 다른 목요일과 섞여버리게 되며 단지 그 목요일에 특별하고 예외적인 어떤 것이 있을 때만 별달리 남게 되어 기억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266-267)

-...주어진 일상성에는 어떠한 주체도 다른 주체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상성의 주체들은 상호교환적인 존재들이다....일상성은, 그 안에서 인간의 기계론적 본능에 따라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규칙적 리듬의 세계이다.(267)

-그런데 현실의 개별성 속에서 특수한 것, 영혼의 본질변화를 위한 특수한 체험을 도출해내야 하는 그런 시간성을 가진 소설에서는 이런 반복되는 리듬이 비본질적 존재로 간주되기 쉽고 실재로 이런 소설 분석의 관점에서 일상의 평범함을 그린 소설들이 통속소설로 폄하된 것도 사실이다. 소설가들은 설사 일상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인간생활에 주는 권태와 모순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소설을 진해시켜 왔다(G. Lukacs-木幡順三 譯 <美學> 頸草書房 1968 34).
 이런 사고에 의하면 일상적 사고는 현실의 객관적 반영이 될 수 없다. 현실은 일상성 속에서 직접적,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개적 국면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성에 대한 분석은 현실을 파악하고 기술하는 데 어느 특정한 정도까지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일상성은 역사의 받침이며 원료이다. 일상성은 역사를 지탱해주고 그것에 자양분을 주지만 그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다. 반면 잡다한 일상생활의 객관화 활동이 과학과 예술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현실의 과학적 반영 및 미적 반영은 역사적 발전의 도상에서 형성되어 점점 서분화되어온 반영이다. 이런 반영은 물론 그 기초와 궁극적 실현도 생활의 실현 중에서 보여진다. 이 반영은 일상생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립되었는데 그 결과 일상생활의 표현형식과 혼합됨으로써 일상생활을 한층 높여준다. 일상생활과 예술의 관계를 파악해볼 때 양자는 끊임없는 동요가 있는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다. 예술 속에 인생의 여러 문제가 특히 미적인 형식으로 개조되어 예술적으로 해결되며 현실의 미적 극복의 성과가 일상생활 속에 유입되어 객관, 주관적으로 그것을 풍부하게 한다. 예술과 일상생활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희곡과 소설은 특정의 개별적 사례의 형성 중에서 거기에 포함된 성격과 상황과 전형을 예술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앞의 책 209-210). 요약하면 예술은 일상생활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양자는 상호작용을 하나 그럼에도 일상성은 그 무매개성과 우연성 때문에 객관적 반영이 될 수 없고 미적 반영의 자양분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267-268)

-그렇다면 일상성에서 도출되는 '생활의 리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리듬감각을 루카치는 '현실의 미적 반영의 추상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추상은 탈의인화된 즉자개념인데 예술은 구체적 대상에서 발견한 것, 대자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전화됨과 동시에 형식이 내용으로 전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외적인 자연의 리듬의 체험은 규칙있는 움직임에 대해 일종의 안정성(Sekuritat)의 감정을 느끼게 하며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 페르세포네와 데미테르의 신화도 이 감정에서 기원을 갖는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성에서 차단되어 리듬 그 자체만을 즉자적으로 존재시키는 방식은 근대 부르조아 미학의 추상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루카치는 있어야 할 현실에 대한 미적 반영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잡다한 일상성의 반복에 대한 반영은 지극히 탈의인화적이고 추상적인 반영이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루카치는 현대 산업사회의 속성이 되어버린 조직화된 일상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제 일상성은 단수히 극복되어야 할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 자체의 특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일상성은 제도로 정착되었으며 이것이 부인되기에는 너무나 견고한 토대를 지니게 되었다. 도시인은 이미 의무의 시간(직업적인 일을 하는 시간), 자유시간(여가의 시간), 강제된 시간(일 이외에 잡다하게 필요한 시간: 교통, 수송 등)의 짜임 속에서 적절히 적응하게 되었다. 이 반복은 물론 농촌의 반복과도 다르다. 자연의 흐름과 합일되어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반복에서 인간은 생리적인 안정감을 느끼나 도시의 제도가 부여하는 반복은 인간에게 더 광범한 반복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일상생활은 지루한 임무, 노동계급의 삶, 짓눌려 사느 삶의 반복이란 비참함과 동시에 땅 위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될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양상이 되었다.(268-269)

-...일상성의 이 양면성, 즉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삶의 반복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엄연히 현대 세계에 지속될 가장 확실한 일들이라는 지속성의 양면...(269)

-일상성이란 생활의 리듬을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개별적 삶들의 반복가능성이 반복의 시간 배분 속에서 고정되는 것을 말한다.(273)

-영화에서서 시간은 연속성과 일방통행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클로즈 업(close up)으로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면 플래시 백(flash-back)으로 거꾸로 돌릴 수 있다. 회상하는 장면에서 반복도 된다. 또는 미래의 전망을 통해 앞으로 껑충 뛰어나갈 수도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전후해서 보여 줄 수 있는가 하면 시간적 간격을 가진 사건들이 이중 노출이나 교대적 몽타쥬를 동시에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시공성은 흔히 프루스트, 조이스, 도스, 파소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서 플롯과 장면 전개의 불연속성, 사상과 감정의 직접성, 시간 척도의 상대성과 모순성 등은 영화의 커팅과 溶明(fade-in), 화면 삽입 등과 동일한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
 경험이나 사건을 연대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이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더욱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사람 특유의 전형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성인이 되더라도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을 겪고 견뎌낸 여러해 후에야 비로소 머리에 떠오른다. 따라서 지나간 세월의 침전물을 현재 시간의 경험과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프루스트가 질서정연하고 일정한 순서를 가진 시간을 해체하여 자기 마음대로 뜯어 맞추는 것은 인간의 내면성과 경험의 직접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의 직접성을 얻기 위한 형식으로 소설에 나타나는 심적 상태의 동시성은 영화의 시공성과 일치하고 있는데 <천변풍경>에 나타나는 영화기법은 이 상관성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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